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그런데 액정에 떠오른 이름을 보는 순간, 손끝이 미세하게 멈췄다.
[윤오] “…….” 에단을 향해 짧게 눈인사를 건네자 그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왜.” ㅡ “어디야.” 기다렸다는 듯 돌아오는 목소리. 스물일곱 해를 들어온, 지나치게 익숙한 음성이었다. “……밖.” ㅡ “밖 어디.” “왜.” 수화기 너머로 짧은 한숨 소리가 새어 나왔다. ㅡ “차. 점심에 병원에 두고 갔잖아.” 담담한 목소리였다. 하지만 그 안에는 숨길 수 없는 답답함이 배어 있었다. ㅡ “지금 어디야.” 선우는 무심코 에단을 힐끗 바라봤다. “……압구정.” ㅡ “압구정? 누아르 오크?” 척하면 척이었다. “응.” ㅡ “거기 있어.” 툭. 대답조차 허락하지 않겠다는 듯 전화는 일방적으로 끊겼다. “……진짜.” 선우는 휴대전화를 내려다보다 작게 혀를 찼다. 우리 아빠도 이 정도는 아닌데. “바쁘신가 봅니다.” 에단이 잔 속 얼음을 천천히 굴리며 물었다. “……그냥, 차 때문에요.” “그럼 가보셔야겠네요.” 그는 구태여 붙잡지 않았다. *** “야.” 공기를 가르고 들려오는 익숙한 목소리에 선우는 소리가 난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가로등 불빛 아래, 익숙한 차체에 등을 기대고 서 있는 남자가 보였다. 권윤오였다.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기다리고 있던 그는 선우와 눈이 마주치자 짧게 턱을 들었다. “빨리 와.” 왜 명령이야. 선우의 미간이 절로 구겨졌다. “왜.” “차 타.” “나 걸어갈 건데.” 또 오기였다. 윤오가 짧게 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성큼. 단 한 걸음. “말 길게 하게 하지말고.” 참 나. 가슴 밑바닥에서부터 묵직한 짜증이 울컥 치밀어 올랐다. 아니, 이건 짜증보다 훨씬 더 비겁하고 축축한 감정이었다. 권윤오의 저 말투, 저 태도, 저 확신. 나를 다 안다는 듯한 그 눈빛이, 결국 나를 한 발짝도 도망가지 못하게 묶어버릴 것 같아서. “넌 맨날 이런 식이야.” “……뭐?” “물어보는 척하고, 이미 다 정해놓고.” 그게 싫었다. 아니. 싫어해야만 했다. 윤오가 다시 한 발짝 다가왔다. 그가 내딛는 보폭만큼 두 사람 사이의 물리적 거리가 소멸했다. “그래서.” “…….” “잘못됐어?” 잘못됐냐고. 말문이 막혔다. 권윤오는 늘 옳았고, 늘 적절했으며, 늘 나를 위했다. 그 사실이 선우를 더 초라하게 만들었다. “빨리 타.” “싫다구.” 이번엔 거의 반사적으로 튀어 나간 대답이었다. 윤오의 미간이 굳어졌다. “김선우.” 이번엔 경고였다. “…….” 선우가 입을 열었다가 이내 다물었다.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이유는 없었다. 그냥 오기라도 한바탕 부려보고 싶었다. “누구야? 지금 나오는 데서.” 윤오가 선우의 뒤편, 바 출입구를 향해 턱을 까딱였다. “누구랑 있었냐고.” “…….” “또냐.” 또 남자랑 그러고 있었냐는 뜻이지. 뒷 말을 굳이 입 밖으로 내지 않아도 들렸다. “그런 거 아니거든?” “그럼 뭔데.” 한 박자도 쉬지 않고 반격이 몰아쳤다. 선우는 입술을 깨물었다. 구질구질하게 설명하기 싫었다. 아니, 설명할 필요도 없었다. 윤오 역시 한 발짝도 물러서지 않았다. 선우는 속이 뒤틀리는 기분을 감출 수 없었다. “상관없잖아.” 결국, 내뱉지 말아야 할 말이 터져 나왔다. 순간, 무거운 정적이 내려앉았고 공기는 유리막이 깨지듯 비틀렸다. 윤오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선우는 생경한 압박감에 숨을 들이켜는 법조차 잊어버렸다. 내뱉고는 즉시 후회하고 있는 중이었다. “상관없어?” 한참 뒤에야 떨어진 목소리는 놀라울 만큼 잔잔했다. “……어.” 선우는 턱 끝에 힘을 주었다. “상관없어.” 선우는 기어코 비뚤어진 진심을 뱉어냈다. 이번만큼은 피하지 않았다. 정면으로 그의 눈을 마주했다. “…….” 네가 내 연애를 걱정하든, 내 오답을 비웃든, 그 모든 게 '친구'라는 선 안에서만 허용되는 오지랖이라면 이제는 질색이었다. 두 사람 사이로 무거운 침묵이 떨어졌다. 윤오는 선우를 오래 바라봤다. 감정을 읽을 수 없는 눈이었다. 그런 그가 이내 아주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윤오는 미련 없이 몸을 돌렸다. 곧 엔진소리와 함께 차가 멀어졌다. 진짜로 가버렸다 권윤오. *** 낮게 가라앉은 밤공기 위로 붉은 불꽃 하나가 작게 일렁였다. 남자의 손가락 사이에 끼워진 담배 끝이 타들어 가며 가느다란 연기를 뱉어냈다. 그는 벽에 비스듬히 기댄 채, 한 폭의 비극적인 연극을 감상하듯 모퉁이 너머의 두 사람을 지켜보고 있었다. ㅡ “누구랑 있었냐고, 안에.” ㅡ “상관없잖아.” 멀리서 선우의 날 선 목소리가 바람을 타고 날아와 남자의 귀끝을 때렸다. 그 순간. 남자의 입술 끝이 아주 미세하게 휘어졌다. ㅡ “상관없어?” ㅡ “……어. 상관없어.” 남자는 담배를 입에 문 채 한동안 아무 말이 없었다. 붉게 타오르던 불씨가 천천히 짧아졌다. 이윽고 그가 깊게 연기를 들이마셨다가, 길게 내뱉었다. “그래.” 곧 이어 끼이익—! 타이어가 아스팔트를 긁는 비명이 들려왔다. 뒤이어 신경질적으로 터지는 엔진음이 여자의 발치에 머물던 미련을 강제로 앗아가버리고 만다. 멀어지는 붉은 후미등이 골목 끝에서 번뜩이다가 끝내 어둠 속으로 완전히 삼켜졌다. “…….” 툭. 남자가 담배를 구두 끝으로 짓이겼다. 그가 어둠 속에서 천천히 걸음을 뗐다. 고요한 골목에 구두 소리가 일정한 간격으로 번져 나갔다. 서두르는 기색은 없었다. 그의 시선 끝에는, 홀로 남겨진 여자 하나. 이제는 닻을 잃고 난파선처럼 흔들리는 선우를 건져 올릴 시간이었다.하이랜드의 아침은 태초의 지구를 닮아 있었다. 낮게 깔린 안개가 끝없이 이어진 구릉을 감싸 안고, 짙은 초록과 갈색, 보랏빛 헤더가 겹겹이 쌓인 대지는 수백 년의 시간을 침묵으로 품고 있었다. 바람은 차가웠고, 그 적막마저도 이 땅의 일부처럼 느껴졌다. 창고 안으로 들어선 선우의 감각은 전날보다 한층 또렷해져 있었다. 웨어하우스의 묵직한 철문이 열리자, 선우의 감각이 단숨에 깨어났다. 젖은 목재의 냉기. 비를 머금은 흙내음. 오랜 세월 이끼를 품은 돌벽의 습기. 그 위를 수십 년 동안 증발한 원액이 남긴 달콤한 잔향이 천천히 덮어씌웠다. 마치 시간을 들이마시는 기분이었다. 어제는 압도당했던 공간이, 오늘은 읽히기 시작하고 있었다. “시작해볼까요.” 에단의 낮은 목소리가 창고의 정적을 갈랐다. 선우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제보다 발걸음이 가벼웠다. 정확히는, 망설임이 사라지고 있었다. 에단이 하나의 캐스크 앞에서 멈춰 섰다. 거친 오크통을 손끝으로 가볍게 쓸어내리며 말했다. "어제 확인했던 구간입니다." 선우는 대답 대신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섰다. 그녀의 시선이 거대한 오크통 위를 천천히 훑었다. 세월이 조각해 놓은 나무의 결, 미세하게 벌어진 틈, 압력을 견디며 부풀어 오른 나무의 호흡. “…….” 아주 희미한 향 하나가 코끝을 스쳤다. 선우는 손바닥을 캐스크 위에 올렸다. 거친 결을 따라 손끝을 미끄러뜨리다가. 툭. 짧게 두드렸다. “이건…….” 천천히 입이 열렸다. "생
“아직 안 주무십니까.” 환청처럼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선우는 무언가 들킨 사람처럼 고개를 들었다. “……아, 본부장님.” “시차 때문인지 잠이 안 와서요.” 에단이 자연스럽게 맞은편 의자를 빼 앉았다. 금방 샤워를 마친 모양이었다. 낮 동안 몸에 배어 있던 오크와 알코올 향은 사라지고, 깨끗한 비누 향이 남아 있었다. 그의 손에는 맑은 액체가 담긴 잔 하나가 들려 있었다. 그는 말없이 잔을 선우 앞으로 밀었다. “괜찮으시면.” 권유였다. 거절할 이유는 떠오르지 않았다. “……감사합니다.” 선우가 잔을 들어 향을 맡았다. “버번이네요.” “맞습니다.” 에단이 옅게 웃었다. 선우가 한 모금 머금었다. 버번 특유의 결. 옥수수를 베이스로 만든 위스키라서 단향이 또렷하고, 복잡하게 꼬이지 않는다. 순간, 낯익은 손 하나가 기억 속에서 겹쳐졌다. ‘먹어.’ 무심한 얼굴로 고기를 잘라 접시에 올려주던 손. “…….” 선우의 미간이 미세하게 좁혀졌다. 이제는, 윤오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가슴 한편이 아릿한 느낌이 들었다. 지나가야 하는데, 지나가지 않는 것. 정리해야 하는데, 손을 대지 못하고 있는 것. 더 이상은 한계다. 선우는 요즘 그런 생각이 자신을 지배하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때. 짧은 진동. 휴대폰 화면이 밝아졌다. “…….” 휴대폰 화면 위로 선명하게 박힌 이름은 윤오였다. 언제나 타이밍은 기가 막혔다. 단 한 번의 예외 없이 선우를 지탱해 온 견고한 지지대. 그 이름을 보는 것만으로도 익숙한 다정함이 손끝에 닿을 듯 선명했다. 전화를 받으면, 평소처럼 밥은 먹었는지 묻고, 입국날 몇 시에 데리러 가겠노라 약속하며 선우를 다시 아늑하고 안온한 평화로 복귀시킬 터였다. “…….” 선우의 손끝이 휴대폰 위에서 멈췄다. 하지만 끝내 화면은 뒤집힌 채 테이블 위에 내려놓였다. “…….” 에단은 맞은편에서 잔을 가볍게 돌리고 있었다. 아무것도 묻지 않고, 아무것도 재촉하지 않는 얼굴. 얼음을
“Thief.” 캘럼은 곧바로 기다란 금속 도구를 건넸다. 쇠끝이 캐스크를 파고들었다. 툭. 투둑. 이윽고 잔 속으로 떨어지는 액체는 창고의 희미한 잔광을 머금고 짙은 호박색으로 출렁였다. 에단은 곧바로 마시지 않았다. 잔을 천천히 들어 빛에 비췄다. 색을 보고. 잔을 기울여 점도를 확인하고. 눈을 감은 채 향을 들이마셨다. “…….” 창고 안은 숨소리조차 사라졌다. 그 짧은 침묵이 몇 분처럼 길게 느껴졌다. 이윽고. 그가 한 모금을 머금었다. 혀끝에서 굴리고. 입안 전체에 퍼뜨린 뒤. 천천히 삼켰다. “Too young.” (아직 덜 길들여졌네요.) 입가를 엄지손가락으로 가볍게 훔친 에단이 말했다. 캘럼이 예상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Figured.” (그럴 줄 알았어요.) 에단은 이미 등을 돌리고 있었다. 마치 방금의 캐스크에는 더 이상 단 한 순간도 쓸 가치가 없다는 듯 그의 시선은 벌써 다음 오크통을 향해 있었다. “…….” 선우는 말없이 그의 등을 바라보았다. 조금 전까지 자신을 압도하던 것은 끝없이 이어진 캐스크였다. 하지만 이제는 달랐다. 이 거대한 창고조차 한 남자의 감각을 증명하기 위해 존재하는 무대처럼 보였다. 이 공간의 진짜 주인은 시간이 아니라, 그 시간을 심판하는 저 남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선우의 머릿속을 스쳤다. *** 에단이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말없이 한 걸음 옆으로 비켜섰다. “Try.” 그의 시선이 화살처럼 선우에게 꽂혔다. 네가 가진 본질을 증명해 보라는 명령이었다. “……저요?” 곁에 서 있던 캘럼이 투박한 웃음을 섞어 거들었다. “Go on.” (해보시죠.) 선우는 숨을 길게 들이마신 뒤 앞으로 걸어 나갔다. 끝없이 이어진 캐스크. 수천 개의 시간이 잠든 숲. 손에 쥔 Thief의 차가운 금속이 긴장한 손바닥을 파고들었다. 투둑. 나무의 틈 사이로 도구를 밀어 넣자, 둔탁한 마찰음이 고요를 깼다. 이윽고 어둠 속에서 길어 올린
문이 열리자마자 스코틀랜드 특유의 차갑고 습한 공기가 한꺼번에 밀려들었다. 으, 진짜 쌀쌀하네. 선우는 본능적으로 어깨를 움츠렸다. “춥죠.” 새로 온 본부장은 눈치 하나는 귀신인 듯했다. 선우가 대답했다. “조금요.” “벗어드릴 옷은 없는데.” 에단이 입꼬리를 비스듬히 올리며 가볍게 상의를 벗는 시늉을 했다. 선우가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짧게 웃은 에단이 앞장섰다. “5월의 스코틀랜드입니다.” 에단의 낮은 음성이 안개처럼 내려앉았다. 공기에는 이 땅의 진짜 주인인 침엽수림의 짙은 송진 향과, 방금 비를 머금은 흙냄새가 섞여 있었다. 축축한 바람이 뺨을 스치고 지나갈 때마다 서늘한 공기가 피부로 스며들었다. “차는 준비되어 있습니다. 바로 이동하시죠.” 주차장으로 향하는 길. 가느다란 빗줄기는 쉬지 않고 내렸고, 젖은 아스팔트는 회색 하늘을 그대로 품은 채 묵직하게 빛났다. “…….” 선우는 무심코 에단을 바라보았다. 비행기 안에서 보여 주던 느긋한 미소는 어느새 흔적도 없었다. 코트 깃을 세운 그는 망설임 없이 빗속을 걸었다. 그의 뒷모습에서 느껴지는 기묘한 안도감이 선우의 발걸음을 조금 더 가볍게 만들었다. *** 반나절이 넘는 비행 끝에 스코틀랜드에 도착했지만, 시차 덕분에 본사에 들어선 시각은 겨우 오후 두 시였다. “Ethan!” 낮고 굵은 목소리가 로비에 울렸다. 에단과 선우가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Good to see you.” (오랜만이네요.) 스코틀랜드 특유의 거칠고 묵직한 억양이 귀를 두드렸다. “Long flight?” (비행 길었죠?) “Could’ve been worse.” (나쁘진 않았습니다.) 에단이 짤막하게 대꾸했다. 상대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에단의 옆에 선 선우에게 멎었다. “And you are…?” (이쪽 분은?) “She’s with me.” (저랑 같이 온 사람입니다.) 잠시 말을 멈춘 에단이 선우를
오전 회의실.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서울의 빌딩 숲은 평소와 다름없이 견고했으나, 문을 닫고 들어선 회의실 안은 전혀 다른 농도의 세계였다. 베이스 작업을 위해 모인 팀원들의 눈빛에는 ‘아르벨라 코리아’의 사활이 걸린 프로젝트에 대한 거대한 압박감이 서려 있었다.스크린 위로 프로젝트의 이름이 선명하게 내려앉았다.ㅡHEARTBEAT.ㅡ이제는 모두의 심박을 지배하기 시작한 이름이었다. 에단이 먼저 침묵의 벽을 깼다.“컨셉이 생명입니다. 기획 단계에서부터 원액의 방향성이 어긋나면, 그건 마케팅이 아니라 기만이죠.”낮게 가라앉은 그의 목소리에 모두가 숨을 죽이며 동의를 표했다.박 팀장이 조심스럽게 원액 확보 계획을 묻자, 에단이 손가락 사이로 펜을 가볍게 굴리며 답했다.“직접 가죠. 스코틀랜드.”무심하게 던져진 단어였으나 거부할 수 없는 무게감이 실려 있었다.“현지 창고에서 캐스크를 직접 확인하고, 즉석에서 샘플링까지 끝내겠습니다. 김선우 과장님과 제가 가죠. 프로젝트를 설계한 사람이 현장에 있어야 조율이 빠를 테니까.”나? 저요?주변에 앉아 있던 팀원들의 시선이 화살처럼 선우에게 꽂혔다. “…….”선우의 머릿속에 시끄러운 사이렌 소리가 울려 퍼졌다. 스코틀랜드? 비행기만 10시간을 타야하는데, 거길 이 인간이랑 단둘이 가야 한다고?“김 과장님. 문제 없죠?”“물론입니다.”억지 미소를 지어 보였다. 한국 지사 최고 결정권자의 명령을 거역할 배짱 따위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다.회의는 그렇게 번복 불가능한 결론으로 마침표를 찍었다.***선우는 왼손에 캐리어를, 오른손에 여권을 쥔 채 출국장 특유의 소음 속에 서 있었다.파도처럼 밀려드는 사람들 사이로 전광판을 확인하던 그때였다.“시간 맞춰 오셨네요.”고개를 돌린 선우의 눈동자가 미묘하게 커졌다. 평소처럼 각이 살아 있는 수트 차림이 아니었다. 짙은 네이비 니트에 가볍게 걸친 코트. 힘을 뺀 듯 자연스러운 차림인데도 꾸미지 않은 여유가 오히려 더 어른스
엘리베이터 앞은 퇴근 인파가 전실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하루를 끝낸 사람들 특유의 피곤함과 들뜸이 뒤섞인 공기 그 속에서 선우는 틈 가장자리에 몸을 붙였다.그때였다. 이젠 제법 익숙해진 향기가 코끝을 스쳤다. 어젯밤 바에서도. 오늘 회의실에서도.안 봐도 알았다.뒷덜미를 타고 흐르는 시선이 따가워 선우는 자석에 이끌리듯 시선을 바닥으로 떨궜다. 괜히 확인했다가 눈이라도 마주치면 더 어색해질 것 같았다.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좁은 공간 안으로 사람들이 가득 들어찼다. 제 직감이 맞다면 에단이 바로 곁에 서 있었다.반들반들하게 닦인 대리석 바닥.그 위로 보이는 검은 구두 한 켤레.잘 재단된 슬랙스 끝단.맞네.“…….”선우는 솔직히 새로 온 본부장이 좀 불편했다. 침마냥 가늘고 날카롭게 사람 속을 콕콕 찔렀다. 게다가 눈빛 하나로 생각을 읽는 것도 같았다(말도 안되는 소리였지만).그래서 마주치고 싶지 않아 고개를 더 숙였다. 15F.엘리베이터가 천천히 내려갔다.10F.7F.4F.층수가 하나씩 바뀔 때마다 묘한 압박감이 느껴졌다. 띵.1F.문이 열리자 사람들은 기다렸다는 듯 사방으로 흩어졌다. 선우도 작게 숨을 내쉬며 밖으로 걸어 나왔다.유쾌, 상쾌, 통쾌!선우는 기분 좋게 휴대전화를 꺼냈다. 권윤오한테 연락해야지. 그 순간.“오늘 수고하셨습니다.”으악. 선우가 흠칫 놀라 뒤돌아봤다.에단이었다.“본부장님도 수고하셨습니다.”형식적인 인사 딱 그 정도였다. 에단도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그때.선우의 시선이 그의 어깨 너머로 향했다.오렌지빛 가로등 아래, 풍경처럼 익숙한 실루엣 하나가 서 있었다.권윤오였다.눈은 정확히 이쪽을 응시하고 있었다. 굳어 있던 선우의 입가가 헤벌쭉해졌다.“그럼 들어가보겠습니다. 내일 뵐게요!”선우의 말 끝이 경쾌하게 튀어 올랐다. 그녀는 황급히 윤오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아니, 거의 뛰듯이 달려갔다. 윤오가 헛웃음을 흘렸다.“초딩이냐. 뛰지마.”짐짓 엄한 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