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못다 핀 사랑을 다시 피우리라 : Chapter 1 - Chapter 10

12 Chapters

제 1화 죽을 운명의 왕과의 혼례

혼례는… 생각보다 훨씬 길었다.아니, 길다는 말로도 부족했다.지우는 이를 악물었다.‘이거 언제 끝나…? 진짜 하루 종일 하는 거 아니야?’눈앞에는 줄지어 선 대신들.무겁게 내려앉은 공기.그리고—자신의 몸.붉은 혼례복이 낯설게 느껴졌다.분명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대한민국에서 평범하게 살고 있었는데.지금은—조선.그것도 궁 안.‘미친 거 아니야, 진짜…’도망칠 수도 없었다.이미 모든 게 시작된 뒤였으니까.“부인.”갑작스러운 목소리에 지우의 시선이 흔들렸다.옆.자신의 ‘남편’이라는 사람이 서 있었다.“안색이 좋지 않아 보이오. 어디 불편한 것이 있소?”지우는 순간 표정이 굳을 뻔했다.‘뭐야… 몇 번 보지도 못했으면서 왜 이렇게 다정해?’속으로 투덜거리면서도, 겉으로는 빠르게 표정을 정리했다.“아닙니다. 처음 겪는 혼례라… 조금 긴장했을 뿐입니다.”“그렇소?”사내의 눈빛이 부드럽게 흔들렸다.“그렇다면 다행이오. 혹 몸이 좋지 않은 줄 알고 걱정했소.”그 말과 함께—그가 웃었다.지우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아니, 못 했다기보단—할 수가 없었다.‘…뭐야.’심장이, 이상하게 뛰었다.눈앞의 사내는—말도 안 되게 잘생겨 있었다.조선의 그 어떤 사내와 비교해도 부족함이 없을 정도로,아니, 오히려 더 눈에 띌 정도로.게다가—‘어려.’겨우 열넷.앳된 얼굴에, 말도 안 되는 외모.현대였다면?‘이미 번호 따고 있었다, 100%.’지우의 입꼬리가 아주 미세하게 올라갔다가, 다시 내려갔다.지금은 그런 상황이 아니니까.여긴 조선이고—이곳은 궁이다.그리고 무엇보다.지금 이 혼례의 상대는—단종.그리고 자신은—그의 비, 정순왕후.‘하필이면… 왜.’지우는 속으로 절규했다.‘그 많은 왕후 중에 왜 정순왕후야!’역사 지식이 많지는 않았지만,이 정도는 알고 있었다.단종.짧은 재위.그리고—비극.‘순탄하게 사는 왕후도 많잖아… 왜 하필 이런 루트야.’그때였다.따뜻한 감촉이 손등에 닿았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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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화 -들리는 밤

문이 닫혔다.탁.그 소리는 이상할 정도로 크게 울렸다.지우는 가만히 서 있었다.방 안은 고요했지만—이상하게, 숨이 막히는 느낌이 들었다.“…들리십니까.”낮게 깔린 목소리.지우의 시선이 옆으로 향했다.그—남편.단종이 조용히 입을 열고 있었다.“문 밖에, 사람이 있습니다.”지우의 심장이 순간 철렁 내려앉았다.“…네?”“발소리가 들립니다. 네 명.”지우는 숨을 죽였다.그제야 들렸다.아주 미세한 기척.움직임을 죽인 채, 문 앞을 지키고 있는 사람들.‘뭐야… 이거.’첫날밤이다.왕과 왕비가 단둘이 있어야 할 밤.그런데—밖에 누군가가 있다.그것도 네 명이나.“왜… 지키고 있는 거죠?”지우가 최대한 작게 물었다.그러자 단종이 잠시 말을 멈췄다.그리고는—아주 조용히 대답했다.“저를, 지킨다는 명목입니다.”그 말에 담긴 의미는 하나였다.지우의 눈이 가늘어졌다.‘지킨다?’아니.이건—감시다.그것도 노골적인.지우는 문 쪽을 한 번 힐끗 바라봤다.닫힌 문.하지만—‘듣고 있을 수도 있어.’순간, 등골이 서늘해졌다.그때였다.툭.지우의 손등 위로, 무언가가 닿았다.깜짝 놀라 고개를 들자—단종이 그녀를 보고 있었다.“…놀라게 했다면, 미안합니다.”목소리는 여전히 조용했다.“이대로 있으면… 더 의심을 살 것 같아서.”지우는 그 말을 이해하는 데 몇 초가 걸렸다.“…아.”첫날밤.부부.그리고—문 밖의 감시자들.‘연기하라는 거네.’지우의 입꼬리가 아주 미세하게 올라갔다.이 상황에서도, 웃음이 나왔다.‘생각보다… 머리 잘 돌아가는데?’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그리고는—조금 더 가까이 다가갔다.의도적으로.“폐하.”일부러, 들릴 듯 말 듯한 목소리.“이렇게 하면… 괜찮으시겠습니까?”단종의 눈이 아주 잠깐 흔들렸다.그는 잠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지우는 속으로 피식 웃었다.‘어라?’‘이건 또 순수하네.’손은 먼저 잡아놓고—이런 상황엔 약하다?지우는 조금 더 다가갔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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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3화 웃고있는 사람

아침 공기가 묘하게 무거웠다.지우는 눈을 떴다.잠을 잔 건지, 버틴 건지 모를 밤이었다.옆을 보자—그가 있었다.단종.조용히 앉아 있었다.이미 일어나 있었던 모양이다.“…주무시지 않으셨습니까?”지우의 물음에 단종이 고개를 살짝 저었다.“괜찮습니다.”짧은 대답.하지만—어딘가 긴장한 기색이 남아 있었다.지우는 잠시 그를 바라보다가 입을 열려던 순간—똑.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방 안 공기가 단번에 얼어붙었다.“…누구냐.”단종의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았다.문 밖에서 바로 답이 돌아왔다.“수양대군, 문안 인사 올립니다.”순간.지우의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뭐야.’왜 여기까지 와?아침.왕비전.그리고—수양대군.수양대군.이 조합이 의미하는 건 하나였다.‘보러 왔다.’지우는 직감했다.단순한 문안이 아니다.확인하러 온 거다.“…들라 하라.”단종이 짧게 말했다.문이 열렸다.그리고—한 사람이 들어왔다.걸음 하나, 하나가 느릿했다.하지만 그 느림이 오히려 더 압박으로 느껴졌다.지우는 본능적으로 알았다.‘이 사람.’위험하다.수양대군은 두 사람 앞에 멈춰 섰다.그리고—미소를 지었다.“…폐하.”고개를 숙인다.겉보기에는 완벽한 예였다.하지만—눈은 웃고 있지 않았다.“밤은 편안히 보내셨습니까?”지우의 눈이 아주 미세하게 흔들렸다.그 말.너무 평범한데—전혀 평범하지 않았다.옆에서 단종이 웃으며 대답했다."예, 숙부. 염려해 주신 덕에 편히 쉴 수 있었습니다.”단종은 웃고 있었다.아무렇지 않다는 듯이.그 모습에—지우의 눈썹이 아주 미세하게 찌푸려졌다.입술 안쪽을 살짝 깨물었다.‘전하…’속으로 부르듯, 아주 작게.시선은 여전히 앞을 향한 채였다.‘저 사람이 무슨 짓을 할지도 모르는데…’눈동자가 천천히 흔들렸다.다시 한 번 수양대군을 훑는다.‘왜 저렇게 아무렇지 않으신 거야…’순간—지우의 시선이 다시 단종에게 꽂혔다.답답함이, 목 끝까지 차올랐다.하지만 내색할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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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4화 왕비를 향한 첫 시험

집으로 돌아온 수양대군은 아무 말 없이 붓을 들었다.먹을 묻히고—난을 그리기 시작했다.사각, 사각.고요한 방 안에 붓이 종이를 긁는 소리만 울렸다.한 획.그리고 또 한 획.같은 선을, 몇 번이나 덧그었다.이미 완성된 난이었다.그럼에도—손은 멈추지 않았다.“….”붓끝이 잠시 멈췄다.눈이 가늘어졌다.아침.왕비전에서 마주했던 얼굴이—문득 떠올랐다.“…그런 일 없었습니다.”차분한 말투였다.단종과 크게 다르지 않은, 단정한 말.문제는—말이 아니었다.수양대군의 손이 다시 움직였다.사각—하지만 이번엔, 획이 조금 비뚤어졌다.“…표정.”작게 중얼거렸다.겁을 먹은 듯하면서도—완전히 무너지지는 않았다.피하려는 눈빛이었지만,끝까지 피하지는 않았다.‘숨기고 있었다.’그 사실이—묘하게 걸렸다.수양대군의 입꼬리가 아주 미세하게 올라갔다.“…”흥미였다.붓을 내려놓았다.그리고—조용히 중얼거렸다.“재미있군.”시선이 창밖으로 향했다.왕비.처음 보는 얼굴.처음 보는 눈.그리고—처음 보는 반응.수양대군의 눈이 천천히 가라앉았다.‘그저 순한 아이는 아니겠어.’붓에서 손을 뗀 수양대군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대길.”문밖 공기가 미세하게 흔들렸다.“밖에 있느냐.”말이 끝나기도 전에—문이 열렸다.기척은 거의 없었다.검을 찬 사내 하나가 안으로 들어왔다.발소리조차 죽인 채였다.“부르셨습니까.”짧고 낮은 음성.수양대군은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 말했다.“그래.”잠시 침묵.그리고—천천히 입꼬리가 올라갔다.“재미있는 것을 하나 보았다.”그제야 고개가 살짝 기울었다.시선이 어딘가를 향했다.“…이번에 들어온 왕비 말이다.”대길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저 조용히 기다렸다.수양대군의 손가락이 탁자 위를 가볍게 두드렸다.툭.툭.“겉은 얌전한데—”잠시 멈춘다.“속이 보이질 않아.”그 말은—칭찬에 가까웠다.혹은, 경계.수양대군의 눈이 가늘어졌다.“확인해봐야겠지.”짧게.담담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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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5화 궁에 적응하다

낯선 환경에 적응하지 못할까 걱정했던 지우는 아침 수라를 보는 순간,어쩌면 잘 지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김이 은은하게 피어오르는 수라에는 육해공의 음식이 고루 차려져 있었고,그 맛 또한 훌륭했다.다만, 자신이 밥을 먹는 모습을 궁녀들이 가만히 지켜보고 있다는사실은 여전히 어색하고 불편했다.지우는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수저를 들었다.그러나 한 숟갈을 뜰 때마다 시선이 따라붙는 듯한 느낌에, 손끝에 힘이 들어갔다.‘이렇게까지 지켜볼 일인가…’속으로 중얼거리며 고개를 살짝 들었을 때였다.“입에 맞으십니까.”조용하지만 또렷한 목소리가 방 안의 공기를 가르듯 울렸다.지우는 순간 수저를 멈췄다.말을 건넨 이는 다른 궁녀들과 달리 한 걸음 뒤에 서 있던 여인이었다.고개는 공손히 숙여져 있었지만, 시선만은 분명 지우를 향하고 있었다.잠시 망설이던 지우는 조심스레 답했다.“……괜찮습니다. 그런데 궁녀들이 너무 많은데, 한 명만 남기고 나가게 할 수는 없을까요?”지우의 말에 여인은 숙였던 고개를 조금 들어 올려 그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예, 그리하겠습니다. 그리고 마마께서 저희에게 존대를 하실 필요는 없사옵니다.”“아… 그래? 그럼 그렇게 하겠네.”“예, 마마.”짧은 대답을 마친 여인은 다른 궁녀들을 향해 시선을 주었다.말 한마디 없었지만, 그 눈빛만으로도 충분했다.이내 궁녀들 중 한 명만을 남기고, 나머지는 조용히 문밖으로 물러났다.그 모습을 어색한 표정으로 지켜보던 지우는 문득 깨달았다.이곳에서는말보다 눈빛이,설명보다 침묵이 더 강한 힘을 가진다는 것을.“마마, 어서 수라를 마저 드시지요.”남겨진 궁녀가 어느새 밥상 가까이 다가와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저기, 그렇게까지 고개를 숙일 필요는 없지 않나…?”“마마께서 수라를 다 드실 때까지 고개를 숙이고 있는 것이 원칙입니다.그러니 심려치 않으셔도 됩니다.”또박또박 정돈된 말투였다.지우와 비슷한 또래로 보였지만, 태도만큼은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었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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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6화 수양대군과 마주하다

그 태도가 워낙 분명했던 탓에, 사회성이 좋기로 소문난 지우조차 순간 할 말을 잃고 말았다.괜히 입을 열었다가 선을 넘은 것만 같은 기분.결국 지우는 더 말을 꺼내지 못한 채, 다시 조용히 수저를 들었다.수라를 다 먹고 나자, 고개를 숙이고 있던 궁녀가 조용히 상을 물렸다.문밖에 상을 내어놓은 뒤, 다시 돌아와 지우 앞에 공손히 섰다.“저기… 그럼 이름은?”지우는 어떻게든 말을 이어가 보려는 듯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이름 정도는 알아도 괜찮지?”‘이 정도는 괜찮겠지…’잠시 망설이던 궁녀가 입을 열었다.“소인은… 소하라 하옵니다.”“소하.”지우는 한 번 이름을 되뇌듯 불러보았다.“좋네, 이름. 앞으로 잘 부탁해, 소하.”그 말에 소하는 순간 시선을 살짝 떨구었다.볼이 희미하게 붉어진 채, 더 작아진 목소리로 답했다.“예, 마마.”‘하… 봐라. 너무 귀엽잖아.’잠시 흐뭇하게 바라보던 지우는 문득 밖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시선을 돌렸다.“그런데… 밖이 좀 소란스러워졌네. 무슨 일 있어?”지우의 물음에 소하는 금세 표정을 가다듬고 다시 단정한 태도로 돌아왔다.“아마 수양대군께서 폐하께 주청하여 개최된 사냥대회 때문일 것이옵니다.”“사냥대회?”지우가 잔뜩 굳은 표정으로 궁녀의 말에 반응하자,궁녀는 순간 자신이 무언가 잘못 말했는지 긴장한 기색을 보였다.“예… 사냥대회 준비로 인해 다소 소란스러울 뿐이옵니다.혹 불편하시다면, 조용히 하라 전할까요?”“아니, 그럴 필요까진 없어.”지우는 짧게 답하고는 잠시 말을 멈췄다.“…그런데, 이걸 수양대군이 주최했단 말이지?”“예, 마마.”궁녀의 대답이 떨어지자,지우의 얼굴에 드리워진 표정이 미묘하게 변했다.굳어 있던 기색 위로,설명하기 어려운 불안이 천천히 번져갔다.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지우는 이내 결심한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전하를 뵈러 가야겠네.”짧게 내뱉은 말이었다.그 말에는,지금 이 상황을 그냥 넘길 수 없다는 의지가 담겨 있었다.지우는 급히 겉옷을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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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7화 사냥대회의 시작

새벽에 내린 눈이 아직 그대로 쌓여 있는 연못가를,단종과 지우는 나란히 걷고 있었다.발걸음이 닿을 때마다, 눈 위로 희미한 소리가 남았다.고요한 궁 안에서 그 소리만이 유일하게 흐르고 있었다.‘일단… 폐하께 궁 안을 안내해 달라 부탁해 수양대군은 떼어냈지만…사냥대회는 어쩌지…’‘분명 그냥 주청한 게 아닐 텐데…’연못가를 반쯤 돌 즈음,단종이 걸음을 멈췄다.그리고—조용히 지우를 바라보았다.“이제 말씀해 보시오, 중전.”‘…눈치챈 건가.’예상보다 빠른 반응에 지우의 시선이 미묘하게 흔들렸다.“수양대군을… 얼마나 믿으십니까.”단종은 잠시 생각하듯 시선을 흐렸다.“숙부를 말하는 것이오?”짧은 되물음 뒤, 이내 옅은 숨이 섞였다.“글쎄요… 그런 질문을 제게 던진 이는 없어서 말이오.”지우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가만히 단종을 바라보았다.그리고—“그럼 질문을 바꾸겠습니다.”한 박자.시선이 곧게 맞닿았다.“저는… 얼마나 믿으십니까, 전하.”“전 사실… 숙부도, 중전도 반반이오.지금 제 위치가 그러하니 말이오.”의외의 대답이었다.지우의 입가에 아주 미세한 변화가 스쳤다.“그렇다면 다행이군요.”지우는 한 발짝 다가서며 말을 이었다.“전하, 소신의 생각을 말씀드려도 되겠습니까.”단종은 말없이 지우를 바라보았다.“수양대군은… 속을 헤아리기 어려운 분이라 여겨집니다.”잠시 멈춤.“그리고 그런 이일수록, 더욱 경계해야 합니다.”“중전.”단종의 짧은 부름이 공기를 가르듯 떨어졌다.그러나 지우는 멈추지 않았다.“전하께 숙부와의 연을 끊으라 말씀드릴 수는 없습니다.”“다만—”지우의 시선이 더욱 또렷해졌다.“그 뜻을 알 수 없는 자라면,그만큼 조심하셔야 합니다.”“전하.”“그 말은 선을 넘은 것이오.다른 이들 앞에서는 삼가시오.”단종의 표정이 어둡게 가라앉았다.그 순간—지우는 묘한 기시감을 느꼈다.마치…과거의 자신을 마주한 것 같은 느낌.혼자 남겨졌던 그때처럼.지우가 고등학교에 막 입학했을 무렵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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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8화 무릎을 꿇은 중전

중궁전은 어제 사냥대회의 어수선함과는 또 다른 이유로 소란스러웠다.사냥을 끝까지 마치지도 못한 채 돌아온 일,그리고—궁녀 소하가 화살을 맞은 사건 때문이었다.“마마, 소인은 여기서 돌볼 터이니 이만 쉬시지요…”몇 시각이 지났음에도,지우는 한 번도 소하의 곁을 떠나지 않고 있었다.다른 궁녀들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번갈아 가며 쉬시라 청했지만—“됐으니 그만 물러가.”짧고 단호한 말이었다.“나 대신 다친 아이야.내가 돌보는 게 맞아.”“마마…”지우는 더 이상 대답하지 않았다.그저 조용히,소하의 이마에 맺힌 땀을 천으로 닦아낼 뿐이었다.한참의 침묵 끝에—지우가 낮게 입을 열었다.“범인은… 어떻게 됐어?”궁녀가 잠시 머뭇거리다 대답했다.“아직 입을 열지 않고 있다 합니다.”“……”“마마가 아닌 소하가 맞았으니…이대로 입을 다물고 있으면,일이 크게 번지지 않을 것이라 여기는 듯합니다.”‘…여긴 조선이다.’‘그것도—역사상 가장 어린 왕이 군림하고 있는 시대.’지우의 입술이 천천히 굳어졌다.‘하…’짧은 숨이 새어 나왔다.그리고—“그럼 전하와 대신들은… 지금 뭘 하고 있는 거지?”낮게 깔린 목소리였다.그러나 그 안에 담긴 감정은 결코 가볍지 않았다.궁녀는 더 깊이 고개를 숙였다.“…송구하옵니다, 마마.”대답은 없었다.그 침묵이—오히려 모든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자신을 대신해 화살을 맞고 사경을 헤매고 있는 소하를한참이나 내려다보던 지우는,이내 무언가 결심한 듯 자리에서 일어섰다.“아무래도… 내가 전하를 뵈어야겠어.”짧은 말이었지만, 망설임은 없었다.“그리고—지금 당장 하얀 소복을 가져와.”지우의 말에 궁녀가 잠시 머뭇거리다가 고개를 숙였다.“예, 마마.”곧 소복이 준비되어 들어왔다.“이 소복은… 어찌하시려고…”“뭐하긴.”지우는 담담하게 답했다.“내가 입어야지.”그리고 시선을 들었다.“최대한 초췌해 보이게 꾸며줘.”“예…? 마마, 어찌 그런—”지우는 더 이상 설명하지 않았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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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9화 수양대군의 경고

-편전-모두 물러간 뒤—넓은 편전에는단종과 수양대군만이 남아 있었다.무거운 침묵이 잠시 이어졌다.먼저 입을 연 것은 단종이었다.“숙부… 아니.”단종의 눈빛이 천천히 가라앉았다.“대군께서는 어찌 아직 자리를 뜨지 않으신 겁니까.”낮은 목소리였다.그러나 그 안에는 분명한 경계가 담겨 있었다.“혹…”잠시 말을 멈춘 단종이수양대군을 똑바로 바라보았다.“중전의 말이 그리 불편하셨습니까.”“설마 그러겠사옵니까.”수양대군은 평소와 다름없는 온화한 미소를 지은 채 대답했다.“중전의 뜻은 틀리지 않았습니다.”잠시 시선을 내린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그러니 전하께서도 중전에게 힘을 실어주셔도 됩니다.”담담한 말이었다.하지만—그 말이 끝난 뒤에도수양대군은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등을 돌려 몇 걸음 옮기던 그는,문득 다시 걸음을 멈췄다.그리고 천천히 고개를 돌려단종을 바라보았다.“헌데…”짧은 침묵.“중전의 행동이 지나치게 눈에 띄는군요.”수양대군의 눈빛이 아주 미세하게 가라앉았다.“부디—”“행동에 있어 자중하라 일러주십시오, 전하.”수양대군의 말을 들은 순간—단종의 표정이 미세하게 굳어졌다.서늘한 감각이 천천히 등을 타고 스며들었다.익숙한 분위기였다.지금의 수양대군이 짓고 있는 표정과 말투.단종 자신에게 무언가 일이 생기기 전마다—늘 보아왔던 그것이었다.그런데 이번에는,그 시선이 중전을 향하고 있었다.단종의 손끝이 천천히 굳어졌다.“대군께서는…”잠시 숨을 고른 단종이 입을 열었다.“중전을 경계하시는 겁니까.”수양대군의 눈이 아주 미세하게 가늘어졌다.그러나 입가의 미소는 여전했다.“경계라…”나직한 목소리.“전하께서는 그리 보이셨습니까?”수양대군의 말이 끝난 뒤—편전 안에는 잠시 정적이 내려앉았다.단종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그저 수양대군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수양대군은 그런 단종의 시선을 조용히 받아내다가,천천히 입을 열었다.“전하.”낮고 부드러운 목소리였다.“사람은 누구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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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0화 흔들리기 시작한 믿음

단종은 낮게 숨을 내쉬었다.그리고—오늘 있었던 일을 천천히 떠올렸다.소복 차림으로 무릎을 꿇었던 중전.그리고—편전 안에서 자신을 바라보던 수양대군의 눈빛까지.단종의 손끝이 천천히 굳어졌다.“짐은…”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았다.“…오늘 처음으로 알았소.”촛불이 미세하게 흔들렸다.“숙부께서—”단종의 시선이 천천히 아래로 떨어졌다.“…중전을 위험하게 볼 수도 있다는 것을.”“오늘 편전에서…중전마마께서 석고대죄를 하셨다 들었습니다.”김종서의 목소리는 조심스러웠다.“혹, 그 일 때문이옵니까.”단종은 곧바로 대답하지 못했다.잠시 시선을 내린 채 침묵하던 그는이내 낮게 입을 열었다.“…그보다.”단종의 눈빛이 천천히 흔들렸다.“편전에서 숙부와 단둘이 나눈 이야기가… 마음에 걸리오.”김종서의 표정이 미세하게 굳어졌다.“무슨 말씀을 들으셨사옵니까.”단종은 짧게 숨을 내쉬었다.그리고—“숙부께서 그러더군.”방 안의 공기가 천천히 가라앉았다.“‘중전의 행동을 자중시키라’고.”단종의 목소리가 낮게 떨렸다.“헌데…”단종의 손끝이 천천히 굳어졌다.“그 말이… 어찌 그리 섬뜩하게 들리던지.”“전하…”김종서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려던 순간—단종이 먼저 말을 이었다.“김 대감.”낮게 가라앉은 목소리였다.“아무래도… 불안하오.”단종의 시선이 천천히 아래로 떨어졌다.“혹여 이러다 중전까지 잘못되면…”짧은 침묵.“짐에겐 정말 아무도 남지 않을 것 같소.”촛불이 미세하게 흔들렸다.단종은 쓴웃음 비슷한 숨을 내쉬었다.“짐에게 가족이라곤… 숙부들뿐이었소.”“허니 알지 않소.”단종의 눈빛이 희미하게 흔들렸다.“가족이 아닌 이를 믿는다는 것이—”“…얼마나 어려운 일인지.”순간,김종서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처음으로 드러난 단종의 불안과 외로움이그의 마음을 무겁게 짓눌렀기 때문이었다.김종서는 천천히 시선을 내렸다.가슴 한켠이이상하리만큼 답답해져 왔다.“지키고 싶소.”단종의 목소리는 이전보다 훨씬 또렷했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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