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어느 새 시계가 8시를 향해 가고 있었다. 대부분의 팀원들이 퇴근한 뒤라 사무실은 텅 비어있었다. 퇴근 시간이 한참 지났지만, 서하는 자리에서 꼼짝도 않은채 모니터 화면만 노려보고 있었다. 화면에 떠있는 피해자 최준혁. 그리고 책상 위에 놓여진 두꺼운 서류뭉치 속 『회계사 김성철 사망 사건』.
서하는 펜 끝으로 책상을 톡, 톡 치며 생각에 잠겨있었다.
뭔가 있다.
분명 있다.
15년 전 사건과 지금 사건이 연결되어 있다는 확신이 점점 강해지고 있었다.
그때.
"아직 안 가셨어요?"
김민석이 컵라면을 들고 다가왔다.
"너도 안 갔잖아."
"경위님 안 가는데 제가 어떻게 갑니까."
서하는 피식 웃었다.
민석이 사건철을 내려다봤다.
"계속 그 사건 보고 계시네요."
"...응."
"15년 전 사건."
김민석이 컵라면 하나를 그녀에게 건넸다.
“알겠으니까, 이거라도 드십쇼.”
“점심도 안드셨잖아요. 다 먹고 살자고 하는 일인데, 경위님 그러다 쓰러지십니다.”
서하는 민석이 건네는 컵라면을 받아들고 가볍게 웃었다.
"내가 이 정도로 쓰러질 사람이었으면 진작 상 치렀지."
“고맙다. 잘 먹을게.”
민석과 컵라면을 먹으면서도 서하의 눈은 파일철에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그러다 곧,
"민석아."
"예."
"당시 수사기록 전부 확인해야겠다."
"전부요?"
"응."
"폐기된 자료까지."
김민석의 표정이 굳었다.
"그 정도면..."
"그 사건...아무래도 뭔가 있어. 이번 사건이랑도 연관이 있는 것 같다."
민석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저희 또 밤새야합니다.”
서하가 민석의 등을 툭, 치며 웃었다.
“소고기 사줄게.”
그 말에 민석도 허탈한 웃음을 터뜨리며 일어섰다.
“약속 하신겁니다.”
김민석이 자료보관실로 향하자, 서하는 다시 사건철을 펼쳤다.
서울경찰청 본청 인근.
검은 세단 안.
도윤은 말없이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시선 끝에는 본청을 나서는 이정훈의 모습이 있었다.
"보스."
"이정훈 경감 이동 시작합니다."
도윤은 짧게 대답했다.
"계속 붙어."
"예."
그 때 폰이 진동했다.
도윤이 먼저 입을 열었다.
"말해."
전화기 너머에서 남자의 보고가 들려왔다.
"보스, 윤서하 경위 아직 조직범죄수사팀 사무실에 있습니다."
"..."
"자료보관실 자료 요청했다고 합니다."
도윤의 손끝이 천천히 팔걸이를 두드렸다.
톡.톡.톡.
예상대로였다.
그녀는 포기할 사람이 아니었다.
한 번 의심하기 시작하면 끝까지 파고든다.
15년 전 사건도.
이정훈도.
결국 모두 찾아낼 것이다.
도윤은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낮게 말했다.
"사무실 나오면 바로 보고해."
"예."
경찰청 본청 주차장.
이정훈은 주변을 한번 둘러본 뒤 차에 올라탔다.
차가 출발하고 그 뒤로 일정한 거리를 유지한 검은 차량 한 대가 조용히 따라붙었다.
30분 뒤,
서울 외곽의 한적한 도로.
이정훈은 블루투스 이어폰을 귀에 꽂고 전화를 받았다.
"예."
잠시 침묵.
그리고 곧 허리를 숙이듯 공손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예. 잘 넘겼습니다."
"..."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이정훈은 오늘 오전 서하 앞에서 보이던 태도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예."
"예, 알겠습니다."
"확인 후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통화가 끝났다.
이정훈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그는 알지 못했다.
자신의 차량 뒤에 따라붙은 그림자를.
"보스."
검은 차량 안.
남자가 낮게 말했다.
"통화했습니다."
휴대전화 너머로 도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상대는.”
“윗선인 듯 합니다.”
도윤의 입꼬리가 비틀리듯 올라갔다.
역시나.
이정훈 정도의 선에서 끝날 리가 없지.
“폰 확보해.”
“예.”
부하의 짧은 대답을 끝으로 통화는 끊겼다.
도윤은 이미 집 앞에 도착해 있었다.
이제 곧 서하가 집으로 돌아온다.
그 전까지 김도윤은 다시 다정한 남편의 모습으로 그녀를 기다려야 했다.
서하는 눈이 뻐근해지도록 민석과 파일들을 들여다보았다.
뻐근한 목을 풀며 시계를 확인하니 어느새 시간이 12시가 다되어 가고 있었다.
민석도 새빨개진 눈을 비비고 있었다. 아직 이렇다 할 수확은 없었다. 서하는 자기 때문에 고생하는 민석을 보며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이제 그만 들어가자. 어차피 오늘 안에 다 보지도 못할거고.”
민석은 그제야 고개를 들며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자료가 너무 많네요...아직 뭐 찾은게 없는데. 그럼 내일 마저 파보죠.”
둘은 함께 서를 나왔다. 민석이 꾸벅 인사를 하고는 터덜터덜 걸어갔다.
서하는 차에 올라타 도윤에게 연락했다.
[나 이제 집 가. 저녁 대충 먹었으니까 안해도 돼.]
도윤은 그 시각 집안일을 마치고 서하를 맞이할 준비를 막 끝낸 참이었다.
폰이 짧게 진동했다. 확인해보니 서하의 문자였다.
잠시 후,
현관문이 열리고 서하가 조용히 집으로 들어왔다. 도윤이 잠들어 있을까 발소리도 내지 않고 조심하며 들어왔지만 도윤은 현관문 소리가 들리자마자 나와 그녀를 맞이했다.
“어...안 잤어?”
“너무 늦었지....먼저 자고 있지 그랬어.”
서하가 멋쩍게 웃으며 뒷머리를 긁적였다.
도윤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그녀의 팔을 부드럽게 끌어당겨 품에 안았다.
“이렇게 늦게 다니면 어떡해....”
“바쁜건 알지만, 그래도 요즘 너무 자주 야근하는거 아냐?”
그의 팔에 조금 힘이 들어갔다.
“당신 몸 상할까 걱정돼.”
서하는 지친 듯한 기색에도 애써 웃음지으며 그의 허리를 마주안았다.
“걱정시켜서 미안...이번 사건만 끝나면 휴가써서 여행이라도 가자.”
“요즘 내가 너무 신경 못 썼지...같이 시간 보내지도 못하고..”
도윤의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가 번졌다.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정수리에 입을 맞췄다.
“좋아. 이번 일 끝나면 좋은 곳으로 여행 다녀오자.”
서하가 씻으러 들어가고, 곧 욕실에서 물소리가 들려왔다.
도윤은 그제야 품 안에 넣어두었던 휴대전화를 꺼냈다.
짧은 진동과 함께 화면에 뜬 메시지.
[보스, 확보했습니다.]
서하가 씻고 나오자 도윤은 평소와 같이 그녀의 머리를 말려주었다. 둘은 함께 침대에 누워 사건 이야기 대신 별것 아닌 이야기를 나눴다.
여행은 어디로 갈지.
이번 사건이 끝나면 뭘 할지.
도윤은 서하의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며 낮게 웃었다.
"휴가 나오면 진짜 아무도 없는 데로 가자."
"좋지."
"전화도 안 받고."
"그건 안 돼."
"왜."
"...형사잖아. 급한 연락이 올 수도 있고."
도윤이 못마땅하다는 듯 한숨을 쉬었다.
"당신 직업이 내 라이벌 같아."
서하가 피식 웃었다.
"질투해?"
"엄청."
"누구한테."
"경찰."
둘의 웃음소리가 침실을 메웠다.
잠시 후,
서하의 대답이 점점 뜸해졌다.
그녀의 숨소리가 고르게 변하는 것을 느끼며 도윤이 고개를 내려다봤다.
어느새 그녀는 잠들어 있었다.
도윤은 한참을 그렇게 잠든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이마에 입을 맞추고 팔을 빼냈다.
잠이 깨지 않도록 이불을 다시 덮어주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옷장을 열었다.
집에서 입던 편안한 옷 대신 검은 셔츠를 꺼내 입었다.
손목시계를 채우고 서랍 깊은 곳에 넣어둔 검은 가죽 장갑을 챙겼다.
현관문이 소리 없이 닫혔다.
집 앞에는 검은 세단 한 대가 기다리고 있었다.
도윤이 모습을 드러내자 운전석에 앉아 있던 남자가 급히 내려와 뒷문을 열었다.
"보스. 오셨습니까."
“대기 중이라고 합니다.”
도윤은 아무 말 없이 차에 올라탔다.
문이 닫혔다.
세단은 조용히 어둠 속으로 미끄러졌다.
한 시간 뒤.
서울 외곽 폐공장.
철문이 천천히 열렸다.
끼이익—
어둠 속으로 발걸음이 울렸다.
뚜벅.
뚜벅.
뚜벅.
"...읍!"
"...으읍...!"
낡은 의자에 묶인 남자가 몸부림쳤다.
입에는 재갈이 물려 있었다.
도윤은 천천히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희미한 조명 아래 드러난 남자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이정훈 경감이었다.
이정훈의 고개가 힘겹게 들렸다.
눈 앞의 남자를 확인하자 그의 눈이 서서히 커졌다.
“오랜만입니다, 이정훈 경장님.”
도윤의 입가에 서늘한 미소가 걸렸다.
“아니.”
“이제 경감님이라고 불러드려야 하나.”
며칠 전.서울지방검찰청.검사실 문이 조용히 열렸다. 비서가 먼저 고개를 숙였다."손님 오셨습니다."책상 위 서류를 넘기던 임태성이 고개를 들었다. 정장을 차려입은 남자가 안으로 들어왔다. 분명 예의를 차리고 있었지만 어딘가 위압감이 느껴지는 남자였다. 낯선 얼굴, 하지만 이름은 익숙했다.새로운 흑룡파 보스. 강도윤."...도윤 대표."도윤은 가볍게 목례만 했다."처음 뵙겠습니다."임태성이 의자를 가리켰다."앉으시죠."도윤은 말없이 자리에 앉았다. 잠시 정적이 흘렀다. 임태성이 먼저 입을 열었다. 약간은 경계심 어린 눈빛으로 도윤을 바라보았다."무슨 일로 검찰청까지 오셨습니까."도윤은 잠시 검사실을 둘러보더니 담담하게 말했다."거래를 하나 제안드리려고 왔습니다."임태성의 눈이 가늘어졌다."...거래?""예.""검사님도 손해 볼 일은 아닙니다."임태성은 팔짱을 꼈다."들어보죠."도윤은 미리 준비해 온 서류철 하나를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하지만 서류를 열지는 않았다.대신 전혀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요즘.""경찰이 꽤 시끄럽더군요."임태성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이정훈 경위."그 이름이 나오자 검사의 표정이 아주 미세하게 굳었다.도윤은 마치 신문 기사를 읽듯 담담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그 사건 때문인지.""15년 전 사건까지 다시 들여다본다는 이야기가 있더군요."순간, 임태성의 손끝이 아주 잠깐 멈췄다.김성철.그 이름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도윤은 그 변화를 놓치지 않았다. 하지만 모른 척 말을 이어갔다."...괜한 소문이었으면 좋겠습니다."짧은 침묵이 흐르고, 도윤이 이번에는 서류철을 앞으로 밀었다."본론으로 들어가죠."임태성이 천천히 서류를 펼쳤다.첫 장.도심 재개발 사업 투자 계획.두 번째 장.예상 수익.수십억 원.세 번째 장.참여 기업 명단.겉으로 보기에는 아무 문제도 없는 사업이었다.임태성이 천천히 서류를 덮었다."...그래서, 이걸 왜 보여주시죠.""
기록보관실은 오래된 종이 냄새로 가득했다. 천장 끝까지 빼곡하게 기록들이 서가에 들어차 있었다. 민석은 양손 가득 사건 기록철을 들고 와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쿵.쿵.두꺼운 파일들이 연달아 쌓였다. 표지만 봐도 수십 건이었다.민석이 한숨을 내쉬었다."...경위님."서하는 대답 대신 파일 하나를 집어 들었다.민석이 쌓여 있는 기록철을 바라보며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이거... 전부 보시게요?"서하가 담담하게 대답했다."응.""...""이거 15년 치예요."민석이 헛웃음을 흘렸다."며칠은 걸리겠는데요."서하는 첫 번째 파일을 펼쳤다.낡은 종이가 바스락 소리를 냈다."다 봐."민석이 그녀를 바라봤다.서하는 시선을 기록에서 떼지 않은 채 말했다."...김성철 사건이."잠시 말을 멈춘 뒤 조용히 덧붙였다."마지막이 아닐 수도 있어."민석의 표정이 조금 굳었다."...무슨 말씀이십니까."서하가 그제야 고개를 들어 민석을 바라봤다."흑룡파가 지금까지 살아남은 걸 보면, 김성철 회계사 한 명으로 끝났을 리 없어.""분명.""비슷한 사건이 더 있었을 거야."민석도 더 이상 농담을 하지 않았다.말없이 옆 의자에 앉아 다른 파일을 펼쳤다.두 사람은 한동안 말없이 기록만 넘겼다.바스락거리는 소리만이 이어졌다.파일이 한 장 넘어갔다.또 다른 사건.또 다른 종결.또 다른 무혐의.민석이 고개를 갸웃했다."...경위님.""응.""딱히 눈에 띄는 특징이 없습니다."파일을 넘기던 손을 멈추며 말했다.“분명 사건들이 다 찝찝하게 끝난 건 맞는데…”서하도 손을 멈췄다.잠시 생각에 잠긴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맞아.""하나씩 보면, 안보이지."그녀는 다시 다음 파일을 펼쳤다."...하지만."서하가 자리에서 일어났다.파일이 하나둘 책상 위에 펼쳐졌다.민석은 사건번호를 정리했고, 서하는 화이트보드 앞으로 걸어갔다.드르륵.검은 마커 뚜껑을 열었다.잠시 생각하던 그녀가 가장 위에 날짜를 적었다
“윤 경위.”“...”“내가 전에도 분명 말했지.”“끝난 일을 뒤돌아보는 버릇은 사람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게 한다고.”“...죄송합니다.”서하는 시선을 떨궜다.“사건은 종결됐다.”“...공식적으로는.”박 팀장의 덧붙인 말에 서하가 놀란 듯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앞으로 한 달."팀장이 책상 위 달력을 한번 훑어봤다."본청 일 때문에 자리를 비울 일이 많다.""당분간은 정신없을 예정이라는 뜻이다."“그동안 네가 어디를 뛰어다니는지, 누굴 만나 뭘 캐고 다니는지, 일일이 신경 쓸 여유도 없겠지.”박 팀장이 고개를 들어 놀란 눈으로 자신을 보고 있는 서하와 눈을 맞췄다.“그 안에,”"흑룡파랑 연결돼 있다는 증거를 찾아와.""하지만 한 달 뒤에도 빈손이면.""그땐 정말 사건에서 손 떼야 할거다.“"알겠나."서하가 멍하니 팀장을 바라보았다.“...팀장님.”박 팀장이 그녀를 똑바로 바라봤다."이번엔 느낌 말고 증거를 가져와."“대답.”“....예, 알겠습니다.”서하의 눈이 의지로 다시 한번 불타올랐다.팀장이 다시 서류에 시선을 내리며 말했다.“그럼 나가봐. 팀원들도 퇴근하라고 하고.”팀장실 문이 닫혔다.서하는 문 앞에 잠시 기대 선 채 깊게 숨을 내쉬었다."...경위님?"민석이 조심스럽게 다가왔다."많이 깨지셨습니까...?"서하는 말없이 고개를 저었다.민석이 괜히 웃으며 말했다."괜찮습니다.""팀장님 하루 이틀 그러신 것도 아니잖아요."서하가 민석을 바라봤다. 잠시 침묵하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우리.""반드시 잡아야겠다.""...예?"민석이 눈을 깜빡였다."아...그쵸.""당연히 잡아야죠."민석이 당황한 듯 서둘러 대답했다. 서하는 조용히 말을 이었다."한 달.""우리한테 한 달 주셨어.""...네?"민석의 눈이 동그래졌다."설마...""팀장님이..."서하가 고개를 끄덕였다."공식적으로 허락하신건 아냐.""하지만, 우리가 증거를 가져오면.""다시 사건을
“이 번호...전부 겹쳐.”서하는 통화 내역을 보며 중얼거렸다.시점이 너무 절묘하게 맞아 떨어졌다.“가족들을 만난 사람이 있었어...”그녀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분명해.""이 번호 주인이 가족들을 만났어."서하는 다시 통화 내역을 확인했다.이정훈의 아내, 그리고 아들.전부 한 번씩 통화했을 뿐이지만 분명 겹치고 있었다. 우연이라고 보기엔 지나치게 이상했다. 통화 시점도, 통화 상대도."...통화 이후에 장례를 서둘렀고.""...그래서 이사까지 갔다."서하는 천천히 의자에 몸을 기댔다.이정훈 가족들은 무언가를 알고 있다.아니, 정확히는 누군가에게서 무언가를 들었다.그 이후부터 모든 것이 바뀌었다.“민석아.”김민석이 서하의 부름에 곧장 몸을 일으켰다."예, 경위님?““이 번호, 좀 알아봐봐.”서하가 민석에게 통화 목록 자료를 내밀었다.“이 번호요? 뭔가 찾으셨어요?”“아직은. 근데, 뭔가 있는건 맞는 것 같아. 타이밍이 너무 절묘해.”민석은 통화 목록을 내려다보다가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그러네요. 이정훈 가족들이랑 다 한 번씩 통화한 기록이 있어요.""사건 이후라 그냥 넘어갔는데..."민석이 자료를 다시 훑었다."응."서하가 통화 내역을 손가락으로 짚었다.“거기다 통화 시점이 장례 전날이랑 이사 전날이야. 뭔가 이상하지 않아?”"..."“만약, 이정훈 가족들이 누군가를 만났고 그 사람이 가족들을 침묵하게 만들었다면..."민석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그럼.""이 사람부터 찾아야겠네요."서하의 눈빛이 날카롭게 빛났다."응.""이 번호. 이번 사건의 시작일 수도 있어."잠시 후,민석이 복잡한 표정으로 서하에게 다가왔다.“알아봤어?”"네. 번호 조회는 해봤는데 등록 정보가 안 나옵니다.""명의도 확인 안 되고요.""대포폰 같습니다."서하는 민석의 말에 예상했다는 듯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역시.”민석은 의아한 듯 서하를 바라보았다."예상하셨습니까?""응.""보
도윤은 잠든 서하를 애틋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하고 싶은 말이 많았다. 하지만 끝내 입 밖으로 꺼내지 못했다. 그저 그녀의 잠든 얼굴을 바라보며 조용히 생각했다.『내가 처음 널 만난 날, 이렇게 될 줄은 몰랐어.』『처음에는 그저 지켜보기만 하려고 했는데.』『그런데 어느 순간부터.』『내 세상에는 너밖에 남지 않았어.』도윤의 시선이 천천히 서하의 얼굴을 훑었다.마치 잃어버릴까 두려운 사람을 눈에 담아두려는 것처럼.『그래서 더 두려워.』『언젠가 네가 모든 진실을 알게 되는 날.』『그때도...』잠시 생각이 멈췄다.도윤은 느리게 눈을 감았다.그리고 마음속으로 조용히 물었다.『넌 내 이름을 불러줄까.』한참을 그렇게 잠든 서하를 바라보던 도윤은 그녀를 가볍게 안아들고 침대에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서하의 이마에 살며시 입을 맞추고 일어나 불을 끄고 방을 나섰다.철컥.어두운 집을 뒤로 하고 현관문이 닫혔다.짙게 선팅된 검은 세단 안,도윤은 말없이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조금 전까지 집에서 보였던 부드러운 표정은 어디에도 없었다. 차 안에는 무거운 정적만이 흘렀다. 운전석에서 도윤의 눈치를 살피며 부하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이정훈 가족들 이주 완료까지 확인했습니다.”“현재도 감시 중입니다.”도윤은 잠시 대답하지 않았다. 창문 너머 스쳐 지나가는 야경만 바라보다가 짧게 입을 열었다.“계속 지켜봐.”부하가 고개를 숙였다.“예.”도윤의 시선이 백미러를 향했다. 차가운 눈빛이 잠시 부하를 스쳤다.“접촉하는 사람은 전부 보고해.”“알겠습니다.”다시 도윤의 시선이 무심하게 창밖을 향했다.“검찰 쪽은.”부하가 곧바로 자세를 고쳐 앉았다.“예?”“그 검사.”“움직임 있나?”“최근 들어 연락을 자주 돌리고 있습니다.”“예전 인맥들도 접촉하는 것 같습니다.”도윤의 입꼬리가 아주 미세하게 올라갔다.“그래?”“우리 제안에 대한 답은.”부하가 잠시 머뭇거리다 대답했다.“아직 확답은 없습니다.”“다만…”"자료를 더 요
전날 오후.서하가 이정훈의 가족들을 찾아가 진실을 묻던 순간에도, 도윤은 그 곳에 있었다. 빌라 앞 주차장에 세워진 검은 세단 안, 도윤은 서하가 건물 안으로 들어가는 것도, 그리고 그녀의 문 앞에서 이정훈의 가족들이 굳은 얼굴로 그녀를 밀어내듯 문을 닫는 것도 전부 지켜보고 있었다. 서하가 힘없이 돌아서는 것을 보며 도윤의 눈동자도 어둡게 가라앉았다. 그녀의 그런 뒷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그 원인을 만든 사람이 자신이라는 사실 역시.서하의 차가 골목을 빠져나가는 것을 한참 동안 바라본 뒤에야, 도윤은 숨을 길게 내쉬었다.땅거미가 질 무렵, 작은 이삿짐 트럭 한 대가 빌라 앞에 도착했다. 이정훈의 가족들은 가방 몇 개를 들고 건물에서 나와 서둘러 싣기 시작했다. 그 모든 과정을 도윤은 짙게 선팅된 창문 너머로 말없이 지켜보고 있었다. 트럭이 조용히 빌라 주차장을 빠져나갔다."..."그의 손끝이 천천히 움직였다.운전석에 앉아 백미러로 눈치를 살피던 부하가 조심스럽게 물었다."따라붙을까요?"도윤은 잠시 침묵했다."..."천천히 입을 열었다. 낮은 목소리로 지시했다."당분간.""계속 지켜봐."부하가 고개를 숙였다."예."도윤은 창문에 기대어 조용히 눈을 감았다.그들이 어떤 선택을 했든 혹은 앞으로 어떤 마음을 먹게 되든, 지금은 아직 안심할 수 없었다.철컥.잠금장치가 풀리는 소리와 함께 현관문이 열렸다. 하지만 소리가 들린 곳은 서하의 옆이었다. 서하는 반사적으로 몸을 돌렸다.“밤중에 왜이렇게 시끄럽게 해요?”문을 열고 나온 중년의 여자가 말했다. 이웃집 여자였다.“무슨 일이에요?”이웃집 여자는 서하를 경계하듯 훑어보며 물었다.“...죄송합니다.”“그 집 사람들 찾아왔어요?”“아, 네. 볼 일이 좀..”“듣기론, 어제 집 내놨다던데.”여자가 집을 턱짓으로 가리키며 말했다.“...네?”서하가 순간 벙찐 얼굴로 되물었다.“이사를..갔다구요?”“그렇다던데. 나도 얼굴도 못보고 부동산에 전해들었어요.”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