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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l Chapters of 나의 불행을 너에게: Chapter 11 - Chapter 20

38 Chapters

11화

원래도 술이 약한 데다 안좋은 몸상태 눈앞의 시야가 격렬하게 흔들렸다. 웅성거리는 동기들의 목소리가 수중에서 들리는 것처럼 아득해졌다.설아는 정신을 잃지 않기 위해 테이블 아래로 주먹을 피가 통하지 않을 정도로 꽉 쥐었다. 손톱이 살을 파고드는 통증으로 간신히 버텼다.‘버텨야 해. 여기서 쓰러지면 안 돼…….’설아의 시야가 가파르게 흔들리는 와중에도, 테이블 건너편의 공기는 잔인할 만큼 다정했다.서진은 설아가 독한 위스키를 삼키는 순간조차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아니, 돌리지 않은 것인지 아니면 눈앞의 대화에 가려 정말 보지 못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철저하게 외면당한채 설아는 의식을 가까스로 붙잡고 있었다.수현은 그런 설아의 하얗게 질린 안색을 놓치지 않았다. 서진의 시선이 아주 잠깐이라도 맞은편으로 향하지 못하도록, 그녀는 더욱 자극적인 카드를 꺼내 들었다.수현이 묵직한 크리스탈 글라스에 빛깔이 아주 짙은 위스키를 새로 따랐다. 얼음도 섞이지 않은, 스트레이트 잔이었다."유서진, 우리 옛날에 학회 마감 끝내고 밤새 마셨던 거 기억나? 그때 네가 나한테 완패했었잖아."수현이 도발적인 미소를 지으며 잔을 서진의 눈앞으로 바짝 들이밀었다. 술잔 너머로 수현의 집요한 시선이 서진의 눈에 꽂혔다."오늘 그때 복수할 기회 줄게.“서진의 시선이 수현이 건넨 잔으로 향했다. 승부욕을 자극하는 수현의 노련한 말솜씨와 눈앞을 가로막은 독한 술잔 때문에, 서진의 세계는 순식간에 수현이 짜놓은 판 안으로 좁혀졌다. 맞은편에서 힘겨워하는 설아의 존재는, 이미 안중에도 없었다."내가 너한테 졌다고? 기억을 왜곡하네, 박수현.“서진이 피식 웃으며 수현이 건넨 잔을 받아 들었다.두 사람의 잔이 맑은 소리를 내며 부딪치는 순간, 수현은 만족스러운 듯 설아를 향해 힐끗 시선을 던졌다. '내 말이 맞지? 넌 여기 끼어들 자리가 없어'라고 속삭이는 듯한, 조롱 가득한 눈빛이었다.설아는 당장 그 숨 막히는 방에서 벗어나야만 했다. 그렇지 않으면 이대로 쓰러져 버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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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화

그때, 서진의 기류를 읽은 수현이 생긋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내가 화장실 가볼게. 남자 새끼들이 되어놔서 센스가 없냐. 너희는 술이나 마시고 있어.“가볍게 발걸음을 옮겨 화장실에 들어선 수현은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웃음기를 싹 지웠다. 사방이 고요한 화장실 안에서, 그녀는 구두 굽 소리를 죽이며 닫힌 칸들을 하나씩 확인하기 시작했다.그리고 가장 마지막 칸 앞에서 수현의 발길이 멈췄다. 문이 완전히 닫히지 않은 채 반쯤 열려 있었다. 수현이 슬그머니 문을 밀어젖히자, 그 좁은 공간 안에 설아가 쓰러져 있었다. 핏기가 하나도 없는 창백한 얼굴, 차가운 타일 바닥에 힘없이 쓰러져 있었다.수현은 잠시 그 모습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그 얼굴에는 놀람도, 당황함도 없었다. 도대체 무슨 감정인지 읽기 어려울 정도로 서늘하고 무감각한 시선이었다.한참을 내려다 보던 수현이 누군가 화장실로 들어오는 소리에 몸을 움직였다. 그녀는 구두 끝으로 설아의 쓰러진 몸을 칸 안쪽으로 깊숙이 밀어 넣었다. 그리고 문을 닫았다. 밖에서 슬쩍 봐서는 사람이 쓰러져 있다는 것을 절대 눈치챌 수 없도록,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세면대 앞으로 걸어 나온 수현은 수도꼭지를 틀고 정갈하게 손을 씻었다.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완벽한 얼굴을 가만히 응시하던 그녀는, 파우치에서 립스틱을 꺼내 흐트러짐 없이 입술을 고쳐 발랐다. 거울 속 수현의 미소가 잔혹하게 빛났다.룸으로 돌아온 수현이 아무렇지 않게 서진의 옆자리에 앉으며 말했다."서진아, 설아 씨 화장실에도 없던데? 몸 안 좋다고 하더니 먼저 집에 간 거 아냐?"그 말에 옆 자리에 있던 친구 하나가 고개를 갸웃했다."어? 집에 갔다고? 가방도 안 가져갔는데?“순간, 서진의 시선이 테이블 위로 내리꽂혔다. 그곳에는 설아가 들고 왔던 작은 클러치 백과 여전히 깜빡이는 휴대폰이 그대로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서진은 망설임 없이 그대로 룸의 문을 열어 젖히고 나갔다.서진은 친구들의 부름도 무시한 채 빠르게, 거의 뛰다시피 룸 밖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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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화

술기운이 거나하게 오른 친구들이 하나둘 먼저 가겠다며 자리를 뜨자, 널찍한 룸 안에는 어느새 서진과 수현, 단둘만이 남게 되었다.수현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서진의 단단한 어깨에 제 몸을 온전히 기대어 왔다. 화끈거리는 위스키 향과 짙은 향수 냄새가 뒤섞인 숨결을 흘리며, 그녀는 취한 척 아득한 대학 시절의 이야기를 나지막이 꺼내 들었다."유서진…… 내가 학교 다닐 때 너 진짜 많이 좋아했던 거, 알지? 너네 부모님도 나 엄청 예뻐하셨잖아....그때 진짜 나 너 좋아했었는데.....”서진은 수현의 애탄 섞인 고백에 대답 대신 피식, 메마른 웃음을 흘렸다. 이미 취한 서진의 눈동자는 평소의 날카로움을 잃고 둔탁하게 풀려 있었다.수현은 제 어깨를 감싸 안지도, 그렇다고 밀어내지도 않는 서진의 모호한 태도를 기회로 확신했다.그녀의 노골적인 시선이 서진의 잘생긴 얼굴을 탐하듯 훑어내렸다. 이윽고 수현은 테이블 아래로 손을 뻗어, 서진의 탄탄한 허벅지 안쪽 깊숙한 곳을 느릿하게 쓸어 올렸다.두꺼운 슬랙스 천 너머로 선명하게 전해지는 뜨거운 손길에 서진의 미간이 좁아졌다. 서진이 고개를 돌려 수현을 내려다본 순간, 수현은 망설임 없이 그의 목을 감싸 안으며 그대로 입술을 집어삼켰다."읍…….“이성이 마비된 서진은 제 입안을 헤집는 수현을 거부하지 않았다.오늘 설아와 집에서 있었던 불쾌한 기분을 화풀이 하듯 수현의 허리를 단단히 감싸 쥐며 거칠게 입술을 맞부딪쳤다.두 사람의 거친 숨소리가 룸안을 가득 채웠다. 수현의 손길은 한층 더 과감하고 노골적으로 서진의 셔츠 단추 사이를 파고들며 단단한 가슴과 등줄기를 훑어내렸다.수현은 소파에 앉아 있는 서진의 탄탄한 몸 위로 완전히 올라탔다. 짧은 치마 자락이 허벅지 위로 거침없이 말려 올라갔다. 수현은 서진의 뜨거운 목덜미에 잘게 입을 맞추며, 지체 없이 그의 바지 벨트를 거칠게 풀어내렸다.터질 듯 팽팽하게 부풀어 오른 서진의 묵직한 존재감이 수현의 손아귀에 꽉 차게 쥐어졌다.수현이 제 치마 속 은밀한 곳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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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화

수현의 애원 섞인 콧소리가 서진의 등 뒤에 닿았다.하지만 서진은 수현의 손길을 가볍게 떼어내며 손목시계를 확인했다."늦었어. 설아가 걱정할 거야.“서진의 입에서 나온 그 세 음절은 수현의 이성을 사정없이 난도질하기에 충분했다.‘이설아.’방금 전까지 거친 숨을 몰아쉬며 자신을 탐했던 서진이 이 열기가 식기도 전에 집에서 기다릴 아내를 입에 올리고 있었다. 수현은 머리끝까지 분노가 치밀었다. 하지만 수현은 노련했다. 여기서 감정을 터뜨리면 서진과의 관계가 영영 끝난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내가 생각이 짧았네. 미안."수현은 오히려 살짝 짓궂은 미소를 지으며 아무렇지 않게 소파 위로 떨어진 옷들을 주워 입기 시작했다."하긴, 내가 너무 붙잡아뒀다. 가자, 나도 피곤하네.“룸을 나온 두 사람은 적막한 복도를 걸었다. 술집의 화려했던 조명들은 대부분 꺼져 있었고, 복도 끝 화장실 쪽은 유독 어둡고 고요했다.서진의 발걸음이 화장실 앞을 지날 때 아주 잠깐 느려졌다. 본능적인 이끌림이었을까. 하지만 수현이 타이밍 좋게 서진의 팔짱을 끼며 그의 시선을 가로막았다."기사님 밑에서 대기 중이지? 나 진짜 졸리다, 서진아.""어, 내려가자.“결국 두 사람은 화장실을 그대로 지나쳐 엘리베이터에 올랐다.두 사람의 구두 굽 소리가 완전히 사라진 화장실 안.설아의 가녀린 숨소리는 이제 들리지 않을 만큼 희미해져 가고 있었다.새벽 5시를 향해 가는 시간, 적막에 잠긴 집안으로 들어선 서진은 현관문을 닫자마자 알 수 없는 한기에 휩싸였다.평소라면 은은하게 켜져 있어야 할 거실 스탠드 불빛도 없었고, 너무 고요했다."이설아.“낮게 부른 이름은 허공에 흩어질 뿐이었다. 불안감이 엄습했다. 서진은 구두를 거칠게 벗어던지고 서둘러 안방으로 향했다. 문을 열어젖히자, 미동도 없이 깔끔하게 정돈된 텅 빈 침대가 눈에 들어왔다."이설아…… 집에 온 게 아니었어?“휴대폰도, 가방도 모두 술집 테이블 위에 놓고 사라진 설아였다, 휴대폰, 지갑도 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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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화

순간, 심장이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그리고 바로 이어서 불길한 전화벨이 울렸다. 기사였다.[대, 대표님! 큰일 났습니다. 사모님께서…….]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기사의 목소리는 사시나무 떨듯 사정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말을 잇지 못하고 더듬거리는 기사를 향해 서진이 핏대를 세우며 소리쳤다."무슨 일인데! 똑바로 말해!!“[영상을 확인하던 중에 사모님이 화장실에서 나오시는 동선이 없어서, 이상하다 싶어 매장 직원과 함께 급히 여자 화장실로 가봤더니…… 사모님께서…… 화장실 구석 칸 안에서 피를 흘리며 쓰러져 계셨어요! 바닥이 온통 피바다입니다. 지금 바로 119 불러서 응급실로 이송 중입니다!]"……뭐?“순간 서진의 머릿속이 하얗게 점멸했다. 귀에서 삐- 하는 이명이 울렸다.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었다고?자신이 수현과 몸을 섞으며 쾌락에 취해있던 그 긴 시간 동안, 설아가 차가운 바닥에서 피를 흘리고 있었다는 말인가..."그래서, 지금 상태는! 상태는 어떠냐고!!“서진은 미친 사람처럼 거실 테이블 위의 차 키를 낚아챘다. 떨리는 손으로 대충 겉옷을 걸쳐 입으며 수화기가 터져라 소리쳤다.[그게…… 머리를 크게 부딪치신 것 같은데다, 발견이 너무 늦어져서 피를 너무 많이 흘렸다고 합니다.지금 현재 의식이 전혀 없는 상태예요…]의식이 없다. 발견이 너무 늦었다.기사의 말이 칼날이 되어 서진의 심장을 난도질했다."어디 병원이야. 빨리 말해, 당장!!!“[지금 여기서 가장 가까운 강일병원 응급실로 가고 있습니다! 대표님, 지금 그리로 오셔야…….]기사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서진은 전화를 끊어버렸다.서진은 거칠게 차 키를 손에 쥔 채 현관문을 박차고 나갔다. 이미 새벽 내내 독한 위스키를 몇 잔이나 들이켠 만취 상태였지만, 이성적인 판단 따위는 뇌리에서 완전히 지워진 지 오래였다.지하 주차장으로 내려가는 엘리베이터 안에서 서진의 손이 사정없이 떨렸다. 거칠게 차에 올라탄 그는 시동을 걸고, 굉음과 함께 주차장을 빠져나와 빗길 같은 도로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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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화

설아의 얼굴은 지독할 정도로 고요하고 편안한 표정이었다. 그 평온함이 오히려 서진을 미치게 만들었다."설아야…… 제발 깨어나기만 해줘. 응? 깨어나서 나를 원망해도 좋으니까 눈만 떠봐, 제발…….“서진은 차마 설아의 창백한 뺨을 만지지도 못한 채, 그 차가운 손을 제 두 손으로 꼭 감싸 쥐고 침대맡에 엎드렸다.그 순간, 거칠게 병실 문이 열리며 설아의 부모님이 소식을 듣고 지방에서 급히 올라와 들이닥쳤다.두 사람은 병실 안의 풍경을 마주하자마자 주저앉았다. 침대에 미동도 없이 누워있는 제 귀한 딸을 보며, 노부부는 가슴을 쥐어뜯으며 하염없이 눈물만 흘릴 뿐이었다."설아야…… 아이고, 내 새끼야! 이게 무슨 일이야……!“오랜만에 마주한 자신의 딸이 이런 시체 같은 모습이라니. 가뜩이나 사위의 그늘에 가려 연락도 자주 못 하던 딸이었다. 하얗게 질린 창백한 얼굴과 몰라보게 야윈 마른 몸을 쓰다듬으며 설아의 어머니는 꺼질 듯 통곡했다. 서진은 죄인처럼 그 곁에서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입술만 피가 나도록 깨물었다.몇 날 몇 일이 지나도 설아는 깨어날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산소호흡기의 기계음만이 규칙적으로 병실을 채울 뿐이었다.이 비극적인 소식을 듣고도, 서진의 부모는 매정했다.'바빠서 갈 시간이 없다'는 비겁한 핑계를 대며 단 한 번도 병문안을 오지 않았다.서진도 회사를 오래 비울수 없는 자리였기에 회사를 마냥 비워둘 수만은 없어 자주 병실을 비워야 했다. 결국 설아의 곁을 밤낮으로 지키는 것은, 힘없고 나이든 설아의 부모님뿐이었다.서진은 매일 밤 지옥 같은 죄책감과 압박감을 이기지 못해 술로 머리를 식혔다. 독한 알코올이 없으면 단 1분도 잠들기 어려웠다.설아가 의식을 잃은 지 어느덧 한 달이 지날 무렵, 지방에 있는 집을 오래 비워둔 설아의 부모님이 집안 단속과 짐 정리를 위해 잠시 내려가게 되었다. 설아의 부모님이 자리를 비운 그날 밤, 서진은 홀로 설아의 병실을 지키고 있었다.고요하다 못해 적막한 병실의 문이 조용히 열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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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화

수현의 입에서 흥분과 쾌락으로 뒤범벅된 노골적인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수현은 거친 반동에 몸이 흔들리면서도, 고개를 돌려 저편 환자 침대에 의식없이 누워있는 설아의 모습을 똑똑히 응시했다. ‘결국 서진이는 내 차지야.’ 수현의 입꼬리가 승리의 비웃음으로 일그러졌다.오직 살과 살이 부딪히는 외설적인 파동만이 병실을 지배했다. 이윽고 절정에 다다른 서진의 격렬한 움직임이 멈추고, 두 사람은 서로의 몸 위에 엎어진 채 가쁘게 숨을 몰아쉬었다.정신이 조금 돌아온 서진은 거칠어진 옷을 고쳐 입다가, 산소호흡기를 낀 채 누워 있는 설아에게 시선이 닿자미안함과 불쾌감에 서진은 급히 고개를 돌려버렸다.하지만 그 불쾌감도 찰나였다. 한 번 무너진 둑은 겉잡을 수 없었다.그날 밤을 시작으로, 두 사람은 설아가 의식이 없는 틈을 타 대담하고 잔인한 밀회를 즐기기 시작했다. 설아가 누워있는 병실의 보호자 침대에서, 때로는 화려한 최고급 호텔 스위트룸에서, 그리고 설아의 온기가 아직 남아있는 서진의 집 안방 침대에서까지 두 사람의 추악하고 자극적인 밀회는 설아의 깊은 잠을 비웃듯 계속해서 이어졌다.그러나 이 관계에서 서진의 감정은 지독하리만치 무미건조했다. 서진은 수현에게 단 한 조각의 마음도 주지 않았다. 그에게 수현은 애틋한 첫사랑도, 매력적인 연인도 아니었다. 그저 매일 밤 숨을 막아오는 죄책감을 잠재우고, 터질 것 같은 육체적 욕구를 배설하듯 풀어낼 정교한 도구일 뿐이었다.그러던 어느 날 밤, 여느 때처럼 서진의 집 안방 침대에서 수현과 격정적인 행위를 끝낸 서진은 샤워를 마치고 거실로 나왔다. 담배를 한 대 피워 물며 창밖의 어둠을 응시하던 서진은 욕구를 채우면 채울수록, 역설적이게도 병실에 누워있는 설아의 창백한 얼굴이 더 선명하게 뇌리를 파고들었다. 서진은 신경질적으로 담배를 비벼 껐다.바로 그때, 서진의 휴대폰이 요란하게 울렸다. 밤낮으로 병실을 지키던 설아의 아버지가 걸어온 전화였다. 이 새벽에 걸려 올 리 없는 전화에 서진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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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화

누워있는 자신의 코앞에서 살을 섞으며 탐욕스럽게 울려 퍼지던 서진과 수현의 그 더러운 신음소리, 자신을 비웃던 수현의 숨결, 설아는 단 한 마디도 잊지 않고 기억하고 있었다.저녁 시간이 지나고, 설아가 씻기 위해 거실에서 혼자 낑낑대며 휠체어 바퀴를 움직였다.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 바퀴를 굴리는 손길이 위태로웠다. 그때, 소리 없이 다가온 서진이 뒤에서 휠체어 손잡이를 붙잡고 매끄럽게 샤워실 안으로 설아를 옮겼다."그만 나가줘요. 혼자 씻을 수 있어요."설아의 목소리는 건조했다. 서진은 부드럽게 웃으며 설아의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이 몸으로 어떻게 혼자 씻겠다는 거야. 고집 부리지 마.""혼자 할 수 있어요. 그러니까…….“설아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서진의 커다란 손이 설아의 입고 있던 얇은 원피스 단추를 거침없이 벗겨내기 시작했다."오빠, 제가 해요. 그만 나가주세요!“설아가 다급하게 제 옷자락을 붙잡고 거부하자, 서진은 부드럽지만 반박할 수 없는 강압적인 눈빛으로 설아를 올려다보았다."난 네 남편이야, 아픈 널 씻겨주는 건 당연한 일이지. 가만있어.“서진은 설아가 움켜쥐고 있던 힘없는 손가락을 손쉽게 하나씩 풀어냈다. 완전히 실루엣이 드러난 설아의 마른 몸을 단숨에 안아 올린 서진은, 따뜻한 물이 가득 찬 욕조 안으로 그녀를 조심스럽게 밀어 넣었다.서진은 스펀지에 거품을 내어 설아의 하얀 어깨와 등을 조심스럽게 닦아주기 시작했다. 지극히 다정하고 섬세한 손길이었다. 하지만 그 손가락이 살결에 닿을 때마다 설아는 뼈마디가 시릴 정도의 소름이 끼쳤다.‘서진아…… 아.., 더 깊이…….’자신이 산소호흡기를 끼고 사선에 서 있던 그 병실에서, 제 바로 옆 보호자 침대에서 수현과 난잡 하게 사랑을 나누던 서진의 거친 짐승 같은 신음소리가 자꾸만 귓가를 맴돌아 정신이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목욕을 마친 설아의 몸은 물기 머금은 하얀 꽃처럼 창백하면서도 기묘하게 매혹적인 아우라를 풍겼다.젖은 머리칼 아래로 드러난 가녀린 목선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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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화

관계를 마친 서진은 제 품에서 벗어나려는 듯 멀어지는 설아를 강하게 끌어당겨 자신의 팔베개 위에 눕혔다.품에 안긴 설아의 몸은 어떠한 저항도, 온기도 없이 그저 딱딱하게 굳어 있을 뿐이었다. 감정 없이 안겨 있는 설아의 정적을, 서진은 그저 오랜 투병 끝에 찾아온 피로감이라 여겼다.서진은 설아의 부드러운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쓸어내리며 만족스러운 듯 말을 이어갔다."설아야, 네가 영영 깨어나지 못할까 봐 내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몰라."서진의 낮고 다정한 목소리가 안방을 채웠다."이제 정말 내가 잘할게. 그러니까…… 다시는 이혼이란 단어 꺼내지 마.“그 가식적인 고백을 실시간으로 귀에 담는 설아는 헛웃음조차 나오지 않았다. 기가 막혔다.‘걱정?자신이 산소호흡기에 의지해 가쁜 숨을 몰아쉬던 그 침대 옆에서 박수현과 살을 섞으며 흥분에 겨운 소리를 내뱉던 남자의 입에서 나온 말치고는 지나치게 뻔뻔했다.누워있는 제 앞에서 둘이 그렇게 좋아 죽어놓고, 이제 와서 애처가 흉내를 내는 유서진의 이중성에 설아는 가슴 속 깊은 곳에서부터 역겨움이 치밀었다.서진은 자신의 절절한 고백에도 아무런 대답이 없자, 의아한 듯 고개를 숙여 설아를 내려다보았다. 설아는 그저 미련 없이 눈을 감고 있었다. 그 더러운 얼굴을 마주하고 싶지 않아서였다."……자 설아?“서진은 대답 없는 설아의 감긴 눈꺼풀과 이마 위에 부드럽게 입맞춤을 한 뒤, 그리고 마치 자신의 소유물을 더 단단히 가두려는 것처럼, 설아의 가녀린 몸을 팔 가득 더 세게 껴안았다.다음 날 아침, 서진은 평소처럼 아침 일찍 일어나 완벽한 수트 차림으로 출근 준비를 마쳤다. 거울 앞에서 넥타이를 정돈한 그는 침대에 누워있는 설아에게 다가와 몸을 숙였다. 그리고 짙은 블랙 코트 자락을 휘날리며 설아의 입술 위에 부드럽게 입을 맞췄다."다녀올게. 무리하지 말고 집에서 쉬고 있어.“문이 닫히고 도어록이 잠기는 소리가 적막한 집안에 울려 퍼지자마자, 설아가 눈을 떴다.설아는 서진이 나간 현관 쪽을 바라보며 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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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화

이래서 수준에 맞는 집안끼리 결혼을 해야 하는데, 없는 집 애 하나 우리 착한 서진이 때문에 거둬줬더니 상전도 이런 상전이 없네, 아주. 쯧쯧!"시어머니는 들으라는 듯 주방을 향해 혀를 차며 가장 치명적인 비수를 꽂아 넣었다. 설아의 부모까지 통째로 모욕하는 잔인한 언사였다.그 순간, 설아는 온몸의 피가 거꾸로 솟구치는 것 같았다. 자신이 사선을 헤매는 동안 밤낮으로 병실을 지키며 눈물로 밤을 지새운 부모님이었다.설아의 맑은 눈망울에 금세 눈물이 그렁그렁하게 차올랐다.'울지 마, 이설아. 여기서 울면 지는거야.‘설아는 심호흡을 하며 준비한 차를 쟁반에 들고 거실로 걸어 나갔다.거실로 걸어 나오는 설아의 발걸음마다 시어머니의 따가운 시선이 송곳처럼 날카롭게 박혔다. 설아는 쟁반을 내려놓으며 간신히 떨림을 억누른 목소리로 물었다."어머니, 오늘 무슨 일 때문에 오셨어요?"그 나지막한 질문이 떨어지기 무섭게, 시어머니는 코방귀를 뀌며 고개를 빳빳이 쳐들었다."내가 내 아들 집에 오는데 너한테 이유를 말하고 허락이라도 맡고 와야 되니? 어처구니가 없어서 정말.""…….“설아는 입술을 짓이기며 말을 삼켰다. 그런 설아의 모습을 본 시어머니는 턱짓으로 소파 앞 테이블을 가리키며 뻔뻔하게 본론을 꺼냈다."오늘 서진이 퇴근하면 여기서 같이 저녁 먹으려고 왔다. 아, 그리고 수현이도 초대했으니까 정성껏 저녁상 좀 차려 봐라. 손님 대접 소홀히 해서 우리 서진이 얼굴에 먹칠하지 말고."그 순간, 설아는 귀를 의심했다.아직 몸도 성치않은 며느리에게 손수 저녁상을 차려내라는 시어머니의 잔인함에 치가 떨렸다. 결혼 직후부터 충분히 가사 도우미를 쓸 수 있는 유복한 집안이었음에도, "여자가 손에 물을 묻혀봐야 살림 귀한 줄 안다"며 가차 없이 반대했던 시어머니였다. 그 지독한 시월드의 그림자는 여전히 설아의 목을 조르고 있었다.자신을 철저히 기만하고 짓밟은 불륜 당사자들을 위해 저녁준비 라니..시어머니는 설아를 기죽이고 모욕하기 위해 일부러 박수현을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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