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툭, 하고 통화가 끊기는 소리와 함께 서재 안에는 숨 막히는 정적이 감돌았다. 도진은 붙잡고 있던 휴대폰을 책상 위로 팽개치듯 내려놓고 유라를 쳐다봤다. 그의 짙은 눈동자에는 겉잡을 수 없는 분노와 깊은 상처가 뒤섞여 잔뜩 불타오르고 있었다.“이유라, 이리 와 봐.”낮게 가라앉은, 그러나 뼈가 시릴 만큼 차가운 명령조의 목소리였다. 유라는 도진의 싸늘한 모습에 조심스럽게 걸음을 옮겨 그의 바로 앞에 섰다.도진은 유라의 가녀린 어깨를 부서질 듯 움켜쥐며 이를 악물었다.“너 지금 네가 무슨 짓을 한 줄이나 알아? 내가 알아서 한다고 했잖아. 그런데 지금 이게 뭐 하는 짓이야!”도진의 다그침에 유라는 오히려 차분하게 가라앉은 눈으로 도진을 응시했다. 이미 밤새도록 수천 번도 더 삼켜냈던 말들이었다.“그게…… 저는 잃을 게 없지만, 도진 씨는 아니잖아요. 도진 씨뿐만 아니라 유태희 씨도 그렇고…… 도진 씨 회사에서 일하는 직원들이 얼마나 많은데, 겨우 이런 기사 하나 때문에 다 같이 무너지면 안 되잖아요.”“이유라!”“전 정말 괜찮아요. 그러니까 신경 쓰지 마세요.”유라는 아무렇지 않은척 도진의 앞에서 억지 미소를 지어 보였다.“아침에 기사 보니까…… 뭐, 틀린 말도 아니더라구요…… 불우한 환경에서 자란 것도 맞고, 불쌍한 것도 맞고……
유라는 아무 말 없이 도진의 넓은 품 안에서 눈을 꼭 감았다. 심장이 아릿하게 저려왔지만, 그를 지키기 위해 선택한 길에 후회는 없었다.그리고 다음 날 아침.기사는 유라가 의도한 대로, 아니 그보다 훨씬 더 자극적이고 폭력적인 형태로 인터넷 세상을 집어삼켰다. 포털 사이트의 메인 화면은 온통 붉고 강렬한 헤드라인으로 도배되어 있었다.[단독] 탑스타 김도진, 알고 보니 악질 ‘꽃뱀’에게 당했다? 충격적 전말[이슈] 김도진을 파멸로 몰고 간 여인은 누구? 정신 이상 증세까지 보인 이 모 씨[비하인드] 김도진, 동정심에 도와준 스토커에게 발목 잡혔나… 흉악한 폭로의 진실기사는 기획사의 발 빠른 대처가 맞물려 완벽한 소설을 써 내려가고 있었다. 도진은 하루 아침에 선의의 피해자로 둔갑해 있었다.거기에 대중들의 말동무를 자극할 가장 치명적인 미끼가 하나 더 던져졌다.[속보] 김도진의 진짜 연인은 유태희! ‘유태희도 이 모든 내막 알고 있었다’교묘하게 왜곡되었던 두 사람의 키스 사진은 ‘악질 꽃뱀에 시달리던 도진을 위로하던 연인 ’유태희‘ 라는 눈물겨운 프레임으로 재해석되었다.기사는 순식간에 김도진과 유태희의 눈물겹고도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로 도배되었다. 모든 진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불우한 환경에서 자란 불쌍한 꽃뱀을 어떻게든 조용히 감싸주려 했던 두 사람의 깊은 속내와 배려가 세상에 드러났다는 식이었다.여론은 무서운 속도로 반전되었다. 유태희의 악성 팬들조차 이번 기사를 보고는 완전히 태도를 바꾸었다.‘유태희 진짜 다시 봤다. 저런 막장 스토커까지 품어주려고 했다니 천사가 따로 없네.’‘김도진도 피해자였어. 둘이 진짜 눈물겹다. 이 사랑 응원함.’댓글창은 두 사람을 향한 찬사와 동정론으로 가득 찼고, 유태희와 김도진의 이미지는 오히려 이전보다 훨씬 더 긍정적인 방향으로 바뀌어 있었다. 유라보다 먼저 잠에서 깬 도진은 습관처럼 침대 옆 탁자 위에 놓인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피곤함이 섞인 한숨을 내쉬며 포털 뉴스를 켠 도진의 눈동자가 순간
도진의 눈을 피해 유라를 따로 불러내 조용히 이야기 하던 매니저의 목소리는 지독하리만치 차분하고 현실적이었다.‘그럼 모든 화살은 유라 씨에게 향하겠지만, 그래도 유라 씨는 공인이 아니라 금방 잊힐 거예요. 하지만, 도진씨는 달라요. 이번 일로 무너지면 다신 복귀 못 해요. 유라 씨가 도진 씨를 정말로 생각한다면…… 무슨 뜻인지 아시죠?’그래, 자신은 어차피 이 화려한 세계의 이방인일 뿐이었다. 사람들의 손가락질도, 악의에 찬 수군거림도 시간이 지나면 흐릿해질 먼지 같은 것들이었다. 하지만 김도진은 달랐다. 그는 저 높은 곳에서 언제나 빛나야만 하는 사람이었다.“아니요, 제가 지금 경찰서 갈게요.”유라가 도진의 옷소매를 다급하게 붙잡았다.“가서 다 이야기할게요. 기사에 나온 거 전부 다 이도현이 지어낸 거짓말이라고…… 도진 씨와 저는 정말 아무 사이도 아니라고 말할게요.”유라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제가…… 제가 도진 씨 너무 좋아해서 멋대로 쫓아다닌 거고, 도진 씨는 그냥 불쌍한 저를 동정심에 몇 번 만나준 것뿐이라고…… 그렇게 말하면 대중들도 믿어줄 거예요. 그러니까 제발…….”“이유라.”참지 못한 도진이 거칠게 유라의 말을 가로막았다.“무슨 소릴 하는 거야, 대체. 그만해. 너 그런 말도 안되는 생각은 하
도진은 거짓 기사가 번지기 시작하자마자 곧바로 반박 자료를 배포하고 수습 기사를 냈지만, 대중은 이미 자극적인 가십에 눈이 멀어 진실을 전혀 믿어주지 않았다. 이때다 싶은 언론사들은 조회수를 더 늘리기 위해 더 악의적이고 자극적인 찌라시를 공장처럼 찍어냈고, 사태는 겉잡을 수 없이 악화되었다.결국 우려했던 일이 터졌다. 도진이 메인 모델로 활약하던 대기업 광고주들로부터 계약 해지와 위약금 청구 압박이 들어왔고, 현재 촬영 중인 대작 드라마의 제작사마저 하차 요구를 빗발치게 받으며 도진의 캐리어가 송두리째 흔들리기 시작했다.탁!정적이 흐르는 소속사 대표실. 소속사 대표가 태블릿 PC를 탁자 위로 거칠게 내던졌다. 대표의 얼굴은 흙빛으로 변해 있었다.“김도진, 너 대체 어쩌려고 이래? 반박 기사고 뭐고 대중들은 이제 들으려고도 안 해! 남의 여자 빼앗은 파렴치한으로 낙인찍혔다고!”도진은 창밖을 바라보며 깊게 담배 연기를 뱉어낼 뿐,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그 태연한 태도에 대표의 속이 새까맣게 타들어 갔다.“지금 들어와 있는 광고 서너 개는 이미 브랜드 이미지 타격 운운하면서 소송 걸겠다고 난리야. 오늘 아침엔 드라마 제작사 대표한테 직접 전화 왔어. 이번 주 촬영 분량부터 네 분량 다 들어내고 대본 수정하겠단다. 사실상 퇴출이야, 임마!”“…….”“도진아, 제발 정신 좀 차려. 여자 하나 때문에 네가 평생 쌓아 올린 커리어를 다 시궁창에 쳐넣을 셈이야? 언론에 그냥 발표하자. 그 여자 정신 불안 증세 있고, 불우한 가정 환경으로 돈을 노리고 너한테 접근한거라고!”지금 상황에서는 유라를 철저히 ‘정신적으로 문제 있는 불쌍한 여자’, 그리고 돈을 노리고 접근한 악질적인 ‘꽃뱀’으로 위장해야만 도진이 살아남을 수 있었다. 세간의 비난 화살을 온전히 유라 한 사람에게 돌려 희생양으로 삼는 것. 그것이 탑스타 김도진을 이 더러운 진흙탕에서 단숨에 건져낼 유일한 탈출구였으니까.“도진아, 넌 알고 있잖아! 대중들은 자극적인 마녀사냥에 미쳐 있어. 그 여
속을 꽉 채우는 도진의 묵직하고 뜨거운 마찰감에 유라는 비명을 지르듯 신음을 내뱉으며 도진의 목덜미를 가녀린 두 팔로 터질 듯 꽉 끌어안았다. 도진은 유라의 허벅지를 제 허리에 단단히 감아올린 채 유라의 안을 거침없이 헤집기 시작했다.“하아…… 읏, 아……!”숨이 가쁘게 얽히고설키며 두 사람의 뜨거운 신음이 빈틈없이 방 안을 메웠다.서로를 그토록 원하고 애태우던 격렬한 행위가 끝나고, 마침내 방 안에는 가쁜 숨소리만이 아련하게 가라앉았다.도진은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힌 유라를 제 품 안으로 조심스럽게 당겨 꼭 껴안았다.자신의 품 안에 쏙 들어오는 유라의 작은 몸을 한층 더 강하게 끌어안으며, 도진이 낮게 속삭였다.“사랑해, 이유라…….”심장 가장 깊은 곳에서 울려 퍼지는 듯한 진심 어린 고백이었다.도진의 그 따뜻한 한마디에, 유라는 그토록 자신을 벼랑 끝으로 몰아가던 불안정하고 조각나 있던 감정들이, 도진의 깊은 품 안에서 비로소 고요하고 차분하게 가라앉기 시작했다.“사랑해요....”유라는 나지막히 도진에게 속삭였다.서로의 심장 박동을 나누며 온전한 사랑을 확인한 두 사람은 마침내 지독했던 악몽을 뒤로하고 달콤한 안식을 맞이하는 듯했다.하지만 두 사람의 평화는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띠리릭, 띠리릭─.새벽녘, 고요한 펜트하우스의 정적을 깨고 도진의 휴대폰이 미친 듯이 울려대기 시작했다. 액정 화면 위로 비서의 이름과 함께 다급한 메시지들이 쉴 새 없이 팝업창을 덮었다.불길한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포털 사이트 메인은 이미 두 사람을 표적으로 삼은 자극적인 헤드라인으로 도배되어 있었다.[단독] 탑스타 김도진의 진짜 연인은 유태희가 아니었다? 베일에 싸인 진짜 여인은 누구[충격] ‘완벽남’ 김도진의 은밀한 사생활… 일반인 여성 ‘이 모 씨’와의 동거설 실체김도진, 일반인 여성 감금? 연예계 뒤흔들 메가톤급 스캔들마치 거대한 덫이 유라와 도진의 숨통을 조여오듯, 자극적이고 악의적인 기사들이 실시간으로 쏟아졌다이 지저분한 폭로전의
유라는 필사적으로 두 팔을 교차해 제 몸을 감싸 안으며 물속으로 몸을 더 깊숙이 숨겼다. 도진에게만은 절대로 보여주고 싶지 않았던, 이도현에게 처참하게 유린당한 낙인 같은 흔적들이었다.자신의 이런 처참한 몰골을 보면 도진이 자신을 더럽다고 혐오하며 싫어하게 될 것이라는 두려움과 수치심에, 유라의 온몸이 쏟아지는 눈물과 함께 사정없이 떨리기 시작했다.물 밖으로 드러난 하얀 살결 위에 선명하게 새겨진 붉고 푸른 멍 자국들.절망적으로 몸을 웅크린 채 비참하게 울고 있는 유라를 보던 도진은, 그제야 머리를 강하게 얻어맞은 듯 정신이 아득해졌다. 왜 유라가 그토록 자신을 피했는지, 제 손길이 닿을 때마다 왜 그토록 두려움에 떨며 물러섰는지...‘바보 같이…… 이것 때문이었어?’보여주고 싶지 않은 가장 치명적인 상처를 들켜버린 채 지옥 같은 수치심에 몸부림치는 유라의 모습에, 도진은 순간 심장이 통째로 뜯겨 나가는 듯 저릿하고 지독한 통증을 느꼈다.화가 나서가 아니었다. 유라를 지켜주지 못했다는 미안함과, 이 깊은 상처를 혼자 감당하며 무너져 내렸을 유라에 대한 애달픔이 도진의 가슴을 헤집어 놓았다.도진은 입고 있던 옷 그대로 유라가 들어가 있는 욕조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따뜻한 욕조 물속으로 도진의 젖은 옷자락이 무겁게 가라앉았다.“아, 안 돼요.... 나한테 오지마요... 제발 보지 마요......흣, 보지 마....”유라가 울부짖으며 필사적으로 그를 밀어내려 했지만, 도진은 거칠게 반항하는 유라의 가녀린 손목을 부드럽게 감싸 쥐고 그녀를 제 품으로 강하게 끌어당겼다. 온몸으로 전해지는 물기 어린 온기에 유라의 여린 어깨가 굳어졌다.“이유라, 내 말 똑똑히 들어.”도진의 목소리가 뜨겁게 젖어 있었다.“난 네가 어떤 모습이든, 네 몸에 어떤 상처가 있든 상관없어. 넌 여전히 나한테 가장 소중하고 사랑하는 여자야, 그러니까 제발 그런 눈으로 스스로를 괴롭히지 마.”도진은 물속에서 유라의 떨리는 등을 단단히 감싸 안으며, 유라가 완전히 안전함을
[다시 현재 도현의 방]자책하며 안절부절못하는 유라를 내려다보던 도현의 눈빛이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그날 밤 김도진이 제게 뱉었던 소유욕 어린 경고가 귓가를 맴돌았다. 유라를 그 지옥 같은 놈의 곁에 둘 수는 없었다.도현은 침대 옆 의자에 깊숙이 기댄 채 앉으며 낮게 읊조렸다.“거기 그만두고 우리 병원으로 와. 너 일할 자리 하나 만드는 건 일도 아니니까.”순간 유라의 마음이 세차게 흔들렸다. 시급 두 배의 꿈의 직장이라 생각했지만, 첫날부터 이런 꼴이 되었으니 겁이 난 것도 사실이었다. 하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보육원
도현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유라가 중심을 잃고 쓰러졌고, 도현은 본능적으로 그녀를 낚아채듯 품에 안아 올렸다. 바로 그때, 룸의 문이 열리며 한 남자가 걸어 나왔다.“이도현? 이런 데서 볼 줄은 몰랐네.”오만한 미소를 지으며 나타난 이는 김도진이었다. 고교 시절부터 지독한 라이벌이자 숙적이었던 두 남자의 시선이 허공에서 날카롭게 부딪혔다. 도진의 시선이 도현의 품에 무력하게 안겨 있는 유라에게로 향했다.“내 신입 매니저가 왜 거기 안겨 있는지 물어봐도 될까?”도진의 입가에 걸린 미소는 여유로웠지만, 눈빛만큼은 사납게 빛나고
평소의 도현은 냉정해 보여도 유라에게만큼은 눈빛에 다정한 온기가 도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지금 그녀를 내려다보는 도현의 눈은, 아무런 감정도 읽을 수 없을 만큼 깊게 가라앉아 있었다.“그랬구나…… 죄송해요, 오빠. 저 때문에 고생 많으셨죠.”“…….”“근데, 제 가방이랑 핸드폰은 어디 있어요? 회사에 연락도 못했는데....유라가 침대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초조하게 묻자, 도현이 천천히 그녀의 곁으로 다가왔다. 그의 거대한 실루엣이 유라의 위로 짙은 그림자를 드리웠다. 도현은 양복 주머니에서 익숙한 스마트폰 하나를 꺼내 들었다.
사방이 적막에 잠긴 어두운 방.이유라는 끊어질 듯 가느다란 신음을 내뱉으며 깊은 늪 같은 잠 속을 헤매고 있었다.‘으음…….’그때, 문밖에서 들려오는 희미한 인기척에 그녀가 힘겹게 눈을 떴다. 눈꺼풀이 천근만근 무거웠지만, 온몸의 세포가 본능적인 위기감을 맥질하며 그녀를 깨웠다.낯선 천장, 코끝을 찌르는 서늘한 약품 냄새.꿈인지 실제인지 분간하려 고개를 돌리던 유라는 당황해 몸을 일으키려다, 왼손등에 차갑게 꽂힌 링거 바늘을 보고 멈칫했다.“분명 어제…… 드라마 촬영팀 회식 후…….”필름이 끊긴 듯 그 이후의 기억은 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