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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문장 사이의 공백

Author: 데이지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05-18 14:03:58

회의실 창밖으로 비가 다시 내리기 시작했다.

잔잔했지만, 오래 갈 비였다.

유림은 앉지 않았다. 

테이블 끝에 서서, 파일을 내려다보는 건우를 바라보고 있었다.

“대표님이 어제 저녁, 제게 전화를 하셨습니다.”

그녀의 말투는 단정했다.

감정이 끼어들 틈이 없었다.

건우는 파일을 덮지 않았다.

통화 기록의 숫자들이 시야에 남아 있었다.

저녁 7시 12분.

“오늘로 끝내자고 하셨다고요.”

그가 되물었다.

“네.”

“무엇을.”

유림은 잠시 침묵했다.

답을 고르는 사람의 침묵이 아니라,

상대를 재는 사람의 침묵이었다.

“업무 관계를요.”

건우의 눈이 미세하게 움직였다.

“대표님과 저는 해외 법인 구조를 같이 정리하고 있었습니다. 최근 투자 건이 복잡했거든요.”

그녀의 손가락이 파일 위 한 페이지를 가볍게 넘겼다.

“이 법인. 대표님이 직접 설계하셨죠.”

건우는 그 이름을 읽었다.

낯선 해외 법인. 지분 구조가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형이 갑자기 정리하겠다고 했다는 겁니까.”

“갑작스럽진 않았어요.”

유림의 시선이 창밖으로 잠시 향했다가 돌아왔다.

“이미 오래 고민하셨던 것 같았습니다.”

그녀의 말은 부드러웠지만, 그 안에 미세한 금이 있었다.

건우는 고개를 들었다.

“형이 고민하던 게, 회사 문제였습니까.”

“회사만은 아니겠죠.”

짧은 대답. 회의실 공기가 조용히 식었다.

“어제 통화에서, 대표님이 그러셨습니다.”

유림은 천천히 말을 이었다.

“이제 정리해야 할 게 있다.”

건우의 심장이 느리게 뛰었다.

“정리라니.”

“정리.”

그녀는 같은 단어를 반복했다.

“사람도, 구조도.”

그 말이 애매하게 걸렸다.

사람.

건우는 그 단어를 곱씹었다.

“형이 누구를 정리하려 했다는 겁니까.”

유림은 처음으로 아주 옅게 웃었다.

“그건… 대표님만 아셨겠죠.”

침묵이 길어졌다.

회의실 문 밖에서 누군가 발걸음을 멈췄다가 지나갔다.

회사 안은 평소와 다름없이 돌아가고 있었다.

대표가 죽었는데도.

“대표님은 어제… 평소와 달랐습니까.”

건우가 물었다.

서유림은 잠시 생각했다.

“조용했습니다.”

“원래도 조용하지 않았습니까.”

“어제는… 결심한 사람 같았습니다.”

그 말은 묘하게 정확했다.

건우는 시선을 내렸고, 형의 얼굴이 가만히 떠올랐다.

평온했던, 너무 평온했던 얼굴.

“그 통화 이후에, 다시 연락한 적은 없습니까.”

“없습니다.”

단정한 대답.

“하지만.”

그녀가 덧붙였다.

“대표님이 먼저 끊었습니다.”

건우의 눈이 다시 들렸다.

“무슨 뜻이죠.”

“통화를 제가 먼저 끝내지 않았습니다. 대표님이… 중간에 끊었습니다.”

“중간에.”

“네.”

건우의 머릿속에서 시간이 겹쳤다.

저녁 7시 12분.

사망 추정 시각은 8시 전후.

“그때 대표님 목소리는 어땠습니까.”

서유림은 건우를 똑바로 바라봤다.

“급했습니다.”

“급했다고요?”

“마치… 누군가 옆에 있는 것처럼.”

공기가 멎은 듯 고요해졌다.

“누군가라니.”

“정확히는 모르겠습니다.”

그녀는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하지만 통화가 끊기기 직전에,

대표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짧은 정적.

“‘지금은 안 돼.’”

건우의 손끝이 미세하게 굳었다.

-지금은 안 돼.

그 문장은 누군가에게 하는 말이었다.

“그게 마지막입니까.”

“네.”

유림은 더 말하지 않았다.

회의실 안은 지나치게 조용했다.

건우는 천천히 숨을 고르며 말했다.

“형이 회사 문제로 위협받은 적은 없습니까.”

“위협은 없었습니다.”

그녀는 곧장 답했다.

“하지만 압박은 있었습니다.”

“어떤 압박.”

“투자 구조를 재조정하라는 압박.”

“누가.”

유림은 한 박자 늦게 대답했다.

“이사회 일부.”

그 말은 의미를 품고 있었다.

대표가 죽고, 이사회 일부가 압박을 넣고 있었다.

우연이라고 보기엔, 시점이 묘했다.

“형이 그걸 거부했다는건가요?.”

“네.”

“그리고 어제, 정리하겠다고 말했고요?”

“네.”

건우는 눈을 감았다가 떴다.

어젯밤, 거실.

깨진 창문. 피. 그리고 하나의 말.

‘창문, 이상하지 않았어?’

그녀는 왜 그걸 먼저 꺼냈을까.

“대표님과 개인적인 관계는 없었습니까.”

건우가 묻자, 서유림의 눈빛이 아주 잠깐 흔들렸다.

그러나 곧 원래 자리로 돌아왔다.

“업무 외적인 만남은 없었습니다.”

그 말은 사실일 수도, 아닐 수도 있었다.

건우는 더 캐묻지 않았다.

지금은.

“필요한 게 있으면 연락 주세요.”

유림이 말을 정리했다.

“대표님의 죽음이 단순 강도 사건으로 

끝나길 바라진 않습니다.”

그녀는 문 앞에서 멈춰 섰다.

“대표님은… 그렇게 허술하게 강도한테 당할 분이 아니니까요.”

문이 닫혔다.

건우는 한동안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대표의 자리. 그 자리는 이제 비어 있다.

그리고 그 빈자리를 두고 여러 시선이 오가고 있을 것이다.

그는 파일을 다시 펼쳤다.

통화 기록.

저녁 7시 12분.

그리고 그 직후, 통화 없음.

건우는 핸드폰을 꺼내 시간을 확인했다.

어젯밤 8시 27분.

하나가 그의 집 초인종을 눌렀던 시간.

-그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을까.

비는 창문을 두드리고 있었다.

건우는 그날 처음으로 확신했다.

형의 죽음은, 거실에서 끝난 사건이 아니다.

그리고 자신은 그 중심으로 천천히 끌려가고 있었다.

회사에서 돌아오는 길, 

건우는 신호가 바뀔 때마다 괜히 브레이크를 더 깊이 밟았다.

라디오는 켜지 않았고, 창문 밖 풍경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대표실 문 앞에서 멈췄던 순간이 자꾸 떠올랐다.

책상은 그대로였고, 의자는 안쪽으로 밀려 있었으며,

서류는 정리된 채 흩어지지 않았다.

마치 잠깐 자리를 비운 사람처럼.

신우는 늘 그랬다.

언제든 돌아올 사람처럼 자리를 정리해두고 나가던 사람.

그런데 이번엔 돌아오지 않는다.

‘지금은 안 돼.’

유림이 전한 마지막 통화의 말이 자꾸 머릿속을 맴돌았다.

누구에게 한 말이었을까.

무엇이 안 된다는 뜻이었을까.

그 생각을 더 밀어붙이기 전에, 집에 도착했다.

현관 불이 켜져 있었다.

문을 열자 잔잔한 음악이 흘러나왔다.

클래식이었다. 숨을 낮추게 만드는 선율.

하나는 소파에 앉아 있었다.

정장을 벗고 편한 차림이었지만, 

자세는 흐트러지지 않았다.

“왔어?”

건우는 신발을 벗으며 짧게 대답했다.

“네.”

그녀가 리모컨을 내려놓았다.

“회사 어땠어?”

건우는 코트를 걸어두며 대답을 늦췄다.

“…그냥 뭐….”

그 이상은 덧붙이지 않았다.

하나는 잠시 그를 바라보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대표실은… 그대로였어?”

그 질문은 권력이나 자리 얘기가 아니었다.

그 사람의 흔적을 묻는 말이었다.

“네. 정리도 안 돼 있었어요.”

하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신우 씨는 늘 그랬지. 자리를 비워도, 금방 돌아올 사람처럼.”

그 문장이 건우의 가슴을 묘하게 건드렸다.

형의 의자가 다시 떠올랐다.

잠시 정적이 흘렀다.

“회사에서 누굴 만났어?”

건우는 물컵을 집어 들었다.

“전략기획팀 차장이라는 사람.”

“서유림?”

“네.”

하나는 고개를 조금 기울였다.

“어땠어?”

건우는 곧장 답하지 않았다.

물 한 모금을 삼킨 뒤에야 말했다.

“…별거 없었어요”

“신우 씨에 대한 얘기에도?”

“네.”

그녀의 시선이 잠시 멈췄다.

“어제 마지막으로 통화했다고 하던데.”

건우는 잠깐 숨이 막혔다.

“네. 업무 정리 얘기였다고 해요.”

그는 일부러 ‘지금은 안 돼’라는 문장을 꺼내지 않았다.

지금 그 말을 꺼내면, 대화가 더 깊어질 것 같아서.

하나는 더 묻지 않았다.

그게 오히려 불편했다.

밤이 깊어지고, 음악이 꺼진 뒤에도 건우는 쉽게 잠들지 못했다.

부엌으로 나와 물을 따르던 순간, 게스트룸 문이 열렸다.

하나가 나왔다.

“안 자?”

“잠이 안 와서.”

그는 시선을 마주하지 않은 채 대답했다.

하나는 식탁에 앉았다.

잠시 망설이다가 조용히 물었다.

“형 얘기하는 거… 힘들지?”

건우는 그 질문을 예상하지 못한 듯 멈췄다.

시선을 피하려 했지만, 이미 마주 앉은 상태였다. 피할 수 없었다.

입을 열었다가 다물고, 몇 초가 흐른 뒤에야 말했다.

“…지금은 좀.”

그 이상은 이어지지 않았다.

말이 목 안에서 멈췄다.

하나는 그제야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더 묻지 않았다.

그 침묵이 오히려 고마웠다.

잠시 후, 하나가 다시 입을 열었다.

“강도라고 했지?”

“네.”

“넌 형사의 그 말 믿어?”

건우는 쉽게 답하지 못했다.

믿는다는 말도, 믿지 않는다는 말도 할 수 없었다.

“…아직은…잘 모르겠어요.”

그게 가장 솔직한 말이었다.

하나는 창가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빗방울이 유리창을 타고 내려가고 있었다.

“사건 당일 그 집에 제일 먼저 들어간 건 나야.”

그녀가 조용히 말했다.

“그 장면을 제일 먼저 본 사람도 나고.”

그 말에는 도발이 없었다. 자기 확인에 가까웠다.

“그런데도… 넌 나랑 같이 있을 수 있겠어?”

질문은 낮았다.

건우는 한참 동안 대답하지 않았다.

형의 얼굴과, 젖은 거실과 지금 이 집의 고요함이 한꺼번에 겹쳤다.

“…지금은…아무말도 하고 싶지 않아요”

그 말밖에 나오지 않았다.

하나의 눈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그래.”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방문 앞에서 멈췄다가, 돌아보지 않은 채 말했다.

“힘들면 말 안 해도 돼.”

문이 닫혔다.

거실에는 다시 빗소리만 남았다.

건우는 한동안 식탁에 앉아 있었다.

형은 죽었고, 진실은 모른다.

그리고 이 집 안에서 자신은 아직 아무것도 결정하지 못했다.

지금 자신을 붙잡고 있는 건 사랑도, 의심도 아니다.

그저 형의 아내를 혼자 둘 수 없다는, 그 책임감 하나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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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형수의 밤   163. 질문의 방식

    건우가 집에 들어왔을 때는 이미 해가 기울어 있었다.낮 동안 맑아졌던 하늘은 저녁이 가까워지면서 다시 흐려졌고, 창밖에는 비 대신 축축한 어둠이 천천히 내려앉고 있었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익숙한 집 안 냄새가 먼저 밀려왔지만, 이상하게도 그날은 그 익숙함이 조금도 편안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익숙한 것일수록 더 조심해야 하는 기분이 들었다. 잘 아는 얼굴, 잘 아는 목소리, 잘 안다고 믿어왔던 관계들이 요즘 들어 자꾸만 낯선 방향으로 틀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거실은 조용했다.주방 쪽 조명만 켜져 있었고, 텔레비전 소리도 없었다. 하나는 식탁 끝에 앉아 있었다. 노트북을 펴놓고 있었지만 화면은 한참 전부터 같은 페이지에 멈춰 있는 것처럼 보였다. 건우가 들어오는 소리에 그녀는 고개를 들었다.“왔어?”짧고 평범한 인사였다.그런데 건우는 그 목소리를 듣는 순간, 오늘 오후 카페에서 들었던 형의 음성이 아주 짧게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가는 걸 느꼈다. 둘은 전혀 다른데, 이상하게도 그 직후부터는 하나의 말투 하나, 호흡 하나까지 괜히 더 예민하게 들렸다. 누군가의 목소리를 의심하기 시작하면, 그 사람의 모든 문장이 이전과 같은 의미로 들리지 않게 되는 순간이 있다.건우는 신발을 벗고 천천히 안으로 들어왔다.“일은?”하나가 묻자, 그는 재킷을 벗어 소파 팔걸이에 걸치며 짧게 답했다.“대충.”하나는 더 묻지 않았다. 그 대신 시선이 잠깐 그의 얼굴 위에 머물렀다. 평소 같았으면 그냥 지나쳤을 정도의 짧은 확인이었지만, 지금의 건우는 그런 짧은 시선에도 괜히 의미를 읽으려는 자기 자신을 느끼고 있었다.그는 냉장고에서 물병을 꺼내 컵에 따랐다. 유리컵에 물이 차오르는 소리가 주방 안에 얇게 퍼졌다. 그 소리조차 괜히 길게 느껴졌다.“하나야.”건우가 물컵을 손에 쥔 채 불렀다.하나는 고개를 들었다.“응?”건우는 바로 말을 잇지 못했다. 차라리 자료를 다시 보는 건 쉬웠다. 숫자와 흔적은 조용하

  • 형수의 밤   162. 익숙해서 소름 끼치는 목소리

    그 목소리를 듣는 순간 건우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너무 다른 두 목소리가 머릿속에서 겹쳤기 때문이다.형의 차갑게 정리된 목소리와, 지금 수화기 너머에서 들려오는 하나의 목소리. 둘은 전혀 다른데, 이상하게도 방금 전 녹음 속 문장을 들은 직후라 그런지, 하나의 숨소리까지도 평소보다 더 가깝게 느껴졌다.“건우야?”하나가 다시 불렀다.건우는 그제야 입을 열었다.“하나야.”자기 입에서 그 호칭이 나간 순간, 이유 없이 가슴 안쪽이 서늘해졌다. 예전에는 아무 의미 없이 부르던 말이었는데, 요즘 들어서는 그 호칭이 자꾸 둘 사이의 거리를 확인하는 말처럼 들렸다. 가까워질수록 오히려 더 아프게 만드는 이름.“왜요. 무슨 일 있어?”건우는 창밖을 한 번 봤다. 유리창 너머로 사람 몇 명이 지나가고 있었고, 그 위로 낮의 빛이 흐릿하게 내려앉아 있었다.“아니.”대답은 그렇게 했지만, 목소리가 평소보다 조금 느렸던 건 본인도 느꼈다.“그냥… 좀 늦을 것 같아서.”전화기 너머에서 잠깐 침묵이 흘렀다.하나는 그 짧은 공백 뒤에 아주 낮게 물었다.“무슨 말 들었어?”건우는 순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그 질문은 너무 정확했다.봤어요도 아니고, 찾았어요도 아니었다.‘무슨 말 들었어.’건우는 수화기 너머 조용한 숨소리를 들으며, 자기 손끝이 다시 차갑게 식는 걸 느꼈다. 하나는 지금 정말로 짐작해서 묻는 걸까. 아니면 자신도 모르게, 어떤 단어를 먼저 알고 있어서 그렇게 입 밖으로 꺼낸 걸까.건우는 아주 천천히 물었다.“왜 그렇게 물어.”그때 하나가 말을 잇지 못했다.정말 짧은 정적이었다. 그러나 그 짧은 멈춤 안에는 너무 많은 것이 들어 있었다. 건우는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수화기 너머로 아주 얕게 숨을 들이쉬는 소리, 무언가를 고르다가 결국 다른 쪽 문장을 택하는 사람의 침묵.하나는 곧 평소보다 조금 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아니, 그냥… 목소리가 그래 보여서.”건우는 대답하지 않았다.그는

  • 형수의 밤   8. 잠긴 문

    밤은 쉽게 오지 않았다.건우는 거실 소파에 앉은 채, 불을 켜지도 끄지도 못한 상태로 시간을 흘려보냈다.문은 안쪽에서 잠겨 있었다.하나의 말. 나가려는 목소리였다.유림의 말. 두 문장이 서로를 부정하고 있었다.형이 나가려 했다면, 문은 열렸어야 한다.문이 잠겨 있었다면, 형은 나가지 않았다.그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혹시 문을 잠근 사람이, 형이 아닐 수도 있다면. 그 생각은 곧바로 밀어냈다.너무 빨랐다. 너무 직접적이었다.아침, 하나는 평소보다 더 조용했다.부엌에서 접시를 정리하는 소리가 유난히 또렷하게

  • 형수의 밤   7. 6분

    집으로 돌아오는 길, 두 사람은 거의 말을 하지 않았다.신호등이 바뀔 때마다 차 안의 공기가 조금씩 식는 것 같았다.라디오도 켜지지 않았고, 창문은 닫힌 채였다.건우는 운전대를 잡은 손에 힘을 빼지 못했다.9시 12분.9시 18분.6분.그 짧은 시간이 자꾸 마음을 긁었다.집에 들어서자, 현관 불이 자동으로 켜졌다.빛이 바닥에 길게 떨어졌다.하나는 코트를 벗어 의자에 걸어두고 그대로 거실에 섰다.“유림 씨 말, 어떻게 들렸어?”그녀가 먼저 물었다.건우는 잠시 생각했다.“거짓말은 아닌 것 같아요.”“근데 전

  • 형수의 밤   6. 6분의 공백

    카페는 회사 건물에서 두 블록 떨어진 곳에 있었다.점심시간이 지난 뒤라 한산했다.유리창 밖으로는 출입증을 목에 건 직원들이 드문드문 오가고 있었다.유림은 이미 와 있었다.짙은 네이비 재킷, 단정한 머리.의자에 앉아 있는 자세가 흐트러짐 없이 곧았다.하나와 건우가 들어서자,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와주셔서 감사합니다.”목소리는 낮고 안정적이었다.하나는 마주 인사했다.“바쁜데 시간 내줘서 고마워요.”건우는 따로 말을 하지 않았다.유림과 눈이 마주쳤다가, 먼저 시선을 거두었다.세 사람은 마

  • 형수의 밤   5. 공백의 길이

    건우는 거의 잠들지 못한 채 눈을 떴다.방은 익숙했다.벽지의 색, 침대 옆 협탁의 위치, 책상 위에 뒤집힌 법전까지.모든 것이 자신의 것이었다.그런데도 공기는 낯설었다.부엌에서 물이 끓는 소리, 컵이 부딪히는 소리,혼자일 때는 존재하지 않던 생활의 잔향이 집 안에 남아 있었다.그는 천천히 방문을 열고 거실로 나왔다.하나가 부엌에 있었다.단정하게 묶인 머리, 다림질된 셔츠, 군더더기 없는 움직임.어제 새벽의 젖은 얼굴은 어디에도 없었다.“일어났네.”건우는 대답을 늦췄다가 짧게 말했다.“네.”하나는 커피를 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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