تسجيل الدخول비는 오지 않았는데도, 저녁 공기가 눅눅했다.
건우는 창문을 열어두고도 답답함이 가시지 않는 걸 느꼈다.
거실 테이블 위에는 여전히 숫자가 적힌 메모가 놓여 있었다.
9:12
9:18
9:37
그 아래, 어젯밤 그가 덧붙인 한 줄.
‘조용했다.’
그는 그 문장을 손가락으로 천천히 짚어보았다.
조용했다면, 형은 움직이지 않았다.
움직이지 않았다면, 누군가를 맞이하고 있었을 가능성이 더 크다.
그 생각이 목을 죄었다.
하나는 부엌에서 설거지를 하고 있었다.
물 흐르는 소리가 규칙적으로 이어지는…
건우는 문득 물었다.
“그날… 진동 느꼈다고 했죠.”
하나의 손이 아주 잠깐 멈췄다.
“응.”
“9시 18분.”
“그래.”
“현관 앞이었어요?”
하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쯤이었던 것 같아.”
‘그때쯤.’
건우는 그 단어에 걸렸다.
“집 앞 복도였어요? 아니면 엘리베이터 안이었어요?”
하나는 고개를 들었다.
“왜 그렇게 자세히 묻는 거야?”
“그냥 확인하려고요.”
그녀는 잠시 생각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리고… 걸어가던 중이었어.”
어제는 ‘현관 앞’이라고 했다.
오늘은 ‘엘리베이터에서 내리고 걸어가던 중’이다.
아주 작은 차이였다.
그런데 기억은 그렇게 바뀌지 않는다.
건우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어제는… 현관 앞이라고 했어요.”
하나는 몇 초 동안 말이 없었다.
물소리가 계속 흘렀다.
“그랬어?”
“네.”
그녀는 수건으로 손을 닦으며 말했다.
“정확히는… 복도였던 것 같아.”
‘정확히는.’
기억은 점점 수정되고 있었다.
밤이 깊어지자, 하나는 소파에 앉아 휴대폰을 보고 있었다.
화면이 잠깐 켜졌다 꺼졌다.
건우는 망설이다가 말했다.
“통화 기록… 한 번만 봐도 될까요.”
하나의 눈이 그에게 향했다.
“왜.”
“시간이… 정확히 궁금해서요.”
그녀는 잠시 그를 바라봤다.
그리고 아무 말 없이 휴대폰을 건넸다.
건우는 화면을 켰다.
9:12 - 서유림 (1분 4초)
9:18 - 신우 씨 (부재중)
9:37 - 112
그는 스크롤을 내렸다.
9:05 - 부장검사
8:47 - 사건 참고인
하나는 그를 지켜보고 있었다.
“확인했어?”
“네.”
그는 휴대폰을 돌려주려다 멈췄다.
“진동… 몇 번 울렸어요.”
하나의 눈이 아주 미세하게 흔들렸다.
“두 번 정도.”
“확실해요?”
“응.”
“어제는… 한 번이라고 하지 않았어요?”
공기가 멈췄다.
하나는 몇 초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랬어?”
“네.”
그녀는 휴대폰을 받아 들며 말했다.
“그날은… 모든 게 겹쳐 있었어. 정신도 없었고..”
변명처럼 들리지 않도록 조심한 말투였다.
“한 번이었는지, 두 번이었는지…
그게 그렇게 중요해?”
건우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은요.”
그 말은 차갑지 않았다.
그냥 사실이었다.
하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넌 지금, 나를 취조라도 하는 거야?”
질문은 공격적이지 않았지만, 낮았다.
건우는 대답을 늦췄다.
“취조가 아니라… 맞추는 거예요.”
“뭘.”
“시간을.”
하나는 고개를 숙였다.
“나도 맞추고 싶어.”
그녀의 말은 처음으로 조금 흔들렸다.
“내가 틀리게 기억하고 있다면… 그게 더 무서워.”
건우는 그 말을 듣고 멈췄다.
그녀의 눈에는 분명 두려움이 있었다.
연기가 아니었다.
그는 처음으로, 아주 잠깐,
자신이 너무 빨리 몰아붙이고 있는 건 아닐까 생각했다.
하지만 숫자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기억은 바뀐다.
그날 밤, 건우는 혼자 형의 통화 기록을 확인할 방법을 떠올렸다.
유림. 투자자. 그리고 9시 18분.
만약 형의 휴대폰에서도 같은 시간이 찍혀 있다면 그는 천천히 숨을 고르며 생각했다.
9시 18분.
형은 왜 형수에게 전화를 걸었을까.
위험해서?
아니면…확인하려고?
그는 눈을 감았다.
진동이 한 번이었는지, 두 번이었는지. 복도였는지, 현관 앞이었는지.
아주 작은 차이였다.
그런데 그 차이가 사람을 갈라놓기 시작하고 있었다.
그리고 건우는 이제, 그 차이를 놓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아침 공기가 묘하게 차가웠다.
밤새 뒤척인 탓인지, 건우는 눈을 떴을 때부터 피곤했다.
거실로 나오자, 식탁 위에 컵 두 개가 놓여 있었다.
하나는 이미 일어나 있었다.
“잠 못 잤지.”
그녀가 말했다.
건우는 대답 대신 냉장고에서 물을 꺼냈다.
“형이… 왜 전화했을까요.”
갑작스러운 질문이었다.
하나는 잠시 멈췄다.
“9시 18분.”
그는 컵을 내려놓으며 덧붙였다.
“그 시간에.”
하나는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위험해서겠지.”
“위험했다면… 112에 먼저 걸었어야 하지 않습니까.”
그 말은 날카롭지 않았지만, 정확했다.
하나는 잠시 말을 고르듯 숨을 들이켰다.
“당황하면… 가까운 사람부터 찾게 돼.”
건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수 있다.
하지만 형은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신우는 늘 계산적이었다.
위험하면 구조를 찾는 사람이지,
감정을 찾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날… 형의 목소리, 조용했다고 했어요.”
건우는 이어 말했다.
“유림 씨 말로는.”
하나는 미묘하게 눈을 좁혔다.
“그 사람을 왜 그렇게 신뢰해.”
“신뢰가 아니라… 참고예요.”
그는 차분하게 말했다.
“배경에 소리가 없었다고 했고.”
하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위험했다면… 숨 가쁜 소리라도 있었을 텐데.”
“그럼 네 말은.”
하나의 목소리가 조금 낮아졌다.
“신우 씨가 위험하지 않았다는 거야?”
건우는 고개를 저었다.
“위험했을 수도 있고… 아니었을 수도 있었겠죠.”
“모른다는 거네.”
“네.”
짧은 대답.
두 사람 사이에 정적이 길어졌다.
오후, 건우는 회사 IT팀을 찾았다.
형의 휴대폰은 이미 경찰에 제출된 상태였다.
하지만 통신 기록은 남는다.
“법적 요청 없이 제공은 어렵습니다.”
IT팀장은 조심스럽게 말했다.
건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통신사에 요청하면…
수신 위치 정보는 나옵니까.”
“기지국 접속 기록은 나옵니다.”
그는 더 묻지 않았다.
위치.
그날 9시 18분, 형의 휴대폰이 어느 기지국에 잡혀 있었는지.
그게 집 안이었는지, 아니면 집 근처 도로였는지. 그 차이는 결정적이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건우는 처음으로 형의 번호로 전화를 걸어보았다.
없는 번호라는 안내음이 흘러나왔다.
당연했다.
번호는 이미 정지되었을 것이다.
그는 핸들을 쥔 손에 힘을 줬다.
-형은 왜 형수에게 전화를 걸었을까.
그는 떠올렸다.
9시 12분 - 유림과 통화 종료.
그 직후, 6분 뒤 - 하나에게 전화.
그 6분 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누군가가 도착했다면, 그 도착은 9시 12분 이후여야 한다.
형이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다면,
그 기다림은 9시 이전부터였을 수도 있다.
건우는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하나의 진동 횟수는 중요하지 않을 수도 있다.
-중요한 건 형이 전화한 이유다.
저녁 시간, 하나는 조용히 소파에 앉아 있었다.
“회사 갔다 왔어?”
“네.”
그는 맞은편에 앉았다.
“통신 기록… 요청해 보려고요.”
하나의 눈이 천천히 올라왔다.
“위치?”
“네.”
“왜.”
“형이 집 안에 있었는지,
아니면 밖으로 나가려던 건지… 확인하려고요.”
하나는 몇 초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건우야.”
그녀가 낮게 말했다.
“그걸 확인하면… 뭐가 달라질까.”
“적어도… 상상은 줄어들겠죠.”
그는 차분하게 답했다.
“지금은 너무 많아요.”
하나는 시선을 떨구었다.
“나를 포함해서?”
건우는 잠시 멈췄다. 대답하지 않았다.
그 침묵이 답이 되지 않기를 바라면서. 하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확인해.”
하나는 그 질문 앞에서 처음으로 눈을 피했다.건우는 그 작은 움직임에 심장이 천천히 조여드는 걸 느꼈다. 그녀는 아주 잠깐 고개를 돌려 창 쪽을 봤고, 손끝이 컵 손잡이에서 천천히 떨어졌다. 그리고 아주 오래 걸려서야 대답했다.“그땐 그걸 무섭다고 생각 안 했어.”건우는 목 안이 마르는 걸 느꼈다.하나는 다시 그를 보지 않은 채 말을 이었다.“그냥… 내가 뭘 잘못한 건가 싶었ㅈ;.”그 말은 조용했지만, 건우에게는 거의 정면으로 꽂혔다.사람을 직접 다치게 하지 않고도 무너뜨리는 방식이 있다.상대가 자기 감각을 의심하게 만들고, 자기가 과민한 건지, 오해한 건지, 쓸데없이 예민한 건지 계속 스스로를 돌아보게 만드는 방식.건우는 아주 천천히 숨을 들이마셨다.하나는 지금도 너무 담담하게 말하고 있었다. 그래서 오히려 더 아팠다. 이건 갑자기 떠오른 상처가 아니라, 오래전에 이미 몸 안으로 들어와 자리를 잡은 감각이었다.건우는 자기도 모르게 손을 뻗었다가, 중간에 멈췄다.식탁 위, 하나의 손까지는 닿을 수 있는 거리였다.그런데 그 짧은 거리조차 쉽게 넘을 수가 없었다. 지금 그녀를 위로하는 건 너무 쉬운 방식 같았고, 동시에 아무것도 하지 않는 건 너무 잔인한 것 같았다. 그 어중간한 거리에서 건우는 자기 손을 천천히 거두었다.하지만 하나는 그걸 봤다.그녀의 시선이 잠깐 건우의 손끝에 머물렀다가, 다시 그의 얼굴로 올라왔다. 그 짧은 움직임 안에 너무 많은 말이 담겨 있어서, 건우는 순간 더 이상 질문을 이어갈 수 없었다.둘 사이에 짧은 침묵이 내려앉았다.그 침묵은 불편했지만, 이상하게도 이전과는 조금 달랐다. 감추기 위한 침묵이라기보다, 서로가 서로 안의 어떤 부분을 너무 선명하게 봐버린 뒤에 생기는 정적에 가까웠다.건우는 아주 늦게서야 입을 열었다.“오늘…”하나가 조용히 그를 바라봤다.건우는 시선을 잠깐 내렸다가 다시 들었다.“형 목소리 들었어.”그 말이 떨어진 순간, 하나의 표정이 처음으로 눈에 띄
하나는 이번에는 조금 더 오래 침묵했다.그녀는 시선을 컵에 두고 있었고, 손끝으로 컵 가장자리를 아주 느리게 쓸고 있었다.유리 표면에 맺혀 있던 작은 물기가 손끝에 묻었다. 그 동작은 너무 조용해서, 오히려 지금 그녀가 말을 고르고 있다는 사실을 더 선명하게 보여줬다.“사람마다 다 다르게 대하긴 했는데.”하나가 마침내 말했다.“그게… 그 사람 마음이 움직여서 다르게 대하는 건 아니었던 것 같아.”“그럼.”“필요한 방식으로.”건우는 그 말 앞에서 아무 반응도 하지 못했다.필요한 방식으로. 오늘 하루 동안 여러 번 비슷한 결의 문장을 들었다. 정리. 결재선. 선 넘기 전에 자른다.감정 섞이면 일이 커진다. 그리고 지금 하나의 입에서 나온 이 말까지.윤신우는 사람을 사람으로 보기보다, 상황 안에 배치된 변수처럼 다뤘을지도 모른다.그 생각이 떠오르는 순간, 건우는 자기 안쪽이 아주 얇게 식어가는 걸 느꼈다.그는 조심스럽게 다음 질문으로 넘어갔다.“너한테도?”하나의 손이 멈췄다.정말로 아주 잠깐, 컵을 쥐고 있던 손끝이 그대로 굳었다. 건우는 그 짧은 멈춤을 보고 나서야 자기가 얼마나 직접적인 질문을 던졌는지 뒤늦게 깨달았다. 하지만 이미 말은 나온 뒤였다.하나는 곧바로 대답하지 않았다.건우는 괜히 후회 비슷한 걸 느꼈다. 지금 자기가 원하는 건 정답이 아니었다. 단서를 확인하고 싶은 마음과, 하나를 다치게 하고 싶지 않은 마음이 계속 어긋나고 있었다. 그런데 그 어긋남 자체가 이미 너무 늦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한참 뒤에야 하나가 아주 낮게 말했다.“모르겠어.”건우는 그 대답이 전부가 아니라는 걸 거의 본능적으로 느꼈다.하나는 고개를 조금 숙인 채 덧붙였다.“처음엔… 아니라고 생각했으니까.”건우는 숨을 멈춘 듯 그녀를 바라봤다.처음엔 아니라고 생각했다는 말은,어느 순간부터는 아니라고 말할 수 없게 됐다는 뜻이기도 했다.하나는 여전히 컵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그 안
건우가 집에 들어왔을 때는 이미 해가 기울어 있었다.낮 동안 맑아졌던 하늘은 저녁이 가까워지면서 다시 흐려졌고, 창밖에는 비 대신 축축한 어둠이 천천히 내려앉고 있었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익숙한 집 안 냄새가 먼저 밀려왔지만, 이상하게도 그날은 그 익숙함이 조금도 편안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익숙한 것일수록 더 조심해야 하는 기분이 들었다. 잘 아는 얼굴, 잘 아는 목소리, 잘 안다고 믿어왔던 관계들이 요즘 들어 자꾸만 낯선 방향으로 틀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거실은 조용했다.주방 쪽 조명만 켜져 있었고, 텔레비전 소리도 없었다. 하나는 식탁 끝에 앉아 있었다. 노트북을 펴놓고 있었지만 화면은 한참 전부터 같은 페이지에 멈춰 있는 것처럼 보였다. 건우가 들어오는 소리에 그녀는 고개를 들었다.“왔어?”짧고 평범한 인사였다.그런데 건우는 그 목소리를 듣는 순간, 오늘 오후 카페에서 들었던 형의 음성이 아주 짧게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가는 걸 느꼈다. 둘은 전혀 다른데, 이상하게도 그 직후부터는 하나의 말투 하나, 호흡 하나까지 괜히 더 예민하게 들렸다. 누군가의 목소리를 의심하기 시작하면, 그 사람의 모든 문장이 이전과 같은 의미로 들리지 않게 되는 순간이 있다.건우는 신발을 벗고 천천히 안으로 들어왔다.“일은?”하나가 묻자, 그는 재킷을 벗어 소파 팔걸이에 걸치며 짧게 답했다.“대충.”하나는 더 묻지 않았다. 그 대신 시선이 잠깐 그의 얼굴 위에 머물렀다. 평소 같았으면 그냥 지나쳤을 정도의 짧은 확인이었지만, 지금의 건우는 그런 짧은 시선에도 괜히 의미를 읽으려는 자기 자신을 느끼고 있었다.그는 냉장고에서 물병을 꺼내 컵에 따랐다. 유리컵에 물이 차오르는 소리가 주방 안에 얇게 퍼졌다. 그 소리조차 괜히 길게 느껴졌다.“하나야.”건우가 물컵을 손에 쥔 채 불렀다.하나는 고개를 들었다.“응?”건우는 바로 말을 잇지 못했다. 차라리 자료를 다시 보는 건 쉬웠다. 숫자와 흔적은 조용하
그 목소리를 듣는 순간 건우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너무 다른 두 목소리가 머릿속에서 겹쳤기 때문이다.형의 차갑게 정리된 목소리와, 지금 수화기 너머에서 들려오는 하나의 목소리. 둘은 전혀 다른데, 이상하게도 방금 전 녹음 속 문장을 들은 직후라 그런지, 하나의 숨소리까지도 평소보다 더 가깝게 느껴졌다.“건우야?”하나가 다시 불렀다.건우는 그제야 입을 열었다.“하나야.”자기 입에서 그 호칭이 나간 순간, 이유 없이 가슴 안쪽이 서늘해졌다. 예전에는 아무 의미 없이 부르던 말이었는데, 요즘 들어서는 그 호칭이 자꾸 둘 사이의 거리를 확인하는 말처럼 들렸다. 가까워질수록 오히려 더 아프게 만드는 이름.“왜요. 무슨 일 있어?”건우는 창밖을 한 번 봤다. 유리창 너머로 사람 몇 명이 지나가고 있었고, 그 위로 낮의 빛이 흐릿하게 내려앉아 있었다.“아니.”대답은 그렇게 했지만, 목소리가 평소보다 조금 느렸던 건 본인도 느꼈다.“그냥… 좀 늦을 것 같아서.”전화기 너머에서 잠깐 침묵이 흘렀다.하나는 그 짧은 공백 뒤에 아주 낮게 물었다.“무슨 말 들었어?”건우는 순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그 질문은 너무 정확했다.봤어요도 아니고, 찾았어요도 아니었다.‘무슨 말 들었어.’건우는 수화기 너머 조용한 숨소리를 들으며, 자기 손끝이 다시 차갑게 식는 걸 느꼈다. 하나는 지금 정말로 짐작해서 묻는 걸까. 아니면 자신도 모르게, 어떤 단어를 먼저 알고 있어서 그렇게 입 밖으로 꺼낸 걸까.건우는 아주 천천히 물었다.“왜 그렇게 물어.”그때 하나가 말을 잇지 못했다.정말 짧은 정적이었다. 그러나 그 짧은 멈춤 안에는 너무 많은 것이 들어 있었다. 건우는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수화기 너머로 아주 얕게 숨을 들이쉬는 소리, 무언가를 고르다가 결국 다른 쪽 문장을 택하는 사람의 침묵.하나는 곧 평소보다 조금 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아니, 그냥… 목소리가 그래 보여서.”건우는 대답하지 않았다.그는
건우는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그는 굳이 그 자리에서 바로 파일을 열지 않았다. 담당자와 필요한 확인만 마친 뒤 자료를 받아 나왔고, 근처에 있던 조용한 카페로 들어갔다. 사람은 많지 않았다. 창가 자리에 앉아 노트북을 열자, 유리창 너머로 흐린 햇빛이 들어오고 있었다. 낮은 소음, 멀리서 들리는 컵 부딪히는 소리, 주문 번호를 부르는 직원의 목소리 같은 것들이 오히려 도움이 됐다. 너무 조용한 데서 듣기엔 형의 목소리가 감당되지 않을 것 같았다.건우는 이어폰을 꽂고 파일을 열었다.오디오 파일은 생각보다 짧았다. 대부분은 1분 안팎, 긴 것도 3분을 넘지 않았다. 회의실 녹취처럼 여러 사람 목소리가 섞인 파일도 있었지만, 건우가 손을 멈춘 건 아주 짧은 단독 음성 메모였다.파일명은 날짜뿐이었다.건우는 재생 버튼을 눌렀다.잠깐의 잡음 뒤에 형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낮고, 차분하고, 이상할 만큼 정리된 목소리였다.“이건 빨리 끊어야 돼.”건우는 숨을 멈췄다.문장은 짧았고, 누구를 향한 말인지도 분명하지 않았다. 회의용 정리 메모일 수도 있었다. 리스크 관리 차원에서 한 말일 수도 있었고, 어떤 거래선이나 외부 인물과의 관계를 의미하는 것일 수도 있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문장 자체가 아니었다.목소리였다.윤신우는 전혀 흥분하지 않은 상태였다. 누군가를 설득하거나, 다그치거나, 분노를 누르는 사람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이미 결론을 내려놓은 사람이, 필요한 조치만 다시 자기 입으로 확인하는 쪽에 가까웠다.건우는 그 파일을 끝까지 다 듣지 못하고 중간에 멈췄다.이어폰을 뺀 것도 아닌데, 귀가 먹먹해졌다. 카페 안의 소음이 갑자기 멀어지는 느낌이었다. 그는 휴대전화를 뒤집어 놓듯 노트북 화면을 잠시 내리고 두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형의 목소리는 기억 속과 똑같았다.다정하게 들을 수도 있고, 냉정하게 들을 수도 있는 톤. 듣는 사람이 어떤 믿음을 갖고 있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의미가 되는 목소리. 예전의 건우
오후로 넘어가는 동안에도 건우는 식탁을 떠나지 못했다.한 번 노트북을 덮었다가도 다시 열었고, 자료 창을 닫았다가도 같은 파일을 몇 번씩 다시 클릭했다. 같은 숫자와 같은 문장들이 반복해서 눈에 들어왔는데도, 이상하게도 볼 때마다 다른 뜻이 따라붙었다. 처음에는 단순한 흔적으로 보이던 것들이 이제는 사람의 습관처럼 보였고, 습관처럼 보이던 것들은 다시 의도처럼 읽혔다.건우는 화면 속 신우 확인이라는 네 글자를 한참 동안 내려다보다가 결국 노트북을 닫았다.더 보고 있으면 뭔가가 명확해질 것 같으면서도, 동시에 지금 이 자리에서 혼자 끝까지 밀어붙이는 건 위험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방향은 분명해지고 있었다. 형은 이 구조를 몰랐던 사람이 아니다. 다만 문제는, 어디까지 알고 있었는지, 그리고 어디까지 직접 자기 손으로 움직였는지를 아직 가늠할 수 없다는 점이었다.건우는 의자에 기대 앉아 두 눈을 잠시 감았다. 눈꺼풀 안쪽으로도 글자들이 그대로 남아 있는 것 같았다. 머릿속이 지나치게 뜨거웠고, 반대로 손끝은 계속 차가웠다. 피곤한데 쉬어지지 않는 상태가 오래 이어지자, 감정도 생각도 어느 순간부터는 묘하게 둔해졌다.그때 휴대전화가 울렸다.낯선 번호는 아니었다. 예전에 사고 조사 과정에서 몇 번 연락이 오갔던 사람, 형 회사의 보안실에서 일하던 직원이었다. 건우는 화면을 잠시 내려다보다가 전화를 받았다.“네.”상대는 약간 망설이는 기색으로 인사를 건넨 뒤,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본론을 꺼냈다. 예전 자료를 정리하다가 신우 전무 관련 백업 폴더 하나를 추가로 찾았는데, 폐기 전에 혹시 확인할 생각이 있느냐는 내용이었다. 원래라면 형 개인 자료는 가족 동의 없이 열 수 없는 것이 맞지만, 이미 수사 협조 차원에서 한 차례 분류가 끝난 폴더 안에 섞여 있었고, 그중 일부가 오디오 파일이라 내용 확인이 필요하다는 설명도 덧붙였다.건우는 잠깐 말이 없었다.오디오 파일.이상하게 그 말 하나에 먼저 몸이 굳었다.
카페는 회사 건물에서 두 블록 떨어진 곳에 있었다.점심시간이 지난 뒤라 한산했다.유리창 밖으로는 출입증을 목에 건 직원들이 드문드문 오가고 있었다.유림은 이미 와 있었다.짙은 네이비 재킷, 단정한 머리.의자에 앉아 있는 자세가 흐트러짐 없이 곧았다.하나와 건우가 들어서자,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와주셔서 감사합니다.”목소리는 낮고 안정적이었다.하나는 마주 인사했다.“바쁜데 시간 내줘서 고마워요.”건우는 따로 말을 하지 않았다.유림과 눈이 마주쳤다가, 먼저 시선을 거두었다.세 사람은 마
건우는 거의 잠들지 못한 채 눈을 떴다.방은 익숙했다.벽지의 색, 침대 옆 협탁의 위치, 책상 위에 뒤집힌 법전까지.모든 것이 자신의 것이었다.그런데도 공기는 낯설었다.부엌에서 물이 끓는 소리, 컵이 부딪히는 소리,혼자일 때는 존재하지 않던 생활의 잔향이 집 안에 남아 있었다.그는 천천히 방문을 열고 거실로 나왔다.하나가 부엌에 있었다.단정하게 묶인 머리, 다림질된 셔츠, 군더더기 없는 움직임.어제 새벽의 젖은 얼굴은 어디에도 없었다.“일어났네.”건우는 대답을 늦췄다가 짧게 말했다.“네.”하나는 커피를 내
회의실 창밖으로 비가 다시 내리기 시작했다.잔잔했지만, 오래 갈 비였다.유림은 앉지 않았다. 테이블 끝에 서서, 파일을 내려다보는 건우를 바라보고 있었다.“대표님이 어제 저녁, 제게 전화를 하셨습니다.”그녀의 말투는 단정했다.감정이 끼어들 틈이 없었다.건우는 파일을 덮지 않았다.통화 기록의 숫자들이 시야에 남아 있었다.저녁 7시 12분.“오늘로 끝내자고 하셨다고요.”그가 되물었다.“네.”“무엇을.”유림은 잠시 침묵했다.답을 고르는 사람의 침묵이 아니라,상대를 재는 사람의 침묵이었다.“업무 관계를요.”
아침은 비가 그친 뒤에야 찾아왔다.창문을 두드리던 소리가 사라지자,집 안은 이상할 만큼 고요해졌다.어젯밤의 대화가 정말 있었던 일인지,건우는 한동안 확신하지 못했다.부엌에서 물 끓는 소리가 났다.그는 잠시 멈춰 서서 그 소리를 들었다.익숙한 소리였다.누군가 이 집에서 아침을 준비하고 있다는 사실이 묘하게 낯설었다.하나는 평소와 다름없는 얼굴로 서 있었다.머리는 단정하게 묶여 있었고, 어제 젖었던 코트는 의자에 걸려 있었다.“일어났어?”목소리가 차분했다.건우는 고개를 끄덕였다.어젯밤의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