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제14화 선을 넘는 온도(2)
"누가 돈 달래?"
탁-.
이안의 커다란 손이 서아의 핸드백 위를 덮었다.
"……!"
서아가 놀라 고개를 들었다. 이안이 턱밑까지 다가와 있었다.
그의 큰 체구가 가로등 불빛을 가리며 서아의 위로 짙은 그림자를 드리웠다.
도망칠 곳이 없었다. 뒤에는 서아의 주차된 차가 막고 있었고, 앞에는 이안이 거대한 벽처럼 버티고 섰다.
"비켜요."
서아가 목소리를 깔며 경고했다.
하지만 이안은 비키기는커녕, 상체를 살짝 숙여 서아의 얼굴과 시선을 나란히 맞췄다.
그의 까만 눈동자가 서아의 흔들리는 동공을 집요하게 파고들었다.
"당신, 오늘 회식 내내 나만 보더라."
"……뭐라고요?"
"내가 물잔을 들 때도, 나이프를 쥘 때도. 당신 시선은 계속 내 손끝에 닿아 있었잖아. 안 그래?"
정곡을 찔렸다.
서아는 회식 내내 이안을 무시하려 애썼지만, 시선은 자꾸만 그의 거친 손과 핏대 선 팔뚝으로 향했었다. 그것은 철저하게 무의식적인 반응이었다.
"착각하지 마. 나는 당신이 또 무슨 돌발 행동을 해서 분위기를 망칠까 봐 감시한 것뿐이니까."
"감시?"
이안이 낮게 웃었다. 목 안쪽에서 끓어오르는 듯한 진득한 웃음소리였다.
"당신은 참 그럴싸한 변명들을 잘 만들어내. 비즈니스, 통제, 감시. 그렇게 그럴듯한 단어들로 당신의 진짜 속내를 칭칭 감아놓고 살지."
"헛소리 그만하고 비키라고 했습니다."
서아가 이안의 가슴팍을 손으로 밀어냈다.
하지만 단단한 근육질의 몸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안은 서아가 밀어낸 손을 그대로 낚아챘다.
"읏……."
이안이 서아의 얇은 손목을 꽉 틀어 쥐었다.
지난번 작업실에서 느꼈던 그 델 듯이 뜨거운 체온이, 얇은 블라우스 소매를 뚫고 서아의 피부에 고스란히 전해졌다.
"이거 놔!"
서아가 당황하여 손을 빼내려 했지만, 이안의 악력은 무자비했다.
그가 서아의 손목을 쥔 채, 그녀를 자신의 몸 쪽으로 바짝 끌어당겼다. 구두 굽이 바닥에 끌리며 두 사람의 몸이 닿을 듯 말 듯 가까워졌다.
숨결이 섞였다. 서아는 산소가 부족해지는 것을 느꼈다.
"당신, 그거 알아?"
이안의 목소리가 귓가에 뱀처럼 감겨들었다.
"지금 당신 맥박, 미친 듯이 뛰고 있어."
서아의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수치심과 분노, 그리고 도무지 정의할 수 없는 기묘한 흥분감이 뒤섞여 온몸의 피가 역류하는 것 같았다.
"미친 자식. 이거 안 놔?! 당장 경찰 부를 거야!"
"불러."
이안이 픽 웃으며 서아의 손목을 쥔 손에 더 힘을 주었다.
"갤러리 아르테 수석 큐레이터가, 이 밤거리에 무명 작가랑 엉켜서 실랑이하는 꼴. 내일 아침 뉴스 기사로 나면 참 볼만하겠네. 안 그래?"
"너……!"
서아의 입에서 결국 정제되지 않은 날것의 분노가 터져 나왔다.
늘 교양 있고 우아한 언어만 사용하던 그녀였다. 남편 도진 앞에서는 목소리 한 번 높인 적 없는 완벽한 아내였다.
하지만 이 야만적인 남자 앞에서는 그녀가 평생을 걸쳐 만들어온 견고한 가면이 너무도 쉽게, 속수무책으로 박살 나고 있었다.
"그렇게 노려보지 마. 잡아먹고 싶어지니까."
이안의 시선이 서아의 분노에 찬 눈동자에서 미끄러져 내려와, 가쁘게 숨을 몰아쉬는 그녀의 붉은 입술에 머물렀다.
농염하고 노골적인 시선. 시선만으로도 이미 옷이 벗겨지는 듯한 폭력적인 감각.
서아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공포가 아니었다. 그것은 명백한 전율이었다.
"윤서아."
이안이 처음으로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직함이 아닌, 오롯이 그녀라는 존재 자체를 부르는 서늘하고 묵직한 음성.
이안이 빈손을 들어 올려 서아의 뺨을 가볍게 쓸어내렸다. 거친 굳은살이 하얗고 매끄러운 피부를 스치는 감각에 서아는 눈을 질끈 감았다.
"고상한 척, 완벽한 척 그만해. 역겨우니까."
그의 입술이 서아의 귓바퀴에 닿을 듯 다가왔다.
"당신, 그 숨 막히는 진열장 안에서 벗어나고 싶어 미치겠잖아."
"……."
"나한테 전시 비즈니스 운운하면서 내 반경 안에 얼쩡거리는 거. 사실은 내 그림이 필요한 게 아니라……."
이안이 서아의 손목을 쥔 손을 위로 들어 올리며, 그녀를 자신의 넓은 가슴팍에 완전히 밀착시켰다.
뜨거운 심장 박동이 서아의 몸으로 고스란히 전도되었다.
"나한테, 철저하게 헤집어지고 싶어서 그런 거 아니야?"
심장이 쿵, 하고 바닥으로 곤두박질치는 소리가 들렸다.
서아는 숨을 쉬는 방법조차 잊어버린 사람처럼 굳어버렸다.
정확했다.
자신조차 외면하고 억눌러왔던, 가장 밑바닥에 도사리고 있던 시커먼 욕망.완벽한 남편, 완벽한 집, 완벽한 직장.
박제된 나비처럼 아름답지만 생명력이 거세된 삶에서 벗어나, 피 흘리고 찢기더라도 숨통을 트고 싶었던 그 지독한 갈증을.이 짐승 같은 남자가 단숨에 꿰뚫어 보고, 기어코 입 밖으로 끄집어내 버린 것이다.
"대답해 봐."
이안이 서아의 턱을 쥐고 강제로 고개를 들게 만들었다.
"내 말이 틀려?"
서아의 눈동자가 파도처럼 요동쳤다.
반박해야 했다.
천박한 소리 지껄이지 말라며 그의 뺨을 올려붙이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나야 했다.하지만 서아의 입술은 달싹거리기만 할 뿐, 아무런 대답도 뱉어내지 못했다. 그녀의 핏속을 흐르는 이 기묘한 흥분과 배덕감이, 그의 말이 진실이라는 것을 증명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손님! 윤서아 고객님 맞으십니까!"
그때, 저만치서 뛰어오는 대리기사의 목소리가 정적을 찢었다.
마법이 풀린 것처럼, 팽팽했던 공기가 탁 끊어졌다.
서아는 짐승의 덫에 걸렸다가 간신히 빠져나온 초식동물처럼, 이안을 거칠게 밀쳐내고 뒤로 물러섰다.
"하아…… 하아……."
거친 숨을 몰아쉬는 서아의 눈빛은 혼란과 수치심으로 젖어 있었다.
이안은 밀려난 채로 제자리에 서서, 그런 서아를 여유롭고 서늘한 눈빛으로 관망할 뿐이었다.
"네, 제가 불렀습니다."
서아는 대리기사를 향해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하며, 도망치듯 자신의 차 뒷좌석으로 몸을 피했다.
차 문이 닫히는 순간까지도 서아는 이안 쪽을 바라보지 못했다.
창문 너머로 뒷걸음질 치는 풍경 속에서, 이안은 여전히 그 자리에 서서 서아의 차가 멀어지는 것을 똑바로 응시하고 있었다.
마치, 사냥감의 도주를 여유롭게 지켜보는 포식자처럼.
어두운 차 안.
서아는 무너져 내리듯 시트에 몸을 기대고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심장이 갈비뼈를 부수고 튀어나올 것처럼 미친 듯이 뛰고 있었다.
손목에는 이안이 쥐었던 악력이 붉은 멍처럼 선명하게 남아 있었고, 귓가에는 그가 내뱉은 선을 넘는 발언이 환청처럼 끊임없이 맴돌았다.
'나한테, 철저하게 헤집어지고 싶어서 그런 거 아니야?'
"미쳤어…… 윤서아. 정신 차려."
서아는 입술을 짓이기며 중얼거렸다.
그녀의 완벽했던 세계에 금이 가는 소리가, 돌이킬 수 없을 만큼 크고 선명하게 울려 퍼지고 있었다.
오후 1시.마포구 망원동의 후미진 골목 안쪽, 거무튀튀한 적벽돌로 지어진 낡은 상가 건물 지하 작업실 앞.서아는 자신의 하얀색 포르쉐 파나메라 안에서 한참 동안 시동을 끄지 못한 채 앉아 있었다.창밖으로 보이는 이안의 작업실 철문은 언제나처럼 굳게 닫혀 있었다.저 문을 열고 들어가면, 또다시 짐승처럼 달라붙어 올 이안의 거친 숨결이 생생하게 그려졌다."후우……."서아는 깊은숨을 내쉬며 백미러를 보았다.오늘 그녀는 마치 전장에 나가는 장수처럼 완벽하게 무장했다.머리부터 발끝까지 빈틈없이 떨어지는 크리스찬 디올의 화이트 수트, 그리고 셔츠 깃 사이로 은근하게 빛을 내뿜는 물방울 다이아몬드 목걸이.어젯밤 남편 도진이 그녀의 목에 직접 걸어주었던, 수억 원짜리 '성 안의 삶'에 대한 증표였다.'이게 나야. 내 진짜 모습이라고.'서아는 스스로에게 최면을 걸듯 중얼거렸다.이안이 주는 쾌락은 불량식품처럼 자극적이었지만, 그녀의 뼈와 살을 구성하는 것은 결국 도진이 제공하는 막대한 부와 명예였다.가진 것을 잃을까 벌벌 떠는 초라한 불륜녀의 모습은 오늘로 끝이다.서아는 차 문을 열고 하이힐 굽 소리를 또각거리며 작업실 쪽으로 걸어갔다.끼기기긱-무거운 철문이 둔탁한 마찰음을 내며 열렸다.작업실 안은 어제와 다름없이 지독한 테레빈유 냄새와 먼지가 뒤섞여 있었다.이안은 거대한 캔버스 앞에 앉아 붓을 움직이고 있었다. 물감이 덕지덕지 묻은 앞치마를 두르고, 헝클어진 머리를 한 채였다."일찍 왔네."이안이 붓을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그는 서아의 화려한 화이트 수트를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피식 웃음을 흘렸다."뭐야. 작업실 바닥에 구르기엔 너무 비싼 옷 같은데
"그래서…… 그 여자는 어떻게 되는데?"서아는 침을 꼴깍 삼키며 간신히 물었다."글쎄. 당신 생각은 어때? 당신이 그 여자라면 어떤 선택을 할 것 같아?"도진이 턱을 괸 채 서아와 눈을 맞추었다.그의 다정한 미소 뒤에 숨겨진, 바닥을 알 수 없는 깊은 심연이 서아를 빤히 들여다보는 것 같았다."나, 나라면……."서아의 입술이 바르르 떨렸다.도진은 다 알고 있는 걸까? 아니, 그럴 리 없다. 이건 그냥 소설 이야기일 뿐이다. 직업병이 도진 것일 뿐이다."당연히…… 성 안을 선택해야지. 순간의 호기심 때문에 자기가 가진 모든 걸 버리는 건…… 너무 어리석은 짓이잖아."서아가 애써 태연한 척하며 대답했다.그러자 도진의 입가에 아주 흡족한 미소가 번졌다."맞아. 어리석은 짓이지."도진이 테이블 위로 손을 뻗어 서아의 손등을 부드럽게 덮었다."진흙탕은 처음엔 체온처럼 따뜻하게 느껴질지 몰라도, 결국엔 말라붙어서 여자의 아름다운 비단옷을 찢어발기고 숨통을 조여버리거든. 성 밖으로 나가는 순간, 여자는 더 이상 고귀한 귀족이 아니라 그저 진흙을 뒤집어쓴 천박한 창부로 전락할 뿐이니까."서아의 등줄기를 타고 식은땀이 한 방울 흘러내렸다.창부.그 단어가 비수처럼 날아와 서아의 가슴에 꽂혔다."우리 서아는 참 똑똑해. 역시 내가 사랑하는 완벽한 뮤즈다워."도진이 자리에서 일어났다.그는 안주머니에서 길쭉한 검은색 벨벳 케이스를 꺼내 들고 서아의 등 뒤로 걸어갔다.딸깍-케이스가 열리는 소리와 함께, 서아의 눈앞에 영롱하게 빛나는 물방울 다이아몬드 목걸이가 자태를 드러냈다.
어쩜 강 작가님은 글도 그렇게 잘 쓰시는 분이, 인물도 훤칠하고 매너도 완벽하대? 저번 연말 자선 파티 때 보니까 백 관장 에스코트하는 솜씨가 아주 귀족이 따로 없던데.""남편이 워낙 세심한 편이라서요.""그러니까. 남자가 돈이 아무리 많아도 천박하면 티가 나기 마련인데, 강 작가님은 뼛속부터 기품이 흘러. 그런 남편 내조하면서 이렇게 갤러리까지 훌륭하게 키워내고. 백 관장은 전생에 나라를 구했나 봐."최 사모의 끊임없는 찬양을 들으며, 서아는 속으로 조용히 쾌재를 불렀다.최 사모가 수억 원짜리 그림을 턱턱 사들이는 이유는 작품이 좋아서가 아니다. '강도진의 아내'인 백서아와 친분을 유지하며 그들의 우아한 바운더리 안에 속해 있다는 우월감을 느끼고 싶기 때문이다.만약 이안의 말대로 강도진과 이혼을 한다면?눈앞에서 호호 웃고 있는 저 늙은 여우 같은 최 사모가 가장 먼저 갤러리의 발길을 끊을 것이다. 그리고는 강남 사모님들 모임에서 '젊은 놈팽이랑 눈 맞아서 쫓겨난 천박한 여자'라며 안줏거리로 씹어댈 것이 뻔했다.'이안. 네가 감히 나한테 이런 세상들을 버리라고? 네가 뭔데.'서아의 눈동자가 차갑게 식었다.이안과 뒹굴었던 침대에서의 쾌락은 이미 머릿속에서 말끔히 증발해버렸다.지금 그녀의 눈앞에 있는 것은 수억 원의 가치를 지닌 그림과, 자신을 돋보이게 해 줄 권력자들의 찬사뿐이었다."사모님, 이번 김 화백님 신작은 정말 사모님 저택 거실에 딱 어울릴 만한 대작이에요. 제가 특별히 다른 VVIP분들 홀드 다 막아놓고 사모님께 제일 먼저 보여드리는 거예요.""어머, 역시 우리 백 관장밖에 없어. 볼 것도 없지 뭐. 백 관장 안목 믿고 내가 바로 사인할게."단 30분 만에 3억 원짜리 그림의 매매 계약이 성사되었다.서아는 최 사모를 배웅하고 돌아와 계약서에 찍힌
끼이익-!강남 한복판의 왕복 8차선 도로.서아의 하얀색 포르쉐 파나메라가 거칠게 브레이크를 밟으며 갓길에 멈춰 섰다."하아…… 하아……."서아는 핸들에 머리를 박은 채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방금 전까지 이안의 작업실에서 겪었던 일들이 폭풍우처럼 머릿속을 헤집어놓고 있었다."이혼해. 그 가짜 새끼 밑에서 인형 노릇 하는 거 다 때려치우고 나와."귓가에 맴도는 이안의 목소리가 징그러울 만큼 생생했다.서아는 떨리는 손을 들어 자신의 목덜미를 매만졌다. 실크 스카프 아래로 감춰진, 이안이 짐승처럼 씹어 삼키듯 남겨놓은 검붉은 멍 자국.손끝에 닿는 미세한 통증마저도 서아의 온몸을 찌릿하게 만들었다."미친 새끼……."욕설을 내뱉었지만, 그녀의 하반신은 여전히 뻐근한 열기로 가득 차 있었다.이안의 그 무식하고 폭력적인 맹목.그것은 서아가 지금껏 단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날것의 자극이었다.언제나 완벽하고 이성적인 남편, 강도진 앞에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이안의 품에 안길 때면 그녀는 자신이 우아한 갤러리 관장 백서아가 아니라, 그저 쾌락에 미쳐 헐떡이는 한 마리 암컷이 된 것 같은 착각에 빠졌다.그 본능적인 해방감은 지독하게 달콤했다. 마약처럼 혈관을 타고 흐르며 이성을 마비시켰다.하지만."이혼이라니. 정신이 나간 게 분명해."서아는 고개를 들어 백미러 속 자신의 얼굴을 쳐다보았다.최고급 샵에서 관리받은 윤기 나는 머릿결, 한정판 샤넬 트렌치코트, 그리고 자신의 손목에서 영롱하게 빛나고 있는 파텍 필립 시계.이 모든 것이 누구의 돈으로, 누구의 이름값으로 유지되는 것인가.서아는
정숙한 척, 교양 있는 척, 현모양처인 척. 근데 내 앞에서는 어때?"이안의 손이 서아의 뺨을 타고 내려와, 트렌치코트 깃 사이로 드러난 맨살을 쓸어내렸다."숨소리 하나 못 감추고 다 드러내잖아. 이게 진짜 백서아야. 이게 당신 본모습이라고."징- 징- 징-그때, 서아의 트렌치코트 주머니에서 날카로운 진동음이 울렸다.서아는 화들짝 놀라며 이안을 밀쳐내려 했지만, 이안의 손이 더 빨랐다.그가 서아의 주머니에서 억지로 스마트폰을 빼냈다.액정에 뜬 이름은 [사랑하는 남편].이안의 입꼬리가 비릿하게 말려 올라갔다."돌려줘!""조용히 해. 진짜 남편인지, 아니면 입력된 멘트를 뱉는 AI인지 한번 테스트해 볼까?"이안은 서아의 입을 한 손으로 틀어막은 채, 통화 버튼을 누르고 스피커폰으로 전환했다."여보? 서아."작업실 안으로 도진의 나직하고 부드러운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평온하기 그지없는, 한없이 다정한 남편의 목소리였다.이안이 서아의 입을 막고 있던 손을 살짝 떼어냈다. 눈빛으로 대답하라는 무언의 협박을 보냈다.서아는 침을 꼴깍 삼키며, 최대한 떨리는 목소리를 숨기고 대답했다."어, 어어. 도진 씨.""어디야? 아침에 일어나 보니 없길래. 갤러리에 급한 일이라도 생겼어?""아…… 응. VVIP 고객분이 갑자기 뵙자고 하셔서. 미안해, 인사도 못 하고 나와서."서아가 거짓말을 내뱉는 순간, 이안의 커다란 손이 그녀의 허리춤을 파고들었다.트렌치코트 안쪽, 얇은 블라우스 너머로 뜨거운 손바닥이 맨살을 지분거리기 시작했다."흐읏……!"서아가 자신도 모르게 숨을 삼키며 몸을 비틀었다.이안
오전 10시.서아는 파우더룸 거울 앞에 서서 멍하니 자신의 얼굴을 바라보았다.눈 밑에는 짙은 다크서클이 내려앉아 있었고, 입술은 누군가에게 뜯긴 것처럼 붉게 부어올랐다.하지만 그녀의 시선이 머문 곳은 쇄골 아래쪽, 목덜미와 가슴이 이어지는 은밀한 부위였다.검붉은 멍 자국.어젯밤, 정원 구석의 어둠 속에서 이안이 짐승처럼 입술을 묻고 빨아들인 흔적이었다."미친 자식……."서아는 떨리는 손으로 컨실러를 집어 들었다.두껍게 덧발라 멍 자국을 지워보려 했지만, 거친 손아귀에 잡혀 억눌렸던 피부의 미세한 통증은 화장품으로 가려지지 않았다.덜덜 떨리는 손끝이 어젯밤의 기억을 고스란히 소환했다.남편의 서재가 올려다보이는 바로 그 정원 아래서, 자신은 이안의 목을 끌어안고 헐떡였다.밀어내야 한다는 이성은 공포와 쾌락이 뒤섞인 아드레날린 앞에 속수무책으로 녹아내렸다."안 돼. 이건 아니야. 여기서 멈춰야 해."서아는 컨실러를 세면대에 던지듯 내려놓았다.이대로 끌려다닐 수는 없었다.이안은 선을 넘어도 한참 넘었다. 어제는 집 앞 정원이었지만, 다음에는 안방 침실까지 쳐들어올지도 모르는 미친놈이었다.결판을 내야 했다.확실하게 선을 긋고, 두 번 다시 갤러리 외의 사적인 공간에서 얽히는 일이 없도록 단단히 못을 박아야만 했다.서아는 목 위까지 올라오는 실크 스카프를 단단히 두르고, 검은색 트렌치코트를 챙겨 입었다.평소라면 남편 도진에게 다녀오겠다는 인사라도 남겼겠지만, 오늘은 그럴 정신조차 없었다.도진은 아침 일찍부터 서재에 틀어박혀 소설 작업에 몰두하고 있었다.그녀는 도망치듯 저택을 빠져나와 차에 올라탔다.해방촌 옥탑을 정리한 뒤 얼마 전 새로 옮긴 곳.
제3화 마침표가 없는 방(1)계단을 오르는 도진의 발소리는 대리석 바닥에 규칙적으로 부딪히며 서재 앞으로 향했다.문을 열자, 차갑게 식은 공기가 그를 맞이했다. 서재는 그의 성소이자, 거대한 감옥이었다.벽면을 가득 채운 책장에는 고전부터 현대 소설, 그리고 자신의 이름이 선명하게 박힌 장편 소설들이 빼곡히 꽂혀 있었다.그는 천천히 걸음을 옮겨 넓고 묵직한 마호가니 책상 앞에 앉았다. 의자에 몸을 기대자 기분 좋은 가죽 냄새가 코끝을 스쳤다.도진은 심호흡을 크게 한 번 내쉬고는, 전원 버튼을 눌렀다.부잉-, 하는 기계음과
"저는 그때의 거친 문장들도 참 좋아했는걸요.""지금의 내 문장이 더 완성도가 높다는 게 평단의 일관된 의견입니다. 서아 씨도 알다시피.""물론이죠. 지금의 당신은 완벽해요. 의심할 여지 없이."서아는 부드럽게 맞받아쳤다. 대화의 흐름이 조금이라도 위험한 곡선을 그리려 하면, 두 사람은 약속이라도 한 듯 알아서 수위를 조절하고 안전한 평지로 돌아왔다. 그것이 이 결혼 생활을 5년 동안 파탄 없이 유지해 온 비결이었다.서아는 포크를 내려놓고 시계를 보았다. 7시 30분. 식사 시작 후 정확히 30분이 지난 시간이었다."오늘
제1화 완벽한 식탁의 조건(1)오전 6시 50분.정확히 조율된 스위스제 벽시계의 초침이 서늘한 거실의 공기를 갈랐다.서아는 눈을 떴다. 암막 커튼 사이로 스며든 미세한 아침 햇살이 정돈된 침대 위에 일정한 선을 그리고 있었다. 옆자리는 이미 비어 있었다. 시트에는 흐트러짐이 없었다. 김도진은 언제나 자신보다 20분 먼저 일어났고, 그가 머물던 자리는 마치 아무도 눕지 않았던 것처럼 완벽하게 정리되어 있었다.서아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실크 가운의 끈을 단정하게 묶고 욕실로 향했다. 거울 속의 얼굴은 흐트
제7화 불협화음의 침입자(1)오후 2시 30분.서아는 책상 위에 놓인 탁상시계를 차가운 눈으로 응시했다. 시곗바늘이 초 단위로 움직이는 소리가 유독 거슬렸다.약속 시간은 오후 2시 정각이었다.서아의 사전에서 '지각'이란 허용되지 않는 단어였다. 갤러리 아르테의 수석 큐레이터인 그녀와의 미팅을 위해 내로라하는 작가들도 30분 전부터 로비에서 대기하는 것이 당연한 관례였다.그런데 이름 없는 무명 작가, 이안이라는 남자는 무려 30분이나 약속 시간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