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어젯밤, 왜 내 문 앞에 섰소?”
손가락 두 마디만큼 열린 문틈으로 연화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검지에 감긴 붉은 실과 빗장을 쥔 왼손만 희미한 등잔빛 아래 드러났고,
이겸은 대장간 문턱에 선 난실을 돌아보지 않은 채 그 손을 바라보았다.
연화의 손가락이 실을 감는 동작은 느리고,
손목의 맥박이 희미하게 뛰는 것이 문틈 사이로 느껴질 듯했다.
이겸의 시선이 그 손끝에 닿자,
자신의 몸 어딘가가 미세하게 달아오르는 감각이 있었다.
“옥련의 문이 닫힐 때 그대가 내 시선을 피하지 않았으니까.”
“한 번 눈이 마주친 것이 이유가 되오?”
“내게는 되었소.”
연화의 손끝이 빗장에서 미끄러졌다.
이겸은 가까이 다가가지 않았으나 젖은 돌바닥 위로 길게 뻗은 그림자는 문턱 바로 앞까지 닿아 있었고,
그 그림자가 연화의 발목을 스치는 듯한 긴장감이 문틈을 타고 흘렀다.
연화는 손바닥 안으로 붉은 실을 감추며, 손가락이 저리게 떨리는 것을 느꼈다.
“그것이 밤을 보낸 여자를 두고 내 문 앞에 설 까닭이오?”
“돌아서야 할 까닭은 되지 않았소.”
연화는 붉은 실을 손바닥 안으로 감추었다.
문이 닫힌 뒤 빗장이 한 번 내려앉았고,
잠시 후 다시 밀리는 소리가 들렸으나 문은 열리지 않았다.
그 문틈 사이로 스며드는 이겸의 체온이, 연화의 목덜미를 간질이는 듯했다.
이겸이 몸을 돌리자 난실은 손에 든 댕기를 문고리에 걸지 않은 채 대장간 안으로 들어갔다.
화덕의 열기가 열린 문을 타고 골목으로 번졌고,
그가 뒤따라오지 않자 어깨 너머로 물었다.
난실의 등줄기가 땀에 젖어 윤기 나게 반짝였다.
“대답은 끝났소?”
“들어오라는 말은 듣지 못했소.”
“내가 묻는 것은 그 여자의 문이 아니오.”
난실은 문을 열어 둔 채 붉은 댕기를 모루 옆에 내려놓았다.
그날 밤 댕기는 끝내 문고리에 걸리지 않았고,
이겸의 발소리도 어느 집 문턱에서 멎지 않았다.
난실의 손바닥이 모루를 짚는 순간,
손가락의 굳은살이 거칠게 문지르는 소리가 은밀하게 울렸다.
다음 날 해가 오르자 월선은 이겸을 마을 가운데 느티나무 아래 불러 세웠다.
옥련과 난실, 매향과 초희가 둘러섰고,
연화는 빨랫줄에서 걷어 온 무명천을 품에 안은 채 가장 뒤에 서 있었다.
가지런히 맞춰 쥐었던 모서리는 이겸의 시선이 닿을 때마다 조금씩 어긋났다.
연화의 가슴이 미세하게 들썩이며, 무명천 아래로 몸의 곡선이 드러날 듯 숨이 가빠졌다.
“댕기가 걸려도 여자가 문을 열기 전까지 기다리게.
마음을 거두면 이유를 묻지 말고, 해가 뜬 뒤에는 지난밤을 빚으로 만들지 말게.”
“지키겠소.”
“댕기가 없는 문은 두드리지 말게.
붉은 천이 걸렸더라도 여자가 직접 길을 내주기 전에는 문턱을 넘지 말고.”
이겸의 시선이 연화에게 향하자 월선이 그 사이로 걸음을 옮겼다.
연화는 이겸의 시선이 닿는 순간, 허벅지 안쪽이 뜨겁게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망월촌에 머물 생각이라면 먼저 이 규칙부터 몸에 익히게.”
“그 뒤에는 머물러도 되오?”
“그때까지 마을이 자네를 견딘다면.”
옥련이 짧게 웃자 머리에 묶인 붉은 댕기의 한쪽 끝이 귀 뒤로 흘러내렸다.
이겸은 더 묻지 않고 고개를 숙였고, 연화는 어긋난 무명천의 모서리를 품 안으로 감췄다.
그녀의 손가락이 천을 움켜쥐는 힘이, 은밀한 욕망을 드러내듯 세졌다.
한낮의 비가 그치자 난실은 대장간 화덕을 다시 살렸다.
연화는 맡겨 둔 낫을 찾으러 갔다가 문간에서 걸음을 멈췄다.
이겸이 풀무 손잡이를 당기고 있었고,
난실은 달아오른 쇠를 모루 위에 올려 망치를 내리쳤다.
불빛이 솟을 때마다 두 사람의 얼굴이 번갈아 드러났다.
난실의 팔 근육이 불빛에 비칠 때마다, 연화의 숨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낫을 찾으러 왔소.”
난실이 벽에 기대 둔 낫을 꺼냈다.
“날은 세웠으나 손잡이가 갈라졌소. 새 끈으로 묶어야 하오.”
“내가 하겠소.”
연화가 낫을 받아 들자 이겸이 갈라진 틈을 살피려 손을 내밀었다.
닿기 전에 낫을 품 안으로 당긴 것은 연화였고,
그 움직임을 먼저 본 것은 난실이었다.
연화의 품 안으로 당겨진 낫이,
그녀의 가슴을 스치는 듯한 긴장으로 이어졌다.
“저 사내 손은 싫다면서 보는 것은 괜찮소?”
“낫을 보았소.”
“낫은 그대 품에 있는데, 눈은 왜 풀무 쪽에 가 있소?”
연화는 대꾸하지 않고 대장간을 나섰다.
등 뒤에서 풀무가 다시 움직였고, 되살아난 불길이 대문 안까지 따라붙는 듯했다.
그녀의 등줄기가 뜨거운 바람에 젖은 듯 달아올랐다.
집으로 돌아온 연화는 낫 손잡이의 낡은 끈을 풀었다.
새 삼끈을 세 번 감아 매듭을 지었으나 자꾸 느슨해졌다.
그녀는 풀려 나오는 끈 끝을 손톱으로 갈라진 손잡이 틈에 억지로 밀어 넣었지만,
이겸이 난실의 손 가까이 풀무를 당기던 모습만 선명해졌다.
이겸의 손가락이 난실의 손목을 스치듯 가까워지던 그 순간이,
연화의 손끝을 저리게 만들었다.
결국 낫을 내려놓고 함을 열었다가 붉은 실을 보기도 전에 다시 닫았다.
함을 닫는 순간, 그녀의 손바닥이 자신의 허벅지를 스치며 은밀한 열기를 느꼈다.
해가 서쪽 담장에 걸리자 난실은 모루 옆에 두었던 붉은 댕기를 들고 밖으로 나왔다.
마른 천이 문고리에 걸리자 옥련은 주막 창을 열었고,
초희는 염색한 천을 걷던 손을 멈췄다.
난실의 손가락이 댕기를 거는 동작은 느리고 유혹적이었다.
연화는 대문 안에서 다시 낫 손잡이를 묶고 있었다.
매듭은 같은 자리에서 풀렸고, 함 속에 넣어 둔 붉은 실이 없는 손가락마저 저절로 오므라들었다.
그녀는 빗장을 확인한 뒤 돌아왔으나 문틈 아래로 대장간 불빛이 가느다랗게 스며들었다.
그 불빛이 연화의 몸을 훑는 듯, 피부가 간질였다.
이겸이 대장간 앞에 섰다. 난실은 문 안쪽에 선 채 길을 내주지 않았다.
난실의 숨결이 문틈으로 새어 나오며, 이겸의 목덜미를 간지럽혔다.
“어젯밤에는 마음이 같으면 오라 했소.”
“오늘도 같소?”
“그대가 문턱 앞에서 누구를 보고 있는지 확인한 뒤 정하겠소.”
이겸의 시선이 골목 끝으로 향했다.
연화의 문은 닫혀 있었으나 창호 위로 사람의 그림자가 움직였고,
빗장을 누른 손이 희미하게 비쳤다.
연화의 손가락이 빗장을 누르는 힘에, 그녀의 손목이 떨렸다.
난실은 손바닥의 굳은살을 엄지로 한 번 문질렀다.
기대한 곳에 머문 시선은 아니었으나,
그 때문에 자신의 선택까지 거둘 생각은 없는 듯했다.
난실의 손이 문을 여는 순간, 몸의 열기가 문틈을 타고 퍼져 나왔다.
“그대 눈이 다른 곳을 본다고 내 마음까지 따라갈 까닭은 없소.”
난실은 문고리에서 붉은 댕기를 풀어 이겸의 손바닥 위에 올려놓았다.
댕기의 천이 이겸의 손바닥을 스치며, 피부가 달아오르는 감촉을 남겼다.
“들어오시오.”
이겸은 문턱 앞에서 한 번 멈춘 뒤 대장간 안으로 들어갔다.
연화는 창호에서 물러나지 못했고,
난실은 문짝을 당기다 말고 그의 시선이 다시 골목 끝으로 향하는 것을 보았다.
난실의 손이 이겸의 팔을 잡아당기는 힘이, 은밀한 욕망으로 충만했다.
“이겸.”
그가 돌아보자 난실은 이겸의 손에 들린 붉은 댕기 끝까지 문 안으로 거두었다.
난실의 손이 이겸의 손목을 감싸며, 뜨거운 체온이 전해졌다.
“내 문을 넘고도 그 여자를 볼 셈이오?”
“그대는 내 선택도 놓을 수 있소?”붉은 천 끝에 붙은 불씨가 결을 타고 번졌다.이겸의 손이 들렸으나 문턱 앞에서 멎었고, 연화는 등잔 옆 물그릇을 바라보지 않았다.“불부터 끄시오.”“대답부터 하시오.”“놓고 싶지는 않소.”연화의 시선이 그에게 닿았다.“그러면서도 빼앗지는 않겠소. 태울지 말지는 그대가 정하시오.”불길이 손끝 가까이 다가오자 연화는 천을 물그릇에 떨어뜨렸다.치익 하는 소리와 함께 등잔불이 흔들렸고,젖은 붉은 천에서는 검게 탄 냄새가 올라왔다.이겸은 한 걸음도 다가오지 않았다.“놓고 싶지 않으면서 내 선택은 따른다니, 그 두 말이 함께 설 수 있소?”“그대가 나를 택하지 않아도 막지 않겠다는 뜻이오.”“막지 않는다고 놓은 것은 아니지 않소.”연화는 물그릇 가장자리에 번진 붉은 물을 닦지 않았다.탄 조각이 물속에서 풀릴 때마다 색은 옅어졌으나 검은 끝은 그대로 남았다.그녀는 천을 꺼내려다 다시 잠기게 했고,이겸의 발소리가 사라진 뒤에야 두 손으로 건져 냈다.젖은 천을 문 안쪽에 펼치자 물이 문턱을 타고 골목으로 흘렀다.붉은 물이 돌틈에 고였다가 천천히 번졌다.연화는 그 자국이 골목 끝까지 흐르지 않는 것을 확인한 뒤에야 문에서 물러섰다.등잔에는 탄내가 오래 남아 있었다.새 빗장이 걸린 뒤 이겸은 닫힌 문 앞에 머물지 않았다.아침이 밝자 탄 자국은 붉은 천의 한쪽 귀를 검게 오므려 놓았다.연화는 잘라 내지 않고 마당 빨랫줄에 걸었다.밤새 물에 젖은 소매도 함께 널었고,월선은 빈 바구니를 들고 들어오다 두 천을 번갈아 보았다.“태웠구먼.”“끝까지 태우지는 못했소.”“못한 것인지, 안 한 것인지부터 정해야겠네.”월선은 마루 끝에 놓인 방석을 털었다.먼지가 햇빛 속으로 일었다가 빈자리 위에 다시 내려앉았다.“문을 열면 누군가 다칠 것이고, 닫으면 그대가 다치오. 어느 쪽이 덜 나쁜지 골라야 하는 것이오?”“죄 없는 선택만 찾으면 아무것도 고르지 못하지.”“그러면 다치게 해도 된다는 말이오?”
“왜 그대가 기다리는 문은 늘 연화의 것이오?”옥련은 사람 하나 지날 틈을 손바닥 너비까지 좁힌 채 이겸의 대답을 기다렸다.맞은편 창호의 어둠이 그의 어깨 너머에 남아 있었고, 연화는 그 틈에서 물러나지 않았다.“그 문은 아직 나를 부르지 않았소.”옥련의 웃음이 멎었다가 더 환하게 번졌다.“먼저 연 문은 기억하고, 열리지 않은 문은 기다리는구려.”그녀는 붉은 댕기를 안으로 잡아당기고 문을 닫았다.빗장이 걸리는 소리가 골목을 건넜고, 이겸은 닫힌 문 앞에 머물지 않았다.묵는 방으로 향하는 길은 연화의 집 앞을 지났으나 그는 고개를 들지 않았다.연화도 창호를 닫았지만 바느질함은 밤새 열린 채였다.닫힌 주막 문 아래로 등잔빛이 새어 나왔으나, 그 뒤로 주막 앞에 멎는 발소리는 없었다.이튿날 염색집 솥 아래에서는 젖은 장작이 연기를 토했다.초희는 쪽빛 천을 걷어 내고 두 밤 전 접어 쥔 붉은 댕기를 화덕 가까이 가져갔다.끝자락이 열기에 오그라들자 연화가 천의 반대편을 붙잡았다.“무엇을 하려는 것이오?”“태우면 다시 걸지 않을 것 같았소.”“태운다고 그대가 연 문까지 없어지지는 않소.”“없애려는 것이 아니오.”초희는 천을 놓지 않은 채 불길을 바라보았다.“또 열까 봐 그러는 것이오.”연화의 손등과 초희의 손등이 천 위에서 맞닿았다.초희는 먼저 손을 거두지 않았고, 연화도 댕기를 빼앗지 않았다.화덕의 연기가 두 사람 사이를 지나간 뒤에야 초희가 천을 불에서 멀리 옮겼다.“그날 밤을 후회하오?”“내가 문을 연 일을 남의 탓으로 돌리지는 않소.”초희는 검게 오그라든 끝을 가위로 잘랐다.“다만 그 사람이 내 앞에 있어도, 나를 지나 연화를 보는 순간까지 다시 견딜까 봐 두렵소.”잘린 붉은 조각이 연화의 치맛단 앞에 떨어졌다.그녀는 그것을 집지 않고 한 걸음 물러섰다.초희는 남은 천을 길게 찢어 젖은 쪽빛 천 묶음에 감았다.불에 그을린 조각만 화덕 앞에 남았다.한낮에 이겸이 염색을 마친 베 꾸러미를 옮기러 왔다.초희는
“그럴 줄 알면서 문을 연 나는 무엇이 다르오?”연화에게는 초희의 마지막 말이 들리지 않았다.문 안쪽으로 물러선 입술과 다시 접히는 붉은 천만 보였고,이겸은 문턱을 넘지 않은 채 한동안 움직이지 않았다.초희가 문을 닫자 그제야 골목으로 나왔지만 연화 쪽으로 다가오지는 않았다.비뚤어진 도포 고름에 감긴 쪽빛 실이 새벽 안개 속에서도 또렷했다.연화는 물동이를 들고 먼저 돌아섰다.이겸의 발소리가 뒤에서 같은 방향으로 이어지다가 갈림길에서 멎었으나 확인하려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집에 닿아 물을 항아리에 붓는 동안 절반이 바닥으로 흘렀고,젖은 치맛단이 발목에 붙은 뒤에야 물동이가 기울었다는 것을 알았다.한낮의 주막 마당에는 빨래한 술거름베가 길게 널렸다.베 아래를 지나던 이겸의 도포 고름에 쪽빛 실이 감겨 있었다.옥련의 시선이 그곳에 잠시 멎었으나 초희의 이름은 입에 올리지 않았다.대신 상 아래 두었던 술독 마개를 꺼내 세 줄의 금을 손톱으로 훑었다.“밤의 차례를 정하지 않겠다면서, 지난 밤은 자꾸 늘어나는군.”월선은 젖은 베의 안팎을 뒤집어 널었다.“문을 연 수가 권리가 되는 순간부터 밤은 빚이 되네.”“빚을 달라는 게 아니오. 처음이 사라지는 게 싫은 거요.”초희는 물에 헹군 쪽빛 천을 들고 마당에 들어섰다.어젯밤 접어 쥐었던 댕기는 보이지 않았고 소매 끝만 평소보다 단단히 여며져 있었다.“처음이었다고 마지막까지 먼저인 것은 아니오.”옥련은 웃었으나 마개를 감춘 손은 풀지 않았다.“마지막을 탐낸 적은 없소. 먼저였다는 사실까지 남의 눈치를 보며 지워야 하오?”연화는 술거름베의 물기를 짜다가 손을 놓았다.젖은 천이 대야 안으로 떨어지며 물을 튀겼고, 초희는 제 치맛단에 번진 방울을 털지 않았다.이겸이 빈 술독을 들고 마당으로 들어오자 옥련은 세 줄의 금을 가리지 않았다.“당신도 기억하오? 내가 먼저였소.”“기억하오.”“그런데 왜 첫 문보다 열리지 않은 문을 더 오래 보오?”이겸의 시선이 연화에게 향하기 전에 그녀가
“아니면 다른 문을 넘을 때마다 아파 줄 내 마음이오?”이겸은 약즙이 밴 손등을 내려다보았다.매향은 문턱 안에서 붉은 끈을 주워 들었고, 연화의 손바닥에는 쑥가루가 그대로 남아 있었다.“그대가 아무렇지 않다면 내가 그대에게 아무것도 아닌 듯하오.”“그러니 내 아픔으로 그대 자리를 확인하려는 것이오?”“그대가 감추는 것을 모른 척하고 싶지 않았소.”“모른 척하지 않는 것과 들춰 보는 것은 다르오.”이겸은 대답하지 못했다. 연화는 손바닥을 털지 않고 돌아섰다.쑥가루가 걸음마다 조금씩 떨어졌고,집에 돌아와 차린 아침상에서는 밥이 두 술도 줄지 않았다.소매를 걷자 손등의 약빛이 드러났지만 연화는 물을 떠 놓고도 끝내 씻지 않았다.두레박 소리가 났으나 평소보다 늦게 문을 열었다.문 안쪽 못에는 거두어 둔 붉은 천이 걸려 있었고,바람도 없는데 끝자락이 비스듬히 접혀 있었다.한낮에 연화는 찢어진 소맷단을 들고 초희의 염색집을 찾았다.초희는 쪽물이 밴 실을 실패에 감다가 연화의 손등에 남은 초록빛을 보았다.묻지 않은 채 소매를 받아 펼쳤으나 같은 곳을 두 번 꿰맨 뒤에야 실을 잘라 냈다.상에는 쪽빛 실패와 붉은 실패가 나란히 놓여 있었다.“잠을 못 잤소?”“바느질이 마음에 들지 않소?”“그대 손이 아니라 내 손이 흔들린 것이오.”초희는 잘못 든 바늘땀을 뜯었다.연화는 상 아래 놓인 낡은 검은 끈 한 토막을 보았다.곁에는 약즙이 묻은 도포 소매가 놓여 있었다.“그 사람이 다녀갔소?”“옷만 맡기고 갔소.”“밤의 흔적까지 그대가 지워 주는구려.”초희의 바늘이 천 위에서 멎었다.“지우는 것이 아니라 꿰매는 것이오. 남은 자국은 그 사람 몫이고.”초희는 바늘귀에 실을 꿰려다 놓쳤다.실끝을 눌러 가늘게 만든 뒤 밀어 넣었고,도포를 접으면서도 약즙이 밴 부분을 안쪽으로 숨기지 않았다.연화도 약방에서 묻은 것이냐고 묻지 않았다.두 사람 사이에서는 쪽빛 실만 길게 당겨졌다.잠시 뒤 이겸이 도포를 찾으러 왔다.그는 문턱 밖에 서
“아니면 내 문을 넘지 않은 그대 자신이오?”이겸의 손이 문설주 앞에서 내려갔다.문턱에 걸친 붉은 천은 안으로도 밖으로도 떨어지지 않은 채 두 사람 사이를 가르고 있었다.그 천 끝이 연화의 손가락을 스치듯 흔들리며,이겸의 숨결이 문밖으로 스며 나오는 듯한 긴장이 두 사람 사이를 조였다.“그대가 무너진 틈을 타고 들어가고 싶지 않았소.”“무너졌는지는 내가 정하오.”“아침이 되면 그대가 스스로를 미워할 것 같았소.”“그 미움까지 그대가 대신 짊어질 셈이오?”연화는 붉은 천을 거두어 문 안으로 끌어당겼다.새 빗장이 걸리는 소리가 났고, 이겸은 닫힌 문 앞에 머물지 않았다.발소리는 곧장 골목 끝으로 멀어졌지만 연화는 등잔이 다 타도록 천을 접지 못했다.손끝이 천의 매끄러운 감촉에 계속 머물렀고, 그 촉감이 몸 안쪽까지 퍼지는 듯했다.문 안에서는 밥그릇의 뚜껑이 기울어 있었고 바느질감에는 바늘 하나 꽂히지 않았다.연화는 붉은 천을 무릎 위에 펼쳤다가 다시 접었으며,닭이 울고서야 문 안쪽 못에 걸었다. 천이 무릎을 스칠 때마다 몸이 미세하게 반응했다.아침이 밝자 연화는 못에 걸린 붉은 천을 접어 소매에 넣고 우물로 향했다.우물가에서는 붉은 댕기의 차례를 정하자는 말이 나왔다.옥련은 술독 마개를 무릎에 올려 세 줄의 금을 가렸고,초희는 젖은 실타래 끝을 거듭 비틀었다.월선이 빈 물동이를 뒤집어 놓자 둥근 바닥이 돌 위에서 한 번 울렸다.“한밤에 두 집이 댕기를 걸면 사내가 고르는 꼴이 되네.”“그러니 먼저 건 집부터 지키게 해야지요.”옥련의 말에 초희가 실타래를 내려놓았다.“먼저 건 사람이 밤까지 먼저 가진다는 법은 없소.문을 여는 때까지 마음은 바뀔 수 있지 않소.”월선은 뒤집어 둔 물동이 바닥에 손을 올렸다.“차례를 적는 순간 허락이 몫이 되고, 몫은 곧 빚이 되네.”옥련이 마개를 소매 아래로 밀었다.“그럼 먼저 건 사람 앞에서 다른 댕기가 흔들려도 보고만 있으란 말이오?”“보는 일과 빼앗는 일은 다르지.”연화는
“왜 연화의 이름은 문밖에 두고 오지 못하오?”이겸은 우물 턱의 세 번째 금과 연화를 번갈아 보았으나 대답하지 않았다.옥련은 마개를 집어 들었다.“입으로 부르지 않았다는 말은 하지 마시오.”웃음은 여전히 환했지만 마개를 쥔 손은 움직이지 않았다.옥련은 주막으로 돌아가 문을 닫기 전,세 줄의 금이 모두 보이도록 마개를 문턱 안쪽에 세워 두었다.연화는 물동이를 들었고 이겸이 길을 비키자 반대편으로 돌아갔다.그가 따라오지 않았는데도 걸음은 쉽게 느려지지 않았다.한낮의 대장간에서 난실은 망치 자루에 감았던 붉은 천을 풀고 있었다.숯가루가 밴 천은 문고리에 걸렸을 때보다 어두워졌고 가장자리에는 오래 쥔 자국이 남아 있었다.연화가 낫을 찾으러 들어오자 난실은 새 천을 덧대지 않고 같은 것을 다시 감았다.“버리지 않는구려.”“내가 고른 밤을 부끄러워하진 않아. 그렇다고 다시 열겠다는 표식으로 둘 생각도 없고.”난실은 망치를 들어 무게를 가늠한 뒤 매듭을 손바닥 아래로 돌렸다.연화의 소매 안에서 붉은 천 끝이 잠깐 드러나자 시선이 그곳에 머물렀다.“오늘 걸 셈이야?”“내가 정할 일이오.”“그래. 그러니까 다른 여자 말에 밀려 걸지는 마.”연화가 낫날을 천으로 감싸는 동안 이겸이 부러진 호미를 들고 들어왔다.난실은 호미보다 먼저 그의 빈 허리를 보았다.칼은 없었고 초희가 갈아 준 검은 끈 자국만 도포 위에 남아 있었다.“연화가 댕기를 걸면 좋겠나?”이겸은 연화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그대가 원해서 건다면.”난실은 망치를 모루 위에 내려놓았다.“자네가 받아도 되는 마음인지까지 고르겠다는 소리로 들리는데.”“다른 여자에게 상처받아 여는 문이라면 기다리겠소.”“상처도 저 여자 마음이야. 자네가 골라 버릴 찌꺼기가 아니고.”연화는 낫을 품에 넣고 대장간을 나섰다.이겸의 발이 따라 움직였으나 난실이 부러진 호미를 그의 앞에 밀어 놓자 멈췄다.연화는 뒤돌아보지 않았고 소매 속 붉은 천만 더 깊이 밀어 넣었다.해가 기울 무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