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are

21. 강

Author: moominkiller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07-03 07:50:09

부러진 칼끝이 눈 속에서 나온 것은 한참 뒤의 일이다.

기억에는 먼저 소리가 있었다. 쇠가 우는 소리라고 하기에는 너무 짧고, 너무 높은 소리. 그다음에 우두머리의 몸이 산문 돌계단까지 밀려나 부딪었고, 부러진 칼날 반 토막이 빙글빙글 돌며 날아가 저만치 눈에 꽂혔다. 그 사이에 무엇이 있었는지 운설은 말할 수 없었다. 열린 손바닥이 칼날에 닿았다는 감촉조차 없었다. 물살에 씻긴 돌처럼, 닿은 것들이 그냥 떠내려갔다.

"형님!"

두 아우가 동시에 덤벼들었다. 정이 시킨 무모함이었을 것이다. 왼쪽에서 창이, 오른쪽에서 도끼가 왔다. 강은 그 둘을 거의 심심하다는 듯이 받아넘겼다. 몸이 반 바퀴 돌았고, 손등이 창대를 스쳤고, 팔꿈치가 어딘가에 닿았다. 그것뿐이었다.

우두둑, 하는 소리와 함께 왼쪽 사내가 손목을 안고 무너졌다. 오른쪽 사내는 두 발이 땅에서 떨어져 반 장을 날아가 처박혔다.

요골. 그리고 빗장뼈.

들리는 순간 알았다. 의녀의 귀는 뼈 부러지는 소리를 종류별로 안다. 수없이 이어 붙인 뼈들이었다. 부목을 대고, 붓기를 짚고, 아물 때까지 달포를 함께 견디던 뼈들. 그 뼈가 부러지는 소리가 지금 제 몸이 지나간 자리에서 나고 있었다.

왼쪽 사내는 부러진 손목을 겨드랑이에 끼운 채 눈 위를 기어 물러났다. 오른쪽 사내는 일어나지 못하고, 어깨를 늘어뜨린 채 짐승 같은 신음만 뱉었다. 둘 다 무기를 찾지 않았다. 그들 평생의 사냥이 가르쳐 준 대로, 이길 수 없는 것 앞에서 몸을 낮추고 있었다.

그만. 이제 그만.

강은 듣지 않았다. 물은 아직 반도 차지 않았다는 듯이, 더 깊은 데서 더 큰 물이 밀려 올라왔다. 눈에 비치는 세상이 이상하리만치 환했다. 눈송이 하나하나의 결이 보이고, 쓰러진 자들의 숨이 흰 김으로 오르는 것이 보이고, 그 숨줄기가 어디서 얕아지고 어디서 끊기는지까지 보였다. 아름다웠다. 소름 끼치게 아름다워서, 운설은 그 환함 속에서 비로소 겁이 났다. 이 눈으로 세상을 보는 일에 사람이 익숙해지면 어찌 되는가. 겁이 나는데도 눈을 감을 수 없다는 것이, 이 힘의 가장 무서운 대목인지도 몰랐다.

숨을 끊어 쉬어 보았다. 놀란 환자를 가라앉힐 때 가르치는 호흡이었다. 들이쉬고, 멈추고, 길게 내쉬고. 두 번을 채우기 전에 강이 그 숨마저 제 물살에 실어 갔다. 입술을 깨물었다. 피 맛이 났다. 아픔은 분명 제 것인데, 아픔조차 흐름을 거스르지 못했다. 왼손이 침통을 더듬어 소매까지 갔다가, 거기서 남의 손처럼 멎었다. 강은 제 물길을 막을 물건이 어디 있는지 그녀보다 잘 알았다.

우두머리가 계단 밑에서 몸을 일으키려다 도로 무너졌다. 갈비 어름을 움켜쥔 손가락 사이로 숨이 새는 소리가 났다. 부러진 뼈끝이 어디를 누르고 있는지, 환한 눈에는 그것도 보였다. 위태로운 자리였다. 한 뼘만 더 밀리면 숨주머니가 뚫린다.

살려야 한다. 의녀의 머리가 그렇게 말하는 동안.

몸은 그에게 걸어가고 있었다. 살리는 걸음이 아니었다.

강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그제야 알았다. 물은 넘치기 위해 차오른다. 시위를 얹던 손, 값을 매기던 눈, 새끼 범 운운하던 입 — 흐름은 그 모든 것 위로 덮쳐 지나가고 싶어 했다. 눈 덮인 골짜기가 강바닥으로 보였다. 쓰러진 세 사람이 물길에 놓인 돌멩이로 보였다.

강을 부탁한다, 하던 노인의 웅얼거림이 물소리 틈에서 되살아났다. 그날 밤 그 말끝에 노인은 무어라 덧붙였었다. 열에 들뜬 소리라 흘려들었던 한마디. 물은…… 물은 무어라 했던가. 기억은 딱 거기서 끊겼고, 끊긴 자리가 지금 이토록 아쉬웠다. 이 강을 다루는 법을, 어쩌면 그 잠꼬대가 쥐고 있었을 텐데.

안 된다.

운설은 흐름의 한가운데서 발버둥 쳤다. 소용없었다. 익사하는 사람이 제 팔다리를 마음대로 못 하듯, 그녀는 제 몸속에서 허우적거렸다. 오른손이 올라갔다. 손바닥이 다시 열렸다. 계단 밑에 무너진 사내의 가슴 위, 그 위태로운 자리 바로 위에서.

사냥꾼은 피하지 않았다. 구르지도, 빌지도 않았다. 피할 수 없다는 것을 아는 눈으로, 늙은 범 같은 눈으로, 눈 한 번 깜빡이지 않고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눈발 속에서, 손이 내려가기 시작했다.

Continue to read this book for free
Scan code to download App

Latest chapter

  • 설야팔부 (雪夜八部)   40. 인수(印綬)

    선우현은 오래 서 있었다.바람이 두 번 지나가고 깃발이 두 번 누웠다 일어서는 동안, 그는 돌처럼 서서 노인을 보았다. 이윽고 입을 열었을 때, 목소리는 여느 때처럼 낮고 골랐다."아버지가 그 밤에 무엇을 베었습니까.""공훈록에 길게 적혀 있네. 대회에서 낭독될 걸세." 노인은 물음을 받아넘기는 데 이골이 난 손길로 받아넘겼다. "듣고 싶으면 베고 와서 주빈석에서 듣게. 자네 집안의 공이 반 두루마리야.""공." 선우현은 그 글자를 입안에서 한 번 굴렸다. "아홉 살에 그 공의 잔치를 보았습니다. 고기 냄새가 사흘을 갔지요. 저는 그 냄새를 공의 냄새로 배웠습니다."잔치의 이야기가 나왔을 때 노인의 낯에서 무언가가 잠깐 지나갔다. 그 잔치에 저도 있었던 낯이었다. 십팔 년 전의 공훈록에 집법당의 이름이 어떻게 적혀 있을지, 운설은 문득 궁금해졌다."훌륭하게 배웠지.""요즘은 그 냄새가 다르게 기억납니다."노인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눈길이 사람을 상하게 한다더니.""눈길이 아니라 눈이었습니다. 이 땅의 눈 밑에 무엇이 묻혔는지를 보았습니다." 그는 거기서 운설 쪽을 보지 않았다. 보지 않는 것이 그가 그녀를 지키는 방식이라는 것을, 그녀는 쉰 개의 활 앞에서 이해했다. "당주. 저는 이 명을 받들 수 없습니다.""수장.""베라는 명도, 끌고 가라는 명도, 받들 수 없습니다."선우현은 허리에서 인수를 끌렀다. 옥으로 깎은 수장의 인(印)과 붉은 끈. 그는 그것을 두 손으로 받쳐 들었다가, 눈 위에 내려놓았다. 무겁게 다루지도 던지지도 않았다. 남의 물건을 임자에게 돌려주는 손이었다.운설은 그가 인수를 끄르는 손을 보고 있었다. 매듭을 짓던 손이었다. 그녀의 손바닥에 무명을 감아 주던, 조이지도 늦추지도 않던 그 손이 지금 제 평생을 끄르고 있었다. 말리고 싶었다. 저 인수 하나가 그의 스물몇 해였다. 넷에 목검을 잡은 날부터 검신이라 불린 오늘까지가 저 붉은 끈에 묶여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말리지 않았다. 말릴 자격의 문제가 아니었다.

  • 설야팔부 (雪夜八部)   39. 영웅첩

    물러설 길은 없었다. 등 뒤 비탈에 이미 매복 둘이 붙어 있다고 선우현이 말했다. 그물 안에서 몸부림치면 그물만 조여든다는 것을 두 사람 다 알았다."내가 먼저 내려가겠소." 그가 말했다. "그대는 반 마장 뒤에서 오시오. 달아나지 마시오. 활이 쉰이오."두 사람은 언덕을 내려갔다. 흰 무복들이 창을 세우며 길을 열었고, 그 길 끝에서 가마의 휘장이 걷혔다.집법당주는 늙어 있었다. 성읍의 마당에서 보았을 때보다 더. 그러나 가마에서 내려 눈을 밟는 걸음에는 지팡이가 없었고, 운설을 훑는 눈에는 흐림이 없었다.운설은 반 마장 뒤에 서서 그 문답을 다 들었다. 쉰 개의 활이 그녀 한 사람을 향해 반쯤 당겨져 있었다. 강물 소리가 가슴 밑에서 몸을 뒤척였으나 그녀는 숨으로 눌렀다. 여기서 물이 넘치면 활 쉰이 운다. 그다음은 폐사의 눈밭이 다시 벌어질 뿐이고, 이번에는 부러지는 것이 뼈 몇 대로 끝나지 않을 것이었다."수장." 노인이 먼저 선우현에게 예를 받았다. "소환장이 느린 것 같아 늙은이가 마중을 나왔네. 북쪽 눈길이 험하다더니, 과연 상하지 않고 잘 있었군. 몸도," 노인의 눈이 운설에게 옮겨 왔다. "짐도.""짐이 아니라 사람입니다." 선우현이 말했다."그 말버릇부터가 보고와 같군." 노인은 웃었다. 웃음이 눈가에 깊게 파였다. "감찰의 아이들이 별소리를 다 적어 올렸지. 수장이 계집의 손에 제 팔을 맡기더라, 밥을 마주 앉아 먹더라. 나는 그 보고를 덮었네. 검신의 이름이 그런 종이 쪼가리로 상해서야 쓰나."노인이 소매에서 두루마리를 꺼냈다. 붉은 인장이 찍힌 첩지였다."영웅첩일세. 보름 뒤 중원 무한(武漢)에서 대회가 열리네. 구파일방과 오대세가가 다 오지. 거기서 저 계집은 강호 공적이 되네. 삭월의 남은 씨, 월하심법의 임자, 왕가 삼 형제를 꺾은 요녀. 첩에 적힌 죄목일세." 노인은 두루마리를 펴지도 않고 도로 넣었다. "한데 공적첩이라는 게 말이야, 이름이 둘 오르면 값이 헐해져. 수장, 자네 이름이 지금 그 곁에 오르내리네.

  • 설야팔부 (雪夜八部)   38. 나루

    이튿날 아침, 밥그릇을 사이에 두고 그가 말했다."다녀오겠소."밥은 노인이 지어 준 조밥이었고, 처음으로 마주 앉아 먹는 밥이었다. 하필 그 밥상에서 그 말이 나왔다. 운설은 수저를 내려놓지 않았다. 내려놓으면 말이 더 무거워질 것 같았다."소환에 응하겠다는 말씀입니까.""응하는 모양을 갖추겠다는 말이오." 그는 제 그릇을 보며 말했다. "가서 시간을 벌겠소. 보고 올릴 것이 있고, 물을 것이 있소. 척후 보름이라 적은 붓이 누구 것인지. 정병 삼천이라 세운 숫자가 어느 서고에서 나왔는지. 맹의 안에서만 열리는 문들이 있소.""그 문들이 당신을 되돌려 보내 줄 것 같습니까.""모르오.""모르는 문으로 들어가시겠다고요.""그대는 얼음강을 거슬러 겨울 궁으로 가지 않소." 그가 고개를 들었다. "그쪽도 모르는 문이오."맞는 말이어서 운설은 답을 잃었다. 두 사람 다 모르는 문 앞에 서 있었고, 두 문은 반대 방향으로 나 있었다. 조밥에서 김이 다 빠지도록 아무도 수저를 들지 않았다."나루까지는 같이 가겠소." 이윽고 그가 말했다. "사백이라는 자의 눈은 믿을 만하오. 그대를 나루에서 넘기고, 나는 남쪽 관도를 타겠소."넘기고, 라는 말을 그는 물건 옮기듯 담담하게 골랐는데, 그 담담함이 도리어 서툴렀다. 운설은 문득 이 사람이 이별의 말을 지어 본 적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다. 넷에 목검을 잡은 아이는 작별을 배울 겨를도 없었을 것이다."돌아올 수 있으면," 그녀는 그릇을 포개며 물었다. "어디로 돌아오실 겁니까. 나는 어디 있을지 모르는데.""북쪽에는 강이 하나뿐이오." 그가 말했다. "강을 따라가면 되오."강을 따라가면 되오. 그 말을 운설은 캐지 않고 받아 두었다. 두 사람은 짐을 꾸렸다.노인은 사립도 없는 움막 앞에서 배웅했다. "겨울 궁에 닿거든," 노인이 운설의 봇짐 끈을 여며 주며 말했다. "마님을 만나거든 — 부수가 돌을 다 못 쌓고 죽거든 마저 쌓아 달라고 여쭈어라. 그 말이면 된다."그 말이면 된다는 말의 뜻을

  • 설야팔부 (雪夜八部)   37. 수(繡)

    "— 베지 말고 살려 두어라. 쓸 데가 있으니."사백은 명의 뒷절을 마저 옮기고 입을 닫았다. 벼르던 칼이 도로 칼집에 드는 것 같은 침묵이었다. 살려 두라는 말이 이렇게 서늘하게 들리기는 처음이었다. 북쪽의 그이는 선우가의 핏줄을 미워하는 것도 아니었다. 쓸모를 셈하고 있을 뿐이었다.선우현도 그 말의 온도를 들었을 것이다. 그는 아무 말 없이, 다만 아주 조금 고개를 기울였다. 값이 매겨진 자가 값을 매긴 자에게 보내는, 기이하게 정중한 목례였다.기름종이 안에는 두 가지가 들어 있었다.하나는 서신이었다. 접힌 자리가 낡지 않은, 오래 기다렸다 급히 쓴 글씨. — 눈이 녹기 전에, 달이 두 번 이지러지기 전에, 겨울 궁으로 오라. — 서명은 없었다. 서명 대신 종이 끝에 핏빛 실 한 올로 이지러진 달이 감쳐져 있었다.다른 하나는 천 조각이었다.빛바랜 무명에, 색 죽은 실로 놓인 수. 이지러진 달 아래 아이 둘이 손을 잡고 있는 그림이었다. 한 아이는 크고 한 아이는 작았다. 바늘땀은 고르지 않았다. 수를 배운 손이 아니라, 다만 놓고 싶어서 놓은 손의 땀이었다."부인의 수다." 사백이 말했다. "강보의 귀퉁이야. 마님께서 십팔 년을 품에 지니셨다. 그 절반을…… 너에게 보내신 게다."절반. 운설은 천의 잘린 가장자리를 손끝으로 쓸었다. 가위가 아니라 칼로 자른 자리였다. 달 아래 아이 둘 가운데 작은 아이 쪽이 그녀의 손에 있었다. 큰 아이는 북쪽의 누군가에게 있을 것이었다."보름 뒤, 얼음강 나루에서 기다리마." 사백이 말에 올랐다. "그리고 하나 더. 중원이 시끄럽다. 맹이 영웅첩(英雄帖)을 돌린다더라. 재앙의 씨를 강호 공적으로 세우는 대회(大會)를 연다고. 수장에게는," 매의 눈이 선우현을 지났다. "소환령이 떨어졌다더군. 기한 안에 돌아오지 않으면 수장의 이름도 공적첩에 나란히 오른다고."세 기수는 올 때 그랬던 것처럼 소리를 죽이고 사라졌다.노인은 수 조각을 보고 오래 말을 잃었다. "부인께서 수를 놓으시면 늘 저 모양이었지.

  • 설야팔부 (雪夜八部)   36. 뼈피리

    말은 셋, 사람도 셋이었다.눈을 죽여 밟는 말발굽이 움막 앞에서 멎었다. 재갈에 헝겊을 물린 말들이었다. 소리를 지우고 달리는 법을 아는 자들, 그러니 지금 소리를 내며 온 것은 알리며 온 것이다. 노인이 문을 밀고 나갔고, 운설과 선우현이 뒤따랐다.앞선 기수가 말에서 내렸다. 여자였다. 눈보라에 그을린 낯에 왼 눈썹을 가르는 오랜 흉이 있고, 등에는 활, 허리에는 삭도(朔刀)라 부를 법한 휜 칼을 찼다. 나이는 마흔쯤. 눈매가 사냥매의 것이었다.달빛 아래에서 보니 세 사람의 가죽옷 안깃에 같은 문양이 박혀 있었다. 이지러진 달. 다만 신패의 달과 달리, 달의 안쪽에 가느다란 핏빛 실이 한 올 감쳐져 있었다. 같은 달을 쓰되 다르게 쓰는 사람들. 혈비라는 이름이 어떤 식으로 달을 쥐고 있는지, 그 한 올이 먼저 말해 주고 있었다."부수 어른." 여자가 노인에게 북방 말씨로 예를 올렸다. "봉화가 헛것이 아니기를 빌며 왔소.""헛것이면 늙은이가 삭정이만 축낸 게지." 노인이 운설 쪽으로 반걸음 비켰다. "보아라."매의 눈이 운설에게 옮겨 왔다. 두건 아래의 흰 낯을, 값을 매기는 법 없이, 그러나 한 치도 놓치지 않고 훑는 눈이었다. 이윽고 여자가 손을 내밀었다. "패."운설은 신패를 건넸다. 여자는 그것을 달빛에 비추고, 뒤집고, 이지러진 달의 획을 엄지로 쓸었다. 그러고는 도로 내밀며 말했다."진짜 패다. 한데 패는 죽은 손목에서도 벗겨 올 수 있지.""그렇겠지요." 운설은 패를 받으며 답했다. "제가 저를 증명할 길은 저도 모릅니다. 저는 제 피를 구경한 적도 없으니."매의 눈이 아주 잠깐 흔들렸다. 그 대답을 예상 못 한 눈이었다. 여자는 품에서 작은 것을 꺼냈다. 손가락 두 마디 길이의, 누렇게 바랜 뼈피리였다."삭월의 아이들은 이 소리를 들으며 업혔다." 여자가 말했다. "피가 삭월이면, 몸이 기억한다."피리가 입술에 닿았다. 소리는 가늘고 낮았다. 곡조라 부르기도 어려운, 세 음이 오르내리는 짧은 가락이 눈 내린 골짜기에 풀렸

  • 설야팔부 (雪夜八部)   35. 그 밤

    노인의 움막은 사당 뒤 바위틈에 붙어 있었다. 세간이라고는 화로 하나, 그릇 몇, 벽에 걸린 낡은 활 한 자루. 십팔 년을 산 살림이 하룻밤 살림처럼 가벼웠다. 언제든 떠날 수 있는 자의 방이 아니라, 언제 죽어도 좋은 자의 방이었다.화롯불에 마른 뿌리차가 끓었다. 노인은 두 사람에게 그릇을 내밀고, 저는 마시지 않았다."그 밤 이야기를 해 달라 했지." 노인이 불을 보며 입을 뗐다. "눈부터 말해야겠구나. 초저녁부터 눈이 왔다. 발등이 묻히는 눈이었어. 그런 밤엔 늑대도 굴에서 안 나온다. 우리는 화덕에 겨를 넣고 일찍들 문을 닫았지. 사냥 나간 장정 서른을 빼면, 마을에 남은 건 아녀자와 늙은이, 그리고 아이들이었다.""정병 삼천은요." 운설이 물었다."삼천." 노인은 웃지 않았다. 웃음보다 오래된 것이 그 낯을 지나갔다. "삭월부가 다 긁어도 활 잡는 손이 오백이다. 그나마 절반은 사냥꾼이지 병(兵)이 아니야. 중원을 친다? 우리는 겨울을 나는 게 전쟁이었다."운설의 안에서 무언가가 천천히 식었다. 재앙의 씨. 침략의 핏줄. 그녀를 묶어 온 말들의 밑동이 이 화롯가에서 삭고 있었다. 성읍의 집법당주가 마당에서 외치던 죄목들, 방에 적힌 글자들, 화톳불 가의 이야기들 — 그 모든 것이 딛고 선 바닥이 삼천이라는 숫자 하나였다. 그리고 그 숫자를 지어낸 붓이 어딘가에 있었다.선우현은 그릇을 든 채 움직이지 않았다. 기록을 외는 자의 낯이었다. 척후 보름, 정병 삼천, 국경 도발 세 차례. 그가 자란 집의 서고에서 몇 번이고 읽었을 글자들이, 화롯불 앞에서 하나씩 재가 되고 있었다."한밤에 잠이 깼다. 오줌이 마려웠는지 개꿈을 꿨는지, 그건 기억에 없어. 기억나는 건 이상한 고요다." 노인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이보게, 젊은이들. 낯선 것 수백이 마을을 에워싸면 제일 먼저 우는 게 무언지 아나.""개." 선우현이 말했다."개지. 삭월의 개들은 눈 밑의 쥐도 듣는다. 한데 그 밤에," 노인은 화로의 재를 부지깽이로 천천히 골랐다. "개들이 짖

More Chapters
Explore and read good novels for free
Free access to a vast number of good novels on GoodNovel app. Download the books you like and read anywhere & anytime.
Read books for free on the app
SCAN CODE TO READ ON APP
DMCA.com Protection Stat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