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같은 시각, 제이아우라 대표실.지수는 민철로부터 도진과 수진의 파국, 그리고 아이가 보육원으로 보내졌다는 소식을 전달받고 있었다.“……도진 씨가 아이를 보육원에 버렸다고?”지수가 찻잔을 내려놓으며 눈살을 찌푸렸다. 아무리 미쳐 돌아가는 강도진이라지만, 그렇게 아끼던 핏줄을 그토록 쉽게 버렸다는 사실에 문득 이상한 이질감이 들었다.그때, 지수의 뇌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과거의 한 장면이 있었다.예전에 유진이 아이를 품에 안고 울면서 자신 찾아왔을 때 털어놓았던 그 이야기.‘어머니는 꼭 본인이 지정한 연구소에서 한 친자 검사만 믿겠다고 고집을 부리셨어요…… 다른 대형 병원 결과는 전부 조작이라면서…….’지수의 얼음처럼 차가운 눈동자가 번뜩였다.“김민철 실장님.”“네, 대표님.”“강도진의 어머니가 전담으로 친자 확인을 의뢰한다는 그 연구소…… 지금 당장 은밀하게 조사해 봐요. 뭔가 구린 냄새가 나.”지수의 나지막한 명령과 함께, 강도진 가문을 완벽한 지옥으로 밀어 넣을 마지막 시한폭탄의 핀이 뽑히기 시작하고 있었다.지수의 지시를 받은 태준은 곧바로 도진의 모친이 십수 년간 전담으로 거래해 온 ‘한국 유전체 발전 연구소’의 뒤를 은밀히 밟기 시작했다. 대외적으로는 첨단 바이오 연구 기관으로 포장되어 있었지만, 그 실상은 겉포장과 완벽히 달랐다.사흘 만에 지수의 대표실로 돌아온 민철의 손에는 두툼한 기밀 보고서가 들려있었다.“대표님, 상상 이상입니다.”태준이 서류를 넘기며 차분하지만 서늘한 목소리로 보고를 이
오늘 집에 돌아올 아이를 위해 아이방을 채울 쇼핑을 신나게 마치고 돌아온 수진. 하지만 그녀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낮부터 소파에 엉망으로 쓰러져 술을 마시고 있는 도진이었다.“우리 아들은?”수진은 쇼핑한 물건들을 아이방에 놓아두고 도진의 옆에 앉아 팔짱을 끼며 그의 품에 안겼다. 하지만 도진은 수진의 가식적인 애교에도 아무 말 없이 묵묵히 술잔만 비워낼 뿐이었다.그제야 도진의 서늘하고 날 선 분위기를 눈치챈 수진이 조심스럽게 자세를 바로 세웠다.“우리 아들 어디 있냐고? 그리고 아이가 오는 날 낮부터 술을 마셔? 당신 생각이 있는 거야, 없는 거야?”수진이 다급하게 쏘아붙였다. 도진은 천천히 고개를 돌려 자신을 몰아세우는 수진을 묵묵히 응시하다가, 다시 잔을 입가로 가져갔다. 답답함에 막 다시 재촉하려던 수진의 귓가로, 낮게 가라앉았으나 지독한 살기가 깃든 도진의 목소리가 흘러들었다.“한 시간 준다. 짐 챙겨서 나가.”
CB 뷰티를 완벽하게 빼앗기고 그룹 이사회에서 쫓겨날 위기에 몰린 강도진에게, 세상은 온통 차가운 잿빛이었다. 숨조차 쉬기 힘든 패배감과 치욕이 사방에서 그를 목 졸랐다. 하지만 그 참담한 지옥 속에서도, 매일 밤 그를 버티게 하는 단 하나의 온기 어린 구원처가 있었다.병원 인큐베이터의 차가운 유리를 견디고 드디어 신생아실로 옮겨진, 수진이 낳은 그의 아들이었다.처음 '정자 운동성 저하'라는 진단서를 손에 쥐었을 때만 해도, 제 아이일 거라는 확신은 없었다. 하지만 아이가 태어나고 하루가 다르게 핏덩이 같은 얼굴에 온기가 도는 것을 지켜보며, 그의 가슴엔 미련하도록 깊은 정이 뿌리를 내렸다. 이렇게 가슴이 찢어지도록 애틋한데 제 핏줄이 아닐 리 없다는, 처절하고도 어리석은 확신이었다.유리창 너머로 조그마한 손발을 꼼지락거리는 아이를 바라볼 때만큼은, 도진은 세상의 모든 치욕을 잊을 수 있었다.“……아빠가 미안하다. 네가 세상에 나올 때는 훨씬 더 근사하고 당당한 모습이 되어 있으려고 했는데.”도진은 정성스레 준비한 배냇저고리와 앙증맞은 모자를 품에 안은 채, 신생아실 유리창에 가만히 이마를 대었다. 차가운 유리 너머의 아이를 향한 그의 눈빛에는 핏발 선 욕망 대신, 지독할 정도로 애절하고 묵직한 부성애가 서려 있었다.수진과의 관계는 이미 썩어 문드러진 껍데기였을지언정, 이 아이만큼은 도진에게 무너진 인생을 재건해 줄 유일한 희망이자 마지막 피붙이였다. 지수에게 빼앗긴 모든 것을 언젠가 이 아이에게 되찾아주겠
CB 뷰티의 인수 계약이 완료된 다음 날 아침.제이아우라 사옥은 아침부터 축제 분위기로 떠들썩했다. CB 그룹의 핵심 알짜 신사업을 완벽하게 품에 안았다는 기사가 경제지 메인을 장식하면서, 제이아우라의 주가는 단숨에 상한가를 쳤고 회사 로비는 직원들의 환호성으로 가득 찼다.“대표님! CB 뷰티 핵심 연구진과 실무진 승계 절차, 완벽하게 마쳤습니다! 다들 CB 본사의 꼰대 임원들한테 시달리다가 우리 회사로 넘어온다니까 만세를 부르던데요?”팀원들이 들뜬 얼굴로 보고서를 내밀자, 지수는 가볍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고생 많았어요, 다들. 오늘 저녁은 법인카드 한도 없이 회식하니까 마음껏 즐겨요.”사무실을 뒤흔드는 직원들의 환호성을 뒤로한 채, 지수는 기분 좋은 미소를 지었다.한편, 같은 시각 CB 그룹 본사의 분위기는 그야말로 초상집이었다. TV 화면에서는 연신 앵커의 건조한 목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CB 그룹, 뷰티 사업부 파격 매각…… 사실상 실패 인정][강도진 대표의 무모한 사업 확장, 100억 채무와 승계 비용 본사에 안기며 이사회 반발 극에 달해]뉴스 자막 옆으로는 취재진을 피해 지하 주차장으로 비틀거리며 도망치듯 들어가는 도진의 처량한 뒷모습이 찍혀 있었다. 도진이 커다란 야망으로 시작한 사업을 결국 지수의 손에 쥐어주고, 100억 대의 채무와 승계 정산금만 본사에 떠안긴 그에게 돌아온 것은 이사회의 차가운 해임 건의안과 주주들의 거센 비난뿐이었다.껍데기뿐인 왕좌에 앉아 술병을 거머쥔 도진의 몰락은, 이제 완전히 지수의 관심 밖이었다.저녁 무렵, 지수는 진우의 차를 타고 도심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호젓한 레스토랑으로 향했다. 거창한 파티 대신, 두 사람만의 소소하고 따뜻한 저녁 자리가 마련되어 있었다.테이블
300억 원. CB 뷰티의 부도를 막고 그룹 전체로 번질 연쇄 파산을 저지하기 위해 당장 피처럼 필요한 현금이었다.도진은 평생 차려본 적 없는 납작한 태도로 시중 금융권과 대형 사모펀드를 미친 듯이 찾아다녔다. 하지만 이미 A은행을 시작으로 ‘신용 불량’ 낙인이 찍혀버린 CB 뷰티에 손을 내밀어 주는 곳은 단 한 곳도 없었다. 그룹 본사의 유보금이라도 끌어다 쓰려 했으나, "뷰티의 무모한 확장이 낳은 자업자득에 본사 자금을 쏟아부을 수 없다"는 이사회의 서늘한 반발에 막혀 단 한 걸음도 나아가지 못했다.만기 상환일이 한 달 남짓 남았던 시점에서 금융권을 전전하며 허송세월을 보낸 지 어느덧 삼 주. 벼랑 끝에 몰린 채 밤을 새운 도진의 눈은 핏발이 서다 못해 검붉게 충혈되어 있었다. 시시각각 죄어오는 상환 시한에 숨이 막혀갈 때쯤, 대표이사실의 묵직한 문이 열리며 세 사람이 걸어 들어왔다.박진우, 이지수, 그리고…… 얼마 전까지 자신의 충직한 수석비서였던 최태준이었다.“……너희가 여기 왜 있어? 최태준, 네가 감히 여길……!”도진이 쉰 목소리로 쏘아붙이며 태준을 노려보았다. 진우는 차가운 미소를 지으며 품에서 꺼낸 두툼한 서류 한 권을 도진의 유리 테이블 위에 던지듯 내려놓았다. 툭, 하고 둔탁한 마찰음이 정적을 깨트렸다.“강도진 대표, 피를 말리며 죽어가는 중인 것 같아 구원투수로 친히 와줬는데 표정이 왜 그러나?”도진이 경계심 가득한 떨리는 손으로 계약서를 펼쳐 들었다.[CB 뷰티 지분 매각 및 사업권 양도 계약서]“CB 뷰티가 안고 있는 단기 대출 채무 300억 원을 제이아우라와 RV가 전액 인수한다. 그리고 그 대가로 CB 뷰티의 지분 80%와 브랜드 소유권을 넘겨받는 조건이
‘제이아우라와 CB의 '검은 태양' 컬렉션 긴밀 협업 체결.’대대적인 언론 발표와 함께 끝없이 폭락을 거듭하던 CB 그룹의 주가가 단숨에 가파른 상향 곡선을 그렸다. 시장은 지수와 도진의 전격적인 협업을 ‘두 신흥 거인의 극적인 결합’이자 최고의 호재라 부르며 환호했다.CB 그룹 본사 대표이사실. 도진은 모니터 화면에 가득 찬 붉은색 주가 상승 그래픽을 내려다보며 깊은 숨을 내쉬었다. 가슴을 짓눌러 오던 답답함이 일순간 씻겨 내려가는 기분이었다.“거봐, 내가 아니면 누가 이렇게 빨리 이 미친 난국을 해결할 수 있었겠어.”도진은 턱을 바짝 쳐들며 특유의 자만 어린 미소를 되찾았다. 비록 지수에게 7 대 3이라는 비참할 정도로 불리한 수익 배분율을 내주긴 했지만, 어차피 위태롭던 자신의 대표 자리를 완벽히 보전하지 않았는가. VVIP들의 불안 요소마저 단번에 잠재우며 CB라는 브랜드의 명줄을 연장할 수 있었으니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승리한 경주라고 생각했다. 지수의 손바닥 위에서 놀아났다는 찜찜함쯤은 당장 얻어낸 과실 뒤로 손쉽게 묻어버릴 수 있었다.그때, 정지상 실장이 굳어버린 표정으로 서류 봉투 하나를 들고 대표이사실 문을 열었다.“대표님, 시중은행 세 곳에서 통보서가 도착했습니다. CB 뷰티의 300억 단기 대출 건에 대한 ‘만기 연장 재심사 결과’입니다.”도진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소
3일간 안정을 취한 지수는 외출준비를 서둘렀다.거울 앞에 선 지수의 차림새는 단조로웠다. 연한 하슬색 원피스에 검은색 C사의 핸드백이 전부였다. 초췌해진 얼굴은 화장으로도 가려지지 ㅇ낳았고 푸석해진 머릿결과 여전희 볼록하게 남아있는 복부는 지수를 실제보다 훨씬 지쳐보이게 했다.누가 이모습을 보고 스물여덟의 꽃다운 나이라 할까. K국의 공주님으로 불리던 지수는 이제 A국의 가정부보다 못한 몰골을 하고 있었다. 지수는 거울 속 낯선 여자를 뒤로 한채 깊은 한숨을 내뱉으며 집을 나섰다.그녀의 차는 도진이 3년전 결혼 기념으로 사준
7일간 입원 치료를 마치고 영양제로 간신히 기력을 회복한 지수는 배아 이식을 끝내고 오랜만에 집으로 돌아왔다. 그 동안 도진에게서는 단 한통의 연락도 없었다.지숙 역시 먼저 손을 내밀 기운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적막하고 차가운 공기가 감도는 거실, 현관문을 열고 들어선 지수의 귓가에 가정부의 은밀한 전화 통화 소리가 드려왔다."네 사모님 진짜라니까요. 그 여자가 일주일이나 집에 들어오지 않았어요. 분명 다른 남자가 생긴거에요. 그렇지 않으면 이렇게 사장님은 방치할수는 없는 거죠 . 네 ,맞아요 제가 어떻게 사모님께 거짓말을 할
도진과 전화를 마친 지수는 떨리는 숨을 몰아쉬며 휴대폰을 조작했다. 익숙한 번호가 아닌, 철저히 숨겨두었던 가른 번호로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김실장인 혹시 오늘 CB 그룹과 투자 회의가 잡혀 있나요? "라고 물었다. " 네 사장님. 오늘 오후에 미팅이예정되어 있습니다. 혹시 변동사랑이 있으신가요?지수의 입가에 서늘안 미소가 번졌다. 도진이 그토록 화를 내며 중요하도고 외쳤던 미팅은 역시나 지수의 RV인벤스먼트와의 미팅이었다. " 네 변동 사항이 있습니다. 미팅은 그대로 진행해 주세요. 대신 계약서에 싸인은 하지말고
도진은 아침 6시가 넘어서야 옷을 갈아입기 우해 집에 들어왔다.주방에서는 가정부가 무미건조한 소리를 내면 아침 식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평소 같았으면 지수가 현관까지 뛰어나와 "여보 왔어?"라며 겉옷을 받아 들었을 시간이었다. 밤새 고생했다며 미리 따뜻한 물을 받아둔 욕조로 그를 안내했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 아침은 달랐다. 거실은 적막했고 욕조는 차갑게 비어 있었다." 이 사람, 어디 갔어요?" 도진의 물음에 가정부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대답했다." 사장님 오셨어요? 사모님은 주무시는지 방에서 안 나오시네요."그말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