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8년의 짝사랑을 폐기 처분합니다: Chapter 121 - Chapter 130

176 Chapters

제121화

현관까지 걸어갔던 남자의 발걸음이 우뚝 멈췄다.구태윤이 고개를 돌려 정루아를 바라보았다. 칠흑 같은 눈동자는 속내를 알 수 없었다.그는 손을 뻗어 넥타이를 거칠게 잡아당기더니, 셔츠 단추를 풀며 다시 그녀를 향해 걸어왔다.정루아는 위험을 감지했다. 방금 한 말을 당장이라도 주워 담고 싶었다.이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외쳤다.“오지 마! 나 출근해야 한단 말이야.”겁에 질린 여자의 얼굴을 보자 구태윤의 눈동자가 날카롭게 번뜩였다.“앞으로는 그딴 소리 다신 하지 마.”그가 덤덤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네가 방금 한 말, 몸소 증명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으니까.”약 먹을 일도 없을 테니 마음 놓고 밀어붙이겠다는 뜻이었다.정루아는 입술을 깨물며 끓어오르는 감정을 억눌렀다.그가 문을 닫고 나가는 것을 확인하고서야 다시 침대에 걸터앉았다. 길게 드리워진 속눈썹 아래로 씁쓸함과 슬픔이 묻어났다.어젯밤 구태윤이 했던 말들, 비록 증거까지 보여주긴 했지만 그녀는 여전히 믿을 수 없었다.겨우 그까짓 일 때문에 발목이 묶여 이혼 못 하는 신세라니.지독한 무력감이 그녀를 덮쳤다.그때, 휴대폰 벨 소리가 울렸다.화면에 뜬 이름은 정석주였다.“여보세요.”전화를 받은 그녀의 목소리는 한없이 차가웠다.정석주가 짧게 명령했다.“병원으로 와.”“왜요? 무슨 일인데요?”아까보다 훨씬 더 냉랭해진 말투였다.“정루아! 아버지한테 어디서 그따위 태도로 말대꾸야? 일이 없으면 연락도 못 해? 네 엄마가 아직 병원에 누워 있는데 어쩜 들여다볼 생각조차 안 하니?”정석주의 가식적인 온화함은 3초도 가지 않았다. 머리끝까지 치밀어 오른 분노가 기어이 폭발하고야 말았다.정루아는 휴대폰을 꽉 쥔 채 쏘아붙였다.“당신들한테는 눈에 넣어도 안 아픈 딸이 이미 한 명 있잖아요. 내가 가든 말든 무슨 상관이죠?”“이 계집애가...!”정석주는 휴대폰을 집어던지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당장 기어와! 싫으면 네 지분까지 몽땅 시연이한테 넘겨버릴 테니까, 그런 줄 알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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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2화

두 사람은 서로 눈빛을 교환했다. 눈동자 속에는 알 수 없는 감정이 스쳐 지나갔다.정석주가 먼저 말을 꺼냈다.“시연아, 그게 무슨 대단한 일이라고. 우리 식구가 된 이상 당연히 챙겨줘야지. 그러니까 괜한 고민 하지 마. 경영 좀 모르면 어떠니? 내가 사람을 구해서 회사 맡기면 되니까 얼른 사인해.”임혜숙도 곁에서 한마디 거들었다.“맞아, 하준이도 하루가 다르게 자라는데 네가 언제까지 애 옆에만 붙어 있을 수는 없잖니. 너도 자기 인생 살아야지. 이게 다 네 든든한 버팀목이 돼줄 거다.”정시연은 크게 감동한 표정이었다.“아빠, 엄마... 저를 걱정해주셔서 정말 고마워요.”이내 손으로 눈가를 살짝 훔치며 말했다.“하지만 정말 괜찮아요. 전 지금 가진 것만으로도 이미 충분히 만족해요. 괜히 이런 일로 두 분 번거롭게 해드리고 싶지도 않고요. 그러니까 더는 말씀하지 마세요. 저 사인 안 할 거니까.”“시연아, 네가 너무 일찍 철이 들어버린 것 같아서 엄마 마음이 참 그래.”임혜숙은 그녀의 손을 꼭 잡았고, 눈빛에는 애틋함이 가득했다.정석주도 한마디 보탰다.“네가 우리 친딸이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기가 막혀서, 원.”곁에서 한 편의 쇼를 지켜보던 정루아가 대놓고 콧방귀를 뀌었다.“흥, 가식덩어리들.”말을 마치고는 곧장 뒤돌아 가버렸다.“저 계집애가 정말!”정석주는 멀어져 가는 정루아의 뒷모습을 보며 미간을 팍 찌푸렸다. 대놓고 불쾌한 기색이었다.임혜숙은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었다.“시연아, 네 동생이 철이 없어서 그래, 우리가 너무 받아주며 키웠나 봐. 혹시라도 너한테 심술부려도 마음에 담아 두지 마. 엄마가 대신 사과할게, 응?”정시연은 눈시울을 붉히며 고개를 숙였다.“저 화 안 났어요. 그래도 제 동생이잖아요.”임혜숙은 그제야 안도하며 환하게 웃었다.“그래, 역시 우리 시연이가 제일 착하네.”...정루아는 기분이 무척 좋았다.어쨌거나 지분을 챙겼고, 정시연은 아직 돈 한 푼 받지 못했다.무슨 이유로 거절했는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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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3화

이연희가 말했다.“밑져야 본전이니까 일단 한번 찾아보자.”정루아가 고개를 끄덕였다.“응, 알았어.”이연희가 문득 화제를 돌렸다.“참, 그리고 너 전에 얘기했던 거 있잖아. 외할머니께서 갖고 계셨다던 사파이어 귀걸이 말이야. 예전에 난리 통에 잃어버려서 평생 찾으셨다고 했잖아. 내가 혹시 몰라 큰 경매장 정보 계속 눈여겨봤거든? 근데 최근에 비슷하게 생긴 게 딱 올라왔더라고. 사진 보낼 테니까 얼른 봐봐. 외할머니 귀걸이 맞는 것 같아?”순간, 정루아의 눈이 번쩍 뜨였다.“대박, 얼른 보내줘!”사진을 확인한 그녀는 단박에 알아보았다.바로 이거였다. 외할머니의 귀걸이가 확실했다.집에서 정시연을 입양한 이후로 정루아는 외할머니댁에서 자주 지내곤 했었다.외할머니는 늘 그녀를 품에 안고 옛날이야기를 해주며 소장한 골동품들을 구경시켜 주셨는데, 그 귀걸이 사진을 볼 때마다 깊은 한숨을 쉬었다.그건 외할아버지한테서 받은 프러포즈 선물이었다.나중에 잃어버리는 바람에 수십 년 동안 찾아 헤맸지만, 끝내 찾지 못해 가슴 한구석에 한으로 남은 물건이었다.정루아가 다급하게 말했다.“연희야, 이거 맞아! 어느 경매장에서 올라온 거야? 경매는 언제 시작한대?”이연희가 대답했다.“자세한 일정은 문자로 보내줄게.”“응, 고마워.”내용을 확인해 보니 경매는 바로 사흘 뒤였다.마침 결혼반지를 처분한 돈도 들어올 테고, 정석주와 구태윤에게서 뜯어낸 것까지 합치면 이 귀걸이를 낙찰받기엔 충분했다.그녀는 퇴근 후 집에 돌아와 대충 가방만 내려놓고 다시 밖으로 나왔다.그러고는 바로 허도준에게 연락했다.레스토랑에 마주 앉은 두 남녀.허도준은 의아한 눈빛으로 정루아를 바라보았다.“당분간 이혼 안 하겠다더니, 마음 바뀐 거야?”정루아가 말했다.“응, 갑자기 일이 좀 생겨서 그냥 소송하는 게 답이겠더라고. 혹시 지금 시간 괜찮아? 바쁘면 다른 방법을 알아볼게.”허도준이 싱긋 웃었다.“시간이야 당연히 있지. 내가 알아서 서류 접수할 테니까 조금만 기다려 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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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4화

정시연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홀 안을 둘러보다가, 이내 창가 자리에 앉아 있는 정루아를 발견했다.웬 낯선 남자와 마주 앉아 식사하는 중이었다.그녀는 눈썹을 치켜올리더니 묵묵히 구태윤의 뒤를 따랐다.정루아 역시 구태윤이 들어오는 걸 봤지만, 모른 척 시선을 내리깐 채 부지런히 수저를 움직였다.“도준아.”하지만 구태윤은 바로 옆 테이블에 떡하니 자리를 잡더니, 허도준에게 아는 체를 했다.고개를 돌린 허도준의 눈이 휘둥그레졌다.“어? 너도 여기 밥 먹으러 왔냐? 이 꼬맹이는 누구...?”그의 시선이 구태윤의 품에 안긴 아이에게 닿았다.“조카야.”구태윤이 무덤덤하게 대답했다.“아저씨, 안녕하세요.”구하준이 싹싹하게 인사를 건넸다.그러고는 정루아를 보며 머뭇거리더니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숙모, 안녕하세요...”그 말에 허도준이 풉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구태윤이 미간을 찌푸리며 엄하게 말했다.“그렇게 부르는 거 아니야. 나한테 작은아빠라고 하니까, 숙모한테도 작은엄마라고 불러야지.”구하준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이었지만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작은엄마, 안녕하세요.”정루아가 무덤덤한 눈빛으로 아이를 힐긋 쳐다보았다.“이제 나 안 무서운가 보네?”그 말에 구하준은 저도 모르게 구태윤의 품으로 파고들었다.구태윤이 눈을 가늘게 뜨고 정루아를 쏘아보며 한마디 했다.“애 좀 그만 괴롭혀.”“하.”정루아가 냉소를 지었다.그러고는 옆 테이블에 옹기종기 앉아 있는 세 사람을 바라보다가 허도준에게 슬쩍 턱짓했다.“도준아, 저기 좀 봐봐. 셋이 꼭 한 가족 같지 않냐?”허도준이 세 사람을 찬찬히 뜯어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어, 그러네.”구태윤의 눈빛이 싸늘하게 가라앉았다.“너, 사는 게 지겹냐?”허도준은 능글맞게 웃어넘겼다.“에이, 틀린 말한 것도 아닌데 뭐. 셋이서 같이 걸어 다니면 십중팔구 한 가족으로 오해할걸? 게다가 이 꼬맹이는 너랑 완전 판박이잖아. 조카라고 안 밝히면 백이면 백, 다 네 친자식인 줄 알겠구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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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5화

허도준의 시선이 정시연의 얼굴에 머물렀다. 입가에는 속을 알 수 없는 묘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글쎄. 내가 루아를 도와주길 바라는 거야? 아니면 반대야?”정시연은 세상 무해하고 순진한 얼굴로 생긋 웃었다.“난 그냥 동생이 걱정돼서 물어본 거니까 괜한 오해하지 마.”“그렇구나.”허도준이 고개를 끄덕이며 단칼에 잘랐다.“그럼 난 더더욱 해줄 말이 없네.”정시연은 속으로 치밀어 오르는 불쾌감을 꾹 누르며 그를 가만히 응시했다.그러다 문득 미끼를 던졌다.“사실 너도 정루아 좋아하는 거 맞지?”허도준은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묵묵히 밥을 먹었다.정시연은 구하준을 제 옆으로 끌어당겨 반찬을 얹어주며 말을 이어갔다.“걔가 워낙 성격도 밝고 시원시원하잖아. 꼭 햇살 같달까? 정 많고 의리도 넘쳐서, 솔직히 어떤 남자가 봐도 탐낼 만한 해.”허도준은 여전히 대꾸가 없었다.슬슬 민망해진 정시연이 허도준의 눈치를 살폈다.자신을 대할 때는 이토록 차갑고 거리감을 두면서, 정루아 앞에서는 생글생글 웃어주다니.그야말로 하늘과 땅 차이의 대접이었다.정시연의 얼굴이 서서히 굳어졌다....정루아가 레스토랑을 나와 막 택시를 잡으려던 찰나, 누군가에게 손목을 덥석 붙잡혔다.깜짝 놀라 고개를 돌린 그녀는 구태윤의 깊고 서늘한 눈빛과 마주했다.“이거 안 놔?”정루아가 미간을 찌푸리며 손을 빼내려고 버둥거렸다.하지만 구태윤은 손아귀에 힘을 주며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으르렁거렸다.“그 자식이랑 무슨 얘기 했어?”“신경 꺼!”정루아는 짜증 섞인 목소리로 쏘아붙였다.“이거 놓으라고.”“나, 네 남편이야. 밖에서 딴 남자랑 단둘이 밥 먹으며 비밀 얘기까지 나누는데, 내가 눈이 안 돌아가게 생겼어?”구태윤이 그녀를 앞으로 잡아당겼다.“루아야, 우리 아직 이혼한 거 아니야.”정루아가 그를 바라보며 조소를 흘렸다.“왜? 내가 다른 남자 좋아할까 봐 겁나?”그 말에 구태윤의 얼굴이 순식간에 일그러졌다.“너 진짜 그러기만 해 봐.”“당신은 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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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6화

구태윤은 다시 차에 올라탔다. 준수한 얼굴은 심연처럼 음침했고, 차 안의 공기는 얼어붙은 듯 무거웠다.한참을 달린 후에야 그는 입을 열었다.“헛수고하지 마. 네가 무슨 짓을 했는지 결국 다 들통나게 돼 있어.”하지만 정루아는 창밖만 내다볼 뿐, 대꾸 한마디 안 했다.구태윤은 미간을 찌푸리며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가슴속이 몹시 답답하고 화가 치밀었다.머릿속으로는 자꾸 정루아와 허도준이 나란히 앉아 밥을 먹던 모습이 생각났다.입가에 미소를 띤 채 다정한 눈빛을 보내던 그녀가 떠올라 여간 불쾌한 게 아니었다.정작 자신에게 웃어준 게 언제였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돌이켜 보면 결혼기념일 밤만 해도 그에게 딱 붙어 있었던 정루아였다.그런데 시간이 얼마나 지났다고 관계가 180도 뒤집힌 건지.구태윤은 이 상황이 몹시 낯설고 불편했다.차가 아파트 지하 주차장에 멈춰 섰다.정루아가 문을 열고 내리려 했지만, 차 문은 잠겨 있었다.그녀가 고개를 돌려 싸늘한 눈빛으로 노려보았다.“문 열어.”구태윤은 정루아를 빤히 응시했다.“꼭 이럴 때만 나한테 먼저 말을 걸지?”정루아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이내 시선을 아래로 떨구며 말했다.“구태윤, 나 정말 지쳤어. 이렇게 붙잡고 늘어져 봐야 아무 소용 없어.”“겨우 8년 가지고 지쳤다고? 그럼 앞으로 남은 평생은 어쩔 건데?”구태윤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우리 평생을 함께하기로 약속했잖아.”그러자 정루아가 맞받아쳤다.“내가 말한 평생은 ‘너와 나’단둘이었어. 다른 사람이 낀 게 아니라.”“우리 사이에 다른 사람 같은 건 처음부터 없었어.”정루아는 피곤한 듯 눈을 감아버렸다.“그냥 이혼하자. 너랑 말 섞는 것도 이제 지쳐.”“싫어.”그녀는 더 대꾸하지 않았다. 초점 없는 눈으로 앞만 바라볼 뿐, 차 안에는 다시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구태윤은 감정이 지워진 여자의 얼굴을 내내 응시했다. 한층 가라앉은 눈빛은 용암처럼 뜨거웠다.그러다 문득 울컥 화가 치밀었다.이내 안전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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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7화

탁!술잔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자 청량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구태윤의 검은 눈동자가 한층 더 차갑게 가라앉았다.그는 음침한 시선으로 허도준을 매섭게 노려보며 읊조렸다.“네가 루아를 돕겠다고? 그럼 나는?”허도준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덤덤하게 받아쳤다.“넌 네 형수가 있잖아.”구태윤의 눈빛이 순식간에 싸늘하게 식어갔다.“너 진짜 겁 상실했구나.”허도준이 입꼬리를 올렸다.“태윤아, 그동안 인생 너무 순탄하게만 살아서 감을 못 잡나 본데, 정루아가 널 사랑하니까 네가 무슨 짓을 해도 곁에 남을 줄 알았지? 루아도 사람이고 감정이 있어. 게다가 정씨 자매가 어떤 사이인지 모르는 것도 아니잖아. 그런데도 넌 매번 루아 기분은 무시하고 정시연을 만나왔어. 당사자 속이 정녕 어땠을지 생각이나 해봤냐?”그러더니 잠시 말을 멈추고 한숨을 푹 쉬었다.“나야 너희 둘 다 오래 본 친구지만 이번만큼은 상처받은 사람 편에 서야겠어. 안 그러면 다들 루아를 만만하게 볼 텐데, 너무 가엾잖아.”“정루아는 내 아내야. 누가 감히 루아를 건드려?”구태윤이 오만하게 받아쳤다.“우리 부부 일에 다른 인간 끼어드는 거 딱 질색이야. 허도준, 너 지금 친구고 뭐고 눈에 뵈는 게 없냐? 나랑 진짜 끝까지 가보려고?”허도준의 얼굴에서 미소가 싹 사라졌다.“내가 끝까지 참견하겠다면?”“어디 한 번 해보든가.”두 남자의 시선이 공중에서 정면으로 충돌했다.룸 안을 채우던 미묘한 여유는 온데간데없었고, 사방에 불꽃이 튀는 듯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다.한참이 지나서야 허도준이 먼저 침묵을 깼다.“너 그렇게 독불장군처럼 굴수록 루아를 더 멀리 밀어내는 꼴밖에 안 돼.”“네가 상관할 바 아니야.”허도준은 앞에 놓인 술잔을 들어 단숨에 비워버린 뒤, 자리에서 일어나 미련 없이 룸을 나갔다.구태윤 역시 술을 들이켰다.한 잔, 또 한 잔 연거푸 들이붓는 그의 눈빛이 갈수록 차갑고 깊어졌다.그때, 휴대폰 벨 소리가 울렸다.화면을 보니 정시연의 전화였다.“네, 형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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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8화

정루아의 입술이 굳게 다물어졌다.이혼 소송을 제기하려던 길마저 또다시 막혀버렸다.대체 어떻게 해야 그 지긋지긋한 남자와 갈라설 수 있단 말인가.치밀어 오르는 두통에 정루아는 관자놀이를 짚었다....오후가 되자, 이연희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오늘 밤이 바로 경매잖아. 준비는 다 됐어?”정루아가 대답했다.“응.”이연희가 말했다.“그럼 내가 지금 데리러 갈게.”“알았어.”정루아는 평소보다 일찍 퇴근해 곧장 경매장으로 향했다.웅장한 규모의 행사장 안은 이미 수많은 참석자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무대 위에서는 사회자가 분주히 움직였고, 사람들의 손에는 저마다 경매품이 인쇄된 팸플릿이 들려 있었다.이연희가 팸플릿에 실린 사파이어 귀걸이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이거 시작가가 300만 원이고, 호가단위가 50만 원씩이네. 얼추 800만 원 선에서 낙찰받을 수 있을 것 같아.”정루아 역시 시선을 팸플릿에 고정한 채 결의를 다졌다.바로 그 순간, 장내 분위기가 술렁이기 시작했다.영문을 몰라 고개를 돌린 두 사람의 눈에 문을 열고 들어오는 구태윤의 모습이 들어왔다.몸에 맞춘 듯 정교하게 재단된 블랙 수트와 수려한 이목구비.그저 걸음을 옮길 뿐인데도 범접할 수 없는 고귀한 기품이 흘러넘쳤다.그의 팔짱을 낀 채 나란히 걸어 들어오는 정시연은 검은색 드레스 차림으로 우아하고 화사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저 인간 말종들 진짜...!”두 남녀를 발견한 이연희가 참지 못하고 욕설을 내뱉었다.하지만 정루아는 괜스레 불길한 예감이 들어 팸플릿을 꽉 움켜쥐었다.그가 왜 여기 온 걸까? 그것도 정시연을 데리고.이연희는 여전히 구시렁거렸다.“아니, 왜 가는 곳마다 저 쓰레기들이 눈에 밟히는 거야! 귀신이 곡할 노릇이네.”정루아가 이연희의 손목을 꽉 붙잡았다. 잔뜩 가라앉은 목소리에는 긴장감이 서려 있었다.“저 사람들이 여기 왜 왔을까?”“내 말이! 불륜 저지른 게 무슨 벼슬이라고 동네방네 소문 못 내서 안달인 건지. 진짜 뻔뻔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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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9화

정루아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번호판을 부서져라 움켜쥔 그녀의 머릿속에 번개처럼 스치는 이름이 있었다.‘구태윤.’이 사파이어 귀걸이는 애초에 대단한 수집 가치가 있는 물건도, 특별한 유래가 깊은 유물도 아니었다.아무리 높게 잡아도 800만 원 선.그 이상을 부르는 건 미련한 짓이었기에 600만 원에서 이미 다른 입찰자들이 발을 뺀 것이었다.뒤이어 소장 가치가 어마어마한 골동품들이 줄을 이어 대기 중인 상황에서 이런 무모한 짓을 저지를 사람은 오직 한 명이었다.정루아는 어금니를 악물었다. 잘게 떨리는 눈동자에 서슬 퍼런 분노가 피어올랐다.“1,000만 원 한 번!”사회자의 우렁찬 외침에 정루아는 다시 번호판을 치켜들었다.“1,050만 원!”한편, 행사장 반대편 객석.낙찰을 확신하던 정시연은 예상치 못한 복병의 등장에 당황함을 금치 못했다.이내 곁에 앉은 구태윤의 눈치를 살폈다.여기서 그가 손을 털까 봐 가슴이 조마조마했다.정시연이 조심스럽게 속삭였다.“태윤 씨, 가격이 너무 터무니없이 올라가면 그냥 포기해요. 귀걸이 한 쌍에 이 정도 거금을 쓰는 건 아무래도 좀...”이보전진을 위한 일보후퇴 전략이었다.어스름한 조명 아래, 구태윤의 옆얼굴은 그 어떤 감정도 읽어낼 수 없었다.그는 정시연의 말에 대꾸조차 하지 않은 채 그저 기계적으로 번호판을 다시 한번 높이 들어 올렸다.“1,100만 원!”장내가 웅성거림으로 가득 찼다.“저 정도로 특별한 귀걸이었어?”“대체 왜 이렇게까지 값을 올리는 거지?”사람들은 술렁이며 양쪽을 번갈아 살폈다.직전까지 입찰했던 이가 과연 이 게임을 이어갈지 숨을 죽인 채 지켜보았다.정시연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지만, 겉으로는 짐짓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태윤 씨, 이건 너무 과해요. 그냥 포기해요, 우리.”그러나 구태윤은 덤덤한 어조로 대꾸할 뿐이었다.“내 목숨의 가치가 고작 1,000만 원밖에 안 됩니까?”정시연은 할 말을 잃고 슬그머니 입을 다물었다.정루아 역시 지지 않고 번호판을 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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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0화

정루아는 휴대폰을 부서져라 꽉 쥐었다.“1,800만 원!”전화가 끊김과 동시에 사회자의 목소리가 다시 울려 퍼졌다.정루아는 왈칵 차오르는 눈물을 간신히 참으며 다시 한번 번호판을 치켜들었다.하지만 승패는 이미 정해졌다.정시연이 원하는 이상 구태윤에게 2,000만 원 따위는 푼돈에 불과했으니, 기꺼이 그녀의 소원을 들어줄 터였다.그렇다면 아내인 자신은?정루아는 참담함에 눈을 질끈 감았다.“2,000만 원!”종착지에 다다른 액수가 선언되자, 그녀의 손에서 힘이 탁 풀렸다.번호판이 손바닥 사이로 스르륵 미끄러져 바닥으로 떨어졌다.결국 외할머니의 유품을 지켜내지 못했다.평생 외할아버지를 그리워하며 낡은 사진 속 귀걸이를 멍하니 바라보던 분이셨다.그 아름다웠던 시절의 유일한 흔적조차 찾아드리는 데 실패하다니.자신이 이토록 무능하고 쓸모없을 줄이야.이연희가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으며 안타까운 눈빛으로 바라보았다.“루아야, 기죽지 마! 낙찰 못 받았으면 뭐 어때, 가서 도로 뺏어오면 되지. 구태윤 그 인간이 무슨 권리로 부부 공동재산을 마음대로 써서 딴 년한테 선물을 줘? 저쪽에서 상도덕 없이 나오는데, 너도 그냥 막무가내로 나가.”그 말에 정루아의 눈동자가 다시금 생기가 돌았다.“그래, 네 말이 맞아.”이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곧장 대기실을 향해 걸어갔다.이연희는 그녀의 뒤를 바짝 따르며 연신 힘을 불어넣어 주었다.대기실 스태프는 이미 귀걸이를 정시연의 손에 인도한 상태였다.구태윤은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서서 누군가와 통화를 하고 있었다.정시연은 만면에 미소를 띠고 상자를 소중히 품에 안은 채 그의 곁으로 다가갔다.“태윤 씨, 내 소원을 들어줘서 정말 고마워요.”구태윤은 그녀를 덤덤하게 바라보며 대꾸했다.“이걸로 과거의 빚은 전부 청산한 겁니다.”정시연의 안색이 순간 굳어졌으나, 아무렇지 않은 척 말을 이었다.“태윤 씨, 왜 자꾸 지난 일에 얽매여 있어요? 난 대가를 바란 적 한 번도 없어요.”“내가 남한테 신세 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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