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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l Chapters of 피안을 거슬러: Chapter 291 - Chapter 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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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91화

정왕은 유지영을 바라보며 말했다."네가 비록 준형이와 연이 없다고 해도, 그 아이를 이리 모질게 사지로 몰아넣을 필요까지는 없지 않느냐! 배현준 그 방탕한 놈은 언젠가 널 파멸로 몰고 갈 것이다."그 말을 들은 유지영은 천천히 시선을 거두었다."애초에 파혼을 요구한 것은 준형이의 잘못이 맞다. 네가 이번에 준형이를 도와준다면, 훗날 네가 배현준과 갈라선 뒤 정왕부로 들어오는 것을 윤허하마."정왕은 진지한 목소리로 그녀를 회유했다.풋!유지영은 참지 못하고 실소를 터뜨렸다.사람이 어찌 이리 뻔뻔한 말을 지껄일 수 있단 말인가…!"정왕 전하의 그 말씀은, 저더러 당장 전각에 들어가 그 서신들을 제가 썼다고 거짓 자백을 하라는 뜻입니까? 그런 다음 제 막대한 혼수로 정왕부의 빚을 갚고 위기에서 구해주면, 정왕부에서 제게 첩실의 신분을 내려 배준형을 모시게 해주겠다는 말씀인가요?"유지영은 단 몇 마디로 정왕의 속내를 까발렸다.속내를 들킨 정왕의 얼굴이 순식간에 시뻘겋게 달아올랐다.그가 생각한 바와 정확히 일치했기 때문이었다.장부상의 빈 구멍을 메우기에는 이미 써버린 보물의 액수가 너무 커서 정왕부 혼자 감당하기에는 벅찼다.만약 유지영이 나서서 혼수를 보태준다면 일이 훨씬 수월해질 터였다."내... 내 평생 네 공로를 잊지 않으마."정왕이 이를 악문 채 간신히 말을 짜냈다.유지영은 정왕이 단단히 미친 게 아닌가 싶었다.그러지 않고서야 어찌 번듯한 세자비 자리를 내버려 두고, 남의 부군을 유혹했다는 오명까지 뒤집어쓴 채 자신의 혼수까지 바치면서 고작 배준형의 첩이 되라고 할 수 있단 말인가?정왕이 다시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훗날...""훗날이라 한들 배준형이 황자들을 넘어설 수는 없습니다. 정왕께서 하신 말씀을 폐하께서 들으신다면, 정왕부는 남의 죄를 부추겼다는 죄명까지 뒤집어쓰게 될 것입니다."유지영은 단호하게 말을 끊었다.정왕부 사람들은 하나같이 사리 분별을 못 했다.전생에 정왕부에 있을 때도 시아버지는 겉으로는 제 일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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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92화

필적 대조 결과가 나오자, 숙태비의 안색이 급격히 어두워졌다.정왕의 표정도 눈에 띄게 일그러졌다."폐하, 차라리 유선주를 직접 불러 심문하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그러면 진상이 바로 밝혀질 것입니다."배현준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황제에게 고했다.건양제는 고개를 끄덕였다."당장 유선주를 잡아 오거라!"그제야 유지영은 배현준이 왜 갑자기 배준형에게 사사로이 혹형을 가했는지 깨달았다.이 일을 빌미로 숙태비가 유선주네의 재산을 강탈한 일까지 낱낱이 들춰낼 속셈이었던 것이다.결과적으로 배준형은 공연히 매만 맞은 꼴이 되었다.숙태비도 무언가를 직감한 듯 눈꺼풀을 파르르 떨리며, 마음속에서 걷잡을 수 없는 불안감이 밀려왔다.또 한 시간이나 기다린 끝에, 파견되었던 호위가 드디어 돌아왔다."폐하, 유선주네 집은 이미 텅 비어 있었고, 유선주는 며칠 전부터 행방이 묘연하다 합니다."배현준은 곧바로 입을 열었다."그 말을 들으니 생각나는 일이 있습니다. 며칠 전 숙태비께서 호위를 이끌고 유씨 가문 차남댁에 들이닥쳐 막대한 재산을 억지로 빼앗아 가셨고, 그 탓에 차남댁 자식들이 거리에 나앉게 되었습니다. 유정혁의 두 아들은 국공부로 찾아가 무릎을 꿇고 거둬달라 애원했고, 결국 장인어른의 자비로 겨우 머물 곳을 얻었다고 들었습니다."그는 몸을 돌려 안색이 시퍼렇게 질린 숙태비를 똑바로 바라보며 물었다."숙태비 마마, 이 일이 정녕 사실입니까?"숙태비는 술술 떠드는 배현준의 입을 당장이라도 찢어버리고 싶었다.그녀는 가슴을 부여잡은 채 숨을 헐떡였으나, 차마 어떤 반박도 입 밖으로 꺼내지 못했다."숙태비, 어찌하여 그런 짓을 벌인 것이오?"건양제가 물었다.대답은 배현준이 대신했다."배준형이 사사로이 은닉했던 보물을 유선주에게 적잖게 선물로 주었기 때문이지요. 이제 와서 장부의 구멍을 메울 길이 없으니, 억지로 차남댁을 찾아가 빼앗은 것입니다."또다시 보물 이야기가 수면 위로 떠올랐다.건양제의 얼굴이 싸늘하게 굳었다."폐, 폐하. 저는 그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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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93화

배현준은 서 태후가 매질이 너무 가벼웠다고 넌지시 타박하고 있다는 사실을 단번에 알아차렸다.살얼음판 같았던 의정전의 분위기와 달리, 서 태후는 이 일을 대수롭지 않게 넘기는 듯했다.애초에 크게 마음 쓰고 있지 않은 눈치였다.그때 어린 내관이 들어와 아뢰었다."태후 마마, 경군자께서 뵙기를 청합니다."배이수 얘기가 나오자 서 태후는 미간을 찌푸렸다.근래 들어 배이수는 하루에 세 번씩이나 찾아와 뵙기를 청하고 있었다.서 태후에게는 여간 귀찮은 일이 아니었다.아무리 쫓아내도 기어이 버티던 그는, 이번에는 태후의 복을 기원한다며 손수 필사한 경전까지 들고 왔다.서 태후는 기가 막혀 헛웃음을 쳤다."내가 늙어서 눈이 침침한 것도 아니고 이리 정정하거늘, 어찌 경전을 필사해 복을 빈단 말이냐?"그녀는 이제 겨우 서른 남짓한 나이였다. 아래로 줄줄이 딸린 어린 황족들의 기강을 잡기 위해 일부러 나이 들어 보이게 꾸민 것이었다.서 태후의 태도에는 노골적인 혐오감이 묻어났다.두 사람이 자녕궁에서 나왔을 때도 배이수는 그 자리를 떠나지 않고 버티고 서 있었다.배현준 부부를 발견한 배이수는 예전보다 한결 우호적인 태도로 인사했다."현준 형님, 형수님."배현준은 무심하게 고개만 끄덕이고는 그대로 걸음을 옮겼다.배이수가 재빨리 그의 앞을 가로막으며 말했다."형님께서 뛰어난 기마술로 단숨에 무과 장원을 차지하셨다는 소문을 듣고 무척 감탄했습니다. 저도 형님께 기마술과 사격술을 배우고 싶습니다. 이 일은 이미 아바마마께도 말씀드렸습니다."마지막 말이 핵심이었다.그러자 배현준이 입꼬리를 올리며 응했다."그게 뭐 어렵겠느냐. 다만 해마다 말에서 떨어지거나 말발굽에 밟혀 죽는 자가 적지 않다는 것을 명심하고 꼭 조심해야 한다. 정 배우고 싶거든 내일 마장으로 오거라."말을 마친 배현준은 유지영의 손을 이끌고 자리를 떴다.배이수의 안색이 점차 어둡게 굳어졌지만,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주군, 설마 경세자가 감히..."곁에 있던 호위 무사가 조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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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94화

배현준은 욕설을 듣는 데 싫증이 난 지 오래였다. 그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대청 안을 여유롭게 둘러보더니, 담담히 입을 열었다."며칠 후면 경왕부에서 또 혼사를 치르게 되었군요."그 한마디에 경왕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오늘 왕비가 정세자비를 안으로 들인 것은 그저 대문 밖이 소란스러워서 그런 것뿐이다. 그 사람 말을 믿은 것도 아니고, 네 처를 모함해 곤경에 빠뜨리려 한 것도 아니니 억지 부리지 말거라!"배현준은 참지 못하고 실소를 터뜨렸다."압니다. 오가는 사람이 많은 대문 앞에서 소란을 피우니 안으로 들인 것 자체는 잘못이 아니지요. 하지만 제가 하려는 말은 그게 아닙니다."경왕은 의심 가득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배영준의 혼사이니, 경왕비께서도 함께 나와 이야기를 들으시는 편이 좋겠습니다."경왕이 좀처럼 움직일 기미를 보이지 않자, 배현준은 등받이에 몸을 기대고 찻잔을 들어 느긋하게 한 모금 마셨다."좋은 말로 할 때 부르시지요. 나중에 왜 미리 말해주지 않았느냐고 원망하지 마시고요."경왕은 배현준의 속내를 도무지 알 수 없어, 하는 수 없이 시종을 시켜 경왕비를 불러오게 했다."무사히 돌아왔다고?"경왕비는 배현준이 털끝 하나 다치지 않고 돌아왔다는 소식에 적잖이 놀란 듯했다.소월이 답했다."폐하께서 세자에게 율법을 열 번 필사하라는 벌만 내리셨다 합니다."율법 필사라니, 이건 그저 보여주기식 처벌에 불과했다."몇 년간 황성을 떠나 있더니, 갈수록 수완이 좋아지는구나."이제 그녀는 사사건건 배현준의 기세에 눌려, 그저 속으로만 끙끙 앓으며 당하고만 있는 처지였다.새로 들인 며느리 역시 만만한 인물이 아니었다.소월이 위로하듯 말했다."폐하께서 영지로 돌아가는 것을 윤허하시기만 하면, 더 이상 세자의 눈치를 볼 일도 없을 것입니다."그 말을 들으니 경왕비도 속이 답답해졌다.시간이 이렇게나 흘렀건만, 황제는 아직도 영지로 돌아가겠다는 청을 받아들이지 않고 그들을 붙잡아두고 있었다.그때 문밖에서 전갈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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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95화

"이, 이게 왜 네 손에 있느냐?"경왕이 마른침을 삼키자, 배현준이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제 허락 없이는 두 분께서 결코 영지로 떠나지 못하실 겁니다!"말을 마친 그는 뒷짐을 진 채 여유롭게 몸을 돌려 대청을 빠져나갔다.그 뒷모습은 오만하기 짝이 없었다.경왕은 탁자 위에 놓인 상소문들을 바라보며, 누군가에게 뺨이라도 세게 얻어맞은 듯 머릿속이 새하얘졌다.그는 한참 동안 이를 바득바득 갈다가 욕설을 내뱉었다."이런 후레자식을 보았나!"경왕비는 그제야 상황을 확실히 깨달았다.배현준의 심기를 거스르면, 그가 결코 자신들을 가만두지 않으리라는 사실을 말이다."전하, 이를 어쩌면 좋습니까?"그녀는 서러움과 원망으로 인해 속이 부글부글 끓기 시작했다."영준이의 혼례를 정녕 이리 초라하게 치러야 한단 말입니까?"경왕은 이대로 물러설 수 없었다."여봐라! 당장 말을 대령하라!"그는 황제에게 어찌하여 저토록 방자한 자를 이렇게까지 감싸고도는지 직접 따져 물을 작정이었다.그러나 그가 대문을 나서기도 전에, 밖에서 정세자비가 당도했다는 전갈이 왔다.담시령은 시종들의 부축을 받으며 마차에서 내렸다.그녀의 양 뺨은 시뻘겋게 퉁퉁 부어 있었다.고개를 푹 숙인 채 왕부로 들어서는 얼굴에는 굴욕감과 분노가 가득했다.담시령이 황명에 따라 사죄하러 왔다는 얘기를 들은 부관은 즉시 방비각으로 시종을 보냈다.유지영은 하던 일을 멈추고 대청으로 나왔다.수많은 시선이 쏟아지는 가운데, 담시령은 결국 억지로 사과의 말을 내뱉을 수밖에 없었다."지영아, 내가 한순간 눈이 멀어 너를 모함했다. 미안하구나."말을 마친 담시령의 눈빛에는 지독한 원망과 증오가 서려 있었다.유지영은 여유로운 태도로 답했다."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뉘우치는 것도 선행이라 할 수 있지요. 앞으로는 부디 사람답게 처신하길 바랍니다.""너!"담시령의 표정이 험악하게 일그러졌다."정세자비를 밖으로 배웅해 드리거라.""유지영!"담시령은 물러서지 않고 유지영에게 한 발짝 다가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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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96화

담시령은 불현듯 고개를 돌려 유지영을 쏘아보며 믿을 수 없다는 듯 되물었다."너, 방금 뭐라고 했어?"홍주가 다시 한번 상황을 설명하고 나서야, 담시령은 이를 악물었다.눈치 빠른 시녀가 재빨리 차와 의자를 가져왔다."나는 네 사촌 언니야. 담씨 가문이 네게 얼마나 잘해줬는데, 네가 감히 이럴 수 있어?"담시령은 좀처럼 찻잔을 받으려 하지 않았다.유지영은 혀를 차며 코웃음을 쳤다."외할머니께서 내게 잘해주신 건 다 우리 어머니 덕분이지요. 그 은혜야 당연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게 언니와 무슨 상관인가요? 언니가 담씨 가문을 대표하는 것도 아닌데, 감히 황명을 거역하시겠다는 건가요?""너!"말문이 막힌 담시령은 분통이 터져 가슴을 쳤다.그녀는 찻잔을 받아 들었지만, 손이 덜덜 떨리는 바람에 찻잔이 달그락거렸다.결국 담시령은 허리를 굽히고 찻잔을 내밀었다."지영아, 미안하다!"유지영은 손을 뻗어 찻잔을 받았으나, 본인이 마시지 않고 곧장 홍주에게 넘겼다."손님을 배웅하거라!"득은커녕 망신만 톡톡히 당한 담시령은 수치심과 분노에 휩싸여 이를 갈았다."너 두고 보자!"그러고는 소매를 뿌리치며 휑하니 가버렸다.유지영은 담시령의 협박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문득 고개를 드니 대문 너머로 경왕이 지나가는 모습이 어렴풋이 보였다.그녀는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입궁하려던 경왕은 발걸음을 멈추고 방향을 틀어 배영준의 처소로 향했다.마침 그곳에는 경왕비도 있었다.배영준의 상처는 요 며칠 정성껏 치료를 받은 덕에 전보다 훨씬 나아진 상태였다."아버지."배영준은 침상에 기대앉은 채 경왕을 불렀다.경왕비는 의아한 눈빛으로 경왕을 바라보았다."방금 정세자비가 와서 지영이에게 차를 올리며 사죄했다 하오. 지금 저 두 사람의 기세가 하늘을 찌르니, 이때 입궁해 봤자 좋을 게 없을 것 같군."그래서 경왕은 생각을 바꾸었다.지금 배현준의 심기를 건드리는 것은 현명하지 않다고 판단한 것이다.경왕비에게 예물 이야기를 전해 들은 배영준은 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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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97화

옆 묵향원에서 이따금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려왔다.혼례를 앞두고 처소를 수리하는 등 단장하느라 부산을 떠는 소리였다.이때 경왕을 모시는 시종이 예물 목록을 들고 찾아왔다."전하께서 세자께 확인을 부탁하셨습니다. 내일 아침 일찍 민씨 가문에 예물을 보낼 예정입니다."배현준이 예물 목록을 받아보니 과연 스무 함이 맞았다.안에 채워진 물건들도 자신 때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평안아!"부름을 들은 평안이 다가왔다."창고에 가서 장신구 몇 가지를 골라 영준이에게 보내거라. 세자인 내가 따로 보태는 선물이라 전하고."배현준이 명했다.평안은 명을 받들고 시종을 이끌고 물러갔다.유지영은 그제야 궁에서 돌아온 뒤 배현준이 대청에서 무슨 일을 벌였는지 알 수 있었다.배현준은 눈썹을 쓱 치켜올리며 그녀를 바라보았다."내가 너무 옹졸하게 구는 것 같으냐?"유지영은 곧바로 고개를 저었다."받은 대로 돌려주는 것이 이치이지요."궁에서 내린 하사품과 선왕비의 혼수가 없었더라면, 경왕이 유씨 가문에 그리 많은 예물을 보냈을 리 없었다.경왕이 먼저 야박하게 굴었으니, 이쪽도 똑같이 갚아주면 그만이었다.다음 날, 배현준은 아침 일찍 집을 나섰다.왕부 안은 혼례 준비로 제법 소란스러워, 유지영도 더는 잠이 오지 않아 일찍 잠에서 깼다."마마, 방금 경왕비께서 시녀를 보내 대청으로 와 달라 하셨습니다. 오늘 왕부에 손님이 적지 않게 오실 테니 접대를 좀 거들어 달라 하십니다."동금이 고했다.유지영은 입을 꾹 다물고 하늘을 올려다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앞뜰로 나가보니 이미 손님 몇 명이 와 있었다.요 며칠 짐을 싸 왕부를 나갔던 임씨 가문 친척들이 오늘은 손님 자격으로 온 것이었다.그들은 유지영을 보자 나름 깍듯하게 대했다."조카며느리 왔는가.""지영아."다들 먼저 인사를 건네왔다.유지영도 체면을 세워주며 일일이 답례했다."지영아, 왔구나."경왕비가 다가왔다.이마에는 송골송골 땀이 맺혀 있었고, 몹시 다급해 보이는 얼굴이었다."오늘 손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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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98화

마차가 담씨 저택 앞에 멈춰 섰다.부관은 유지영을 보고 공손히 다가가 예를 올렸다."경세자비 마마.""예는 되었네. 외삼촌께서는 어디 계시는가?""나으리께서는 서재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집을 나서기 전, 그녀는 미리 외삼촌에게 사람을 보내 조금 늦을 것 같다고 전해두었다.유지영은 저택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바로 외할머니의 병세를 물었다.부관은 담담한 미소를 지으며 이전과 똑같다고 답했다."가끔 복도까지 걸어 나오셔서 잠시 서 계시곤 합니다."유지영은 그 말을 듣고 무척 기뻐하며, 이따가 꼭 들러봐야겠다고 생각했다.서재로 안내를 받아 들어가니, 담성국은 이미 그곳에서 기다리고 있었다.문을 열고 들어선 유지영은 담성국에게 예를 올렸다."외삼촌."담성국의 표정은 그리 좋지 않았다.그는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지영이 왔느냐. 앉거라."유지영은 빈자리를 찾아 앉았다."어제 있었던 일은 들었다. 시령이가 네게 몹쓸 짓을 했더구나."담성국은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운을 뗐는데, 그의 표정에는 은근한 원망이 서려 있는 듯했다. 유지영은 순간 자신이 잘못 본 것인가 싶어 눈을 깜빡였다."지영아..."담성국은 시선을 들어 그녀를 바라보았다."기가 너무 센 것도 결코 좋은 일만은 아니다. 외삼촌도 네가 예전에 숱하게 서러움을 겪었다는 것은 잘 안다만, 때로는 적당히 참고 넘길 줄도 알아야지."유지영은 눈을 내리깔고 옅은 미소를 지었다."지영아, 너는 시령이가 혼례를 올리기 전부터 배현준이 배준형을 끌어내릴 작정이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이 아니냐?"담성국의 말투가 점차 싸늘해졌다.유지영이 어제 담성국에게 사람을 보내 담시령의 최근 행적을 알린 것은 그에게 주의를 주기 위해서였다.그런데 지금 담성국의 태도를 보니, 오히려 그 일로 자신을 원망하고 있음이 분명했다.유지영은 고개를 저으며 부인했다."그럼 어찌하여 혼인을 말렸던 것이냐?"담성국이 재차 따져 물었다."제가 진작에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배준형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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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99화

담씨 노부인은 눈시울을 붉힌 채 다소 격해진 목소리로 말했다."시령이가 네 반만큼이라도 총명했다면, 그리 어리석은 짓은 하지 않았을 게다.""경왕비는 계비이니, 네게 효를 들먹이며 억누르려 든다면 답답한 일이 많을 게야. 지영아, 이 할미의 말을 명심하거라. 앞으로는 네 가정을 가장 우선으로 챙겨야 한다. 나는 네 현명함을 믿으니, 절대로 홀로 참고만 살지는 말거라."외삼촌 담성국과는 정반대인 따뜻한 당부에, 유지영은 가슴 깊은 곳에서 온기가 번지는 것을 느꼈다.지난 수년간 담씨 노부인이 외숙모 한씨를 억지로라도 인주에 보내 자신을 살피게 하지 않았더라면, 그녀의 삶은 훨씬 더 비참해졌을 것이다."내가 김씨 가문의 노부인과 곽씨 가문의 노부인과 친분이 있어 미리 말을 해두었다. 훗날 네게 도움이 필요한 날이 온다면, 그들이 나를 보아서라도 너를 더 챙겨주고 감싸줄 게다."노부인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시령이 그 아이는 어려서부터 내가 곁에 두고 가르치지 않아 내 말을 듣지 않는다. 만약 그 애가 또 네 심기를 거스르거든, 내 눈치 볼 것 없이 매사에 네 안위만을 최우선으로 생각하거라."어젯밤, 노부인은 담시령이 유지영을 찾아가 몹쓸 짓을 벌였다는 소식을 듣고 홧병이 나 밤새 한숨도 눈을 붙이지 못했다.그렇게 아침 내내 애타게 기다린 끝에야 겨우 유지영의 얼굴을 볼 수 있었던 것이다."네 외삼촌이 네게 무슨 무리한 요구라도 하더냐?"담씨 노부인이 묻자, 유지영은 고개를 저었다."그저 가벼운 안부를 나누었을 뿐입니다.""지영아, 내가 비록 오랜 세월 침상에 누워 지냈으나, 눈치가 없는 것은 아니란다."담씨 노부인은 유지영의 손을 꼭 쥔 채 연신 한숨을 내쉬었다."네 어미가 일찍 세상을 뜨는 바람에... 그 애가 살아 있었더라면 널 더 든든히 보듬어주었을 텐데.""외할머니, 저는 지금 아주 잘 지내고 있습니다."유지영은 품에서 손수건을 꺼내 담씨 노부인의 눈가를 다정하게 닦아주며, 애교를 부리듯 노부인을 달랬다.그녀는 방금 전 외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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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00화

배현준이 곁에 있어서인지, 유지영은 굳이 마음을 숨기지 않고 담성국이 부탁한 일을 있는 그대로 전했다.그리고 돌아오는 길에 그녀는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만약 오늘 곤경에 처한 사람이 배현준이었다면, 외삼촌은 과연 배준형을 찾아가 사정했을까?아마 외삼촌이라면 그랬을 것이지만, 딱 선을 지키며 부탁만 할 뿐, 배준형에게 강요하지는 않았을 것이다."배준형 일은..."배현준이 입을 열자, 유지영은 가볍게 그를 막았다."그에게 관용을 베풀어 달라는 뜻이 아닙니다. 정적에게 마음이 약해지면 훗날 저희에게 큰 화근이 될 테니까요."배준형이 옥사에서 죽어 뒤처리가 곤란해지는 상황만 아니었다면, 당장이라도 배현준에게 그를 없애라고 권했을 것이다."외삼촌과의 정 때문에 부군께 폐를 끼치고 싶지 않아요. 드릴 말씀은 이미 다 드렸으니, 훗날 담씨 가문에 변고가 생기더라도 외할머니께서 편히 여생을 보내실 수 있게만 해주시면 됩니다."그녀가 바라는 것은 그게 전부였다.배현준이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그게 뭐 어려운 일이라고."묵산마을의 보물 사건만으로도 정왕부는 충분히 휘청거릴 터였다.그동안 쌓아온 가업을 모조리 내놓아야 할 것이다.장부에 적힌 것은 물론, 적히지 않은 것까지 모두 정왕부의 죗값으로 돌아갈 것이다.눈 깜짝할 사이에 배영준의 혼례식 날 아침이 밝았다.아침 일찍부터 경왕부는 활기로 가득 찼다.유지영은 세자비이자 맏며느리로서 겉치레라도 해야 했기에 일찍부터 나가 일손을 도왔다.경왕은 환한 얼굴로 손님들을 맞이했다.경왕비도 짙은 자줏빛 의복에 화려한 비녀를 꽂아 귀티를 강조했다.그녀는 유지영이 오자 잠시 웃음을 거두더니, 종종걸음으로 다가와 말을 걸었다."지, 지영아. 영준이가 다리를 다쳐서 한동안 처소 밖으로 나오지 못했단다. 그동안 우리 사이가 나름 원만했으니, 앞으로도 이대로 서로 간섭하지 말고 지내자꾸나."배현준의 무대포 같은 성격에 꽤나 겁을 먹었는지, 그녀는 평소보다 유지영에게 유독 조심스러웠다.유지영은 가볍게 미소 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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