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uk“여보세요? 당신의 인생을 훔친 사람, 바로 나예요.” 전화 한 통으로 사람을 울리고, 목소리 하나로 세상을 속였던 여자 - 린자오밍. 그녀는 ‘보이스피싱 조직’의 전설이자, 죽은 언니의 복수를 위해 한국으로 돌아왔다. 땅끝마을 해남, 꽃집 ‘린’을 열고 평범한 얼굴로 살아가는 그녀 앞에 한 남자가 나타난다 - 전직 국정원 요원, 강혁. 그는 과거의 작전에서 그녀의 언니를 잃게 만든 남자였다. 전화선 끝에 남겨진 거짓말, 그리고 그 거짓 속에서 피어난 진짜 사랑. “당신 목소리… 어디선가 들은 것 같네요.” 사랑이었을까, 복수였을까. 그녀의 이름은 김수진이었다. 하지만 세상이 기억한 건… 린자오밍이었다.
Lihat lebih banyak하늘은 이미 죽은 듯 어두웠다.
바람은 눈을 실어 나르며 거리를 할퀴고,
흰 눈송이들은 마치 바다의 거품처럼 떠다녔다.
그 속을 두 아이가 걷고 있었다.
누군가는 자매라 부르고, 누군가는 고아라 불렀다.
그들에게는 불릴 이름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언니… 손 시렵다니.”
작은 아이가 흐느끼듯 말했다.
그녀의 이름은 수진. 열 살도 채 되지 않은 얼굴엔 추위와 공포가 뒤섞여 있었다.
언니 수민은 잠시 걸음을 멈추고 동생의 손을 더 꼭 잡았다.
“조금만 더 가. 저기 불빛 보이지?”
“응… 눈이 너무 와서 잘 안 보인다니.”
“괜찮아. 거기까지만 가면 따뜻해질 거야.”
두 사람의 발밑엔 새하얀 눈이 밟힐 때마다 눅눅한 소리를 냈다.
허공에 떠 있는 듯한 작은 불빛 하나가, 그들에게는 마지막 희망처럼 보였다.
그 불빛은 낡은 건물의 2층에서 새어 나오고 있었다.
문 앞에는 오래된 간판, 글자 반이 지워져 있었고,
‘다방(茶房)’이라 적힌 표지판만 간신히 남아 있었다.
수민은 조심스럽게 문을 두드렸다.
“누구요?”
낮고, 담배 연기 같은 목소리가 안에서 울렸다.
수민은 작게 대답했다.
“우리… 잘 곳을 찾고 있다니.”
잠시의 정적. 문이 삐걱거리며 열렸다.
눈발이 안으로 쏟아지고,
그 안에서 검은 모피코트를 입은 여인이 나타났다.
그녀는 처음 보는 사람이라기엔 이상하리만큼 친숙한 미소를 지었다.
입술은 붉게 칠해져 있었고, 눈동자는 어둠처럼 깊었다.
“애들이 왜 이런 데서 이러고 다녀?”
그녀의 말투엔 부드러움과 위협이 동시에 섞여 있었다.
수민은 고개를 숙였다.
“춥다니… 하루만이라도… 잘 데가 필요하다니.”
여인은 두 자매를 한 번 훑어보았다.
그 시선은 사람을 보는 게 아니라, 물건의 가격을 매기는 듯했다.
“이리 들어와. 밖에 있으면 얼어 죽어.”
그녀는 문을 더 열었다.
따뜻한 공기가 흘러나왔다.
하지만 그 안의 냄새는 달콤했으나, 어딘가 이상했다.
향수와 피, 그리고 오래된 철 냄새가 섞여 있었다.
아이들은 서로를 바라봤다.
수진의 눈에는 두려움이, 수민의 눈에는 ‘살아야 한다’는 절박함이 비쳤다.
그리고, 문턱을 넘었다.
실내는 따뜻했다.
벽난로엔 불이 피워져 있었고, 그 옆에는 이미 여러 아이들이 앉아 있었다.
그들의 얼굴엔 생기가 없었다.
모두 같은 회색 옷을 입고, 손에는 똑같은 노트를 쥐고 있었다.
“여기 아이들 다 너희처럼 길에서 주워온 애들이야.”
여인이 말했다.
“여기선 굶지 않아. 공부도 시켜주지.”
“공부요?”
수민이 눈을 반짝였다.
“그래. 사람을 설득하는 법, 목소리를 쓰는 법.”
여인은 의자에 앉으며 담배를 피웠다.
“전화만 잘해도 세상은 널 믿게 돼. 그게 돈이야.”
수진은 고개를 기울였다.
“전화…?”
여인이 미소를 지었다.
“그래. 목소리로 세상을 바꾸는 일이지.”
그녀는 수진의 볼을 손가락으로 쓰다듬었다.
“너 목소리 예쁘네. 사람을 속이기에 딱 좋아.”
수진의 몸이 굳었다.
언니는 그 손을 밀치며 말했다.
“우리 그냥 나갈게요.”
“그래?”
여인의 눈빛이 차갑게 변했다.
“그럼 나가보지. 밖은 영하 스무 도야.”
눈발이 문틈으로 스며들며 바닥에 녹았다.
그 순간, 수진의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다.
여인은 그 소리에 미소를 지었다.
“밥은 먹고 가. 세상은 배고픈 자한테는 기회를 안 주니까.”
그날 밤, 그들은 난로 옆에서 따뜻한 밥을 먹었다.
하지만 밥의 맛은 이상했다. 달고, 쓰고, 씁쓸했다.
잠들기 전, 수진은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언니, 여긴 이상하다니.”
“그래도… 추위보단 낫잖아.”
“그 여자는… 웃을 때 눈이 안 웃는다니.”
“쉬자, 수진아. 내일은 좀 나을 거야.”
그러나 그 다음날,
아이들은 모두 같은 시간에 일어나 같은 문장을 외쳤다.
“고객님, 안녕하세요. ○○은행입니다.
당신의 계좌에서 이상 거래가 발견되어 연락드렸습니다.”
그때, 수진은 아직 몰랐다.
그 문장이 평생 그녀의 목소리를 따라다닐 줄은.
밤이 다시 내렸다.
창밖엔 눈이 내리고, 흑거미라 불린 여인은 창가에 서 있었다.
그녀의 손끝엔 불 꺼진 담배 한 개비가 있었다.
“수진이라… 목소리가 참 맑아.”
그녀가 중얼거렸다.
“거짓말은… 깨끗한 목소리로 해야 사람들이 속지.”
그 말은 마치 저주처럼 공기 중에 흩어졌다.
그리고 며칠 뒤, 수진은 처음으로 전화를 걸었다.
수화기 너머에서 들려오는 낯선 남자의 목소리.
“여보세요?”
수진은 손을 떨며 말했다.
“고객님… 이상 거래가 발생했습니다.”
그때, 언니가 문밖에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눈물인지, 눈발인지 모를 물방울이 그녀의 뺨을 타고 흘렀다.
“수진아…”
“언니…”
“그 말… 진짜로 믿게 만들었니?”
수진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가, 아주 조용히 속삭였다.
“응… 그 사람이 울었다니.”
그 밤, 자매는 서로 다른 꿈을 꿨다.
수민은 ‘이곳을 떠나는 꿈’을, 수진은 ‘거짓말로라도 살아남는 꿈’을.
눈은 계속 내렸다.
그들의 세상은 이미 하얗게, 너무 하얗게 물들어 있었다.
새벽이었다.바람은 멎었지만, 어딘가에서 오래된 금속이 울리는 소리가 지하실의 습한 공기를 흔들었다.여진이 남긴 파일은 단 하나의 문장으로 시작됐다.“너희가 믿는 어떤 진실도, 이미 누군가의 거짓말 위에 세워져 있다.”수진은 말없이 화면을 바라보았다.그 문장은 죽은 사람의 목소리처럼 차갑게 번졌다.그녀의 눈동자에 희미한 떨림이 스쳤다.파일은 단순한 보고서가 아니었다.흑거미 조직 내부의 통신 기록,국정원이 삭제한 실험 아카이브,그리고 ‘LIN PROJECT’의 원본 설계도.거기엔 짧은 문구가 붉은색으로 강조돼 있었다.LZM-01: 김수진LZM-02: 김수민강혁의 숨이 짧게 멎었다.“……02가 네 언니였어.”수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대신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던 사실처럼 눈을 감았다.“우릴 만들었어.”그녀가 낮게 말했다.“목소리를 훔치는 기술, 기억을 조작하는 방식…우린 누군가가 설계한 ‘이름’이었어.”백사는 이를 악물고 모니터를 내리쳤다.“그럼 이 모든 게”“배신구의 작품이지.”강혁이 끝맺었다.그리고 마지막 화면이 떠올랐다.좌표: 해남 폐등대LZM KEY – ACCESS GRANTED그들은 동시에 시선을 들었다.오늘 밤, 끝이 열린다는 것을 모두가 알고 있었다.폐등대는 바람의 시체처럼 서 있었다.유리창은 오래전 깨졌고, 계단은 녹이 슬어 있었다.바다는 잿빛으로 일렁였고, 빛은 이미 사라진 지 오래였다.등대 아래, 숨겨진 문이 있었다.문 너머는 어둡고 길었다.마치 오래된 진실이 스스로를 숨기기 위해 만든 뱃속 같았다.배신구는 그 안쪽에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세상에서 제일 상냥한 얼굴로.“왔군.”백사가 총을 들이밀었다.그러나 배신구는 오히려 미소를 지었다.“너희는 아직 모르지? 왜 내가 수민을 죽여야 했는지.”수진의 눈빛이 흔들렸다.“수민은 LZM-02였어. 네가 LZM-01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 그리고… 널 지키려 반역을 선택했다.”그 한 문장이 수진의 가슴을 칼처럼 갈랐다
방 안의 공기가 완전히 식어갈 무렵, 수진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첫 번째 자가 사라진 자리엔 그 어떤 흔적도 없었다.피도, 체온도, 생의 마지막 경련조차도 남아 있지 않았다.마치 누군가가 시간이 지나기 전에 서둘러 지워버린 흔적처럼,그 자리는 처음부터 비어 있었던 것처럼 보였다.그러나 빈자리는 언제나 말이 많았다.침묵보다 많은 것을 말하는 구멍이었고 수진은 그 침묵의 모양을 오래 바라보았다.“나를… 지켜보고 있었나 봐.”그녀가 낮게 말했다.“언니 얼굴을 한 그 아이를 누가 만들었든, 그들은 내가 어디까지 갈지 알고 있었던 거지.”그녀의 목소리는 떨리지 않았지만 말끝이 희미하게 마른 숨에 잠겼다.강혁은 몇 걸음 뒤에서 그녀를 지켜보다가 무릎을 굽혀 그 빈자리에 손끝을 가져갔다. 차갑다.차갑다는 감각조차 빠르게 사라진다.“흔적이 너무 깨끗해.”그가 중얼거렸다.“흑거미도, 국정원도… 이런 방식은 안 써. 이건… 당신 언니 사건 이후로 우리가 놓친 세력이 있다는 뜻이야.”수진은 그의 말에 완전히 시선을 돌렸다.그녀는 그가 말한 ‘놓친 세력’이라는 단어에 수민의 그림자를 보았다.그림자는 오래전 폭설 속에서 사라진 언니의 모습을 따라갔고 그 뒤를 쫓는 자신의 뒷모습까지 포개어졌다.“배신구가 나한테 한 말이 있어.”수진은 잠시 망설였지만, 결국 꺼냈다.“언니가 죽기 전, 마지막으로 남긴 기록은 배신구에게 바로 가지 않았다고 했어.그 위에 누가 있었다고… 그 사람한테 먼저 보고가 들어갔다고.”강혁의 눈이 깊게 가라앉았다.그러나 놀라움보다는 이제 조각이 맞춰지는 느낌에 가까웠다.“그러니까 배신구도 꼭대기가 아니었다는 거지.”수진은 아주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그 끄덕임은 결심의 움직임이 아니었다.아직 반쯤은 상처였고, 나머지 반만 겨우 수면 위로 올라온 진실이었다.“난… 언니가 죽은 줄 알았던 밤부터 배신구만 보면 됐다고 생각했어.” 그녀가 말했다.“그 사람만 겨냥하면 모든 게 끝난다고… 그게 내 복수의 끝이라고… 그
바닥이 흔들린 뒤, 방 안에는 짧고 깊은 정적이 내려앉았다.먼지가 흩어지는 소리조차 크게 들릴 만큼 모든 공기가 갑자기 가벼워졌다.그러나 그 가벼움은 해방이 아니라 어딘가에서 차갑게 빠져나간 무게 때문이었다.봉인이 깨지자, 방 안의 온도는 서서히 떨어졌고첫 번째 자는 마치 실을 끊은 인형처럼 가볍게 무너졌다.그 움직임엔 생명도, 의지도 없었다.마지막까지도 ‘언니의 얼굴을 가진 껍데기’였다는 사실이 잔혹할 만큼 명확해졌다.수진은 그 모습을 똑바로 보지도 못했다.무너져가는 형체의 그림자가 바닥에 길게 늘어나자 그녀는 무의식적으로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눈앞이 흐려진 것도 아닌데 경계가 흐트러지는 느낌이 들었다.그녀의 손끝은 아직도 첫 번째 자의 팔을 잡았던 자세 그대로 굳어 있었고손바닥에 남아 있는 ‘가벼움’이 오히려 무거운 죄처럼 느껴졌다.강혁이 먼저 다가왔다.몸을 숙여 수진과 눈높이를 맞추려는 그의 움직임은아까의 전투에서 보여줬던 속도와 전혀 다른 느리고 조심스러운 것이었다.“수진.”그는 그 한 단어를 부르며 숨을 아주 천천히 들이켰다.그녀의 눈이 흔들렸다.흔들린 이유는 방금 전의 폭력도, 봉인의 붕괴도 아니었다.그녀를 부르는 그의 목소리에 두려움이, 안도감이, 미안함이 함께 묻혀 있었기 때문이었다.수진은 떨림을 억누르던 입술을 조금 씹었다.“괜찮아.”입에서 나온 말은 그녀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조용했다.“다 끝났어.”“끝난 게 아니야.”강혁은 고개를 저었다.“네가 혼자 감당하는 방식으로는… 아직 끝이 아니야.”그 말은 그녀의 가슴에 조용히 박혔다.그녀는 순간적으로 눈을 내리깔았지만시선이 떨어진 곳에는 첫 번째 자의 몸이 점점 흐릿해지는 흔적이 있었다.강혁이 그걸 보고 말을 멈췄다.수진도 고개를 들어 살폈다.첫 번째 자의 몸은, 흐릿해지는 것이 아니라 사라지고 있었다.피도, 살도, 무게도 남기지 않은 채 그저 빛이 빠져나가듯 처음부터 이곳에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이것은 흑거미의 기술도, 국정원의
첫 번째 자가 바닥을 가르며 뛰어드는 순간, 방의 공기가 단숨에 찢어졌다.금속이 긁히는 소리는 없었다.살이 공기를 헤치며 나아가는 날것의 속도만이 귀를 때렸다.강혁은 예상보다 훨씬 빠르게 몸을 낮췄다.그의 어깨와 팔 근육이 순간적으로 수축하면서첫 번째 자의 팔꿈치가 지나가는 궤적을 비켜냈다.팔꿈치 하나에 함부로 스친다면, 골절 정도가 아니라 관절 전체가 뒤틀려버릴 정도의 힘이었다.수진은 뒤에서 숨을 들이마셨다.정확하게 말하면, 들이마신 게 아니라 숨이 ‘절로’ 끊겼다.오랜 시간 몸으로 기억해버린 공포흑거미가 키운 아이들이 가진 공격 방식은 마음보다 몸이 먼저 알아본다.첫 번째 자의 발끝이 바닥을 스치며 강혁 쪽으로 돌아섰다.금속 같은 무게를 가진 움직임. 그러나 소리는 없다.소리 없는 움직임일수록 치명적인 훈련을 견딘 아이들이었다.강혁은 공격을 막지 않았다.대신 ‘흐르는 방향’에 몸을 맡겨 첫 번째 자의 깊이를 읽었다.흑거미의 방식은 모두가 알고 있었다.수진도, 강혁도.직접 막는 순간, 죽는다.부딪히는 힘이 아니라‘흐름’을 읽어야 한다.첫 번째 자가 두 번째로 공격을 내리찍었다.이번엔 손날이었다.목을 자르는 각도. 흑거미가 심장 다음으로 즐겨 노리던 부위.강혁은 뒤로 내딛으며 팔목을 피하려 했지만 완벽하게 피할 수는 없었다.손날이 스친 자리에서 피가 아주 얇게, 필름처럼 번졌다.“강혁!”수진의 목소리가 튀어나왔다.감정이 억눌려 있는 목소리.이름을 부르는 그 짧은 울림만으로 어린 연변 사투리가 조금 섞여 있었다.강혁은 대답하지 않았다.대신 몸을 비틀며 첫 번째 자의 손목을 잡았다.그러나 잡는 순간 깨달았다.힘이 너무 가볍다.사람의 팔을 잡은 느낌이 아니라깃털이 붙은 금속 막대를 잡은 것 같은 비현실적인 공허함.수진도 그걸 느낀 듯 숨이 멎은 얼굴로 중얼거렸다.“…몸이… 비어 있다…”바로 그 순간 첫 번째 자가 몸을 비틀어 강혁의 손을 빠져나갔다.움직임이 너무 빠르고 가볍게 돌아서 강혁의 중
해남의 바람은 여전히 바다 냄새가 났다.봄기운이 묻어나는 바람 속에 수진은 천천히 발을 옮겼다.머리 위로 갈매기가 울었고, 하늘은 오래전과 다르지 않았다.린플라워의 간판은 바래 있었다.몇 달 동안 닫혀 있던 문을 열자 꽃잎 냄새가 아니라 먼지 냄새가 먼저 밀려왔다.수진은 가만히 눈을 감았다.그리고 천천히 손끝으로 테이블을 쓸었다.꽃잎이 다시 살아나는 것처럼, 그녀의 마음에도 작은 온기가 번졌다.“다시 여는 거야?”뒤에서 강혁의 목소리가 들렸다.그녀는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응. 이곳은 멈춰 있었으니까.”“이제
밤은 길었다.훈련소의 전등은 꺼져 있었지만, 불빛은 벽 사이로 스며들어 어둠을 더 짙게 만들었다.수민은 그 빛의 경계를 바라보고 있었다.그건 마치 ‘선’처럼 보였다.넘으면 죄가 되고, 서 있으면 죄책이 되고, 돌아서면 모든 게 사라지는 경계선.그녀는 천천히 손끝을 들어 그 빛의 테두리를 따라 그렸다.차가운 벽의 감촉이 손끝을 타고 전해졌다.“이 안에서 난… 점점 작아지고 있다.”그녀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머릿속에서는 흑거미의 목소리가 되풀이되었다.“네가 그 애를 구하려면, 네가 그 자리에 앉아야 해.”그 말
그날은 유난히 공기가 탁했다.창문은 여전히 잠겨 있었지만, 새벽의 어둠 속에서 먼지들이 빛을 삼키며 떠다녔다.이제 이곳의 새벽은 ‘시작’이 아니라 ‘명령’이었다.훈련소의 벽면에는 새로운 구호가 걸려 있었다.“감정은 노이즈다. 신뢰는 연기다.”조교의 호명 소리가 메아리쳤다.“린자오밍.”수진은 즉시 일어섰다.오늘, 그녀는 ‘외부 통화조’로 승격됐다.이제부터는 단순한 연습생이 아니라, 실제 현금 흐름에 개입하는 실전 요원이었다.그녀는 거울 앞에 섰다.짧게 자른 앞머리, 눈 밑의 그늘, 차분하게 눌린 입술.거울 속
새벽의 공기는 무겁고 끈적했다.훈련소의 창문은 늘 닫혀 있었고, 바람은 커녕 소리조차 들어올 틈이 없었다.밖은 세상이 아니라, 단절된 또 다른 지옥이었다.그날, 수진은 평소보다 일찍 일어났다.눈을 떴을 때 머리맡의 스피커에서는 아무 소리도 나오지 않았지만,그녀는 스스로 몸을 일으켰다. 습관이었다.몸보다 먼저 깨어나는 건 의식이 아니라, ‘두려움’이었다.지각하면 벌을 받는다는 걸 이미 배워버렸으니까.언니는 여전히 잠들어 있었다.수민의 얼굴에는 깊은 피로가 깃들어 있었다.그녀는 요 며칠 밤마다 깨어 있었고, 훈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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