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정맥 메이커

부정맥 메이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15
By:  밤이불Updated just now
Language: Kore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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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정맥인 것 같아. 내일 병원으로 와.” ​나를 흔든 건 너인데, 너는 나를 환자로 취급한다. 인생의 거의 모든 페이지에 주석처럼 달려 있던 권윤오라는 이름은 선우에게 단순한 짝사랑 그 이상이었다. “기꺼이 나를 이용해요.” 신규 위스키 하트비트(Heartbeat)의 한국 런칭을 위해 스코틀랜드 본사에서 파견된 무자비한 본부장 에단로웰(이현우) 그런데 이 남자, 나를 처음 보는 것 같지가 않다? 새로 부임한 본부장은 첫 만남부터 나를 여자로 흔든다. ​비즈니스 공조는 핑계일뿐? ​“당신이 어디로 가든, 그 끝엔 내가 있을 테니까.” ​누구에게도 들키고 싶지 않았던, 나의 가장 위험한 심장 소리에 대하여. ​단 한 순간도 텐션을 놓칠 수 없는, 고감도 어른 로맨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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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1

Prologue.

어둡게 가라앉은 바 안에선 나무 냄새가 났다.

오래된 위스키 배럴 속에 갇힌 것처럼 눅눅하고, 또 열병처럼 뜨거운 향.

낮은 조명 아래서 잔 속의 원액이 흔들릴 때마다 금빛 파동이 일렁였다.

낡은 스피커에선 엘비스 프레슬리의 목소리가 먼지처럼 깔리고 있었다.

ㅡ Elvis Presley - Can’t help Falling in Love.

느리고, 달콤하고, 그래서 더 잔인하게 사람 심장을 긁어대는 종류.

선우는 턱을 괸 채 잔을 기울였다.

‘Wise men say, only fools rush in…’

현명한 이들은 사랑에 투신하지 않는다고 했다. 오직 바보들만이 앞뒤 재지 않고 그 불길 속으로 뛰어든다고.

“하.”

그래. 난 바보 똥멍청이다. 선우가 자조했다. ​잔이 테이블에 내려앉으며 둔탁한 비명을 질렀다.

“또야?”

윤오가 물었다. 흰 셔츠, 지나치게 단정한 카라, 그리고 조명이 낮게 깔린 이 고루한 공간과는 지독하게 어울리지 않는 무결한 얼굴.

권윤오. 그는 선우의 가장 오래 된 ‘친구’ 였다.

“또 똥차야.”

“이번엔 뭔데.”

선우의 사랑 실패는 그에게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었다.

“바람.”

“또?”

또는.

선우가 눈을 흘겼다. 첫 연애, 그리고 바로 이전 연애 전부 다 상대방의 바람으로 막을 내렸었다.

“바람만 세 번째네.”

윤오가 잠깐 눈을 감았다 떴다.

“확률적으로 너 문제일 가능성이 높은데.”

“닥쳐.”

선우가 술을 한 입에 털어 넣었다. 식도가 타들어가는 듯한 열기가 번지자, 참았던 비참함이 역류했다.

그녀가 느끼는 비참함의 이유는 전남친의 배신. 고작 그런 이유 때문이 아니었다.

‘But I can’t help…’

흘러나오는 가사를 선우가 나직이 읊조렸다. 손은 새로 잔을 채우고 있었다. 꼴꼴꼴. 유리잔을 타고 액체가 레그를 그렸다.

“그러니까, 나는 바보라는 거지.”

“야.”

윤오가 손을 뻗어 선우의 잔을 가로챘다. 그리고 짐짓 엄한 얼굴을 지어 보였다.

“그만 마셔. 취했어.”

저 표정. 저 얼굴.

넌 그게 문제야. 권윤오.

너에게서 도망을 쳐야겠다.

선우가 허리를 피며 바 의자를 내려오려 했다. 그런데.

“나 아직 멀쩡—.”

말이 끝나기도 전에 선우의 세계가 앞으로 기울었다.

어, 어. 나 넘어간다.

탁.

반듯한 이마가 테이블에 닿기 직전, 윤오의 손이 먼저 그녀를 받아냈다.

“…….”

“…….”

그 바람에 둘 사이의 거리가 단숨에 소멸했다.

서로의 숨결이 섞이고, 그의 옷에서 나는 결벽적인 소독약 냄새가 위스키 향을 모조리 덮어버릴 만큼.

“…….”

선우가 고개를 들었다. 초점이 풀린 눈이 윤오의 턱선을 따라 천천히 올라가 끝내 그의 입술에 멈췄다.

윤오는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너.”

너무 가까웠다. 찰나의 침묵 속에서 뜨거운 숨이 섞였다. 그의 시선은 여전히 선우의 눈동자에 박제된 채였다.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선우의 시선이 느릿하게 내려가 그의 입술을 훑고, 다시 눈으로 올라와 시선을 맞췄다. 지금 이건.

쿵.

이상해.

선우의 심장이 튀었다. ‘친구’라는 이보다 더 안전할 수 없는 균형이 비명을 지르며 뒤틀리는 소리가 들렸다.

조금만 더 가까워지면, 이 눅눅한 공기 속에서 취한 척 입을 맞출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쿵, 쿵, 쿵.

쉿. 조용히 해.

그녀의 심장이 주인의 속도 모르고 세차게 펌프질을 해댔다. 윤오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선우의 얼굴을 부드럽게 감싸 쥔 손길이 뜨겁고 단단했다.

“……선우야.”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 윤오가 이름을 불렀다. 닿을 듯 말 듯한 입술 사이로 긴장감이 폭발하려던 순간이었다.

“너 부정맥인 거 같아.”

정적.

“……뭐라고?”

잘못된 게 내 귀인가? 저 녀석의 주둥이인가?

방금까지의 농밀한 공기가 얼음물을 뒤집어쓴 듯 차갑게 식었다. 선우의 미간이 형편없이 일그러졌다.

나 방금 기대한 거지?

“심박이 불규칙해. 정상 아니야. 내일 병원으로 와.”

권윤오는 이미 의사 가운을 입은 듯 핸드폰 업무 캘린더 스케줄을 확인하고 있었다.

미친놈이, 심장내과 전문의 아니랄까 봐.

10년의 짝사랑을 질환으로 치부하는 잔인함. 그것이 선우가 갇힌 권윤오라는 거대한 관성이었다.

***

“관계라…….”

에단이 낮게 읊조리며 찻잔을 내려놓았다. 달그락, 하는 소리가 정적을 깨고 비수처럼 꽂혔다.

“왜 내 눈을 피합니까? 선우씨가 지금 나한테 화를 내는 건, 내 질문에 대답할 말이 없어서 아닙니까?”

“본부장님.”

선우는 도망치듯 피했던 시선을 다시 들어 에단을 똑바로 마주 보았다. 억울함인지, 혹은 반격인지 모를 뜨거운 감정이 울컥 치밀어 올랐다.

“본부장님, 정말 몰라서 물으시는 거예요?”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찔리는 구석을 파고드는 에단의 통찰력이 잔인해서, 그리고 그 통찰력을 가진 그가 누구보다 이 상황을 잘 알고 있는 당사자였기에 더 화가 났다.

“제가 윤오를 12년이나 마음에서 못 놓고 있었던 거, 본부장님이 제일 잘 아시잖아요. 그 시간 속에 있던 저를 억지로 끌어당겨서 옆에 앉혀 놓은 건 본부장님 아니었나요?”

"……."

“그렇게 저를 헤집어 놓으셨으면, 제가 흔들리는 것 정도는 본부장님이 감당하셔야죠. "

제 화살이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는 채로 그녀의 날 선 원망이 식탁 위로 쏟아졌다.

"……."

에단은 대답 대신 가만히 선우를 응시했다. '감당'이라는 단어가 그녀의 입술 끝에 머무는 순간, 에단의 눈빛이 미세하게 일렁였다.

“감당하라고요?”

에단이 낮게 되물었을 때, 그의 목소리는 아까보다 훨씬 더 눅진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그는 들고 있던 찻잔을 천천히 내려놓았다. 손등에 솟은 푸른 힘줄이 그가 억누르고 있는 감정의 크기를 짐작케 했다.

“하고 있습니다, 지독한 감당.”

에단의 눈동자 속에는 아침에 서류를 던지던 본부장의 이성도, 연인 같은 다정함도 없었다. 자신조차 제어하지 못하는 감정의 과부하가 그대로 소용돌이치고 있는 듯했다.

“당신이 그 12년이라는 낡은 원액을 붙잡고 괴로워하는 걸 지켜보는 것부터가, 나에겐 가장 지독한 감당이니까.”

“…….”

“하지만 기억하세요. 내가 당신을 끌어낸 건, 고작 적당히 시간을 때우게 하려는 게 아닙니다. 당신의 12년을 단숨에 덮어버릴 만큼 압도적인 피니시를 주겠다고 약속했죠.”

에단의 시선이 젖은 눈동자를 뚫어지게 응시했다.

“그 남자 곁에서 마음껏 흔들리세요. 그리고 깨달으세요.”

“…….”

“당신이 돌아올 곳은 결국 그 지루하고 다정한 12년이 아니라, 나라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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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녁수
권녁수
시작부터 느껴지는 지독한 쓰레기컬렉터의 냄새 .. 주인공은 과연 옳은 선택을 할것인지가 너무 궁금해집니다.
2026-07-13 22:55: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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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Chapters
Prologue.
어둡게 가라앉은 바 안에선 나무 냄새가 났다. 오래된 위스키 배럴 속에 갇힌 것처럼 눅눅하고, 또 열병처럼 뜨거운 향. 낮은 조명 아래서 잔 속의 원액이 흔들릴 때마다 금빛 파동이 일렁였다. 낡은 스피커에선 엘비스 프레슬리의 목소리가 먼지처럼 깔리고 있었다.ㅡ Elvis Presley - Can’t help Falling in Love.느리고, 달콤하고, 그래서 더 잔인하게 사람 심장을 긁어대는 종류. 선우는 턱을 괸 채 잔을 기울였다. ㅡ ‘Wise men say, only fools rush in…’ ㅡ현명한 이들은 사랑에 투신하지 않는다고 했다. 오직 바보들만이 앞뒤 재지 않고 그 불길 속으로 뛰어든다고.“하.”그래. 난 바보 똥멍청이다. 선우가 자조했다. ​잔이 테이블에 내려앉으며 둔탁한 비명을 질렀다.“또야?”윤오가 물었다. 흰 셔츠, 지나치게 단정한 카라, 그리고 조명이 낮게 깔린 이 고루한 공간과는 지독하게 어울리지 않는 무결한 얼굴. 권윤오. 그는 선우의 가장 오래 된 ‘친구’ 였다.“또 똥차야.”“이번엔 뭔데.”선우의 사랑 실패는 그에게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었다.“바람.”“또?”또는. 선우가 눈을 흘겼다. 첫 연애, 그리고 바로 이전 연애 전부 다 상대방의 바람으로 막을 내렸었다.“바람만 세 번째네.”윤오가 잠깐 눈을 감았다 떴다.“확률적으로 너 문제일 가능성이 높은데.”“닥쳐.”선우가 술을 한 입에 털어 넣었다. 식도가 타들어가는 듯한 열기가 번지자, 참았던 비참함이 역류했다. 그녀가 느끼는 비참함의 이유는 전남친의 배신. 고작 그런 이유 때문이 아니었다. ㅡ ‘But I can’t help…’ ㅡ흘러나오는 가사를 선우가 나직이 읊조렸다. 손은 새로 잔을 채우고 있었다. 꼴꼴꼴. 유리잔을 타고 액체가 레그를 그렸다.“그러니까, 나는 바보라는 거지.”“야.”윤오가 손을 뻗어 선우의 잔을 가로챘다. 그리고 짐짓 엄한 얼굴을 지어 보였다.“그만 마셔. 취했어.”저 표정. 저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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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낯익은 천장이 흐릿하게 번져 보였다. 초점이 겨우 맞물리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기억은 파편화되어 군데군데 구멍이 뚫려 있었다.낮게 가라앉은 눈빛, 닿을 듯 말 듯 가깝게 느껴지던 숨결, 그리고 제 뺨을 감싸 쥐던 단단하고 뜨거운 손가락.나는 홀린 듯 권윤오를 올려다보았고, 그의 시선은 아주 천천히. 그리고 노골적으로 내 입술로. 1초가 1분처럼 느껴지던 정적 속에서 윤오가 아주 조금 고개를 숙였을 때—.‘……선우야.’고막을 간질이던 낮은 음성.쿵.심장이 무겁게 내려앉았다.‘……너 부정맥인 거 같아.’뭐라고?“뭐야?”선우가 눈을 깜빡였다.“아…….”천천히 몸을 일으키자, 머릿속의 무게추가 한 박자 늦게 따라붙으며 관자놀이를 마구 때려댔다.숙취의 통증이 뇌세포 하나하나를 망치로 때리는 기분이었다. 선우는 눈도 뜨지 못한 채 이불을 얼굴 끝까지 끌어올렸다. 꿈인가? 꿈이겠지?“…….”그냥 죽자, 김선우.콱 죽어버리자.선우가 제 얼굴을 이불로 둘둘 감아 봉인해버렸다. 숨이 막혀오는 답답함이 차라리 머릿속에서 상영 중인 흑역사 필름보다 나았다.“죽어! 그냥 죽어!”퍽ㅡ, 퍽ㅡ.선우가 침대 위에서 발버둥을 쳤다. 이불이 여기저기 형편없이 주름졌다.어제는 꽤 마셨다. 아니, ‘꽤’라는 부사는 이 대참사에 너무 예의 바른 표현이었다. 명백히, 그리고 아주 화려하게 선을 넘었다.원래 이 정도로 자신을 방치하는 타입은 아니었다. 글로벌 위스키 브랜드 한국지사에서 10년 가까이 근무해온 그녀에게 술은 업무의 연장선이었고, 스스로의 주량 컨트롤은 생존 본능에 가까웠다. 그런데 어제는 감정이 이성을 앞질렀고, 위스키는 그저 그 뒤를 따르는 훌륭한 공범이었을 뿐이다.근데 왜 하필! 권윤오냐고!선우는 얼굴을 양손으로 감싸 쥐었다. 괴로워. 너무 너무 괴로웠다.숙취 때문에 머리가 아픈 건지, 아니면 어제의 '키스 미수 사건'의 충격 때문에 뇌가 정지한 건지 분간이 안 갔다.이게 다 내 술기운이 만들어낸 화려한 망상아닐까?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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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권윤오가 있었다. 차트를 넘기고 있는 손, 고개를 드는 타이밍, 모두 평소와 다름이 없이 무결했다.“왔네.”“어.”짧은 인사와 대답이 오갔다. 윤오가 쳐다보지도 않고 말했다.“앉아.”그녀가 의자에 앉자마자 팽팽하게 당겨진 침묵이 두 사람 사이를 가로 질렀다. 윤오가 차트에서 눈을 떼고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시선이 맞물린 찰나, 선우의 머릿속으로 어제의 장면이 해일처럼 밀려들었다.제발 좀 잊어버리고 싶었다.결국 화상을 입은 듯 먼저 시선을 꺾었다. 12년이다. 이 지긋지긋한 짝사랑의 세월 동안 숨소리 하나, 눈짓 하나에 의미를 부여하지 않으려 얼마나 자신을 채찍질해왔던가.​ 권윤오의 두 눈이 저를 향하고 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도 가슴께가 간질거렸고, 귓가를 울리는 맥박 소리가 소음처럼 의식되는 거였다.“……야.”결국 ​선우가 먼저 침묵을 깼다. 갈라진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겨우 입을 열었다.“어제 있잖아.”용기를 냈는데.“심전도 검사 한번 하자.”선우의 해명이 허공에서 맥없이 잘려 나갔다.“……뭐?”“금방 끝나.““야, 나 멀쩡ㅎ…….”“확인만 하는 거야.”선우가 입을 합죽이했다. 확인이라니. 지금 네 눈앞에서 미친 듯이 뛰고 있는 이 심장 소리를, 기계로 확인이라도 하겠다는 건가. 선우는 제 마음을 들킬까 겁이 나면서도, 정작 아무것도 모르는 채 무심하게 차트만 넘기는 저 잘생긴 옆얼굴이 야속해졌다.“금방하고 점심이나 같이 하자. 배고프잖아.”어르고 달래는 투였다. 항상 이런 식이다. 12년째 반복되는 이 뻔한 술래잡기는 그녀의 속만 시커멓게 태웠다.“갑자기 왜 난린데.”선우의 날 선 물음에 윤오가 들고 있던 차트를 ‘툭’ 소리 나게 덮었다. 두 눈. 그녀가 세상에서 제일 사랑하고 제일 두려워하는 눈이 자신을 향했다.“어제 심박 이상 있었어.”윤오가 선우를 뚫어져라 응시했다. 마치 눈동자 너머로 숨겨진 맥박 하나까지 다 읽어낼 것 처럼 고요한 시선으로.“…….”간질 간질, 가슴 쪽이 신경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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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뭐야?”목소리에 당혹감이 잔뜩 묻어났다. 회사 정문 앞, 낯익은 실루엣 하나가 버티고 서 있는 것이었다. 기억하고 싶지 않은, 지긋지긋하다 못해 진저리가 쳐지는 얼굴. 민재였다.“……선우야.”그 얼굴이 점점 가까워진다. 평화롭던 공기가 단숨에 비틀렸다. 윤오와 걷던 길 위에 남아있던 가슴 떨리는 온기가 순식간에 식어버렸다.“회사까진 왜 왔어?”“전화도 안 받고, 카톡도 안 보고…​. 계속 연락했는데…​…​.”“차단했거든.”정곡을 찔렸다. 그가 멍청한 얼굴로 굳어버렸다. 하지만 비굴함은 이내 집요함으로 변질되어 또 끈질기게 거리를 좁혀왔다.“그래도 우리 얘기 좀 하자.”“할 얘기 없어.”“나 진짜 이번에는…​…​.”“됐어.”더 들어 볼 이유도 없었기에 ​단호하게 말을 잘랐다. 이미 바닥까지 드러낸 관계에 미련 따위 남아있을 리 없었다. 남이야 그러던 말던 민재는 끈질겼다. 그의 손이 선우의 팔을 향해 뻗어지던 찰나, 묵직한 그림자가 들어섰다.“그만하지 좀.”언제 다가왔는지 윤오가 선우의 앞을 가로막고 섰다. 민재의 미간이 단번에 일그러졌다.“권윤오?”윤오는 대답 대신 선우의 상태를 짧게 살폈다. 그러고는 다시 민재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시선에는 건조한 경멸이 서려 있었다.“회사까지 와서 뭐 하는 짓이야.”민재의 시선이 윤오와 선우. 두 사람을 번갈아 향하더니 이윽고 기가 찬다는 듯 헛웃음을 흘렸다.“니네 진짜….”그의 시선이 선우에게 날카롭게 꽂혔다.“나랑 헤어지고 바로 붙어먹는 게 또 권윤오야?”“뭐? 김민재, 너 말 똑바로 해.”선우의 눈동자가 분노로 번뜩였다. 민재가 답답한 듯 자신의 머리를 거칠게 쓸어넘겼다.“선우야, 내가 말했잖아. 어제 그거 다 오해라고—.”“오해?”기어코 실소가 터져 나왔다. 어이가 없다 못해 허탈할 지경이었다.내가 도대체 무슨 시간 낭비를 한 거지?“바람 피운 게 오해야?”결국 목소리가 한 옥타브 높아졌다. 점심시간이 끝나가다보니 회사 입구를 채운 사람들이 많았다. 그 시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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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들어오세요.” 문을 열자마자 낯선 기류에서 오는 긴장감이 피부를 훑었다. 그리고 넓은 회의실 창가, 쏟아지는 역광을 등지고 서 있는 남자가 보였다. 군더더기 없는 수트 핏과 조각처럼 고정된 자세. 그저 서 있는 것만으로도 공간의 모든 산소를 독점하고 있는 듯한 실루엣. “…….” 그가 천천히 몸을 돌렸다. 창을 가로지른 빛이 그의 얼굴 위로 선명한 궤적을 그리며 내려앉았다. 제일 먼저 보이는건 깊은 눈매와 한 치의 흐트러짐 없는 표정이었다. 화려한 외모였다. 하지만 선우를 압도하고 있는 것은 남자의 이목구비의 생김이 아닌, 그의 시선이었다. 가볍지도, 그렇다고 위압적이지도 않았으나 단숨에 상대를 묶어 두는 힘이 있었다. “김선우 씨?” 차분하고 흔들림 없는 목소리였다. “네, 김선우입니다.” 한 박자 늦게 터져 나온 대답 위로 남자의 구두 소리가 얹혔다. 그가 거리를 좁혀올수록, 선우는 자신이 사냥감이 된 기분을 떨칠 수 없었다. “에단 로웰입니다.” 남자가 손을 내밀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본부장님.” 서로의 손바닥이 맞닿은 짧은 찰나, 선우는 자신의 맥박이 상대의 손끝에 실시간으로 읽히고 있다는 이상한 기분에 휩싸였다. “이름은 이미 들었습니다.” 그가 손을 놓으면서 자연스럽게 말을 이었다. “아시아 태평양 브랜드 총괄로 파견 왔습니다. 이번 분기 신규 위스키 론칭부터 김선우 과장님과 함께하게 될 겁니다.” 과하게 힘을 주지도, 가볍지도 않은 태도였다. 하지만 그의 저음에는 거부할 수 없는 확신과 지배력이 실려 있었다. “잘 부탁드립니다.” 그가 여유롭게 웃는다. “저도 잘 부탁드립니다. 본부장님.” 선우는 에단의 시선이 제 얼굴 어디쯤 머물고 있는지 신경 쓰였다. 이 남자의 눈동자는 꼭 잘 숙성된 위스키의 원액처럼 깊고, 속을 알 수 없는 위험한 향기를 풍기고 있었다. “그럼……. 저는 이만 업무 복귀해 보겠습니다.” 선우가 서둘러 몸을 돌린 찰나였다. “김선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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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여보세요?”찰나의 정적이 흘렀다. ㅡ “김선우 씨.”선우의 눈동자가 잘게 흔들렸다. 수화기 너머의 목소리가 제 예상을 완벽히 빗나간 탓이었다. 분명 오늘 처음 들었는데도, 이상하리만큼 낯설지 않은 음절의 무게.ㅡ “에단 로웰입니다.”아, 이 기시감의 원인은 역시나였다. 이어지는 목소리는 이전보다 조금 더 가깝게 들렸다. 그리고 뒤이어.ㅡ “뒤 돌아보시겠어요.”선우가 삐걱거리는 몸을 천천히 돌렸다. 그 곳에, 그가 서 있었다.“…….”낮은 조도가 일렁이는 바 한가운데, 낮의 정갈한 수트 차림과는 전혀 공기를 두른 남자. 그는 마치 이 공간의 주인이라도 되는 양 자연스럽게 어둠 속에 녹아 있었다. 그리고 시선이 허공에서 정확하게 맞물린 순간, 바 안의 소음들이 먼 곳의 일처럼 아득해졌다. 얼음이 잔에 부딪히는 소리도, 나른하게 흐르던 음악도 베일 너머로 사라지고 오직 그가 몰고 온 긴장감만이 폐부를 날카롭게 파고들었다.선우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저 자신이 머물던 공간의 밀도가 순식간에 진득하게 바뀌는 것을 속수무책으로 느낄 뿐이었다.찰나는 짧은 순간이 이상하리만치 길게 늘어졌다.본부장이, 여길 왜?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이런 걸 두고 하는 말인가.벙찐 선우의 앞으로 에단이 터벅, 터벅 걸어왔다. 느릿한 발걸음인데도 이상하게 주변의 공기까지 그를 따라 움직이는 것 같았다. 그리고 곧 발걸음이 그녀의 앞에 멈춰 섰다.놀란 건 비단 선우뿐만이 아니었다.수정 역시 입술을 살짝 벌린 채 인중을 길게 늘어뜨리고 그 광경을 관조했다. 평소라면 누구보다 빠르게 상황을 파악했을 그녀였지만, 지금만큼은 머릿속 계산기가 멈춘 듯했다. “놀라셨죠.” “……여기까지 어떻게.”도대체 여기까지 어떻게? 이런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히는 우연이 있을 수가 있나? “거래처 리스트 보다가 알았습니다. 한국에서 워낙 유명하기도 하고요.” “……그래서 오신 거예요? 시장조사?” “겸사겸사요.”겸사겸사. 그 말은 애매했다. 철저히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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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그런데 액정에 떠오른 이름을 보는 순간, 손끝이 미세하게 멈췄다.[윤오] “…….”에단을 향해 짧게 눈인사를 건네자 그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왜.”ㅡ “어디야.”기다렸다는 듯 돌아오는 목소리. 스물일곱 해를 들어온, 지나치게 익숙한 음성이었다.“……밖.”ㅡ “밖 어디.”“왜.”​수화기 너머로 짧은 한숨 소리가 새어 나왔다.ㅡ “차. 점심에 병원에 두고 갔잖아.”담담한 목소리였다. 하지만 그 안에는 숨길 수 없는 답답함이 배어 있었다.ㅡ “지금 어디야.”선우는 무심코 에단을 힐끗 바라봤다.“……압구정.”ㅡ “압구정? 누아르 오크?”척하면 척이었다.“응.”ㅡ “거기 있어.”​툭. 대답조차 허락하지 않겠다는 듯 전화는 일방적으로 끊겼다.“……진짜.”선우는 휴대전화를 내려다보다 작게 혀를 찼다.우리 아빠도 이 정도는 아닌데.“바쁘신가 봅니다.”에단이 잔 속 얼음을 천천히 굴리며 물었다.“……그냥, 차 때문에요.”“그럼 가보셔야겠네요.”그는 구태여 붙잡지 않았다.***“야.”​공기를 가르고 들려오는 익숙한 목소리에 선우는 소리가 난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가로등 불빛 아래, 익숙한 차체에 등을 기대고 서 있는 남자가 보였다.권윤오였다.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기다리고 있던 그는 선우와 눈이 마주치자 짧게 턱을 들었다.“빨리 와.”왜 명령이야.선우의 미간이 절로 구겨졌다.“왜.”“차 타.”“나 걸어갈 건데.”또 오기였다. 윤오가 짧게 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성큼. 단 한 걸음.“말 길게 하게 하지말고.”참 나.가슴 밑바닥에서부터 묵직한 짜증이 울컥 치밀어 올랐다. 아니, 이건 짜증보다 훨씬 더 비겁하고 축축한 감정이었다. 권윤오의 저 말투, 저 태도, 저 확신.나를 다 안다는 듯한 그 눈빛이, 결국 나를 한 발짝도 도망가지 못하게 묶어버릴 것 같아서.“넌 맨날 이런 식이야.”“……뭐?”“물어보는 척하고, 이미 다 정해놓고.”그게 싫었다.아니.싫어해야만 했다.​윤오가 다시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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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로얄 살루트 어때요?”선우가 자리로 돌아오자 수정은 아무 말 없이 그녀의 얼굴부터 훑었다. 헝클어진 감정은 감추려 할수록 티가 나는 법이었다.잠시 선우를 바라보던 수정은 말없이 몸을 돌렸다. 그리고는 진열장에서 짙은 코발트블루 도자기 병을 집어 들었다.Royal Salute 38 Year Old Stone of Destiny.영국 왕실 대관식에서 왕이 앉는 '운명의 돌'을 기리며 탄생한 블렌디드 스카치.“…….”선우는 잔을 바라봤다. 호박빛 액체가 유리 벽을 타고 천천히 번져 나갔다.천천히 잔을 들어 코끝에 가져가자 38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오크통의 숨결을 들이마신 액체의 묵직한 향이 피어 올랐다.선우는 조심스레 한 모금 머금었다. 부드럽게 혀끝을 감싼 액체가 천천히 목을 타고 흘러내렸다. 역시 좋은 술은 사람의 기분을 달래는 재주가 있었다. 가득 엉켜 있던 머릿속이, 오래 숙성된 술 한 모금에 천천히 가라앉는 기분이었다.“같은 걸로 주시죠.”어느새 곁으로 다가온 에단이 바 의자에 앉아 느긋하게 등을 기댔다.간 줄 알았는데.에단은 잔을 들어 조명을 향해 기울였다. 그가 자세를 고쳐 앉자 잘 재단된 슈트가 미세한 마찰음을 냈다.호박빛 액체가 유리 안에서 천천히 흔들렸다. 그 빛이 감청색 눈동자에 스며들자 차갑던 눈빛에 순간 금빛 온기가 번졌다.“이 정도 숙성의 블렌디드는…….”그가 나직이 입을 뗐다.“시간이 맛을 정리했다기보다는, 층을 쌓아 올린 쪽에 가깝습니다.”낮고 일정한 목소리.조급함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말투.말을 할 때마다 움직이는 입술의 선은 놀라울 정도로 정교해서, 선우는 저도 모르게 또 그의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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