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남장 탐정에게 입덕했다.(나, 오직 너만을): Chapter 11 - Chapter 20

26 Chapters

11화. 샤워기 아래 떠오른 기억

희찬이와 나란히 골목길을 오르는 동안, 머릿속은 자꾸 딴 곳에 가 있었다.차우석과 이솔이 나란히 레스토랑을 나서던 모습.그 장면이 머릿속에서 지워지질 않았다.윤이솔.한 달 전, 짧은 미니스커트에 모피코트를 걸치고 탐정 사무실 문을 두드렸던 여자.엄마가 만나는 남자가 수상하다고, 사기꾼 같다고.늘씬한 다리에 또렷한 눈매, 여자인 내가 봐도 꽤 괜찮은 여자였다.그리고 그녀의 촉은 정확히 맞았다.사기 전과 5범.큰일 날 뻔했다며 가슴을 쓸어내리던 이솔.고맙다고 이런 저런 손님들을 내게 보냈다.그런 여자가 차우석 옆에 있다.후—"누나, 왜 자꾸 한숨 쉬어?"희찬이가 옆에서 물었다.나는 흠칫 했다."뭐? 내가?""그래. 아까부터 계속. 일 많이 힘들어?""아냐, 할 만해.""그럼 아버지 친구들이 아직도 누나 괴롭혀? 이사까지 하고 유혁이라는 이름으로 살고 있는데도?""아냐… 그런 적 없어."거짓말이었다.하지만 희찬이를 걱정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피— 아니긴. 누나 얼굴에 다 써 있는데."희찬이가 투덜댔다."그 사람들 참 못됐다.""야, 그렇게 말하지 마. 아버지 도와주셨던 분들이야. 그러니까 꼭 갚아드려야지."그렇다.아버지 사업을 돕다가 함께 무너진 사람들.나는 지금 차우석 생각을 할 때가 아니었다.하루라도 빨리 돈을 벌어야 했다."돈은 내가 벌어야 하는데…"희찬이가 작게 중얼거렸다.나는 고개를 저었다."야, 인턴이 돈을 어떻게 번다고.""남들은 의사라고 많이 버는 줄 아는데, 현실은 그게 아니잖아.""너 돈 때문에 의사 되려 했던 거 아니잖아.""그건 그렇지만, 당장 우리 현실은 돈이 필요하잖아."나는 희찬이의 얼굴을 바라봤다.고된 병원 일에 고시원 생활까지.나는 표정을 바꾸며 말했다."걱정하지 마. 누나가 돈 많이 벌 테니까.""참, 누나도."희찬이가 피식 웃었다."좋은 일 하겠다고 변호사 됐으면서, 그 일도 못하고 탐정이라니.""야, 탐정 일도 나름 보람 있어. 누나가 얼마나 많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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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화. 문 밖에 서 있는 남자

차우석이 잊지 못하는 여자가 있다는 것을.그리고 내가 그 여자를 떠올리게 만든다는 것을.나는 천장을 향해 물이 흘러내리는 얼굴을 들어 올렸다.채령.어딘지 익숙한 이름인데.기억이 나지 않는다.그때였다.톡톡— 톡톡.현관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나는 샤워기 아래에서 굳었다.심장이 쿵 내려앉았다.아버지 친구분들이 여기까지 또 찾아온 건가.숨을 죽이고 귀를 기울이는데."유 탐정님! 저 차우석입니다!"'차우석?!'나는 그 순간에야 깨달았다.지금 내가 욕실 안에,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채로 서 있다는 것을."잠..잠깐만요! 곧 나갑니다!"나는 허둥지둥 타월로 몸을 닦으며 소리쳤다.심장이 제멋대로 뛰고 있었다.옷을 황급히 집어 들고 입으면서 발이 엉켰다.겨우 정신을 차리고 젖은 머리를 수건으로 대충 감싼 채 현관문을 열었다.차우석이 서 있었다.손에는 종이가방.표정은 멋쩍음과 걱정이 반반이었다."아, 제가 너무 늦은 시간에 온 건 아닌지… 전화를 드렸는데 받지 않으셔서요.""아닙니다. 그런데 웬일이시죠?""모자 가져다 드린다 해놓고 또 깜빡했었네요."그가 종이가방을 내밀었다."급하지 않은데… 다음에 주셔도 됐는데.""늘 쓰시던 모자인 것 같아서요."그가 소년처럼 웃으며 말했다.6년 전 처음 그를 봤던 날 보였던 그 미소였다.그때였다.계단 저편에서 헉헉거리는 발소리가 들려왔다."아이고, 왜 이렇게 힘들어!"주인집 아줌마였다.나는 반사적으로 우석의 팔을 잡아챘다."잠깐 들어와요. 빨리!"영문도 모른 채 우석이 안으로 밀려 들어왔다.나는 황급히 문을 닫고 그를 벽 쪽으로 세웠다.그런데 방이 너무 좁았다.등을 붙이고 선 그와 나 사이에, 겨우 손바닥 하나 들어갈 틈밖에 없었다.나는 입에 손가락을 갖다 댔다.우석이 눈을 동그랗게 뜨다가 이내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숨소리마저 조심스러웠다.젖은 머리에서 물방울이 목덜미를 타고 흘렀다.그의 숨결이 정수리 위쯤에서 느껴지자 심장이 다시 요동치기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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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우리, 호형호제 합시다

십 분 후.수건으로 머리를 마저 말리고 있는데우석이 맥주와 안주를 한 봉지 사들고 다시 나타났다.그리고 아무렇지도 않게 탁자 앞에 털썩 앉더니 말했다."뭐해요? 어서 앉지 않고."나는 얼떨결에 맞은편에 앉았다.탁—맥주 캔이 내 앞에 놓였다.그가 자기 캔을 따더니 내 쪽으로 들어 올렸다."자, 예삐의 무사 귀환과 유 탐정님을 위해!""예삐요?""네, 제 강아지 이름이 예삐입니다."그가 맥주를 쭉 들이켰다.나도 따라 한 모금 마셨다.하—"어때요? 시원하죠?""네…""하하하. 우리 예삐는 말입니다—"그는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시작했다.유기견 보호소에서 예삐를 데려오던 날의 이야기를.처음엔 밥도 안 먹고 구석에서 떨고만 있는 모습에, 그게 어찌나 안쓰럽던지 결국 침대 위로 올려 꼭 안아주었다고 말하는 그.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들었다.이렇게 큰 사람이.카메라 앞에서 수많은 사람들을 매혹시키는 이 남자가, 지금 강아지 이야기를 아이처럼 늘어놓고 있다.참. 강아지가 무섭다고 뒤에서 떨던 사람이.이렇게나 강아지를 좋아하는 사람이 되어 있을 줄이야....맥주가 한 캔, 두 캔 비워졌다.이야기가 무르익고 우석의 눈빛이 조금 풀릴 무렵, 그가 불쑥 말했다."유 탐정님, 우리 호형호제 합시다.""네?""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난 유 탐정이 동생 같고 너무 좋습니다."동생 같고.그 말에 웃어야 할지 씁쓸해야 할지 잠깐 헷갈렸다.나는 아무렇지도 않은 척 고개를 끄덕였다."좋습니다."내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우석이 내쪽으로 상체를 기울이며 물었다."혁이 너는 형제가 어떻게 돼?"그와 얼굴이 너무 가까워졌다.깊이를 알 수 없는 눈동자에 빨려 들어갈 것 같았다.상체를 뒤로 빼며 답했다."동생 하나 있습니다.""여동생?""아닙니다. 남동생입니다.""아, 그래? 에이 아깝다. 여동생이었다면 나 소개시켜 달라고 했을 텐데.""소개요? 이솔씨랑 사귀는 거 아닙니까?""이솔이? 아이 아냐. 걘 나하고 남매 같은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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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앨범에 없는 이름

페이지를 천천히 넘겼다.익숙한 얼굴들, 잊고 있었던 이름들이 스쳐 지나갔다.한 장 한 장, 처음부터 끝까지.그러나 어디에도 채령이라는 이름은 없었다.나는 앨범을 덮었다.이상하다.분명 어딘가에서 들었던 이름인데.차우석이 잊지 못하는 채령은 도대체 누구인 걸까.어떤 여자였길래, 저 남자의 가슴속에 저다지도 깊이 박혀 있는 걸까.창밖에 눈이 다시 내리고 있었다.소리도 없이, 차갑게.우석이 앉았던 방석 위에는 아직 온기가 남아 있을 것 같았다.나는 시선을 돌렸다.보지 마, 송희우.그 온기에 익숙해지면 안 돼.대리기사를 불러 집으로 돌아오는 길.차창 밖으로 서울의 밤 풍경이 흘러갔다.불빛들이 빗속에 번지듯 지나쳤다.나는 창에 머리를 기대고 눈을 감았다.그래, 잘한 일이다.동생처럼 생각하고 지내다 보면, 차차 유혁을 통해 채령을 느끼려는 감정도 가라앉겠지.채령.스물한 살 꽃다운 나이에 세상을 떠난 여자.하필 나를 면회 오는 길에 사고가 났다는 사실이, 지금까지도 나를 놓아주지 않는다.비밀 연애였던 탓에 그녀의 죽음은 세상에 알려지지도 못했다.조용한 장례. 조용한 이별.그리고 아무도 모르는 채로 계속되는 나의 고통의 시간.후—어느새 집에 도착했다.나는 터덜터덜 현관으로 들어섰다.예삐가 없어서일까.넓은 집이 평소보다 훨씬 더 휑하게 느껴졌다.나는 소파에 앉았다가 일어섰다가 다시 앉았다.텔레비전을 켰다가 껐다.유혁이 있는 그 옥탑방으로 다시 가고 싶다.그 생각이 드는 순간, 나는 피식 웃었다.정말 너 단단히 미쳤구나, 최우석."강아지를 찾으셨다구요?"다음날, 우석이 너무나도 아무렇지도 않은 목소리로 강아지를 찾았다고 했다."그게 글쎄, 요 옆집에서 맡고 있었더라구."정말 강아지를 잃어버린 건 맞는 걸까?의구심이 들었지만 나는 짐짓 모른 척했다."네, 알겠습니다. 그럼 다음에 또 의뢰하실 일이 있으면 찾아주세요."나는 사무적으로 말하며 전화를 끊으려 했다."아이 왜 그래, 꼭 일이 있어야 서로 찾는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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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화. 제발, 알아보지 마

거울 앞에서 준비를 마쳤을 때, 내 모습이 나 스스로도 낯설었다.유혁이 아닌, 오래전에 묻어둔 송희우도 아닌 또 다른 누군가의 모습이 되어또각또각 하이힐 소리를 울리며 걸었다.클럽 안을 천천히 훑으며 변 사장이 말한 김 실장이 있을 만한 사무실 쪽으로 움직였다.그때였다.슥— 하고 허리에 두꺼운 팔이 둘러졌다."야, 새로 보는 얼굴인데. 언제 들어온 거야?"술 냄새가 역하게 풍겼다.취한 남자가 나를 품으로 당겼다.성가시게 됐네.몸을 빼내려는 순간,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손님, 여자 손님한테서 손 빼시죠."돌아보니 훤칠한 키의 남자가 서 있었다.변사장이 말한 김 실장이었다.꽤 훈남이었다.다부진 몸에 날카로운 눈빛.겉으로는 단정한데 어딘지 서늘한 기운이 느껴졌다.취한 남자가 소리를 질렀다."아 김 실장, 왜 그래? 서로 다 아는 처지에.""그러니까요."김 실장이 조용하고 단호하게 말했다."서로 다 아시면서. 제가 제 손님한테 함부로 구는 거 싫어한다는 걸."그가 남자의 손을 잡아 비틀었다.욱— 외마디 비명이 나오며 남자가 뒤로 물러섰다."자, 조용히 제자리로 돌아가시죠."김 실장이 나를 돌아보며 말했다."손님도 나가주시죠. 여기는 오실 곳이 아닙니다."정중한 목소리, 하지만 확고했다.하지만 내겐 이자가 달려 있었다.나는 일부러 휘청거렸다."아, 여기가 어디지…"술에 취한 듯 비틀거리며 걸어가다가— 김 실장 옆을 지나치는 순간 일부러 발을 삐끗했다.악—미리 살짝 느슨하게 해둔 구두 굽이 쏙 빠져나갔다.나는 휘청하며 구두를 벗어 들고 김 실장을 올려다봤다."이런, 구두가… 아저씨, 여기 신을 만한 신발 없어요?"김 실장이 잠깐 나를 내려다봤다.성가시다는 표정이 스쳤다.그래도 그가 말했다."이쪽으로 오시죠."나는 절뚝이며 그를 따라 사무실로 들어갔다.김 실장이 신발장을 뒤지는 사이, 나는 재빠르게 사무실 구조를 눈에 담았다.책상, 서랍, 캐비닛 위치.그가 구두 한 켤레를 내밀었다.나는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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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화. 위험한 뒷골목

우석이 날카로운 눈빛으로 바짝 다가서자 추근대던 남자가 "아이, 오늘따라 왜 이래" 하며 슬그머니 물러섰다.나는 벽에 바짝 붙은 채 고개를 최대한 돌리고 몸을 움츠렸다.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가발이 흘러내리지 않기를, 화장이 지워지지 않기를, 제발 알아보지 말기를."괜찮으십니까? 다친 데는 없으세요?"걱정이 잔뜩 담긴 목소리였다.말투로 봐서 아직 나를 알아차리지 못한 것 같았다.나는 재빠르게 허리를 숙였다."감사합니다."그리고 냅다 복도를 걸어갔다.최대한 빠르게, 최대한 자연스럽게.등 뒤에서 그가 고개를 갸웃하는 기척이 느껴졌다.그리고 이내 다른 곳을 향해 목소리를 높였다."야! 솔비! 언니가 너 찾아오라고 지금 난리야!"솔비? 언니?누군가를 데리러 온 모양이었다.나는 그제야 숨을 내쉬며 계단을 서둘러 내려왔다.후—그런데 아까 그 눈빛이 자꾸 머릿속에 걸렸다.날카롭고 단호하던 눈.위험한 상황에서도 흔들림 없이 앞으로 나아가던 그 눈빛.텔레비전에서 볼 때는 다 연출인 줄 알았는데.화면 속 모습은 절반도 안 보여준 거였구나 싶었다.나는 고개를 세차게 저으며 화장실로 들어갔다.서둘러 가발을 벗고 옷을 갈아입었다.거울에 비친 내 얼굴이 새빨개져 있었다."오랜만에 높은 힐 신었더니 삭신이 쑤신다. 그래도 오늘 미션은 성공적이야."나는 스마트폰에 저장된 장부 사진들을 확인하며 흡족하게 웃었다.하지만 머릿속에는 여장한 나를 알아보지 못한 채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던 우석.그 눈빛이 계속 머릿속을 맴돌았다.그런데 화장실 밖으로 나오려던 나는, 발걸음이 멈칫했다.#나는 다시 여자와 마주쳤던 장소로 발걸음을 돌렸다.아무래도 2년 전 촬영장 시냇가에서 보았던 여자와 닮았다.그렇다면 나는 확인해야 했다.내가 유혁에게 흔들리는 건지, 아니면 채령을 닮은 사람이라면 그 누구에게도 다 마음이 흔들리는 건지.그걸 꼭 확인하고 싶었다.그런데 이미 그녀의 자취는 없었다.두리번거리며 이곳저곳을 살피는데, 저 멀리 여자가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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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화. 채령이 아니라 너였다

"야! 그 손 안 놔!"내 목소리가 골목을 갈랐다.그리고 한 놈씩 빠르게 쳐냈다.틈이 생기는 순간, 나는 유혁의 손을 잡았다."뛰어!"헉헉—한참을 달렸다.뒤를 돌아보니 더 많은 놈들이 몰려오고 있었다.벌집을 건드린 것 같았다.나는 유혁의 손을 더 단단히 잡고 뛰었다.그런데 유혁이 따라오질 못했다.숨이 차서인지 발이 엉켜서인지.주변을 빠르게 훑었다.무조건 들어가야 했다.보이는 곳으로 뛰어들었다.아이, 하필 모텔이라니.그런데 따지고 있을 상황이 아니었다.뛰어 들어오는 우리를 보며 놀라는 주인에게 지폐를 잡히는 대로 건네자 키 하나가 날아왔다.문이 닫혔다.헉헉— 헉헉—나는 벽에 등을 기대고 숨을 몰아쉬었다.심장이 목까지 올라와 있었다.그리고 옆에 선 유혁을 봤다.입가에 피가 맺혀 있었다."너! 도대체 ..."나도 모르게 버럭 소리를 질렀다."그런 놈들한테 왜 맞고 있는 건데—"유혁이 놀란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그 순간이었다.나는 그 눈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너무나도 아름다운 눈이었다.유혁이 채령을 닮았다고 생각했다.그런데 얼굴은 닮았는데, 눈동자는 아니었다.이 눈동자... 더 깊고 더 아름다웠다.지금 이 순간, 나는 알았다.유혁은 채령이 아니었다.그리고 채령을 닮아서 흔들렸던 게 아니었다.놀란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혁의 고운 얼굴. 벌어진 입술. 흐트러진 머리칼. 가쁜 숨결.나의 세상이 무너지는 것 처럼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그냥 두면 안 될 것 같았다.당장이라도 그 입술에 손을 대고 싶었다.아니, 손이 아니라.저 몸을 와락 안고 싶었다.그리고 저 작은 입술에 키스를 하고 싶다는 욕구가 나의 저 밑에서 끓어올랐다.나, 혁에게 완전히 빠져들고 있다.채령 때문이 아니었다.처음부터.이 녀석 때문이었다.유혁, 너 때문이었다.나는 시선을 억지로 떼어내며 입을 열었다."일단 앉아. 입가 닦아야지."목소리가 평소보다 낮게 깔렸다.그런데 냅킨을 뽑아드는 나의 손이 떨리고 있었다.차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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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화. 네 심장도 뛰고 있어?

아버지가 남긴 빚을 받으러 다니는 사채업자 중 하나가 전직 조폭 두목 출신인 변사장이라는 말을.그래서 내가 그의 부탁은 왠만하면 들어줘야 한다는 것을.도저히 할 수가 없었다."그런 게 있어요. 그것보다 형, 제발 다음부터는 그렇게 나서지 마요.""뭐?"우석이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구해줬더니 보따리 내놓으라는 이 기분은 뭐지?""그게 아니라, 괜히 형 다치기라도 하면요.""야야, 내가 너냐? 다치기는."그가 주먹을 휙휙 내질러 보였다.복싱 좀 했다는 걸 자랑하고 싶은 모양이었다.그 모습에 픽— 웃음이 새어 나왔다."와-, 너도 웃을 줄 아는구나! 그리고 이런 상황에서."우석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놀라워했다.그러네.내가 참 오랜만에 웃었다."야, 너 좀 더 웃겨야겠다."우석이 자리를 툭 쳤다."이리 앉아봐."나는 어색하게 그의 옆에 가 앉았다.어깨가 닿을 듯한 거리."세종대왕이 초콜릿 주면서 하는 말은?""…네? 세종대왕이 초콜릿을요?""난센스 퀴즈야. 맞혀봐!""음… 모르겠는데요.""하— 법률 책은 그렇게 보면서 이것도 몰라. 가나다라야.""네에?"나는 어이없어 웃어버렸다.그 모습에 우석이 환하게 좋아라 했다.저 능청스러운 얼굴에 소년 같은 웃음이 또 다시 번졌다.그 순간이었다.우석의 손이 갑자기 내 입을 막았다.차갑고 넓은 손바닥.그의 숨소리가 뚝 멈췄다.쉿—그가 입술에 손가락을 갖다 댔다.눈이 진지하게 굳어 있었다.복도에서 발소리가 들려왔다.묵직하고 빠른, 여러 개의 발소리.저 놈들이 여기까지 쳐들어온 건가.내 눈이 커졌다.우석 또한 당혹스러운 기색이 역력했다.그때 복도에서 목소리가 들렸다."분명히 남자 둘이 이쪽으로 들어왔어. 김 사장, 거짓말하면 여기서 영업 못 해.""아이, 안 들어왔다니까요!"주인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그다음 순간."이리 와!"우석이 내 팔을 잡아당겼다.나는 침대 위로 눕혀졌다.이불이 머리 위로 뒤집어씌워졌다.그리고 그가 내 옆으로 누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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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화. 네 이름을 부르려다

나는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이불이 아직 따뜻했다.그의 온기가 아직 남아 있었다.등을 보이며 사라지는 그에게, 나는 말하고 싶었다.나도. 나도 같은 기분이야.아까부터 심장이 터질 것 같았어.그런데 말할 수가 없었다.우석은 지금 혁에게 흔들리고 있는 거다.남자인 유혁에게.송희우가 아니라.나는 이불 위에 손을 얹었다.아직 따뜻한 그 자리를.이러면 안 되는데.눈물이 날 것 같았다.#내가 지금 무슨 짓을 한 거지.방금 전까지도 믿기지 않았다.남자한테— 그것도 유혁에게— 입을 맞췄다.그런데 더 당황스러운 건 따로 있었다.유혁이, 피하지 않았다는 것.이렇게 다정하고 달콤한 키스는 처음이었다.채령과 나눴던 입맞춤에서도 느껴보지 못한 강렬함이었다.그나저나 웬 망신이야.너도 나처럼 심장이 뛰냐고 묻다니.나는 손바닥으로 마른세수를 했다.모텔 문을 나서는 나의 발걸음이 허탈했다.밤바람이 차가웠다.그 차가움이 오히려 반가웠다.달아오른 얼굴을 식혀줄 것 같아서.걸어가다가 나는 걸음을 멈췄다.그리고 뒤를 돌아봤다.저 멀리, 유혁이 따라 걷고 있었다.고개를 약간 숙인 채로.작은 몸이 가로등 불빛 아래 길게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그런데 저 녀석, 정말 심장이 뛰지 않았다고?이불 속에서 내 품에 안겨 있던 그 온도가 아직 손바닥에 남아 있었다.분명히 느꼈다.그 작은 몸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는 걸.귓불이 빨갛게 달아오른 것도.숨을 참고 있던 것도.그게 다 뭐냐고.묻고 싶었다.당장 달려가서.다시 입맞춤을 해보고 싶었다. 정녕 나처럼 이렇게 피가 뜨거워지지 않는지를.하지만 나는 다시 앞으로 돌아섰다.유혁 입장에서 생각해봐.남자 둘이 좁은 이불 속에 엉켜 있었잖아.누구라도 어색하지.나는 애써 태연하게 손을 한 번 흔들어 보이고는 그대로 걸어갔다.유혁의 얼굴을 제대로 볼 수가 없었다.그래도 그렇지.내가 왜 이렇게까지 얼굴을 못 보는 건데.어떻게 왔는지 기억도 나지 않은 채집에 돌아왔다.넓고 조용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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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화. 얼어붙은 옥탑방

"야, 그 작품 너한테 어려워. 앞이 보이지 않는 연기가 얼마나 어려운 줄 알아? 눈빛보다 표정 연기가 압권이 되어야 하고, 노래도 해야 하고 춤도 춰야 하고. 너 몸이 뻣뻣하잖아."그 말에 나는 잠깐 굳었다.인기에 비해 내 연기가 딸린다고 생각하고 있는 거구나.솔직히 나도 알고 있었다.두 작품 찍고 바로 운 좋게 떠버린 나.작품을 잘 만난 거지, 내 연기가 뛰어난 건 아니라는 걸.그런데 막상 박 대표 입에서 그 말이 나오니 자존심이 구겨졌다."알았어요. 그럼 '도도한 재벌 손자는 죽은 나의 남편이었다'는 어때요?""야! 그건 더 어려워! 대작인 데다 한 사람이 세 캐릭터를 소화해야 해. 쓸데없이 작품 고르려 하지 말고 기다려. 너한테 맞는 작품이 들어오겠지."뚝— 전화가 끊겼다.나는 헐— 하며 소파 등받이에 기댔다."와, 날 뭘로 보고. 세 캐릭터 소화를 못한다고?"틀린 말이 아니라는 게 더 열 받았다.나는 대본집을 탁자 위에 탁 내려놓았다.그리고 천장을 바라봤다.오기가 생기는데.이 작품, 하고 싶다.그때 친구 기석에게서 전화가 왔다."야! 우석아, 날짜 잡았어. 이번 토요일이야. 절대 말 바꾸면 안 돼!"이렇게 빨리?나는 순간 당황했다.하지만 짐짓 반기는 척 말했다."물론이지. 이번 토요일, 꼭 나갈게."전화를 끊었다.그리고 창밖을 바라봤다.눈이 내리고 있었다.소리도 없이, 조용하게.창문 너머로 서울의 밤 위에 하얗게 쌓이는 눈.아, 유혁의 옥탑방 창에도 이렇게 눈이 보이겠지.지금쯤 그 작은 방에서 무얼 하고 있을까.법률 서적을 펼쳐놓고 있을까.아니면 혼자서 라면이라도 먹고 있나.아니면 오늘 일을 떠올리며 혼자 얼굴을 붉히고 있을까.당장이라도 달려가 묻고 싶다.나를 생각하고 있긴 하는 거냐고?내가 드는 이 기분, 정말 너는 느끼지 않냐고?그 생각이 드는 순간 나의 한심함에 한숨이 절로 나왔다.후—조금이라도 틈이 생기면 어김없이 유혁, 네가 머릿속을 헤집고 들어오는구나.그런데, 소개팅에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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