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옥련의 시선이 검지에 감긴 붉은 실에 닿자 연화는 뒤늦게 손을 움켜쥐었다.
옥련은 밤새 풀어 두었던 머리카락을 한쪽 어깨로 늘어뜨린 채였다.
손목에 감긴 붉은 댕기는 아직 젖어 피부에 착 달라붙어 있었다.
그 촉촉한 천이 피부 위로 미끄러지며 남긴 흔적이,
마치 누군가의 입술이 스치고 간 자국처럼 선명했다.
“비에 떠내려갈까 거둔 것뿐이라더니, 손가락이 먼저 마음을 말했네.”
“그 밤을 아침까지 들고 나오지는 마시오.”
연화가 문을 닫자 붉은 실 끝이 문틈에 걸렸다.
잡아당기면 밖으로 빠질 것을 알면서도 한참 그대로 두었다가,
빗장이 완전히 내려앉은 뒤에야 천천히 안으로 끌어들였다.
아궁이에는 밤새 습기를 머금은 재만 남아 있었으므로 실끈을 던질 불씨조차 찾을 수 없었다.
그녀는 함 밑바닥에 붉은 실을 눌러 넣고 뚜껑을 덮었다.
손바닥으로 두 번 더 누른 뒤 자리에 누웠으나 잠을 청할수록 귀는 오히려 또렷해졌다.
처마 끝에서 떨어지는 빗물 사이로 주막 안에서 끊겼던 웃음과 옥련이 삼키지 못한 짧은 숨이 되살아났다.
그 숨결은 마치 옥련이 이겸의 몸 위에서 내쉬던, 억눌린 신음처럼 귀에 파고들었다.
동이 틀 무렵 물동이를 들고 우물로 나가자 이겸이 두레박줄을 감고 있었다.
머리는 뒤로 느슨하게 묶였고,
여민 옷깃 아래에는 붉게 눌린 입술 자국 하나가 반쯤 남아 있었다.
그 자국은 어제 밤 누군가의 입이 얼마나 거칠게 빨아들였는지를 증언하듯 선명했다.
연화는 옷깃 아래의 흔적을 보지 않은 사람처럼 물동이를 내려놓았다.
“비키시오.”
“내가 길을 막았소?”
“사람 하나가 우물턱을 차지하고 있으면 막은 것이오.”
이겸은 한 걸음 옆으로 물러났으나 두 사람이 스치지 않고 지나가기에는 여전히 좁았다.
연화가 두레박줄을 잡는 순간 소매 끝에 붙어 있던 붉은 실밥 하나가 드러났다.
문을 닫기 전 검지에 감겨 있던 실끈에서 떨어진 모양이었다.
이겸은 실밥을 집으려 손을 뻗다가 연화의 소매에 닿기 직전 멈추었다.
“버리지 않았소.”
“돌려주려던 참이오.”
“내 것이 아니라 했소.”
“그럼 왜 내 문 앞에 두었소?”
“그대가 주울 것 같았으니까.”
우물물에 비친 연화의 얼굴이 떨어진 물방울 하나에 흔들렸다.
물결이 그녀의 입술을 스치듯 일렁였다.
“다른 여자의 방에서 나온 사내에게 내 속을 짐작하라 허락한 적은 없소.”
“그대는 문이 닫힌 뒤까지 귀를 거두지 못했소?”
연화의 손이 두레박줄을 세게 당겼다
. 물이 우물턱을 넘으며 소매와 치맛자락을 적셔 몸에 한껏 달라붙어 몸매가 다 드러나 보였다.
젖은 천이 가슴의 곡선을 따라 흘러내리며, 단단히 조여오는 듯한 압박감이 그녀의 숨을 가쁘게 만들었다.
주막 문이 열리며 옥련이 나왔다.
느슨하게 틀어 올린 머리 아래로 붉은 댕기가 흘렀고,
한쪽 옷고름은 급히 다시 맨 듯 길이가 맞지 않았다.
그녀가 이겸에게 다가가 옷깃을 바로잡으려 손을 뻗자 그는 닿기 전에 반걸음 물러났다.
“해가 뜨면 정말 남이오?”
“그대가 정한 일이 아니오?”
옥련은 허공에 남은 손으로 자신의 댕기를 고쳐 묶었다.
웃고 있었으나 매듭은 한 번에 잡히지 않았다.
손가락이 떨리는 이유를 숨기려는 듯.
처마 아래에서 젖은 무명천을 널던 월선이 천의 안팎을 뒤집었다.
“밤은 문 안에서 끝내게. 해가 뜬 뒤까지 끌고 나오면 선택이 빚이 되네.”
연화는 물동이를 들고 돌아섰다.
걸음을 재촉할수록 물은 가장자리를 넘었고,
집에 도착했을 때에는 절반 가까이 줄어 있었다.
다시 길으러 갈 생각은 들지 않아 남은 물로 손부터 씻었다.
검지에는 두 번 감겨 있던 자리가 가느다랗게 붉어져 있었다.
물로 문지르자 빛은 옅어졌으나 눌린 자국까지 사라지지는 않았다.
그 자국이 마치 누군가의 손가락이 그녀의 피부를 파고드는 듯한 열기를 남겼다.
한낮이 지나 연화는 얼룩진 홑청을 들고 초희의 염색방으로 갔다.
비에 젖었던 천을 작업대에 펼치던 초희의 손이 연화의 검지 앞에서 멈췄다.
“어디를 다쳤소?”
“실이 쓸렸소.”
“무슨 실이 살갗에 자국까지 남겼소?”
연화는 대답 대신 홑청의 젖은 귀퉁이를 접었다.
초희가 더 묻기 전에 염색방을 나와 집으로 돌아온 뒤,
아궁이에 마른 솔가지를 밀어 넣었다.
작은 불길이 살아나자 함을 열어 붉은 실끈을 꺼냈다.
끝자락 한 올이 불꽃에 닿아 검게 말리는 순간 대문 밖에서 이겸이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한연화.”
연화는 불에서 손을 거두었다.
대문을 열자 이겸은 문턱에서 두 걸음 떨어진 곳에 서 있었다.
그녀의 손에 들린 실을 본 뒤에도 가까이 오지 않았다.
그의 시선이 그녀의 젖은 손가락과 실끈이 만나는 지점을 천천히 훑었다.
“아침에는 돌려주겠다 했소. 해가 기울도록 오지 않기에 내가 왔소.”
“내 것이 아니라 하지 않았소?”
이겸의 시선이 검게 말린 실끝에 멎었다. 희미한 그슬린 냄새가 문밖까지 따라 나왔다.
“돌려준다더니 태우려 했소?”
“가져가시오.”
“끝이 그슬린 것을 보니 아까워졌소.”
“또 두고 가면 이번에는 정말 태우겠소.”
“태우기 전에 한 번쯤 걸어 보시오.”
연화가 손을 펴자 실끈이 손바닥 아래로 미끄러졌다.
그것을 받으려던 이겸의 손끝이 연화의 손목 안쪽을 스쳤다.
그의 손가락이 그녀의 맥박을 더듬듯 살짝 누르는 순간,
빠른 맥이 손가락 아래에서 한 번 크게 뛰었다.
그 뛰는 감촉이 이겸의 손끝까지 전해지며, 그의 숨이 순간적으로 거칠어졌다.
“그 손 치우시오.”
이겸은 대답보다 먼저 손을 거두었다.
손가락 아래에서 뛰었던 맥을 확인하려는 듯 그의 시선이 연화의 손목에 잠시 남았다.
그곳은 아직도 그의 손길이 남긴 열기로 달아올라 있었다.
붉은 실이 두 사람의 발 사이에 내려앉은 순간 맞은편 대장간 문이 열렸다.
난실은 붉은 댕기를 손에 든 채 문턱에 섰다.
아직 문고리에 걸지는 않았으나 이겸이 어느 쪽으로 돌아설지를 기다리는 얼굴이었다.
그녀의 눈빛은 이겸의 몸을 향한 욕망과 경계가 뒤섞여 있었다.
연화는 대문을 닫고 빗장을 걸었다.
이겸의 발이 대장간 쪽으로 향하자 방금 내려앉은 빗장이 다시 문틀을 긁었고, 문은 손가락 두 마디만큼 열렸다.
“이겸.”
그가 돌아보았을 때 붉은 실은 다시 연화의 검지에 감겨 있었다.
실이 그녀의 손가락을 조여 오는 듯한 압박이, 그녀의 숨을 더욱 가쁘게 만들었다.
“난실의 문을 넘기 전에 대답하시오.”
연화는 실끈을 감은 손을 문 뒤로 숨겼다.
손목의 맥박이 아직도 그의 손길을 기억하며 요동치고 있었다.
“어젯밤, 왜 내 문 앞에 섰소?”
“그대는 내 선택도 놓을 수 있소?”붉은 천 끝에 붙은 불씨가 결을 타고 번졌다.이겸의 손이 들렸으나 문턱 앞에서 멎었고, 연화는 등잔 옆 물그릇을 바라보지 않았다.“불부터 끄시오.”“대답부터 하시오.”“놓고 싶지는 않소.”연화의 시선이 그에게 닿았다.“그러면서도 빼앗지는 않겠소. 태울지 말지는 그대가 정하시오.”불길이 손끝 가까이 다가오자 연화는 천을 물그릇에 떨어뜨렸다.치익 하는 소리와 함께 등잔불이 흔들렸고,젖은 붉은 천에서는 검게 탄 냄새가 올라왔다.이겸은 한 걸음도 다가오지 않았다.“놓고 싶지 않으면서 내 선택은 따른다니, 그 두 말이 함께 설 수 있소?”“그대가 나를 택하지 않아도 막지 않겠다는 뜻이오.”“막지 않는다고 놓은 것은 아니지 않소.”연화는 물그릇 가장자리에 번진 붉은 물을 닦지 않았다.탄 조각이 물속에서 풀릴 때마다 색은 옅어졌으나 검은 끝은 그대로 남았다.그녀는 천을 꺼내려다 다시 잠기게 했고,이겸의 발소리가 사라진 뒤에야 두 손으로 건져 냈다.젖은 천을 문 안쪽에 펼치자 물이 문턱을 타고 골목으로 흘렀다.붉은 물이 돌틈에 고였다가 천천히 번졌다.연화는 그 자국이 골목 끝까지 흐르지 않는 것을 확인한 뒤에야 문에서 물러섰다.등잔에는 탄내가 오래 남아 있었다.새 빗장이 걸린 뒤 이겸은 닫힌 문 앞에 머물지 않았다.아침이 밝자 탄 자국은 붉은 천의 한쪽 귀를 검게 오므려 놓았다.연화는 잘라 내지 않고 마당 빨랫줄에 걸었다.밤새 물에 젖은 소매도 함께 널었고,월선은 빈 바구니를 들고 들어오다 두 천을 번갈아 보았다.“태웠구먼.”“끝까지 태우지는 못했소.”“못한 것인지, 안 한 것인지부터 정해야겠네.”월선은 마루 끝에 놓인 방석을 털었다.먼지가 햇빛 속으로 일었다가 빈자리 위에 다시 내려앉았다.“문을 열면 누군가 다칠 것이고, 닫으면 그대가 다치오. 어느 쪽이 덜 나쁜지 골라야 하는 것이오?”“죄 없는 선택만 찾으면 아무것도 고르지 못하지.”“그러면 다치게 해도 된다는 말이오?”
“왜 그대가 기다리는 문은 늘 연화의 것이오?”옥련은 사람 하나 지날 틈을 손바닥 너비까지 좁힌 채 이겸의 대답을 기다렸다.맞은편 창호의 어둠이 그의 어깨 너머에 남아 있었고, 연화는 그 틈에서 물러나지 않았다.“그 문은 아직 나를 부르지 않았소.”옥련의 웃음이 멎었다가 더 환하게 번졌다.“먼저 연 문은 기억하고, 열리지 않은 문은 기다리는구려.”그녀는 붉은 댕기를 안으로 잡아당기고 문을 닫았다.빗장이 걸리는 소리가 골목을 건넜고, 이겸은 닫힌 문 앞에 머물지 않았다.묵는 방으로 향하는 길은 연화의 집 앞을 지났으나 그는 고개를 들지 않았다.연화도 창호를 닫았지만 바느질함은 밤새 열린 채였다.닫힌 주막 문 아래로 등잔빛이 새어 나왔으나, 그 뒤로 주막 앞에 멎는 발소리는 없었다.이튿날 염색집 솥 아래에서는 젖은 장작이 연기를 토했다.초희는 쪽빛 천을 걷어 내고 두 밤 전 접어 쥔 붉은 댕기를 화덕 가까이 가져갔다.끝자락이 열기에 오그라들자 연화가 천의 반대편을 붙잡았다.“무엇을 하려는 것이오?”“태우면 다시 걸지 않을 것 같았소.”“태운다고 그대가 연 문까지 없어지지는 않소.”“없애려는 것이 아니오.”초희는 천을 놓지 않은 채 불길을 바라보았다.“또 열까 봐 그러는 것이오.”연화의 손등과 초희의 손등이 천 위에서 맞닿았다.초희는 먼저 손을 거두지 않았고, 연화도 댕기를 빼앗지 않았다.화덕의 연기가 두 사람 사이를 지나간 뒤에야 초희가 천을 불에서 멀리 옮겼다.“그날 밤을 후회하오?”“내가 문을 연 일을 남의 탓으로 돌리지는 않소.”초희는 검게 오그라든 끝을 가위로 잘랐다.“다만 그 사람이 내 앞에 있어도, 나를 지나 연화를 보는 순간까지 다시 견딜까 봐 두렵소.”잘린 붉은 조각이 연화의 치맛단 앞에 떨어졌다.그녀는 그것을 집지 않고 한 걸음 물러섰다.초희는 남은 천을 길게 찢어 젖은 쪽빛 천 묶음에 감았다.불에 그을린 조각만 화덕 앞에 남았다.한낮에 이겸이 염색을 마친 베 꾸러미를 옮기러 왔다.초희는
“그럴 줄 알면서 문을 연 나는 무엇이 다르오?”연화에게는 초희의 마지막 말이 들리지 않았다.문 안쪽으로 물러선 입술과 다시 접히는 붉은 천만 보였고,이겸은 문턱을 넘지 않은 채 한동안 움직이지 않았다.초희가 문을 닫자 그제야 골목으로 나왔지만 연화 쪽으로 다가오지는 않았다.비뚤어진 도포 고름에 감긴 쪽빛 실이 새벽 안개 속에서도 또렷했다.연화는 물동이를 들고 먼저 돌아섰다.이겸의 발소리가 뒤에서 같은 방향으로 이어지다가 갈림길에서 멎었으나 확인하려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집에 닿아 물을 항아리에 붓는 동안 절반이 바닥으로 흘렀고,젖은 치맛단이 발목에 붙은 뒤에야 물동이가 기울었다는 것을 알았다.한낮의 주막 마당에는 빨래한 술거름베가 길게 널렸다.베 아래를 지나던 이겸의 도포 고름에 쪽빛 실이 감겨 있었다.옥련의 시선이 그곳에 잠시 멎었으나 초희의 이름은 입에 올리지 않았다.대신 상 아래 두었던 술독 마개를 꺼내 세 줄의 금을 손톱으로 훑었다.“밤의 차례를 정하지 않겠다면서, 지난 밤은 자꾸 늘어나는군.”월선은 젖은 베의 안팎을 뒤집어 널었다.“문을 연 수가 권리가 되는 순간부터 밤은 빚이 되네.”“빚을 달라는 게 아니오. 처음이 사라지는 게 싫은 거요.”초희는 물에 헹군 쪽빛 천을 들고 마당에 들어섰다.어젯밤 접어 쥐었던 댕기는 보이지 않았고 소매 끝만 평소보다 단단히 여며져 있었다.“처음이었다고 마지막까지 먼저인 것은 아니오.”옥련은 웃었으나 마개를 감춘 손은 풀지 않았다.“마지막을 탐낸 적은 없소. 먼저였다는 사실까지 남의 눈치를 보며 지워야 하오?”연화는 술거름베의 물기를 짜다가 손을 놓았다.젖은 천이 대야 안으로 떨어지며 물을 튀겼고, 초희는 제 치맛단에 번진 방울을 털지 않았다.이겸이 빈 술독을 들고 마당으로 들어오자 옥련은 세 줄의 금을 가리지 않았다.“당신도 기억하오? 내가 먼저였소.”“기억하오.”“그런데 왜 첫 문보다 열리지 않은 문을 더 오래 보오?”이겸의 시선이 연화에게 향하기 전에 그녀가
“아니면 다른 문을 넘을 때마다 아파 줄 내 마음이오?”이겸은 약즙이 밴 손등을 내려다보았다.매향은 문턱 안에서 붉은 끈을 주워 들었고, 연화의 손바닥에는 쑥가루가 그대로 남아 있었다.“그대가 아무렇지 않다면 내가 그대에게 아무것도 아닌 듯하오.”“그러니 내 아픔으로 그대 자리를 확인하려는 것이오?”“그대가 감추는 것을 모른 척하고 싶지 않았소.”“모른 척하지 않는 것과 들춰 보는 것은 다르오.”이겸은 대답하지 못했다. 연화는 손바닥을 털지 않고 돌아섰다.쑥가루가 걸음마다 조금씩 떨어졌고,집에 돌아와 차린 아침상에서는 밥이 두 술도 줄지 않았다.소매를 걷자 손등의 약빛이 드러났지만 연화는 물을 떠 놓고도 끝내 씻지 않았다.두레박 소리가 났으나 평소보다 늦게 문을 열었다.문 안쪽 못에는 거두어 둔 붉은 천이 걸려 있었고,바람도 없는데 끝자락이 비스듬히 접혀 있었다.한낮에 연화는 찢어진 소맷단을 들고 초희의 염색집을 찾았다.초희는 쪽물이 밴 실을 실패에 감다가 연화의 손등에 남은 초록빛을 보았다.묻지 않은 채 소매를 받아 펼쳤으나 같은 곳을 두 번 꿰맨 뒤에야 실을 잘라 냈다.상에는 쪽빛 실패와 붉은 실패가 나란히 놓여 있었다.“잠을 못 잤소?”“바느질이 마음에 들지 않소?”“그대 손이 아니라 내 손이 흔들린 것이오.”초희는 잘못 든 바늘땀을 뜯었다.연화는 상 아래 놓인 낡은 검은 끈 한 토막을 보았다.곁에는 약즙이 묻은 도포 소매가 놓여 있었다.“그 사람이 다녀갔소?”“옷만 맡기고 갔소.”“밤의 흔적까지 그대가 지워 주는구려.”초희의 바늘이 천 위에서 멎었다.“지우는 것이 아니라 꿰매는 것이오. 남은 자국은 그 사람 몫이고.”초희는 바늘귀에 실을 꿰려다 놓쳤다.실끝을 눌러 가늘게 만든 뒤 밀어 넣었고,도포를 접으면서도 약즙이 밴 부분을 안쪽으로 숨기지 않았다.연화도 약방에서 묻은 것이냐고 묻지 않았다.두 사람 사이에서는 쪽빛 실만 길게 당겨졌다.잠시 뒤 이겸이 도포를 찾으러 왔다.그는 문턱 밖에 서
“아니면 내 문을 넘지 않은 그대 자신이오?”이겸의 손이 문설주 앞에서 내려갔다.문턱에 걸친 붉은 천은 안으로도 밖으로도 떨어지지 않은 채 두 사람 사이를 가르고 있었다.그 천 끝이 연화의 손가락을 스치듯 흔들리며,이겸의 숨결이 문밖으로 스며 나오는 듯한 긴장이 두 사람 사이를 조였다.“그대가 무너진 틈을 타고 들어가고 싶지 않았소.”“무너졌는지는 내가 정하오.”“아침이 되면 그대가 스스로를 미워할 것 같았소.”“그 미움까지 그대가 대신 짊어질 셈이오?”연화는 붉은 천을 거두어 문 안으로 끌어당겼다.새 빗장이 걸리는 소리가 났고, 이겸은 닫힌 문 앞에 머물지 않았다.발소리는 곧장 골목 끝으로 멀어졌지만 연화는 등잔이 다 타도록 천을 접지 못했다.손끝이 천의 매끄러운 감촉에 계속 머물렀고, 그 촉감이 몸 안쪽까지 퍼지는 듯했다.문 안에서는 밥그릇의 뚜껑이 기울어 있었고 바느질감에는 바늘 하나 꽂히지 않았다.연화는 붉은 천을 무릎 위에 펼쳤다가 다시 접었으며,닭이 울고서야 문 안쪽 못에 걸었다. 천이 무릎을 스칠 때마다 몸이 미세하게 반응했다.아침이 밝자 연화는 못에 걸린 붉은 천을 접어 소매에 넣고 우물로 향했다.우물가에서는 붉은 댕기의 차례를 정하자는 말이 나왔다.옥련은 술독 마개를 무릎에 올려 세 줄의 금을 가렸고,초희는 젖은 실타래 끝을 거듭 비틀었다.월선이 빈 물동이를 뒤집어 놓자 둥근 바닥이 돌 위에서 한 번 울렸다.“한밤에 두 집이 댕기를 걸면 사내가 고르는 꼴이 되네.”“그러니 먼저 건 집부터 지키게 해야지요.”옥련의 말에 초희가 실타래를 내려놓았다.“먼저 건 사람이 밤까지 먼저 가진다는 법은 없소.문을 여는 때까지 마음은 바뀔 수 있지 않소.”월선은 뒤집어 둔 물동이 바닥에 손을 올렸다.“차례를 적는 순간 허락이 몫이 되고, 몫은 곧 빚이 되네.”옥련이 마개를 소매 아래로 밀었다.“그럼 먼저 건 사람 앞에서 다른 댕기가 흔들려도 보고만 있으란 말이오?”“보는 일과 빼앗는 일은 다르지.”연화는
“왜 연화의 이름은 문밖에 두고 오지 못하오?”이겸은 우물 턱의 세 번째 금과 연화를 번갈아 보았으나 대답하지 않았다.옥련은 마개를 집어 들었다.“입으로 부르지 않았다는 말은 하지 마시오.”웃음은 여전히 환했지만 마개를 쥔 손은 움직이지 않았다.옥련은 주막으로 돌아가 문을 닫기 전,세 줄의 금이 모두 보이도록 마개를 문턱 안쪽에 세워 두었다.연화는 물동이를 들었고 이겸이 길을 비키자 반대편으로 돌아갔다.그가 따라오지 않았는데도 걸음은 쉽게 느려지지 않았다.한낮의 대장간에서 난실은 망치 자루에 감았던 붉은 천을 풀고 있었다.숯가루가 밴 천은 문고리에 걸렸을 때보다 어두워졌고 가장자리에는 오래 쥔 자국이 남아 있었다.연화가 낫을 찾으러 들어오자 난실은 새 천을 덧대지 않고 같은 것을 다시 감았다.“버리지 않는구려.”“내가 고른 밤을 부끄러워하진 않아. 그렇다고 다시 열겠다는 표식으로 둘 생각도 없고.”난실은 망치를 들어 무게를 가늠한 뒤 매듭을 손바닥 아래로 돌렸다.연화의 소매 안에서 붉은 천 끝이 잠깐 드러나자 시선이 그곳에 머물렀다.“오늘 걸 셈이야?”“내가 정할 일이오.”“그래. 그러니까 다른 여자 말에 밀려 걸지는 마.”연화가 낫날을 천으로 감싸는 동안 이겸이 부러진 호미를 들고 들어왔다.난실은 호미보다 먼저 그의 빈 허리를 보았다.칼은 없었고 초희가 갈아 준 검은 끈 자국만 도포 위에 남아 있었다.“연화가 댕기를 걸면 좋겠나?”이겸은 연화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그대가 원해서 건다면.”난실은 망치를 모루 위에 내려놓았다.“자네가 받아도 되는 마음인지까지 고르겠다는 소리로 들리는데.”“다른 여자에게 상처받아 여는 문이라면 기다리겠소.”“상처도 저 여자 마음이야. 자네가 골라 버릴 찌꺼기가 아니고.”연화는 낫을 품에 넣고 대장간을 나섰다.이겸의 발이 따라 움직였으나 난실이 부러진 호미를 그의 앞에 밀어 놓자 멈췄다.연화는 뒤돌아보지 않았고 소매 속 붉은 천만 더 깊이 밀어 넣었다.해가 기울 무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