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uk밤은 쉽게 오지 않았다.
건우는 거실 소파에 앉은 채, 불을 켜지도 끄지도 못한 상태로 시간을 흘려보냈다.
문은 안쪽에서 잠겨 있었다.
하나의 말. 나가려는 목소리였다.
유림의 말. 두 문장이 서로를 부정하고 있었다.
형이 나가려 했다면, 문은 열렸어야 한다.
문이 잠겨 있었다면, 형은 나가지 않았다.
그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혹시 문을 잠근 사람이, 형이 아닐 수도 있다면. 그 생각은 곧바로 밀어냈다.
너무 빨랐다. 너무 직접적이었다.
아침, 하나는 평소보다 더 조용했다.
부엌에서 접시를 정리하는 소리가 유난히 또렷하게 들렸다.
“오늘 일정 있어요?”
건우가 묻자,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오전에 청사 들렀다가… 오후엔 시간 비워놨어.”
“왜요.”
“현장 다시 보고 싶어.”
건우의 손이 멈췄다.
“출입 통제 아직 안 풀렸어요.”
“형사한테 부탁했어. 잠깐만 들어가게 해달라고.”
그녀의 말은 담담했지만, 속이 보이지 않았다.
건우는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
“저도 같이 가요.”
하나는 잠깐 망설이다 고개를 끄덕였다.
형의 집 앞은 여전히 폴리스 라인이 쳐져 있었고,
비는 그쳤지만, 바닥은 아직 젖어 있었다.
현관문 앞에서 건우는 잠시 숨을 멈췄다.
여기서 모든 게 멈췄다.
문이 열리고, 익숙한 냄새가 흘러나왔다.
소독약과 피 냄새가 섞인, 설명하기 어려운 냄새였다.
하나는 먼저 들어갔다.
거실은 그대로였다. 바닥은 정리됐지만, 가구의 위치는 변하지 않았다.
“여기.”
하나가 낮게 말했다.
“내가 처음 본 자리.”
건우는 그 자리를 바라봤다.
형이 쓰러져 있었던 위치.
“그날… 현관 문은.”
그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하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잠겨 있었어.”
“안에서요.”
“응.”
“비밀번호 누르고 들어갔어요?”
“응.”
“문 열렸고요?”
“열렸지.”
그녀의 답은 빠르지 않았다.
그런데 확신은 있었다.
건우는 현관 안쪽 잠금 장치를 바라봤다.
자동 잠금. 문이 닫히면 자동으로 잠긴다.
“형이 나가려 했다면… 문은 열려 있었어야 해요.”
그는 거의 혼잣말처럼 말했다.
하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부엌 쪽으로 걸어가 서랍이 반쯤 열려 있는 걸 확인했다.
“여기.”
그녀가 손끝으로 가리켰다.
“이 서랍.”
건우는 서랍 안을 들여다봤다.
칼꽂이는 정리되어 있었고, 한 칸이 비어 있었다.
“원래… 저 칸 비어 있었어요?”
그가 물었다.
하나는 잠시 멈췄다.
“…모르겠어.”
이번에는 대답이 느렸다.
“그날은 서랍이 열려 있는 것만 봤어.”
“칼이 빠져 있었는지는.”
하나는 고개를 저었다.
“기억 안 나.”
기억은 점점 짧아지고 있었고,
확실했던 것들이, 조금씩 흐려지기 시작했다.
거실로 돌아왔을 때, 건우는 창문을 바라봤다.
후면 창.
강도가 침입했다는 경로.
창틀에는 여전히 파손 흔적이 남아 있었다.
그는 천천히 말했다.
“형이… 문을 열어줬을 가능성은 없을까요.”
하나는 즉시 대답하지 않았다.
“비밀번호를 아는 사람이면.”
그는 말을 이었다.
“굳이 창문을 깨고 들어올 필요는 없잖아요.”
하나는 천천히 그를 바라봤다.
“그럼 네 생각은 뭐야.”
질문이 아니라, 직면이었다.
건우는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누군가가… 형을 밖으로 부르려고 했고, 형이 나가려다가”
그는 말을 멈췄고, 하나는 조용히 다시 물었다.
“누군가가 누구야.”
건우는 입술을 다물었다.
유림.
투자자.
아니면
그는 그 이름을 끝내 말하지 않았다.
집을 나오는 길, 하나가 말했다.
“건우야.”
“네.”
“너 지금… 혹시 나를 의심해?”
그 질문은 날카롭지 않았다.
그냥, 평평했을 뿐.
건우는 숨을 고르며 말했다.
“아니요.”
거짓말은 아니었다.
의심이라고 말하기에는 아직 증거가 부족했다.
“그럼.”
하나는 더 묻지 않았다.
차 안에서 두 사람은 한동안 말을 하지 않았다.
늦은 밤, 건우는 혼자 형의 집 구조를 머릿속에 그렸다.
현관- 거실 - 부엌 - 후면 창.
9시 12분 통화 종료.
9시 18분 하나에게 부재중.
9시 37분 신고.
만약 형이 9시 12분 이후 집 안에 있었다면,
누군가가 안으로 들어왔어야 한다.
만약 형이 9시 12분 이후 밖으로 나가려 했다면, 문은 열려 있었어야 한다.
그런데 문은 잠겨 있었다.
그는 처음으로 한 가지 가능성을 떠올렸다.
문은 안쪽에서 잠겨 있었다.
‘안쪽에서.’
그 말이 머릿속에 남았다.
안쪽에서 잠근 사람.
그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그리고 처음으로, 시간이 아니라 사람을 의심하기 시작했다.
아직 이름은 붙이지 못한 채.
그날 밤, 건우는 쉽게 잠들지 못했다.
눈을 감으면 현관문이 떠올랐다.
안쪽에서 잠겨 있었다는 말.
문은 말을 하지 않는다.
기억하는 건 사람이다.
그는 새벽 세 시쯤 일어나 거실로 나왔다.
불을 켜지 않은 채, 현관 앞에 섰다.
자기 집 문이었다.
같은 모델, 같은 자동 잠금 장치.
문을 닫았다.
철컥.
자동으로 잠겼다.
그는 안쪽에서 손잡이를 눌러보았다. 열렸다.
밖에서 손잡이를 눌러보았다. 잠겨 있었다.
안쪽에서 잠근 문은, 안쪽에서는 언제든 열린다.
그는 한 걸음 물러섰다.
형의 집 문은, 그날 밤,
하나가 비밀번호를 눌러 열었다고 했다.
그렇다면
형은 이미 안쪽에 있었고, 문은 닫혀 있었고, 자동으로 잠겼다는 뜻이다.
그 자체는 이상하지 않다.
이상한 건, ‘나가려던 사람’이라는 말이다.
아침이 밝았을 때, 하나는 소파에 앉아 있었다.
눈은 떠 있었지만, 밤을 지운 얼굴은 아니었다.
“잠 안 왔지.”
그녀가 먼저 말했다.
건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현관문 생각하고 있었어요.”
하나의 눈이 아주 잠깐 멈췄다.
“문?”
“네.”
그는 맞은편에 앉았다.
“그날… 들어갔을 때, 문이 완전히 닫혀 있었어요?”
하나는 잠시 기억을 더듬는 듯 눈을 위로 올렸다.
“닫혀 있었지.”
“틈도 없이요?”
“응.”
대답은 빠르지 않았지만, 망설임도 없었다,
건우는 숨을 고르고 물었다.
“잠금 소리는요.”
“무슨 소리.”
“비밀번호 누르고 들어가면… 문 열릴 때 ‘삐’ 소리 나잖아요.”
하나는 눈을 깜박였다.
“그랬겠지.”
“기억나요?”
이번에는 아주 짧은 침묵이 흘렀다.
“그런 건… 기억 안 나.”
건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수 있다.'
그런데 문이 잠겨 있었다는 건 또렷하게 기억한다.
잠금 소리는 기억하지 못한다. 기억은 선택적이다.
오전, 건우는 혼자 형의 집 근처를 다시 찾았다.
출입은 허가되지 않았지만, 바깥에서 볼 수 있는 건 있었다.
후면 창.
깨진 유리 조각은 정리됐지만,
창틀에는 여전히 금이 남아 있었다.
그는 창문을 오래 바라봤다.
강도가 침입했다면, 왜 후면 창을 택했을까.
정문 비밀번호를 모르는 사람.
혹은 모른 척한 사람.
그는 고개를 저었다.
생각이 너무 빠르게 간다.
그는 다시 회사로 향했다.
유림은 그의 방문을 예상하지 못한 듯한 표정을 지었다.
“또 오셨네요.”
건우는 의자에 앉으며 말했다.
“그날 통화… 정확히 몇 초였죠.”
유림은 바로 대답했다.
“1분 4초.”
“형의 목소리… 뒤에 다른 소리는 없었습니까.”
“소리요?”
“발자국이라든지.”
유림은 눈을 감고 기억을 더듬는 듯했다.
“조용했습니다.”
“정말요?”
이번에는 유림이 건우를 바라봤다.
“무슨 의미입니까.”
건우는 잠시 망설이다가 말했다.
“형이 나가려는 사람 같았다고 하셨잖아요.”
“네.”
“그런데 배경은 조용했다고요.”
유림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 말은 서로를 찌르고 있었다.
나가려는 사람의 뒤에는 보통 소리가 있다.
발자국, 문 열리는 소리, 혹은 바람.
그런데 조용했다?
그는 조용히 물었다.
“서두른다는 게… 정확히 어떤 느낌이었습니까.”
유림은 컵을 내려놓았다.
“결정을 빨리 내리려는 사람의 말투였습니다.”
“누군가가… 옆에 있어서가 아니라?”
“그건 아니었습니다.”
그녀의 답은 분명했다.
건우는 그 말을 기억 속에 고정했다.
집으로 돌아오니 해가 기울고 있었다.
하나는 서류를 정리하고 있었다.
“회사 갔다 왔어?”
“네.”
그는 가방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유림 씨가… 통화 배경은 조용했다고 해요.”
하나는 손을 멈췄다.
“그래?”
“네. 발자국 소리도, 문 소리도 없었다고.”
하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집 안에 있었겠지.”
“그렇겠죠.”
그는 조용히 말을 이었다.
“형이 나가려던 게 아니라면.”
하나는 시선을 들었다.
“뭘 말하고 싶은 거야.”
건우는 숨을 고르며 말했다.
“형이…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을 가능성요.”
하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문은 안쪽에서 잠겨 있었고, 통화 배경은 조용했고.”
그는 그녀를 똑바로 바라봤다.
“그럼 그 사람은… 이미 안에 있었을 수도 있어요.”
공기가 아주 느리게 식었다.
하나는 천천히 일어섰다.
“건우야.”
그녀의 목소리는 차분했다.
“넌 지금… 나한테 묻는 거야?”
건우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거짓말은 아니었다.
그는 하나에게 묻지 않았다.
대신 계산하고 있었다.
신우의 시간을, 행동을, 그리고 상황을
밤이 깊었다.
건우는 거실에 앉아 숫자를 다시 적었다.
9:12
9:18
9:37
그리고 그 아래에 한 줄을 덧붙였다.
‘조용했다.’
그는 펜을 내려놓았다.
문은 안쪽에서 잠겨 있었고,
통화는 조용했고, 하나는 부재중을 못 받았고.
어느 문장이 먼저 흔들릴지, 아직은 모른다.
하지만 오늘 처음으로, 그는 깨달았다.
이 사건은 시간의 문제가 아니라, 기억의 문제일지도 모른다는 걸.
그리고 기억은 때때로 가장 쉽게 바뀌는 증거라고.
하나는 물을 마신 뒤에도 한동안 고개를 들지 못했다.컵을 두 손으로 감싸 쥔 채, 아주 천천히 숨을 고르고 있었다.아까보다 호흡은 조금 안정된 것 같았지만, 건우는 이상하게도 더 쉽게 안심할 수가 없었다. 방금 전까지 분명히 눈앞에 있었던 그 낯선 결이 너무 선명하게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같은 얼굴이었다.같은 목소리였고, 같은 손이었고, 같은 눈이었다.그런데 아주 짧은 순간, 그 안에 전혀 다른 무언가가 스쳐 지나갔다.건우는 소파 옆에 선 채로 하나를 내려다봤다.하나는 아직도 물컵을 쥔 손에 힘이 조금 들어가 있었다. 손등 위 얇은 혈관이 드러나 있었고, 마른 입술은 컵 가장자리를 아주 천천히 따라 움직이다가 멈췄다. 평소 같았으면 그저 피곤한 밤처럼 보였을 장면인데, 지금은 그 작은 동작 하나하나가 전부 다르게 읽혔다.건우는 결국 천천히 하나의 옆에 앉았다.너무 가깝지도, 너무 멀지도 않은 거리였다. 손을 뻗으면 닿을 수는 있지만, 지금 당장 닿는 건 오히려 무언가를 망칠 것 같은 거리.한동안 아무 말도 없었다.하나는 컵을 내려놓지 않았고, 건우도 먼저 입을 열지 않았다. 괜히 말을 꺼냈다가 방금 전 자기 눈앞에서 지나간그 이상한 순간을 너무 쉽게 지워버리게 될까 봐, 건우는 침묵 쪽을 택했다.그 정적은 불편했지만, 이상하게도 도망치고 싶지는 않았다.지금 필요한 건 질문보다 관찰이라는 걸 건우는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얼마쯤 지났을까.’하나가 아주 낮게 말했다.“왜 그렇게 봐.”건우는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뭘.”“계속.”그 말은 평소의 하나로 돌아온 것처럼 들렸다. 목소리도, 호흡도, 말 끝의 결도 방금 전과는 달랐다. 그래서 건우는 오히려 더 혼란스러워졌다. 정말 자기가 잘못 본 건가. 긴장과 피로가 겹쳐서 순간적으로 이상하게 느낀 것뿐이었나.하지만 그런 식으로 넘기기엔, 방금 전 하나의 눈이 너무 선명했다.건우는 아주 천천히 말했다.“아까 너 좀 이상했어.”하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식탁 위의 공기가 완전히 가라앉기까지는 시간이 조금 더 필요했다.누가 먼저 말을 꺼내지 않아도, 둘 다 알고 있었다. 방금 지나간 짧은 순간이 단순한 대화의 끊김이 아니라, 어떤 경계를 건드린 뒤에 남는 정적이라는 걸. 말 몇 마디로는 다시 예전처럼 돌아갈 수 없는 종류의 틈이 이미 생겨 있었다.건우는 컵을 다시 들지 않았다.물은 그대로였고, 손끝은 여전히 차가웠다. 반대로 심장은 이상할 정도로 차분했다. 감정이 폭발하기 직전의 상태가 아니라, 오히려 너무 많은 걸 한꺼번에 받아들였을 때 오는 묘한 고요함에 가까웠다.그는 눈앞의 하나를 바라봤다.하나는 여전히 같은 자리에 앉아 있었다. 방금 전보다 더 움직임이 적어졌고, 손은 식탁 위에 조용히 놓여 있었다. 겉으로 보면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 건우는 이상하게 그 고요함이 더 불안하게 느껴졌다.너무 조용한 사람은 안에서 이미 무언가가 움직이고 있을 때가 많다.건우는 그 생각을 떠올리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형수님.”하나는 고개를 들지 않았다.“네.”대답은 평소와 다르지 않았지만, 그 짧은 한 음절 안에 미세하게 숨이 섞여 있었다. 건우는 그걸 듣고 잠시 말을 멈췄다. 질문을 이어가는 게 맞는지, 아니면 여기서 멈추는 게 맞는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그는 결국 아주 단순한 쪽으로 돌아갔다.“괜찮아요?”하나는 그제야 시선을 들었다.눈빛은 여전히 정돈되어 있었다. 흐트러진 흔적은 없었고, 눈가도 마른 상태였다. 그런데 건우는 그 눈을 보는 순간 알 수 있었다. 괜찮은 사람의 얼굴이 아니라는 걸. 다만, 괜찮은 것처럼 유지하고 있는 사람의 얼굴에 가까웠다.하나는 아주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네.”그 대답은 너무 빠르고, 너무 매끄러웠다.건우는 더 묻지 않았다.대신 잠깐 시선을 내렸다가, 다시 그녀를 바라봤다. 지금은 답을 끌어내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그 답이 나오는 방식을 보는 게 더 중요하다는 걸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하
하나는 그 질문 앞에서 처음으로 눈을 피했다.건우는 그 작은 움직임에 심장이 천천히 조여드는 걸 느꼈다. 그녀는 아주 잠깐 고개를 돌려 창 쪽을 봤고, 손끝이 컵 손잡이에서 천천히 떨어졌다. 그리고 아주 오래 걸려서야 대답했다.“그땐 그걸 무섭다고 생각 안 했어.”건우는 목 안이 마르는 걸 느꼈다.하나는 다시 그를 보지 않은 채 말을 이었다.“그냥… 내가 뭘 잘못한 건가 싶었ㅈ;.”그 말은 조용했지만, 건우에게는 거의 정면으로 꽂혔다.사람을 직접 다치게 하지 않고도 무너뜨리는 방식이 있다.상대가 자기 감각을 의심하게 만들고, 자기가 과민한 건지, 오해한 건지, 쓸데없이 예민한 건지 계속 스스로를 돌아보게 만드는 방식.건우는 아주 천천히 숨을 들이마셨다.하나는 지금도 너무 담담하게 말하고 있었다. 그래서 오히려 더 아팠다. 이건 갑자기 떠오른 상처가 아니라, 오래전에 이미 몸 안으로 들어와 자리를 잡은 감각이었다.건우는 자기도 모르게 손을 뻗었다가, 중간에 멈췄다.식탁 위, 하나의 손까지는 닿을 수 있는 거리였다.그런데 그 짧은 거리조차 쉽게 넘을 수가 없었다. 지금 그녀를 위로하는 건 너무 쉬운 방식 같았고, 동시에 아무것도 하지 않는 건 너무 잔인한 것 같았다. 그 어중간한 거리에서 건우는 자기 손을 천천히 거두었다.하지만 하나는 그걸 봤다.그녀의 시선이 잠깐 건우의 손끝에 머물렀다가, 다시 그의 얼굴로 올라왔다. 그 짧은 움직임 안에 너무 많은 말이 담겨 있어서, 건우는 순간 더 이상 질문을 이어갈 수 없었다.둘 사이에 짧은 침묵이 내려앉았다.그 침묵은 불편했지만, 이상하게도 이전과는 조금 달랐다. 감추기 위한 침묵이라기보다, 서로가 서로 안의 어떤 부분을 너무 선명하게 봐버린 뒤에 생기는 정적에 가까웠다.건우는 아주 늦게서야 입을 열었다.“오늘…”하나가 조용히 그를 바라봤다.건우는 시선을 잠깐 내렸다가 다시 들었다.“형 목소리 들었어.”그 말이 떨어진 순간, 하나의 표정이 처음으로 눈에 띄
하나는 이번에는 조금 더 오래 침묵했다.그녀는 시선을 컵에 두고 있었고, 손끝으로 컵 가장자리를 아주 느리게 쓸고 있었다.유리 표면에 맺혀 있던 작은 물기가 손끝에 묻었다. 그 동작은 너무 조용해서, 오히려 지금 그녀가 말을 고르고 있다는 사실을 더 선명하게 보여줬다.“사람마다 다 다르게 대하긴 했는데.”하나가 마침내 말했다.“그게… 그 사람 마음이 움직여서 다르게 대하는 건 아니었던 것 같아.”“그럼.”“필요한 방식으로.”건우는 그 말 앞에서 아무 반응도 하지 못했다.필요한 방식으로. 오늘 하루 동안 여러 번 비슷한 결의 문장을 들었다. 정리. 결재선. 선 넘기 전에 자른다.감정 섞이면 일이 커진다. 그리고 지금 하나의 입에서 나온 이 말까지.윤신우는 사람을 사람으로 보기보다, 상황 안에 배치된 변수처럼 다뤘을지도 모른다.그 생각이 떠오르는 순간, 건우는 자기 안쪽이 아주 얇게 식어가는 걸 느꼈다.그는 조심스럽게 다음 질문으로 넘어갔다.“너한테도?”하나의 손이 멈췄다.정말로 아주 잠깐, 컵을 쥐고 있던 손끝이 그대로 굳었다. 건우는 그 짧은 멈춤을 보고 나서야 자기가 얼마나 직접적인 질문을 던졌는지 뒤늦게 깨달았다. 하지만 이미 말은 나온 뒤였다.하나는 곧바로 대답하지 않았다.건우는 괜히 후회 비슷한 걸 느꼈다. 지금 자기가 원하는 건 정답이 아니었다. 단서를 확인하고 싶은 마음과, 하나를 다치게 하고 싶지 않은 마음이 계속 어긋나고 있었다. 그런데 그 어긋남 자체가 이미 너무 늦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한참 뒤에야 하나가 아주 낮게 말했다.“모르겠어.”건우는 그 대답이 전부가 아니라는 걸 거의 본능적으로 느꼈다.하나는 고개를 조금 숙인 채 덧붙였다.“처음엔… 아니라고 생각했으니까.”건우는 숨을 멈춘 듯 그녀를 바라봤다.처음엔 아니라고 생각했다는 말은,어느 순간부터는 아니라고 말할 수 없게 됐다는 뜻이기도 했다.하나는 여전히 컵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그 안
건우가 집에 들어왔을 때는 이미 해가 기울어 있었다.낮 동안 맑아졌던 하늘은 저녁이 가까워지면서 다시 흐려졌고, 창밖에는 비 대신 축축한 어둠이 천천히 내려앉고 있었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익숙한 집 안 냄새가 먼저 밀려왔지만, 이상하게도 그날은 그 익숙함이 조금도 편안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익숙한 것일수록 더 조심해야 하는 기분이 들었다. 잘 아는 얼굴, 잘 아는 목소리, 잘 안다고 믿어왔던 관계들이 요즘 들어 자꾸만 낯선 방향으로 틀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거실은 조용했다.주방 쪽 조명만 켜져 있었고, 텔레비전 소리도 없었다. 하나는 식탁 끝에 앉아 있었다. 노트북을 펴놓고 있었지만 화면은 한참 전부터 같은 페이지에 멈춰 있는 것처럼 보였다. 건우가 들어오는 소리에 그녀는 고개를 들었다.“왔어?”짧고 평범한 인사였다.그런데 건우는 그 목소리를 듣는 순간, 오늘 오후 카페에서 들었던 형의 음성이 아주 짧게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가는 걸 느꼈다. 둘은 전혀 다른데, 이상하게도 그 직후부터는 하나의 말투 하나, 호흡 하나까지 괜히 더 예민하게 들렸다. 누군가의 목소리를 의심하기 시작하면, 그 사람의 모든 문장이 이전과 같은 의미로 들리지 않게 되는 순간이 있다.건우는 신발을 벗고 천천히 안으로 들어왔다.“일은?”하나가 묻자, 그는 재킷을 벗어 소파 팔걸이에 걸치며 짧게 답했다.“대충.”하나는 더 묻지 않았다. 그 대신 시선이 잠깐 그의 얼굴 위에 머물렀다. 평소 같았으면 그냥 지나쳤을 정도의 짧은 확인이었지만, 지금의 건우는 그런 짧은 시선에도 괜히 의미를 읽으려는 자기 자신을 느끼고 있었다.그는 냉장고에서 물병을 꺼내 컵에 따랐다. 유리컵에 물이 차오르는 소리가 주방 안에 얇게 퍼졌다. 그 소리조차 괜히 길게 느껴졌다.“하나야.”건우가 물컵을 손에 쥔 채 불렀다.하나는 고개를 들었다.“응?”건우는 바로 말을 잇지 못했다. 차라리 자료를 다시 보는 건 쉬웠다. 숫자와 흔적은 조용하
그 목소리를 듣는 순간 건우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너무 다른 두 목소리가 머릿속에서 겹쳤기 때문이다.형의 차갑게 정리된 목소리와, 지금 수화기 너머에서 들려오는 하나의 목소리. 둘은 전혀 다른데, 이상하게도 방금 전 녹음 속 문장을 들은 직후라 그런지, 하나의 숨소리까지도 평소보다 더 가깝게 느껴졌다.“건우야?”하나가 다시 불렀다.건우는 그제야 입을 열었다.“하나야.”자기 입에서 그 호칭이 나간 순간, 이유 없이 가슴 안쪽이 서늘해졌다. 예전에는 아무 의미 없이 부르던 말이었는데, 요즘 들어서는 그 호칭이 자꾸 둘 사이의 거리를 확인하는 말처럼 들렸다. 가까워질수록 오히려 더 아프게 만드는 이름.“왜요. 무슨 일 있어?”건우는 창밖을 한 번 봤다. 유리창 너머로 사람 몇 명이 지나가고 있었고, 그 위로 낮의 빛이 흐릿하게 내려앉아 있었다.“아니.”대답은 그렇게 했지만, 목소리가 평소보다 조금 느렸던 건 본인도 느꼈다.“그냥… 좀 늦을 것 같아서.”전화기 너머에서 잠깐 침묵이 흘렀다.하나는 그 짧은 공백 뒤에 아주 낮게 물었다.“무슨 말 들었어?”건우는 순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그 질문은 너무 정확했다.봤어요도 아니고, 찾았어요도 아니었다.‘무슨 말 들었어.’건우는 수화기 너머 조용한 숨소리를 들으며, 자기 손끝이 다시 차갑게 식는 걸 느꼈다. 하나는 지금 정말로 짐작해서 묻는 걸까. 아니면 자신도 모르게, 어떤 단어를 먼저 알고 있어서 그렇게 입 밖으로 꺼낸 걸까.건우는 아주 천천히 물었다.“왜 그렇게 물어.”그때 하나가 말을 잇지 못했다.정말 짧은 정적이었다. 그러나 그 짧은 멈춤 안에는 너무 많은 것이 들어 있었다. 건우는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수화기 너머로 아주 얕게 숨을 들이쉬는 소리, 무언가를 고르다가 결국 다른 쪽 문장을 택하는 사람의 침묵.하나는 곧 평소보다 조금 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아니, 그냥… 목소리가 그래 보여서.”건우는 대답하지 않았다.그는
건우는 거의 잠들지 못한 채 눈을 떴다.방은 익숙했다.벽지의 색, 침대 옆 협탁의 위치, 책상 위에 뒤집힌 법전까지.모든 것이 자신의 것이었다.그런데도 공기는 낯설었다.부엌에서 물이 끓는 소리, 컵이 부딪히는 소리,혼자일 때는 존재하지 않던 생활의 잔향이 집 안에 남아 있었다.그는 천천히 방문을 열고 거실로 나왔다.하나가 부엌에 있었다.단정하게 묶인 머리, 다림질된 셔츠, 군더더기 없는 움직임.어제 새벽의 젖은 얼굴은 어디에도 없었다.“일어났네.”건우는 대답을 늦췄다가 짧게 말했다.“네.”하나는 커피를 내
회의실 창밖으로 비가 다시 내리기 시작했다.잔잔했지만, 오래 갈 비였다.유림은 앉지 않았다. 테이블 끝에 서서, 파일을 내려다보는 건우를 바라보고 있었다.“대표님이 어제 저녁, 제게 전화를 하셨습니다.”그녀의 말투는 단정했다.감정이 끼어들 틈이 없었다.건우는 파일을 덮지 않았다.통화 기록의 숫자들이 시야에 남아 있었다.저녁 7시 12분.“오늘로 끝내자고 하셨다고요.”그가 되물었다.“네.”“무엇을.”유림은 잠시 침묵했다.답을 고르는 사람의 침묵이 아니라,상대를 재는 사람의 침묵이었다.“업무 관계를요.”
아침은 비가 그친 뒤에야 찾아왔다.창문을 두드리던 소리가 사라지자,집 안은 이상할 만큼 고요해졌다.어젯밤의 대화가 정말 있었던 일인지,건우는 한동안 확신하지 못했다.부엌에서 물 끓는 소리가 났다.그는 잠시 멈춰 서서 그 소리를 들었다.익숙한 소리였다.누군가 이 집에서 아침을 준비하고 있다는 사실이 묘하게 낯설었다.하나는 평소와 다름없는 얼굴로 서 있었다.머리는 단정하게 묶여 있었고, 어제 젖었던 코트는 의자에 걸려 있었다.“일어났어?”목소리가 차분했다.건우는 고개를 끄덕였다.어젯밤의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시신을 실은 차량이 골목을 빠져나갈 때까지,건우는 비를 맞은 채 그대로 서 있었다.경광등 불빛이 젖은 도로 위에 번졌다가 사라졌다.형은 그렇게 떠났다.설명도, 변명도 없이.경찰은 현장을 통제했고, 필요한 절차를 간단히 설명했다.참고인 조사 일정이 잡힐 거라고 했다.말은 또렷했지만, 건우의 귀에는 제대로 들어오지 않았다.남은 건 한 문장뿐이었다.저녁 8시 전후.그 시간에 그는 집에 있었다.침대에 누워,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하나는 경찰의 안내를 받아 현관을 나왔다.비는 여전히 세게 내리고 있었고,그녀의 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