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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Author: 밤이불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07-17 17:46:22

“Thief.”

캘럼은 곧바로 기다란 금속 도구를 건넸다. 쇠끝이 캐스크를 파고들었다.

툭.

투둑.

이윽고 잔 속으로 떨어지는 액체는 창고의 희미한 잔광을 머금고 짙은 호박색으로 출렁였다.

에단은 곧바로 마시지 않았다. 잔을 천천히 들어 빛에 비췄다. 색을 보고. 잔을 기울여 점도를 확인하고. 눈을 감은 채 향을 들이마셨다.

“…….”

창고 안은 숨소리조차 사라졌다. 그 짧은 침묵이 몇 분처럼 길게 느껴졌다. 이윽고. 그가 한 모금을 머금었다. 혀끝에서 굴리고. 입안 전체에 퍼뜨린 뒤. 천천히 삼켰다.

“Too young.”

(아직 덜 길들여졌네요.)

입가를 엄지손가락으로 가볍게 훔친 에단이 말했다. 캘럼이 예상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Figured.”

(그럴 줄 알았어요.)

에단은 이미 등을 돌리고 있었다. 마치 방금의 캐스크에는 더 이상 단 한 순간도 쓸 가치가 없다는 듯 그의 시선은 벌써 다음 오크통을 향해 있었다.

“…….”

선우는 말없이 그의 등을 바라보았다. 조금 전까지 자신을 압도하던 것은 끝없이 이어진 캐스크였다.

하지만 이제는 달랐다. 이 거대한 창고조차 한 남자의 감각을 증명하기 위해 존재하는 무대처럼 보였다.

이 공간의 진짜 주인은 시간이 아니라, 그 시간을 심판하는 저 남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선우의 머릿속을 스쳤다.

***

에단이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말없이 한 걸음 옆으로 비켜섰다.

“Try.”

그의 시선이 화살처럼 선우에게 꽂혔다. 네가 가진 본질을 증명해 보라는 명령이었다.

“……저요?”

곁에 서 있던 캘럼이 투박한 웃음을 섞어 거들었다.

“Go on.”

(해보시죠.)

선우는 숨을 길게 들이마신 뒤 앞으로 걸어 나갔다.

끝없이 이어진 캐스크.

수천 개의 시간이 잠든 숲.

손에 쥔 Thief의 차가운 금속이 긴장한 손바닥을 파고들었다.

투둑.

나무의 틈 사이로 도구를 밀어 넣자, 둔탁한 마찰음이 고요를 깼다.

이윽고 어둠 속에서 길어 올린 황금빛 액체가 조용히 유리잔 속으로 흘러내렸다.

“…….”

선우의 시선이 가느다란 물줄기의 곡선을 따라 깊게 침잠했다.

서두르지 않았다. 잔을 들어 올려 창고의 희미한 빛을 머금은, 짙게 퇴적된 호박색의 점도를 확인했다.

향이 먼저 말을 걸어왔다. 농축된 건포도의 진득한 단향이 파도처럼 밀려들었다. 그리고 그 뒤를 그림자처럼 따라붙는 스파이스.

이어서 천천히 잔을 입술에 가져다 댔다. 점성이 느껴질 만큼 묵직한 질감이 혀 위를 부드럽게 덮어왔다.

선우의 눈빛이 달라졌다.

잔 안의 액체는 스코틀랜드의 거친 비바람과 오크통의 단단한 침묵이 빚어낸 시간의 정수였다.

“셰리 캐스크네요.”

선우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그런데 건과일에서 끝나는 게 아니라, 끝맛이 열려요. PX 계열의 짙은 단맛인데…….”

잠시 눈을 감았다가 다시 떴다.

“말린 망고. 그리고 아주 익은 파인애플. 트로피컬 계열이 마지막에 올라옵니다.”

선우의 감평이 끝났다. 창고가 조용해졌다.

“Then.”

(그러면.)

에단. 그가 한 걸음 가까워졌다.

“Heart-beat.”

혀끝을 낮게 굴리는 스코틀랜드식 발음이었다.

“기억에 남는 순간과, 그때 함께한 사람이 동시에 떠오르는 위스키라면……. 버번이 좋겠습니까, 셰리가 좋겠습니까?”

그의 감청색 눈동자가 선우를 똑바로 응시했다.

​“셰리는 기억을 붙잡아두는 쪽이에요. 향이 강하고 층이 많아서 한 번 인지되면 지워지지 않죠. 대신에 무거워요.”

선우는 복잡하게 얽힌 셰리의 레이어처럼, 자신의 감정선을 정리하며 덧붙였다.

“사람보다 순간을 더 오래 남깁니다.”

선우는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버번은 반대에요. 더 직선적이고, 더 솔직하죠. 상황보다는 상대에게 포커스가 될 수 있겠네요.”

창고 안에서는 먼지 하나 떨어지는 소리까지 들릴 것 같았다. 오직 그녀의 목소리뿐이었다. 선우는 마지막으로 잔을 내려놓았다.

“사람을 기억하게 하고 싶다면 버번.”

“…….”

“순간을 영원하게 남기고 싶다면…….”

잠시 미소가 번졌다.

“셰리입니다.”

에단은 한동안 아무 말이 없었다. 다만 달라진 점이 있었다.

조금 전까지 평가자의 눈이었다면, 지금은 무언가를 발견한 사람의 눈이었다.

마침내 그의 입꼬리가 아주 희미하게 올라갔다.

“Good.”

(좋네요.)

낮고 짧은 한마디. 하지만 그 한 단어에는 방금까지의 모든 침묵보다 더 큰 무게가 실려 있었다.

에단이 한 걸음 더 가까워졌다.

“Keep that.”

(그 감각 유지하세요.)

그의 목소리가 바로 귓가에서 울렸다.

“Don't let anyone refine it out of you.”

(누구도 당신의 그 감각을 깎아내지 못하게 하세요.)

***

밤이 깊은 숙소 라운지. 유리창 너머로 스코틀랜드의 밤이 잉크를 풀어놓은 듯 천천히 번지고 있었다.

선우는 한참전부터 가만히 앉아 낮의 여운을 곱씹고 있었다. 웨어하우스의 눅눅한 공기, 끝을 가늠할 수 없을 만큼 길게 늘어섰던 캐스크의 행렬.

그리고.

그 사이를 마치 제 영토인 양 유연하게 걸어 들어가던 한 남자.

이상했다.

유리잔을 감싸 쥐던 에단의 길고 희고 단단한 손가락이 자꾸만 머릿속에 선명하게 떠올랐다.

그때였다.

“아직 안 주무십니까.”

환청처럼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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