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세자는 전각 앞에 멈춰 서 있었다.그의 서늘한 그림자가 햇빛을 가르며 내려앉자 궁의 숨결이 눈에 띄게 고요해졌다.무엇 하나 소리를 내서는 안 될 것처럼, 바람조차도 조심스레 움직이는 듯했다.이수는 마음을 가다듬고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무탈하시옵니까, 저하.”그 말은 정확했고, 절제되어 있었다.하지만 정확함과 절제만으로는 감춰지지 않는 떨림이 있었다.아주 깊고, 오래된 상흔처럼 그녀의 목소리 끝에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미세한 결이 남아 있었다.세자는 그 결을 놓치지 않았다.현의 시선이 이수의 얼굴을 잠시 머물렀다.그 머묾은 궁중 예를 지키는 수준에서 벗어나지 않았으나그 안에는 이유를 설명할 수 없는 정적이 있었다.“예로다.”현은 조용히 답했다.말투는 예우를 갖추었으나, 눈빛에는 읽히지 않는 무언가가 잠시 스쳤다.그 미세한 순간이 이수의 심장을 한 번 깊게 파문치게 했다.‘왜… 어째서 그 눈빛이 이렇게 낯설지 않은가.’현은 이어서 말을 붙였다.“궁은 그대가 궐무에 빈틈을 남기지 않았다 하였다. 잘 지낸 듯 하여 안심입니다.”칭찬이었지만 그 말 속에는 어딘가 짙은 의미가 섞여 있었다.칭찬과 확인 사이, 예우와 경계 사이의 어중간한 결.이수는 그 결을 알아차렸으나 따라 묻지 않았다.“…저하께서 부재하신 동안 궁이 어지러워지지 않도록 하는 것이 소첩의 도리였사옵니다.”말은 완벽했다.그러나 이수 자신도 눈치채지 못한 사이한순간 아주 부드러운 흔들림이 그 말의 끝자락에 닿아 있었다.현은 그 흔들림을 느낀 듯 시선을 잠시 고정시켰다.그러나 이내 아무 일 없듯 걸음을 옮겼다.“전각에서 다시 보도록 합시다.”세자는 앞으로 천천히 걸어나갔다.행렬이 뒤따랐고, 궁 안의 모든 시선이 그가 지나가는 길에 붙잡혔다.그러나 이수의 시선은 그 길을 끝까지 쫓지 못했다.그녀의 시선이 자기도 모르게 다른 곳에서 걸려버렸기 때문이다.도진.그는 군영의 무사들과 함께 서 있었지만 그 존재만으로도 다른 이들과 선이 달랐다.
궁문 밖에서 울리던 북은 점점 더 묵직한 울림으로 바뀌어궁의 바람과 기척을 모두 끌어당기고 있었다.기척이 모여들수록 공기는 더 얇아졌고, 누구도 깊게 숨을 들이쉬지 못했다.마치 숨을 크게 쉬는 것조차 궁의 예를 흐리는 일이 되는 듯이.전각을 향해 걷던 이수도 자신의 걸음이 묘하게 가벼워지는 것을 느꼈다.발걸음이 가벼운 건 설렘 때문이 아니라 몸이 ‘준비’라는 긴장에 더 익숙해져 있기 때문이었다.궁에서의 긴장은 언제나 심장을 바닥으로 끌어당기며 시작되었다.궁녀들이 양쪽에 늘어서 있었다.그들의 얼굴에는 긴장과 경계가 섞여 있었지만이수의 얼굴은 마치 안개 위에 얹힌 새벽의 그림자처럼 단정하고 흔들림이 없었다.그러나 그 단정함 아래에는 아무도 모르는 파문이 아주 가늘게 일렁이고 있었다.‘오늘… 그 사람의 얼굴을 마주하게 되겠지.’그 사람이 누구인지 그녀는 입 밖에 낼 수 없었다.아니, 낼 필요도 없었다.말이라는 형태가 붙는 순간 그 마음은 더 위험해지니까.궁은 숨조차도 기록되는 곳이기에 ‘마음의 방향’조차 드러내서는 안 되는 곳이었다.궁문 너머에서는 무사들의 발걸음이 큰 물결처럼 몰려오고 있었다.정제된 발소리는 어지럽게 뛰는 심장의 박동과는 전혀 다른 결을 가지고 있었다.모두가 숨을 삼킨 채 그 소리를 들었다.군영에서는 그 소리를 누구보다 또렷하게 듣는 사람이 있었다.도진.그는 검집을 고쳐 쥔 채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세자의 행렬이 들어오는 길을 향해 촉을 세운 시선은 흔들림이 없었지만가슴 한가운데에서는 말할 수 없는 무게가 차올랐다.석윤이 그의 곁에 멈춰 섰다.“경. 곧 행렬이 도착한다 하옵니다. 대비전에서도 방금 마지막 전갈이 내려왔다 하오니경께서는 오늘… 그 어떤 표정도 드러내시면 아니 된다 하였습니다.”도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말이 필요 없었다.그는 이미 알고 있었다.오늘은 검을 드는 일보다 가슴을 다스리는 일이 더 어려운 날이라는 것을.석윤은 조심스레 말을 이었다.“궁이… 빈마마의 일거수
정오의 북이 세 번 울리고, 궁의 공기는 한순간에 형태를 달리했다.바람도, 햇빛도, 사람들의 숨결도 모두 같은 방향으로 쏠려 들어갔다.오늘 세자가 돌아온다.그 사실 하나만으로 궁의 수많은 표정이 동시에 굳어졌다.이수는 전각 앞에서 잠시 걸음을 멈추었다.그녀의 시선은 담장 너머를 향하고 있었으나 그 너머의 사람을 볼 수는 없었다.그러나 마음은 이미 그곳을 향해 가 있었고, 그 마음을 억누르는 힘만 더욱 깊어져 갔다.궁녀가 다가와 속삭였다.“마마… 오늘은 빈마마의 표정까지 궁에서 기록한다 하옵니다.상궁들이 곳곳에서… 마마의 숨소리까지 듣고 있사옵니다.”이수는 그 말에 아무런 놀람도, 두려움도 드러내지 않았다.그러나 그녀의 속은 차가운 물결이 한 번 크게 흔들린 듯 미묘하게 떨렸다.“숨을 쉬는 것도 이제는 허락이 필요하다는 말이겠지.”궁녀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이수는 걸음을 내딛었다.그 걸음은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았다.그러나 오직 오늘 하루만큼은 그 걸음의 리듬마저도 궁의 눈들이 헤아리고 있었다.군영에서는 세자 환궁을 위한 준비가 이미 절정에 다다르고 있었다.정렬된 무사들의 발끝은 바람 한 줄기에도 흔들리지 않았다.도진은 그들보다 더 단단하게 서 있었다.그의 앞에는 공문이 놓여 있었고,그 공문에는 오늘 그가 맡아야 할 자리와 그 자리에서의 모든 행동이 적혀 있었다.그 행동 하나하나가 궁의 질서와 체면을 지키는 일이자그 질서 안에서 자신의 마음을 가두는 일이기도 했다.석윤이 다가왔다.“경… 전각에서 빈마마의 동선을 조금 전 다시 보고했다 하옵니다.”도진의 시선이 아주 미세하게 흔들렸다.“…어디로 향하셨느냐.”“대비전과 후원 사이… 하지만 오래 머물지 않았다고 하옵니다. 대비마마의 명 때문이라 합니다.”그녀가 오래 머무르지 못한다는 사실이왜 이토록 가슴을 묵직하게 만드는지 도진은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오늘… 그대의 발걸음은 얼마나 조심스러웠을까.’석윤이 다시 말했다.“경께서도 오늘은 어떤 표정도…
석윤이 다가오며 낮게 말했다.“경. 궁은 누가 움직이는지보다 왜 움직이는지를 먼저 본다 하옵니다.”도진은 눈을 떴다.“알고 있다.”석윤은 조심스럽게 덧붙였다.“그러니 오늘… 경께서는 평소보다 더 마음을 다스리셔야 합니다.”그 말은 조심스러웠으나 그 조심 속에 담겨 있는 말의 진심은 분명했다.경의 마음은 이미 움직였으니 오늘 하루만큼은 그 움직임이 드러나지 않게 하시오.그러나 도진은 외면한 듯 말 없이 걸음을 내디뎠다.그리고, 그 무심한 걸음 하나조차 누군가의 눈에는 이미 어떤 표정으로 보이고 있을지 그는 알고 있었다.이수는 오전 점검을 위해 후원 가까운 전각을 살피고 있었다.햇빛이 이미 담장을 넘어오고 있었고, 정오의 열기는 아직 오지 않았지만그 예고만으로도 공기가 묵직하게 갈라져 있었다.궁녀가 귀에 바짝 대고 말했다.“마마… 오늘은 각 전각에서 마마를 뵙기를 꺼린다 하옵니다.”“…나를?”“예, 마마. 빈마마를 향한 작은 말도 오늘은 조심해야 한다고… 궁인들끼리 서로 경계하고 있사옵니다.”경계. 그 말은 곧 ‘위험’이었다.궁은 언제나 가장 가까운 사람을 먼저 경계했고, 가장 조용한 사람이 가장 많은 말을 듣는 법이었다.이수는 눈을 가늘게 떴다.“오늘 하루는 누구도 믿지 말라는 뜻이겠지.”궁녀는 대답하지 못했다.그러나 그 침묵이 이미 대답이었다.그 순간, 멀리서 금속이 부딪히는 소리가 바람에 실려 들려왔다.군영이었다.정확히는 도진이 있을 자리였다.이수의 발끝이 아주 조금 멈췄다.그 멈춤은 오래가지 않았지만 그 짧은 순간에도 가슴 깊은 곳이 찢어질 듯 흔들렸다.‘경… 오늘 당신은 어떤 마음으로 이 하루를 버티고 있을까.’그녀는 다시 걸음을 옮겼다.천천히, 그러나 확실하게.오늘 하루는 감정을 누르는 날이었다.누군가를 향한 마음이 단 한 번이라도 흔들리면 그 흔들림이 곧 궁의 칼이 될 수 있었다.정오가 가까워질수록 궁은 이상하리만큼 조용해졌다.마치 바람도, 햇빛도, 사람도 모두 한곳을 향해 고개를 돌리는
그녀의 말은 예언처럼 내려앉았다.전각을 나서자 햇빛이 처음으로 궁의 담장을 밝히기 시작하고 있었다.이수는 그 빛을 마주보았다.기분 좋은 따뜻함보다는 등뒤가 서늘해지는 느낌이 더 먼저 찾아왔다.그 순간 담장 너머로 군영의 금속음이 멀리서 들려왔다.이수의 심장이 조용히, 그러나 힘 있게 울렸다.‘경… 오늘 무사하시오.’바람이 지나가며 그 한마디를 어디론가 흩어지게 만들었다.도진은 마지막 검 점검을 마치고 자신의 위치로 이동하고 있었다.그의 걸음은 흔들림이 없었지만오늘 배치된 자리의 의미는 그 누구보다 그가 잘 알고 있었다.그 자리에서는 많은 것을 볼 수 있고, 많은 것을 잃을 수도 있다.그리고, 오늘 이수의 움직임을 어떤 방식으로든 마주칠 수도 없었다.‘마마를… 오늘은 볼 수 없겠군요.’그 생각이 의도와 다르게 가슴 깊은 곳을 눌렀다.그는 그 흔들림을 철저히 숨기듯 다시 발걸음을 내딛었다.무인의 걸음으로. 세자를 기다리는 자리의 걸음으로.그러나 마음은 궁이 움직이는 이 하루가 무언가를 바꾸기 시작한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새벽빛이 완전히 궁을 덮는 순간, 모든 전각에서 문이 동시에 열렸다.궁이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누군가는 속삭였고, 누군가는 걸음을 멈추었고, 누군가는 마음을 숨겼다.그리고 그 가운데 바람처럼 스며드는 그림자가 있었다.그것은 현이 오고 있다는 첫 번째 전조였고,오늘 하루가 세 사람의 운명을 조용히 비틀어놓을 시작이었다.정오는 아직 멀었으나, 아침 공기는 어느새 이미 정오의 긴장감을 품고 있었다.세자의 환궁이 가까워질수록 궁 전체의 숨결이 가늘어지고,작은 바람에도 흔들리는 등불처럼 모든 표정이 예민하게 떨렸다.이수는 아침 의례를 마치고 전각을 나서던 중이었다.오늘은 누구도 먼저 말을 걸어오지 않았고, 누구도 눈을 제대로 마주치지 않았다.그들의 침묵 속에는 어떤 감정도, 어떤 판단도 드러나지 않았지만 그 침묵 자체가 이미 하나의 경계였다.궁녀가 조심스럽게 속삭였다.“마마… 오늘은 내명부
문밖으로 걸어나오는 순간, 서늘한 새벽 공기가 몸을 휘감았다.그 바람 속에는 이미 다양한 의도들이 흩어져 있는 듯했다.궁의 군데군데에서 귓속말처럼 번지고 있는 소문,눈을 마주치지 않고 걸어가는 궁인들,평소보다 더 이른 시간에 움직이는 무사들의 그림자.고요하지만 고요하지 않은 아침이었다.오늘의 군영은 새벽부터 강철의 냄새가 더 짙게 퍼져 있었다.도진은 한밤중의 점검을 끝낸 뒤아직 돌아가지 못한 무사들을 향해 마지막 지시를 내리고 있었다.“모든 인원은 지정된 자리에 서라. 아무도 자기 자리를 벗어나지 말아야 한다.”그의 목소리는 단단했고 표정은 흔들림이 없었다.그러나 그 단단함 너머 오늘 하루가 어떤 의미를 갖는지 그 또한 알고 있었다.세자가 돌아오는 날.궁의 판도가 흔들리는 날.그 흔들림은 곧 누군가에게 기회가 되고, 누군가에게 위협이 된다.석윤이 옆으로 다가왔다.“경. 오늘은 누구의 시선이 가장 날카로운지 아시겠습니까.”도진은 짧게 시선을 돌렸다.“…대비전이겠지.”“예, 경. 그리고… 빈마마의 주변 또한 오늘 하루 종일 눈이 머물 것이옵니다.”그 말이 끝나자 바람이 잠시 멈춘 듯한 순간이 흘렀다.석윤은 목소리를 낮추었다.“경. 오늘은… 경의 마음이 드러나지 않도록 하셔야 합니다.”도진의 손끝이 검자루 위에서 아주 느리게 굳어갔다.“내 마음이 드러난 적은 없었다.”석윤은 그 말이 더 이상의 말로 이어지지 않을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조심스레 덧붙였다.“드러내지 않은 것과 지켜보는 자가 알아채지 못하는 것은 다른 일이옵니다.”도진은 잠시 눈을 감았다.그 짧은 시간 동안 어딘가 멀리서 이수의 발걸음이 들리는 듯했다.그녀의 목소리,그녀의 눈빛,그녀가 오늘 어떤 시간을 보내고 있을지모든 생각이 잠시 그의 마음을 스쳤다.그러나 그는 곧 눈을 뜨고 말했다.“내 자리는… 변하지 않는다.”석윤은 그 말의 의미를 이해했다.그 자리는 세자의 오른편. 지켜야 할 자리에 서는 무인의 자리.그러나 그 자리 안에서
밤은 더욱 깊어지고 있었다.달빛은 기와 위에서 희미하게 번졌고,바람은 소리 없이 건물의 모서리를 스쳤다.도진은 이수의 처소에서 멀어질수록오히려 마음 한가운데 알 수 없는 불편함이 자리 잡는 걸 느꼈다.그 감정은 단순한 경계심이 아니었다.호위무사로서 세자빈을 지키려는 의무감도 아니었다.그것은 그녀의 얼굴을 떠올릴 때마다가슴을 묘하게 죄어오는 부끄러울 만큼 인간적인 감정.도진은 발걸음을 멈췄다.그는 무사였다.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욕망을 절제하며, 의무를 지키기 위해 살아온 사람이었다.그런 그가 오늘 하루 동안
현은 그를 오래 바라보았다.그 시선은 단순한 명령자의 시선이 아니었다.오랜 우정과 굳건한 믿음이 깔려 있으나,그 밑바닥에는 설명할 수 없는 미세한 균열이 보였다.“마마의 밤이니만큼… 혹 무슨 일이 생기지 않도록 주변을 더 살펴보아라.”명분 있는 명령이었다.그러나 그 말 속에는 ‘왜 네가 여기에 있었느냐’는 질문보다도 더 깊은 무언가가 흐르고 있었다.도진은 눈을 내렸다.“…예, 저하.”그는 마지막으로 이수를 향해 아주 조심스럽게 인사를 하고 문 밖으로 사라졌다.그의 발걸음이 멀어지는 동안 방 안의 공기는 다시 천
귓가에 닿은 목소리는 위로인지, 반가움인지, 그리움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도진은 숨을 제대로 쉬지 못했다.사람들의 시선도, 사인회장도, 현실도 그에게는 모두 멀어졌다.그는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당신은 대체 누구입니까.”이수는 대답하지 않았다.대답 대신 그의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 올렸다.그리고, 정말로 오래 기다린 사람에게 하듯 조용히, 그러나 확신 있게 입맞춤을 했다.그 순간 도진의 다리가 풀렸다.머리가 가벼워졌다.심장이 너무 크게 뛰었다.세상이 기울었다.그는 휘청이며 앞으로 쓰러졌다.이수의 손이
비는 오후 내내 흐릿하게 내리고 있었다.도심의 커다란 유리 건물들은 회색 안개 속에서 윤곽이 무뎌져 있었고,사람들은 비를 피해 우산을 들고 바삐 움직였지만,이제 막 내리기 시작한 냄새는 오히려 공기를 맑게 정돈하고 있었다.도진은 백화점 입구 앞에서 잠시 걸음을 멈췄다.늘 그렇듯, 아무 계획 없이 들른 곳이었다.욕망도, 필요도 없이 그저 시간이 남아서 들어오는 곳그의 삶은 지루할 정도로 완벽했고, 어떤 자극도 오래 머물지 않았다.비가 어깨를 적셔도 그는 대수롭지 않았다.몇 백 년 동안 수없이 맞아온 비였다.어떤 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