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uk그녀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어딘가 힘이 빠져 있었다.
밤이 깊어지고, 어둠이 가득한 방, 건우는 숫자를 다시 적었다.
9:12
9:18
9:37
그리고 그 옆에 한 줄을 덧붙였다.
‘왜.’
-형은 왜 전화했는가.
-위험을 알리기 위해?
-아니면 누군가의 도착을 확인하기 위해?
그는 처음으로 그 가능성을 떠올렸다.
형이 전화한 건 도움을 요청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시간을 맞추기 위해서’였을 수도 있다면.
그 생각은 섬뜩했다.
만약 누군가와 약속이 있었다면.
9시 18분은 우연이 아닐지도 모른다. 건우는 펜을 내려놓았다.
기억은 흔들리고, 문은 잠겨 있었고, 통화는 조용했다.
그리고 이제 의도라는 단어가 천천히 고개를 들고 있었다.
선택하지 않은 길
비는 오지 않았지만, 하늘이 낮게 깔려 있었다.
건우는 오전 내내 아무 일도 하지 못한 채 거실에 앉아 있었다.
식탁 위에는 어제 적어둔 숫자들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9:12
9:18
9:37
그 아래, ‘왜.’
그는 펜을 집어 들었다가 내려놓았다.
아무리 들여다봐도 숫자는 바뀌지 않는다.
하나는 방에서 나왔다.
출근 준비를 마친 얼굴이었다.
“오늘 회사 안 가?”
“오후에 잠깐.”
건우는 짧게 답했다.
하나는 잠시 그를 바라보다가 맞은편에 앉았다.
“건우야.”
그녀가 먼저 말을 꺼냈다.
“다시 시험 볼 생각은 없어?”
질문은 담담했지만, 피하지 않았다.
건우는 고개를 들었다.
“검사.”
“응.”
잠깐 정적이 흘렀다.
그는 시선을 식탁 위 숫자에 두었다.
“지금은 아니에요.”
“왜.”
짧은 질문. 건우는 숨을 고르고 말했다.
“제가 검사가 되면… 이 사건 못 건드려요.”
하나의 눈이 아주 미세하게 흔들렸다.
“이건 네 사건이 아니야.”
그녀의 말은 논리적으로 옳았다.
건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그럼.”
“제 형 사건이에요.”
말이 낮게 떨어졌다.
하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이어 말했다.
“검사가 되면… 감정 개입 금지잖아요.”
“당연하지.”
“지금은 안 돼요.”
건우는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저 아직… 감정 정리 안 됐어요.”
그건 솔직한 말이었다.
부모, 형, 하나. 그는 아직 아무것도 놓지 못했다.
하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더 말하지 않았다.
그 침묵이 오히려 깊었다.
오후, 건우는 형의 회사 자료를 정리하다가 한 통의 메일을 발견했다.
발신인은 외부 투자 컨설팅 회사. 제목은 간단했다.
‘9/18 일정 확정 관련’
날짜는 사건 당일 오전. 그는 메일을 열었다.
‘대표님, 오늘 저녁 9시 전후로 말씀 나누기로 한 건, 비공개로 진행하는 걸로 정리하겠습니다.’
9시 전후. 건우의 손이 멈췄다.
비공개.
그는 메일 하단의 연락처를 바라봤다.
회사명이 낯설지 않았다.
유림이 언급했던 투자자였다.
그는 의자에 몸을 기대었다.
형은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 시간이 9시 전후라면
9시 12분 통화 종료.
9시 18분 아내에게 부재중.
그 사이. 그는 메일을 다시 읽었다.
‘비공개.’
-왜 비공개였을까.
저녁 시간, 하나는 소파에 앉아 서류를 보고 있었다.
건우는 메일을 보여주었다.
“이거… 알고 있었어요?”
하나는 화면을 들여다봤다.
잠깐의 침묵.
“아니.”
짧은 대답.
“투자 얘기… 없었어요?”
“있었지. 근데 이렇게 구체적이지는 않았어.”
그녀의 목소리는 평소와 다르지 않았다.
“비공개 일정이었네요.”
건우가 말했다.
“그래 보이네.”
“9시 전후.”
하나는 아무 말이 없었다.
“형이…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던 건 아닐까요.”
이번에는 그녀의 숨이 조금 느려졌다.
“그럴 수도 있지.”
“그럼 강도는 아닐 가능성이 더 크잖아요.”
하나는 눈을 들었다.
“넌 지금 어디까지 가려는 거야.”
질문은 차분했다.
건우는 대답 대신 물었다.
“형이 누굴 만나기로 했는지, 확인해 본 적 있어요?”
하나는 고개를 저었다.
“경찰에서 추적 중이라고 했어.”
“그 결과는요.”
“아직.”
짧은 답.
건우는 한 걸음 더 들어갔다.
“혹시… 형이 형수한테 그 얘기 숨겼을 가능성은요?”
공기가 멈췄다.
하나의 시선이 건우에게 꽂혔다.
“그 말, 무슨 뜻이야.”
“아니에요.”
그는 고개를 저었다.
“그냥 가능성요.”
하나는 천천히 일어났다.
“넌 지금… 형보다 나를 더 보고 있어.”
그 말이 조용히 떨어졌다.
건우는 대답하지 못했다.
그녀의 말이 틀렸다고 말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밤이 깊어졌다.
하나는 방으로 들어갔고, 문은 닫혔다.
그리고, 건우는 혼자 거실에 앉아 메일을 다시 읽었다.
9시 전후. 그 시간은 우연이 아니었다.
형은 누군가를 만나려 했고, 아내에게는 그 사실을 말하지 않았다.
그리고 9시 18분.
-형은 왜 아내에게 전화를 걸었을까.
-만약 약속한 사람이 도착하지 않았다면.
-아니면 약속한 사람이 예상과 달랐다면.
건우는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그는 오늘 처음으로, 자신이 검사가 되지 않기로 한
이유를 다시 확인했다.
법은 절차를 따른다.
하지만 지금 필요한 건 절차가 아니라 진실이다.
그리고 그 진실은 가장 가까운 사람부터 의심하라고
조용히 속삭이고 있었다.
메일은 짧았다.
‘9시 전후로 말씀 나누기로 한 건, 비공개로 진행하겠습니다.’
건우는 그 문장을 몇 번이나 읽었다.
비공개.
형은 대외적으로는 모든 걸 투명하게 처리하는 사람이었다.
투자든, 계약이든, 숫자로 정리하고 문서로 남겼다.
그런 사람이 ‘비공개’라는 단어를 택했다.
그건 단순한 일정이 아니었다.
오전, 건우는 메일 하단의 연락처로 전화를 걸었다.
몇 번의 연결음 끝에 남자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컨설팅입니다.”
“윤신우 대표 관련해서 연락드렸습니다.”
짧은 침묵.
“어떤 부분이죠.”
건우는 숨을 고르고 말했다.
“9월 18일, 밤 9시 전후 약속.”
상대는 잠시 말을 멈췄다.
“그 일정은 취소된 걸로 압니다.”
“취소요?”
“대표님 쪽에서 연락이 와서, 보류하자고.”
건우의 손이 멈췄다.
“언제요.”
“오후 늦게.”
“정확한 시간 기억하십니까.”
“기록이 있습니다만… 왜 묻는 겁니까.”
건우는 더 묻지 않았다.
감사 인사를 남기고 전화를 끊었다.
오후 늦게.
그렇다면 9시 전후 약속은 없었다.
형은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지 않았다.
그렇다면
9시 12분 통화,
9시 18분 부재중.
그 사이에 있었던 일은, 약속과 무관하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건우는 머릿속에서 구조를 다시 짰다.
약속 취소.
비공개 일정 무산.
그럼 형은 그 시간에 누구를 만나려 했던 게 아니다.
아니면 약속 상대가 다른 사람이었을 가능성.
그는 그 생각을 밀어붙이지 않았다.
아직은 단서가 부족했다.
집에 들어섰을 때, 하나는 소파에 앉아 있었다.
“어디 갔다 왔어.”
“메일 보낸 회사요.”
하나의 눈이 살짝 움직였다.
“왜.”
“확인하려고요.”
그는 신발을 벗으며 말했다.
“그날 약속, 취소됐다고 하네요.”
짧은 침묵.
“취소?”
“오후 늦게.”
하나는 몇 초간 아무 말이 없었다.
“그럼… 집에서 혼자였겠네.”
그녀의 말은 자연스러웠다.
너무 자연스러웠다.
건우는 천천히 그녀를 바라봤다.
“형이 그 얘기… 형수한테는 안 했나요?.”
하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날 저녁, 통화는 안 했어요?”
“퇴근 전에 잠깐.”
“약속 취소 얘기요?”
하나는 눈을 깜박였다.
“…기억 안 나.”
짧은 대답. 건우는 그 말을 곱씹었다.
약속 취소는 오후 늦게. 하나는 퇴근 전 통화했다고 했다.
그 통화에서 형이 아무 말도 하지 않았을까.
“형이 그날… 평소랑 달랐어요?”
건우가 물었다.
하나는 시선을 떨어뜨렸다.
“조금.”
“어떻게요?”
“조금 예민해 보였어.”
그 말은 처음이었다.
건우는 그걸 놓치지 않았다.
“왜 그 얘기, 이제 해요.”
하나는 고개를 들었다.
“네가 묻지 않았잖아.”
말은 맞았다.
그런데, 기억은 계속 추가되고 있었다.
현관 앞 → 복도
한 번 → 두 번
조용했다 → 예민했다
조각들이 조금씩 바뀐다.
늦은 밤, 건우는 형의 성격을 다시 떠올렸다.
신우는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는 사람이었다.
예민함을 숨기지 못할 정도라면,
그건 이미 문제가 진행 중이었다는 뜻이다.
그는 식탁에 앉아 노트북을 켰다.
형의 일정표.
그날 오후.
4시 회의.
6시 내부 보고.
7시 퇴근.
그 이후 공백.
건우는 손가락으로 7시 이후를 짚었다.
약속은 취소되었다.
-그럼 9시 12분 통화는 단순한 업무 정리였을까.
-아니면 다른 누군가와의 문제였을까.
그는 갑자기 떠올랐다.
형은 아내에게 9시 18분에 전화했다.
약속도 없고, 외부 일정도 취소된 상태에서.
그 시간에 굳이 전화를 걸 이유.
건우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혹시 형은 누군가의 이름을 확인하려던 건 아닐까.
“너… 지금 어디야.”
그 질문을 하려고. 그 생각이 떠오른 순간, 가슴이 서늘해졌다.
거실 불은 꺼져 있었고, 게스트룸 문은 닫혀 있었다.
건우는 그 문 앞에서 멈췄다.
형이 전화를 건 이유.
확인.
확인하려는 사람은 가장 가까운 사람일 가능성이 높다.
그는 손을 들었다가, 문을 두드리지 않았다.
아직은. 아직은 확신이 없다.
하지만 오늘 처음으로, 그는 한 가지 가능성을 똑바로 바라봤다.
형이 9시 18분에 전화를 건 이유가 '위험'이 아니라 '의심'이었다면.
그 의심의 대상이 누구였는지 그는 아직, 입 밖으로 꺼내지 못했다.
보류 통보 이후, 집 안의 공기는 조용해졌지만 가벼워지지는 않았다.하나는 표면적으로 아무 변화가 없는 듯 행동했다. 평소처럼 출근했고, 평소처럼 자료를 정리했고, 평소처럼 차분한 목소리로 통화를 했다. 그러나 건우는 알고 있었다. 그녀의 시선이 이전보다 더 날카로워졌고, 움직임이 더 절제되어 있다는 것을.그건 방어가 아니라, 각오에 가까웠다.“내일 기자 브리핑 잡았어.”저녁 식사 후, 하나가 말했다.“직접?”건우의 물음은 이미 답을 알고 있는 사람의 질문이었다.“응. 시간 끌기 프레임을 먼저 깨야 해.”그녀는 담담했지만, 그 결정이 어떤 파장을 가져올지 모르는 사람은 아니었다.건우는 포크를 내려놓았다.“저쪽이 가만히 있을 것 같아?”하나는 잠시 생각하듯 고개를 기울였다.“가만히 있지 않겠지.”그 말이 오히려 더 무거웠다.그녀는 위험을 계산에서 제외하지 않았다. 다만, 그 위험을 이유로 물러서지 않을 뿐이었다.그날 밤, 건우는 잠들지 못했다.침실 문틈으로 새어 나오는 불빛이 낯설게 느껴졌다. 하나는 거실에서 브리핑 원고를 수정하고 있었다. 그는 한동안 침대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다가 결국 일어나 거실로 나왔다.노트북 화면에는 정리된 문장들이 빼곡히 적혀 있었다.‘사고는 단순 교통사고가 아닙니다.’‘명확한 외부 개입 정황이 확인되었습니다.’그 문장들은 단단했고, 흔들림이 없었다.“지금 멈추면.”건우가 낮게 말했다.하나는 고개를 들었다.“뭐가 바뀌어?”그 질문에는 비난이 없었다. 단지 확인이었다.그는 대답하지 못했다.바뀌는 건 없을지도 모른다.하지만 잃는 건 분명히 있을 것 같았다.다음 날 오전, 브리핑은 예정대로 진행되었다.하나는 단상 위에 서서 준비한 원고를 또박또박 읽어 내려갔다. 질문은 예상보다 거칠었고, 일부는 노골적이었다. 개인 감정 개입 여부, 전 연인 관계, 이해충돌 가능성까지 언급되었다.그녀는 한 치도 물러서지 않았다.“제 개인적 관계와 사건의 진실은 별개의 문제입니다.”그
영상 파일은 공식 증거 목록에 포함되기 직전 단계까지 올라갔다.하나는 내부 검토 라인을 통과시키기 위해 관련 판례와 유사 사례를 정리했고, 고의성 입증 기준을 조목조목 맞춰가며 보고서를 수정하고 있었다. 그녀의 손놀림은 흔들림이 없었지만, 건우는 알고 있었다. 지금 이 속도는 단순한 수사 진척이 아니라, 물러서지 않겠다는 선언이라는 걸.“언론은 잠잠해졌어.”건우가 말했다.“일단은.”하나는 화면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잠잠해진 게 아니라 방향을 바꾼 거겠지.”그녀는 담담하게 덧붙였다.“개인 공격이 통하지 않으면, 다른 방식으로 올 거야.”그 말은 예측이 아니라 경험에서 나온 확신이었다.건우는 창가에 기대 서서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사건은 분명히 진전되고 있었다. 하지만 그 진전만큼, 보이지 않는 압박도 짙어지고 있었다. 브레이크 조작, 난간 사고, 언론 공세, 그리고 마지막 영상. 모든 것이 단계적으로 조여 오고 있었다.그는 문득, 하나가 자신보다 더 침착하다는 사실이 두렵게 느껴졌다. 그녀는 위험을 알고도 앞으로 걸어가고 있었고, 자신은 그걸 말릴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하나야.”그가 조심스럽게 불렀다.“응?”“만약에… 여기서 더 세게 오면.”그녀는 키보드를 두드리던 손을 멈췄다.“그럼 더 세게 받아치면 돼.”그 대답은 망설임이 없었다.건우는 웃지 못했다.“넌 항상 그렇게 말해.”“틀렸어?”그녀의 눈이 그를 향했다.그 시선은 흔들리지 않았지만, 아주 미세한 피로가 배어 있었다. 그는 그걸 읽었다. 그리고 그 피로가 자신 때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마음이 묘하게 죄어왔다.밤이 깊어졌을 무렵, 그는 혼자 거실에 남아 있었다.노트북 화면은 꺼져 있었고, 불은 켜져 있었다. 최근 들어 그는 일부러 불을 끄지 않았다. 어둠이 길어질수록, 생각이 더 선명해지는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오늘은 조용하네.”서하의 목소리가 소파 뒤편에서 흘러나왔다.그녀는 천천히 걸어 나
복원된 메일은 단순한 정황 증거가 아니었다.‘정리되면 자연스럽게 넘어간다’는 문장은 사고 이후의 대응을 말하는 게 아니라, 사고를 전제로 한 문맥처럼 읽혔다. 하나는 그 부분을 확대 출력해 두고 상부 보고서에 첨부했다. 문장의 뉘앙스 하나가 수사의 방향을 완전히 바꿀 수 있다는 걸 그녀는 알고 있었다.건우는 보고서 초안을 함께 검토하면서도 마음 한쪽이 불편했다.공식적으로 확대 수사에 들어가는 순간, 상대는 더 이상 간접적 경고에 머물지 않을 가능성이 컸다.“지금 단계에서 바로 올려도 돼?”그가 조심스럽게 물었다.하나는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답했다.“여기서 멈추면, 우린 계속 밀려.”그녀의 판단은 논리적으로 옳았다.그러나 건우는 그 논리 바깥에 있는 위험을 더 선명하게 보고 있었다.“올리는 순간, 저쪽도 올려.”그가 낮게 말했다.“이미 올라왔어.”하나는 담담했다.그녀는 두려움을 인정하지 않는 게 아니라, 두려움보다 결론을 우선에 두고 있었다.그날 오후, 예상보다 빠르게 반응이 왔다.계열사 감사팀 명의로 하나에게 공식 항의 공문이 도착했다. 수사 범위를 벗어난 자료 확보였다는 주장과 함께, 직권 남용 가능성을 언급하는 내용이었다. 동시에 언론사 한 곳에서 ‘검사 개인 감정 개입 의혹’이라는 제목의 취재 요청이 들어왔다.건우는 그 기사를 보고 이가 악물렸다.“이건 너를 사건에서 떼어내려는 거야.”그가 말했다.하나는 화면을 넘기며 차분히 분석했다.“논점 흐리기지.”“아니.”건우의 목소리가 낮아졌다.“개인 공격이야.”그녀의 과거 연인 관계, 형과의 연결, 이해충돌 가능성까지 암시하는 문장이 포함되어 있었다. 확정적 표현은 없었지만, 독자가 의심하도록 설계된 구조였다.하나는 잠시 침묵했다.“이건 네가 흔들리길 바라는 거야.”그녀는 건우를 바라보며 말했다.“나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멈추길.”그는 대답하지 않았다.이미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저녁이 되자, 집 앞 골목에 낯선 차량이 한 대 더 늘
난간 사고 이후, 집 안의 공기는 이전과는 다른 종류의 긴장을 품고 있었다. 위험은 더 이상 추상적인 가능성이 아니라, 실제로 눈앞에서 떨어진 철제 구조물처럼 구체적인 형상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그 형상이 사라진 자리에 남은 건, 감정이었다.저녁 식탁 위에 서류가 펼쳐져 있었다. 형의 사고 직전 지분 변동 내역과 계열사 간 자금 흐름이 나란히 놓여 있었고, 건우는 특정 날짜에 표시를 해두었다. 사고 이틀 전, 이사회 비공개 결의가 있었고 그 직후 특정 계좌로 대규모 자금이 이동했다.“이건 준비된 구조야.”그가 낮게 말했다.하나는 화면을 오래 들여다보았다.“우연으로는 설명이 안 되네.”그녀의 말은 감정이 아니라 판단에 가까웠다. 하지만 그 판단이 의미하는 건 단순한 배임이나 횡령이 아니었다. 누군가의 죽음이 ‘필요한 변수’였을 가능성이다.“여기까지 가면.”건우가 말을 이었다.“더 세게 반응할 거야.”하나는 고개를 끄덕였다.“이미 시작됐어.”그녀는 난간이 무너졌던 순간을 떠올렸을 것이다. 말로는 침착했지만, 그날 밤 그녀의 손끝이 차가웠다는 걸 그는 기억하고 있었다.잠시 정적이 흐르는 사이, 하나의 휴대폰이 진동했다.발신자는 표시되지 않았다.메시지 한 통.사진 한 장.하나는 화면을 보는 순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건우는 그녀의 표정이 아주 미세하게 굳는 걸 보았다.“이거.”그녀가 휴대폰을 그에게 건넸다.사진 속에는 건우의 거실이 찍혀 있었다. 불이 켜진 상태였고, 소파 앞에 서 있는 건우의 모습이 선명했다. 그리고 그 맞은편에, 여자의 실루엣이 희미하게 잡혀 있었다. 얼굴은 정확히 나오지 않았지만, 분명히 ‘누군가’였다.촬영 각도는 창밖이 아니었다. 집 안 어딘가에서 찍은 듯한 위치였다.건우의 심장이 천천히 조여들었다.“이게 뭐야.”하나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차갑지 않았다. 대신 지나치게 침착했다.그는 사진을 다시 확대했다.“누가 우리 집 안을 찍은 거야.”그의 첫 반응은 감정이 아니
다음 날 오전, 건우는 하나가 보낸 자료를 다시 정리하고 있었다.전날 소환했던 중간 관리자에 대한 통화 기록, 자금 흐름표, 계열사 간 내부 메신저 로그 복원 요청서까지 나란히 펼쳐 놓자 흐름이 보이기 시작했다. 누군가가 사고 이전부터 자금 구조를 재편하고 있었고, 그 과정에서 형의 지분이 자연스럽게 ‘정리될 수밖에 없는 구조’로 바뀌어 있었다.우연이라고 보기에는 너무 정교했다.건우는 펜을 내려놓고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이제 이건 의심의 단계가 아니라 계산의 영역이었다.그 순간 휴대폰이 울렸다.낯선 번호였다.받자마자 들려온 목소리는 어제와는 다른 사람이었다. 낮고 차분했지만, 어딘가 냉기가 섞여 있었다.“윤건우 씨. 계속 파고 계신 모양인데, 방향은 제대로 잡으셨습니까.”그는 대답하지 않았다.“지분 구조까지 가셨다면, 이제 멈추셔야 합니다.”“왜죠.”그의 목소리는 평온했지만, 손끝에 힘이 들어갔다.“다음은 사람이 다칠 수 있습니다.”그 말은 구체적이었다.형의 사고 때와 같은 간접적인 위협이 아니었다. 직접적인 경고였다.건우는 낮게 말했다.“이미 다친 사람 있습니다.”상대는 잠시 웃었다.“이번엔 더 명확해질 겁니다.”전화는 일방적으로 끊겼다.건우는 화면을 내려다본 채 한동안 움직이지 않았다.이번에는 분명히 ‘다음 단계’를 예고했다.그는 하나에게 전화를 걸었다.“지금 어디야.”“사무실.”그녀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안정적이었다.“지금 당장 나와.”잠시 침묵이 흘렀다.“왜.”“위협 들어왔어.”그는 숨을 고른 뒤 덧붙였다.“이번엔 노골적이야.”하나는 짧게 숨을 내쉬었다.“건우야.”그녀는 천천히 말했다.“우릴 흔드는 건 감정이 아니라 타이밍이야.”“무슨 뜻이야.”“우리가 맞는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거지.”그 말은 논리적으로는 맞았다.하지만 지금 건우는 논리로만 움직일 수 없었다.“그래도 조심해.”“나 충분히 조심하고 있어.”그녀는 잠시 말을 멈췄다가 낮게 덧붙였다.“너도.”그 한 마
다음 날 아침, 건우는 거의 잠을 이루지 못한 채 소파에 앉아 있었다.서하가 나타났던 밤은 이상하게도 짧게 느껴졌고, 사라진 뒤의 공기가 더 무거웠다. 하나는 아직 방 안에서 자고 있었다. 그의 머릿속에는 서하의 마지막 말이 맴돌고 있었다.‘하나를 사랑하면 그렇게 말해. 나를 찾지 말고.’그 문장은 도발이 아니라 선언에 가까웠다. 마치 자신을 시험하듯, 아니면 밀어내듯.현관문이 열리는 소리에 그는 고개를 들었다.하나는 이미 출근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어젯밤 서하가 나타났다는 사실을 그녀는 모른다. 모른 채로 일상을 이어가고 있다.“왜 그렇게 앉아 있어.”그녀가 묻자, 건우는 자리에서 일어났다.“잠이 좀 안 와서.”그는 평소처럼 말했지만, 하나는 그를 오래 바라봤다.“얼굴이 안 좋아.”“괜찮아.”그녀는 더 묻지 않았다. 대신 코트를 걸치며 말했다.“오늘 오후에 참고인 하나 부를 거야. 회사 쪽 중간 관리자.”건우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머릿속에서는 다른 계산이 돌아가고 있었다.누군가 밤의 변화를 알고 있고, 하나의 움직임을 감시하고 있다면, 오늘의 소환도 이미 파악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끝나면 바로 연락해.”그가 말했다.하나는 짧게 웃었다.“또 걱정이야?”“당연하지.”그 말은 농담처럼 들렸지만, 진심이었다.오후 네 시를 조금 넘긴 시각, 건우의 휴대폰이 울렸다.발신자는 하나였다.그는 바로 받았다.“끝났어?”“응. 근데 이상해.”그녀의 목소리는 낮았다.“뭐가.”“그 사람이 너무 준비돼 있었어. 질문을 던지면, 마치 미리 정리해 둔 대본을 읽는 것처럼 대답해.”건우는 눈을 가늘게 떴다.“누가 코칭한 거네.”“아마도.”하나는 잠시 숨을 고른 뒤 덧붙였다.“그리고…”“그리고?”“나 나올 때, 주차장에 검은 세단이 서 있었어. 브레이크 사건 이후로 계속 보이던 차랑 비슷해.”건우의 심장이 느리게, 그러나 무겁게 뛰었다.“지금 어디야.”“차 안.”“움직이지 마.”그는 이미 차 키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