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우리집 지하실엔 특별한 아이가 살았다. 성도 없이 불리던 이름, '유 영'. 누구도 가족이라 부르지 않았지만, 준호에게 만큼은 특별했다. 작고도 겁이 많던, 예쁘지만 웃지 않던, 아무리 아파도 울지 않던 그런 아이. 그런 영이가 열 네 살이 되던 해, 아무런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준호는 그제야 깨달았다. '나는 공범이구나, 공범이었어.' 그리고 십 년 뒤, 영이를 찾았다. 아니, 끝끝내 찾아냈다. 문제는 자신이 알던 모습이 아니었다는 것. 아무 것도 모른 채, 말도 안 되는 끔찍한 일에 놀아나고 있었다는 것. 그때부터 준호는 달라졌다. 살아있는 한, 아버지를 용서하는 일은 기필코 없을 것이다.
View More“유영! 영아...!”
정신없이 집안을 헤집었다. 열려 있던 방문을 하나씩 확인하고, 지하실을 들락거린지 삼십여 분.
아무 대답이 없다는 걸 알면서도 이름을 부르는 걸 멈출 수 없었다. 더 이상 그 아이를 볼 수 없다는 사실에 세상이 와르르 무너지는 기분이었다.“영아..!”
얼마나 애타게 불렀는지, 목이 잔뜩 쉬어가고 있었다. 교복 넥타이는 헐겁게 풀렸고, 거실 슬리퍼는 한쪽만이 위태롭게 발을 감쌌다.
그때였다.
“신준호!”
어머니의 비명 같은 목소리가 집안을 갈랐다.
숙경은 거실 한가운데 서서 아들의 옷깃을 꽉 움켜쥐었다. 얼굴은 창백했고, 입술은 떨렸고, 눈동자는 이미 결론에 닿아있었다.
“정신 차려! 어차피 떠날 아이였어!”
준호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방금 들은 말을 뇌가 제대로 처리하지 못한 그런 얼굴.
“그게 지금 하실 말씀이에요? 고작 열네 살이에요. 열네 살이요!”
처음 보는 아들의 모습에 저도 모르게 시선을 피했다. 그 짧은 순간이 이미 대답보다 더 많은 걸 말해주고 있었다.
지금 와서 그 아이의 나이는 중요하지 않았다. 어차피 보내야 했고, 하루 빨리 보내길 바랐고, 사실은 내내 끔찍하고 소름까지 끼쳤다.
맞다. 아들의 말처럼 그 아이는 열네 살이다. 하지만 그 나이는 숙경에겐 완전히 다른 의미였다.
처음부터 어디서 굴러왔는지도 모르는 아이. 14년이나 먹여주고 재워주고 돌봐줬으면 그걸로 됐잖아. 이미 충분하잖아.
분을 못 이겨 씩씩거리던 준호가 거실 한켠을 바라보았다.
아버지 신태호는 이 사달에도 소파에 앉아 신문을 넘기고 있었다. 손놀림은 느긋했고 표정은 덤덤했다.
그 모습에 속이 서늘하게 뒤집혔다.
“아버지.”
텁, 신문이 접히는 소리가 들렸다. 태호는 준호에게 시선 하나 주지 않고 안방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소란 피울 일 아니다.”
“소란이요? 지금 소란이라고 하셨어요?” “쟤 좀 치워.” “여보!”숙경의 목소리가 뒤늦게 터졌지만 이미 늦었다. 닫혀있던 방문이 벌컥 열리며 동생 보람이마저 잔뜩 구겨진 얼굴을 내밀었다.
“또 뭔데? 곧 기말인 거 몰라서 이래?”
짜증이 가득한 목소리에, 준호는 깨달았다.
이 집에서 영이가 사라진 건, 사건이 아니라 불편한 진실에 불과하다는걸. 어차피 처음부터 정해져 있던 결말이라는걸.
기가 막혀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사람 하나가 사라졌는데, 기말고사 이야기나 하고 있는 동생의 모습은 이미 사람이 아니었다.
“다들 지긋지긋해.”
보람이 보란 듯이 코웃음을 쳤다.
“설마 그 기지배 때문에 그래? 그래서 시험 기간에 이 난리를 치는 거야?”
“신보람. 그 입 안 닥쳐?” “오빠가 걔를 언제부터 그렇게 챙겼다고? 가식 좀 그만 떨어.”거실엔 이내 정적이 내려앉았다.
아무도 보람을 말리지 않았다. 아무도 그 말이 틀렸다고 하지 않았다. 그게 더 끔찍했다.
“그래. 이제 좆같은 가식은 그만 떨어야겠네.”
***
준호는 그날의 기억이 여전히 선명하다.
고3. 마지막 기말고사를 앞둔 어느 날이었다.
하굣길, 그날도 편의점에 들러 젤리를 샀다. 영이가 좋아하는 복숭아 맛 젤리.
교복 안주머니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는 평범했다. 너무도 평범해서 아무렇지 않았다.
하지만 집으로 들어서는 순간 분위기가 달랐다.
어머니는 웃음을 흘리며 저녁상을 차리고 있었고, 콧노래마저 흥얼거렸다.
꼭 무언가에 해방된 것처럼, 행복해 보이기까지 했다.
이런 모습은 본 적이 없는데. 너무도 이질적인 풍경이었다.
“엄마, 무슨 일 있어요?”
갑작스러운 준호의 물음에 숙경이 화들짝 놀라 뒤를 돌았다. 그리곤 괜스레 분주하게 접시들을 옮기기 시작했다.
모든 게 부자연스러웠다. 모든 게 평소답지 않았다.
“어, 어... 준호 왔어? 얼른 앉아. 배고프겠다.”
“잠깐만요.”늘 그랬던 것처럼, 준호의 발걸음은 자연스레 계단 옆에 위치한 문 쪽으로 향했다.
지하실로 내려가는 계단, 영이가 있는 곳.
문고리를 잡아 돌리려는 순간, 어머니의 목소리가 등 뒤로 떨어졌다.
“걔 없어!”
“네?” “없다고. 그러니까 더는 기억도 생각도 하지 마.”그렇게 영이는 연기처럼 사라졌다.
남아있는 짐도, 마지막 인사도 없었다. 어제까지 그 자리에 있던 아이가 끔찍한 설명 하나로 지워져 버렸다.
그 아이를 어떻게 잊으란 소리지? 그건 이미 불가능한데.
부모님은 자식 없는 부잣집에 입양을 갔다는 똑같은 대사로 입을 맞춘듯했지만, 애초부터 그건 말이 되지 않았다.
아니, 성립할 수 없었다.
아버지 주변에는 다 자란 열네 살짜리 아이를 입양할 만큼 마음 넓은 인간이 없었으니까.
게다가 가끔 집에 드나들던 어른들은 하나같이 영이를 찾으면서도, 동시에 꺼렸다.
노골적으로 말하지 않아도, 표정과 시선이 먼저 답을 내놨다. 소름 끼친다. 그 말이 가장 어울렸다.
그날 밤, 준호는 지하실 문 앞에 한참을 서 있었다.
손에 쥔 젤 리가 눅눅해지며 복숭아 향이 진득하게 새어 나왔다.
달콤한 향기가 진실을 알려주었다.
자신도 그들과 다르지 않다는걸, 이곳에 영이가 있다는 사실을 처음부터 자연스레 여겨왔던 공범이었다는걸.
“다 알고 있었잖아. 영이는 내내... 갇혀 있었다는 걸.”
그때, 영이가 무언가 생각난 듯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러고는 주방으로 향해 머그컵을 가지고 자리로 돌아오더니, 석현을 향해 내밀며 이리저리 움직였다.“이거 봐요. 인터넷으로 처음 산 물건이에요.”“컵이네? 영이 거야?”“아니요. 준호 오빠 거요. 오빠가 손이 커서 손잡이가 큰 컵이 필요했거든요.”“야.... 신준호... 좋겠다..... 부럽다.”준호는 괜히 컵을 들어 올려 손에 쥐어봤다.손가락이 자연스럽게 들어갔고, 힘을 줄 필요도 없었다. 영이가 말한 그대로였다. 딱 맞는다는 말이 이렇게 정확할 수 있나 싶을 정도로.“마음껏 부러워하거라.”“얄미워 죽겠네.”투덜대는 석현을 두고, 영이는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봤다.눈동자가 바쁘게 오가는 게, 꼭 상황을 파악하려는 얼굴이었다.“오빠도 필요해요?”“오빠도 사 줄 거야?”준호의 목소리가 버럭, 평소보다 훨씬 크게 튀어나왔다.“안 돼!”석현이 준호를 향해 눈을 좁혔다.저 속 좁은 자식 같으니라고. 저 치사한 자식 같으니라고. 영이는 눈이 동그래졌다. “왜? 석현 오빠는 사주면 안 되는 거야?”“어, 저 자식은 집에 컵이 100개나 있어. 나보다 손도 훨씬 더 작고.”스스로가 생각해도 유치한 질투심. 다행히도 석현은 별다른 의심이 없어 보였다.“와, 다른 사람도 아닌 네가 이런 식으로 쪼잔하게 굴 줄은 진짜 몰랐다.”“미안해요. 준호 오빠가 안된다면 안 되는 거예요.”석현이 결국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됐다, 됐어.”한숨처럼 웃고는 이내 자리에서 일어났다.“이만 간다.”영이가 곧바로 따라 일어났다.“오빠... 화났어요?”“아니 아니, 저녁도 먹었고 끝내주는 타자 구경도 했으니까. 오빠도 이제 집에 가야지.”“정말 화난 거 아니죠?”“조금 삐치긴 했는데, 괜찮아.”그 말에 영이의 표정이 시무룩해졌다. 금방이라도 죄를 지은 사람처럼, 얼굴에는 걱정이 가득 번졌다.“강석현, 적당히 해라. 괜히 영이 신경 쓰이게.”“뭐! 삐친 거 맞거든?”“어떡해
식탁에 둘러앉아 식사를 이어가던 중, 영이가 석현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시선이 너무 노골적이라 석현이 먼저 눈치를 챘다.“영아? 혹시 내 얼굴에 뭐 묻었어?”그 순간이었다. 영이의 입꼬리가 스르륵 올라갔다.아니, 스르륵이 아니라 활짝이었다. 입이 귀에 걸릴 듯한, 숨길 생각조차 없는 웃음. 처음이었다. 영이가 그렇게 웃는 건.“축하해요.”“응? 그게 무슨 소리야?”갑작스러우면서도 알 수 없는 말에 준호와 석현은 고개를 갸웃했다. 하지만 영이는 자꾸만 웃기만 했다.마치 지금 이 순간이 너무 재미있고, 기분 좋아서 어쩔 줄 모르겠다는 얼굴로.“기분 좋은 물벼락.”“물벼락?”“여기까지만요.”준호는 알았다. 영이가 방금 무언가를 봤구나.그 미래라는 것. 석현에게 조만간 닥칠 일. 그걸 본 것이 틀림 없었다.하지만 분명히 나쁜 기척은 아니었다. 그래서 별다른 의미를 부여하지 않기로 했다. “강석현, 복받은 줄 알아라.”“이게 다 무슨 소리인데!”“영이가 그렇다면 그런 줄 알아.”순간, 석현의 머릿속에도 준호가 했던 말이 스쳐 지나갔다. 영이는 미래를 본다고. 그게 산속에 갇힌 이유 같다고. 어느 날 그런 말을 했던 적이 있었지. 기분 좋은 물벼락이 뭔지는 하나도 이해되지 않았지만, 그 역시도 자세히 묻고 실지 않았다. 지금은 그게 맞는 것 같았다. “와~ 영아! 웃으니까 더 예쁘네.”그제야 영이의 미소가 조금씩 옅어졌다. 자신도 모르게 지었던 미소가 갑자기 민망해진 탓이었다. 문제는 준호는 석현의 입에서 튀어나온 예쁘다는 말이 신경쓰여 죽겠다는 것.“예쁘다는 말 금지다.”“야, 진짜 남매처럼 굴어. 보통은 눈깔이 삐었냐고 반응하는 게 정상이야.”진짜 남매. 그 말에 준호는 입이 다물렸고, 영이는 고개를 갸웃거렸다.“남매 아닌데요?”생각지도 못한 말에 석현은 당황한 듯 준호를 바라보았고, 준호는 어색하게 웃으며 상황을 무마했다.“영, 영아. 물 줄까?”영이가 고개를 살짝 끄덕이자, 식탁 위에는 다시 젓가락 소
아무리 좋아 죽겠어도, 당장이라도 침실로 달려가고 싶어도.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정확한 설명이 필요했다.“맞아. 어떤 일은 정말 시간이 해결해 주기도 해. 근데, 이 말이 상처가 되는 건 타이밍 때문이야.”“타이밍?”“응. 들은 사람이 하필 가장 아픈 순간일 때. 그때는 아무것도 하지 말라는, 혹은 아무것도 해주지 않겠다는 뜻으로 들릴 수도 있으니까.”“뭔지 알겠어. 위로가 아니라 미루는 말이라 그런 거구나.”“맞아.”영이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생각에 잠긴 얼굴로 화면을 바라봤다가, 다시 고개를 돌려 준호를 올려다봤다.“나한테 이 말이 지금 괜찮았던 건, 힘든 순간이 다 끝난 다음이라서 그랬었나 봐.”마음이 묵직하게 내려앉았다. 왠지 모르게 영이의 말이 준호에게도 위로가 됐다. 이미 끝난 아픔을 돌아보며 덤덤한 말로 내뱉는 것.도망치지 않고, 미화하지도 않고, 그냥 그랬다고 인정하는 것. 그것보다 확실한 치유가 또 어디 있을까.“영아. 너 혹시 천재야?”“응?”“우리 영이 천재야. 천재가 분명해.” 영이는 당황한 듯 눈만 깜빡였지만, 준호는 확신했다.남들이 뭐라고 하든 상관없다. 지금 이 순간부터 자신은 팔불출이다. 영이 한정, 꽤나 지독하고 평생 바뀌지 않을 그런 팔불출.“오빠, 가짜 오빠는 또 안 와?”“왜. 보고 싶어?”“그냥. 가짜 오빠 덕분에 노트북이 많은 걸 알려주니까.”“영이가 직접 전화해 봐.”핸드폰 잠금을 풀어 건네주자, 손가락이 화면 위에서 어색하게 미끄러졌다.그리고 주소록을 여는 순간, 화면을 가득 채운 이름들에 두 눈이 동그래졌다.“왜 이렇게 많아?”“검색창에 이름 적어 봐. 영이가 직접.”“이름이.... 아 맞다. 강석현이랬어.”석현의 이름이 뜨자, 영이는 망설임 없이 통화 버튼을 눌렀다. 준호는 살짝 손을 뻗어 스피커폰으로 설정을 바꿨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익숙한 목소리가 집 안에 울렸다.“왜. 농땡이 씨.”“가짜 오빠. 저 영이에요.”이번에도 석현의 목소리가 단숨에
주문 완료 화면이 뜨자, 영이는 화면을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받는 사람 이름 유영, 그 아래에 적힌 선명한 집 주소까지.“기다릴 게 생겼어.”“컵?”“응. 내일이 조금 빨리 와도 좋을 것 같아.”기대감이 잔뜩 담긴 말투와 표정이 얼마나 귀엽던지. 하루하루 달라지는 영이의 모습에 ‘키울맛이 난다’는 생각이 스치자, 준호는 어이가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앞으로 필요한 건 이렇게 쇼핑하면 돼.”“난 오빠랑 마트 가는 게 더 좋은데.”“응, 당연히 마트도 가고.”영이가 눈을 반짝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그러더니, 컵이 올 자리를 이미 머릿속에 그려둔 사람처럼 주방 쪽을 힐끔 바라보았다.“오빠, 새 컵 오면 내가 커피 타줄게.”“엄청 기대되네?”“응. 엄청 엄청 맛있게.”***다음날 오후, 회의를 막 마치고 한숨을 돌리던 중 주머니 속에서 짧은 진동이 울렸다. 화면을 확인하자 영이에게 문자메시지 한 통이 와 있었다. - 오빠, 새 컵 왔어. 예쁘지?방금 막 도착한 머그컵 사진까지 첨부한 게, 이제는 핸드폰도 제법 능숙하게 쓰는 모양새였다.심지어 사진의 각도도, 초점도 나쁘지 않았다. - 응. 영이가 고른 거니까. - 근데 인터넷 보니까, 저녁에 마시는 커피는 안 좋대. 커피는 내일 아침에 타줄게.자꾸만 웃음이 났다. 별것 아닌 문장 하나가 하루를 가볍게 만드는 기분.그리고, 내일 아침이라는 말이 이렇게 자연스럽게 오가는 게 언제부터였나 싶어서.결국 재킷을 챙겨 자리에서 일어났다.오늘은 집에 조금 더 빨리 가고 싶어졌다. 커피는 내일이지만, 그냥 이유 없이 그래야 할 것 같았다.사무실을 나서자, 태블릿을 손에 든 석현이 다가왔다.당당했던 준호가 깜짝 놀랄만큼 정확한 타이밍.“대표님, 어디 가십니까?”“농땡이.”“야! 다음 주에 중요한 미팅 있는 거 몰라?”“알지. 근데 어여쁜 영이가 집에 혼자 있잖아.”지금의 신준호를 누가 말릴 수 있을까.아무것도 몰랐던 석현은 결국 직원이 아닌, 친구로서 봐주기로 했다.
지하실이라는 공간은 소리가 없다기보단 억눌린 공간 같았다.벽과 바닥에 스며든 습기, 낮은 천장, 숨을 깊이 들이마시면 가슴이 먼저 답답해지는 공기.먼지 쌓인 테이블 위, 아이를 조심스레 내려놓자 담요 사이로 아이의 얼굴이 드러났다.작았다. 모든 게 너무 작고 여려서 이런 공간과는 도무지 어울리지 않았다.“....”다시 한번 자신의 결정을 되짚었다. 6개월, 그 숫자를 머릿속에서 몇 번이고 되뇌었다.짧다면 짧은, 길다면 긴. 하지만 이 모든 일을 정리하기에 가장 안전한 기간.그때, 아이의 눈꺼풀이 열렸다. 형광등 불빛에
몇 시간 전, 하늘이 유독 흐렸다. 금방이라도 무언가가 쏟아질 것처럼 공기가 낮게 가라앉은 아침이었다.번듯한 제복을 차려입은 ‘신태호’의 어깨엔 오늘도 반짝이는 은색 별 하나가 박혀 있었다. 1성 장군(將軍), 준장을 의미하는 별.그의 아내 ‘이숙경’이 견장 위를 다정스레 어루만졌다. 손길엔 오래된 습관 같은 온도가 섞여 있었다.“여보, 오늘은 퇴근하고 바로 오실 거죠?”“응.”숙경은 더 묻지 않겠다는 듯 익숙한 미소를 지으며 남편을 배웅했다. 그건, 하루도 빼놓지 않는 익숙한 루틴이었다. 태호가 익숙한 듯 현관문을 열
한참을 멍하니 앉아있던 중, 침대 옆에 높인 협탁. 그 서랍을 무심코 열어보았다. 안에는 투명한 아크릴 케이스에 담긴 핸드폰이 가지런히 놓여있었다. 충전기는 연결되어 있었고, 화면은 어두웠다. 문제는 상자에 보란 듯이 채워진 자물쇠였다. 외부와의 소통을 아예 선택지에서 지워버린 방식임이 분명했다.“아....”그래서 스마트워치를 채운 거였구나. 그저 수신되는 전화만 받게 하려고.전화가 오면 지시를 듣고, 그 외의 세상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그렇게 사람 하나를 세상에서 완벽하게 고립시킨 거였다.준호는 다시 한번 영이의
묶는 걸 좋아한다니? 말 같지도 않은 말에 준호의 눈빛이 돌변했다. 그는 이성을 잃어버린듯 방 안을 헤집기 시작했고, 붙박이장 문을 여는 순간 그 자리에 돌처럼 굳어버렸다.안에는 수많은 성인 용품들이 즐비했고, 종류와 수가 그야말로 상상 이상이었다.영이는 입양된 게 아니었다. 누군가에 의해 이 곳에 가둬지고, 끔찍한 시간을 견뎌가며 죽지 못해 살아온 것이다.그리고, 준호는 그 누군가의 정체를 알 것 같았다.“오빠, 준호 오빠....!”욕설이 목구멍을 막아버렸다. 차마 내뱉지 못한 채 후들거리는 다리에 애써 힘을 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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