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라리엘은 트리샤의 손끝이 머물렀던 허공을 결연하게 바라보며 ‘딱 중간’이라는 말을 작게 읖조렸다.트리샤는 그런 라리엘의 가녀린 옆얼굴을 지켜보다가, 참지 못하고 길게 한숨을 내쉬며 솔직한 속내를 흘렸다.“에휴…부인이 과연 그걸 잘 해낼 수 있을지 모르겠네. 워낙 속이 유리처럼 투명한 사람이라.”트리샤의 걱정을 읽은 라리엘은 잠시 눈을 깜빡였다. 그녀는 자신에게 기대를 걸어준 동료를 안심시키려는 듯 햇살처럼 부드럽고 온화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너무 걱정하지 말아요, 트리샤 씨. 저도 명색이 공작가의 안주인으로서, 사교계에서 상대의 기분을 맞추거나 화제를 돌리는 화술 정도는 많이 익혔으니까.”그 말간 웃음에 트리샤는 오히려 더 불안해졌다.저렇게 착해 빠진 순진한 얼굴로 수십 년간 권모술수를 부려왔을 노련한 늙은이를 상대로 연기를 하겠다니, 도박도 이런 위험한 도박이 없었다.하지만 그런 그녀의 걱정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라리엘은 한층 진지해진 눈으로 단호하게 말했다.“나보다는 트리샤 씨가 더 걱정이에요. 원장님의 품에서 열쇠를 훔치는 것도, 그 금기된 방을 홀로 뒤지는 것도 모두 엄청나게 위험한 일이잖아요. 그러니까 혹시라도 들킬 것 같으면 절대 무리하지 말아요. 만약 누군가와 마주치면 바로 길을 잃었다고 둘러대고 빠져나와요. 수색은 포기해도 괜찮으니까.”라리엘이 살며시 손을 뻗어 트리샤의 손을 꼭 붙잡았다.따뜻한 온기가 손을 통해 전해지자 트리샤는 순간적으로 손을 움찔했다. 그러나 그녀는 끝내 그 따뜻한 손을 뿌리치지 못했다.대신 어깨를 으쓱이며 평소처럼 능청스럽게 대꾸했다.“참나, 부인. 내 평생 해온 일이 남의 눈 피해서 뒷조사하고 들키지 않게 연기처럼 사라지는 거에요. 그
벽에 고정된 작은 벽등만이 가쁘게 숨을 몰아쉬듯 빛을 내고 있는 밤이었다.수도원의 두꺼운 돌벽 사이로 스며드는 겨울 밤공기가 유난히 차고 무거웠다. 기분 나쁜 정적과 적막함이 안개처럼 감도는 수도원 별채의 작은 방 안에는 라리엘과 트리샤가 낡은 목재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무겁게 마주 앉아 있었다.“젠장, 분명 뭔가 구린게 하나쯤은 있을텐데…”트리샤가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거칠게 쓸어올렸다. 머리카락 가닥들이 마치 현재의 꼬여버린 상황 같아 괜히 그녀의 예민한 신경을 거슬렀다.벌써 며칠째, 숨죽이며 지켜본 지하 수로 주변에는 쥐새끼 한 마리 얼씬거리지 않았다.시종으로 위장한 트리샤가 그림자처럼 발소리를 죽이고 내부 서고와 공용 집무실을 몰래 뒤져보았지만, 안셀리온의 꼬리를 잡을 만한 문서는커녕 깨끗하게 세탁된 합법적인 장부들뿐이었다.불안한 듯 무릎을 연신 까닥거리는 그녀의 눈빛에는 초조함이 가득했다.확실하다고 믿었던 지하 수로의 단서도, 수도원장의 치명적인 약점도 —모든 길이 막혀버린 듯한 기분에, 혹시 처음부터 방향을 잘못 잡은 건 아닌가 하는 불길한 의심이 스멀스멀 고개를 들었다.그때까지 말없이 찻주전자를 기울이던 라리엘이 나직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트리샤 씨. 나… 며칠 동안 기도를 핑계로 수도원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면서 떠오른 기묘한 기억이 하나 있어요.”축 처져 있던 트리샤의 고개가 번쩍 들렸다.라리엘은 찻잔 속에서 아슬아슬하게 일렁이는 등불의 붉은 빛을 물끄러미 응시하며, 아주 먼 유년 시절의 파편을 더듬기 시작했다.“어주 어릴 적, 아버지를 따라 이곳에 왔을 때였죠. 호기심에 수도원 뒤편 구석진 복도를 지나 어느 방 앞에 멈춰 선 적이 있었어요. 문 틈 사이로 묘한 향 냄새와 오래된 종이의 먼지 냄새가 났던 걸 기억해요.”“그래서요? 그 방 안에 대체 뭐가 있었
겉으로는 오직 공작 부인의 안위와 결백을 진심으로 걱정하는 척하면서도, 실려 있는 문장의 맥락은 라리엘이 무언가 추악한 비밀을 숨기고 있는 부정한 여인인 것처럼 은연중에 낙인을 찍어버리는 고단수의 화법이었다.클로디아는 자신이 던진 말이 공작의 마음 속에 어떤 파문을 일으킬지 잔뜩 기대하며, 숨을 죽인 채 그의 안색을 살폈다.입을 굳게 다문 공작의 시선은 허공의 어느 한 지점을 날카롭게 꿰뚫고 있었다. 정적이 길어질수록, 공작의 의심이 이미 시작되었다고 짐작한 클로디아는 속으로 미소 지었다.이윽고 아르덴이 시선을 돌려 클로디아를 보았다.순간, 그의 입가에 눈이 시릴 만큼 아름답고 우아한 호선이 그려졌다. 클로디아가 꿈꿔왔던, 오직 선택 받은 특별한 이에게만 허락될 것 같은 그림 같은 미소였다.“레이먼 백작 영애, 정말 고맙군. 우리 알브릭 가문을 위해 여린 몸으로 이토록 위험을 무릅써주다니. 나머지는 내가 직접 알아볼 테니 이제 영애는 걱정하지 않아도 되네.”그 눈부신 미소와 다정한 어조에 클로디아는 잠시 숨 쉬는 법조차 잊은 채 넋을 잃고 그를 바라보았다.목적을 달성했다는 확신이 전율처럼 온몸을 감쌌다.공작 부인을 향한 공작의 의구심을 자극하는 데 성공했을 뿐만 아니라, 그의 신뢰까지 얻어냈다는 만족감이 그녀를 취하게 만들었다.아르덴은 직접 자리에서 일어나 응접실 문 앞까지 그녀의 걸음에 맞춰 다정하게 배웅했다.그 행동 하나만으로도, 그녀의 자존감과 허영심은 통제할 수 없을 정도로 위험하게 부풀어 올랐다.“클로디아…라고 했던가?”그의 입술 사이에서 마침내 자신의 이름이 흘러나오자, 클로디아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그녀가 잔뜩 상기되어 붉어진 얼굴로 수줍게 아르덴을 올려다보았다. 그가 한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을
창밖으로 비치는 오후의 잔광이 응접실 천장의 거대한 수정 샹들리에에 부딪혀 사방으로 흩어졌다.몇 번이나 와본 응접실이었지만 오늘은 평소와 다르게 무거운 공기가 클로디아의 숨을 조여왔다.그녀는 공작저의 부드러운 벨벳 소파에 앉아 있었지만, 가시방석에 앉은 듯 몸이 자꾸만 꼿꼿하게 굳었다.손끝을 만지작거리던 그녀가 떨려오는 손을 감추기 위해 찻잔을 들려다 이내 그만두었다.찻잔이 떨려 받침대와 부딪히는 소리라도 난다면, 자신의 긴장과 불안이 이 넓은 응접실에 고스란히 울려 퍼질 것만 같아 두려웠다.오늘 공작저를 찾은 클로디아의 목적은 명확했다.그녀는 자신이 던질 한마디가 공작의 가슴 속에 의구심이라는 독초를 심기를 바랐다.공작 부인이 숨기고 있는 사생활이든, 가문의 뒤편에 감춰진 구린 구석들이든ㅡ 그것이 무엇이든 상관없었다.사실 여부도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건 완벽해 보이는 부인의 지위에 아주 작은 균열을 내는 것이었다.그렇게 된다면 자신이 그 틈을 비집고 들어갈 기회가 반드시 올 것이다. 클로디아는 그렇게 믿고 싶었다.그때, 응접실 문이 열렸다.클로디아는 저도 모르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문을 열고 들어오는 공작에게서 금방이라도 살얼음이 얼어붙을 것 같은 서늘한 냉기가 뿜어져 나오는 것 같았다. 그는 천천히 걸어 들어와 응접실 중앙에 멈춰 섰다.그리고는 형식적인 예의를 차리기보다 날 선 시선으로 클로디아를 빤히 응시했다.“레이먼 백작 영애. 부인이 개인적인 사정으로 자리를 비운 시각에, 굳이 나를 찾은 연유가 무엇인지 들어야겠군.”사교계의 평범한 인사조차 생략된 아르덴의 낮고 단정한 목소리에 클로디아의 심장이 발끝까지 덜컥 내려앉았다.눈앞에 선 그의 수려한 이목구비는 조각처럼 아름다웠지만, 그 차가운 눈 안에 담긴 기세
트리샤는 의미심장하게 라리엘을 위아래로 집요하게 훑으며, 입꼬리를 한껏 올린 채 장난기 어린 웃음을 살살 흘렸다.“흐음… 아르데엔? 아주 자연스럽게 공작 각하의 함자를 다정하게 부르시네? 그러고보니 요즘 부부 사이가 꽤 좋아진 것 같던데… 어머, 부인? 얼굴이 왜 그렇게 왜 빨개져요?”“하하…참나, 트리샤 씨도 오늘 온종일 차가운 수로를 기어 다니느라 무척 피곤할 테니 얼른 쉬어야겠네요. 난 이만 나가 줄게요.”라리엘이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채로, 잔뜩 붉어진 얼굴을 가리기 위해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났다.바로 눈앞에서 턱을 괸 채 대놓고 키득거리는 트리샤의 능청스러운 시선을 피하려는 듯, 라리엘은 괜히 고개를 푹 숙이고 테이블 위에 놓인 나무 쟁반과 빈 그릇들을 황급히 정리하려고 가느다란 손을 뻗었다.공작 가문의 안주인인 라리엘에게 식기까지 직접 치우게 내버려 둘 수는 없었기에, 트리샤는 잽싸게 손을 뻗어 그녀의 매끄러운 손목을 부드럽게 막아 세웠다.“아유, 내가 먹은 그릇은 내가 알아서 치울 테니까, 그대로 두고 그냥 나가요.”“그래도 어차피 내 방으로 건너가는 김에 내가 들고 가서 문밖에 내놓으면ㅡ”짧게 한숨을 푹 내쉰 트리샤가 여전히 미련을 못 버린 채 쟁반을 만지작거리는 라리엘을 아래에서 위로 올려다보았다.“부인의 그런 태도가 날 더 불편하고 미안하게 만드는 거라고요.”“아… 그런가요? 내가 도리어 부담을 주었나 보네요. 미안해요, 그럼 트리샤 씨 말대로 그냥 나갈게요.”머쓱한 미소를 지으며 슬그머니 손을 거둔 라리엘이, 치맛자락을 정리하며 단정한 걸음으로 문 쪽을 향해 걸어갔다. 트리샤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지도 않은 채 식어버린 빵 한 조각을 입에 물며, 툭 내뱉듯 한마디를 던졌다.“아까… 나한테 그렇게 말해줘서 고마워요.”탁.낡은 나무 문의 손
담담하게 내뱉어진 말이었지만, 라리엘은 그 말이 얼마나 잔인한 자책인지 단번에 알아차렸다. 가슴 깊은 곳에 가두어 두었던 진심이 계속해서 문장으로 엮여 흘러나왔다.“그런데...당신 말대로 내가 뭘 한건 아니잖아요. 떳떳한 삶은 아니었을지언정, 난 그냥 내게 주어진 삶을 살고 있었을 뿐인데…”그녀는 말끝을 흐리다가, 곧 스스로가 한심하다는 듯 불만이 가득 섞인 거친 한숨을 내뿜었다.“하, 내가 왜 이런 얘길 당신한테 하고 있는 건지… 됐으니까 다 잊어버리고 그냥 신경 쓰지 말아요.”트리샤는 미간을 깊게 찌푸리며 의자를 밀고 일어나려 했다.그 순간, 라리엘이 트리샤보다 먼저 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생각할 틈도 없이 테이블을 반바퀴 돌아 트리샤의 앞으로 성큼 다가갔다.라리엘의 하얗고 부드러운 두 손이 트리샤의 거친 손을 덥석, 힘주어 붙잡았다. 차가웠던 손끝이 맞닿는 순간 트리샤의 눈이 크게 흔들렸다.“맞아요! 그러니까 트리샤 씨, 제발 더는 그런 잔인한 생각은 스스로에게 하지 말아요. 제이드가 과거에 그 어떤 선택을 했든, 그건 결코 트리샤 씨의 잘못이 아니에요!”라리엘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려왔다.“나는… 이 여정에 트리샤 씨가 함께해줘서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해요.”감정을 숨길 줄 모르는 라리엘의 커다란 눈에 눈물방울이 맺혀 일렁였다. 예상치 못한 그녀의 반응에 트리샤는 당황한 듯 눈을 빠르게 깜빡였다.잡힌 손을 뿌리치지도 못한 채, 그녀는 어정쩡하게 시선을 먼 바닥으로 흘렸다.“뭐야, 대체. 당사자인 난 아무렇지도 않은데, 왜 피해자인 당신이 눈물을 흘리고 그래요?”라리엘은 고개를 세차게 저으며, 자신의 가슴속 깊은 진심을 어떻게든 전달하려는 듯 잡고 있던 손에 더욱 힘을 꽉 주어 움켜쥐었다.“진심이에요, 트리샤 씨. 정말로요.”가느다란
그것으로 족했다. 어차피 자신이 죽인것과 다름 없었다. 자신이 더 깊이 파헤치지만 않았더라도, 백작에게 그런 것을 요청하지만 않았더라도 백작은 죽지 않았을 것이다. 더구나 그녀가 진실을 알게 되면 분명 더 깊이 파헤치려 들것이 뻔했다. 그렇게 되면 그녀 또한 표적이 될 수 있다. 무엇보다 백작을 죽인 세력의 실체가 아직 안개속에 있다는 사실이 그의 피를 말리게 했다. 그보다는 차라리 자신을 오해한 채 증오하는 편이 나았다. 친구이자 스승의 딸에게 씌워진 비극적인 연극. 그 모든 비난과 저주는 자신 하나로 충분했다.
“하아…… 하…….” 거칠게 몰아쉬는 숨이 방금 전 아르덴이 서 있던 공간의 잔열을 집어삼켰다. 심장이 늑골을 부수고 나올 것처럼 뛰었다. 단순한 공포가 아니었다. 뺨을 타고 흐르던 그의 서늘한 숨결, 얇은 잠옷 너머로 전해졌던 손바닥의 지독한 열기, 그리고 찰나의 순간 자신을 꿰뚫었던 눈빛. 그 모든 감각이 사슬처럼 그녀의 전신을 옭아매고 있었다. 라리엘은 떨리는 손으로 자신의 목덜미를 감싸 쥐었다. 그의 숨결이 닿았던 자리가 여전히 화끈거렸다. 마치 낙인이 찍힌 것 같았다. ‘자극하지 말라고?’ 그녀는
의회에서 돌아온 아르덴의 마차가 저택 정문에 들어선 것은 해가 완전히 자취를 감춘 뒤였다. 아르덴은 마차에서 내리자마자 망토를 하인에게 넘겼다. 차가운 밤공기를 뚫고 저택으로 들어온 그의 모습에는 금실이 수놓인 어깨 장식과 단정한 칼집, 그리고 하루 종일 그를 조여 왔을 격식과 피로가 한데 엉겨 있었다. 예복도 채 벗지 않은 채 그는 곧장 식당으로 향했다. 라리엘은 이미 식탁 앞에 앉아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니, 기다렸다기보다는 도살장에 끌려온 짐승처럼 그가 올 시간만을 헤아리며 경직되어 있었다. 촛불은
아침 식사가 끝난 후, 식당에 남겨진 것은 차갑게 식은 커피 향기와 라리엘의 떨리는 숨소리뿐이었다. 그녀는 억지로 자리에서 일어나 몸을 정돈했다. 이제부터는 슬픔이나 분노에 잠겨 있을 시간이 없었다. 알브릭 공작저라는 거대한 괴물의 뱃속에서 살아남으려면, 우선 이 내부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파악해야 했다. 식당 문을 열고 나가자, 어제 연회장에서 보았던 중년의 남자가 뒷짐을 진 채 서 있었다.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빳빳하게 다려진 연미복, 차가운 은테 안경 너머로 번뜩이는 예리한 눈매. 알브릭 가문의 가신이자 대대로 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