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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화

Author: 진해랑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05-19 20:56:02

우리가 마주 앉은 곳은 SLP그룹 소유의 프라이빗 미팅룸이었다.

외부에 알려질 일 없는 장소.

통유리 너머로 한강이 내려다보였지만, 그날은 비 때문에 풍경이 전부 흐릿하게 번져 있었다.

휴대폰 알람이 울렸다.

<그랑 팔레 경영권 분쟁 가속>

<신윤수 전무, 지분 확보 나서>

기사 내용은 읽어보지 않아도 뻔했다.

상황은 예상대로 흘러가고 있었다. 숙부는 결코 느린 사람이 아니었다. 판을 짜기 시작하면 끝까지 밀어붙였다. 문제는, 지금 내게 시간이 없다는 거였다.

“신채은 대표님.”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고개를 들어 그를 보았다, 차도영이었다.

차도영은 사진으로 보던 것보다 훨씬 차가운 인상이었다. 셔츠부터 넥타이, 재킷 온통 검은색으로 무장한 그는 잘생긴 외모가 한층 도드라져 보였다.

“들어가시죠.”

나는 그를 따라 들어갔다.

내가 자리에 앉는 동안 차도영은 커피 테이블에서 느긋하게 커피를 내렸다.

타들어가는 내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는 여유가 넘쳤다.

부드럽고 진한 커피향이 미팅룸을 가득 채웠다.

“여기.”

그가 커피가 절반 정도 담긴 잔을 내 앞에 내려놓았다. 그가 입고 있는 옷처럼 새까만 커피에 내 얼굴이 비쳐 보였다. 내색하지 않으려 노력하는데도 초조한 기색이 차마 가려지지 않았다.

“차도영 대표님. 시간이 많지 않습니다.”

“저도 그렇습니다.”

그는 커피잔을 들어 입가로 가져가며 나를 보았다.

옅은 갈색 눈동자에는 상대의 속내를 먼저 읽고 움직이는 사람 특유의 여유가 담겨 있었다.

“신 대표님.”

달콤하리만치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하지만 이어진 말은 냉정했다.

“고민하고 있는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 준다는 겁니까?”

“계약을 제안하려고 해요.”

그의 눈동자가 커졌다. 놀랐다기보다는 확실히 흥미를 느낀 쪽에 가까웠다.

“계속 말씀하시죠.”

나는 준비해 온 서류를 꺼냈다.

“요즘 SLP그룹에서 결혼 압박을 받고 계신다고 들었어요.”

그는 한 박자 늦게 웃었다.

“아… 벌써 그 정도로 소문이 났군요.”

“재벌가 소문은 생각보다 빨리 퍼지죠.”

“그렇긴 하죠.”

그는 의자에 등을 기댔다.

“그래서?”

나는 곧장 본론으로 들어갔다.

“따로 마음에 둔 사람은 없고, 결혼 압박에서는 벗어나고 싶으시죠.”

그의 시선이 살짝 가늘어졌다.

그리고 그는 손을 들어 보였다. 계속 말해보라는 제스처였다.

“SLP와 그랑 팔레의 결합은 서로에게 나쁜 거래는 아닐 겁니다.”

내가 설명을 이어가는 동안 도영은 서류를 펼쳐 읽어내려갔다.

“SLP그룹은 이미지를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죠.”

“맞습니다.”

“그랑 팔레는 그 까다로운 기준을 충분히 통과할 수 있어요.”

“부정할 수 없군요.”

“정략 결혼에 대한 압박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고, 그랑 팔레라는 최고의 사업파트너를 얻는 거예요.”

그는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왜 하필 나죠?”

“SLP 때문이죠.”

“아니요.”

그가 말을 끊었다.

“그건 표면적인 이유고. 그래서. 신채은 씨가 얻는 건 뭡니까?”

그의 눈이 서늘해졌다. 나는 결국 속내를 털어놓을 수 밖에 없었다.

“경영권.”

그의 눈이 아주 미세하게 움직였다.

“숙부가 지분을 모으고 있어요. 하지만 SLP와 혼인 관계로 묶이게 된다면 쉽게 움직이지 못할 거예요.”

“그랑 팔레 경영권 분쟁에서 방패가 되어 달라?”

“그렇죠.”

그는 입을 꾹 다문 채 미동도 하지 않았다. 머릿속에서 수많은 경우의 수를 계산하고 있을 게 분명했다.

차는 어느새 식어 있었다.

나는 컵을 들어 한 모금 마셨다.

쓴맛이 혀끝에 남았다.

잠시 후, 그가 말했다.

“하지만 이 계약에는 맹점이 하나 있군요.”

“맹점이요?”

그는 내 눈을 바라보며 말했다.

“사랑이죠.계약서에 적기 가장 까다로운 변수.”

순간 숨이 막혔다. 그는 천천히 말을 이었다.

“신 대표님는 이 결혼을 철저히 공적인 계약이라고 못 박았죠.”

그의 목소리는 조용했지만 단정적이었다.

“하지만 감정이란 예측 불가능한 영역입니다.”

그의 시선이 나를 꿰뚫었다.

“계약에 감정이 섞이는 순간, 이 결혼은 통제가 불가능해져요.”

나는 차마 아니라고 답하지 못했다. 사실 그건 나 역시도 우려하고 있는 사항이었던 탓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예측불가능한 부분을 따지고 있을 때가 아니었기에 모른 척 넘겼을 뿐이었다.

“그걸 감당할 자신이 있습니까?”

“그럼 계약 조항으로 넣죠.”

그의 눈썹이 미세하게 움직였다.

“둘 중 한 명이라도 이 관계를 계약 이상으로 착각하는 순간.”

나는 또박또박 말했다.

“계약은 자동 파기.”

내 입에서 나온 말이었지만 어딘가 서늘하게 느껴졌다.

차도영은 한동안 말없이 나를 바라봤다. 마치 그 문장의 끝을 미리 보고 있다는 얼굴로.

“확신하시는군요.”

“그럴 일은 없을 테니까요.”

“감정 없는 결혼에도 배신은 생깁니다.”

나는 그렇게 말하며 스스로를 설득했다.

이 결혼은 업무의 연장선일 뿐이다. 감정 따위가 끼어들 여지는 없다.

한참 생각에 잠겨 있던 차도영이 펜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내가 내민 제안서 위에 몇 가지 조항을 추가로 적어 내려갔다.

<불필요한 간섭은 하지 않을 것.>

<사생활을 침범하지 않을 것.>

<언론 앞에서는 이상적인 부부로 행동할 것.>

<자신의 감정을 상대방에게 강요하지 않을 것.>

그는 잠깐 멈추더니 나를 보며 말했다.

“그리고 이건 꼭 필요하겠네요.”

펜이 다시 움직였다.

<외도는 명백한 계약 위반으로 간주한다.>

나는 그 문장을 몇 번이고 반복해서 읽었다. 그런 내가 웃긴 지 차도영이 피식, 웃는 소리를 냈다.

“생각보다 보수적이라고 생각하고 있죠?”

“그런 건 아니고.”

“괜찮습니다. 보수적인 거 맞으니까.”

제안서는 그렇게 결혼 계약서가 되었다.

나는 그의 이름 옆에 내 이름을 적었다.

사인을 마치는 순간, 펜 끝이 아주 잠깐 멈췄다.

이유는 알 수 없었다.

설명하기 어려운 예감 같은 거였다.

차도영은 그 모습을 놓치지 않았다.

그의 시선이 내 손 위에 잠시 머물렀다가 천천히 올라왔다.

“대표님.”

그가 낮게 말했다.

“계약은요, 지키는 것보다 어기는 쪽이 훨씬 쉽습니다.”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 말이 불쾌해서가 아니었다.

이상하게도, 맞는 말처럼 들렸기 때문이다.

그날 우리는 결혼이라는 이름의 계약을 체결했다.

사랑하지 않을 것.

간섭하지 않을 것.

사생활을 침범하지 않을 것.

그리고 외도하지 않을 것.

우리는 그 모든 조항을 지킬 수 있다고 믿었다.

그때는 몰랐다.

가장 먼저 깨질 조항은 외도가 아니었다.

감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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