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모임이 끝나고 부인들이 돌아간 뒤 이사벨라는 엘라엔을 불러 세웠다. “엘라엔. 앞으로는 대공 각하께서 하셨던 말씀 중에 그런 험악한 단어들은 밖으로 꺼내지 말렴. 전하께서 들으시면 네가 정무에 끼어든다고 불쾌해하실지도 모르니.”“네, 어머니. 조심할게요. 저는 그저 어머니께 칭찬받고 싶어서 아는 척을 해본 것뿐이에요.”엘라엔은 수줍게 웃으며 방으로 향했다. 복도를 걷는 그녀의 뒷모습은 여전히 연약하고 우아했다. 하지만 문을 닫고 홀로 남겨진 순간 그녀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단번에 사라졌다.그녀는 책상 위에 놓인 빈 종이에 오늘 들었던 이름들과 숫자들을 기록하기 시작했다.***라안느 공작저의 창밖에는 새벽 내 내린 서리가 정원의 조각상 위로 맺혀 창백하게 빛났다.엘라엔은 겹겹이 레이스를 덧댄, 상아색의 모닝 드레스를 입고 식당을 찾았다.그녀의 목에는 르세인이 하사한 루비 목걸이 대신 라안느 가문의 문양이 새겨진 페리도트 목걸이가 걸려 있었다. 빛의 각도에 따라 연둣빛에서 짙은 올리브색으로 변하는, 섬세하게 세공된 그 보석은 마치 엘라엔을 감시하는 르세인의 눈동자를 닮아있었다.식탁 위에는 식기들이 완벽한 대칭을 이루며 놓였고, 송로버섯을 곁들인 수란과 갓 구워낸 브리오슈, 그리고 백차가 김을 모락모락 피워냈으나 식당에 퍼져든 냉기를 녹이지는 못했다.“엘라엔. 오늘따라 유독 힘이 없어 보이는구나. 금방이라도 깨질 것처럼 말이야.”이사벨라는 은제 나이프로 훈제 연어를 얇게 저미며 말했다. 그녀의 손가락에 끼워진 에메랄드 반지가 햇살을 받아 서늘한 초록빛을 뿜어냈다. 그녀는 엘라엔의 안색을 살피는 척하면서도 얼굴 뒤에 숨은 기색을 집요하게 탐색했다.“할아버지를 뵈러 갈 생각에 잠을 조금 설쳤을 뿐이에요, 어머니.”엘라엔은 브리오슈를 작게 조각내어 입속에 넣었다. 버터의 풍미가 혀끝에 닿았지만 그녀는 그것을 맛으로 느끼기보다 우아하게 씹는 동작에 집중했다. 귀족의 식사는 허기를 채우는 행위가 아니라 자신의 교양을 증명하는 고도의 연극이었으
엘라엔은 블러드의 가르침을 떠올리며 찻잔을 내려놓고 아주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시선은 노라 남작 부인의 떨리는 부채 끝에 머물렀다. “남작 부인. 반디아의 지지는 전하께 큰 힘이 되겠지요. 하지만….”엘라엔이 말끝을 흐리자 테라스에는 기묘한 정적이 흘렀다. 순식간에 이사벨라의 표정이 미세하게 경직되었다.“하지만?”“최근 카르노스 왕궁의 함대가 제국 남부 해역을 봉쇄하려고 한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반디아의 상선들이 그곳에 발이 묶여 청동 수입에 차질을 빚고 있다던데….”“……!” “전하께 무역로를 청탁하시기 전에 그 문제부터 해결하는 게 순서가 아닐까요?”노라 남작 부인의 부채가 멈췄다. 그녀의 눈동자는 눈에 띄게 흔들리고 있었다. 그건 반디아 상업 연맹이 철저히 함구하고 있던, 연맹의 사활이 걸린 치명적인 약점이었다. 이사벨라 역시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그녀는 엘라엔이 그저 예법 수업이나 받는 줄 알았지 제국 밖의 정세… 그것도 상인들의 은밀한 자금줄 문제까지 꿰뚫고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엘라엔은 더 이상 말을 보태지 않았다. 대신 아주 기품 있는 손짓으로 식어버린 차를 한 모금 마셨다. 노라 남작 부인은 이제 엘라엔을 어린 영애가 아닌, 자신의 목줄을 쥐고 있는 거대한 피사체로 보기 시작했다. 그녀는 당황하며 이사벨라의 눈치를 살폈지만 이사벨라 또한 엘라엔의 예상치 못한 발언에 평정심을 잃고 있었다. “엘라엔, 그런 낭설은 어디서…!”“낭설일까요, 어머니? 아니면 제가 전하의 곁으로 가기 전 마레즈나가 정리해야 할 오물일까요?”엘라엔은 이사벨라를 똑바로 응시했다. 그 목소리에는 상대를 서서히 갉아먹는 독이 있었다. 이사벨라는 등 뒤로 서늘한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자신이 라안느 공작과 함께 만들려 했던 이 인형이 자신들은 보지 못한 제국 전체의 판을 읽고 있다는 공포….엘라엔은 이사벨라가 공들여 쌓아온 사교의 장을 단 한 문장으로 무너뜨린 채 다시 침묵의 방패 뒤로 몸을 숨겼다.테라스에 내려앉은 정적
엘라엔은 서신 하나를 꺼내 읽어 내려갔다. 서신에는 제국의 공식 외교 문서에는 결코 기록되지 않을 은밀한 거래와 치명적인 약점들이 적혀 있었다. “남쪽 카르노스의 왕은 제국의 비단을 탐내고, 동쪽 반디아의 거상들은 제국의 소금 통행권을 원하지. 황자가 그들을 굴복시키려 할 때 너는 그들이 가장 목말라 하는 것을 건네주며 그들의 영혼을 사거라.”블러드는 엘라엔의 하얀 뺨을 조심스럽게 쓰다듬었다.엘라엔은 눈을 감았다. 가슴 밑바닥에서 뜨거운 무언가가 치밀어 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건 단순히 복수심이나 야망이 아니었다. 이 거대한 제국이라는 판에서 자신만의 방식으로 승리하겠다는 다짐이었다.“할아버지. 전하께서 돌아오시기 전까지 제가 배워야 할 게 너무 많아요.”“허허, 걱정 마라. 나는 네가 그를 완벽하게 집어삼킬 수 있을 때까지 이 질긴 목숨을 놓지 않을 테니까. 너는 나의 혈육이고 진정한 제국의 안주인이 될 자격을 갖추었으니.”밤은 깊어갔고 대공의 가르침은 엘라엔의 내면에 스며들었다.르세인이 전장에서 승전보를 쌓아갈 때 엘라엔은 이곳 정적인 대공저에서 보이지 않는 제국의 설계도를 한 장씩 그려 나갔다.***마레즈나로 돌아오는 길. 엘라엔은 마차 창가에 머리를 기대고 베르제 대공이 건네준 낡은 서신들의 내용을 곱씹었다.르세인이 전장에서 칼로 지도를 다시 그리는 동안 그녀는 머릿속으로 욕망의 지도를 그리기 시작했다.마레즈나에 도착하자 평소와 다른 향이 복도를 채웠다. 장미 향이 아닌, 조금 더 자극적이고 이국적인 향….이사벨라가 반디아 상업 연맹에서 들여왔다던 바로 그 향료였다.“어머, 엘라엔. 마침 잘 왔구나.”이사벨라는 평소보다 훨씬 화사한 차림으로 엘라엔을 맞이했다. 그녀의 뒤로는 낯선 부인 몇몇이 화려한 부채를 흔들며 호기심 어린 눈으로 엘라엔을 보고 있었다.르세인이 자리를 비운 틈을 타, 이사벨라는 기다렸다는 듯 자신의 사교 모임을 마레즈나 안에서 열고 있던 것이다.“인사하렴. 이쪽은 반디아 상업 연맹의 안주인들이란다.
베르제 대공의 침소는 제국의 역사 그 자체였다. 벽면을 가득 채운 낡은 지도들과 빛바랜 훈장들 사이로 노사자의 거친 숨소리가 공명했다. 엘라엔은 블러드의 침대 곁에 앉아 그의 마른 손을 잡았다. 블러드는 거친 숨을 내쉬면서도 엘라엔의 눈빛이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 꿰뚫어 보는 듯했다.“엘라엔. 황자가 씌워준 그 질서가 답답하느냐.”“……처음엔 그랬어요. 하지만 지금은 뒤에 숨어 사람들의 위선을 구경하는 게 꽤 흥미로워요.”대공은 껄껄거리며 기침을 섞어 웃었다가 엘라엔을 자신의 곁으로 더 가까이 끌어당겼다.“좋은 자세다. 황궁은 말이다. 빛이 가장 강한 곳이지만 그만큼 그림자가 가장 짙은 곳이지. 사람들은 왕좌를 보느라 그 발밑에 괸 피 웅덩이를 보지 못해. 너는 그 웅덩이의 깊이를 재는 자가 되어야 한다.”대공은 침대 옆에 놓인 커다란 지도를 가리켰다. 엘레니르 제국은 강대했으나 그 강대함은 주변국들의 희생과 긴장 위에 세워진 위태로운 탑이었다.“황자가 왜 그토록 바쁜지 아느냐. 단순히 북부의 반란 때문이 아니란다. 남쪽 카르노스 왕궁의 함대가 심상치 않고, 동쪽 반디아 상업 연맹은 제국의 화폐 가치를 흔들 기회만 노리고 있지. 북쪽의 해카테 부족들 역시 황자의 등극을 틈타 국경을 넘보려 하고 있어.”엘라엔은 지도를 가만히 응시했다. 제국 안의 권력 다툼에만 매몰되어 있던 시야가 단숨에 확장되는 기분이었다. “엘라엔. 제국은 거대한 배와 같다. 선장이 아무리 유능해도 배 밑바닥에 커다란 구멍 하나가 뚫리면 가라앉는 법이지. 황자는 지금 밖으로 몰아치는 파도를 막느라 배의 구멍을 보지 못하고 있어. 그 구멍이 바로 네 아버지 에드먼을 포함한 탐욕스러운 귀족들이지.”“제가 그 구멍을 메워야 할까요? 아니면 더 크게 뚫어야 할까요?”“그건 너 스스로 결정할 일이다. 다만 이것만은 기억하거라. 진정한 포식자는 먹잇감을 죽이는데 힘을 낭비하지 않아. 먹잇감이 스스로 네 입안으로 걸어 들어오게 환경을 조성할 뿐이지.”블러드는 엘라엔의 얼굴 위로
그녀는 엘라엔의 어깨를 가볍게 토닥이며 가식적인 위로를 건넸다.“그래. 너무 마음 쓰지 말렴. 네가 한 일은 가문을 위한 것이었으니까. 앞으로는 그런 정보가 생기면 전하께 바로 보고하기 전에 우리에게 먼저 말하거라. 네가 감당하기엔 너무 무거운 일들이니까.”“네, 어머니…. 명심할게요.”이사벨라가 멀어지자 엘라엔은 숙이고 있던 고개를 천천히 들었다. 루비색 눈동자에는 서늘한 냉기가 감돌았다.그녀는 알고 있었다. 지금은 발톱을 완전히 드러낼 때가 아니라는 것을.르세인은 영악함을 시험하고 있고, 에드먼은 가치를 저울질하고 있으며, 이사벨라는 추락을 기다리고 있었다. 사방이 막힌 이 감옥에서 살아남아 르세인의 옆자리에 앉으려면 가장 무해한 꽃의 탈을 쓰고 그들의 목을 조를 독을 배양해야 했다.‘공작 부인. 당신이 내 예복의 코르셋을 더 조이라고 명령할 때마다 생각했어. 언젠가 당신의 숨통도 조여주겠다고. 이제 시작이야.’엘라엔은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그녀는 더 이상 누군가의 설계도 위에서 움직이는 인형이 아니었다. 스스로 제국이라는 거대한 판의 설계자가 되어가고 있었다. ***베른 성의 반란은 진압되었으나 그 여파는 엘레니르 제국 전체를 뒤흔들었다.르세인은 승전보를 즐길 틈도 없이 북부 국경의 문제와 반란군과 내통한 귀족들의 숙청 작업을 진두지휘해야 했다.곧 황태자 책봉을 앞둔, 제국의 차기 황제라는 무게는 그를 황궁의 집무실과 북부 전선에 묶어두었고 엘라엔에게는 예기치 못한 자유가 주어졌다.“전하의 말씀입니다. 당분간 정무가 긴박하여 황궁에서의 예법 수업은 잠정 중단되었습니다.”바델이 전한 소식은 마레즈나에 기묘한 적막을 가져왔다. 르세인의 서슬 퍼런 감시가 한풀 꺾이자 엘라엔을 옥죄던 공작저의 공기도 미세하게 느슨해졌다.이사벨라 역시 르세인의 눈치가 보이지 않는 틈을 타 자신의 사교계 영향력을 확대하느라 바빠졌고, 에드먼은 북부 무역로 재편에 따른 이권을 챙기느라 엘라엔에게 소홀해졌다.이 모든 방임 속에서 엘라엔은 자유를 얻었다
북부 베른 성의 비보는 승전보가 되어 마레즈나의 아침을 깨웠다. 단 사흘 만에 반란군의 수뇌부가 전멸하고 그들과 내통하던 중앙 귀족들이 줄줄이 압송되었다는 소식은 사교계를 넘어 제국 전체를 경악하게 했다.르세인은 직접 칼을 휘두르지 않았다. 그림자들을 움직여 반란군 내부의 분열을 조장했고, 주동자들 사이의 배신을 유도해 그들이 서로의 목을 치게 만들었을 뿐이었다.제국 군이 베른 성에 도착했을 때 반란군은 이미 자중지란으로 붕괴해 있었고 제국 군은 피 한 방울 묻히지 않고 그들을 수거해 갔다. 그 모든 공은 엘라엔의 정보 덕분에 미리 대비했던 르세인에게 돌아갔다. 그리고 그 승리의 정점인 황자 전하에게 비밀스러운 조력이 있었다는 소문은 제국 내에 파다하게 퍼졌다. 마레즈나의 식당에는 평소보다 무거운 정적이 감돌았다. 식탁 상석에 앉은 에드먼은 평소 좋아하던 거위 간 요리에 손도 대지 못한 채 서류 뭉치를 뒤적였다.“엘라엔. 네가 전하께 드린 정보가 대체 무엇이었느냐? 델마르 백작의 물류 장부라니. 그런 건 베르제 대공조차 쉽게 손에 넣지 못할 기밀이었을 텐데.”에드먼의 목소리에는 자부심보다 두려움이 깔렸다. 자신이 통제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빛나던 딸이 자신의 손을 벗어나 제국의 거물들을 단칼에 베어 넘기는 칼날이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아버지께서 가르쳐 주신 대로 했을 뿐이에요. 라안느 가문의 영광을 위해 전하의 질서에 방해가 되는 자들을 지운 것뿐이죠.”엘라엔은 우아하게 찻잔을 들었다. 그녀의 안색은 예법 수업에 시달리던 것과 달리 그저 평안했다.맞은편에 앉아 있던 이사벨라는 평소와 달리 입을 굳게 다물고 있었다.엘라엔이 르세인의 정치적 파트너로 급부상했다는 건 마레즈나 내에서 엘라엔의 위치가 훈육의 대상이 아니라 경외의 대상으로 격상되었음을 의미했기에.“엘라엔의 공이 지대하구나. 하지만 너무 앞서나가는 건 위험해. 황자 전하께서는 유능한 여인을 좋아하시겠지만 자신을 앞지르려는 여인은 경계할 수도 있잖니.”이사벨라가 뼈 있는 조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