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새벽의 공기는 무겁고 끈적했다.
훈련소의 창문은 늘 닫혀 있었고,
바람은 커녕 소리조차 들어올 틈이 없었다.
밖은 세상이 아니라, 단절된 또 다른 지옥이었다.
그날, 수진은 평소보다 일찍 일어났다.
눈을 떴을 때 머리맡의 스피커에서는 아무 소리도 나오지 않았지만,
그녀는 스스로 몸을 일으켰다. 습관이었다.
몸보다 먼저 깨어나는 건 의식이 아니라, ‘두려움’이었다.
지각하면 벌을 받는다는 걸 이미 배워버렸으니까.
언니는 여전히 잠들어 있었다.
수민의 얼굴에는 깊은 피로가 깃들어 있었다.
그녀는 요 며칠 밤마다 깨어 있었고,
훈련소의 통신 라인을 살피는 모습을 보였다.
수진은 그것이 위험하다는 걸 알았다.
하지만 말리지 않았다.
그녀는 더 이상 언니에게 간섭할 자격이 없다고 느꼈다.
조용히 방을 나서자 복도는 차가웠다.
벽에는 언제나처럼 붉은 문장 하나가 붙어 있었다.
“목소리는 칼보다 빠르다.”
훈련실 문 앞에는 이미 조교들이 대기 중이었다.
오늘의 훈련 주제는 ‘실전 응용’.
아이들에게 주어진 미션은 실제 피해자를 만들어내는 것이었다.
그들의 통화는 녹음되어 분석되고, 성공 여부는 오직 ‘상대의 울음’으로 평가되었다.
흑거미가 들어왔다.
그녀는 오늘따라 유난히 밝은 색 옷을 입고 있었다.
흰 블라우스에 붉은 립스틱, 그녀의 미소는 어둠 속에서 더 또렷하게 빛났다.
“오늘부터 너희는 진짜다.”
그녀의 말에 아이들의 어깨가 굳었다.
“그동안은 연습이었지만, 오늘부턴 실전이다.
사람의 돈을, 마음을, 그리고 시간을 훔쳐야 한다.
하지만 절대 들켜선 안 된다. 거짓말의 핵심은 들키지 않는 거야.”
그녀의 시선이 수진을 향했다.
“린자오밍, 네 차례가 올 거야.”
그 이름이 불릴 때마다,
수진의 가슴속 어딘가가 서늘해졌다.
그 이름은 이제 그녀의 정체가 되어가고 있었다.
첫 번째, 두 번째, 세 번째 아이가 통화를 시작했지만, 결과는 모두 실패였다.
누군가는 너무 서툴게, 누군가는 너무 기계적으로 말했다.
상대는 아무 말 없이 전화를 끊었다.
흑거미의 입꼬리가 천천히 내려갔다.
“감정이 없어.”
“죄송합니다.”
“그 말 자체가 감정이야.”
그녀의 목소리가 칼처럼 날카로웠다.
그때, 흑거미의 손끝이 수진을 가리켰다.
“린자오밍. 너.”
수진은 숨을 삼켰다.
그녀의 손이 떨렸지만, 표정은 굳건했다.
“네, 지도자님.”
“스크립트는 자유야. 네가 생각하는 ‘달콤한 거짓말’을 해봐.”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전화기의 숫자를 눌렀다.
신호음이 세 번 울리고, 낮고 피곤한 남성의 목소리가 들렸다.
“여보세요?”
그녀는 아주 부드럽게 시작했다.
“안녕하세요, 고객님. ○○은행 보안팀입니다.”
“은행이요?”
“네, 최근 고객님의 계좌에서 비정상적인 송금이 감지되어 확인차 연락드렸습니다.”
“그런 적 없는데…”
“그럴 줄 알았어요. 그래서 이렇게 직접 전화드린 거예요.”
그녀의 목소리가 미세하게 낮아졌다.
“제가 도와드릴게요.”
남자의 숨소리가 느려졌다.
“어떻게 하면 되죠?”
“간단해요. 지금 안전계좌로 옮기기만 하시면 돼요. 제가… 옆에서 도와드릴게요.”
그녀는 마지막 단어를 아주 천천히, 속삭이듯 말했다.
그 순간, 통화실 내부의 공기가 달라졌다.
수민은 모니터를 통해 그 장면을 보고 있었다.
동생의 표정은 놀라울 만큼 침착했다.
눈빛엔 두려움도, 망설임도 없었다.
그녀는 완벽한 배우였다.
거짓을 진심처럼, 진심을 거짓처럼.
몇 분 후, 조교의 손에 들린 화면에 ‘이체 완료’ 메시지가 떴다.
남자가 마지막으로 말했다.
“정말 고맙습니다. 목소리가 참… 믿음직하시네요.”
수진은 미소 지었다.
“좋은 하루 되세요, 고객님.”
전화를 끊는 순간, 방 안의 정적이
무겁게 내려앉았다.
흑거미가 천천히 일어나 걸어왔다.
그녀의 손끝이 수진의 턱 아래에 닿았다.
“잘했어.”
그녀의 눈빛에는 냉정한 자부심이 깃들어 있었다.
“넌 이제 완벽하다. 네 목소리는 사람의 마음을 녹여버려.”
수진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대신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그녀의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지만,
그건 죄책감이 아니라… 이상한 쾌감이었다.
‘내가 한 말 한마디에, 한 사람이 움직였다.’
그 느낌은 살아있다는 실감처럼 그녀의 혈관을 타고 돌았다.
그날 밤, 수민은 훈련장 뒤편의 저장실에 숨어 있었다.
그녀는 시스템을 조작해 방금 통화 녹음 파일을 몰래 복사했다.
수진의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괜찮아요, 고객님. 제가 도와드릴게요.”
그녀는 파일을 듣는 내내 손이 떨렸다.
“이게… 진짜 수진의 목소리야?”
어디에도 어린 날의 따뜻한 음색은 남아있지 않았다.
그 목소리는 달콤했고, 위험했고, 중독성이 있었다.
그녀는 몰래 눈을 감았다.
“이대로 두면… 수진은 돌아오지 못해.”
며칠 뒤, 흑거미는 수진을 자신의 개인실로 불렀다.
그곳은 다른 공간들과 달랐다.
벽에는 붉은 비단 커튼이 드리워져 있었고,
천장에는 오래된 샹들리에가 걸려 있었다.
테이블 위에는 와인과 향초가 놓여 있었다.
그 향은 익숙하면서도 낯설었다.
“앉아.”
수진은 조심스레 자리에 앉았다.
흑거미는 잔을 채우며 말했다.
“네 목소리, 들을 때마다 기분이 좋아져. 거짓말인데 왜 이렇게 아름다울까?”
“그냥… 시키는 대로 한 것뿐이에요.”
“아니. 넌 달라. 넌 사람을 속이는 게 아니라, 사람을 ‘믿게’ 해.”
그녀는 잔을 들고 말했다.
“이건 상이다. 너 같은 아이는 드물어.”
“감사합니다.”
“린자오밍, 넌 앞으로 내 옆에 있게 될 거야.”
그 말에 수진의 어깨가 굳었다.
“제 옆…이요?”
“그래. 이제 너는 단순한 훈련생이 아니라, 나의 오른팔이야.
언젠가 네가 나를 대신하게 될지도 모르지.”
수진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는 잔을 들었지만, 와인은 입에 닿지 않았다.
그 향이 너무 진해서, 숨이 막힐 것 같았다.
그날 밤, 수민은 수진의 방으로 찾아왔다.
문을 열자 그녀는 불 꺼진 방 안에서 혼자 앉아 있었다.
탁자 위에는 꽃이 한 송이 놓여 있었다.
훈련소의 정원에서 몰래 꺾은 조화였다.
진짜 꽃이 아니라, 플라스틱이었다.
“그게 뭐야?”
“꽃이라니.”
“여기서 꽃은 금지잖아.”
“진짜 꽃이 아니니까 괜찮다니.”
“왜 그걸 여기에…”
“그냥, 예뻐서.”
수민은 조심스럽게 그녀 옆에 앉았다.
“오늘 일, 들었어.”
“…”
“수진아, 넌 잘못한 거야.”
“잘못이라니? 그건 훈련이라니.”
“그건 사람을 속인 거야.”
“언니… 사람은 원래 속는다니.
우린 그걸 알려주는 거뿐이다.”
그녀의 말은 너무 차분했다.
수민은 더 이상 설득할 말을 찾지 못했다.
“이건 너가 아니야.”
“맞다니. 이게 지금의 나라니.”
수진은 손에 들고 있던 조화를 바라봤다.
“이 꽃은 향도 없고, 생명도 없다니.
그래도 언니, 예쁘잖아.”
“그건… 가짜야.”
“가짜여도 예쁘다니. 세상 사람들도 진짜보다 가짜를 좋아한다니.”
그녀의 웃음이 너무 가벼워서, 오히려 슬펐다.
수민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일어섰다.
문을 닫는 순간, 수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언니, 나 이제 진심 같은 거 모르겠다니.”
밤이 깊어갈수록 창밖의 어둠은 점점 더 짙어졌다.
수진은 혼자 남은 방 안에서 조화를 바라보다가 불을 껐다.
완전한 어둠 속, 그녀는 속삭였다.
“달콤한 거짓말은 진짜보다 따뜻하다니.”
그녀의 눈가에 희미한 미소가 번졌다.
그리고 그 미소는, 다음 날 새벽 훈련소의 전광판에
떠오른 새로운 이름처럼 빛나는 거짓의 시작이었다.
새벽이었다.바람은 멎었지만, 어딘가에서 오래된 금속이 울리는 소리가 지하실의 습한 공기를 흔들었다.여진이 남긴 파일은 단 하나의 문장으로 시작됐다.“너희가 믿는 어떤 진실도, 이미 누군가의 거짓말 위에 세워져 있다.”수진은 말없이 화면을 바라보았다.그 문장은 죽은 사람의 목소리처럼 차갑게 번졌다.그녀의 눈동자에 희미한 떨림이 스쳤다.파일은 단순한 보고서가 아니었다.흑거미 조직 내부의 통신 기록,국정원이 삭제한 실험 아카이브,그리고 ‘LIN PROJECT’의 원본 설계도.거기엔 짧은 문구가 붉은색으로 강조돼 있었다.LZM-01: 김수진LZM-02: 김수민강혁의 숨이 짧게 멎었다.“……02가 네 언니였어.”수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대신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던 사실처럼 눈을 감았다.“우릴 만들었어.”그녀가 낮게 말했다.“목소리를 훔치는 기술, 기억을 조작하는 방식…우린 누군가가 설계한 ‘이름’이었어.”백사는 이를 악물고 모니터를 내리쳤다.“그럼 이 모든 게”“배신구의 작품이지.”강혁이 끝맺었다.그리고 마지막 화면이 떠올랐다.좌표: 해남 폐등대LZM KEY – ACCESS GRANTED그들은 동시에 시선을 들었다.오늘 밤, 끝이 열린다는 것을 모두가 알고 있었다.폐등대는 바람의 시체처럼 서 있었다.유리창은 오래전 깨졌고, 계단은 녹이 슬어 있었다.바다는 잿빛으로 일렁였고, 빛은 이미 사라진 지 오래였다.등대 아래, 숨겨진 문이 있었다.문 너머는 어둡고 길었다.마치 오래된 진실이 스스로를 숨기기 위해 만든 뱃속 같았다.배신구는 그 안쪽에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세상에서 제일 상냥한 얼굴로.“왔군.”백사가 총을 들이밀었다.그러나 배신구는 오히려 미소를 지었다.“너희는 아직 모르지? 왜 내가 수민을 죽여야 했는지.”수진의 눈빛이 흔들렸다.“수민은 LZM-02였어. 네가 LZM-01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 그리고… 널 지키려 반역을 선택했다.”그 한 문장이 수진의 가슴을 칼처럼 갈랐다
방 안의 공기가 완전히 식어갈 무렵, 수진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첫 번째 자가 사라진 자리엔 그 어떤 흔적도 없었다.피도, 체온도, 생의 마지막 경련조차도 남아 있지 않았다.마치 누군가가 시간이 지나기 전에 서둘러 지워버린 흔적처럼,그 자리는 처음부터 비어 있었던 것처럼 보였다.그러나 빈자리는 언제나 말이 많았다.침묵보다 많은 것을 말하는 구멍이었고 수진은 그 침묵의 모양을 오래 바라보았다.“나를… 지켜보고 있었나 봐.”그녀가 낮게 말했다.“언니 얼굴을 한 그 아이를 누가 만들었든, 그들은 내가 어디까지 갈지 알고 있었던 거지.”그녀의 목소리는 떨리지 않았지만 말끝이 희미하게 마른 숨에 잠겼다.강혁은 몇 걸음 뒤에서 그녀를 지켜보다가 무릎을 굽혀 그 빈자리에 손끝을 가져갔다. 차갑다.차갑다는 감각조차 빠르게 사라진다.“흔적이 너무 깨끗해.”그가 중얼거렸다.“흑거미도, 국정원도… 이런 방식은 안 써. 이건… 당신 언니 사건 이후로 우리가 놓친 세력이 있다는 뜻이야.”수진은 그의 말에 완전히 시선을 돌렸다.그녀는 그가 말한 ‘놓친 세력’이라는 단어에 수민의 그림자를 보았다.그림자는 오래전 폭설 속에서 사라진 언니의 모습을 따라갔고 그 뒤를 쫓는 자신의 뒷모습까지 포개어졌다.“배신구가 나한테 한 말이 있어.”수진은 잠시 망설였지만, 결국 꺼냈다.“언니가 죽기 전, 마지막으로 남긴 기록은 배신구에게 바로 가지 않았다고 했어.그 위에 누가 있었다고… 그 사람한테 먼저 보고가 들어갔다고.”강혁의 눈이 깊게 가라앉았다.그러나 놀라움보다는 이제 조각이 맞춰지는 느낌에 가까웠다.“그러니까 배신구도 꼭대기가 아니었다는 거지.”수진은 아주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그 끄덕임은 결심의 움직임이 아니었다.아직 반쯤은 상처였고, 나머지 반만 겨우 수면 위로 올라온 진실이었다.“난… 언니가 죽은 줄 알았던 밤부터 배신구만 보면 됐다고 생각했어.” 그녀가 말했다.“그 사람만 겨냥하면 모든 게 끝난다고… 그게 내 복수의 끝이라고… 그
바닥이 흔들린 뒤, 방 안에는 짧고 깊은 정적이 내려앉았다.먼지가 흩어지는 소리조차 크게 들릴 만큼 모든 공기가 갑자기 가벼워졌다.그러나 그 가벼움은 해방이 아니라 어딘가에서 차갑게 빠져나간 무게 때문이었다.봉인이 깨지자, 방 안의 온도는 서서히 떨어졌고첫 번째 자는 마치 실을 끊은 인형처럼 가볍게 무너졌다.그 움직임엔 생명도, 의지도 없었다.마지막까지도 ‘언니의 얼굴을 가진 껍데기’였다는 사실이 잔혹할 만큼 명확해졌다.수진은 그 모습을 똑바로 보지도 못했다.무너져가는 형체의 그림자가 바닥에 길게 늘어나자 그녀는 무의식적으로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눈앞이 흐려진 것도 아닌데 경계가 흐트러지는 느낌이 들었다.그녀의 손끝은 아직도 첫 번째 자의 팔을 잡았던 자세 그대로 굳어 있었고손바닥에 남아 있는 ‘가벼움’이 오히려 무거운 죄처럼 느껴졌다.강혁이 먼저 다가왔다.몸을 숙여 수진과 눈높이를 맞추려는 그의 움직임은아까의 전투에서 보여줬던 속도와 전혀 다른 느리고 조심스러운 것이었다.“수진.”그는 그 한 단어를 부르며 숨을 아주 천천히 들이켰다.그녀의 눈이 흔들렸다.흔들린 이유는 방금 전의 폭력도, 봉인의 붕괴도 아니었다.그녀를 부르는 그의 목소리에 두려움이, 안도감이, 미안함이 함께 묻혀 있었기 때문이었다.수진은 떨림을 억누르던 입술을 조금 씹었다.“괜찮아.”입에서 나온 말은 그녀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조용했다.“다 끝났어.”“끝난 게 아니야.”강혁은 고개를 저었다.“네가 혼자 감당하는 방식으로는… 아직 끝이 아니야.”그 말은 그녀의 가슴에 조용히 박혔다.그녀는 순간적으로 눈을 내리깔았지만시선이 떨어진 곳에는 첫 번째 자의 몸이 점점 흐릿해지는 흔적이 있었다.강혁이 그걸 보고 말을 멈췄다.수진도 고개를 들어 살폈다.첫 번째 자의 몸은, 흐릿해지는 것이 아니라 사라지고 있었다.피도, 살도, 무게도 남기지 않은 채 그저 빛이 빠져나가듯 처음부터 이곳에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이것은 흑거미의 기술도, 국정원의
첫 번째 자가 바닥을 가르며 뛰어드는 순간, 방의 공기가 단숨에 찢어졌다.금속이 긁히는 소리는 없었다.살이 공기를 헤치며 나아가는 날것의 속도만이 귀를 때렸다.강혁은 예상보다 훨씬 빠르게 몸을 낮췄다.그의 어깨와 팔 근육이 순간적으로 수축하면서첫 번째 자의 팔꿈치가 지나가는 궤적을 비켜냈다.팔꿈치 하나에 함부로 스친다면, 골절 정도가 아니라 관절 전체가 뒤틀려버릴 정도의 힘이었다.수진은 뒤에서 숨을 들이마셨다.정확하게 말하면, 들이마신 게 아니라 숨이 ‘절로’ 끊겼다.오랜 시간 몸으로 기억해버린 공포흑거미가 키운 아이들이 가진 공격 방식은 마음보다 몸이 먼저 알아본다.첫 번째 자의 발끝이 바닥을 스치며 강혁 쪽으로 돌아섰다.금속 같은 무게를 가진 움직임. 그러나 소리는 없다.소리 없는 움직임일수록 치명적인 훈련을 견딘 아이들이었다.강혁은 공격을 막지 않았다.대신 ‘흐르는 방향’에 몸을 맡겨 첫 번째 자의 깊이를 읽었다.흑거미의 방식은 모두가 알고 있었다.수진도, 강혁도.직접 막는 순간, 죽는다.부딪히는 힘이 아니라‘흐름’을 읽어야 한다.첫 번째 자가 두 번째로 공격을 내리찍었다.이번엔 손날이었다.목을 자르는 각도. 흑거미가 심장 다음으로 즐겨 노리던 부위.강혁은 뒤로 내딛으며 팔목을 피하려 했지만 완벽하게 피할 수는 없었다.손날이 스친 자리에서 피가 아주 얇게, 필름처럼 번졌다.“강혁!”수진의 목소리가 튀어나왔다.감정이 억눌려 있는 목소리.이름을 부르는 그 짧은 울림만으로 어린 연변 사투리가 조금 섞여 있었다.강혁은 대답하지 않았다.대신 몸을 비틀며 첫 번째 자의 손목을 잡았다.그러나 잡는 순간 깨달았다.힘이 너무 가볍다.사람의 팔을 잡은 느낌이 아니라깃털이 붙은 금속 막대를 잡은 것 같은 비현실적인 공허함.수진도 그걸 느낀 듯 숨이 멎은 얼굴로 중얼거렸다.“…몸이… 비어 있다…”바로 그 순간 첫 번째 자가 몸을 비틀어 강혁의 손을 빠져나갔다.움직임이 너무 빠르고 가볍게 돌아서 강혁의 중
강혁이 앞을 막아선 순간, 방 안의 온도는 더 낮아진 듯했다.그 차가움은 봉인의 압박 때문이 아니었다.수진의 가슴 깊은 곳에서 일어난 급격한 변온,마치 심장이 잘못된 기억을 찾아 맥박을 얼려버리는 듯한 느낌이었다.수민의 얼굴을 한 그 존재는 미세하게 고개를 기울이며 수진을 바라보았다.그 눈동자는 살아 있지도, 죽어 있지도 않았다.그저 ‘남겨진 껍질의 눈’처럼 조용히 흔들릴 뿐이었다.그런데 바로 그 침묵이 수진의 폐 안쪽을 파고들어 숨을 막았다.“자오밍.”그 존재는 한 번 더 그녀를 불렀다.수진은 무릎이 풀릴 것 같은 순간, 강혁의 손이 그녀의 팔을 붙잡았다.힘이 아니라 온기였다.지금 이 방에서 유일하게 ‘살아 있는 사람의 온기’.“수진. 네가 알고 있는 건 기억이고, 지금 저기 있는 건… 흑거미가 만든 윤곽이야.”그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단단했다.그러나 말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수진의 시야가 흔들렸다.눈앞에서 천천히 다가오는 얼굴이 과거의 어느 겨울밤과 겹쳐졌다.눈 속에 묻혀 있던 자매. 언니의 손.“자오밍, 언니한테 와.”그 목소리. 그 부름. 그 따뜻함을 가장한 잔인한 모조품.수진은 무의식적으로 한 발 나갔다.그러나 강혁이 그녀를 붙잡아 멈추게 했다.“가지 마.”그는 속삭였지만, 그 속삭임은 명령 같았다.“저건 너를 무너뜨리려고 만든 거야. 네가 언니를 잃은 그 순간을 다시 꺼내서, 네 마음을 갈라버리려는.”수진의 목 안에서 작은 숨이 튀어나왔다.“강혁… 내가… 언니 이름을… 들었어.”“그래. 너만 아는 거니까 흑거미가 더 노린 거야.”강혁이 수진의 눈을 바라보았다.“흑거미가 그걸 알아냈다는 건… 네 마음을 가장 아픈 데서 찌르려고 했다는 뜻이야.”그 존재는 여전히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수민의 얼굴. 그러나 수민에게 단 한 번도 없었던 ‘감정의 공백’이 있었다.그 공백이 수진의 심장을 칼처럼 찔렀다.“자오밍.”이번엔 한발 더 다가와서 불렀다.수민의 입 모양, 수민의 톤, 수민의 미세한 호
바닥이 아주 미세하게 울렸다.진동이라 부르기도 애매한, 그러나 ‘몸이 먼저 느끼는 종류의 진동’이었다.지하 흙층이 아닌, 철골이 흔들릴 때 나는 낯선 떨림.수진은 귀 아래까지 심장이 치밀어 오르는 걸 느끼면서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말을 내뱉으면, 그 순간 들이킨 숨의 떨림이 자신의 공포를 그대로 드러낼 것 같아서였다.강혁은 바닥 중심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그의 눈동자는 작은 흔들림도 허용하지 않는 위험한 집중의 빛으로 가라앉아 있었다.수진 뒤에 서 있는 그 여자는 이미 손등에 핏기가 모두 빠져 있었다.수진이 어깨를 붙잡아 겨우 버티게 했지만봉인의 압박과 천장 위에서 내려오는 ‘무언가의 존재’가 그녀의 체온을 급격히 떨어뜨리고 있었다.바닥 한가운데가 아주 조금 사람 한 명의 무게보다 가볍게 하지만 분명히 눌렸다.수진이 숨을 멈췄다.강혁은 말을 잃었다.그리고 순간, 천장에서 떨어지는 건 그림자도, 사람도, 발걸음도 아니었다.기척이었다.흑거미가 키운 자들은 절대 발소리를 내지 않는다.기척을 먼저 내고, 다음에 발을 내딛는다.그 기척은 오랜 세월 어둠 속에서만 살아온 존재들이 가진 형체 없는 그림자의 느낌이었다.바닥이 다시 눌렸다.그리고 세 번째 진동이 왔다.그 순간 수진은 깨달았다.“…하나가 아니야.”강혁이 미세하게 머리를 돌렸다.“뭐가?”“여긴 ‘한 명’만 내려오는 구조가 아니야.흑거미는 늘 첫 번째 자를 보낼 때 그녀와 짝을 이루는 ‘그림자’를 함께 붙여.”그 말은 흑거미의 방식에서 거의 예언이나 다름없었다.첫 번째 자는 정면을 맡고, 그림자는 뒤에서 심장을 노린다.강혁은 순간 숨을 가볍게 들이켰다.“그럼… 벌써 둘이 내려왔다는 건가.”수진은 천장을 올려다보았다.그녀의 눈동자에 아주 작게, 금속판이 들리는 틈이 보였다.그리고 그 틈 사이로 ‘눈’이 있었다.사람의 눈이라 부르기엔 너무 차갑고,짐승의 눈이라 부르기엔 너무 조용한 그런 눈이었다.수진의 손끝이 차갑게 식었다.그 눈은 과거의 자
해남의 바람은 여전히 바다 냄새가 났다.봄기운이 묻어나는 바람 속에 수진은 천천히 발을 옮겼다.머리 위로 갈매기가 울었고, 하늘은 오래전과 다르지 않았다.린플라워의 간판은 바래 있었다.몇 달 동안 닫혀 있던 문을 열자 꽃잎 냄새가 아니라 먼지 냄새가 먼저 밀려왔다.수진은 가만히 눈을 감았다.그리고 천천히 손끝으로 테이블을 쓸었다.꽃잎이 다시 살아나는 것처럼, 그녀의 마음에도 작은 온기가 번졌다.“다시 여는 거야?”뒤에서 강혁의 목소리가 들렸다.그녀는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응. 이곳은 멈춰 있었으니까.”“이제
새벽 여섯 시. 침대 머리맡의 스피커가 울렸다.금속성의 벨소리와 함께 여자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기상. 훈련생 전원은 5분 내 1층 집합.”창문 밖은 아직 어둡고, 공기에는 먼지와 탄내가 섞여 있었다.수진은 몸을 일으키며 이불 끝을 움켜쥐었다.방 안은 적막했지만, 바닥 밑에서 들려오는 진동이 공간을 미세하게 흔들고 있었다.어제 밤 새벽 내내 전화 벨소리가 울렸고, 누군가는 울고, 누군가는 웃는 소리가 들렸다.그 웃음은 인간의 웃음이 아니었다.언니 수민이 무릎을 꿇은 채 양말을 신었다.“빨리 움직이자. 늦으면 맞
눈이 멎은 새벽, 창문에 성에가 피어 있었다.수진은 이불 속에서 언니의 손을 더듬었다. 따뜻해야 할 손끝은 이미 식어 있었다.“언니…”속삭이자 수민이 눈을 떴다.“깼어?”“언니, 여긴 진짜 학교 같은 데냐니?”수민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 말 대신, 벽 쪽을 바라봤다.벽에는 어제 봤던 붉은 문장이 다시 눈에 들어왔다.“거짓은 기술이다. 진실은 약점이다.”그 아래엔 작고 낡은 스피커가 달려 있었다.철컥, 잡음과 함께 여자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일어나라. 훈련 시작이다.”아이들은 벌떡 일어났다.아직 어린 수진
하늘은 이미 죽은 듯 어두웠다.바람은 눈을 실어 나르며 거리를 할퀴고,흰 눈송이들은 마치 바다의 거품처럼 떠다녔다.그 속을 두 아이가 걷고 있었다.누군가는 자매라 부르고, 누군가는 고아라 불렀다.그들에게는 불릴 이름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언니… 손 시렵다니.”작은 아이가 흐느끼듯 말했다.그녀의 이름은 수진. 열 살도 채 되지 않은 얼굴엔 추위와 공포가 뒤섞여 있었다.언니 수민은 잠시 걸음을 멈추고 동생의 손을 더 꼭 잡았다.“조금만 더 가. 저기 불빛 보이지?”“응… 눈이 너무 와서 잘 안 보인다니.”“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