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uk
그날, 건우는 침대에서 일어날 수가 없었다.
아픈 건 아니었다. 몸은 멀쩡했다.
다만, 일어나는 순간 모든 게 진짜가 될 것 같아서.부모님이 돌아가셨다.
그 문장을 입 밖으로 내는 순간, 정말로 세상이 굳어버릴 것만 같았다. 자신은 살아 있고, 더이상 그의 부모는 없다.-그게 말이 되나.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1년.건우는 병실 침대 위에서 1년을 보냈다.
눈을 떴을 때는 이미 모든 게 끝나 있었다. 장례도, 화장도. 향 냄새를 맡을 겨를도 없었고, 마지막 인사를 할 기회도 없었다. 울지도 못했다.그건 애초에 건우의 몫이 아니었다.
살아 있었지만, 아무것도 겪지 못한 채로 돌아온 셈이었다. 집으로 돌아온 뒤로도 그는 잠을 제대로 자본 적이 없었다.눈을 감으면 보였다.
부모님 얼굴이 비에 젖은 도로 위, 찌그러진 차 안에서,
피를 흘리며 자신을 바라보던 그 눈빛.-왜 너만 살아 있냐고.
-우리는 왜 죽어야 했냐고.그 질문이 밤마다 가슴을 파고들었다.
건우는 그걸 밀어낼 힘이 없었다. 힘을 쓰는 것 자체가 사치처럼 느껴졌으니까.그때 초인종이 울렸다.
건우는 움직이지 않았다.
벨 소리가 집 안을 채우다가, 이내 사라졌다. 다시 울리지 않기를 바랐지만, 바람은 늘 가장 늦게 도착했다.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젖은 손으로 두드리는 것 같았다. 둔탁하고 무거운 소리. 그리고, 누군가 그의 이름을 불렀다.“도련님… 도련님…”
건우의 눈꺼풀이 떨렸다.
그 목소리를 모를 리가 없었다.“윤건우… 윤건우…”
강하나.
윤신우의 아내.
이제는 ‘형수님’이라고 불러야 하는 여자. 그리고, 윤건우가 가장 사랑했던 사람.1년 전엔 그들이 함께 미래를 그렸다.
결혼을 생각했고, 그냥 옆에 있는 것만으로도 좋았다. 웃는 소리 하나도 아까웠다. 모든 순간이. 그런데 1년 만에 눈을 떴을 때, 하나는 이미 그의 사람이 아니었다.검은 정장을 입은 형 옆에 서 있었다.
고개를 숙인 채로. 왼손 약지에 반지가 끼워져 있었다. 사고로 부모님은 돌아가셨고, 형은 혼자 회사를 떠안게 되었다. 언제 깨어날지도 모르는 동생을 대신해서 모든 걸 감당했다고 했다.그리고 그 옆에, 하나가 있었다.
형의 아내로.
이해하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다만, 받아들이는 건 달랐다. 몸 어딘가가 납덩이처럼 가라앉는 기분. 설명은 가능했지만, 감정은 따라오지 못했다.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건우는 겨우 몸을 일으켰다.
발바닥이 차가운 마룻바닥에 닿는 순간,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현관까지 가는 게 이렇게 먼 일인 줄 몰랐다.손잡이를 잡는 순간,
밖에서 비 내리는 소리가 더 선명하게 들려왔다. 문을 여는 일조차 의식처럼 느껴졌다. 돌아갈 수 없는 쪽으로, 한 발 내딛는 의식.문을 열었다. 비 냄새가 밀려 들어왔다.
하나가 우산도 없이 서 있었다.
머리카락이 얼굴에 달라붙어 있었고, 옷은 물에 젖어 검게 변해 있었다.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 같은 얼굴이었다.건우는 그 얼굴을 보는 순간,
이 여자가 왜 여기까지 왔는지 이미 알아버릴 것 같아 숨이 막혔다.“하… 나… 아니, 형수님…”
목소리가 떨렸다.
자기 귀에도 낯선 목소리였다.“대체 무슨 일이에요.”
하나의 입술은 하얗게 질려 있었다.
말을 삼키는 게 보였다. 몇 번이고. 비는 그녀의 어깨를 때리며 흘러내렸고, 그 물기마저 그녀를 더 작게 보이게 만들었다.“…건우야.”
그녀가 그의 이름을 불렀다.
형수님이 아니라, 예전처럼.건우의 가슴이 반응했다.
그 반응이 더 참담했다.“어떡해.”
숨이 가빴다.
“신우 씨가… 신우 씨가…”
눈이 흔들렸다.
마치 한 단어만 더 말하면 모든 게 무너질 것처럼.“죽었어.”
순간, 빗소리가 멀어졌다.
세상이 잠깐 꺼진 듯했다.건우는 그녀를 바라봤다.
말의 의미가 머리로 들어오지 않았다. 단어는 들렸는데, 문장이 되지 않았다.“네?”
천천히 되물었다.
“그게 무슨 말이에요. 갑자기 누가 죽어요?”
하나가 고개를 저었다.
그 움직임이 너무 작아서, 고개를 젓는 건지 무너지는 건지 구분이 안 됐다.“퇴근하고 집에 갔는데… 집이 엉망이었어.”
“창문이 깨져 있었고… 거실은 난장판이었어.”손이 떨리고 있었다.
그 떨림은 추위 때문만은 아니었다.“신우 씨가… 바닥에 쓰러져 있었어. 배에 칼이…”
말이 끊겼다.
그 다음을 말하면, 정말로 끝이 날 것 같아서. 끝이라는 단어가 현실이 될 것 같아서.건우의 머릿속에 형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자신이 깨어났을 때, 침대 옆에 서 있던 그 얼굴. 말없이 물을 건네고, 말없이 창문을 닫아주던 사람.이제 가족은 형밖에 없었다.
그 형이. 오늘 밤, 죽었다.
밖에서는 여전히 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세상은 너무 자연스럽게 계속 돌아가고, 그 자연스러움이 건우를 더 잔인하게 만들었다.하나는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고 문턱에 서 있었다.
마치 이 집 안으로 들어오면, 자신이 가져온 소식이 완전히 현실이 될까 봐.그녀의 눈빛이 집 안을 훑었다.
젖은 현관 매트, 어둑한 거실, 닫힌 방문들. 그리고 다시 건우에게로 돌아왔다.그 눈에 두려움이 담겨 있었다.
하지만 그보다 더 깊은 무엇이, 아주 잠깐 스쳐 지나갔다. 겁에 질린 사람의 눈빛이 아니라, 무언가를 이미 확인한 사람의 눈빛.건우는 그게 뭔지 그때는 알지 못했다.
알고 싶지 않았는지도 모른다.그날 밤, 그 집에서 죽은 건 윤신우만이 아니었다.
누군가의 믿음도 함께, 조용히 무너지고 있었다. *비는 멈출 생각이 없었다.
경찰차의 붉은 불빛이 젖은 아스팔트 위에서 길게 번졌다. 신우의 집 앞에는 이미 노란 통제선이 둘러쳐져 있었다.건우는 그 선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집이 아니라, 다른 공간처럼 느껴졌다.
익숙해야 할 현관이 낯설게 보였다.“가족분이십니까?”
젊은 형사가 다가왔다.
건우는 고개만 끄덕였다.“안쪽은 현장 보존 중입니다. 여기서 확인만 하셔야 합니다.”
건우는 통제선 안쪽을 바라봤다.
거실은 불이 켜져 있었다.
바닥에는 흩어진 물건들이 보였고, 소파가 밀려 있었다. 창문 하나가 깨져 있었는데, 파손된 유리 대부분이 실내 쪽으로 흩어져 있었다. 그는 그걸 한참 바라보다가 시선을 옮겼다.거실 중앙. 하얀 천이 덮여 있었다.
천 아래의 윤곽이 사람의 형태를 하고 있었다. 건우의 목이 마른 듯 굳었다.형은 저 아래에 있다.
그러나 그는 다가갈 수 없었다.
그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건 고작 얇은 테이프 한 줄이었지만, 그건 건너갈 수 없는 경계였다.비가 세게 내리면서 깨진 창문 틈으로 빗물이 들이치고 있었다.
현장 요원이 플라스틱 시트로 급히 막고 있었다.“사망 추정 시각은 9시 전후입니다.”
형사의 말이 들렸다.“침입 흔적은 확인됐습니다. 강도 가능성으로 보고 있습니다.”
강도.
그 단어가 건우의 귓속에서 헛돌았다.
형이 강도에게 찔렸다고.그는 다시 거실을 바라봤다.
피는 이미 어둡게 말라가고 있었다.
비 냄새와 섞여 묘하게 눅진한 공기가 느껴졌다.하나는 현관 안쪽 벽에 기대 서 있었다.
경찰 한 명이 옆에서 진술을 받고 있었다.“귀가 시간은 정확히 언제입니까?”
“9시 반 조금 넘어서요.”목소리가 낮고 고르다. 울음이 섞여 있지 않았다.
“남편분과 최근에 다툰 일은요?”
잠시 침묵.
“없었습니다.”
짧고 단정했다.
건우는 그 대답을 들으면서도, 그녀를 제대로 보지 못했다.
눈이 자꾸 거실 중앙으로 향했다.하얀 천 아래, 형이 누워 있다.
그 사실이 이상하게도 실감이 나지 않았다. 마치 영화 세트장을 보는 것 같았다.“유리 파손 방향은 안쪽으로 튄 흔적이 많습니다.”
현장 감식 요원이 낮게 말했다.“외부 충격인지, 내부에서 파손된 건지는 더 봐야 합니다.”
건우는 그 말을 흘려들으려 했지만,
그 문장이 머릿속 어딘가에 걸렸다.안쪽으로.
그는 천천히 시선을 창문으로 옮겼다.
비는 여전히 바깥에서 쏟아지고 있었다.“도련님.”
누군가 조심스럽게 불렀다.
관리인이었다.“저녁에 큰 소리가 나긴 했습니다. 하지만 비가 워낙 세서… 정확히는…”
말끝이 흐려졌다.
비.
모든 게 비 때문인 것처럼 정리되고 있었다.
형사가 건우에게 다가왔다.“동생분이시죠. 참고인 조사 위해서 잠시 말씀 나누셔야 합니다.”
건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순간, 들것이 들어왔다.하얀 천이 조심스럽게 고정됐다.
윤신우의 얼굴이 잠깐 드러났다. 눈은 감겨 있었다. 표정은 놀랍도록 평온했다.그 평온함이 이상했다.
마지막 순간에 겪었을 공포가 전혀 남아 있지 않았다. 형은 저 얼굴로, 자신의 마지막 말을 남겼을까.건우는 묻고 싶었다.
-형, 그때 뭐라고 말했어.
하지만 대답할 사람은 없었다.
시신이 통제선을 넘어 나갔다.비가 얼굴을 때렸다.
하나는 여전히 안쪽에 서 있었다. 조사를 마친 듯 형사와 몇 마디를 나누고 있었다.그녀의 눈이 잠시 건우를 향했다.
두려움이 담겨 있었다. 그런데, 그보다 먼저 무언가를 이미 알고 있는 사람의 눈빛이 스쳤다.아주 잠깐. 건우는 그걸 정확히 설명할 수 없었다.
다만, 확실한 건 하나였다.형은 죽었고, 이 집은 지금부터 증거가 된다.
그리고 이 밤이,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긴 밤이 될 거라는 예감이 조용히 시작되고 있었다.하나는 물을 마신 뒤에도 한동안 고개를 들지 못했다.컵을 두 손으로 감싸 쥔 채, 아주 천천히 숨을 고르고 있었다.아까보다 호흡은 조금 안정된 것 같았지만, 건우는 이상하게도 더 쉽게 안심할 수가 없었다. 방금 전까지 분명히 눈앞에 있었던 그 낯선 결이 너무 선명하게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같은 얼굴이었다.같은 목소리였고, 같은 손이었고, 같은 눈이었다.그런데 아주 짧은 순간, 그 안에 전혀 다른 무언가가 스쳐 지나갔다.건우는 소파 옆에 선 채로 하나를 내려다봤다.하나는 아직도 물컵을 쥔 손에 힘이 조금 들어가 있었다. 손등 위 얇은 혈관이 드러나 있었고, 마른 입술은 컵 가장자리를 아주 천천히 따라 움직이다가 멈췄다. 평소 같았으면 그저 피곤한 밤처럼 보였을 장면인데, 지금은 그 작은 동작 하나하나가 전부 다르게 읽혔다.건우는 결국 천천히 하나의 옆에 앉았다.너무 가깝지도, 너무 멀지도 않은 거리였다. 손을 뻗으면 닿을 수는 있지만, 지금 당장 닿는 건 오히려 무언가를 망칠 것 같은 거리.한동안 아무 말도 없었다.하나는 컵을 내려놓지 않았고, 건우도 먼저 입을 열지 않았다. 괜히 말을 꺼냈다가 방금 전 자기 눈앞에서 지나간그 이상한 순간을 너무 쉽게 지워버리게 될까 봐, 건우는 침묵 쪽을 택했다.그 정적은 불편했지만, 이상하게도 도망치고 싶지는 않았다.지금 필요한 건 질문보다 관찰이라는 걸 건우는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얼마쯤 지났을까.’하나가 아주 낮게 말했다.“왜 그렇게 봐.”건우는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뭘.”“계속.”그 말은 평소의 하나로 돌아온 것처럼 들렸다. 목소리도, 호흡도, 말 끝의 결도 방금 전과는 달랐다. 그래서 건우는 오히려 더 혼란스러워졌다. 정말 자기가 잘못 본 건가. 긴장과 피로가 겹쳐서 순간적으로 이상하게 느낀 것뿐이었나.하지만 그런 식으로 넘기기엔, 방금 전 하나의 눈이 너무 선명했다.건우는 아주 천천히 말했다.“아까 너 좀 이상했어.”하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식탁 위의 공기가 완전히 가라앉기까지는 시간이 조금 더 필요했다.누가 먼저 말을 꺼내지 않아도, 둘 다 알고 있었다. 방금 지나간 짧은 순간이 단순한 대화의 끊김이 아니라, 어떤 경계를 건드린 뒤에 남는 정적이라는 걸. 말 몇 마디로는 다시 예전처럼 돌아갈 수 없는 종류의 틈이 이미 생겨 있었다.건우는 컵을 다시 들지 않았다.물은 그대로였고, 손끝은 여전히 차가웠다. 반대로 심장은 이상할 정도로 차분했다. 감정이 폭발하기 직전의 상태가 아니라, 오히려 너무 많은 걸 한꺼번에 받아들였을 때 오는 묘한 고요함에 가까웠다.그는 눈앞의 하나를 바라봤다.하나는 여전히 같은 자리에 앉아 있었다. 방금 전보다 더 움직임이 적어졌고, 손은 식탁 위에 조용히 놓여 있었다. 겉으로 보면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 건우는 이상하게 그 고요함이 더 불안하게 느껴졌다.너무 조용한 사람은 안에서 이미 무언가가 움직이고 있을 때가 많다.건우는 그 생각을 떠올리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형수님.”하나는 고개를 들지 않았다.“네.”대답은 평소와 다르지 않았지만, 그 짧은 한 음절 안에 미세하게 숨이 섞여 있었다. 건우는 그걸 듣고 잠시 말을 멈췄다. 질문을 이어가는 게 맞는지, 아니면 여기서 멈추는 게 맞는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그는 결국 아주 단순한 쪽으로 돌아갔다.“괜찮아요?”하나는 그제야 시선을 들었다.눈빛은 여전히 정돈되어 있었다. 흐트러진 흔적은 없었고, 눈가도 마른 상태였다. 그런데 건우는 그 눈을 보는 순간 알 수 있었다. 괜찮은 사람의 얼굴이 아니라는 걸. 다만, 괜찮은 것처럼 유지하고 있는 사람의 얼굴에 가까웠다.하나는 아주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네.”그 대답은 너무 빠르고, 너무 매끄러웠다.건우는 더 묻지 않았다.대신 잠깐 시선을 내렸다가, 다시 그녀를 바라봤다. 지금은 답을 끌어내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그 답이 나오는 방식을 보는 게 더 중요하다는 걸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하
하나는 그 질문 앞에서 처음으로 눈을 피했다.건우는 그 작은 움직임에 심장이 천천히 조여드는 걸 느꼈다. 그녀는 아주 잠깐 고개를 돌려 창 쪽을 봤고, 손끝이 컵 손잡이에서 천천히 떨어졌다. 그리고 아주 오래 걸려서야 대답했다.“그땐 그걸 무섭다고 생각 안 했어.”건우는 목 안이 마르는 걸 느꼈다.하나는 다시 그를 보지 않은 채 말을 이었다.“그냥… 내가 뭘 잘못한 건가 싶었ㅈ;.”그 말은 조용했지만, 건우에게는 거의 정면으로 꽂혔다.사람을 직접 다치게 하지 않고도 무너뜨리는 방식이 있다.상대가 자기 감각을 의심하게 만들고, 자기가 과민한 건지, 오해한 건지, 쓸데없이 예민한 건지 계속 스스로를 돌아보게 만드는 방식.건우는 아주 천천히 숨을 들이마셨다.하나는 지금도 너무 담담하게 말하고 있었다. 그래서 오히려 더 아팠다. 이건 갑자기 떠오른 상처가 아니라, 오래전에 이미 몸 안으로 들어와 자리를 잡은 감각이었다.건우는 자기도 모르게 손을 뻗었다가, 중간에 멈췄다.식탁 위, 하나의 손까지는 닿을 수 있는 거리였다.그런데 그 짧은 거리조차 쉽게 넘을 수가 없었다. 지금 그녀를 위로하는 건 너무 쉬운 방식 같았고, 동시에 아무것도 하지 않는 건 너무 잔인한 것 같았다. 그 어중간한 거리에서 건우는 자기 손을 천천히 거두었다.하지만 하나는 그걸 봤다.그녀의 시선이 잠깐 건우의 손끝에 머물렀다가, 다시 그의 얼굴로 올라왔다. 그 짧은 움직임 안에 너무 많은 말이 담겨 있어서, 건우는 순간 더 이상 질문을 이어갈 수 없었다.둘 사이에 짧은 침묵이 내려앉았다.그 침묵은 불편했지만, 이상하게도 이전과는 조금 달랐다. 감추기 위한 침묵이라기보다, 서로가 서로 안의 어떤 부분을 너무 선명하게 봐버린 뒤에 생기는 정적에 가까웠다.건우는 아주 늦게서야 입을 열었다.“오늘…”하나가 조용히 그를 바라봤다.건우는 시선을 잠깐 내렸다가 다시 들었다.“형 목소리 들었어.”그 말이 떨어진 순간, 하나의 표정이 처음으로 눈에 띄
하나는 이번에는 조금 더 오래 침묵했다.그녀는 시선을 컵에 두고 있었고, 손끝으로 컵 가장자리를 아주 느리게 쓸고 있었다.유리 표면에 맺혀 있던 작은 물기가 손끝에 묻었다. 그 동작은 너무 조용해서, 오히려 지금 그녀가 말을 고르고 있다는 사실을 더 선명하게 보여줬다.“사람마다 다 다르게 대하긴 했는데.”하나가 마침내 말했다.“그게… 그 사람 마음이 움직여서 다르게 대하는 건 아니었던 것 같아.”“그럼.”“필요한 방식으로.”건우는 그 말 앞에서 아무 반응도 하지 못했다.필요한 방식으로. 오늘 하루 동안 여러 번 비슷한 결의 문장을 들었다. 정리. 결재선. 선 넘기 전에 자른다.감정 섞이면 일이 커진다. 그리고 지금 하나의 입에서 나온 이 말까지.윤신우는 사람을 사람으로 보기보다, 상황 안에 배치된 변수처럼 다뤘을지도 모른다.그 생각이 떠오르는 순간, 건우는 자기 안쪽이 아주 얇게 식어가는 걸 느꼈다.그는 조심스럽게 다음 질문으로 넘어갔다.“너한테도?”하나의 손이 멈췄다.정말로 아주 잠깐, 컵을 쥐고 있던 손끝이 그대로 굳었다. 건우는 그 짧은 멈춤을 보고 나서야 자기가 얼마나 직접적인 질문을 던졌는지 뒤늦게 깨달았다. 하지만 이미 말은 나온 뒤였다.하나는 곧바로 대답하지 않았다.건우는 괜히 후회 비슷한 걸 느꼈다. 지금 자기가 원하는 건 정답이 아니었다. 단서를 확인하고 싶은 마음과, 하나를 다치게 하고 싶지 않은 마음이 계속 어긋나고 있었다. 그런데 그 어긋남 자체가 이미 너무 늦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한참 뒤에야 하나가 아주 낮게 말했다.“모르겠어.”건우는 그 대답이 전부가 아니라는 걸 거의 본능적으로 느꼈다.하나는 고개를 조금 숙인 채 덧붙였다.“처음엔… 아니라고 생각했으니까.”건우는 숨을 멈춘 듯 그녀를 바라봤다.처음엔 아니라고 생각했다는 말은,어느 순간부터는 아니라고 말할 수 없게 됐다는 뜻이기도 했다.하나는 여전히 컵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그 안
건우가 집에 들어왔을 때는 이미 해가 기울어 있었다.낮 동안 맑아졌던 하늘은 저녁이 가까워지면서 다시 흐려졌고, 창밖에는 비 대신 축축한 어둠이 천천히 내려앉고 있었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익숙한 집 안 냄새가 먼저 밀려왔지만, 이상하게도 그날은 그 익숙함이 조금도 편안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익숙한 것일수록 더 조심해야 하는 기분이 들었다. 잘 아는 얼굴, 잘 아는 목소리, 잘 안다고 믿어왔던 관계들이 요즘 들어 자꾸만 낯선 방향으로 틀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거실은 조용했다.주방 쪽 조명만 켜져 있었고, 텔레비전 소리도 없었다. 하나는 식탁 끝에 앉아 있었다. 노트북을 펴놓고 있었지만 화면은 한참 전부터 같은 페이지에 멈춰 있는 것처럼 보였다. 건우가 들어오는 소리에 그녀는 고개를 들었다.“왔어?”짧고 평범한 인사였다.그런데 건우는 그 목소리를 듣는 순간, 오늘 오후 카페에서 들었던 형의 음성이 아주 짧게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가는 걸 느꼈다. 둘은 전혀 다른데, 이상하게도 그 직후부터는 하나의 말투 하나, 호흡 하나까지 괜히 더 예민하게 들렸다. 누군가의 목소리를 의심하기 시작하면, 그 사람의 모든 문장이 이전과 같은 의미로 들리지 않게 되는 순간이 있다.건우는 신발을 벗고 천천히 안으로 들어왔다.“일은?”하나가 묻자, 그는 재킷을 벗어 소파 팔걸이에 걸치며 짧게 답했다.“대충.”하나는 더 묻지 않았다. 그 대신 시선이 잠깐 그의 얼굴 위에 머물렀다. 평소 같았으면 그냥 지나쳤을 정도의 짧은 확인이었지만, 지금의 건우는 그런 짧은 시선에도 괜히 의미를 읽으려는 자기 자신을 느끼고 있었다.그는 냉장고에서 물병을 꺼내 컵에 따랐다. 유리컵에 물이 차오르는 소리가 주방 안에 얇게 퍼졌다. 그 소리조차 괜히 길게 느껴졌다.“하나야.”건우가 물컵을 손에 쥔 채 불렀다.하나는 고개를 들었다.“응?”건우는 바로 말을 잇지 못했다. 차라리 자료를 다시 보는 건 쉬웠다. 숫자와 흔적은 조용하
그 목소리를 듣는 순간 건우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너무 다른 두 목소리가 머릿속에서 겹쳤기 때문이다.형의 차갑게 정리된 목소리와, 지금 수화기 너머에서 들려오는 하나의 목소리. 둘은 전혀 다른데, 이상하게도 방금 전 녹음 속 문장을 들은 직후라 그런지, 하나의 숨소리까지도 평소보다 더 가깝게 느껴졌다.“건우야?”하나가 다시 불렀다.건우는 그제야 입을 열었다.“하나야.”자기 입에서 그 호칭이 나간 순간, 이유 없이 가슴 안쪽이 서늘해졌다. 예전에는 아무 의미 없이 부르던 말이었는데, 요즘 들어서는 그 호칭이 자꾸 둘 사이의 거리를 확인하는 말처럼 들렸다. 가까워질수록 오히려 더 아프게 만드는 이름.“왜요. 무슨 일 있어?”건우는 창밖을 한 번 봤다. 유리창 너머로 사람 몇 명이 지나가고 있었고, 그 위로 낮의 빛이 흐릿하게 내려앉아 있었다.“아니.”대답은 그렇게 했지만, 목소리가 평소보다 조금 느렸던 건 본인도 느꼈다.“그냥… 좀 늦을 것 같아서.”전화기 너머에서 잠깐 침묵이 흘렀다.하나는 그 짧은 공백 뒤에 아주 낮게 물었다.“무슨 말 들었어?”건우는 순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그 질문은 너무 정확했다.봤어요도 아니고, 찾았어요도 아니었다.‘무슨 말 들었어.’건우는 수화기 너머 조용한 숨소리를 들으며, 자기 손끝이 다시 차갑게 식는 걸 느꼈다. 하나는 지금 정말로 짐작해서 묻는 걸까. 아니면 자신도 모르게, 어떤 단어를 먼저 알고 있어서 그렇게 입 밖으로 꺼낸 걸까.건우는 아주 천천히 물었다.“왜 그렇게 물어.”그때 하나가 말을 잇지 못했다.정말 짧은 정적이었다. 그러나 그 짧은 멈춤 안에는 너무 많은 것이 들어 있었다. 건우는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수화기 너머로 아주 얕게 숨을 들이쉬는 소리, 무언가를 고르다가 결국 다른 쪽 문장을 택하는 사람의 침묵.하나는 곧 평소보다 조금 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아니, 그냥… 목소리가 그래 보여서.”건우는 대답하지 않았다.그는
시신을 실은 차량이 골목을 빠져나갈 때까지,건우는 비를 맞은 채 그대로 서 있었다.경광등 불빛이 젖은 도로 위에 번졌다가 사라졌다.형은 그렇게 떠났다.설명도, 변명도 없이.경찰은 현장을 통제했고, 필요한 절차를 간단히 설명했다.참고인 조사 일정이 잡힐 거라고 했다.말은 또렷했지만, 건우의 귀에는 제대로 들어오지 않았다.남은 건 한 문장뿐이었다.저녁 8시 전후.그 시간에 그는 집에 있었다.침대에 누워,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하나는 경찰의 안내를 받아 현관을 나왔다.비는 여전히 세게 내리고 있었고,그녀의 코
그녀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어딘가 힘이 빠져 있었다.밤이 깊어지고, 어둠이 가득한 방, 건우는 숫자를 다시 적었다.9:129:189:37그리고 그 옆에 한 줄을 덧붙였다.‘왜.’-형은 왜 전화했는가.-위험을 알리기 위해?-아니면 누군가의 도착을 확인하기 위해?그는 처음으로 그 가능성을 떠올렸다.형이 전화한 건 도움을 요청하기 위해서가 아니라,‘시간을 맞추기 위해서’였을 수도 있다면.그 생각은 섬뜩했다.만약 누군가와 약속이 있었다면.9시 18분은 우연이 아닐지도 모른다. 건우는 펜을 내려놓았다.기억은
비는 오지 않았는데도, 저녁 공기가 눅눅했다.건우는 창문을 열어두고도 답답함이 가시지 않는 걸 느꼈다.거실 테이블 위에는 여전히 숫자가 적힌 메모가 놓여 있었다.9:129:189:37그 아래, 어젯밤 그가 덧붙인 한 줄.‘조용했다.’그는 그 문장을 손가락으로 천천히 짚어보았다.조용했다면, 형은 움직이지 않았다.움직이지 않았다면, 누군가를 맞이하고 있었을 가능성이 더 크다.그 생각이 목을 죄었다.하나는 부엌에서 설거지를 하고 있었다.물 흐르는 소리가 규칙적으로 이어지는…건우는 문득 물었다.“그날… 진동 느
밤은 쉽게 오지 않았다.건우는 거실 소파에 앉은 채, 불을 켜지도 끄지도 못한 상태로 시간을 흘려보냈다.문은 안쪽에서 잠겨 있었다.하나의 말. 나가려는 목소리였다.유림의 말. 두 문장이 서로를 부정하고 있었다.형이 나가려 했다면, 문은 열렸어야 한다.문이 잠겨 있었다면, 형은 나가지 않았다.그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혹시 문을 잠근 사람이, 형이 아닐 수도 있다면. 그 생각은 곧바로 밀어냈다.너무 빨랐다. 너무 직접적이었다.아침, 하나는 평소보다 더 조용했다.부엌에서 접시를 정리하는 소리가 유난히 또렷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