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허공에 흩날리듯 그리운 이름을 불렀다.하늘을 향해 눈을 감고 고개를 젖히자, 한숨이 흘러나왔다.“나리!”그리운 소리에 번뜩 떠진 눈이 소리를 좇자, 하령이 대문으로 들어서고 있었다.“너!”“일찍 오셨네요. 빨래터에 다녀오는 길입니다. 서둘러 온다고 왔는데…”그녀는 빨갛게 언 손을 호호-불며 그에게 다가왔다.홍양은 단숨에 그녀에게 다가가 빨리를 바닥에 내려놓고는 그녀의 손을 꼭 쥐었다.“나리!”생경한 그의 행동에 그녀의 눈이 동그랗게 커지고, 동공이 흔들렸다.“왜, 왜 이러세요. 놔, 놔주세요."당황스럽고 난처한 표정으로 그에게서 벗어나려는 그녀를, 홍양은 더욱 강하게 붙들어 잡았다.“추운데 무슨 빨래를 한다고.”“괘, 괜찮습니다. 익숙해져서…”“들어가자.”그는 그녀의 손목을 잡고,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언제 불을 피웠는지, 방안은 이미 뜨끈뜨끈했다.홍양은 아랫목에 덮인 이불을 걷어내고, 그녀를 앉혔다.“몸 좀 녹이거라.”그녀는 아무 말도 없이, 시선을 내리깔고 자리에 앉았다.둘 사이에 어색하고 불편한 침묵이 흘렀다.그러다, 하령이 먼저 입을 열었다.“왜 이러세요. 냉정하게 밀어내실 때는 언제고. 혼란스럽습니다.”그녀의 말투에 서운함과 투정이 섞여 있었다.“네 신랑 될 사람을 만나고 왔다지?”“……”“어떴더냐? 맘에 들더냐? 기왕지사 혼인하는 거, 마음에 들어야 하지 않겠어?”그 삐뚤어진 말에, 반항하듯 대답했다.“예. 맘에 들었습니다. 듬직하고, 착하고. 잘생기고…”“잘생겼어? 그래서, 마음에 들어? 시집가고 싶어 졌어?”“……”“빨리 떠나고 싶어 졌느냐? 나만 여기 두고, 빨리 그놈에게 가고 싶어?”그는 화가 난 듯 그녀에게 쏘아붙이고, 눈썹을 치켜뜨며 그녀를 몰아붙였다.“왜, 화를 내시나요?”정곡을 찔린 듯, 애써 아닌 척 입꼬리를 올렸다.“내가? 아니, 착각하지 말거라. 그냥 말 잘 듣는 관비가 떠난다니, 아쉬울 뿐이니.”“……”앙-다문 입술이 움찔거리고, 턱이 바
다음날, 관아로 들어가는 홍양의 귀에 관리들이 떠드는 소리가 들렸다.“하령이가 시집을 간다고?”“그래. 옆 함평군에서 일하는 관노라던데?”“하긴, 좀 늦긴 했어. 빨리 치워야지. 안 그래도 눈독 들이는 놈들 많은데, 험한 꼴 당하기 전에 말이야.”“에효- 팔자도 참. 양반집 규수가, 노비랑 혼인을 하다니. 쯧.”순간, 홍양의 머리가 새하얗게 비워졌다.하령이 시집을 간다니. 부질없이 일렁이는 마음이 성가셨다.그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데.그는 이미 한양에 처자식이 있으며, 그녀는 국가의 자산이다.그녀를 위해 무언가 할 수 있나? 그 뒷감당은 할 수 있나?그저 정도만 걸으며, 평탄하게 살고자 한 인생이었다.틀 안에 살고자 했던 그에게, 그녀의 존재는 언제나 변수가 되었다. 감당할 수 없는 일에 신경이 곤두서는 지금 조차도. 정말 성가셨다.그 말을 들은 이후, 그는 애써 그녀를 멀리하고 마주치지 않으려 애썼다.곁을 내어주지 않는 그를 보는 그녀의 눈빛이 조금 서글퍼 보이긴 했지만, 기분 탓일 테지.“나리. 오늘도 소인이 도와드릴 일이 없을까요?”“없다. 이제 네 도움은 필요 없어. 서류는 거의 다 정리를 끝냈으니, 이제 밤새 일을 할 필요는 없다.”“네.”“할 말 없으면 나가보거라.”그녀는 대답 없이 그의 방 앞을 떠났다.시선은 서책에 향했고, 들리는 것은 여상한 그녀의 목소리일 뿐이니 그녀가 지금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후-”정신이 사나워, 글자가 눈에 들지 않았다.홍양은 자리에 누워 눈을 감았다. 눈을 감아도, 잡념들이 그를 떠나지 않았다.밤이 깊었지만, 도저히 잠이 들지 않아 홍양은 방을 나섰다.멀리, 하령의 방에서 등불이 새어 나왔다.‘아직, 안자나?’그는 발소리를 죽이고, 그녀의 거처로 다가갔다.다가갈수록 문틈사이로 흐느끼는 소리가 점점 커졌다.단, 한 번도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지 않던 그녀였다.소리 내 울지 않던, 그저 빙그레 웃기만 하던 그녀가 울고
홍양은 저도 모르게 자꾸 그녀를 훔쳐보고, 그녀가 궁금하고 그녀에게 다가가려는 마음을 애써 눌러야 했다. 한양에 두고 온, 부인과 아이들을 떠올렸다. 절대, 그들을 실망시키고 싶지 않았다. 언제까지나 고고한 선비이기를 바랐다. “나리.” 그가 뒤를 돌아보자, 게슴츠레 눈을 뜬 하령이 곁으로 다가왔다. “송구합니다. 깜빡 잠이 들었나 봐요. 이만, 소인은 가보겠습니다.” 홍양은 그녀에게 시선을 두지 않고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 다음날, 온 마을을 뒤덮은 거센 눈발에 홍양은 관아에서 나와, 일찍 집으로 돌아왔다. 늘 자신을 맞아주던 하령이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눈이 오는 게 어딜 간 게야?” 그는 구들장으로 가, 그녀와 자신의 방에 장작을 밀어 넣고는 다시 밖으로 나왔다. 향리가 나무를 지고 들어오며, 그에게 꾸벅 인사를 했다. “하령이 보이지 않는구나.” “아까 마주쳤을 때, 빨래터에 간다고 했습니다.” 홍양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별일 아니라는 듯, 방으로 들어갔다. 등불을 켜고, 서책을 폈다. 어쩐지 글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거세지는 바람과 눈발이 신경이 쓰여 자꾸만 밖을 내다봐야 했다. 결국, 참지 못하고 방문을 넘었다. 눈발은 더 거세지고, 눈은 발목을 넘어 무릎깊이까지 쌓이고 있었다. “왜 이리 안 오는 게야?” 초조한 발걸음이 눈 위에 발자국을 깊게 남겼다. 그는 더는 기다리지 못하고, 설피를 짚신 위에 단단히 묶고, 도롱이를 걸친 뒤 삿갓을 눌러썼다. 한발 한발 걷는 것조차 힘이 들었다. 겨우 빨래터에 도착했지만, 하령은 보이지 않았다. 그의 심장이 불안함을 감지한 듯,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그는 빨래터 인근을 다 뒤졌지만, 그녀는 보이지 않았다. 근처 산으로 오르며 하령의 이름을 불렀다. “하령아! 하령아!” 정신없이 그녀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을, 그는 인지하지 못하는 듯했다. “하령아!”
스물다섯의 젊은 홍양은 듬직한 두 아들을 품에 안았다.어느새 의젓해진 큰 아들의 어깨를 붙잡는 손에 힘이 들어갔다.걱정과 근심, 애정이 가득 담긴 얼굴이었다.“문아, 아 아비가 없는 동안 동생과 어머니는 네가 지켜야 한다. 알겠지?”“네. 아버지.”진도 홍 씨 가문의 장자답게, 그는 한치의 흐트러짐 없이 우렁차게 대답했다.“늦겠습니다. 대감. 어서 서두르세요.”곧 산달이 다가오는 부인은, 먼 길을 떠나는 지아비 앞에서도 흐트러짐이 없었다.아쉬움의 눈빛도, 다정한 인사말도.그것이 이 큰 저택과 집안을 지탱하는 그녀의 책임감임을 알기에, 서운하지는 않았다.그는 그녀를 품에 안으려던 손을 거두며, 담담히 말했다.“다녀 오리다.”홍양은 말에 올라탔다.자신을 향해 허리를 숙인 아들들과 부인은, 그가 사라질 때까지 고개를 들지 않고 그를 배웅했다.홍양은 전라 나주목 관할의 군수로 임명이 되어 길을 나서는 길이다.3년. 가족과 떨어져 고생을 하겠지만, 한양에 다시 돌아오면 그는 더 높은 자리로 갈 수 있을 것이다.그것을 위해서는 이 정도 불편함쯤은 충분히 감수할 만하며, 어쩌면 당연한 수순이었다.가족을 두고 멀리 떠나야 하는 그의 걱정과 부담을, 그의 부인은 단칼에 잘라 냈다.어서 다녀와, 가문을 빛내라며 그를 독려했다.그 독려에 그 또한 그리하리라 마음 먹었다.먼 길을 달려, 바다가 보이는 전라도 나주목에 도착했다.넓은 평야와 산, 바다가 어우러진 풍경 좋은 곳이었다.“어서 오십시오. 군수 나리. 이쪽으로 오시지요.”향리가 홍양이 거처할 가옥으로 안내를 했다.아담하지만, 기품이 넘치는 곳이 꽤 마음에 들었다.특히나 사랑방에 올라 보이는 강가의 풍경이 정말 아름다웠다.그때, 관리의 뒤로 수줍게 고개를 숙인 소녀가 그를 향해 다가왔다.“인사 올리거라. 군수 나리시다.”“처음 뵙겠습니다. 나리. 윤가 하령이라 하옵니다.”다소곳하게 모은 손부터, 고개를 들 때 드러난 매끄러운 이마와 가는 눈매가
날카로운 목소리에 다시 방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방안은 피가 낭자했고, 폐비는 목에 칼을 꽂은 채 엄청난 피를 흘리며 누워 있었다.연화가 가까이 다가가자, 눈을 희미하게 뜬 폐비와 시선이 마주쳤다.눈을 파르르 떨던 폐비가 힘겹게 입을 열었지만, 소리는 나오지 않았다.하지만 그녀의 입모양으로 그녀가 마지막으로 남긴말을 연화를 알아들을 수 있었다.‘고, 고맙네.’힘겹게 말을 마친 폐비를 향해 연화가 고개를 끄덕이자, 마침내 폐비의 고개가 툭- 연화의 품에 떨어졌다.온몸에 피를 묻힌 채, 궁으로 돌아온 그녀의 행색에 궁인들이 모두 아연실색했다.그녀가 궁으로 도착했다는 소식에, 겸이 한달음에 달려왔다.소름 끼치는 행색이었다.“연화야!”그러나 겸은 아랑곳하지 않고, 그녀를 품에 안았다.“어찌, 그곳에 혼자 간 것이야? 이제 네 손에 피를 묻히지 않아도 되는데!”“마무리 짓고 싶었습니다. 근데, 스스로 떠나셨습니다.”“그래, 그래.”그녀의 등을 쓰다듬는 그의 따뜻한 손에 눈이 저절로 감겼다.“그 업보를 다 어찌할는지요.”“그 정도 각오도 않고 그런 짓을 저지르지는 않았을 것이다.”“이제, 정말 끝인가요?”“아니, 생은 길고 왕관의 무게는 무겁다. 앞으로 살아갈 날들에 어찌 풍파가 없겠느냐.”“그렇겠지요?”그의 턱이 연화의 어깨에서 들썩였다.“하지만 너와 나, 우리가 함께 라면 견디지 못할 일들이 무엇이겠느냐.”연화는 그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이제는 소년티를 벗은 중후하고 인자한 그가, 큰 품에 그녀를 품고 있다.헤쳐나가지 못할 일이 어디 있으랴.함께 전장을 돌고, 모진 궁궐의 암투와 풍파를 함께 거쳐 왔는데.그 모든 것이 서로에 대한 연심과 끈끈한 연대로 이루어진 것이니, 그와 함께라면 남은 삶은 축복이 될 것이다.연화는 겸의 손의 꽉 그러쥐었다.“전하, 피곤합니다. 자고 싶어요. 곁에 계셔주실 거죠?”그녀를 향한 애정 어린 눈빛이 스며들고, 그녀의 곤한 눈가를 쓰다듬는 손길은 퍽-부드러웠다.“그러고
무어라 답을 해야 할까?언젠가는 세자가 알게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었다.하지만 막상 그 순간이 오자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이제는 궁 안 모든 이가 연화가 호위무사였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자신과 임금을 지키던 무사가 어머니가 되어 중전의 자리에 앉았다는 걸 세자가 알게 된다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언제, 어떻게 이야기해야 세자가 이해할 수 있을까.늘 고민했지만, 아직 답을 찾지 못한 채 시간은 속절없이 흘렀었다.늘 당차고 침착하던 연화도 이 순간만큼은 평정심을 잃을 수밖에 없었다.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굳은 표정으로 선 연화를 향해, 세자가 먼저 입을 열었다.“소자는 아직 어려서 모든 것을 알고 이해하기는 어렵습니다.”“세자, 그것은…”“하지만 분명히 말씀드릴 수 있는 건, 소자는 홍연 대장도, 지금의 어마마마도 정말 좋습니다.”세자의 속 깊은 말에 감동한 연화는 그를 살포시 안았다. 그것이면 충분했다.그 작은 품에서 나오는 포용과 아량에 연화는 깊은 감동을 받았다.“세자를 속이거나 숨기려 했던 건 아닙니다. 다만 시간이 좀, 필요했어요. 시간이 지나면 세자도 이 상황을 이해하게 될 날이 올 거예요.”“예, 어마마마. 그때가 되면 어마마마께서 직접 들려주세요.”“그러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세자.”“그리고, 오늘 소자를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어마마마.”세자의 진심 어린 고마움에 연화는 목이 메어 말을 잇지 못하고, 그를 더욱 꼭 껴안았다.세자를 산에서 내려 보낸 후 연화는 일행들과 헤어져 곧장 폐비가 머무는 궁으로 향했다.궁이 눈앞에 들어오자, 억눌렸던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그녀는 말에서 뛰어내리듯 내려, 대문을 걷어차고 안으로 들어갔다.연화를 발견한 나인이 놀란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뉘, 뉘신지…”“폐비는 어디 계신가?”나인은 연화를 알아보지 못하는 듯 보였다.“마, 마마께서는…”위협적으로 다가오는 그녀에게 뒷걸음질 치는 나인을 지나쳐 안채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왔다
"이제 그만하시오. 내가 실언을 했다 하지 않았소?" "그렇게는 안 되겠는데요!" 연화는 순식간에 영도를 향해 달려들었다. "연화야!" 놀란 홍문이 그녀를 향해 소리쳤지만 이미 칼은 영도에게 겨눠지고 있었다. 영도는 재빠르게 다시 칼을 뽑아 그녀의 칼을 막아냈다. 챙! "받아주는 건 여기까지요. 이제 그만하시오. 더는 나도 참지 않겠소!" 영도의 얼굴이 울그락 불그락 달아오르고 있었다. 당최 말이 통하지 않는 여인이다. 무슨 여자가 이리도 드센지… 그렇다고 해도 여인을 상대로 최선을 다하는 것도
"그렇소." 겸 또한 그녀를 향해 정면으로 시선을 내리꽂았다. “여기 보다 높으신 분?” 턱으로 관리를 가리키며 묻는 연화를 향해 겸은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야 말이 좀 통하겠네요. 여기! 여기 좀 보십시오." 연화는 꼬깃해진 벽보를 겸 앞에 들이밀었다. "여기 누. 구. 나. 무술대회에 참가할 수 있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렇소만?" "헌데 왜 저는 대회에 참가할 수 없다고 합니까?" 겸은 잠시 물끄러미 그녀를 관찰했다. 정신 나간 사람처럼 보이지는 않는데… 그는 눈을 가늘게 뜨고 고개
이곳은 고립된 전장이며, 그의 곁에 선 유일한 여인이기에 그의 사랑을 확신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것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자신이 그에게 줄 수 있는 모든 것을 바치겠노라 다짐했으며, 신실한 약조를 했으니까. 그를 위해 무엇을 내어주어도 아깝지 않았다. 그러기에 망설이지 않았다.겸은 자신의 팔에 연화를 뉘었다. 그리고 팔을 감아 그녀를 자신의 품에 가득 안았다. 숨을 고르는 그들의 몸에서 하얀 아지랑이가 피어올랐다. 겸은 담요를 끌어와 그녀의 몸을 감싸주었다. 아직 열기가 가시지 않았지만 체온이 곧
끝없이 펼쳐진 혹한의 대지위는 그야말로 아비규환이었다. 사방은 온통 적과 아군들이 뒤섞여 생사의 전투를 치르고 있었다. 피맺힌 절규와 고통에 찬 비명, 피로 점철된 전쟁의 한복판에 한 여인이 있다. 한때는 명문가의 서녀이며, 고명딸로 철없이 해맑던 시절이 있었다. 하지만 이곳에서 그것은, 더 이상 그녀가 아니었다. 누구보다 날렵하고 강인한 무사. 홍연. 이것이 지금의 그녀이다.어느덧 적들 사이에서 요주의 인물이자, 제거 대상 1순위가 되어있었다. 늘 그렇듯 적들은 그녀와 그녀의 주군을 향해 맹렬히 달려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