Tous les chapitres de : Chapitre 11 - Chapitre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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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화. 저자

왕비의 첫 나들이는 물목 때문이라는 명분을 달고 나섰다.겨울 채비에 쓸 비단과 약재를 왕부 사람 손에만 맡길 수 없다 하니, 상엄도 말리지 못했다. 법도를 아는 왕비가 살림을 챙기겠다는데 말릴 법도가 없었던 것이다. 가마가 문루를 나설 때 담장 안쪽에서 하인들이 목을 뺐다. 왕비의 첫 나들이가 어찌 되는지, 왕부의 눈들이 죄 등 뒤에 얹혀 있었다.가마 곁에는 시종 둘이 붙었다. 경성에서부터 따라온 그녀의 사람들이었다. 하나는 입이 쉴 새 없는 앵무 같은 계집으로, 저자 어귀에 들어서기도 전에 벌써 소문을 세 자루쯤 주워 담고 있었다. 다른 하나는 종일 말이 없는 키 큰 계집으로, 눈만은 지나는 사람들의 손과 허리춤을 훑고 있었다. 떠드는 입과 지키는 눈. 온보요가 남쪽에서 데려온 것은 손발이 아니라 귀와 칼이었다.저자는 가마를 알아보고 술렁였다. 길을 비키는 등들 사이로 수군거림이 낮게 흘렀다. 세작이라더라, 경성의 눈이라더라 하는 소리는 없었다. 고우시더라, 젊으시더라, 왕야께서 푹 빠지셨다더라. 소문은 이미 저자에 먼저 와 있었다. 서신보다 빠른 것이 소문이었다."마마, 저기예요. 새로 연 남쪽 전이래요."앵무가 재잘거리며 가리킨 곳에, 아직 현판의 옻칠도 마르지 않은 전포 하나가 있었다."소인이 오다 들었는데요, 동문 우물가에서는 왕야께서 상사병이 나셨다 하고요, 서문 방앗간에서는 마마께서 선녀시라던데요. 소인이 보기엔 둘 다 참말······."키 큰 시종이 앵무의 옆구리를 슬쩍 찔렀다. 앵무는 입을 다물었다가, 세 걸음 만에 도로 열었다.전 안은 남쪽 냄새가 났다. 말린 귤피와 차, 물들인 비단, 소금기 밴 새끼줄 냄새. 남쪽을 통째로 말려 실어 온 것 같은 냄새였다. 온보요는 잠깐, 사는 일처럼 그 냄새를 맡았다. 늙은 행수가 허리를 깊이 굽혔다. 처음 보는 낯이었다. 처음 보는 낯이어야 했다."왕비마마께서 몸소 걸음하시니 소인, 몸 둘 바를······.""남쪽 차가 있다 들었네.""예, 예. 마침 올해 첫물이 닿았습니다."행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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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화. 서재

부름은 해가 진 뒤에 왔다."서, 서재로 드시랍니다."말을 전하러 온 어린 하인의 낯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왕부에서 나고 자란 아이가 아는 한, 그 방에 든 사람은 왕야뿐이었다. 청소하는 노비도 문밖까지만 들었다. 복도를 지나는 동안 마주친 하인들이 하나같이 걸음을 멈추고 그녀를 보았다. 초상 행렬을 보는 눈 반, 구경거리를 보는 눈 반이었다.문은 열려 있었다.문턱을 넘는 데는 한 걸음이면 족했다. 한데 그 한 걸음을 왕부의 누구도 이십 년간 딛지 못했다. 그녀는 치맛자락을 여미고, 그 한 걸음을 조용히 디뎠다.서재는 소문보다 검소했다. 서가 가득 병서와 장계 뭉치, 벽에 걸린 북강 지도, 그리고 등불 둘. 꾸민 것이라곤 없는 방에서 단 하나, 문 맞은편 벽의 검이 눈에 들어왔다. 오래된 검이었다. 칼집의 옻이 손 닿는 자리만 닳아 있었고, 검수(劍穗)의 술이 색이 바래 있었다. 지금 왕야의 것이라기엔 낡았고, 버려두었다기엔 닦여 있었다. 누구의 것이냐 묻는 것은 예가 아니었다. 그녀는 눈길을 반 박자 만에 거뒀다. 거둔 눈길의 끝에서, 사내가 그 반 박자를 보고 있었다."이리로."낮게 구르는, 서두르는 데가 없는 목소리였다. 진묵은 서안 뒤에 앉아 장계를 읽고 있었다. 그녀는 물음을 접고 서안 앞에 앉았다. 사내가 장계 한 축을 서안 너머로 밀었다. 말은 그것으로 끝이었다.조운 장계였다. 수도에서 북강으로 오르는 겨울 군량의 물목과 뱃길, 갈아타는 나루와 날짜가 줄줄이 적혀 있었다. 온보요는 천천히 읽었다. 천천히 읽는 것이 벌써 수였다. 규방의 여인이라면 이런 문서는 두 번은 읽어야 했다.한데 두 줄을 채 내려가기 전에, 서안 너머의 사내가 곁으로 자리를 옮겨 왔다. 그리고 손부터 놀기 시작했다. 장계를 쥔 그녀의 손끝을 제 손가락으로 툭 건드리고, 흘러내린 귀밑머리를 귀 뒤로 넘겨 주고, 소맷단을 괜히 바로잡았다. 읽으라고 준 자가, 읽는 것을 가장 방해하고 있었다."왕야. 읽으라 하지 않으셨사옵니까.""읽어라. 누가 말리나."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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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화. 반쪽

누가 훔치고 있느냐.물음은 서안 위에 놓인 채 식지 않았다. 온보요는 등불의 심지가 타는 소리를 들으며, 답의 크기를 쟀다. 전부를 말하면 규방이 무너지고, 아무것도 말하지 않으면 쓸모가 무너진다. 답은 언제나 반쪽이어야 했다.등불 그림자가 서안 위에서 흔들렸다. 사내는 재촉하지 않았다. 재촉하지 않는 것이 더 나빴다. 기다릴 줄 아는 자 앞에서는 시간을 벌 수 없다."신첩이 어찌 알겠사옵니까." 그녀는 먼저 물러섰다. "다만.""다만.""젖은 쌀을 받고도 조용한 나루가 셋이옵니다. 셋 다 같은 물목을 오래 맡았고, 셋 다 문책이 없었사옵니다. 도둑이 누구인지는 몰라도, 도둑이 지나가는 길목은 그 셋 중에 있을 것이옵니다."길목까지만. 길목 너머의 이름은 삼켰다. 나루 셋의 물목 도장을 잇대어 보면 한 가문의 상호가 나온다는 것도, 그 가문의 배가 지금 북쪽 물길을 오르고 있다는 것도, 오늘 밤 말할 것은 아니었다.말을 아끼는 것은 숨기는 것과 다르다. 숨긴 것은 들키면 끝이지만, 아낀 것은 들켜도 아꼈다 하면 그만이다. 규방의 여인은 아는 것이 적어야 하고, 왕부의 안주인은 아주 모르면 못쓴다. 그 사이의 좁은 길로만 그녀는 걸었다.진묵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길목이라."사내가 낮게 그 말을 굴렸다. 이름을 아는 자의 굴림이었다. 그도 반쪽을 쥐고 있었고, 저도 반쪽을 쥐고 있었다. 서안 하나를 사이에 두고 두 반쪽이 마주 놓인 채, 어느 쪽도 제 것을 먼저 뒤집지 않았다."늦었다."진묵이 붓을 놓고 일어섰다. 그리고 서안을 돌아 나오더니, 하품을 삼키던 그녀를 그대로 안아 들었다."왕, 왕야.""걸으면 늦다."늦은 것은 이미 늦은 것이 아닌가. 항변은 사내의 가슴팍에 눌려 나오지 못했다. 겨울 복도의 바람이 지나갔지만 춥지 않았다. 사내의 몸은 화로 같아서, 안긴 자리부터 데워졌다. 번을 서던 하인 둘이 기둥 뒤에서 굳는 것이 보였다. 한 놈은 든 등롱을 떨어뜨릴 뻔했고, 한 놈은 벽에 붙어 숨을 참았다. 사내는 둘 다 없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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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화. 통변

부관 노강의 하루는 통변으로 시작해서 통변으로 끝났다.새벽 조련장에서 왕야가 "굼뜨다"라고 하면, 노강은 군관들에게 "전하께서 정진을 당부하셨다"라고 옮겼다. 아침 조회에서 "시끄럽다"라고 하면 "오늘 논의는 여기까지 하자 하신다"라고 옮겼다. 이십 년을 하다 보니 이제는 왕야의 숨소리만 듣고도 초벌 통변이 되었다. 군중에서는 편했다. 전장의 말은 짧을수록 좋고, 왕야의 말은 늘 짧았으니까. 험한 것은 조정과 왕부였다. 격식의 말은 길수록 안전하고, 왕야는 긴 말을 병기(兵器)보다 싫어하셨다.한데 요즘, 통변이 어려워졌다."왕비는."이 두 마디가 문제였다. 아침에 한 번, 낮에 한 번, 많으면 세 번. 처소에 계시다 하면 "그래"로 끝나고, 서고 물목을 보신다 하면 "그래"로 끝나는데, 그 "그래"의 결이 매번 달랐다. 어제의 그래는 짧았고, 오늘의 그래는 꼬리가 길었다. 이것을 뭐라 옮겨야 하는가. 이십 년 통변이 처음으로 옮길 수 없는 말을 만났다. 노강은 고민 끝에 초벌만 적어 두었다. 그래(짧음): 무탈하시다는 뜻. 그래(꼬리 김): 이따 직접 보러 가시겠다는 뜻. 사흘을 겪어 보니 초벌이 대개 맞았다."부관님, 그거 들으셨어요?" 문서고 앞에서 어린 서리가 소매를 붙들었다. "그저께 밤에 왕야께서 마마를 안고 복도를 걸으셨다는…….""장계나 나르거라.""동문 저자에서는 벌써 왕야께서 상사병이 나셨다고…….""장계."소문은 이제 노강의 손을 떠나 있었다. 담을 넘은 소문은 저자에서 살이 붙고, 살이 붙은 소문은 도로 담을 넘어 들어왔다. 누가 지어낸 것도 아닌데 왕부의 겨울이 저 혼자 훈훈해지고 있었다. 노강은 그것이 싫지 않았다. 이십 년 만에 처음으로, 통변할 것이 험한 말이 아니었다.그러고 보면 혼례 전, 왕야는 마마의 처소를 안채에서 가장 먼 별당에 잡으라 하셨다. 별당은 정성껏 꾸며진 채로 겨우내 비어 있었다. 첫날밤부터 단 하루도 쓰이지 않은 그 방의 일을 입에 올리는 자는 왕부에 없었다. 다들 목이 하나뿐인 까닭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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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화. 발자국

겨울 산은 눈이 무릎까지 왔다.온보요는 순한 잿빛 암말 위에서, 배운 지 사흘 된 사람처럼 고삐를 쥐고 있었다. 실은 열두 살에 무림의 험로를 말로 넘었다. 허나 왕비의 승마는 왕비답게 서툴러야 했으므로, 그녀는 반 시진째 안장 위에서 정성껏 흔들리는 중이었다. 몰이꾼과 군관들이 힐끔거렸다. 경성의 왕비가 겨울사냥에 따라나선 것부터가 왕부 개벽 이래 처음이라, 힐끔거림에는 악의보다 구경이 많았다."떨어지겠다."곁으로 붙은 흑마 위에서 진묵이 말했다. 그러고는 처분도 묻지 않고 그녀의 허리를 걷어, 제 앞에 앉혔다. 잿빛 암말은 노강에게 넘어갔고, 그녀는 졸지에 사내의 가슴과 팔 사이에 갇혔다."신첩이 무거울 것이옵니다.""활보다 가볍다."말이 되지 않는 값이었으나, 사내의 저울은 언제나 그런 식이었다. 겉옷자락이 그녀의 어깨까지 둘러졌다. 갖옷 안은 화로처럼 데워져 있어서, 겨울 산의 바람이 딴 세상의 것 같았다. 말이 눈을 헤치고 오를 때마다 몸이 뒤로 쏠렸고, 그때마다 사내의 팔이 반 치 조여들었다. 조임에는 사심이 없었다. 사심이 없는 것이 문제였다. 사심 없는 팔에 사심 없이 기대지는 것은, 앞뒤가 서지 않는 일이었다. 등 뒤의 심장 소리가 말굽 소리보다 가까웠다. 그것을 듣지 않으려고 그녀는 산의 소리를 셌다. 마른 가지가 눈 무게를 버리는 소리. 꿩이 튀는 소리. 멀리서 몰이꾼들이 징을 두드리는 소리.사냥은 이상했다.몰이꾼들은 열심히 짐승을 서쪽 골짜기로 몰았다. 한데 왕야의 말머리는 자꾸 동쪽 능선을 향했다. 활은 등에 걸린 채였다. 시위에 손이 간 것은 반나절에 한 번, 그것도 꿩 한 마리를 겨누다 만 것이 전부였다."짐승이 서쪽에 있다 하옵니다.""서쪽은 시끄럽다."사냥을 나와서 시끄러운 곳을 피하는 사냥꾼이 있는가. 그녀는 그 말을 받아 접었다. 접어서, 펴 보지 않기로 했다. 이 사내의 이상한 사냥을 캐기 시작하면, 저 사내도 저의 이상한 것들을 캘 명분을 얻는다. 서로의 주머니를 뒤지지 않는 것이 지금 이 판의 금도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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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화. 은상

경성의 행렬이 왕부에 든 것은 동지 무렵이었다.황상의 은상이었다. 삭왕비 온씨가 왕부의 법도를 바로 세우고 부덕을 갖췄다 하여 비단과 패물을 내리신다는, 곱고 긴 교지가 함께 왔다. 행렬은 요란했다. 붉은 궤짝이 열둘, 호위가 스물, 앞뒤로 늘어선 의장이 문루에서 정당까지 닿았다. 요란함은 언제나 값을 청구한다. 은상이 요란할수록, 뒤에 붙는 주문은 무거운 법이었다. 향안 앞에 엎드려 성은을 받드는 동안, 온보요는 그 곱고 긴 문장들 사이의 짧은 사실 하나만 건져 냈다.서신이 먹혔다. 황상은 총애받는 세작을 계속 쓰기로 했다.붉은 궤짝이 마당을 지나는 동안 왕부 하인들은 곁눈으로 궤짝 수를 세었고, 앵무는 벌써 저자에 풀 소문의 첫 줄을 다듬고 있었다. 왕비마마가 비단 열두 필을 받으셨다더라— 열두 필이 스무 필로 붇기 전에, 소문의 고삐는 앵무 손에 쥐여 있을 것이었다.은상을 받든 내관은 낯이 희고 말씨가 매끄러운 자였다. 차를 대접받으며 왕부의 겨울 풍광을 칭송하고, 왕야의 위엄을 칭송하고, 마마의 부덕을 칭송했다. 칭송이 셋이면 본론은 그 뒤에 온다. 내관은 찻잔을 내려놓으며, 지나가는 말처럼 덧붙였다."태후마마께서도 마마의 안부를 물으셨사옵니다. 지밀에 남쪽 분이 계시니, 마마께서 심심치 않으시겠다고."온보요는 웃는 낯을 흐트리지 않았다.지밀의 남쪽 사람. 왕부 안채의 일을 이르는 말이었다. 태후전은 왕부 안에 저들의 귀가 있음을 굳이 들려주고 간 것이다. 겁을 주려는 것인지, 저들끼리의 셈이 어긋난 것인지는 아직 알 수 없었다.내관은 차를 석 잔 마시는 동안 왕야를 두 번 청했으나, 왕야는 군무를 핑계로 끝내 낯을 내밀지 않았다. 경성의 행렬 앞에 왕부의 주인이 낯을 아끼는 것. 그 무례조차 수처럼 보이는 것이 이 왕부였다.내관의 행렬이 물러간 뒤, 그녀는 은상의 물목을 손수 정리했다.비단 열두 필. 패물 상자 셋. 그리고 향갑 하나. 향갑의 밑판이 다른 것들보다 반 푼 두꺼웠다. 패물이나 비단이 아니라 향갑에 온 것부터가 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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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화. 쥐

밤이 깊어 등불을 물린 뒤에야, 여인이 베개 밑에서 종이 한 장을 꺼냈다."왕야께 보여 드릴 것이 있사옵니다."진묵은 반쯤 감았던 눈을 떴다. 침상 머리맡의 등잔 하나가 다시 밝혀졌다. 침소의 밤은 격식이 정해져 있었다. 여인이 어디에 눕든, 반 각 안에 이불째 사내의 품으로 끌려가 감긴다. 혼례 첫 밤부터 하루도 거르지 않은 격식이었다. 거리를 두고 눕는 수고를 여인이 언제부터 그만두었는지는, 서로 세지 않기로 한 모양이었다.여인이 내민 것은 잿내가 밴 종이였다. 태운 밀지를 그대로 옮겨 적은 것이라 했다. 병력과 성곽의 허실. 봄이 오기 전까지. 그리고 마지막 줄.읽는 동안 여인은 이불깃을 여미고 앉아 그를 보고 있었다. 분이 지워진 낯은 등잔 빛에 창백하니 어렸고, 풀어 내린 머리가 어깨 위에 먹물처럼 흘렀다. 세작이 제 밀지를 제 사내에게, 시키기도 전에 먼저 내놓고 있었다. 진묵은 그 처음의 값을 묻지 않은 척, 종이를 등잔 위에 가져가 두 번째 재로 만들었다."병력의 숫자는 어찌 지어 올릴까요.""지어낼 것 없다. 부풀려라."답과 함께 사내의 손이 여인의 손목을 끌어왔다. 맥이 뛰는 자리에 입술이 내려앉았다."부, 부풀리면 믿겠사옵니까.""겁먹은 자는 큰 숫자를 믿는다." 입술이 손목에서 팔꿈치 안쪽으로 자리를 옮겼다. "황상은 북강이 두렵다. 두려운 자의 눈에는 창끝이 배로 보이는 법이지."문답은 정확했다. 정확한 것이 문제였다. 입술이 어디에 가 있든 답은 한 자도 흐트러지지 않아서, 흐트러지는 것은 언제나 묻는 쪽이었다."성곽의 허실은······ 어찌하올까요.""성곽은, 참대로."여인의 눈이 흔들렸다. 등잔 빛 탓만은 아니었다. 사내의 숨이 어느새 귓가에 와 있었다."허실은 참을 줘야 병력의 거짓이 산다." 귓불 곁에서 낮은 목소리가 울렸다. "어차피 북강의 성벽은 안다고 오를 수 있는 물건이 아니다."그러는 동안에도 손은 바빴다. 이불 안에서 사내의 손은 제 볼일을 보듯 무람없이 오갔다. 허리의 굽이를 손바닥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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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화. 손

네 곁에 있다.그 말은 아침이 되어도 걷히지 않았다. 온보요는 세숫물에 낯을 씻으며, 곁이라는 말의 반지름을 쟀다. 처소에 드나드는 사람은 열이었다. 시비 넷, 물시중 아이 하나, 숯 나르는 노비 둘, 바느질 어멈 하나, 그리고 방어멈과 시종 둘. 방어멈과 시종 둘은 뺀다. 남은 여덟.여덟을 의심하는 일은 유쾌하지 않았다. 유쾌하자고 하는 일이 아니었다. 찬물의 겨울을 함께 난 손들이었다. 미지근해진 물에 정이 들 무렵, 곁이라는 말이 떨어진 것이다.그날부터 그녀는 여덟 사람의 손을 보았다.무명을 개는 손. 화로에 숯을 얹는 손. 창을 바르는 손. 손은 거짓말을 못 한다. 저잣거리의 스승 하나가 그리 가르쳤다. 입은 시키는 대로 말하고 낯은 배운 대로 웃지만, 손은 제 일을 기억하는 대로 움직인다. 그래서 책사는 낯이 아니라 손을 산다. 저잣거리에서 어린 그녀가 배운 것 가운데, 가장 오래 써먹은 가르침이었다.바느질 어멈의 손은 바늘만 기억했다. 숯 노비들의 손은 무게만 기억했다. 시비 넷의 손은 각기 게으름과 부지런함을 기억했으나, 그뿐이었다. 닷새를 그리 보냈다. 의심은 하나씩 지워질 때마다 가벼워져야 하는데, 지워질수록 남는 쪽이 무거워졌다.물시중 아이의 손이 문제였다.대야를 내려놓는 손은 아이답게 서툴렀다. 한데 문고리를 여닫는 손이 서툴지 않았다. 소리가 나지 않게 여는 법을 아는 손이었다. 걸음도 그랬다. 대야를 안고 종종거리는 걸음은 요란한데, 빈손의 걸음은 소리가 없었다. 요란함이 배운 것이고, 없는 소리가 본래의 것이었다.그리고 아이는 글자를 알았다.서안 위에 일부러 펼쳐 둔 물목 종이 앞에서, 아이의 눈은 두 번 멈췄다. 글 모르는 아이의 눈은 종이 위를 미끄러진다. 아는 눈만이 멈춘다. 멈춘 자리는 두 곳 다, 그녀가 심어 둔 거짓 숫자 위였다.저녁에 정보 시종이 저자에서 캐 온 것들이 얹어졌다.아이는 삼 년 전 흉년에 왕부에 들어왔다. 어미는 병으로 죽고 오라비가 하나 있는데, 두 해 전 경성으로 일을 찾아 떠났다 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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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화. 대야

찬물에 손을 담그던 아침으로부터, 꼭 한 달이 지나 있었다.온보요는 김 오르는 대야에 손을 담그고, 아이가 마른 무명을 개키는 것을 보았다. 여느 아침과 같았다. 다른 것은 보는 눈뿐이었다. 아이는 어제와 같이 무명을 각 맞춰 갰고, 어제와 같이 화로의 재를 쳤다. 달라진 것을 모르는 손은 어제와 같이 부지런했다. 그 같음이, 오늘은 조금 아팠다. 아픈 것은 따질 일이 아니라, 그냥 두었다.내치는 것은 하수다.쥐를 잡으면 쥐구멍이 남는다. 구멍은 곧 새 쥐를 부르고, 새 쥐의 낯은 처음부터 다시 익혀야 한다. 낯을 아는 쥐는 구멍을 아는 것보다 값지다. 하물며 이 쥐는, 제가 쥐인 줄을 반쯤밖에 모르는 쥐였다. 오라비가 묻는 말에 답을 적어 보내는 것뿐이라 여길 것이다. 왕비마마는 어떤 분이시냐. 처소에 누가 드나드느냐. 안부를 묻듯 가벼운 물음들에, 안부를 전하듯 답했을 것이다. 죄를 물으려면 죄의 자리부터 물어야 한다. 아이의 자리인가, 삯을 보내는 손의 자리인가. 답은 물을 것도 없었다.그러니 아이의 눈에 보이는 것들만 다스리면 되었다.그날부터 처소의 결이 조금씩 바뀌었다. 서안 위에는 아이가 읽을 만한 것들이 놓이기 시작했다. 남쪽 친정에 보낼 물목. 왕야의 반찬 투정을 적은 쪽지. 수틀과 당시(唐詩) 필사. 총애받는 왕비의 처소다운, 곱고 무해한 종이들이었다. 반찬 투정 쪽지는 앵무가 받아 적은 것이라, 절반은 지어낸 투정이었다. 밀지가 오가는 일은 그 위로 지나가지 않았다. 진짜 종이들은 이제 방어멈의 반짇고리 밑에서 잠을 잤다. 반짇고리는 방어멈의 무릎을 떠나는 법이 없었고, 방어멈의 무릎은 강호에서 삭은 것이라 보기보다 험했다. 왕부에서 가장 든든한 곳간이, 가장 푸근한 무릎 위에 있었다."어멈."바느질하던 방어멈이 고개를 들었다. 온보요는 잠깐 말을 골랐다."저 아이, 겨울옷이 얇더군요. 삯 일부를 옷으로 바꿔 주세요.""······아가씨."방어멈의 눈이 흔들렸다. 늙은 유모는 셈을 모르지만 사람은 알았다. 마마가 어느 시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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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화. 붓

섣달 조운 장계가 올라온 날, 서재의 등불은 오래 탔다.진묵은 같은 줄을 세 번 읽었다. 젖은 쌀이 또 늘어 있었다. 이번에는 나루 셋 중 둘에서 한꺼번에 늘었다. 겨울이 깊어 물이 줄면 배는 가벼워져야 한다. 가벼워져야 할 뱃길에서 쌀이 물을 먹었다.장계 곁에는 밤참이 식은 채 놓여 있었다. 요즘 서재의 밤참은 둘 몫으로 들어왔다. 오늘은 홀로였고, 홀로인 것이 어색해진 제 자신을 사내는 못 본 척했다."상엄."문밖에 시립해 있던 총관이 들었다."삼 년 치 조운 장부.""서고의 것을 전부······?""전부."상엄이 물러간 뒤, 진묵은 서안에 팔을 얹고 등불을 보았다.군량은 북강의 목숨줄이었다. 목숨줄에 빨대가 꽂힌 지는 짐작보다 오래되었을 것이다. 짐작만 하고 둔 것은 빨대의 임자가 경성에 있기 때문이었다. 북강의 손이 경성의 배를 뒤지는 순간, 그것은 장부 싸움이 아니라 조정 싸움이 된다. 병권을 쥔 이성왕이 외척의 돈줄을 건드렸다는 상소가 눈보다 먼저 쌓일 것이었다. 칼로 이기고 붓으로 지는 싸움을 그는 여럿 보았다. 전장에서 목을 벤 공신이 장계 한 줄에 제 목이 달아나는 것을, 세자 시절의 그는 아버지의 등 뒤에서 보았다.그래서 필요한 것은 칼이 아니라 붓이었다.장부 속에서 도둑을 잡되, 잡은 손이 저여서는 안 되었다. 왕부의 안살림이 제 곳간을 살피다 우연히 짚은 것이어야 했다. 안살림. 그 말에 얹히는 사람은 하나뿐이었다.진묵은 등불 심지를 돋우며, 며칠 전 밤을 떠올렸다.부풀린 병력의 숫자를 정하던 밤, 여인은 붓을 들고 물었다. 기병은 얼마나 부풀릴까요. 보병은요. 군마는요. 묻는 족족 숫자가 자로 잰 듯했다. 부풀림에도 마디가 있어서, 마디를 넘으면 거짓이 되고 못 미치면 값이 없다. 여인의 숫자는 매번 마디 위에 정확히 앉았다. 규방에서 배울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병서를 읽은 자도 아는 것이 아니었다. 군량을 만져 본 자의 숫자였다. 물어볼 수도 있었다. 어디서 배웠느냐고. 묻지 않는 것은, 답을 듣고 나면 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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