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뭐야?”
목소리에 당혹감이 잔뜩 묻어났다. 회사 정문 앞, 낯익은 실루엣 하나가 버티고 서 있는 것이었다. 기억하고 싶지 않은, 지긋지긋하다 못해 진저리가 쳐지는 얼굴. 민재였다. “……선우야.” 그 얼굴이 점점 가까워진다. 평화롭던 공기가 단숨에 비틀렸다. 윤오와 걷던 길 위에 남아있던 가슴 떨리는 온기가 순식간에 식어버렸다. “회사까진 왜 왔어?” “전화도 안 받고, 카톡도 안 보고…. 계속 연락했는데…….” “차단했거든.” 정곡을 찔렸다. 그가 멍청한 얼굴로 굳어버렸다. 하지만 비굴함은 이내 집요함으로 변질되어 또 끈질기게 거리를 좁혀왔다. “그래도 우리 얘기 좀 하자.” “할 얘기 없어.” “나 진짜 이번에는…….” “됐어.” 더 들어 볼 이유도 없었기에 단호하게 말을 잘랐다. 이미 바닥까지 드러낸 관계에 미련 따위 남아있을 리 없었다. 남이야 그러던 말던 민재는 끈질겼다. 그의 손이 선우의 팔을 향해 뻗어지던 찰나, 묵직한 그림자가 들어섰다. “그만하지 좀.” 언제 다가왔는지 윤오가 선우의 앞을 가로막고 섰다. 민재의 미간이 단번에 일그러졌다. “권윤오?” 윤오는 대답 대신 선우의 상태를 짧게 살폈다. 그러고는 다시 민재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시선에는 건조한 경멸이 서려 있었다. “회사까지 와서 뭐 하는 짓이야.” 민재의 시선이 윤오와 선우. 두 사람을 번갈아 향하더니 이윽고 기가 찬다는 듯 헛웃음을 흘렸다. “니네 진짜….” 그의 시선이 선우에게 날카롭게 꽂혔다. “나랑 헤어지고 바로 붙어먹는 게 또 권윤오야?” “뭐? 김민재, 너 말 똑바로 해.” 선우의 눈동자가 분노로 번뜩였다. 민재가 답답한 듯 자신의 머리를 거칠게 쓸어넘겼다. “선우야, 내가 말했잖아. 어제 그거 다 오해라고—.” “오해?” 기어코 실소가 터져 나왔다. 어이가 없다 못해 허탈할 지경이었다. 내가 도대체 무슨 시간 낭비를 한 거지? “바람 피운 게 오해야?” 결국 목소리가 한 옥타브 높아졌다. 점심시간이 끝나가다보니 회사 입구를 채운 사람들이 많았다. 그 시선들 아래서 수치심과 짜증이 진흙물처럼 동시에 치솟았다. 찌질함의 극치를 달리는 전남친의 구질구질한 폭주, 그리고 이 모든 밑바닥을 하필이면 윤오에게 생중계하고 있다는 사실이 선우를 미치게 했다. 내 사주에 망신살이 있나. 굿이라도 해야하나. “그거 다 오해라고 했잖아!” “입 닥치고 가라.” “내 말도 들어봐야 할 거 아니야!” “확 죽여버린다!” 장소는 10년 근속 회사에, 옆에는 12년 짝사랑에. 거의 발가벗겨진 기분이었다. ***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자 좁은 공간 안에 기계 돌아가는 낮은 진동음만이 정적을 메웠다. “……하.” 선우는 벽에 등을 기대며 눈을 감았다. 지우려 해도 지워지지 않는 잔상들. 민재의 비열한 얼굴, 동료들의 수군거림. 그리고, 그 놈의 권윤오. 최악이었다. 쿵. 이제 좀 잠잠해지나 싶었던 심장 부근이 다시 뻐근해졌다. 선우는 제 가슴을 손바닥으로 꾹 눌렀다. 병원을 다시 가봐야하나. 정말이지 권윤오의 얼굴을 떠올리기만 해도 심장이 제 멋대로 튀었다. 이 정도면 중증이다, 중증. 아니 중독인가. 띵. 썩 영양가있는 생각들은 아니었다. 이윽고 엘리베이터가 멈췄다. 문이 열리자마자 날 선 목소리가 고막을 찔렀다. “김선우씨?” 오차장이었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훑어 내리는 무례한 시선이, 딱 봐도 마음에 안 든다는 얼굴이었다. “병가 낸다더니, 이제 출근이에요?” 이 앞에서 대기라도 타고 있던 걸까. 하고 속으로 생각했다. “네. 오전에 병원 좀 잠깐 다녀왔어요.” “술병은 아니지?” 알면서 왜 물어? “얼른 들어가요. 우리 신규 위스키 론칭 코앞인 거 알지? 정신줄 놓을 타이밍 아니야.” 하루도 안빠지고 꼽사리를 놓는 게 하루의 일과로 메모라도 되어있는 모양이었다. 그런데 썩 논리가 틀린 말은 아닌 것 같아 군말 없이 사무실로 들어 온 선우였다. 안으로 들어서자 익숙한 소음들이 쏟아졌다. 키보드 두드리는 소리, 날카로운 전화벨, 낮게 오가는 업무 얘기들 같은 거 말이다. “김선우 과장, 잠깐 이리로 와봐.” 봉 부장의 부름에 선우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넙적한 턱끝이 닫힌 회의실 문을 가리켰다. “오늘 신임 본부장님 오셨으니까, 인사 한번하지.” “……네?” 선우의 반응이 한 박자 늦었다. 갑자기 왠 본부장? “해외본사에서 파견온다고 했잖아. 뭘 못 들은 거 처럼 그래?” “아……. 그랬었죠. 맞아요.”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였지만, 머릿속은 온통 어제 퇴근 무렵에 멈춰 있었다. [수정] (1) 퇴근 시간이 다 된 시간이었다. 난데없이 날아든 메세지의 주인공은 압구정에서 바텐더로 일하는 수정이었다. 사원 딱지를 떼기 전까지 매주 금요일 밤이면 수정의 바를 찾았다. 수정이 내어주는 셰리 캐스크의 잔향을 맡으며 시장의 밑바닥 민심을 읽었고, 수정은 그런 선우에게 업계의 은밀한 생리와 술꾼들의 진짜 갈증이 무엇인지를 가르쳐준 스승이자 든든한 아군이었다. 그렇게 쌓아온 시간이 벌써 몇 년이었다. 술 이야기라면 안주 한 접시 없이도 밤을 새울 수 있는 두 사람이었기에, 수정이 이 시간에 텍스트 한 줄 없이 사진부터 보냈다는 건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거대한 경고임을 의미했다. [사진1] 사진을 확인하는 순간, 선우는 손끝부터 피가 역류하는 기분을 느꼈다. “…….” 사진은 흔들림 없이 선명했다. 압구정 특유의 조도를 낮춘 어둑한 조명, 구리빛으로 빛나는 바 테이블의 매끄러운 질감. 수없이 드나들며 관리했던 곳이라 눈을 감고도 그려낼 수 있는 풍경이었지만, 그 익숙함이 오히려 현실감을 앗아갔다. “허…….” 어두운 조명 아래서 낯선 여자와 엉켜 있는 사진 속 남자는 제 연인이었다. 뒤이어 메시지가 올라왔다. ㄴ언니 이거……. ㄴ말해줘야 할 것 같아서……. 그렇게 한참을 화면만 보고 있었다. 초저녁에 다른 곳도 아닌 나와 함께 갔던 바에서 바람을 피는 남자라니, 김민재가 이렇게 꼴통새끼였나. 그 사진을 들여다보는 순간, 선우는 모든 소리가 페이드아웃 되는 것을 느꼈더랬다. “김과장!” 봉 부장의 목소리가 다시 선우를 현실로 끌어올렸다. “……예, 갑니다.” 짧게 대답하고 회의실로 향했다. 문 앞에 선 선우는 헝클어진 호흡을 가다듬으며 마른침을 삼켰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문을 두드렸다. “들어오세요.”“로얄 살루트 어때요?”선우가 자리로 돌아오자 수정은 아무 말 없이 그녀의 얼굴부터 훑었다. 헝클어진 감정은 감추려 할수록 티가 나는 법이었다.잠시 선우를 바라보던 수정은 말없이 몸을 돌렸다. 그리고는 진열장에서 짙은 코발트블루 도자기 병을 집어 들었다.Royal Salute 38 Year Old Stone of Destiny.영국 왕실 대관식에서 왕이 앉는 '운명의 돌'을 기리며 탄생한 블렌디드 스카치.“…….”선우는 잔을 바라봤다. 호박빛 액체가 유리 벽을 타고 천천히 번져 나갔다.천천히 잔을 들어 코끝에 가져가자 38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오크통의 숨결을 들이마신 액체의 묵직한 향이 피어 올랐다.선우는 조심스레 한 모금 머금었다. 부드럽게 혀끝을 감싼 액체가 천천히 목을 타고 흘러내렸다. 역시 좋은 술은 사람의 기분을 달래는 재주가 있었다. 가득 엉켜 있던 머릿속이, 오래 숙성된 술 한 모금에 천천히 가라앉는 기분이었다.“같은 걸로 주시죠.”어느새 곁으로 다가온 에단이 바 의자에 앉아 느긋하게 등을 기댔다.간 줄 알았는데.에단은 잔을 들어 조명을 향해 기울였다. 그가 자세를 고쳐 앉자 잘 재단된 슈트가 미세한 마찰음을 냈다.호박빛 액체가 유리 안에서 천천히 흔들렸다. 그 빛이 감청색 눈동자에 스며들자 차갑던 눈빛에 순간 금빛 온기가 번졌다.“이 정도 숙성의 블렌디드는…….”그가 나직이 입을 뗐다.“시간이 맛을 정리했다기보다는, 층을 쌓아 올린 쪽에 가깝습니다.”낮고 일정한 목소리.조급함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말투.말을 할 때마다 움직이는 입술의 선은 놀라울 정도로 정교해서, 선우는 저도 모르게 또 그의
그런데 액정에 떠오른 이름을 보는 순간, 손끝이 미세하게 멈췄다.[윤오] “…….”에단을 향해 짧게 눈인사를 건네자 그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왜.”ㅡ “어디야.”기다렸다는 듯 돌아오는 목소리. 스물일곱 해를 들어온, 지나치게 익숙한 음성이었다.“……밖.”ㅡ “밖 어디.”“왜.”수화기 너머로 짧은 한숨 소리가 새어 나왔다.ㅡ “차. 점심에 병원에 두고 갔잖아.”담담한 목소리였다. 하지만 그 안에는 숨길 수 없는 답답함이 배어 있었다.ㅡ “지금 어디야.”선우는 무심코 에단을 힐끗 바라봤다.“……압구정.”ㅡ “압구정? 누아르 오크?”척하면 척이었다.“응.”ㅡ “거기 있어.”툭. 대답조차 허락하지 않겠다는 듯 전화는 일방적으로 끊겼다.“……진짜.”선우는 휴대전화를 내려다보다 작게 혀를 찼다.우리 아빠도 이 정도는 아닌데.“바쁘신가 봅니다.”에단이 잔 속 얼음을 천천히 굴리며 물었다.“……그냥, 차 때문에요.”“그럼 가보셔야겠네요.”그는 구태여 붙잡지 않았다.***“야.”공기를 가르고 들려오는 익숙한 목소리에 선우는 소리가 난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가로등 불빛 아래, 익숙한 차체에 등을 기대고 서 있는 남자가 보였다.권윤오였다.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기다리고 있던 그는 선우와 눈이 마주치자 짧게 턱을 들었다.“빨리 와.”왜 명령이야.선우의 미간이 절로 구겨졌다.“왜.”“차 타.”“나 걸어갈 건데.”또 오기였다. 윤오가 짧게 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성큼. 단 한 걸음.“말 길게 하게 하지말고.”참 나.가슴 밑바닥에서부터 묵직한 짜증이 울컥 치밀어 올랐다. 아니, 이건 짜증보다 훨씬 더 비겁하고 축축한 감정이었다. 권윤오의 저 말투, 저 태도, 저 확신.나를 다 안다는 듯한 그 눈빛이, 결국 나를 한 발짝도 도망가지 못하게 묶어버릴 것 같아서.“넌 맨날 이런 식이야.”“……뭐?”“물어보는 척하고, 이미 다 정해놓고.”그게 싫었다.아니.싫어해야만 했다.윤오가 다시
“여보세요?”찰나의 정적이 흘렀다. ㅡ “김선우 씨.”선우의 눈동자가 잘게 흔들렸다. 수화기 너머의 목소리가 제 예상을 완벽히 빗나간 탓이었다. 분명 오늘 처음 들었는데도, 이상하리만큼 낯설지 않은 음절의 무게.ㅡ “에단 로웰입니다.”아, 이 기시감의 원인은 역시나였다. 이어지는 목소리는 이전보다 조금 더 가깝게 들렸다. 그리고 뒤이어.ㅡ “뒤 돌아보시겠어요.”선우가 삐걱거리는 몸을 천천히 돌렸다. 그 곳에, 그가 서 있었다.“…….”낮은 조도가 일렁이는 바 한가운데, 낮의 정갈한 수트 차림과는 전혀 공기를 두른 남자. 그는 마치 이 공간의 주인이라도 되는 양 자연스럽게 어둠 속에 녹아 있었다. 그리고 시선이 허공에서 정확하게 맞물린 순간, 바 안의 소음들이 먼 곳의 일처럼 아득해졌다. 얼음이 잔에 부딪히는 소리도, 나른하게 흐르던 음악도 베일 너머로 사라지고 오직 그가 몰고 온 긴장감만이 폐부를 날카롭게 파고들었다.선우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저 자신이 머물던 공간의 밀도가 순식간에 진득하게 바뀌는 것을 속수무책으로 느낄 뿐이었다.찰나는 짧은 순간이 이상하리만치 길게 늘어졌다.본부장이, 여길 왜?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이런 걸 두고 하는 말인가.벙찐 선우의 앞으로 에단이 터벅, 터벅 걸어왔다. 느릿한 발걸음인데도 이상하게 주변의 공기까지 그를 따라 움직이는 것 같았다. 그리고 곧 발걸음이 그녀의 앞에 멈춰 섰다.놀란 건 비단 선우뿐만이 아니었다.수정 역시 입술을 살짝 벌린 채 인중을 길게 늘어뜨리고 그 광경을 관조했다. 평소라면 누구보다 빠르게 상황을 파악했을 그녀였지만, 지금만큼은 머릿속 계산기가 멈춘 듯했다. “놀라셨죠.” “……여기까지 어떻게.”도대체 여기까지 어떻게? 이런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히는 우연이 있을 수가 있나? “거래처 리스트 보다가 알았습니다. 한국에서 워낙 유명하기도 하고요.” “……그래서 오신 거예요? 시장조사?” “겸사겸사요.”겸사겸사. 그 말은 애매했다. 철저히
“들어오세요.” 문을 열자마자 낯선 기류에서 오는 긴장감이 피부를 훑었다. 그리고 넓은 회의실 창가, 쏟아지는 역광을 등지고 서 있는 남자가 보였다. 군더더기 없는 수트 핏과 조각처럼 고정된 자세. 그저 서 있는 것만으로도 공간의 모든 산소를 독점하고 있는 듯한 실루엣. “…….” 그가 천천히 몸을 돌렸다. 창을 가로지른 빛이 그의 얼굴 위로 선명한 궤적을 그리며 내려앉았다. 제일 먼저 보이는건 깊은 눈매와 한 치의 흐트러짐 없는 표정이었다. 화려한 외모였다. 하지만 선우를 압도하고 있는 것은 남자의 이목구비의 생김이 아닌, 그의 시선이었다. 가볍지도, 그렇다고 위압적이지도 않았으나 단숨에 상대를 묶어 두는 힘이 있었다. “김선우 씨?” 차분하고 흔들림 없는 목소리였다. “네, 김선우입니다.” 한 박자 늦게 터져 나온 대답 위로 남자의 구두 소리가 얹혔다. 그가 거리를 좁혀올수록, 선우는 자신이 사냥감이 된 기분을 떨칠 수 없었다. “에단 로웰입니다.” 남자가 손을 내밀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본부장님.” 서로의 손바닥이 맞닿은 짧은 찰나, 선우는 자신의 맥박이 상대의 손끝에 실시간으로 읽히고 있다는 이상한 기분에 휩싸였다. “이름은 이미 들었습니다.” 그가 손을 놓으면서 자연스럽게 말을 이었다. “아시아 태평양 브랜드 총괄로 파견 왔습니다. 이번 분기 신규 위스키 론칭부터 김선우 과장님과 함께하게 될 겁니다.” 과하게 힘을 주지도, 가볍지도 않은 태도였다. 하지만 그의 저음에는 거부할 수 없는 확신과 지배력이 실려 있었다. “잘 부탁드립니다.” 그가 여유롭게 웃는다. “저도 잘 부탁드립니다. 본부장님.” 선우는 에단의 시선이 제 얼굴 어디쯤 머물고 있는지 신경 쓰였다. 이 남자의 눈동자는 꼭 잘 숙성된 위스키의 원액처럼 깊고, 속을 알 수 없는 위험한 향기를 풍기고 있었다. “그럼……. 저는 이만 업무 복귀해 보겠습니다.” 선우가 서둘러 몸을 돌린 찰나였다. “김선
“뭐야?”목소리에 당혹감이 잔뜩 묻어났다. 회사 정문 앞, 낯익은 실루엣 하나가 버티고 서 있는 것이었다. 기억하고 싶지 않은, 지긋지긋하다 못해 진저리가 쳐지는 얼굴. 민재였다.“……선우야.”그 얼굴이 점점 가까워진다. 평화롭던 공기가 단숨에 비틀렸다. 윤오와 걷던 길 위에 남아있던 가슴 떨리는 온기가 순식간에 식어버렸다.“회사까진 왜 왔어?”“전화도 안 받고, 카톡도 안 보고…. 계속 연락했는데…….”“차단했거든.”정곡을 찔렸다. 그가 멍청한 얼굴로 굳어버렸다. 하지만 비굴함은 이내 집요함으로 변질되어 또 끈질기게 거리를 좁혀왔다.“그래도 우리 얘기 좀 하자.”“할 얘기 없어.”“나 진짜 이번에는…….”“됐어.”더 들어 볼 이유도 없었기에 단호하게 말을 잘랐다. 이미 바닥까지 드러낸 관계에 미련 따위 남아있을 리 없었다. 남이야 그러던 말던 민재는 끈질겼다. 그의 손이 선우의 팔을 향해 뻗어지던 찰나, 묵직한 그림자가 들어섰다.“그만하지 좀.”언제 다가왔는지 윤오가 선우의 앞을 가로막고 섰다. 민재의 미간이 단번에 일그러졌다.“권윤오?”윤오는 대답 대신 선우의 상태를 짧게 살폈다. 그러고는 다시 민재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시선에는 건조한 경멸이 서려 있었다.“회사까지 와서 뭐 하는 짓이야.”민재의 시선이 윤오와 선우. 두 사람을 번갈아 향하더니 이윽고 기가 찬다는 듯 헛웃음을 흘렸다.“니네 진짜….”그의 시선이 선우에게 날카롭게 꽂혔다.“나랑 헤어지고 바로 붙어먹는 게 또 권윤오야?”“뭐? 김민재, 너 말 똑바로 해.”선우의 눈동자가 분노로 번뜩였다. 민재가 답답한 듯 자신의 머리를 거칠게 쓸어넘겼다.“선우야, 내가 말했잖아. 어제 그거 다 오해라고—.”“오해?”기어코 실소가 터져 나왔다. 어이가 없다 못해 허탈할 지경이었다.내가 도대체 무슨 시간 낭비를 한 거지?“바람 피운 게 오해야?”결국 목소리가 한 옥타브 높아졌다. 점심시간이 끝나가다보니 회사 입구를 채운 사람들이 많았다. 그 시
권윤오가 있었다. 차트를 넘기고 있는 손, 고개를 드는 타이밍, 모두 평소와 다름이 없이 무결했다.“왔네.”“어.”짧은 인사와 대답이 오갔다. 윤오가 쳐다보지도 않고 말했다.“앉아.”그녀가 의자에 앉자마자 팽팽하게 당겨진 침묵이 두 사람 사이를 가로 질렀다. 윤오가 차트에서 눈을 떼고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시선이 맞물린 찰나, 선우의 머릿속으로 어제의 장면이 해일처럼 밀려들었다.제발 좀 잊어버리고 싶었다.결국 화상을 입은 듯 먼저 시선을 꺾었다. 12년이다. 이 지긋지긋한 짝사랑의 세월 동안 숨소리 하나, 눈짓 하나에 의미를 부여하지 않으려 얼마나 자신을 채찍질해왔던가. 권윤오의 두 눈이 저를 향하고 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도 가슴께가 간질거렸고, 귓가를 울리는 맥박 소리가 소음처럼 의식되는 거였다.“……야.”결국 선우가 먼저 침묵을 깼다. 갈라진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겨우 입을 열었다.“어제 있잖아.”용기를 냈는데.“심전도 검사 한번 하자.”선우의 해명이 허공에서 맥없이 잘려 나갔다.“……뭐?”“금방 끝나.““야, 나 멀쩡ㅎ…….”“확인만 하는 거야.”선우가 입을 합죽이했다. 확인이라니. 지금 네 눈앞에서 미친 듯이 뛰고 있는 이 심장 소리를, 기계로 확인이라도 하겠다는 건가. 선우는 제 마음을 들킬까 겁이 나면서도, 정작 아무것도 모르는 채 무심하게 차트만 넘기는 저 잘생긴 옆얼굴이 야속해졌다.“금방하고 점심이나 같이 하자. 배고프잖아.”어르고 달래는 투였다. 항상 이런 식이다. 12년째 반복되는 이 뻔한 술래잡기는 그녀의 속만 시커멓게 태웠다.“갑자기 왜 난린데.”선우의 날 선 물음에 윤오가 들고 있던 차트를 ‘툭’ 소리 나게 덮었다. 두 눈. 그녀가 세상에서 제일 사랑하고 제일 두려워하는 눈이 자신을 향했다.“어제 심박 이상 있었어.”윤오가 선우를 뚫어져라 응시했다. 마치 눈동자 너머로 숨겨진 맥박 하나까지 다 읽어낼 것 처럼 고요한 시선으로.“…….”간질 간질, 가슴 쪽이 신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