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달빛 아래 가려진 운명: Chapter 11 - Chapter 20

26 Chapters

제11화

전각 안은 다시 깊은 적막에 잠겼다.이정은 천천히 침상 곁으로 돌아와 앉았다.그리고 이미 차갑게 식어 버린 조희진의 손을 조심스레 감싸 쥔 채, 말없이 그 손등에 이마를 기댔다. “희진아...”그가 나직이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목소리에는 차마 가라앉히지 못한 고통과 막막함이 짙게 배어 있었다.“네가 말해 보거라... 짐이... 정녕... 틀렸느냐...”그러나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대신 창밖을 스쳐 가는 찬바람만이, 마치 누군가 흐느끼는 듯한 소리를 내고 있었다.사흘이 지났다.조희진의 시신은 여전히 요화궁 내전의 침상 위에 조용히 누워 있었다.태감 총관 이덕춘은 전각 밖에 서서 한참을 망설였다.이내 마음을 다잡은 그는 허리를 깊이 숙인 채 조심스럽게 안으로 들어갔다. “폐하...”이덕춘의 목소리는 바짝 말라 있었다. 그는 조심스럽게 눈치를 살피며 입을 열었다. “마마께서... 이미 승하하신 지 사흘이 되었사옵니다. 날씨가 차갑기는 하나, 옥체를 계속 모시는 데에는 한계가 있사옵니다. 하오니 부디 예부에 명하시어 장례를 준비하게 하시고, 마마께서 편히 가실 수 있도록 해 주시옵소서. 마마께서는 생전 누구보다 품위와 예를 중히 여기셨으니, 아마도 이런 모습으로...”“귀비는 죽지 않았다!”“그저 잠시 잠든 것뿐이다! 짐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는 것이냐!”이정은 목이 찢어질 듯 울부짖었다. 며칠째 제대로 쉬지 못한 탓에 그의 목소리는 이미 거칠게 갈라져 있었다. “장례는 무슨! 귀비는 죽지 않았다! 모두 물러가거라! 당장 짐의 눈앞에서 사라져라!”이덕춘은 화들짝 놀라 털썩 무릎을 꿇고 연신 머리를 조아렸다. “폐하, 부디 노여움을 거두시옵소서! 소인이 경솔하였사옵니다! 죽을죄를 지었사옵니다!”“물러가라!”이덕춘은 거의 기다시피 전각 밖으로 물러났다. 등줄기에는 어느새 식은땀이 흥건히 배어 있었다.그는 굳게 닫힌 전각 문을 바라보며 불안한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폐하의 저 모습은... 분명 이성을 잃으신것 같은데...”그 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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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화

그는 두려웠다.끝없이 이어지는 이 적막도,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대답을 기다리는 시간도, 차갑게 식어 버린 그녀의 몸을 품에 안고 마주하는 현실도 모두 두려웠다.조영지는 그의 눈동자에 고스란히 담긴 숨길 수 없는 아픔과 미련을 보았다. 순간 치솟은 질투심이 마치 불길처럼 타올라 그녀의 이성을 집어삼킬 듯했다.그녀는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도록 세게 움켜쥐었다. 그 통증으로 간신히 마음을 가라앉힌 뒤, 더욱 부드럽고 애처로운 목소리로 흐느끼듯 말했다.“폐하, 폐하께는 아직 신첩이 있사옵니다... 신첩은 앞으로도 끝까지 폐하의 곁을 지킬 것이옵니다. 어릴 적 그때처럼 말이옵니다... 폐하, 부디 신첩을 바라봐 주시옵소서. 한 번만이라도 신첩을 바라봐 주시옵소서...”하지만 이정은 마치 아무것도 듣지 못한 듯했다.그러나 이정은 그녀의 말을 들은 듯도 하지 않았다. 그저 곁에서 숨죽이고 있던 이덕춘에게 말했다. “계속 찾아라. 천하가 이토록 넓거늘, 어찌 기이한 재주를 지닌 이와 뛰어난 인재가 없겠느냐. 귀비를 살릴 방도가 없다는 말 따위, 짐은 결코 믿지 않는다!”이덕춘은 목이 메어 낮게 대답했다.“...예, 폐하.”조영지는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았다.이정의 눈에는 이제 더 이상 자신이 없었다. 그 안을 가득 채운 것은 오직 침상 위에 놓인 차디찬 시신뿐이었다.그녀의 마음은 얼음장처럼 차갑게 식어 갔다. 그러나 이내 참아 온 원망과 분노가 걷잡을 수 없이 치솟으며 온몸을 집어삼켰다.칠 일째, 새벽.밤을 지키던 태감이 혼비백산하여 내전으로 뛰어들었다.얼굴은 핏기 하나 없이 새하얗게 질려 있었고, 바닥에 털썩 무릎을 꿇은 채 사시나무처럼 몸을 떨었다. “폐, 폐하! 큰일 났사옵니다! 귀비마마께서... 귀비마마의 옥체가... 사라졌사옵니다!”침상 기둥에 기대 잠시 눈을 붙이고 있던 이정은 순간 눈을 번쩍 떴다. 그의 두 눈은 삽시간에 핏발로 물들었다. “방금 무어라 했느냐?”“사, 사라졌사옵니다! 빙관... 빙관 안에 모셔 두었던 마마의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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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화

조영지는 감히 대답하지 못했다. 그저 바닥에 엎드린 채 어깨만 들썩이며 흐느낄 뿐이었다.“누가 감히 그녀에게 손을 대라 했느냐! 누가 감히 그녀를 묻으라 했느냐!”이정은 억누르던 분노를 터뜨리며 포효했다. 그리고 손에 든 검을 거칠게 휘둘렀다. “쾅!”굉음과 함께 곁에 있던 정교한 자단목 화장대가 단칼에 두 동강 났고, 위에 놓여 있던 연지와 분, 귀한 장신구들이 바닥으로 어지럽게 쏟아졌다. “꺄악!”조영지는 놀라 비명을 지르며 머리를 감싸 쥔 채 몸을 웅크렸다.이정은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핏발 선 눈에는 걷잡을 수 없는 분노가 들끓었고, 그 모습은 마치 이성을 잃은 맹수처럼 누구도 감히 다가갈 수 없는 위압감을 풍겼다.그는 곧장 몸을 돌려, 뒤따라오던 이덕춘을 향해 쉰 목소리로 외쳤다.“파내라! 당장 비릉으로 가서 귀비의 관을 파내어 짐 앞에 가져오너라! 지금 당장!”“예, 예! 분부 받들겠사옵니다! 소인이 지금 바로 가겠사옵니다!”이덕춘은 얼굴이 새하얗게 질린 채 허겁지겁 전각 밖으로 뛰쳐나가, 사람을 모으고 명을 전했다.순식간에 황궁 전체가 술렁였다.황제가 이제 막 장례를 치른 귀비의 무덤을 다시 파헤치라 명한 것이다.이는 감히 상상조차 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죽은 자에 대한 예를 거스르는 일이었으며, 황실의 법도마저 뒤흔드는 일이었다.하지만 아무도 감히 나서서 말리지 못했다.지금의 황제는 이미 이성을 잃은 듯했고, 그 앞을 막아서는 순간 목숨을 잃을 수도 있었다.곧 금군이 출동했다. 그들은 도구를 챙겨 들고 곧장 비릉으로 향했다.이정은 검을 쥔 채 전각 밖만 바라보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직접 능으로 달려갈 듯한 기세였다.숨 막힐 듯한 정적 속에서 시간만 속절없이 흘러갔다.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마침내 전각 밖에서 다급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흙먼지로 뒤범벅이 된 금군 통령이 갑옷도 제대로 정돈하지 못한 채 허겁지겁 전각 안으로 뛰어 들어와 그대로 무릎을 꿇었다. “폐, 폐하...! 파, 파냈사옵니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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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화

“그만.”이정은 그녀의 처절한 울부짖음을 잘라냈다.낮은 목소리였지만, 그 안에는 더는 물러설 곳 없는 단호함과 깊은 피로가 서려 있었다.그는 조영지를 바라보았다.한때 혼을 빼앗길 만큼 연모했고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다고 여겼던 얼굴이었으나, 지금은 질투와 원망으로 일그러져 있었다.이정은 문득 낯설다는 생각과 함께 깊은 피로감을 느꼈다.그리고 더없이 지쳤다.“짐은...”그는 한 글자 한 글자 또렷하게 내뱉었다. “이제 너를 보고 싶지 않다.”그 말을 끝으로 이정은 조영지를 향해 미련 한 점 남기지 않은 듯 등을 돌렸다. 손에 쥔 검을 든 채 몸을 돌려 봉의궁을 나섰다.“폐하! 폐하, 어디로 가시옵니까! 폐하!”조영지는 그의 뒤에서 목이 터져라 울부짖었다. 그러나 궁인들이 온 힘을 다해 그녀를 붙잡고 있어 한 걸음도 내디딜 수 없었다.이정은 곧장 말에 올라, 군사를 더 모을 겨를도 없이 곁을 지키던 금군만 거느린 채 궁문을 나서 성 밖 난장터로 향했다.매서운 찬바람이 얼굴을 베듯 몰아쳤지만, 이정은 그것조차 느끼지 못했다. 그의 머릿속에는 오직 그녀를 찾아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반드시 찾아야 했다.그런 곳에 그녀를 홀로 남겨둘 수는 없었다.난장터는 경성 밖 깊은 산골짜기에 자리한, 인적조차 드문 곳이었다. 주인 없는 시신과 처형된 죄인들, 궁에서 가장 천한 신분으로 살아가던 이들이 버려지는 곳이었다. 가까이 다가서기도 전부터 지독한 썩은 냄새가 코를 찔러왔다.함께 온 금군들은 저마다 얼굴을 굳혔다. 몇몇은 끝내 견디지 못하고 헛구역질을 했다.하지만 이정은 코를 찌르는 악취조차 느끼지 못하는 듯했다.그는 말에서 내리자마자 시신 사이를 헤집고 들어갔다. 옷자락이 더러워지는 것도, 황제라는 신분도 그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희진아! 조희진!”그가 그녀의 이름을 목이 터져라 외쳤다. 적막한 산골짜기에는 그의 절박한 목소리만이 메아리쳤다.이정은 직접 시신 하나하나를 헤쳐 나가기 시작했다.어떤 것은 썩어 문드러져 구더기가 들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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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화

3년 후.귀비 조씨가 세상을 떠난 지도 어느덧 3년이 흘렀다.조정의 분위기는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폐하, 나라에 군왕이 없어서는 아니 되듯, 궁궐 또한 중궁의 자리를 오래 비워 둘 수 없사옵니다. 황후의 자리가 비어 있고 국본마저 정해지지 않은 것은 종묘사직을 위해서도 결코 바람직하지 않사옵니다. 하오니 신이 감히 청하옵니다. 부디 덕망 있는 여인을 맞아들이시어 황후로 책봉하시고, 흔들리는 민심을 안정시켜 주시옵소서.”용좌에 앉은 이정은 검은 곤룡포를 걸치고 있었다.수척해진 얼굴과 깊게 패인 눈가는 지난 3년의 세월이 남긴 흔적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었다.다만 그의 그 두 눈만큼은 깊고 고요해, 아무도 그 속내를 헤아릴 수 없었다.그는 상소문에는 눈길조차 주지 않은 채 담담히 입을 열었다. 그 목소리에는 아무런 감정도 실려 있지 않았다. “짐이 마음에 둔 이는 이미 세상을 떠났거늘, 어찌 다시 황후를 들인단 말인가?”“폐하, 귀비마마께서 승하하신 일에 신들 또한 비통한 마음을 금할 수 없사옵니다. 허나 떠난 이는 이미 떠났고, 살아 있는 이는 살아가야 하옵니다. 폐하께서는 한 나라의 군주이시니, 부디 나라와 종묘사직을 먼저 헤아려 주시옵소서...”말이 끝나기도 전이었다.쾅 하는 소리와 함께 상소문이 옥계 아래로 내던져졌다. 흰 종잇장이 사방으로 흩날렸다.이정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숨죽인 채 엎드려 있는 신하들을 차례로 훑어보았다.그리고 얼음장처럼 차가운 목소리로 한 글자 한 글자 내뱉었다. “누구든 다시 황후 책봉을 입에 올리면, 참형에 처하겠다.”순간 대전 안은 숨 막힐 듯 고요해졌다.아무도 감히 다시 입을 열지 못했다.조회가 끝난 뒤, 이정은 어서방으로 돌아왔으나 눈앞에 쌓인 정무는 좀처럼 손에 잡히지 않았다.상소문은 산처럼 쌓여 있었으나, 붓을 쥔 손은 한참 동안 움직이지 않았다.결국 그는 붓을 내려놓았다.그리고 다시 걸음을 옮겨, 3년째 주인 없는 전각으로 향했다.비록 주인은 떠났으나 궁인들은 하루도 거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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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화

이정의 손에 들린 찻잔이 순간 멈췄다. “딸아이가 있다고?”그는 천천히 그 말을 되뇌었다. 목소리에는 아무런 감정도 드러나지 않았으나, 찻잔을 쥔 손가락 마디는 어느새 힘이 들어가 하얗게 질려 있었다.“그렇사옵니다. 소인이 며칠 동안 은밀히 지켜본 바로는, 신 부인은 평소 바깥출입이 거의 없었사옵니다. 허나 간혹 장을 보거나 아이를 데리고 나설 때가 있었는데... 그때의 말투와 몸가짐은 어딘가 궁중 여인과 닮은 데가 있었사옵니다.”암위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 고개를 더욱 깊숙히 숙였다.“쩍!”고요한 전각 안에 찻잔이 갈라지는 소리가 낮게 울렸다.이정이 쥐고 있던 백자 찻잔에는 어느새 금이 가 있었다. 따뜻한 찻물이 틈새로 흘러나와 손가락을 붉게 데웠지만, 그는 아무것도 느끼지 못한 듯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조사하라.”이정의 목소리는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심신효원을 조사하라. 그들이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 그 아이가 언제 태어났는지까지 모두 밝혀내라. 사소한 것 하나라도 빠뜨리지 말고, 짐에게 낱낱이 아뢰도록 하라.”“예, 폐하.”암위가 물러가자 어서방 안에는 다시 깊은 적막이 내려앉았다. 타들어 가는 촛불 소리만이 고요한 전각 안을 맴돌았다.이정은 용상에 앉은 채 한동안 미동도 하지 않았다. 마치 넋을 잃은 사람처럼 굳어 있었다.그러다 갑자기 손을 뻗어 탁자 위에 놓인 상소문과 붓, 벼루를 모조리 쓸어 바닥으로 내던졌다.“와장창!”전각 안에서 무언가 깨지는 소리가 들려오자, 문밖에서 시중들던 태감들은 화들짝 놀라 일제히 무릎을 꿇었다.암위가 전해 온 소식은 생각보다 빨랐고, 그 내용은 들을수록 놀라움을 금할 수 없을 만큼 자세했다.신효원은 강남 신씨 가문의 방계 출신으로, 집안은 한미했으나 재주가 뛰어나 일찍이 이름을 떨쳤다. 조씨 가문의 서녀 조희진과는 어린 시절부터 한 동네에서 자라며 가까이 지낸 사이였다.만약 그해 황위를 둘러싼 다툼이 없었더라면, 그가 조씨 가문의 힘을 빌릴 필요도 없었더라면, 조씨 가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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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화

조영지는 그대로 굳어 버렸다.조금 전까지 울부짖으며 매달리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그녀는 멍하니 그 자리에 서 있었다.한참 뒤에야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때와 먼지로 얼룩진 얼굴, 그 위로 드러난 두 눈에는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경악이 어려 있었다. “아니... 아니야... 그럴 리 없어...”바싹 마른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그 아이가 숨을 거두는 순간을 제가 직접 보았습니다! 온몸에서 피를 흘리며 쓰러졌고, 태의도 직접 맥을 짚었습니다! 그 아이는 분명 죽었사옵니다! 제가 직접 확인했단 말입니다!”“그 아이는 죽음을 위장했던 것이다.이정의 목소리는 지나치리만큼 평온했다. 그러나 그 담담한 말들은 조영지에게 차마 견딜 수 없는 아픔으로 하나하나 박혀 들었다. “지금 그녀는 강남에 있다. 신효원과 함께 말이다. 어린 시절부터 연을 맺은 그와 함께 살아가고 있으며, 이미 딸아이까지 낳았다. 올해로 두 살이 되었을 것이다.”조영지는 마치 벼락이라도 맞은 듯 그 자리에 굳어 버렸다.믿을 수 없는 충격에 다리에 힘이 풀린 그녀는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떨리는 입술만 몇 차례 달싹였을 뿐, 끝내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한참 뒤, 그녀는 돌연 웃음을 터뜨렸다.처음에는 낮은 웃음에 불과했다. 하지만 점점 커져 가던 웃음은 어느새 섬뜩하게 일그러진 웃음소리가 되어 전각 안을 가득 메웠다.“하하... 하하하! 죽음을 위장했다고? 그년이 죽은 척을 했단 말입니까? 허면 저는요? 저는 대체 뭡니까!”조영지는 웃다가 끝내 눈물까지 흘렸다.자신을 가리켰다가, 다시 이정을 가리키며 마치 넋이 나간 사람처럼 웃음을 터뜨렸다.“신첩이 이곳에서 지난 3년을 어떻게 버텨 왔는지 폐하께서는 아십니까! 하루도 마음 편히 지낸 날이 없었습니다. 사람이라 할 수도 없고, 귀신이라 할 수도 없는 몰골로 살아왔습니다. 이곳에 갇힌 채 하루하루 버티고 또 버텼습니다! 헌데 이제 와서 그년이 살았다니요? 폐하께서는 그년이 죽었다고 믿으셨기에, 신첩을 이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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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8화

강남, 청수진.따스한 봄날, 버들개지가 하늘하늘 흩날리고 있었다.조용한 마을 거리 한쪽에는 ‘묵운재’라는 이름의 작은 서화방이 자리하고 있었다.겉보기에는 소박한 점포였지만, 안으로 들어서면 깔끔하게 정돈된 모습과 은은한 운치가 느껴졌다.그곳에서 한 여인이 책장을 펼쳐 놓고 어린아이에게 글을 가르치고 있었다.수수한 빛깔의 치마저고리를 입은 여인은 머리를 단정히 올리고 나무 비녀 하나만 꽂은 채, 곁에 기대어 앉은 아이에게 손가락으로 글자를 짚어 주며 다정한 목소리로 글을 읽어 주었다.여자아이는 두세 살쯤 되어 보였다. 양옆으로 조그맣게 머리를 묶은 모습이 앙증맞았고, 보드라운 볼은 발그레하게 물들어 있었다. 아이는 동그랗고 맑은 눈을 크게 뜬 채 여인의 손끝을 따라 글자를 바라보며, 앳된 목소리로 천천히 읽어 내려갔다.“봄잠에...날 밝는 줄 모르고...”여인은 부드러운 눈매로 아이를 바라보며 입가에 미소를 머금었다. 그리고 조심스레 연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우라 연이 참 똑똑하구나.”그때 가게 안쪽 문에 드리워진 발이 걷히며 한 사내가 걸어 나왔다. 푸른빛 긴 도포를 걸친 그의 모습은 단정했고, 맑고 온화한 분위기가 감돌았다.그는 손에 들고 있던 옅은 빛깔의 겉옷을 그녀의 어깨에 조용히 걸쳐 주며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봄추위가 아직 매섭소. 몸 조심하시오. 며칠 전에도 기침을 하지 않았소.”조희진은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그 얼굴에는 온전히 믿고 의지하는 사람에게만 보이는 편안한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알았어요. 참 잔소리도 많으시네요.”신효원도 따라 웃었다. 그의 시선은 조희진의 얼굴에 머물렀고, 눈빛에는 다정함이 가득했다. 그는 몸을 낮춰 연이를 품에 안아 올린 뒤, 부드러운 머리칼에 턱을 살짝 기대며 물었다. “연아, 네 어미가 글 익히는데 귀찮게 하진 않았지?”아이는 까르르 웃으며 그의 품으로 파고들었다.“아니요! 연이는 착하게 있었어요!”따뜻한 기운이 감도는, 더없이 화목한 풍경이었다.길 건너편 오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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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9화

이정은 한참 동안 그녀를 바라보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는 지나칠 만큼 차분했지만,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는 또렷했다.“옛 인연이 있는 사람이오.”조희진의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조희진의 손끝이 가볍게 떨렸다. 그러나 그녀는 곧 아무 일도 없었던 듯 마음을 다잡았다. 그리고는 이정의 시선을 피해 몸을 돌려 신효원을 바라보았다. “서방님, 연이를 먼저 데리고 들어가 주세요.”신효원은 조희진을 바라보았다가 이정에게 시선을 옮겼다.눈빛에는 풀리지 않는 의문이 담겨 있었지만, 그는 더 묻지 않았다. 다만 그녀의 손을 가볍게 잡아 주며 낮게 말했다.“무슨 일이 있거든 부르시오.”그러고는 연이를 품에 안고 안으로 들어갔다. 몇 걸음 옮긴 뒤에도 마음이 놓이지 않는 듯 몇 번이나 뒤를 돌아보았지만, 끝내 조희진의 뜻을 따랐다.마침내 묵운재 안에는 두 사람만 남았다.숨 막히는 정적이 내려앉았다.조희진은 천천히 숨을 고른 뒤 고개를 들었다. 조금 전까지 흔들리던 눈빛은 어느새 가라앉아 있었고, 그녀의 얼굴에는 다시 평온한 기색만이 남아 있었다.그리고 마치 처음 만난 사람을 대하듯 이정을 향해 정중히 예를 올렸다. 흠잡을 곳 하나 없는 단정한 예였다. ‘“소인, 나리를 뵙습니다.”소인.나리.그 낯선 두 호칭이 마치 서늘한 칼날처럼 이정의 마음을 파고들었다.이정은 한동안 말없이 그녀를 바라보았다.고개를 숙인 채 순순히 예를 갖춘 모습도, 일부러 자신과의 거리를 두려는 듯 선을 긋는 태도도 모두 그의 눈에 선명히 들어왔다.그는 문득 입꼬리를 비틀어 올렸다. 그러나 그 미소에는 조금의 온기도 담겨 있지 않았다. “부인께서는... 제가 오래전 떠나보낸 이와 참 많이 닮았구려.”조희진의 속눈썹이 가볍게 떨렸다. 하지만 그녀는 여전히 시선을 내린 채 담담히 말했다. “세상에는 닮은 사람이 많사옵니다. 나리께서 사람을 잘못 보신 듯하옵니다.”“잘못 보았다?”이정이 낮게 되뇌었다. 그리고 한 걸음 앞으로 다가섰다.차분한 목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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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0화

조희진의 손끝이 문발에 닿으려는 순간, 뒤에서 이정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차갑고 위압적이던 제왕의 기세는 온데간데없고, 애써 감추려 해도 숨길 수 없는 떨림과 절박한 애원만이 서려 있었다.“짐과 함께 돌아가자꾸나.”이정의 목소리는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그 짧은 말 한마디를 꺼내는 것조차 온 힘을 다해야 하는 듯했다.“짐은... 네가 너무 그리웠다.”문발을 걷으려던 조희진의 손끝이 잠시 멎었다.하지만 그뿐이었다.흔들리는 문발 너머로 그녀의 모습은 사라졌고, 뒤이어 들리던 발걸음 소리도 천천히 멀어져갔다.이정은 그 자리에 그대로 굳어 있었다.붙잡으려 내민 손은 그대로 멈춰 있었고, 손끝은 얼음처럼 차가워졌다.그때 문밖에서 조희진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언제나처럼 다정하고 평온한 목소리였다. 그러나 그 목소리가 향한 이는 자신이 아닌 신효원이었다. “서방님, 연이는 잠들었나요? 불 위에 올려둔 약선(藥膳)을 좀 살펴보고 올 테니, 서방님은 점포를 봐주세요.”“그래, 가보거라. 뜨거우니 조심하고.”부부 사이의 평범한 대화였다.하지만 그 평범한 말들은 오히려 가장 날카로운 칼날이 되어, 이정의 가슴을 후벼 팠다.그녀는 끝내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그날 밤, 달은 유난히 밝았고 별빛은 희미했다.조희진의 집 뒷마당은 소박하고 크지 않았다. 한쪽에는 과일나무와 채소를 심어 두었고, 구석에는 포도나무 시렁 하나가 놓여 있었다. 아직 잎이 무성해지기 전이라 듬성듬성한 잎 사이로 달빛이 스며들었다.조희진은 낮에 깨끗이 빨아둔 옷가지를 마당에서 말리고 있었다. 손놀림은 익숙하면서도 부드러웠다.그러다 문득 옷을 널다 말고 손을 멈췄다. 하지만 곧 다시 평소처럼 움직이며 담담히 말했다.“폐하께서 이 야심한 밤에 사가를 찾으시는 것은 체통에 어긋나는 일이옵니다.”어둠 속에서 이정이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다. 달빛이 그의 얼굴을 비추며 뚜렷한 이목구비를 드러냈지만, 두 눈 깊은 곳에는 짙은 어둠이 가라앉아 있었다.“짐은 황제다.”그는 조희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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