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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l Chapters of 피안을 거슬러: Chapter 271 - Chapter 2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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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71화

정왕 부자가 입을 떼기도 전에, 밖에서 표기장군이 도착했다는 전갈이 왔다는 소식이 들려왔다.하객들은 미처 상황을 파악하지 못해 우왕좌왕했다.경왕비는 경왕의 옷소매를 살짝 당기며 말했다."현준이가 왔습니다. 설마 혼례식을 엎으려는 건 아니겠지요?"경왕은 그제야 표기장군이 배현준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불효막심한 놈, 한순간도 내 마음을 편하게 두질 않는군!"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은빛 갑옷을 차려입은 배현준이 안으로 들어섰다.등불이 갑옷에 비치며 서늘한 빛을 흘렸다.굳게 다문 입술과 차갑게 가라앉은 얼굴에서는 매서운 기세가 뿜어져 나왔다.그의 뒤로는 무장한 금군들이 따르고 있었다.하객들은 의아해하며 수군거렸다."경세자께서 어찌 군사를 이끌고 정왕부에 들이닥친 겐가?""남의 잔치 날에 소란을 피우다니, 참으로 경솔하군!"경왕은 불안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나 그에게 다가갔다.그가 입을 열기도 전에 배현준이 눈썹을 치켜올리며 외쳤다."묵산마을에서 숨겨둔 보물이 발견되었다. 정세자는 사사로이 이곳을 파헤쳤고, 수많은 보물과 함께 수백 상자에 달하는 병기가 사라졌다. 그 많은 병기를 몰래 숨겨둔 것은 반역과 다름없다!"반역이라는 두 글자가 정원에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혼비백산한 경왕은 하려던 말을 꿀꺽 삼키고 다급히 말을 바꿨다."무, 무슨 오해가 있었던 게 아니냐?"배현준은 경왕을 흘겨보며 답했다."저는 어명을 받들어 이 사건을 철저히 조사하였고, 현재 증인과 물증이 모두 확보된 상태입니다!"어명이라는 말에 경왕은 입을 굳게 다물었다."필히 무슨 오해가 있었을 것이다. 정왕부가 어찌 반역을 꾀한단 말이냐?"정왕이 나서서 배현준의 곁으로 다가갔다."오늘은 정왕부의 경사스러운 날이거늘..."배현준은 그런 정왕을 밀쳐내고 배준형에게 성큼성큼 다가갔다."배준형, 묵산마을의 보물을 네가 팠느냐?"떠밀려난 정왕은 체면이 깎이자 경왕을 노려보았다.아들 참 잘 키웠다는 힐난 어린 눈빛이었다.경왕은 못 본 척 시선을 피했다.배현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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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72화

정왕부의 혼례식에 배현준이 금군을 이끌고 들이닥쳐서 신랑을 잡아갔다는 소식은 하룻밤도 지나지 않아 도성 곳곳에 퍼졌다.정왕은 사람을 풀어 상황을 알아보게 했다.이때 어린 시녀가 들어와 숙태비가 깨어났다고 고했지만, 지금 정왕은 숙태비를 챙길 여유가 없었다.그는 정왕비에게 가보라 이르고는 사람들을 데리고 저택을 나섰다.한 달이 넘게 누워 있다가 정신을 차린 숙태비는 국공부의 혼례식에서 태후에게 뺨을 맞고 송씨네 빈소로 쫓겨났던 일까지 기억하고 있었다.그날 밤, 갑자기 십여 명의 자객이 나타나 그녀의 팔 한쪽을 베어버렸다.그 이후의 일은 전혀 떠오르지 않았다.숙태비는 멍하니 팔을 들어 올렸다.역시나 소매 끝이 텅 비어 있었다.서서히 밀려오는 통증에 그녀가 이를 갈며 시녀에게 물었다."자객들에 대해 알아낸 것은 있느냐?"시녀가 답했다."태비 마마, 경조윤 대인이 조사한 결과 정왕부에 원한을 품은 자들의 소행이라고 합니다. 다만,일을 저지른 뒤 곧바로 도주하여 아직 행방을 찾지 못했다 합니다."그 말을 들은 숙태비는 싸늘한 얼굴로 욕설을 내뱉었다."무능한 것들! 하나같이 쓸모가 없어!"급히 달려오던 정왕비는 그 욕설을 듣고 미간을 찌푸리며 안으로 들어섰다.숙태비는 화려한 붉은 옷을 입고 머리에 장신구를 잔뜩 꽂은 며느리의 차림새를 보더니 대번에 표정이 굳었다."어머님, 오늘은 준형이가 담씨 가문의 장녀와 혼례를 치르는 날입니다. 집안에 경사가 생기니 어머님께서도 깨어나셨나 봅니다."정왕비는 그렇게 말했으나, 어색한 표정까지 감추지는 못했다.숙태비가 놀라 되물었다."오늘이 준형이 혼례 날이라고?""예."하지만 숙태비가 미처 기뻐하기도 전에 정왕비는 말을 이었다."반 시진 전, 배현준이 금군을 이끌고 와 준형이를 끌고 갔습니다. 지금 혼례식은 쑥대밭이 되었지요."그 말에 숙태비는 숨이 턱 막혀 하마터면 다시 기절할 뻔했다."방금 뭐라 했느냐?"정왕비는 그간 있었던 일과 요 근래 정왕부가 겪은 수모를 남김없이 털어놓았다.한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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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73화

한씨의 서신을 정중히 거절하고 나니, 이번에는 경왕이 대청으로 오라는 전갈을 보냈다.경왕이 왜 날?유지영은 차마 경왕의 부름까지 거절할 수는 없었다.결국 그녀는 보던 장부를 덮고 대청으로 향했다.대청에는 경왕과 경왕비뿐만 아니라 몇몇 친척들도 모여 있었다.배현준의 위상이 높아진 탓인지, 모두 호기심 어린 얼굴이었다.친척들은 오늘따라 유지영에게 유난히 호의적인 태도를 보였다.그녀가 들어서자 다들 자리에서 일어나 앞다투어 조카며느리라며 반겼다.그 모습을 보던 경왕이 헛기침을 하자, 유지영은 그제야 앞으로 무릎을 꿇고 예를 표했다."경왕 전하를 뵙습니다."배현준과 마찬가지로 아버님이 아닌 전하라 부르며 선을 긋는 호칭이었다.그러나 호칭 문제로 이미 체면을 구긴 적이 있는 경왕은 굳이 따지고 들지 않았다.그는 손을 뻗어 빈 의자를 가리키며 말했다."우선 앉거라. 네게 몇 가지 물어볼 말이 있어 불렀다."아침 일찍부터 적지 않은 사람들이 경왕을 찾아와 묵산마을 사건의 내막을 물었다.하지만 경왕 본인도 아는 게 없으니 섣불리 답을 해줄 처지가 아니었다.결국 경왕비의 제안으로 유지영을 부른 것이었다."지영아, 묵산마을 일에 대해 묻고 싶구나. 네가 아는 대로 말해 보거라."경왕비도 곁에서 고개를 끄덕이며 거들었다."밖에서는 이 일로 아주 난리가 났어. 그게 사실이라면 우리도 엮이지 않게 피해야 할 것이고, 만약 현준이가 그저 분풀이로 벌인 일이라면 결코 장난으로 넘어갈 수준이 아니지 않느냐."경왕의 생각도 같았다.받은 것은 반드시 갚아줘야 되는 배현준의 성격으로 볼 때, 하필 배준형의 혼례 날에 들이닥친 것은 고의적인 보복일 가능성이 충분했다.유지영은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그 일은 경조윤 대인이 적발하여 조정에 고하였고, 폐하께서 부군께 조사를 명하신 것입니다. 이리 중대한 일을 두고 부군께서 어찌 장난으로 여기시겠습니까?"경왕은 그 말을 듣고 무거운 침묵에 잠겼다."허나 여태 조용하다가 왜 갑자기 누군가 확실한 물증까지 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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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74화

한씨는 유지영의 맞은편에 앉아서 따져 묻기 시작했다."그날 우리 집에서 너는 이 혼사가 부당하다며 정왕부가 폐하의 눈 밖에 났다고 하지 않았느냐.""정왕부가 눈 밖에 난 것은 천하가 다 아는 사실 아닙니까. 친척으로서 좋은 혼처가 아니라고 충고해드린 것에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정곡을 찔린 한씨는 속이 부글거렸다."해서 정녕 내막을 몰랐다고 끝까지 잡아뗄 셈이냐!""외숙모께서 경왕부에 시비를 걸러 오신 것이라면, 더는 상대해 드릴 수 없습니다."유지영은 당당히 고개를 들고 시녀에게 손님을 배웅하라 명했다.한씨는 억울하고 창피한 마음에 언성을 높였다."지영아, 나 네 외숙모야! 정왕부에 큰일이 터져 네 언니까지 엮이게 생겼는데, 몇 마디 물어본 것 가지고 어찌 이리 매정하게 구느냐? 네가 인주 본가에 내려가 있을 때, 널 걱정해서 수고도 마다치 않고 해마다 찾아갔거늘..."가만히 듣고 있던 유지영의 입가에 서늘한 미소가 번졌다."외숙모께서 지난날 제게 베푼 것들을 이리 철저히 따지시겠다면, 저도 더는 체면을 봐드리지 않겠습니다."싸늘하게 가라앉은 유지영의 얼굴에, 한씨는 흠칫 놀랐다."제가 철든 이후로, 외숙모께서 매년 선물을 잔뜩 싸 들고 인주를 찾으신 것은 맞습니다. 허나 제가 직접 외숙모를 뵌 횟수는 손에 꼽을 정도이지요. 가져오신 물건 중 절반만 유씨 가문에 주고, 나머지 절반은 어찌하셨는지 제가 낱낱이 읊어드려야겠습니까?"유지영은 하얗게 질린 한씨의 얼굴을 보며 차갑게 코웃음을 쳤다."외할머니와 외삼촌을 보아 그나마 예의를 갖춰 대했거늘, 정도껏 하셨어야지요!""너... 어찌 감히 내게 이런 식으로 말하느냐!"한씨는 덜덜 떨리는 손가락으로 유지영을 가리켰다."경왕부로 시집와 든든한 뒷배가 생겼다고, 옛정은 이리 헌신짝처럼 내팽개칠 셈이냐?"쾅!유지영은 탁자를 거칠게 내리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매서운 기세에 한씨는 숨이 턱 막힐 것만 같았다."날 낳아 기른 것도, 살뜰히 보살핀 것도 아니면서! 그저 외삼촌의 체면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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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75화

한씨는 당황하여 어쩔 줄 몰라 했다.이번 방문은 담성국 몰래 벌인 일이었다.담성국은 절대 유지영을 찾아가선 안 된다고 신신당부했지만, 그녀가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몰래 온 것이었다."지영아, 꼭 이렇게까지 해야 속이 시원하겠느냐?"한씨가 굳은 얼굴로 따져 물었다."융통성 없이 꼿꼿하기만 한 성격은 훗날 왕부에서 큰 화를 부를 게야."유지영은 한씨의 비난을 가볍게 무시했다.반 시진 후, 얼굴이 흙빛이 된 담성국이 다급한 걸음으로 나타났다.그는 한씨를 매섭게 노려본 뒤, 유지영을 향해 말했다."지영아, 넌 이 일에 신경 쓸 것 없다. 네 외숙모가 어리석어 사리 분별을 못 하는구나. 내 당장 데려가마."유지영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그녀는 외삼촌인 담성국에게만큼은 깍듯하게 예의를 갖추었다.발길을 돌리기 전, 담성국이 한마디 덧붙였다."무슨 일이든 네 가정이 먼저다. 넌 조금도 잘못한 게 없으니 마음 쓰지 말거라. 훗날 일이 잠잠해지거든 외가에 들르거라. 그때 내 친히 네게 사과하마.""외삼촌, 별말씀을 다하십니다."담성국은 그제야 한씨를 데리고 황급히 경왕부를 떠났다.마차에 오른 후, 담성국은 어두운 얼굴로 침묵에 잠겼다.부부의 연을 맺고 수십 년을 함께 산 한씨가 부군의 이런 모습을 본 것은 시누이인 담혜정이 세상을 떠났을 때뿐이었다.그녀는 덜컥 겁이 났다."당장 짐을 챙겨 연성으로 내려가시오."담성국이 차갑게 말했다.조급해진 한씨가 따졌다."지금 절 쫓아내시려는 겁니까?"담성국의 눈빛이 매섭게 번뜩였다."정작 정왕부도 조용히 몸을 사리고 있거늘, 왜 당신이 먼저 나서서 설친단 말이오! 재물을 빼돌리고 병기를 숨긴 건 엄연한 반역이오. 엮이는 순간 멸족을 당할 중죄인데, 감히 지영이에게 비호해 달라 떼를 쓰다니!"사실 한씨도 유지영의 불같은 호통에 정신이 번쩍 든 뒤로는 내심 후회하고 있었다.그저 알량한 체면 때문에 입 밖으로 내지 못했을 뿐이었다."그럼 저희 시령이는 어쩝니까!"한씨가 울먹이며 물었다."이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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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76화

숙태비는 어제 경황이 없었던 탓에 유선주를 떠올리지 못했지만, 시종의 말을 듣자 그날의 기억이 되살아났다.당시 자객이 들이닥쳤을 때, 유선주가 자신을 방패막이로 삼고 혼자 도망쳤던 일이 생생하게 떠오른 것이다."어머님, 유선주는 사고 당시 어머님을 구하고 저희 저택에서 며칠 쉬어가기까지 했었습니다. 줬던 물건을 다시 빼앗아 오면 의리 없다는 소리를 듣지 않을까요?"정왕비는 입으로는 그리 말했으나, 속으로는 당장이라도 물건을 거둬들이고 싶었다.다만 유선주가 숙태비의 생명의 은인이라는 명분을 가지고 있어, 혹여 시어머니의 심기를 거스를까 두려워 섣불리 말을 꺼내지 못한 것이었다."그 계집이 자기가 나를 구했다고 하더냐?"숙태비는 날카롭게 언성을 높였다."그 계집이 나를 자객 쪽으로 밀어버리지만 않았어도 내가 팔을 잃지는 않았을 게다!"당시 문밖에는 금군이 있었다.자객들은 금군의 적수가 되지 못했으니, 잠시 몸을 숨기고 시간만 끌면 될 일이었다.유선주가 그녀를 밀어 넘어뜨리지만 않았어도 자객에게 붙잡힐 일은 없었다!정왕비는 놀란 얼굴로 말했다."하지만 유선주는 분명 자신이 온몸을 던져 어머님을 지켰다 했습니다. 금군이 제때 오지 않았다면 어머님께서 위험하셨을 거라고요.""새빨간 거짓말이다!"정신이 온전해진 숙태비는 그날의 일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정왕비는 그 말을 듣자마자 다급히 맞장구를 쳤다."참으로 뻔뻔한 계집이로군요. 어머님, 당장 가서 준형이가 보낸 물건들을 모조리 찾아오시지요."그녀는 한시도 지체하지 않고 마차를 대령하라 명했다.유선주네 저택에 도착했을 때, 빈소는 이미 치워져 있었고 마당은 조용했다.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리자 누군가 문을 열어주었다."유선주 안에 있느냐?"정왕비가 묻자, 문을 연 시녀는 황급히 고개를 끄덕였다."예, 정왕비 마마. 소인이 바로 아가씨를 모셔오겠습니다."유선주는 정왕비가 문안을 왔다는 말에 하던 일을 팽개치고 부리나케 달려왔다.하지만 지팡이를 짚고 선 숙태비를 본 순간, 얼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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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77화

정왕비는 그 말에 섣불리 호응하지 못했다.호위들은 수색 끝에 열 개의 큰 상자와 몇 장의 은표를 찾았다.그러자 정왕비가 도무지 믿기지 않는다는 듯 의아해하며 물었다."이게 다라고?""왕비 마마, 안팎을 샅샅이 뒤졌으나 남은 건 이게 전부인 듯합니다."호위가 고했다.정왕비는 경멸스러운 눈으로 유선주를 흘겨보고는 손을 저어 전부 거둬가라 명했다."안, 안 됩니다..."유선주는 발버둥 치며 상자를 향해 달려들었으나, 숙태비가 다가와 그녀의 손등을 무자비하게 짓밟았다."요망한 것! 준형이를 꼬드겨 대체 얼마나 많은 은자를 뜯어낸 것이냐! 일찍 죽은 네 어미에게 감사하거라. 안 그랬으면 이렇게 넘어가진 않았을 테니!"연거푸 발길질을 당한 유선주는 반항할 엄두도 내지 못한 채 그들이 떠나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마당은 그야말로 쑥대밭이 되었다."흐윽!"유선주는 분통이 터져 오열했다.시녀가 다가와 그녀를 부축하며 다급히 고했다."듣자 하니 어제 정세자의 혼례 날, 경세자께서 금군을 이끌고 와 정세자를 잡아갔다 하옵니다. 지금 밖에서는 정왕부의 가산이 전부 몰수되고 멸족에 처해질지도 모른다 수군거리고 있습니다."그 말에 유선주는 울음을 멈추고 의아한 눈빛으로 시녀를 바라보았다.그녀는 어제가 혼례 날이라, 시녀들에게 그 이야기를 일절 꺼내지 말라고 엄명을 내려둔 상태였다.홀로 방에 틀어박혀 밤새 속을 끓였건만, 그런 변고가 생겼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시녀가 밖에서 주워들은 소식을 전하자 그녀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배준형이 자신에게 주었던 은표와 패물들이 전부 장물이었다니!"아가씨, 저희는 이제 어찌해야 합니까?"시녀는 엉망이 된 마당을 보며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유선주가 대책을 생각할 새도 없이, 몇몇 시종들은 이미 봇짐을 싸 들고 밖으로 도망치고 있었다.그 모습을 본 그녀가 거기 서라며 고함을 쳤으나 누구 하나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아가씨! 정왕부로 시집가기 전에 어서 도망치십시오! 여기 남았다간 꼼짝없이 엮이게 생겼습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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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78화

유지영이 예상한 대로, 유선주는 저택의 시종들을 내쫓은 뒤 곧바로 방바닥 벽돌 아래 숨겨두었던 은표를 꺼냈다."아가씨...""쉿!"유선주는 도둑이라도 된 듯 황급히 은표를 챙겨 품에 넣으며 불안한 기색으로 속삭였다."훗날 세자에게 시집갈 때 체면을 세우기 위해 모아둔 것인데, 이것이 내 마지막 보루가 될 줄은 몰랐구나."말을 마친 그녀는 서둘러 옷을 갈아입었다."정왕부의 죄목이 확정되기 전에 서둘러 경성을 빠져나가자."두 사람은 몰라보게 변장한 뒤, 저택을 헐값에 팔아넘겼다.과정은 순조로웠고, 사람들의 눈을 피해 무사히 경성을 빠져나갈 수 있었다.같은 시각, 국공부 대문 앞에는 두 사내아이가 꿇어앉아 있었다.한 명은 여덟 살, 다른 한 명은 열두 살쯤 되어 보였다.부관은 그들을 보고 서둘러 유정남에게 보고하려 했으나, 공교롭게도 그는 저택에 없었다.결국 하는 수 없이 경왕부로 전갈을 보냈다."노부인께서 아직 저택에 계시지 않습니까. 노부인도 엄연한 이 댁의 안주인이신데 어찌 고하지 않으십니까?"곁에 있던 시종이 물었다.부관은 한심하다는 듯 시종을 흘겨보았다."노부인께서 아시면 필히 두 도련님을 저택으로 들이시겠지. 아직도 돌아가는 판국을 모르겠느냐? 지금 국공부의 진정한 주인은 오직 국공 어르신과 군주님뿐이다. 잔말 말고 어서 경왕부로 사람이나 보내거라!""예."그렇게 한 시진 후, 유지영은 사람을 보내 두 아이를 외곽의 장원으로 보내라 명했다. 얘기를 들은 한 아이는 자신은 절대 가지 않겠다며 대성통곡을 했다."할머니를 뵈어야겠다!""국공부가 우리 집이란 말이다!"아이는 반나절 넘게 목놓아 울어댔다.그 바람에 거리를 오가던 사람들까지 점점 몰려들기 시작했다.그런데 그때, 마차의 휘장이 걷히며 유지영이 얼굴을 드러냈다."국공부는 진작에 너희 집이 아니게 되었다. 계속 여기서 버틴다면 관아에 고발해 옥살이를 하게 만들 것이다!""큰 누님!"두 아이는 일제히 고개를 돌려 그녀를 쳐다보았다.유원랑이 유지영을 향해 입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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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79화

유지영은 두 주먹을 꽉 쥐고 냉소를 터뜨렸다."외숙모는 이제 없지만, 너희에겐 엄연히 아버지와 친누이가 있지 않느냐. 아무리 그래도 사촌 누이인 내게 찾아올 차례는 아닌 것 같은데. 게다가 분가할 때 나와 내 아버지는 집안의 재산을 아무것도 챙기지 않았다. 온갖 잇속은 너희 둘째네가 다 챙겨가지 않았느냐. 그런데 어찌 아직도 만족을 못 하는 것이냐?"그녀는 체면도 따지지 않고 두 형제의 얄팍한 속내를 정통으로 까발렸다.두 아이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정랑아, 넌 어려서부터 사서오경을 읽고 세상 이치를 배웠지. 그런데 어찌 이리 사리 분별을 못 하고 거짓을 진실이라 우기느냐. 아니면 우리 아버지에게 대를 이을 아들이 없어서, 품어서는 안 될 헛된 속셈이라도 품은 것이냐?"사실 유정랑은 아주 어릴 적부터 장차 국공부의 모든 것이 자신의 것이 될 것이라는 생각을 주입받아 왔다.비록 지금은 쫓겨난 처지이나, 유국공에게 대를 이을 아들이 없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었다.언젠가는 가문을 이을 후계자를 찾아야 할 테니, 적장자인 자신이 가장 적합하다고 굳게 믿고 있었다.또다시 정곡을 찔린 유정랑은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을 만큼 수치스러움을 느꼈다.그는 두 주먹을 꽉 쥐며 쏘아붙였다."큰 누님, 정녕 남매의 정은 안중에도 없이 이리 매정하게 구시는 겁니까? 훗날 할머니께서 오늘 일을 아시고 꾸짖으실까 걱정도 안 되십니까?"불쌍한 척 매달리는 것이 통하지 않자, 아이는 이제 대놓고 협박까지 서슴지 않았다.유지영은 싸늘한 얼굴로 시종에게 명했다."장원에도 보낼 것 없겠구나. 저 은혜도 모르는 늑대 같은 것들에게는 그마저도 사치야! 가서 부관에게 전해라. 저 두 사람은 국공부에 한 발짝도 들이지 못하게 하고, 행여 대문에서 소란을 피우거든 당장 관아로 끌고 가라 하거라!""큰 누님!"유정랑은 다급히 소리치며 유지영을 독기 어린 눈으로 노려보았다.그는 깊게 심호흡하더니 이를 갈며 말했다."큰 누님께서 오늘 주신 수모, 똑똑히 기억하겠습니다!"말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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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80화

한편, 국공부 대문 앞.저택으로 돌아오던 유정남은 문 앞에 무릎을 꿇고 있는 두 아이의 뒷모습이 눈에 익어 가까이 다가갔다.역시나 두 아이는 바로 유정혁의 아들인 유정랑과 유원랑이었다."큰아버지!"그들은 유정남을 보자마자 연신 머리를 조아렸다.유원랑은 고개를 치켜들고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리며 서럽게 울기 시작했다.그 모습은 무척이나 가여워 보였다."이게 무슨 짓이냐?"유정남이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유정랑이 울먹이며 답했다."오늘 숙태비께서 사람들을 이끌고 집에 들이닥쳐 선주 누님을 매질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전에 정세자께서 주신 예물이라며 집안의 물건들을 모조리 털어가셨습니다. 게다가 선주 누님은 저희가 한눈을 판 사이에 저택마저 팔아넘기고 도망쳤습니다. 큰아버지, 저와 원랑이는 이제 오갈 데가 없습니다. 부디 저희를 거두어 주십시오."두 아이는 유정남을 향해 납작 엎드려 큰절을 올렸다.그 모습을 내려다보며 유정남은 입술을 굳게 다문 채 침묵을 지켰다.그때 곁에 있던 부관이 다가와, 유지영이 조금 전 돌아왔으며 한 시진 전에 이미 두 도련님을 만났었다고 귓속말로 전했다.유정남은 그제야 입을 열었다."피를 나눈 친척이니 아예 모른 체할 수는 없겠지. 이번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주는 호의다."그 말에 유정랑은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유정남에게 거듭 절을 올렸다.하지만 이어진 유정남의 말은 예상치 못한 쪽으로 흘러갔다."골목 어귀에 내 명의로 된 작은 가옥이 하나 있다. 비록 좁지만 둘이 지내기엔 충분할 게다. 내 사람을 시켜 땔감과 식량을 좀 넣어주고, 어멈 한 명을 보내 너희 형제를 돌보게 하마."유정랑의 얼굴에 번졌던 웃음기가 딱딱하게 굳어버렸다."싫습니다, 큰아버지! 저희는 저희 집으로 돌아갈 겁니다."유원랑은 국공부 대문을 가리키며 악을 썼다.누추한 단칸방에서 지내기는 싫었다.예전에 누리던 화려하고 큰 저택에서 살고 싶었다.유정랑 역시 분한 듯 따져 물었다."큰아버지, 이토록 넓은 국공부에 정녕 저희 형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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