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만독여향: 비단 위에 핀 꽃: Chapter 101 - Chapter 110

132 Chapters

101화

“짐을 보고도 놀라지 않다니, 역시 그대는 나의 존재에 대해서 알고 있었군.”설아는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반절을 올렸다.“신녀, 오늘 처음으로 황궁 구경을 하게 되었습니다. 감히 폐하의 용안을 알고 있을 리가 없습니다.”“그래? 그렇다면, 아주 담력이 큰 낭자로군. 하지만, 오히려 장락사에서 날 보고 더 놀라는 느낌을 받았다고 하면 어떤가?”그 말이 떨어지자 연백리가 설아를 힐끗 바라보았다.설아는 살짝 등골이 서늘해지며 식은땀이 흐르는 듯했지만, 겉으로는 조금의 흔들림도 내비치지 않은 채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영주시에서 뵐 수 없는 용모의 공자님이시라, 혹여 실례라도 하면 큰일이라 생각하여 조심했을 따름입니다.”“호오.”연각은 그럴싸한 대답이라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를 지었다.“내가 그때 분명히 다시 방문하겠다 약속을 했는데, 이렇게 불러들이게 해서 미안하군.”“백성 된 도리로 당연한 일이오니, 심려치 마시옵소서.”“가게에서 봤던 손수건도 눈에 띄는 솜씨였는데, 옷 짓는 솜씨까지 소문이 날 줄은 몰랐지.”연각은 소매 안에서 장락사의 사은품이었던 광목 손수건을 꺼내 천천히 펼쳐 보였다.그러자, 그 모습을 지켜보던 연백리의 눈썹이 알아챌 수 없을 만큼 미묘하게 꿈틀거렸다.“그래서 궁금하던 차에 이렇게 궁으로 불러 짐의 편복을 지어보라고 명을 내리려 하네.”순간 설아의 숨이 턱 막혔다.마주 잡은 두 손이 저도 모르게 파르르 떨렸지만, 그녀는 애써 침착한 표정을 유지하며 다시 한번 예를 올렸다.“폐하, 제가 짓는 옷은 그저 평민들이 입는 광목일 뿐이옵니다. 천하의 주인이신 폐하께 어울리는 옷이 아니오니, 부디 명을 거둬주시옵소서.”“이런.”연각은 아쉬운 듯 미간을 좁혔다.“다음에 방문하면 잘해주겠다고 분명히 본인 입으로 말하지 않았나? 약속은 지키라고 하는 것이지.”싱긋 웃는 얼굴은 여전히 부드러웠지만, 설아를 바라보는 눈빛만큼은 조금도 웃고 있지 않았다.설아는 마주 잡은 손에 조금 더 힘을 주며 조심스레 다시 입을 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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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화

“치수를 잴 수 있도록 줄자를 내어주시면, 빠른 시간 내 끝마치도록 하겠습니다.”그러고는 연백리를 향해 아주 짧게 눈짓을 보냈다.잠시 설아를 바라보던 연백리는 하는 수 없다는 듯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턱 근육이 미세하게 굳어졌지만, 끝내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태감의 뒤를 따라 승명전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문이 닫히고, 승명전 안에는 연각과 설아만이 남았다.잠시 후 시녀가 줄자를 가져오자, 설아는 두 손으로 그것을 받아 들었다.깊게 숨을 고른 그녀는 최대한 평정을 되찾으려 애쓰며 연각 앞으로 다가갔다.능숙한 손놀림으로 어깨에 줄자를 걸쳐 팽팽하게 당겼다.“어깨, 두 자 한 치.”곁에 서 있던 태감이 재빨리 붓을 움직였다.“소매는 세 자 두 치.”치수를 하나하나 재어 내려가던 설아는 마지막으로 허리를 재기 위해 잠시 걸음을 옮겼다.줄자를 허리에 두르려 팔을 뻗는 순간이었다.갑자기 연각의 팔이 뻗어와 설아의 허리를 덥석 끌어안았다.“앗!”설아는 깜짝 놀란 나머지 황급히 몸을 뒤로 빼려 했지만, 연각의 팔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단단하게 조여 오는 힘에 몸이 그대로 붙들리고 말았다.“폐하, 놓아주십시오!”설아는 다급히 외치며 품에서 벗어나려 애썼지만, 연각은 오히려 입가를 비틀어 올리며 그녀를 더욱 힘주어 품에 끌어안았다. “난 그대가 모란꽃이라는 말에는 동의하지 않아.”연각의 낮은 목소리가 귓가를 스쳤다.“내 생각에 그대는… 활짝 핀 복숭아꽃 같군. 훨씬 더 탐스럽고 달콤할 것 같단 말이지.”연각은 버둥거리는 설아의 가느다란 허리를 당겨 안으며 부드러운 목덜미에 입술을 묻었다. 코끝으로 스며들어오는 달큰하면서도 향기로운 설아의 체취에 저절로 두 눈이 감겼다. 긴 한숨을 쉬며 목덜미를 더듬고 매끄러운 뺨을 지나 앵두처럼 도톰하고 빨간 입술에 진한 입맞춤을 하려는 그 때. “폐하!”쨍하며 울려 퍼지는 날카로운 목소리에 연각의 몸짓이 멈추고 말았다.어느새 승명전 안에는 초영황후가 들어와 있었다.그녀의 얼굴은 질투와 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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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3화

승명전 안은 차가운 서릿바람이 스며든 듯 싸늘한 적막에 잠겨 있었다.연각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초영황후를 마주한 채 서 있었고, 황후 또한 처음으로 그의 시선을 피하지 않은 채 정면으로 바라보고 있었다.꽉 깨문 입술은 핏기가 모조리 가실 만큼 하얗게 질려 있었고, 치켜뜬 두 눈에는 금방이라도 불꽃이 튀어 오를 듯한 분노가 서려 있었다.한동안 이어진 침묵 끝에, 초영이 간신히 입을 열었다.“폐하. 신첩에게 하고 싶은 말씀은 없으십니까?”애써 담담하게 말하려 했지만, 떨리는 목소리만큼은 끝내 감출 수 없었다.하지만 연각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그저 시선을 돌린 채 모른 척 외면할 뿐이었다.“폐하.”초영은 다시 한번 그를 불렀다.이번만큼은 대답을 듣고 말겠다는 듯 간절함이 묻어나는 목소리였다.“그만! 황후는 거처로 돌아가시오.”연각은 뻔뻔할 정도로 태연했다.끝내 그녀를 돌아보지 않은 채, 초영의 물음을 들리지 않는 것처럼 흘려보냈다.초영은 떨리는 숨을 가다듬으며 한 걸음 앞으로 내디뎠다.“폐하. 신첩은 대답을 들을 자격이 있는 사람입니다.”연각의 미간이 불쾌하게 좁혀졌다.“그래서?”결국 그는 날카롭게 언성을 높이고 말았다.“내 입에서 무슨 소리가 듣고 싶은 거요? 미안하다는 말이라도 하란 말이오?”“그럼, 아니십니까?”초영의 눈가가 붉게 물들었다.금방이라도 눈물이 쏟아질 것처럼 떨리는 눈동자가 연각만을 붙잡고 있었다.“내가 왜 미안해야 하지? 난 천하의 주인인 황제인데! 내가 하고 싶은 일, 갖고 싶은 것은 모두 내 마음대로 할 수 있소!”연각은 두 팔을 활짝 벌리며 당당하게 외쳤다.조금의 죄책감도, 망설임도 찾아볼 수 없는 얼굴이었다.“내가 품고 싶어 품으려 했을 뿐인데, 그게 무슨 잘못이란 말이오? 그저 내 처첩 중에 한 명이 될 뿐이지,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오.”“폐하!”끝내 초영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참고 또 참아 왔던 감정이 한순간에 무너져 내리듯, 뜨거운 눈물이 뺨을 타고 쉼 없이 흘러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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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4화

연백리가 빙긋 웃으며 되물었다.“왜 도와줬다고 생각하지?”“왕야 혼자 오신 것보다 훨씬 도움이 됐으니까요.”그 말을 들은 연백리가 슬며시 정색하며 설아를 내려다보았다.“그건 오해야. 내가 황후와 같이 들이닥친 건, 이이제이의 계책을 택했을 뿐이니까.”“용케 황후와 말을 맞추셨네요.”“당연하지.”연백리의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갔다.“그게 바로 경무왕 전하시지.”그는 여간해서는 좀처럼 보인 적 없던 우쭐한 표정으로 만족스럽게 미소를 지었다.그 모습을 바라보던 설아의 입가에도 저도 모르게 옅은 웃음이 번졌다.“저는 늘 왕야의 도움만 받네요.”설아는 연백리의 품에 조용히 기대어 나직하게 말했다.조금 전 승명전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리니, 마음 한편이 괜스레 미안해졌다.“아니야. 그렇지 않아.”연백리는 망설임 없이 고개를 저었다.“저도 왕야를 도울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설아의 목소리에는 아쉬움이 묻어났다.언제나 도움을 받기만 하는 자신의 처지가 답답하기만 했다.“넌 이미 많은 것을 도왔어.”“돕긴요. 옷 만들어드린 것 외엔 별거 없는데요.”설아가 작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그러자 연백리가 설아의 비단 같은 머릿결에 가만히 입을 맞추며 말했다.“그게 왜 별거야.”잠시 머리카락을 쓰다듬던 그의 목소리가 한층 더 부드러워졌다.“내겐 가장 중요한걸.”설아는 잠시 말없이 그의 품에 안겨 있었다.“저도 힘이 있으면 좋으련만. 이룬 것도 없는데, 시련만 잔뜩이네요.”작게 내뱉은 한마디에는 그동안 쌓여온 답답함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그렇다는 건, 혼자서 할 생각을 하지 말라는 뜻 아닐까?”연백리는 설아를 내려다보며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내가 있잖아.”그 순간, 설아의 가슴이 두근거리며 크게 요동쳤다.머릿속을 번개처럼 스쳐 지나가는 수많은 생각들.이번 생에서는 정말 혼자가 아니라, 경무왕과 함께 복수를 완성하라는 것일까.“왕야.”“응?”연백리가 다정하게 대답했다.설아는 한동안 그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조용히 입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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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5화

태후의 말이 떨어지자 곁에 서 있던 상궁이 앞으로 나와 후부인을 조심스레 부축해 일으켰다.한참 동안 엎드려 있던 탓에 다리에 힘이 풀린 후부인은 비틀거리며 겨우 몸을 일으켰다.그러고는 다과상이 차려진 탁자 앞으로 다가와, 태후의 눈치를 살피며 엉덩이를 살짝 붙이고 조심스레 앉았다.그러자 현정태후가 찻잔을 내려놓으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여태껏 작위도 승계 받지 못했다지? 쯧쯧……”안타까워하는 듯한 말투였지만, 한마디 한마디가 후부인의 가장 아픈 속을 후벼 파고 있었다.후부인은 얼굴을 들지 못한 채 태후의 눈치만 살폈다.“아직 제 아들 진우가 관직에 나아가지 못한 탓입니다. 어려서부터 얌전하고 글을 좋아하여 아비를 따라 전장에 나가지 못했답니다. 피를 보는 것을 무서워하다 보니, 어찌 칼을 손에 들 수 있겠습니까아.”후부인은 금방이라도 서러움이 북받친다는 듯 손수건으로 눈가를 훔쳤다.“흑흑……”억지로 눈물을 쥐어짜는 모습이 역력했지만, 현정태후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후부인이 무엇을 원하는지쯤은 이미 오래전에 꿰뚫어 보고 있었다.다만, 그것을 순순히 내어줄 생각이 없었을 뿐이었다.태후는 찻잔을 매만지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그렇다면, 더더욱이나 내 근심을 없애줘야 하지 않겠나? 영원히 경북후부 현판을 매달고 싶다면 말이야.”“태후마마……”후부인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그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모를 만큼 어리석지는 않았다.아무리 태후의 명이라 한들, 친딸을…….차마 그 뒤를 생각하지도 못한 후부인은 겁에 질린 얼굴로 몸을 한껏 움츠리며 태후의 눈치만 살폈다.그 모습을 내려다보던 현정태후가 가소롭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흥, 그래도 어미라고 해코지는 겁이 나는가 보지?”그 말에 후부인의 얼굴이 더욱 새하얗게 질렸다.“태후마마, 제발 자비를 베풀어주시옵소서.”후부인은 다시 한번 바닥에 납작 엎드리며 애원했다.현정태후는 다시 찻잔을 들어 천천히 향을 음미하듯 한 모금 마셨다.“내 손으로 직접 치워버리려고 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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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6화

그 순간, 소설아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아니… 어떻게 제게 이렇게까지 하실 수가 있어요? 아이가 무슨 죄가 있다고 여기까지 데려와서 이러시는 거예요?”설아는 끝내 이성을 잃고 목이 터져라 소리치고 말았다.객잔 앞을 가득 메운 그 외침에 안에서 일을 보던 양부인이 황급히 밖으로 뛰어나왔고, 영묘와 소채 또한 상황을 살피기 위해 뒤를 따라나왔다.“소낭자, 이게 대체 무슨 일이실까요?”하지만 설아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얼굴은 새하얗게 질려 있었고, 두 눈은 믿을 수 없는 현실을 마주한 사람처럼 흔들리고 있었다.양부인은 영문도 모른 채 설아의 다리를 꼭 붙잡고 서 있는 어린 여자아이를 내려다보았다.그러다 문득 시선을 들어 저만치 떨어져 서 있는 경북후부인을 발견했다.후부인은 싸늘한 눈빛으로 이쪽을 한 번 훑어보더니, 마치 볼일을 모두 끝냈다는 듯 거만한 표정으로 몸을 돌렸다.곧장 마차에 올라탄 그녀는 조금의 미련도 없이 그대로 자리를 떠나버렸다.덜커덩.마차가 멀어져 가는 소리만이 객잔 앞에 허무하게 울려 퍼졌다.홀로 남겨진 어린아이는 울지도, 보채지도 않았다.그저 작은 두 손으로 설아의 옷자락을 꼭 붙잡은 채 말없이 서 있을 뿐이었다.양부인은 다시 아이와 설아를 번갈아 바라보며 조심스레 물었다.“소낭자, 대체 이 아이는 누구길래 어떻게 된 이유로 이곳에 있는 건가요?”설아는 금방이라도 울음이 터질 것 같은 얼굴로 한참 동안 입을 열지 못했다.겨우 마음을 추스른 그녀는 길게 한숨을 내쉰 뒤, 힘겹게 입을 열었다.“이 아이는… 제 조카예요. 육소령이라고 합니다.”“조카라고요?”양부인의 눈이 크게 흔들렸다.“예. 하나밖에 없는 제 언니가 진명후부에 시집가서 낳은 아이지요.”“그런데, 도대체 왜 이곳에……”말끝을 흐리는 양부인의 목소리에도 설아는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천천히 몸을 낮춘 설아는 자신을 꼭 붙잡고 서 있는 소령의 작은 어깨를 두 손으로 감싸 안았다.소령은 제 엄마를 꼭 닮은 맑고 고운 큰 눈으로 설아를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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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7화

낯선 곳이 아직 두려운지 소령은 설아의 곁을 떠나지 않은 채 조용히 옷자락만 만지작거리고 있었다.그 모습을 바라보던 설아가 나직하게 입을 열었다.“만약, 진명후부에서 진짜 보낸 거라면 내가 키워야지. 어머니는 키울 생각이 없으신 것 같고. 그렇다고 오라버니에게 보낼 수도 없잖아.”소채가 무언가 더 말하려는 순간이었다.옆에 서 있던 영묘가 슬며시 팔꿈치로 소채를 툭 건드리며 말없이 고개를 저었다.괜한 말을 꺼내 설아의 마음을 더 무겁게 만들지 말자는 뜻이었다.소채도 그 마음을 알아챈 듯 입을 다물었다.그때, 양부인이 안쪽에서 걸어 나왔다.“우선 왕부에 소식을 넣었어요. 빠르면 내일 정도 아이를 봐줄 수 있는 사람이 올 거예요.”설아는 안도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그렇다고는 해도 당분간은 같이 장락사에 왔다 갔다 해야 할 거 같아요. 아이도 저와 이곳이 익숙해지려면 그 방법이 최선이고요. 안에서 쉴 수 있도록 내실도 정리해야겠네요.”양부인이 선뜻 대답했다.“네. 빨리 이곳에 익숙해질 수 있도록 다 같이 돕겠습니다.”“정말 고마워요, 양부인.”설아는 감사한 마음을 담아 양부인을 바라보았다.양부인은 그저 따뜻하게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그제야 설아는 가슴 깊이 눌러 담고 있던 숨을 길게 내쉬었다.‘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는 천천히 생각해 보자. 이 어린아이를 다시 돌려보낼 수는 없어.’설아는 가만히 소령을 바라보다가 문득 연백리의 얼굴을 떠올렸다.이 아이를 보여주면 화를 낼까.다시 돌려보내라며 아이를 데리고 가라고 하지 않을까.잠시 그런 생각이 스쳐 지나갔지만, 설아는 이내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아냐.그럴 리는 없겠지.그럴 사람이 아니니까.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욱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아무 상관도 없는 아이까지 품겠다고 하는 자신의 선택이, 또다시 연백리에게 짐이 되는 것은 아닐까.‘그래도 어쩌겠어. 모든 걸 쉽게 넘어갈 수 없는 내 업보인 것을.’설아는 깊은 시름에 잠겼다.하지만 그런 설아와는 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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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8화

양부인은 소령을 바라보며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다.“이제 앞으로 저희와 살면서 많이 웃고, 떼도 부리는 밝은 아이로 자라게 해주면 되겠지요.”그 말에 설아도 고개를 끄덕이며 조용히 소령의 작은 손을 감싸 쥐었다.“그렇지요. 이제 앞으로의 날들이 더 중요하니까요.”그렇게 일행은 장락사에 도착해 하루 장사를 준비하기 시작했다.문을 열기 전부터 영묘와 소채는 진열된 옷감들을 다시 한번 가지런히 정리했고, 양부인과 임주부도 분주히 가게 안을 오가며 손님 맞을 채비를 마쳤다.설아는 틈틈이 소령의 상태를 살피며 장락사 안쪽에 자리를 마련해 주었다.낯선 곳에서도 소령은 말없이 얌전히 앉아 사람들을 구경하고 있었다.이윽고 장락사의 문이 활짝 열리자, 기다렸다는 듯 손님들이 하나둘 가게 안으로 들어서기 시작했다.천명사의 소문을 듣고 찾아온 사람들까지 더해지면서, 시간이 흐를수록 가게 안은 점점 북적이기 시작했다.점심 무렵이 되자 장락사 안은 발 디딜 틈조차 없을 만큼 사람들로 가득 찼다.설아는 손님들을 응대하면서도 틈이 날 때마다 소령을 살피며 정신없이 하루를 보내고 있었다.그때였다.갑자기 가게 밖이 술렁이기 시작했다.웅성거리던 사람들의 목소리가 점점 가까워지더니, 마치 바다가 갈라지듯 손님들이 하나둘 양옆으로 비켜섰다.순식간에 장락사 입구 앞으로 길 하나가 길게 열렸다.“무슨 일이죠?”양부인이 의아한 표정으로 밖을 내다보려던 순간이었다.누군가 거만한 걸음으로 장락사 안으로 들어섰다.화려한 비단옷을 걸친 남자는 손에 든 부채를 정신없이 흔들며 가게 안을 천천히 둘러보았다.그러더니 사람들의 시선을 한몸에 받으며 큰 소리로 외쳤다.“이곳에 소설아라는 낭자가 있는가?”갑작스러운 호명에 가게 안이 순식간에 조용해졌다.손님들의 시선이 일제히 설아가 있는 쪽으로 향했다.양부인이 재빨리 앞으로 나서며 공손하게 물었다.“저희 행수이신데, 무슨 일이신지요?”남자는 양부인을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대꾸조차 하지 않았다.이내 다시 부채를 흔들며 거만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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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9화

양부인이 앞으로 나서며 되묻자, 육위안은 인상을 험악하게 구기며 버럭 소리를 질렀다.“어서 관청에 가서 혼인신고를 해야 하지 않나! 저 아이를 데리고 있는 것 자체가 나의 평처가 되어 어미 노릇을 하겠다는 뜻 아닌가? 그렇지 않다면, 왜 아이를 데리고 있는 게야!”양부인은 기가 막히다는 표정으로 육위안을 바라보았다.너무나 터무니없는 말이라 뭐라 대꾸할 말조차 떠오르지 않았다.게다가 작위를 가진 고위 귀족인 만큼, 곁에 서 있던 임주부 역시 쉽게 나설 수 없는 상황이었다.육위안은 그런 두 사람을 비웃듯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갈 길이 바쁘니, 어서 이리 오게. 나와 함께 진명후부로 가야지. 태부인께서 기다리고 계시네.”태부인.설아는 그 이름을 듣는 순간, 등골을 타고 서늘한 소름이 번져 가는 것을 느꼈다.언니 소설영이 죽게 된 원인의 팔 할은 바로 시어머니였던 태부인 때문이었다.그 악마 같은 인간 앞으로 자신을 또 끌고 가려 하다니.설아는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애써 억누르며 육위안을 노려보았다.“진명후부는 정말 양심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인면수심의 소굴이네요. 언니가 죽은 것만으로도 모자라, 저까지 끌고 가서 죽일 작정입니까?”설아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왜요? 언니가 그렇게 꼼짝없이 당하다 죽으니, 저까지 만만해 보이십니까?”“뭐라? 이런 발칙한 것을 봤나!”육위안은 쌍심지를 세우며 한 손을 번쩍 치켜들었다.금방이라도 설아의 뺨을 후려칠 기세였다.“소낭자!”양부인과 임주부가 동시에 놀라 앞으로 뛰쳐나오려던 바로 그 순간.어디선가 귀에 익은 목소리가 장락사 안을 쩌렁쩌렁 울렸다.“지금 뭐 하는 짓이냐!”육위안은 물론, 장락사 안에 있던 사람들 모두가 깜짝 놀라 목소리가 들려온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그리고 그 모습을 확인한 양부인과 임주부의 얼굴에 금세 화색이 돌았다.“왕야!”“전하!”덜덜 떨리는 몸을 양부인에게 의지한 채 간신히 버티고 있던 설아의 눈에도 한 사람이 들어왔다.은은한 광택이 감도는 흑색 비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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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화

육위안의 두 발이 허공에서 허우적거렸다.그는 연백리의 손에 대롱대롱 매달린 채 버둥거리며 켁켁 숨넘어가는 소리만 토해낼 뿐이었다.“얼마냐? 얼마를 주고 저 혼인 증서를 얻어냈냐고!”연백리가 으르렁거리듯 내뱉자, 육위안은 숨을 헐떡이며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시, 십만 냥!”그 말을 듣는 순간, 연백리가 고개를 돌려 크게 외쳤다.“임지강! 당장 안에 가서 십만 냥을 꺼내와라! 이자의 면상에 던져줘야겠다!”명령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임주부는 안으로 뛰어들어갔다.잠시 뒤, 은자가 가득 담긴 묵직한 자루를 두 손에 들고 숨 가쁘게 뛰어나왔다.그사이 연백리는 육위안을 거칠게 바닥으로 내던져 버렸다.“아이쿠!”육위안은 엉덩방아를 찧으며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연백리는 임주부의 손에서 은냥 자루를 낚아채더니, 그대로 육위안을 향해 힘껏 내던졌다.털썩!묵직한 은냥 자루가 육위안의 품에 떨어졌다.“당장 이것 갖고 꺼져라!”육위안은 아픈 엉덩이를 연신 문지르며 허겁지겁 돈자루를 끌어안았다.그 모습을 내려다보던 연백리가 이를 악문 채 차갑게 경고했다.“두 번 다시 내 눈에 띄지 마라.”순간 장락사 안이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을 만큼 조용해졌다.“목숨을 살려 보내주는 것은 오늘이 마지막이다. 알겠느냐!”연백리의 일갈에 육위안은 얼굴이 새파랗게 질린 채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그러고는 돈자루를 움켜쥔 채,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치듯 장락사를 빠져나가고 말았다.설아는 그만 다리에 힘이 풀려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소설아!”연백리가 다급히 그녀를 부르며 한걸음에 다가와 몸을 부축했다.그러자, 뒤쪽에서 조용히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소령이 끝내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엄마아~!”갑작스럽게 벌어진 소란이 어린아이의 마음속 공포를 건드린 모양이었다.설아는 울음을 터뜨리는 소령을 바라보다가 간신히 두 팔을 벌렸다.그러자 소령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설아를 향해 달려와 품속으로 폭 안겼다.설아는 흐느끼는 아이를 꼭 끌어안은 채 작은 등을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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