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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l Chapters of 피안을 거슬러: Chapter 261 - Chapter 2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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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61화

"폐하, 원망하시려거든 신첩을 원망하시옵소서. 저번달 행궁에서 신첩이 태후 마마께 무례를 범한 탓에, 마마께서 저희 모자를 탐탁지 않게 여기시는 것이옵니다. 황자는 아무 죄도 없지 않습니까. 그저 순수한 마음으로 웃어른께 효를 다하려 했을 뿐입니다."방 안에서 그 말을 듣고 있던 서 태후는 이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정왕이 어쩌다 저리 분수도 모르는 천박한 것을 데려왔는지, 속만 아플 뿐이었다.오늘 자신이 나서지 않으면 저 모자가 언제까지 소란을 피울지 알 수 없었다.서 태후는 차라리 밖으로 나가기로 했다.건양제는 서 태후가 나오는 것을 보자 굳어 있던 표정을 풀었다."어마마마, 어찌 나오셨습니까?"서 태후는 손을 내저으며 단 귀인에게 시선을 던졌다."태후 마마, 그 시절의 일은 모두 신첩의 잘못이옵니다. 때리시면 맞고 벌을 내리시면 달게 받겠사오니, 부디 노여움을 거두시고 대황자에게 불똥이 튀지 않게 해 주시옵소서."단 귀인은 애처롭게 눈물을 뚝뚝 흘리며 돌계단에 연신 머리를 조아렸다.그 가련한 모습은 누가 보아도 연민을 자아낼 만했다.서 태후의 시선이 배이수에게 닿았다.뜻밖에도 그의 눈 밑에는 증오와 원망이 짙게 깔려 있었다."그때 신첩은 남몰래 황자를 낳고 서로 의지하며 살다 보니, 차마 입궁시킬 엄두를 내지 못했사옵니다. 게다가 누군가 황자를 해칠까 두려워 차일피일 미루게 된 것입니다. 폐하, 부디 용서해 주시옵소서."서 태후에게 머리를 조아린 단 귀인은 이내 건양제를 향해 거듭 절을 올렸다.쿵! 쿵!이마를 찧는 소리가 제법 묵직했다.새하얗던 이마는 순식간에 시퍼렇게 멍이 들었다."가증스러운 수작 부리지 말거라. 넌 그저 아이가 너무 어릴 때 궁에 들어오면, 세월이 흘러 생모인 널 잊을까 두려웠던 게지. 이제 다 커서 철이 들었으니 그 누구도 네 자식을 빼앗아 갈 수 없으리라 여긴 것 아니냐?"건양제는 단 귀인의 얄팍한 속내를 가차 없이 까발렸다.정곡을 찔린 단 귀인의 안색이 창백해졌다.그녀는 다급히 고개를 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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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62화

애지중지 키운 아들에게 대놓고 이기적이라는 말을 듣자, 단 귀인은 억장이 무너졌다.그녀는 눈물이 가득찬 상태로 배이수를 바라보며 말했다."이수야, 내가 널 위해 얼마나 많은 것을 희생했는데 어찌 그런 모진 말을 한단 말이냐?"배이수는 단 귀인과 더는 말다툼할 가치도 없다는 듯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그러고는 단 귀인을 내려다보며 매몰차게 말했다."오늘 아바마마께서 저를 덕비 마마의 슬하로 보낸다 하셨으니, 이제 제 어머니는 당신이 아닙니다. 저를 낳아주신 은혜는 훗날 서운치 않게 갚아 드리겠습니다."말을 마친 배이수는 매정하게 소매를 떨치고 돌아섰다."이수야, 이수야!"단 귀인이 목놓아 불렀으나, 배이수는 단 한 번도 뒤돌아보지 않았다.결국 청죽이 다가와 그녀를 부축해 일으켰다."마마, 진정하십시오. 대황자 전하께선 홧김에 저러시는 겁니다. 화가 가라앉으면 마마의 자리는 그 누구도 대신할 수 없다는 걸 알게 되실 겁니다. 오늘은 전하의 좋은 날이온데 마마께서 빠지시면 아니 되지요."단 귀인은 그제야 정신이 들었다.그녀는 서둘러 구겨진 치맛자락과 흐트러진 머리를 정돈했다."그래, 네 말이 맞다. 아무리 화가 났다 한들 내가 이수의 생모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아. 오늘 귀한 분들도 많이 오실 텐데 내가 빠질 수는 없지."궁원.서 태후는 소 상궁의 부축을 받으며 여유롭게 궁중 복도를 걷고 있었다.건양제는 뒷짐을 진 채 서 태후와 적당히 거리를 두고 걸었다.그는 이따금 고개를 돌려 진지한 표정으로 서 태후의 말을 경청했다."대황자도 명색이 황실의 핏줄인데 단 귀인 곁에 두었다간 자칫 성격이 비뚤어질까 걱정입니다. 혹시 따로 생각해 두신 바가 있으십니까?"서 태후 역시 수년간 후사가 없던 건양제가 대황자를 이토록 차갑게 대할 줄은 몰랐다.건양제가 답했다."이미 열세 살이니 성격도 굳어질 대로 굳어져 고치기 힘들 것입니다. 양나라 강산의 후계자를 정하는 데 있어, 짐은 혈통만 중히 여기지 않습니다. 선조들의 강산을 저런 놈의 손에 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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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63화

그 말에 정왕의 얼굴에 당혹감이 스쳤다.다행히 건양제와 서 태후는 더 캐묻지 않았고, 잠시 후에 서 태후가 담담히 말했다."정세자가 혼례를 치르고 나면, 좋은 기운을 받아 숙태비도 깨어날지 모르지."그때 대신들과 그 가족들이 삼삼오오 모여들기 시작했다.건양제와 서 태후는 각자의 자리로 향했고, 외명부 부인들은 서 태후에게 다가가 문안을 올렸다.부인들은 황실에 두 황자가 생긴 것을 연신 축하했다.후사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자 서 태후의 얼굴에도 환한 웃음이 번졌다.그녀는 무척 기분이 좋아 보였다.영보궁은 본래 황실 연회를 전담하는 곳이었다.오늘도 예외는 아니었으나, 평소와 달리 한 가지 절차가 더 추가되었다.건양제가 직접 향을 피우고 예를 올린 뒤, 배이수의 이름을 황실 족보에 올린 것이다.그리고 백관이 지켜보는 가운데 그에게 경군왕이라는 봉호를 내렸다.배이수는 그 자리에서 넋이 나간 듯 굳어버렸다."아, 아바마마..."명색이 황실의 장자인 자신이 고작 일개 군왕으로 책봉되다니!게다가 입궁한 지 며칠이나 되었다고 벌써 작위를 내린단 말인가?작위와 봉호를 받으면 법도에 따라 궁 밖에 사저를 하사받아 나가야 했다."폐하, 대황자는 아직 어린데, 작위를 내리시기엔 너무 이른 것 아닙니까?"정왕이 나서서 거들었다.오늘 입궁할 때부터 정왕은 눈꺼풀을 심하게 떨며 불안함을 느끼고 있었다.건양제는 그런 정왕을 흘기며 쏘아붙였다."열세 살이면 결코 어린 나이가 아니다. 해가 바뀌면 혼처를 알아봐야 할 텐데, 설마 혼례를 올리고도 궁에 눌러살게 할 셈이냐?"이어서 건양제는 내무부를 불러 조속히 알맞은 저택을 골라 보수하고, 한 달 안에 배이수를 출궁시키라 명했다.내무부 대총관이 앞으로 나와 어명을 받들었다.사람들은 건양제의 빠른 결단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항간에는 황제가 배이수를 냉대한다는 소문이 파다했지만, 대부분은 믿지 않았다.수년간 후사가 없던 황제가 드디어 핏줄을 얻었는데, 어찌 아끼지 않을 수 있겠는가?하지만 지금 눈앞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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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64화

건양제가 이토록 짧은 시간 안에 배이수를 내칠 줄은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이는 곧 대신들이 배이수에게 줄을 대려는 헛된 기대를 완전히 꺾어버린 것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오늘 그를 군왕으로 책봉한 것은, 양나라의 옥좌가 배이수와는 아무런 연이 없다는 사실을 만천하에 공표한 것과 같았다.영보궁.책봉 소식이 전해지자, 서 태후는 잠시 멈칫하더니 곧바로 건양제의 숨은 뜻을 알아차렸다.배이수와 단 귀인이 가까이 지내지 못하도록 일부러 사이를 갈라놓은 것이다.이대로 궁 밖으로 내보낸 뒤 알아서 살게 하겠다는 뜻이기도 했다.고개를 돌린 서 태후의 시야에 백지장처럼 창백하게 질린 단 귀인의 얼굴이 들어왔다.그녀는 가녀린 어깨를 바르르 떨며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서 있었다.곧바로 정신을 차린 단 귀인은 치맛자락을 움켜쥐고 서 태후 앞에 털썩 무릎을 꿇었다."태후 마마, 예전 일은 모두 신첩의 잘못이옵니다. 부디 자비를 베푸시어 대황자를 출궁시키지만 말아 주시옵소서. 때리시든 욕하시든 마마의 처분에 따를 터이니, 제발 황자의 출궁 명령만 거두어 주십시오."그녀는 서 태후를 향해 이마가 바닥에 닿도록 연신 절을 올렸다.갑작스러운 소동에 곁에 있던 부인들은 넋을 잃고 멍하니 바라만 보았다."대황자 전하를 밖으로 내보내신 것이 설마 태후 마마의 뜻이란 말인가?""태후 마마는 폐하의 은인이시니, 폐하께서도 차마 마마의 뜻을 거스르지 못하셨겠지. 그래도 자신의 핏줄마저 내치실 줄이야. 단 귀인은 밖에서 십삼 년이나 떠돌다 우여곡절 끝에 환궁했거늘, 참으로 가련한 팔자로군."귀부인들이 은밀히 수군거렸다."어명을 내리신 분은 분명 폐하이신데, 어찌하여 단 귀인은 태후 마마께 명을 거두어 달라 매달리는 겁니까? 태후 마마께서 경군왕에게 무슨 해라도 끼치셨단 말입니까?"멀지 않은 자리에 앉아 있던 유지영은 부인들의 수군거림을 듣고는 불쑥 한마디를 던졌다.목소리는 크지 않았으나 단 귀인의 귀에 들어가기엔 충분했다.단 귀인은 즉시 고개를 돌려 유지영을 째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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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65화

단 귀인이 아무리 오열하며 매달려도 건양제는 아무 반응도 하지 않았다.잠시 후, 분위기가 심상치 않음을 느낀 단 귀인이 고개를 들었다.그 순간, 차갑게 가라앉은 황제와 시선이 마주쳤다.단 귀인은 저도 모르게 오한이 들어 몸을 떨었다."폐하?"곁에 있던 내관이 상황을 설명했다."귀인 마마, 폐하께서 대황자 전하를 경군왕으로 책봉하셨으나, 전하께서 은혜를 모르고 명을 거부하셨습니다. 이에 폐하께서 경군왕을 종삼품 경군자로 강등하시고, 한 시진 동안 무릎 꿇고 반성하라 명하셨습니다."황장자에서 경군왕으로, 다시 경군자로.눈 깜짝할 사이에 이어진 강등에 사람들은 혀를 내둘렀다.단 귀인은 그 말을 듣고 당장이라도 혼절할 것만 같았다.그녀는 오열하며 매달렸다."폐하, 황자는 아직 나이가 어려 법도를 몰라 그런 것이옵니다..."그때 건양제가 허리를 굽혀 단 귀인을 내려다보았다.그 서늘한 기세에 눌린 단 귀인은 울음을 뚝 그쳤다."이수를 그리 떼어놓기 힘드냐?"건양제가 물었다.단 귀인은 목이 꽉 메어 차마 입을 떼지 못했다."정 그리 아쉽다면, 짐이 황자의 환궁 자체를 없던 일로 해주마. 너희 모자가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가 살거라. 어떠하냐?"그 한마디에 단 귀인은 사지가 얼어붙는 듯했지만, 지금은 궁 안이니 밖이니 따질 처지가 아니었다."태후를 능멸하고 윗사람에게 무례를 저지른 죄를 묻겠다. 당장 끌어내어 장살에 처하라!"건양제가 목소리를 높였다.장살이라는 말에 사람들은 너무 놀라 제대로 반응조차 하지 못했다.정왕이 다급히 나섰다."폐하, 아니 되옵니다."정왕의 눈짓을 받은 대신들도 일제히 나서서 간청했다."폐하, 은혜를 베풀어 주시옵소서. 단 귀인이 법도를 모른다 하나 황실의 핏줄을 낳은 공을 생각하시어 부디 선처해 주시옵소서.""폐하, 신첩이 잘못했사옵니다. 다시는 경거망동하지 않겠사옵니다."단 귀인은 사색이 되어 빌었다.건양제는 가차 없이 발을 들어 그녀의 명치를 걷어찼다.그의 얼굴에는 혐오감이 역력했다."법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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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66화

건양제가 자리에 있던 사람들을 슥 둘러보자, 한 대신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폐하, 정왕 전하께서는 요즘 정무로 몹시 바쁘십니다. 경군자를 가르치는 일까지 맡으신다면 힘에 부치실까 염려됩니다."그 말이 나오자마자 정왕의 마음속에 불안감이 엄습했다.건양제는 뒤늦게 나타난 배현준을 힐끗 보더니 말했다."현준아, 오늘부터 너는 정왕이 맡고 있던 정무를 모두 넘겨받거라."배현준은 눈썹을 치켜올렸다.그는 자신을 잡아먹을 듯 노려보는 정왕의 표정을 힐끗 보고는 두말없이 한쪽 무릎을 꿇었다."신, 어명을 받들겠나이다!""폐하...""현준이도 이제 정무를 익혀야지."건양제는 정왕의 말을 가볍게 무시하고 배현준을 바라보며 말했다."짐은 다음 달 나라의 번영을 기원하기 위해 잠시 자리를 비울 터이니, 그동안 네가 대리청정을 맡도록 하거라."안 그래도 건양제의 거침없는 행보에 얼이 빠져 있던 문무백관들은 그 엄청난 선언에 또다시 경악했다.배현준은 고개를 숙이고 공손히 답했다."어명을 받들겠나이다!"건양제는 처리할 공무가 남았다며 먼저 자리를 떴다.전각 안은 서서히 고요해졌다.서 태후가 유지영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연회의 흥이 다 깨졌구나. 너는 자녕궁에 가서 나와 차나 한잔 마시자꾸나.""예, 마마."그렇게 서 태후도 자리를 떴다.연회의 주인공들이 모두 사라진 셈이었다.남은 사람들은 서로 눈치만 볼 뿐, 아무도 황제의 속뜻을 짐작하지 못했다.정왕의 안색은 먹구름이 드리운 듯 어두웠다.배이수를 궁으로 데려온 대가가 이토록 참혹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곁에 있던 몇몇 대신들은 경왕에게 아부를 하기 시작했다."폐하께선 예나 지금이나 한결같이 경세자를 아끼시니, 훗날 반드시 큰 뜻을 펼치실 수 있을 겁니다."경왕은 감히 정왕 쪽으로 고개를 돌리지도 못한 채 억지웃음만 지었다.당장이라도 쥐구멍에 숨고 싶은 심정이었다.곁에 선 경왕비 역시 한참이나 넋을 잃은 상태였다.마음속에 수만 가지 의문이 피어올랐으나 감히 겉으로 내색하지는 못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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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67화

"아바마마께서는 어찌 핏줄인 저 말고 남을 더 아끼시는 것입니까!"배이수는 분통이 터져 숨을 헐떡이다가 그대로 몸이 뻣뻣하게 굳으며 혼절하고 말았다.그 모습을 본 배준형은 미간을 찌푸리더니 시종에게 슬쩍 눈짓을 보냈다.시종이 목청껏 소리쳤다."경군자께서 쓰러지셨습니다! 게 아무도 없소!"한참을 떠들고 나서야 내관 한 명이 다가와 시종에게 호통을 쳤다."방자한 놈. 궁에서 함부로 소란을 피우다니 죽고 싶으냐?""내관 어르신, 경군자께서 쓰러지셨습니다. 어서 폐하께 고하고 태의를 불러주십시오."시종이 다급히 말했다.하지만 내관은 쓰러진 배이수를 힐끗 보더니 경멸 어린 말투로 내뱉었다."폐하께서 명하셨다. 하늘에서 벼락이 치든, 숨이 끊어지기 직전이든 반드시 두 시진을 다 채워야 출궁할 수 있다고 하셨다!"서슬 퍼런 으름장에 시종은 말문이 막혔다.한편 배현준은 건양제의 부름을 받고 태화궁에 들었다.건양제는 산더미처럼 쌓인 상소문을 읽고 있다가, 발소리가 들리자 그제야 고개를 들었다."폐하."건양제는 담담히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상소문으로 시선을 돌렸다.한참을 고민하다 상소문에 윤허의 뜻으로 '허' 자를 적은 그는, 다음 상소문을 집어 들며 무심하게 물었다."짐이 이수에게 너무 매정하게 군다고 생각하느냐?"배현준은 고개를 끄덕이며 솔직하게 답했다."조금 그렇습니다."그 대답에 건양제는 콧방귀를 뀌었다."이수는 정왕의 손에 이끌려 유일한 황자라는 명분을 쥐고 입궁했습니다. 폐하께서 이름을 하사하신 그날 밤, 정왕부에는 수많은 문객이 몰려들었지요. 만약 폐하께서 이수에게 조금이라도 여지를 주셨다면, 대신들은 동요했을 것이고 앞다투어 황자의 비위를 맞추려 들었을 것입니다."배이수가 주제넘게 군 탓이었다.분수를 지켰더라면 황자라는 신분 하나만으로도 평생 부귀영화를 누렸을 것이다.건양제는 바쁜 와중에도 고개를 들어 옅은 미소를 지었다."그런 이유도 없진 않으나, 그게 전부는 아니다."그는 더 이상 구체적인 이유를 설명하지 않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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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68화

두 사람이 담씨 가문에 도착했을 때, 담성국은 직접 대문 앞까지 나와 기다리고 있었다."세자께 문안 올립니다."두 사람이 마차에서 내리자마자 담성국이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배현준은 손을 들어 그를 만류했다."담 대인, 그리 격식 차릴 것 없습니다.""외삼촌!"유지영도 담성국을 향해 웃으며 인사했다.일행은 함께 저택 안으로 들어섰다.유지영은 담씨 노부인이 마음에 걸려 먼저 문안을 드리러 갔고, 배현준은 담성국과 함께 서재로 향해 이야기를 나누었다.복성당.뜻밖에도 외숙모 한씨와 담시령도 복성당에 와 있었다."외숙모, 언니."유지영이 먼저 인사를 건넸다.하지만 두 사람의 태도는 몹시 냉랭했다.특히 담시령은 노골적으로 그녀를 비아냥거렸다."태후 마마의 총애를 한 몸에 받는 분이 여기까지 걸음하시니, 우리 담씨 가문의 영광이로구나."유지영은 담시령의 말을 가볍게 넘기고 담씨 노부인 곁으로 다가갔다."외할머니, 요 며칠 몸은 좀 어떠셨어요?"담씨 노부인은 애틋한 표정으로 유지영의 손을 맞잡았다."착하지, 할미는 괜찮다. 네가 북명 대사를 모셔와 준 덕분에 다리가 하루가 다르게 좋아지고 있어."담씨 노부인은 자리에서 일어나 몇 걸음 걸어 보이기까지 했다.걸음걸이가 다소 불안정하긴 했으나, 병상에 누워만 있던 예전에 비하면 훨씬 나아진 모습이었다.유지영은 진심으로 기뻤다."뭐가 그리 대단하다고 잘난 척하긴! 다 우리 가문 덕을 본 주제에, 혼자 온갖 찬사를 차지하고 있네."담시령은 어제 정왕부가 황궁에서 수모를 당했다는 소식에 분통이 터져 밤잠을 설친 상태였다.유지영을 향한 증오가 걷잡을 수 없이 치솟고 있었다."시령아!"담씨 노부인은 지팡이로 바닥을 세게 내리치며 싸늘하게 꾸짖었다."억지 부리지 말거라! 정왕부에 벌을 내린 사람은 지영이가 아니라 폐하이시다. 그리 억울하거든 당장 폐하께 달려가 따지지 그러느냐!"담씨 노부인은 아까부터 무려 한 시진이 넘도록 담시령의 불평불만을 들어주고 있었다.좋은 말로 타일렀건만, 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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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69화

"시령아, 이 일이 사람들에게 알려지면 어찌 될 것 같느냐?"한씨는 딸을 다그쳤다.이 일이 정왕부 귀에 들어가면 생명의 은인이 아니라 치밀하게 꾸민 자작극이 되어, 정왕비의 눈 밖에 날 것이라는 엄중한 경고였다.그제야 사태를 파악한 담시령은 이를 꽉 깨물었다."지영아, 내가 한순간 욱해서 헛소리를 했구나. 미안해."한씨는 그제야 고개를 돌려 유지영을 바라보며 말했다."지영아, 네 언니도 이용당했을 뿐이지 않느냐. 자매끼리 지난 일로 너무 앙심 품지 말고 이쯤에서 덮자꾸나."유지영은 여전히 분을 삭이지 못하는 담시령을 보며 담담히 미소 지었다."외숙모 말씀이 맞습니다. 긁어 부스럼을 만들 필요는 없지요.""그래, 역시 우리 지영이는 속이 깊구나. 오랜만에 외할머니를 뵈러 왔으니, 우린 이만 나가보마."한씨는 억지웃음을 지으며 담시령을 끌고 밖으로 나갔다.두 사람이 나가자 담씨 노부인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시령이 저 아이도 참 철이 없군. 나중에 뼈저리게 후회할 날이 올 게다!"노부인은 다시 유지영의 손을 잡고 근황을 물었다."잘 지내고 있었습니다."한씨에게 이끌려 처소로 돌아온 담시령은 분통을 터뜨렸다."저 계집이 일부러 절 협박한 거 아닙니까!""그만하지 못할까!"한씨는 딸을 흘겨보며 말했다."지영이가 경성에 온 지도 일 년이 다 되어간다. 그동안 그 애가 어떻게 변했는지 내 눈으로 똑똑히 보았어. 처신이 바르고, 나아갈 때와 물러설 때를 아는 아이다. 네가 먼저 건드리지 않았다면 그 애가 무엇하러 굳이 지난 일을 꺼냈겠느냐? 말로 겁박하면 순순히 네 뜻대로 움직여 줄 줄 알았어?"한씨는 사리분별을 못 하는 딸을 보며 답답한 듯 혀를 찼다.담시령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군주로 책봉되자마자 국공부를 분가시키고, 제 어미의 혼수를 되찾으며 둘째 삼촌네를 풍비박산 냈다는 걸 잊은 게냐? 셋째네도 마찬가지다. 시집간 지 며칠 만에 그 깐깐한 경왕비를 단숨에 눌러버렸지. 헌데 네가 무슨 수로 그 애를 처리하겠다는 말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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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70화

유지영은 찻잔을 들어 올리며 담담히 입을 열었다."외삼촌을 생각해서 드리는 충고입니다. 시령 언니는 정왕부로 시집가서는 안 됩니다."그 말에 한씨의 안색히 급격히 어두워졌다."배준형은 언니를 조금도 아끼지 않습니다. 철저히 이용할 뿐, 그의 마음속엔 오직 유선주뿐이지요. 게다가 배준형은 이미 태후 마마와 폐하의 눈 밖에 났습니다. 결코 큰 뜻을 이룰 수 없는 자입니다...""지영아. 태후 마마의 교지로 맺어진 혼사를 어찌 마음대로 물릴 수 있겠느냐. 나도 요즘 정왕부가 폐하의 눈 밖에 난 것은 알고 있다. 허나 사람 일이 어찌 늘 평탄하기만 하겠느냐. 굴곡도 있기 마련이지. 부부의 정이야 혼인한 뒤 천천히 쌓아가면 될 일이다."한씨는 타이르듯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정왕부와 경왕부가 앙숙인 것도 잘 안다. 허나 이 혼사가 아니었어도, 우리 담씨 가문이 경세자를 지지하는 일은 없었을 게다."한씨의 눈에는 유지영이 담씨 가문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일부러 이 혼사를 깨려 하는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유지영은 더 할 말이 없었다."그럼 시령 언니의 혼인 생활이 평안하기를 빌겠습니다."배현준의 말대로 사람의 운명은 각자 정해진 법이었다.그녀는 역시나 이렇게 될 줄 알고 오기 전부터 이미 두 가지 경우의 수를 준비해 둔 상태였다. 스스로 불구덩이에 뛰어드는 자를 말릴 수는 없는 법이었다!곧이어 고개를 드니 저 멀리 서 있는 배현준이 보였다.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에게 다가갔다.담성국이 남아서 저녁까지 먹고 가라며 붙잡았으나, 유지영은 정중히 사양했다.두 사람이 떠난 후, 담성국은 한씨를 바라보며 물었다."부인은 안색이 왜 그리 좋지 않은 게요?""지영이가 시령이더러 정왕부로 시집가지 말라고 하지 않습니까. 그동안 제가 소홀했던 것을 아직도 마음에 담아두고, 시령이가 잘되는 걸 보기 싫은 모양입니다."한씨가 한숨을 내쉬며 답했다."쓸데없는 소리. 지영이는 그런 속 좁은 아이가 아니오. 굳이 부인에게 충고했다면 필시 숨겨진 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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