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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화 박제된 천재의 비명(1)

제11화 박제된 천재의 비명(1)챙-.크리스털 샴페인 잔이 가볍게 부딪치는 소리가 넓은 홀을 울렸다.서울 시내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광화문의 5성급 호텔 최상층 연회장.매년 이맘때쯤 열리는 출판계의 가장 큰 행사, '문인의 밤'이었다. 이름만 대면 알 만한 대형 출판사 대표들, 평론가들, 그리고 베스트셀러 매대에 책을 올린 작가들이 한데 모여 교양을 과시하는 자리였다.그 화려하고 웅장한 공간의 한가운데.언제나 그렇듯 중심에는 강도진이 있었다."강 작가님, 이번 유럽 판권 수출 계약 건 들었습니다. 선인세가 어마어마하던데요? 역시 한국 문단의 자랑이십니다."국내 최대 규모의 문학 출판사, 민음서관의 최 대표가 특유의 과장된 웃음을 지으며 도진에게 잔을 내밀었다.도진은 맞은편에서 날아오는 노골적인 아부의 말을 여유롭게 받아넘겼다."과찬이십니다, 대표님. 그저 운이 좋았을 뿐이죠. 번역가분이 제 문장의 뉘앙스를 아주 잘 살려주신 덕분입니다.""에이, 겸손하시기는. 원작이 훌륭하니까 번역도 빛을 발하는 거죠. 유럽 독자들도 강 작가님 특유의 그 서늘하고 날카로운 심리 묘사에 푹 빠졌다는 기사를 봤습니다."옆에 서 있던 김 평론가가 거들었다."맞습니다. 강도진 작가님의 소설은 인간의 가장 밑바닥에 있는 위선과 욕망을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듯 해부해 내지 않습니까? 특히 그 전작 《유리구슬》에서의 결말은 아직도 문단에서 회자되고 있죠. 완벽한 플롯이었습니다.""부끄럽습니다. 좋게 읽어주셨다니 다행이네요."도진은 옅은 미소를 지으며 샴페인을 한 모금 머금었다.입안으로 퍼지는 값비싼 빈티지 샴페인의 향. 최고급 맞춤 정장이 주는 부드러운 착용감. 자신을 우러러보는 사람들의 선망 어린 시선.모든 것이 완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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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화 박제된 천재의 비명(2)

제12화 박제된 천재의 비명(2)"하하하! 역시 강 작가님. 후배 아끼는 마음이 각별하십니다.""태경 작가, 대선배님 조언 새겨들어야지."류태경은 자존심이 상한 듯 얼굴이 붉어졌지만, 차마 도진의 압도적인 아우라 앞에서 더 이상 대꾸하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도진은 잔에 남은 샴페인을 비워냈다.싸움에서는 이겼지만, 입안이 모래를 씹은 것처럼 까끌까끌했다.'다들 나를 지켜보고 있어. 내가 언제 추락할지, 언제 밑천이 드러날지.'숨이 막혀왔다. 목 끝까지 채운 와이셔츠 단추가 밧줄처럼 느껴졌다."죄송하지만, 화장실 좀 다녀오겠습니다."도진은 정중하게 양해를 구하고 사람들의 무리에서 빠져나왔다.연회장을 벗어나 긴 복도를 걷는 동안 도진의 표정은 점차 굳어져 갔다. 여유롭고 부드럽던 가면이 벗겨지고, 신경질적이고 피폐한 본래의 얼굴이 드러났다.그는 화장실이 아니라 비상구 계단으로 향했다.무거운 철문을 밀고 들어가자, 퀴퀴한 시멘트 냄새와 서늘한 공기가 훅 끼쳐왔다.철컥, 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도진은 벽에 기대어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하아... 하아..."손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도진은 재킷 주머니에서 신경안정제가 들어 있는 작은 약통을 꺼냈다. 알약 두 개를 입에 털어 넣고 침으로 억지로 삼켰다.목구멍으로 넘어가는 쓴맛.그는 넥타이를 거칠게 풀어헤치며 눈을 감았다.어둠 속에서 깜빡이는 커서.텅 빈 백지.아무리 키보드를 두드려도 모래알처럼 흩어지는 활자들.'나는 끝났어.'절망감이 해일처럼 도진을 덮쳤다.자신이 쌓아 올린 견고한 성이, 사실은 썩은 기둥 위에 세워진 모래성이라는 것을 매일 밤 확인하는 끔찍한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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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화 선을 넘는 온도(1)

제13화 선을 넘는 온도(1)청담동의 프라이빗 다이닝 레스토랑.고급스러운 샹들리에 조명 아래, 갤러리 아르테 팀원들의 회식 자리가 이어지고 있었다. 최고급 한우 오마카세와 한 병에 수십만 원을 호가하는 와인이 세팅된 테이블.평소라면 우아한 예술계의 가십이나 다음 분기 전시 기획에 대한 고상한 대화가 오갔을 자리였다.하지만 오늘따라 프라이빗 룸의 공기는 숨이 막힐 듯 무거웠다.원인은 단 한 사람.테이블 가장 끝자리에 삐딱하게 앉아 있는 남자, 이안 때문이었다."……."서아는 와인잔을 만지작거리며 미간을 미세하게 좁혔다.신진 작가 발굴 기획전. 서아는 심사위원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이안의 그림을 메인 홀에 거는 것을 밀어붙였다. 그 기괴하고 폭력적인 붉은 캔버스가 갤러리에 가져올 파격을 확인하고 싶다는, 큐레이터로서의 오만함 혹은 호기심 때문이었다.전시를 앞두고 작가와 실무진이 얼굴을 트는 자리. 서아는 분명 비즈니스 차원에서 그를 이 자리에 불렀다.하지만 이안은 이 정제된 공간에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불청객이었다."이안 작가님. 고기 더 안 드세요? 입에 안 맞으신가……."옆에 앉은 어시스턴트 윤지수가 눈치를 보며 물었다.이안은 턱을 괸 채 제 앞에 놓인 최고급 안심스테이크를 나이프로 대충 쑤적거리고 있었다. 물감이 채 지워지지 않은 손톱 밑이 하얀 접시 위에서 유독 이질적으로 보였다."됐어. 피 질질 흐르는 고기 씹는 취미 없으니까.""아…… 네에."지수가 멋쩍게 웃으며 슬그머니 몸을 뒤로 뺐다.이안은 와인잔을 옆으로 밀어내고, 웨이터를 불렀다."여기, 소주 한 병 줘요."웨이터의 얼굴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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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화 선을 넘는 온도(2)

제14화 선을 넘는 온도(2)"누가 돈 달래?"탁-.이안의 커다란 손이 서아의 핸드백 위를 덮었다."……!"서아가 놀라 고개를 들었다. 이안이 턱밑까지 다가와 있었다.그의 큰 체구가 가로등 불빛을 가리며 서아의 위로 짙은 그림자를 드리웠다.도망칠 곳이 없었다. 뒤에는 서아의 주차된 차가 막고 있었고, 앞에는 이안이 거대한 벽처럼 버티고 섰다."비켜요."서아가 목소리를 깔며 경고했다.하지만 이안은 비키기는커녕, 상체를 살짝 숙여 서아의 얼굴과 시선을 나란히 맞췄다.그의 까만 눈동자가 서아의 흔들리는 동공을 집요하게 파고들었다."당신, 오늘 회식 내내 나만 보더라.""……뭐라고요?""내가 물잔을 들 때도, 나이프를 쥘 때도. 당신 시선은 계속 내 손끝에 닿아 있었잖아. 안 그래?"정곡을 찔렸다.서아는 회식 내내 이안을 무시하려 애썼지만, 시선은 자꾸만 그의 거친 손과 핏대 선 팔뚝으로 향했었다. 그것은 철저하게 무의식적인 반응이었다."착각하지 마. 나는 당신이 또 무슨 돌발 행동을 해서 분위기를 망칠까 봐 감시한 것뿐이니까.""감시?"이안이 낮게 웃었다. 목 안쪽에서 끓어오르는 듯한 진득한 웃음소리였다."당신은 참 그럴싸한 변명들을 잘 만들어내. 비즈니스, 통제, 감시. 그렇게 그럴듯한 단어들로 당신의 진짜 속내를 칭칭 감아놓고 살지.""헛소리 그만하고 비키라고 했습니다."서아가 이안의 가슴팍을 손으로 밀어냈다.하지만 단단한 근육질의 몸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안은 서아가 밀어낸 손을 그대로 낚아챘다."읏……."이안이 서아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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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화 서늘한 체온, 그리고 완벽한 고립(1)

제15화 서늘한 체온, 그리고 완벽한 고립(1)"하아, 하아……."차 문이 닫히는 순간, 서아는 참았던 숨을 한꺼번에 토해냈다."손님. 목적지 연남동 자이 아파트 맞으십니까?""네. 맞아요. 최대한 빨리 가주세요."떨리는 목소리를 간신히 억누르며 대답했다.차창 밖으로 시선을 돌릴 용기조차 나지 않았다. 대리기사가 엑셀을 밟고 차가 미끄러지듯 출발하는 그 순간까지도, 서아는 창문 너머 어둠 속에 우뚝 서 있을 그 남자의 시선이 제 목덜미를 꿰뚫는 것만 같아 소름이 돋았다.'나한테, 철저하게 헤집어지고 싶어서 그런 거 아니야?'머릿속에서 이안의 낮고 진득한 목소리가 무한 번 반복 재생되고 있었다."미친 자식……."서아는 창문에 머리를 기댄 채 두 눈을 질끈 감았다.분노였다. 명백한 분노여야 했다.자신의 커리어와 사회적 지위를 알면서도 길거리에서 함부로 손목을 낚아채고, 창녀에게나 할 법한 저급한 농담을 지껄인 무례한 예술가에 대한 분노.하지만 서아의 심장 박동은 분노의 궤도를 이탈해, 지독하게 불길하고 낯선 리듬으로 뛰고 있었다.오른쪽 손목이 화끈거렸다.이안이 꽉 움켜쥐었던 자리. 그의 거친 굳은살이 닿았던 피부에서 불이 붙은 것처럼 델 듯한 열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손님, 에어컨 좀 틀어드릴까요? 땀을 많이 흘리시는 것 같은데."룸미러로 서아의 상태를 힐끗 살핀 기사가 조심스럽게 물었다."아…… 네. 부탁드릴게요. 조금 춥게 틀어주세요.""밤공기가 제법 쌀쌀한데, 어디 편찮으신 건 아니죠?""괜찮습니다. 그냥 차멀미가 좀 나서 그래요."서아는 핸드백을 무릎 위에 꽉 끌어안으며 짧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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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화 서늘한 체온, 그리고 완벽한 고립(2)

제16화 서늘한 체온, 그리고 완벽한 고립(2)"도진 씨?"거실을 향해 작게 불렀지만 대답은 없었다.서재의 불은 꺼져 있었고, 침실 문틈으로만 옅은 무드등 불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벌써 잠자리에 든 모양이었다.서아는 현관에서 트렌치코트를 벗어 미친 듯이 털어냈다. 혹시라도 그 천박한 담배 냄새가 이 완벽한 공간에 단 한 방울이라도 떨어질까 봐 두려웠다.코트를 스타일러 안에 쑤셔 넣듯 걸어둔 서아는 곧장 욕실로 향했다.철컥, 문을 잠그고 세면대 앞에 섰다.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이 낯설었다.평소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던 올림머리는 잔뜩 헝클어져 있었고, 아이라인은 미세하게 번져 있었다. 무엇보다 눈동자. 항상 차갑고 이성적이던 그 눈동자 안에, 낯선 정욕과 공포가 뒤엉켜 일렁이고 있었다.서아는 수도꼭지를 끝까지 돌렸다.얼음장같이 차가운 물이 쏟아져 내렸다.그녀는 펌프형 핸드워시를 두 번, 세 번 거칠게 눌러 손바닥에 듬뿍 짰다. 그리고 이안이 잡았던 오른쪽 손목을 미친 듯이 문지르기 시작했다.거품이 일어나고, 피부가 벌겋게 달아오를 때까지 씻고 또 씻었다."지워져라. 제발…… 지워져."손톱으로 긁어대듯 피부를 문지르다 보니 옅은 생채기마저 생겼다.하지만 씻어내면 씻어낼수록, 그의 손에 잡혔을 때의 그 끔찍하게 뜨거웠던 감각은 뇌리에 더욱 선명하게 달라붙었다.'내 말이 틀려?'턱을 쥐고 강제로 시선을 맞추던 그의 눈."악!"서아는 신경질적으로 수도꼭지를 잠그고 세면대를 양손으로 짚었다. 숨이 거칠었다.안 되겠다.도진이 필요했다. 남편의 확인이 필요했다.나는 사랑받는 아내이고, 이 견고하고 우아한 세계의 안주인이라는 사실을 남편의 몸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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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화 얄팍한 방어기제(1)

제17화 얄팍한 방어기제(1)완벽한 화이트 큐브.먼지 한 톨 없는 갤러리 아르테의 VIP 접견실은 서아에게 있어 일종의 성역이자 요새였다.항온 항습기가 돌아가는 미세한 백색소음.벽에 걸린 수천만 원짜리 단색화.블랙 글래스로 마감된 차가운 테이블.이 공간 안에서 서아는 철저한 지배자였다. 예술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자본의 흐름을 통제하고, 오만한 작가들의 기를 꺾어 자신의 기획 의도대로 움직이게 만드는 수석 큐레이터."……하아."하지만 오늘 아침, 서아의 입에서 새어 나온 것은 권위 있는 지시가 아니라 억눌린 한숨이었다.그녀는 테이블 위에 놓인 차가운 에스프레소 잔을 들어 올려 한 번에 입안으로 털어 넣었다. 쓴맛이 혀뿌리를 강타했지만, 곤두선 신경을 가라앉히기에는 역부족이었다.오른쪽 손목.서아는 무의식적으로 재킷 소매를 끌어내려 손목을 덮었다. 어젯밤 샤워 타월로 피부가 벌겋게 일어날 때까지 문질러 씻었지만, 이안이 남긴 그 끔찍한 악력의 감각은 좀처럼 지워지지 않았다.'당신한테서 낯선 냄새 나.'서아는 눈을 질끈 감았다.어젯밤, 차갑게 돌아누운 채 자신을 밀어내던 남편 도진의 서늘한 목소리가 귓가에 환청처럼 맴돌았다.결국 서아는 뜬눈으로 밤을 새웠다.도진의 옆에 웅크려 누운 채, 숨소리조차 제대로 내지 못하고 어둠 속에서 죄인처럼 아침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남편이 출근 준비를 위해 침대에서 일어났을 때, 서아는 자는 척하며 그의 시선을 피했다.자신이 왜 남편의 눈치를 봐야 하는지, 왜 이토록 끔찍한 죄책감과 수치심에 시달려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아니야. 난 잘못한 거 없어.'서아는 속으로 수백 번 되뇌었던 문장을 다시 한번 곱씹으며 눈을 떴다.'그 미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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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8화 얄팍한 방어기제(2)

제18화 얄팍한 방어기제(2)"말조심해!"서아의 평정심에 쩍, 하고 금이 가는 소리가 났다.그녀는 테이블을 양손으로 짚고 상체를 앞으로 기울이며 목소리를 낮춰 경고했다."여기는 내 직장이고, 내 구역이야. 어젯밤 일은…… 당신이 술에 취해 벌인 저급한 실수로 치부하고 덮어주기로 했어. 내 커리어에 오점 남기기 싫어서. 그러니까 당신도 주제 파악하고 내가 깔아준 판 위에서 얌전히 그림이나 쳐 그려. 쓸데없는 환상 품지 말고."독사처럼 쏟아내는 서아의 경고.그것은 이안을 향한 것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자기 자신을 세뇌시키기 위한 방어기제이기도 했다.하지만 이안의 눈에는 그 앙칼진 저항이 그저 우습고 가소롭게 보일 뿐이었다."덮어준다고?"이안이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났다.그의 큰 체구가 그림자를 만들어내며 서아를 압박했다. 이안은 테이블을 돌아 서아가 앉아 있는 쪽으로 천천히 걸어왔다."……오지 마. 거기 앉아."서아가 본능적으로 의자 등받이 쪽으로 몸을 움츠렸다. 방금 전까지 세워두었던 날 선 권위가, 그가 다가오는 발걸음 하나에 속절없이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이안은 서아의 의자 팔걸이를 양손으로 짚었다.완벽하게 퇴로가 차단되었다.가까워진 거리.오늘 아침 서아가 들이부었던 짙은 향수 냄새가 이안의 코끝을 찔렀다."독하네."이안이 서아의 목덜미 근처로 얼굴을 슬쩍 들이밀며 중얼거렸다."뭐가…….""향수 냄새. 평소에 뿌리던 무화과 향이 아니잖아.""……!""뭘 그렇게 필사적으로 지우고 싶었어? 아니면, 뭘 감추고 싶었던 건가."서아는 숨을 들이켜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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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9화 시선이라는 이름의 해체(1)

제19화 시선이라는 이름의 해체(1)해방촌의 좁고 가파른 골목길.도무지 끝이 날 것 같지 않은 오르막길을 오르며, 서아는 거칠어지는 숨을 몰아쉬었다."하아, 하아……."또각, 또각.아스팔트 바닥에 부딪히는 지미추 힐의 마찰음이 유난히 신경질적으로 울려 퍼졌다.자신의 매끈한 검은색 벤츠는 골목 초입에 간신히 구겨 넣듯 주차해 둔 상태였다. 평소라면 흠집이라도 날까 봐 절대 세워두지 않았을 비좁은 자리였지만, 지금 서아의 머릿속에는 그런 이성적인 판단이 들어설 자리가 없었다.'미쳤어. 내가 여길 왜…….'서아는 속으로 수십 번, 수백 번 같은 질문을 던지며 자신의 발걸음을 저주했다.당장이라도 뒤돌아 도망치고 싶었다.하지만 그녀의 발은 마치 보이지 않는 실에 조종당하는 인형처럼, 이안이 알려준 낡은 적벽돌 빌라를 향해 맹목적으로 움직이고 있었다.'다음번엔 핑계 대지 말고, 그냥 작업실로 와.''그때는 진짜로 벗겨줄 테니까.'오전 내내, 아니 갤러리를 빠져나와 이곳으로 향하는 내내 이안의 그 오만한 목소리가 귓가에 들러붙어 떨어지지 않았다.서아는 그 말도 안 되는 도발에 정면으로 맞서기 위해 온 것이라고 스스로를 세뇌했다.수석 큐레이터로서, 전시를 코앞에 둔 작가의 작업 진행 상황을 불시 점검하러 온 것뿐이다. 그 건방진 입에서 다시는 그런 천박한 소리가 나오지 못하도록, 자신의 지위와 권력으로 그를 완벽하게 짓눌러버리겠다고 다짐했다.하지만.빌라의 옥탑방으로 이어지는 철제 계단 앞에 섰을 때, 서아의 심장은 터질 듯이 요동치고 있었다.녹슨 철계단을 밟고 올라서는 매 순간, 그녀가 겹겹이 껴입은 사회적 체면과 방어기제가 하나씩 떨어져 나가는 것만 같았다.끼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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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0화 시선이라는 이름의 해체(2)

제20화 시선이라는 이름의 해체(2)서아는 엉덩이를 떼고 당장이라도 문을 향해 달려가고 싶었다. 이 불결하고 숨 막히는 공간에서 벗어나, 안전하고 서늘한 남편의 품으로 돌아가야 맞았다.하지만.스툴에 닿은 그녀의 몸은 마치 납덩이라도 매단 것처럼 무거웠다.이안의 시선.도망칠 테면 쳐보라는 저 오만하고 확신에 찬 눈빛.그 눈빛이 서아의 오기를, 아니, 그녀의 가장 깊은 곳에 억눌려 있던 기묘한 피학성을 자극하고 있었다."……빨리 끝내."침묵 끝에 서아의 입에서 새어 나온 목소리는 형편없이 갈라져 있었다."나 시간 많지 않아."스스로도 믿을 수 없는 항복 선언.서아는 입술을 짓이기며 핸드백을 무릎 위에 꽉 끌어안았다.이안의 입꼬리가 호선을 그리며 말려 올라갔다.그는 만족스러운 포식자의 미소를 지으며 이젤 앞에 자리를 잡았다."자세가 너무 굳었어. 어깨에 힘 빼."이안의 지시가 떨어졌다."됐어. 그냥 그려.""내가 그리는 건 정물화가 아니라 인물화야. 그따위로 경직되어 있으면 죽은 사람을 그리는 거랑 다를 게 없잖아."이안이 스케치북을 내려놓고 성큼 다가왔다.그의 커다란 손이 서아의 어깨 위로 툭, 얹혀졌다.서아는 숨을 들이켰다."힘 빼."이안의 손아귀에 힘이 들어갔다.그의 거친 굳은살이 얇은 실크 블라우스 너머로 서아의 쇄골을 지그시 눌렀다.단순히 자세를 교정하기 위한 터치였지만, 서아에게는 그 손길이 벌겋게 달아오른 쇠인두가 살갗에 닿는 것처럼 뜨겁게 느껴졌다.그녀의 어깨가 저항하듯 뻣뻣해졌지만, 이안은 개의치 않고 그녀의 승모근부터 목덜미까지 느릿하게 쓸어내렸다."하아…&he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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