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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문춘귀
주문춘귀
Author: 경옥

제1화

Author: 경옥
한겨울의 깊은 밤, 휘몰아치는 폭설 소리가 귀가를 스쳤고, 휘장이 바람에 날려 탁탁거리는 소리를 냈다.

계연수는 눈을 가늘게 뜨고 얼어붙은 손가락으로 휘날리는 휘장을 걷어내고 짙은 눈이 덮인 먼 곳을 바라보았다. 멀리서 다가오는 말발굽 소리가 눈보라 속에 섞여 선명하지는 않았지만 그녀는 똑똑히 들었다.

뒤에서는 가냘픈 목소리가 들려왔다.

“형수, 옥현 오라버니가 우릴 데리러 올까요?”

계연수는 휘장을 걷고 대답 없이 피곤한 듯 눈을 감았다.

그녀는 사옥현이 올 것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아무리 심한 눈보라라도 그는 올 것이었다.

오늘 그녀는 원래 이명유와 함께 온천 별장에 가고 싶지 않았지만 사옥현이 명유가 감기에 걸렸으니 사촌 형수로서 그녀도 명유를 돌봐야 한다고 해서 간 것이었다.

그는 차가운 말투로 말을 하더니 당연한 듯 모든 것을 준비했다.

다만 돌아올 때, 큰 눈이 길을 막았고 바퀴가 갈라져 마차가 도중에 갇힌 것이었다.

마부가 말을 타고 돌아가서 소식을 전한 지 거의 두 시진이 지났으니 이제 곧 올 것이었다.

멀리서 전해오는 말발굽 소리는 눈보라 치는 밤에 북소리처럼 울려 퍼졌고, 가까워질수록 더욱 초조해졌다.

마침내 말소리가 울리더니 마차 밖에서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명유야.”

곧이어 휘장이 젖히더니 길고 큰 손이 들어왔다.

계연수는 그 손을 내려다보며 분명 자신을 위해 온 것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

이명유는 울먹이는 목소리로 물었다.

“옥현 오라버니, 왜 이제야 오신 겁니까?”

이명유는 부드러운 손을 사옥현의 손 위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너무 두려웠던 탓인지, 나비처럼 그의 품에 달려들어 흐느꼈다. 가늘게 흐느끼는 소리는 눈이 내리는 밤에 길고 따뜻한 봄 풍경처럼 사람들을 빠져들게 했다.

계연수는 묵묵히 이명유의 등에 놓인 길쭉한 손가락을 바라보았다. 그 손은 잠깐 멈칫하더니 다시 품에 안긴 사람을 꼭 껴안았다.

곧이어 두툼한 여우털 옷이 가녀리고 수려한 어깨에 걸쳐졌다.

계연수는 시선을 돌려 휘장을 바라보았다.

휘장은 눈바람에 펄럭였고 눈보라가 들어와 그녀의 뺨을 때렸다. 하지만 그녀는 이미 추위를 느낄 수 없었다.

그녀는 꽁꽁 얼어붙은 손가락을 소매로 깊숙이 집어넣었다.

이명유는 사옥현의 품에서 한참 동안 울다가 남자의 부드러운 위로 속에서 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 그녀는 남자에게 안겨 마차에서 나갔다.

계연수는 밖에서 이명유가 흐느끼며 말하는 걸 들었다.

“형수도 마차 안에 있어요.”

남자의 대답은 눈보라 속에 묻혀 계연수는 듣지 못했지만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그녀는 몸에 걸친 망토를 꽉 조이고, 마차 안의 바람에 흔들리는 등이 부서진 그림자를 드리우는 것을 바라보았다.

곧 휘장이 다시 열렸고, 고귀하고 차가운 얼굴이 그녀 앞에 나타나 오늘 밤의 첫마디를 했다.

“당신들을 데리러 오던 마차가 도중에 눈에 막혀 앞으로 갈 수가 없어서 먼저 말을 타고 온 거야. 명유가 원래 추위를 많이 타는 데다 이번 일로 크게 놀란 것 같아. 마차에 한 명 밖에 태울 수 없으니 명유 먼저 데려갈게. 조금만 더 기다리면 마차가 금방 올 거야.”

계연수는 이해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아무것도 묻지 않고 대답했다.

“네.”

남자의 얼굴은 어둡고 흔들리는 등불 아래에서 미세한 변화가 생겼다. 그는 계연수의 평온한 얼굴을 바라보더니 그녀가 몸을 움츠리는 모습을 보며 걸음을 멈추었다.

그는 계연수를 바라보며 한마디 설명했다.

“올 때 여우털 옷을 한 벌밖에 가져올 수 없었어. 넌 형수니까 명유에게 양보해.”

계연수는 그와 혼인을 하던 날부터 이런 말을 수도 없이 들었고, 그와 혼인을 하면 당연히 억울함을 당해야 하는 것 같았다.

예전 같으면 그녀는 이미 그에게 도대체 누가 당신 부인인지 따졌을 것이었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사옥현은 더 차가운 눈빛으로 그녀를 보았다.

그는 한 마디도 해명하지 않고, 그녀가 억지 부리는 미치광이라도 된 것처럼 얼음 같은 눈빛으로 바라볼 뿐이었다.

하지만 지금의 계연수는 따지는 것도 이미 지쳐버렸고, 따진다고 해도 그녀를 데리고 가지 않을 것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녀는 사옥현의 마음속에서 자신은 결코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어서 가십시오. 명유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녀가 말을 마치자 사옥현은 미간을 찌푸리며 복잡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계연수는 할 말이 없어 눈을 감았다.

사옥현은 입술을 오므리고 더 이상 말을 하지 않고 계연수를 한 번 본 후, 휘장을 내렸다.

마차 밖에서는 곧 말발굽 소리가 났고, 소리는 점점 눈보라 속으로 사라졌다.

이때 옆에서 시녀 용춘의 걱정스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나으리께서 부인을 혼자 여기에 두고 가다니, 정말 걱정이 안 되는 것일까요?”

계연수는 천천히 몸을 용춘의 어깨에 기대어 발 옆의 드문드문 불빛만 남아 있는 숯불을 바라보았다.

냉기를 한 모금 뱉은 후, 그녀는 뜻밖에도 이런 쓸쓸함이 싫지가 않았다.

그녀는 조용히 눈을 감고 말했다.

“용춘아, 나 좀 잘게.”

눈을 감는 순간, 그녀는 3년 전의 자신을 보았다.

그 해 초가을, 그녀는 사 씨 저택 앞에서 사옥현이 나타날 때까지 오랫동안 기다렸었다.

그녀는 두 사람의 혼서를 손에 꽉 쥐고 사 씨 저택으로 달려가 긴장한 마음을 억누르고 일부러 침착한 척 그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저는 계씨 집안의 딸입니다. 제가 여기에 온 이유는 혼약이 아직 유효한지 물어보려고 왔습니다.”

당시 그녀는 이미 성인이 되었고, 평생 가장 용감한 행동을 했다.

그녀는 긴장해서 손이 땀에 흠뻑 젖었고, 무슨 결과를 얻을 수 있을지 몰랐다.

그때 그녀의 아버지는 이미 감옥에 갇혔고, 계부는 수색당했으며, 예전에 방문객이 많던 계부는 엎친데 덮친 격이 되었다.

그녀와 어머니는 연루되지 않아 이미 몰락한 외주부에게 얹혀살고 있어서, 사옥현이 이 혼약을 깨려고 해도 아무도 그를 비난하지 않을 것이었다.

왜냐하면 지금은 예전과 같지 않고 인지상정이란 게 있기 마련이기 때문이었다.

계연수도 그때 사옥현이 거절하면 그 자리에서 혼서를 찢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땐 사옥현이 경성에서 이미 약간의 명성을 얻었고, 젊은 나이에 벼슬을 따내 이름을 떨쳤다. 게다가 외모까지 준수했기 때문에 경성의 수많은 명문 여인들이 그와 혼인을 하고 싶어 했다.

그는 더 좋은 인연을 만날 수 있었다.

그녀는 심지어 그가 혼인을 거부하면 혼서를 찢어버리고 혼약을 없었던 일로 여기려고 했다.

하지만 사옥현은 입을 열어 승낙했다.

계연수는 그때 사옥현이 어떤 표정을 지었는지 잊어버렸다. 다만 그의 목소리만 기억하고 있었다. 따뜻하고 부드러운 그의 목소리는 약간 차가운 늦가을에 그녀에게 온기를 안겨주었다.

“부모의 명령이니 혼약은 당연히 지켜질 것이다. 조만간 어머니를 모셔와 혼인 날짜를 상의하도록 하지.”

그때 계연수는 평생 자신을 사랑해 줄 좋은 사람을 만났다고 생각했다.

그녀를 위해 기꺼이 도움을 준 사람이니, 분명 아버지와 어머니처럼 사이좋게 잘 지낼 것이라고 생각했다.

계연수는 자신에게 또다시 가정이 생긴 것 같았다.

하지만 나중에 알고 보니, 그가 자신과 혼인을 하겠다고 한 이유는 명성 때문이었고, 그의 마음속에는 이미 사랑하는 여인이 있었다.

새하얀 겨울날, 그녀는 마치 꿈에서 깨어난 듯 멍하니 돌아서 실망스러운 눈과 마주쳤다.

“잘 보거라. 이게 바로 네가 선택한 부군이다.”

또 한 차례 살을 에는 듯한 찬바람이 두꺼운 휘장을 뚫고 들어와 꿈속의 사람을 깨웠다.

계연수는 눈을 번쩍 뜨고 이미 다 타버린 숯불을 바라보며 더 이상 얼어붙은 손으로 헤집을 힘이 없었다.

그녀는 열네 살이 되던 해에 감옥에 가서 아버지를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 아버지가 여전히 다정하게 그녀의 손을 잡고 했던 말이 생각났다.

“연수야, 울지 말거라. 이 세상에는 절대적인 옳고 그름이 없고, 절대적인 좋고 나쁨도 없단다. 그러니 관청의 부침도 오르락내리락하는 법이지. 영원히 이길 수 없듯이, 진 사람도 다시 살아날 희망이 있는 거란다. 과거를 잊고 앞으로 나아가거라.”

계연수는 휘장 밖의 눈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문득 깨달았다. 추운 겨울 속에서 영원히 멈춘 인연을 끝내야만 아버지가 말씀하신 대로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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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주문춘귀   제805화

    최씨는 아무 까닭도 없이 그런 꾸지람을 듣고 나니, 가슴 가득 억울함이 밀려왔다.방금 시어머니가 자신을 바라보던 그 혐오 어린 눈빛은, 마치 그녀가 그 앞에 서 있는 것만으로도 견딜 수 없이 거슬린다는 듯했다.하지만 그녀도 시집오기 전에는 집안에서 사랑받던 적녀였다. 처음 이 집안에 시집올 때만 해도 심정민이 자신을 아껴 주는 부군이 되어 줄 것이라 믿었다. 그러나 심정민은 온 마음을 공무에만 쏟았고, 집안일에는 무엇 하나 관여하지 않았다. 하물며 심서준처럼 심씨 노부인 앞에서 제 부인을 위해 한마디 해 주는 일은 더더욱 없었다.그가 할 줄 아는 말이라고는 고작 이것뿐이었다.‘내가 어머니 말씀을 따르니, 너도 어머니 말씀을 따라야 한다.’그에게 괴로움을 털어놓고 원망을 토로해도, 그는 귀찮다는 듯 소실의 처소로 가 버리거나 그녀를 붙잡고 한바탕 훈계만 할 뿐이었다.심지어 심정민은 심서준이 계연수에게 잘해 주는 것조차, 계연수가 부인으로서 심서준을 만족시켰기 때문이라고 여겼다. 심서준이 그저 제 부인을 아끼고 사랑해서 그러는 것이라는 생각은 조금도 하지 못했다.심정민의 성정은 심서준보다도 더 고루하고 재미없었으며, 한층 더 냉담했다. 그런데 시어머니마저 저토록 강압적이니, 최씨는 이 집안에서 자신이 정말 버텨 낼 수 있을지조차 막막해졌다.곁에 있던 시녀는 최씨의 눈가가 붉어지고 얼굴이 창백해진 것을 보고는 조심스레 낮은 목소리로 달랬다.“부인, 우선은 조금만 참으세요. 견디다 보면 언젠가는 괜찮아질 겁니다.”최씨가 멍하니 고개를 돌려 시녀를 바라보았다.“얼마나 더 참아야 하는 것이냐? 어머님께서 돌아가신다 해도 나에게는 아직 이런 부군이 남아 있다. 내 평생은 결국 이렇게 끝나게 되는 것 아니냐?”시녀는 서둘러 주변 사람들을 물리고는 더욱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부인, 앞으로는 절대 밖에서 이런 말씀 하시면 안 됩니다. 아직 살아가실 날이 길지 않습니까. 복아 도련님께서 장성하시면 그때는 부인께서도 고생 끝에 숨통이 트이실 겁니다.”최씨

  • 주문춘귀   제804화

    심씨 노부인 곁을 지키던 어멈이 다시 약을 들고 와 계연수 앞에 내려놓았다.백씨는 그 약그릇을 힐끗 바라보다 말없이 시선을 내리깔고 손에 쥔 수건을 더욱 세게 움켜쥐었다.심씨 노부인이 저토록 계연수의 아이를 서두르는 이유를 그녀가 모를 리 없었다.계연수가 하루빨리 심씨 가문의 적통 손자를 낳기만을 바라는 것, 그리고 그 아이가 생기면 심씨 가문의 살림까지 모두 계연수에게 넘길 생각이라는 것.결국 노부인의 마음은 처음부터 끝까지 계연수에게 기울어 있었다.계연수에게도 이 약은 마시는 것 자체가 고역이었다.하지만 심씨 노부인의 분부를 거스를 수는 없었기에 어렵사리 약을 다 비웠다. 그러자 입안에는 쓴맛만 가득 남아 아무 맛도 느껴지지 않았다.반면 심씨 노부인은 계연수가 군말 없이 약을 마시는 모습을 무척 흡족하게 바라보았다.기혈이 충만해 붉게 생기가 도는 그 얼굴을 보고 있자니, 훗날 태어날 손자가 얼마나 곱게 자랄지 절로 기대가 되었다.요즘 들어 심씨 노부인은 마음을 완전히 내려놓은 상태였다.며칠 동안 계연수가 살림을 처리하는 솜씨를 지켜보며 감탄했고, 애초에 그녀를 며느리로 삼고 싶어 했던 지난날도 다시 떠올랐다.비록 한 차례 화리했던 일은 아직도 마음 한구석에 걸리는 응어리였지만, 굳이 붙잡고 있지 않으면 그 또한 지나갈 일이라 여겨졌다.*계연수는 백씨와 함께 밖으로 나왔다.백씨는 웃음을 띤 채 먼저 입을 열었다.“이번에는 동서가 직접 내 처소까지 올 필요는 없다. 각 장원의 수입 장부는 사람을 시켜 모두 동서에게 보내주마.”계연수도 예를 갖춰 답했다.“그렇게 해 주신다면 감사하겠습니다, 형수님.”백씨는 부드럽게 웃었다.“무슨 감사까지. 오히려 어깨가 한결 가벼워진 기분이다. 그동안은 장원이며 점포며 모두 내가 도맡아 돌보느라 제대로 쉬지도 못했다. 이제는 정우도 제 앞가림을 하게 되었으니 나도 좀 한가롭게 손주나 돌보며, 정우 혼사도 천천히 준비해 보려 한다.”물론 계연수는 그 말을 믿지 않았다.정말 미련이 없었다면 뒤에

  • 주문춘귀   제803화

    심서준은 말없이 계연수를 바라보았다.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눈빛에는 아무런 감정도 드러나지 않았다. 그녀의 까만 살구빛 눈동자에 비친 자신의 모습은 위엄 있고 차갑기만 했다.하지만 그는 지금 자신의 표정이 정말 저렇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조금이나마 부드러워 보이려는 듯 눈매를 누그러뜨려 보았지만, 계연수의 눈동자에 비친 그는 여전히 다를 바 없는 사람이었다.심서준은 미간을 가볍게 찌푸렸다. 한참 침묵하던 끝에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내가 곁에 있는 게 싫은 것이냐?”계연수는 잠시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다.싫은 것은 아니었다. 그녀는 원래 속을 쉽게 드러내지 않는 사람이었다. 사씨 가문에서 보낸 삼 년 동안 혼자 있는 시간에 익숙해졌고, 그 고요 속에서 오롯이 한 가지 일에만 몰두하는 법도 배웠다.무엇보다 심서준은 존재만으로도 사람의 마음을 흔드는 사람이었다. 그가 곁에 있으면 아무리 애를 써도 마음이 쉽게 흐트러졌다.하지만 계연수는 더는 고집을 부릴 일이 아니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심서준이 자신을 위해 위운필을 모셔온 것만으로도 쉽지 않은 일이었으니, 여기서 더 욕심을 낼 수는 없었다.그녀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내일 그려도 늦지 않아요. 벌써 시간이 많이 늦었으니 제가 부군의 옷을 갈아입혀 드리고 쉴 수 있게 해 드릴게요.”심서준은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았다.계연수가 자신의 마음을 헤아려 일부러 맞춰 주고 있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그녀의 눈동자를 스쳐 지나간 아쉬움도 놓치지 않았다.그럼에도 그는 끝내 고개를 끄덕였다.“좋다.”사실 그 역시 계연수가 한밤중까지 서재에 남아 있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그림은 그녀에게 소중한 것이었지만, 삶의 전부는 아닐 테니까.심서준은 대나무빛 둥근 깃 장포를 입고 있었다.평소 즐겨 입던 검은 옷 대신이라 그런지 한결 부드러운 인상이 감돌았다.계연수는 이제 그의 옷을 갈아입혀 주는 일도 제법 익숙해져 있었다.겉옷을 벗기고 흰 안옷 차림이 된 심서준을 바라보던 그녀는 문득 현실감이

  • 주문춘귀   제802화

    마침내 위운필이 고개를 들어 심서준을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평생 제자를 들인 적은 없소. 헌데 심씨 부인만큼은 처음으로 내 친전 제자로 삼고 싶구려. 심 대인께서는 허락하시겠소?”심서준은 옅게 웃었다.“그건 제게 물으실 일이 아닙니다.”그는 고개를 돌려 계연수를 바라보았다.“원하느냐?”계연수는 단 한순간도 망설이지 않았다.“물론입니다!”위운필은 다시 심서준에게 시선을 옮겼다.“이제부터는 내 친전 제자에게만 전할 이야기니 그 뒤의 내용은 심 대인께서 들으실 수 없겠군.”심서준은 나직이 웃더니 계연수를 향해 말했다.“기다리고 있겠다.”그 말을 끝으로 먼저 자리를 떠났다.*계연수가 위운필의 처소에서 나왔을 때는 이미 사방에 짙은 황혼이 내려앉아 있었다.날이 저물지 않았다면 한참 더 머물렀을 것이다. 하지만 어둠이 깊어지기 전에 경성으로 돌아가야 했기에 아쉬움을 뒤로한 채 길을 나설 수밖에 없었다.마차에 오른 뒤에도 계연수의 마음은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가슴속이 시원하게 트인 듯 머릿속에는 오늘 깨달은 것들이 끝없이 맴돌았고, 돌아가자마자 붓을 들어 보고 싶은 마음에 온 정신이 들떠 있었다. 그 탓에 곁에서 심서준이 무슨 말을 했는지조차 듣지 못했다.그런 계연수를 바라보던 심서준의 입가에는 저도 모르게 미소가 번졌다.생각해 보면 그녀가 어려서부터 이토록 마음을 쏟은 것은 그림뿐이었다.빛을 머금은 듯 반짝이는 눈동자를 바라보던 그는 문득 깨달았다. 사씨 가문에서 보낸 지난 삼 년 동안 계연수는 마치 빛을 잃은 별처럼 누구의 눈에도 띄지 못했지만, 그녀의 빛이 사라졌던 것이 아니었다. 그저 오랫동안 가려져 있었을 뿐이었다.그는 지금의 계연수가 좋았다.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마음껏 좇고,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은 채 자유롭게 살아가는 모습.앞으로 그녀가 더는 두려움에 발목 잡혀 머뭇거리지 않기를 바랐다.심서준은 조용히 그녀를 품으로 끌어안았다.계연수는 오늘 위운필에게 배운 깨달음을 들뜬 목소리로 하나하나 이야기했고, 그는 그런

  • 주문춘귀   제801화

    계연수는 다음 날 아침이 되어서야 더듬더듬 눈을 떴다.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심서준의 벌어진 옷깃 사이로 드러난 단단한 가슴이었다. 그 위에는 붉게 긁힌 자국 하나가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시선을 조금 더 올리자 이번에는 그의 목덜미에 남은 희미한 이 자국이 눈에 들어왔다.그것 역시 어젯밤 자신의 흔적이었다.계연수는 자신에게도 그런 대담한 면이 있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얼굴이 순식간에 달아올랐고, 더는 어젯밤 일을 떠올릴 엄두조차 나지 않았다.그녀는 조심스레 심서준을 바라보았다. 그는 아직 눈을 감은 채 잠든 듯 보였다.문득 오늘 위운필 선생을 만나기로 했던 일이 떠올랐다.그녀는 깨워야 할지 말아야 할지 잠시 망설였다. 모처럼 깊이 잠든 그를 차마 깨우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계연수가 몸을 살짝 일으키려는 순간, 심서준이 그녀의 허리를 감싸 안으며 움직이지 못하게 했다.“조금만 더 자거라.”잠긴 목소리가 귓가를 스쳤다. 그는 계연수의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다시 나직하게 말했다.“아침 일찍 이미 다녀왔다. 위 선생은 그대로 머물기로 하셨다.”계연수는 놀란 얼굴로 그의 나른한 눈매를 올려다보았다.“언제 다녀오셨어요?”그녀는 조금도 눈치채지 못했었다.심서준은 계연수를 바라보며 옅게 웃었다.“아주 일찍 다녀왔지. 그때는 네가 아직 자고 있었다.”그 말을 듣자 계연수의 마음은 더욱 미안해졌다. 그녀는 그의 허리를 꼭 끌어안고 품속으로 얼굴을 파묻은 채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위 선생께서 부군을 곤란하게 하시진 않으셨나요?”심서준은 그녀의 등을 가볍게 토닥였다.“괜찮았다.”품 안 가득 안긴 부드러운 온기를 느끼며 그의 입가에는 잔잔한 웃음이 번졌다.“조금만 더 자거라.”사실 계연수는 이미 잠이 다 깬 상태였다.하지만 심서준은 제대로 쉬지 못했을 것이라는 생각에, 그녀는 말없이 그의 품에 안겨 다시 눈을 감았다.두 사람이 자리에서 일어난 것은 바깥이 환히 밝아진 뒤였다.옷을 갈아입던 계연수는 심서준의 옷깃 사이로

  • 주문춘귀   제800화

    심서준은 이 순간이 더없이 좋았다.품 안에 안긴 계연수는 한없이 부드러웠고, 그 따스한 온기마저 놓치기 싫을 만큼 마음을 사로잡았다. 무엇보다 늘 수줍어하던 그녀가 먼저 다가와 준 것이 그를 더욱 기쁘게 했다.그는 계연수를 한층 깊이 품에 끌어안은 채 쉰 목소리로 나직이 말했다.“온천에 다시 들어가고 싶구나.”아까 온천에서 계연수는 끝내 긴장을 풀지 못했다. 심서준도 그 사실을 알아차렸기에 반 시진도 채 지나지 않아 그녀를 데리고 나왔었다.하지만 오늘 밤만큼은 달랐다.모처럼 얻은 이 시간을 천천히 누리고 싶었다. 서두를 것 없이 느긋하게 밤을 보내고, 내일은 새벽같이 조정에 나갈 필요도 없었다. 계연수를 품에 안은 채 날이 밝을 때까지 함께 잠들고, 자신의 품속에서 천천히 눈을 뜨는 그녀를 바라보고 싶었다.계연수는 그에게 꽉 안겨 숨이 조금 막힐 정도였다.미처 대답하기도 전에 심서준은 그녀를 안은 채 몸을 기울여 작은 평상 위로 눕혔다. 바둑판과 작은 탁자가 밀려 바닥으로 떨어졌고, 잘 다듬어진 백옥 바둑돌이 사방으로 흩어졌다.심서준은 계연수의 두 손을 붙잡아 손가락을 맞깍지 낀 채 그녀를 내려다보았다.부드럽게 풀어진 눈빛 아래에는 쉽게 감출 수 없는 짙은 기색이 어려 있었다.“네가 원하지 않는다면 바로 쉬러 가도 된다.”그의 숨결이 바로 눈앞에 닿자 계연수의 심장은 다시 두어 번 크게 뛰었다.그녀는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좋아요.”심서준은 그녀의 표정을 바라보다가 옅게 웃었다.그녀가 자신을 거절하지 않을 것이라는 걸 그는 이미 알고 있었다.심서준이 머무는 이 장원에도 온천이 있었다. 그는 계연수의 손을 잡고 온천으로 들어갔고, 계연수는 거의 그의 몸에 기대다시피 했다.사실 계연수는 물을 조금 두려워했다.예전에 물에 빠진 일을 겪은 뒤로는 연못만 보아도 저절로 물가에서 한발 물러섰다. 가까이 다가가기만 해도 다시 물속으로 빠질 것 같은 기분이 들곤 했다.하지만 그런 모습마저 심서준에게는 사랑스러웠다.물기에 젖은 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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