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과부촌의 밤도깨비: Chapter 11 - Chapter 20

34 Chapters

11화

“문이 끝내 열리지 않아도, 오늘 밤은 이미 그대 것이오.”이겸의 대답을 들은 연화는 문고리에서 손을 떼지 않았다.골목의 여자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더 묻지는 않았으나,문을 닫기 직전 그의 발이 어디에 머무는지 끝까지 확인했다.이겸은 묵던 방으로 들어갔고,연화는 빗장을 내린 뒤에도 귀를 문 쪽에서 떼지 못했다.낮빛이 창호를 옮겨 다니는 동안 두 사람 사이에는 밤에 울릴 두 번의 소리만 남아 있었다.월선은 해가 기울기 전 연화를 찾아왔다. 문턱을 넘지 않고 선 채 연화의 집과 골목 끝을 차례로 살폈다.“댕기는 거두자고 하면서 다른 신호를 만든 게냐?”연화는 말리던 무청을 한 줄씩 가지런히 놓았다.“누구의 문에도 걸리지 않는 약속이오.”“보이지 않는 약속이 보이는 것보다 덜 위험할 것 같으냐?”“끝내 문을 열지 않을 수도 있는 것 또한 내 선택이오.”월선은 대답하지 않은 채 문턱 밖으로 물러났다.돌아가기 전 골목 끝을 한 번 더 살폈다.이겸은 약방 처마 아래에 앉아 매향이 건넨 약을 삼키고 있었다.그는 연화의 집 쪽으로 고개를 돌리지 않았고, 자리를 뜨기 전 빈 약봉지를 두 번 접었다가 다시 펼쳤다.월선이 떠난 뒤 연화는 이부자리를 펴고 물주전자를 문 가까이에 두었다.손님에게 내놓는 잔을 꺼내려던 손은 찬장 안에서 멎었다.문지방의 흙을 닦은 뒤에도 걸레를 놓지 못하다가,바깥에서 발소리가 지나가자 그제야 일어섰다.해가 산마루 뒤로 사라지자 이겸은 약속한 골목 끝에 섰다.칼은 묵던 방에 두었고, 상처가 당기지 않도록 도포 앞을 느슨하게 여몄다.옥련의 주막에서는 늦은 손님의 웃음이 흘러나왔고,금옥의 집에는 일찍 불이 꺼졌다.초희는 처마의 염색천을 걷으며 한 번도 이겸 쪽을 보지 않았으나,마지막 천을 접어 광주리에 넣는 데 평소보다 오래 걸렸다.연화는 저녁상을 치우고 등잔 심지를 줄였다.문 앞까지 갔다가 돌아와 물주전자를 문턱 가까이 옮겼다.창호를 열면 약속한 빗장보다 먼저 허락을 내보이는 것 같아 손대지 못했다.밥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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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화

이겸이 문턱을 넘자 연화는 그의 발이 방 안에 들어온 것을 확인한 뒤 문을 닫았다.빗장은 곧장 홈에 내려앉았으나 손은 나무 위에 남아 있었고,이겸 역시 문 가까이에서 더 움직이지 않은 채 그녀가 돌아보기를 기다렸다.“내가 나가라 하면 바로 나가시오.”“그대가 빗장을 걷는 즉시 나가겠소.”연화는 그제야 문에서 손을 떼고 이부자리 곁으로 돌아갔다.데운 물에서는 김이 거의 사라졌고 손님에게 내놓으려던 잔은 여전히 찬장 안에 있었으나,두 사람 사이에는 물주전자 하나면 충분한 듯했다.“앉으시오.”이겸이 물주전자 건너편에 자리를 잡자 연화는 그의 도포 앞을 한동안 바라보다가 손을 내밀었다.“상처를 보겠소.”이겸은 양손을 무릎 위에 올려놓았다.연화가 매듭을 풀고 옷자락을 벌리자 약 냄새가 방 안의 데운 물 냄새를 밀어냈으며,붕대 가장자리는 새 피 없이 살에 들러붙어 있었다.연화는 젖은 천으로 굳은 부분을 불렸다.천이 떨어질 때마다 이겸의 움찔함이 느껴졌으나 몸을 피하지는 않았고,그녀의 손이 멎을 때만 시선이 아래로 기울었다.“아프오?”“그대 손이 멎는 것이 더 싫소.”“아프면 멈출 것이오.”“그러면 견디겠소.”새 천을 감아 매듭을 묶은 연화가 손을 거두려는 순간,이겸의 손가락이 그녀의 소매 끝에 닿았다.왼손이 먼저 말아 쥐어지자 그는 곧바로 손을 떼고 조금 전보다 더 먼 곳에 내려놓았다.“싫었소?”“놀랐소.”“다른 뜻이라면 다시 묻겠소.”연화는 비어 있는 그의 손을 내려다보았다.가까워지고 싶은 마음과 물러날 자리를 남겨 두고 싶은 마음이 같은 곳에서 부딪히는 듯했으나,이번에는 그가 뜻을 짐작하도록 두지 않았다.“내가 물러서라 할 때까지만 가까이 오시오.”이겸은 손바닥을 위로 펼쳤다.연화가 그 위에 손을 얹자 두 사람 사이의 거리가 천천히 줄었으며,입술이 닿기 전까지도 그녀가 고개를 돌릴 만큼의 틈은 남아 있었다.“나는 그대를 원하오.”연화는 그의 도포 깃을 붙들었다.“그 대답이면 되었소.”첫 입맞춤은 짧게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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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화

연화의 문이 닫힌 뒤 이겸은 옥련의 문턱 앞에 그대로 서 있었다.안쪽으로 비켜선 옥련은 재촉하지 않았고,문고리에 걸린 붉은 댕기만 밤바람을 받아 그의 소매 가까이 흔들렸다.“들어오지 않을 것이오?”이겸은 닫힌 연화의 문을 한 번 바라본 뒤 옥련의 문턱을 넘었다.옥련은 그의 발이 방 안에 들어온 것을 확인하고 문을 닫았으며,빗장이 내려앉는 소리는 골목 건너까지 길게 번졌다.등잔 심지가 낮아진 뒤에도 옥련은 곧장 거리를 좁히지 않았다.물잔을 건네며 이겸의 도포 아래로 드러난 흰 천 끝을 살폈고,그가 잔을 비운 뒤에야 머리의 댕기를 풀어 문고리 곁에 내려놓았다.날이 밝기 전 이겸은 주막에서 나왔다.옷매무새는 단정했으나 옆구리의 붕대가 조금 밀려 있었고,해진 칼끈은 상처를 누르며 걸음마다 한쪽으로 기울었다.연화는 우물가에서 물동이를 채우면서도 그를 보지 않았다.다만 두레박을 끌어 올리는 속도가 평소보다 빨라 물이 돌 테두리 밖으로 여러 번 넘쳤다.옥련은 뒤늦게 문을 열어 이겸이 쓰던 잔을 씻었다.붉은 댕기는 머리에 다시 매지 않은 채였고, 연화가 물동이를 들고 돌아설 때까지 문턱 밖에 서 있었다.초희는 처마 아래의 염색천을 걷다가 이겸의 걸음을 알아보았다.그가 마당 밖에서 멈추자 광주리를 내려놓고 손부터 내밀었다.“칼을 풀어 주시오. 그 끈으로는 상처가 다시 벌어지겠소.”이겸은 칼을 풀어 문턱 안쪽에 놓았다.초희는 해진 가죽 위에 쪽빛 천을 대고 바늘을 밀어 넣었으며,실을 당길 때마다 칼집 끝이 무릎 위에서 조금씩 움직였다.“칼을 맡긴 사내들은 대개 날부터 살피오.”“나는 날을 맡기지 않았소.”“그렇다면 무엇을 보고 있소?”“내 것을 고치는 손.”초희가 실 끝을 끊으려다 바늘에 손끝을 찔렸다.이겸의 손이 먼저 들렸으나 그녀가 손가락을 입술에 대자 닿기 전에 멎었고,문밖에 도착한 연화는 그 짧은 움직임을 끝까지 지켜보았다.“저고리는 안에 두었소. 잠시만 기다리시오.”초희가 방으로 들어간 사이 연화는 새로 달린 쪽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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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화

연화의 마지막 물음이 골목에 남아 있었다.이겸은 초희의 문턱에 한쪽 발을 둔 채 그녀에게 다가가지 않았고,열린 문 안에 선 초희는 자신을 지나 연화에게 머문 그의 시선을 끝까지 지켜보았다.“그대에게 더 가까이 가면 그대 문이 다른 사내에게 열리는 것을 견디지 못할 것 같소.”연화의 손이 문고리 위에서 멎었다.“그대는 다른 여자들의 문을 넘으면서 말이오?”“그래서 그대에게서 먼저 물러난 것이오.”초희는 문고리를 쥔 채 이겸의 발을 내려다보았다.“내 문턱에서 다른 여자의 대답을 기다릴 셈이면 그 발부터 거두시오.”이겸은 방 안에 들였던 발을 밖으로 뺐다.무슨 말을 하려는 듯 입술이 열렸으나 초희는 기다리지 않고 붉은 댕기를 문고리에서 풀어 손안에 감았다.“그대를 가볍게 여긴 것은 아니오.”“가볍지 않은 여자를 앞에 두고도 다른 여자만 보았소.”이겸은 답하지 못했다. 초희는 문고리를 쥔 손에 힘을 주며,그의 시선이 자신의 몸 위로 스치는 열기를 느끼며,문턱 아래 놓인 칼을 칼집 가운데로 들어 그의 발 앞에 내려놓고 안쪽으로 물러났다.“오늘 내 문은 내가 닫겠소.”붉은 댕기가 손안으로 사라진 뒤 문도 닫혔다.이겸은 발 앞의 칼을 집어 허리에 찼으나 연화에게 가까이 가지 않았고,연화 역시 반쯤 열린 제 문 안에서 한 걸음도 나오지 않았다.“나를 위한 척하며 그대 욕심을 감춘 것이구려.”“그렇소.”그가 부정하지 않자 연화는 문을 조금 더 당겼다.좁아진 문틈 사이로 이겸의 얼굴이 절반쯤 가려졌으나 그는 손을 뻗지 않았다연화의 가슴이 거친 숨으로 부풀어 오르는 것을 느끼며,그의 눈이 그녀의 입술과 목선을 타고 내려가는 열기를 견뎌야 했다.“그것은 배려가 아니라 비겁함이오.”연화의 문이 닫힌 뒤에도 이겸은 골목에 남아 있었다.문 안쪽에서 빗장이 걸린 뒤에야 돌아섰으며,그날 밤에는 어느 집의 문 앞에도 다시 서지 않았다.그의 몸은 여전히 두 여자의 문 사이에서 뜨겁게 달아올라 있었다.아침이 되자 초희는 붉은 댕기를 대야에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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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화

골목 끝 방에 불이 들어온 뒤에도 연화는 손바닥만큼 남은 문틈을 붙들고 있었다.이겸의 방에 켜진 등잔이 희미해진 뒤에야 문고리에서 손을 놓았다.우물가에서 물동이를 들던 금옥은 연화의 문이 닫히는 것을 끝까지 지켜보았다.빈 골목과 세 개의 닫힌 문을 차례로 살핀 뒤에야 물동이를 들고 제 집으로 돌아갔다.다음 날 금옥은 마당에 널어 둔 콩을 자루로 옮기고 있었다.접어 둔 자루 입구가 풀리며 콩이 흙바닥으로 쏟아지자 골목을 지나던 이겸이 허리를 숙였으나,금옥이 먼저 손바닥을 내보였다.“도우려면 물어보세요.”이겸은 콩에 닿기 전 손을 거두었다.“도와도 되오?”“이제는 돼요.”이겸이 자루 입구를 벌리는 동안 금옥은 흩어진 콩을 주워 담았다.마지막 한 알까지 들어간 뒤에도 그가 자루를 들어 옮기지 않고 기다리자 금옥이 끈을 건넸다.“입구만 묶어 주세요.”이겸은 자루를 무릎으로 받치고 두 손으로 입구에 끈을 감았다.금옥은 그의 옆구리를 감싼 붕대와 상처 위를 비켜 고쳐 맨 쪽빛 칼끈을 차례로 살폈다.“어젯밤에는 어느 문에도 들어가지 않았지요?”“보았소?”“한쪽은 열려 있었고 한쪽은 닫히고 있었어요.”“그대는 무엇을 보았소?”금옥은 흙이 묻은 손끝으로 자루의 매듭을 눌렀다.“누구에게도 가지 않은 사람을요.”이겸은 대답하지 않았다. 금옥은 자루를 기둥에 기대 놓고 풀어진 머리끈을 다시 묶었다.“다들 나를 막내라고 불러요.”“그대 이름이 있는데 왜 그러오?”“이 마을에서 가장 어리니까요.”“어리다고 이름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오.”금옥은 모아 쥔 머리카락을 놓지 않은 채 그를 바라보았다.“막내라고 불려도 내 문은 내가 정하는 것이지요?”“그렇소.”빈 되를 들고 마당 앞에 도착한 연화는 두 사람 사이에 놓인 콩자루를 보았다.금옥이 한 되를 채우자 이겸은 묶은 끈에서 손을 떼고 먼저 골목으로 나갔다.그의 발이 멀어진 뒤 금옥이 콩이 담긴 되를 연화에게 내밀었다.“오늘 밤 댕기를 걸 거예요.”연화는 콩 위로 솟은 부분을 손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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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화

새벽빛이 담장 위를 희게 밀어 올릴 무렵 금옥의 문이 열렸다.문밖에는 아무도 없었고,이겸이 오래 기대 서 있던 자리만 밤이슬에 젖지 않은 채 어둡게 남아 있었다.금옥은 손안에 감고 있던 붉은 댕기를 풀어 소매 깊숙이 넣었으며,우물가에서 두레박을 당기던 연화는 빈 문턱과 흐트러지지 않은 옷고름을 차례로 살폈다.“들어오지 않았어요.”연화가 묻지 않았는데도 금옥이 먼저 말했다.그녀는 물동이를 내려놓고 댕기를 쥔 자국이 밴 손바닥을 찬물에 담갔다.“문을 열었으나 들이지 않은 것이오?”“내 이름을 듣고 나니 알겠더군요. 내가 기다린 건 그 사람이 아니라, 막내가 아닌 나를 불러 줄 목소리였어요.”연화는 젖은 두레박 줄을 한 번 더 감아 올렸다.밧줄이 손바닥을 긁었으나 힘을 늦추지 않았고,물이 바가지 밖으로 넘친 뒤에야 금옥에게 등을 돌렸다.“그대가 정한 일이면 되었소.”“언니는 왜 안도하면서도 슬픈 얼굴이에요?”“안도한 적 없소.”“그러면 제 문이 닫히는 소리를 왜 끝까지 들었어요?”두레박이 우물 벽에 부딪혀 둔탁한 소리를 냈다.연화가 대답하지 않자 금옥도 더 묻지 않았고,소매 속 댕기를 손끝으로 한 번 누른 뒤 물동이를 들고 돌아섰다.한낮의 대장간에서는 난실이 부러진 낫자루에서 녹슨 못을 빼고 있었다.이겸이 화덕 옆에 물통을 내려놓자 그녀는 망치를 건네지 않고 그의 옆구리에 감긴 붕대부터 살폈으며,그가 손을 뻗자 못 끝을 반대편으로 돌려 놓았다.“도우려면 앉아. 서서 내려다보는 건 도움이 아니야.”이겸은 모루 곁에 앉았다.난실이 낫자루를 붙들고 그가 새 못을 박는 동안 두 사람의 손은 가까워졌다가 닿기 전에 각자의 자리로 물러났고,숫돌을 가지러 온 연화는 처마 아래에서 그 간격을 오래 바라보았다.화덕의 열기가 뺨을 스치자 소매를 걷었다가 밧줄에 쓸린 손바닥이 드러나는 것을 보고 다시 내렸다.“어젯밤 금옥의 문 앞에 있었지?”“그렇소.”“들어가지는 않았고.”“들어오라는 말을 듣지 못했소.”난실은 고친 낫을 연화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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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화

“무엇이라 불러도 좋소. 내가 다른 문을 넘은 일은 달라지지 않소.”연화는 물동이 가장자리에서 넘친 물이 치맛단을 적시는 것도 모르고 그를 바라보았다. 전날과 달라진 붕대 매듭이 이겸의 옆구리에서 반듯하게 겹쳐 있었고, 소매 끝에는 대장간의 검댕이 얇게 남아 있었다. 그가 젖은 흙을 밟지 않도록 한 걸음 비켜섰으나 연화는 그 틈으로 지나가지 않고 두레박 줄만 감아 올렸다.“기다린다는 말과 다른 문을 넘는 일이 어찌 함께 있을 수 있소?”“그대를 기다리는 마음과 다른 이를 원하는 몸은 내게 다른 일이오.”“그대가 둘을 나누었다고 해서 내 상처까지 없어지는 것은 아니오.”이겸은 곧장 답하지 않았다. 대장간에서 망치가 모루를 치는 소리가 골목을 건너오자 연화는 물동이를 들어 돌아섰고, 그는 따라붙지 않은 채 그녀의 문이 닫힐 때까지 우물가에 남았다.한낮에 연화가 쪽빛 실꾸리를 들고 초희의 집을 찾았을 때, 이겸은 가림막 곁에 서서 불씨에 상한 소매를 걷어 올리고 있었다. 초희는 탄 부분을 잘라 낸 뒤 새 천을 그의 팔에 대어 길이를 재고 있었으며, 문턱에 선 연화를 보는 순간 손에 쥔 자가 비스듬히 미끄러졌다.“실을 가져왔소.”“마침 필요했소. 덧댈 천이 두꺼워 가는 실로는 오래 버티지 못할 듯하오.”초희의 설명은 묻지 않은 데까지 길어졌다. 연화가 실꾸리를 바느질상에 내려놓자 쪽빛 타래가 굴렀고, 이겸이 손바닥으로 막았다. 초희는 그의 손등 가까이에 놓인 실을 집으려다 손을 멈춘 채 연화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내게 설명할 필요 없소.”“옷을 고치는 법을 말했을 뿐이오.”“그러면 마저 하시오.”연화가 돌아선 뒤에도 초희는 실 끝을 이로 끊지 못하고 입술 사이에 문 채 굳어 있었다. 이겸의 시선이 열린 문을 따라 골목으로 향하자 그녀는 새 천을 내려놓았다.“따라가고 싶으면 가시오.”“그대가 길이를 재다 말았소.”“옷이 아니라 나를 보고 있는 것이오?”이겸은 골목에서 시선을 거두어 초희에게 돌렸다.“그대를 보고 있소.”해가 기울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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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화

빗장이 걸린 뒤에도 이겸은 연화의 문 앞에서 한동안 움직이지 않았다.문 안에서는 천이 바닥을 스치는 소리가 한 번 났고,뒤이어 등잔 심지를 낮추는 가느다란 마찰음이 들렸다.그는 문짝에 닿지 않은 손을 천천히 내렸으며,새벽닭이 울어서야 골목 끝으로 물러났다.연화는 그 발소리가 끊긴 뒤에도 빗장에 손을 얹고 서 있다가 방바닥의 붉은 천을 주웠으나,다시 안쪽 못에 걸지는 못했다.물주전자 곁에 남은 잔을 비우려 했지만 손이 기울지 않아, 밤새 식은 물만 잔 가장자리에서 가늘게 떨렸다.해가 오른 뒤 연화가 말린 약초를 들고 매향의 집을 찾았을 때 초희가 처마 아래에 앉아 있었다.밤새 잠을 이루지 못했다며 약봉지를 기다리는 그녀의 머리끈은 한쪽으로 기울었고,손목에는 쪽빛 실이 눌린 자국이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연화는 그 흔적을 지나쳐 바구니를 내려놓았으나 모서리가 마루를 세게 눌러 마른 뿌리 몇 개가 밖으로 튀었다.“잠을 돕는 약이 필요하오?”매향의 물음에 초희는 소매를 끌어내렸다.“오늘 하루만 깊이 자고 싶소.”“잠이 달아난 까닭을 가리는 약은 없소.”초희는 약봉지를 받아 들고도 일어나지 못했다.매듭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가 종이가 구겨졌고,연화와 눈이 마주치기 전에야 몸을 일으켜 돌아섰다.치맛자락에 붙었던 쪽빛 실 한 가닥이 마당에 떨어졌고,연화가 엉킨 뿌리를 풀다 가느다란 줄기 하나를 부러뜨리자 매향은 그 조각을 따로 놓았다.“묻지 않을 셈이오?”“밤의 일을 낮에 묻지 않는 것이 이 마을의 법이오.”“법은 손에 힘을 주지 않소.”연화는 손을 폈지만 부러진 뿌리는 돌아오지 않았다. 매향은 더 캐묻지 않고 약초 잎 하나를 손톱으로 접었으며, 깊게 팬 자국을 한동안 펴지 않았다.한낮이 지나 이겸이 찾아왔을 때 매향은 약탕기를 불에서 내리다 손등을 데었다.뜨거운 그릇을 놓치지 않으려 버티는 사이 이겸이 받침을 밀어 넣었고,약탕기가 내려앉자 그녀의 손을 보며 멈췄다.“상처를 보아도 되오?”매향은 잠시 망설이다 손을 내밀었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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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화

“죄라 한 적 없소.”이겸의 대답에도 연화는 문밖으로 반쯤 내밀었던 붉은 천을 거두지 못했다.새벽바람이 천 끝을 가볍게 흔들었고, 손안에 감긴 부분은 눌린 자국대로 구겨졌다.그는 두 걸음의 거리를 남긴 채 그녀의 손만 바라보았으나,연화는 끝내 문고리에 걸지 않고 천을 안으로 끌어들였다.“말로 하지 않아도 죄가 되는 일이 있소.”“그대가 원하는 것을 숨긴다고 없어지지는 않소.”“그러니 보지 마시오.”“보지 않는다고 모르게 되지는 않소.”연화의 손이 문짝 가장자리에서 멎었다.상 위에는 밤새 비우지 못한 물잔이 남아 있었고,붉은 천 끝에는 넘친 물이 스며든 자국이 번져 있었다.그녀는 그것까지 감추듯 문을 당겼으며,천 끝이 문틈에 잠깐 물렸다가 안으로 사라졌다.이겸은 손을 뻗지 않았고, 빗장이 걸리는 소리를 들은 뒤에야 돌아섰다.해가 오른 뒤 연화는 전날 손을 데인 매향에게 가져갈 약주를 사러 옥련의 주막에 갔다.마당에는 씻어 엎어 둔 사발이 가지런했고,옥련은 평상 끝에 앉아 술독 뚜껑의 금을 천 조각으로 메우고 있었다.처마 아래에서는 이겸이 장작을 쪼갰는데,도끼를 내릴 때마다 옆구리의 붕대가 당기는지 몸이 살짝 뒤틀렸다.“매향에게 줄 거요?”“손을 데었으니 기운이라도 돋우라 가져가려 하오.”옥련은 작은 병에 술을 따르면서 연화의 젖은 소매 끝을 보았다.물이 마른 자리에는 여러 번 비튼 주름이 남아 있었고,그녀는 병목을 헝겊으로 감으며 웃음기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마음이 불편해도 다친 손은 그냥 못 지나치는군.”“다친 사람을 챙기는 일에 다른 뜻이 필요하오?”“없지. 필요 없는 것일수록 오래 붙드는 사람도 있으니.”옥련은 누구를 뜻하는지 밝히지 않았다.연화가 약주를 받아 돌아서자 장작더미 한쪽이 기울었고,이겸이 손을 뻗어 붙들었다.그의 손등과 연화의 치맛자락 사이에는 손가락 하나만큼의 틈이 남았다.연화가 먼저 물러났지만 이겸의 시선은 그녀가 골목 모퉁이를 돌아 사라질 때까지 따라갔고,옥련은 술독 뚜껑을 덮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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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화

“주인은 없소.”이겸의 대답이 늦자 옥련은 그 틈부터 알아들었다.문짝을 붙든 손에서 붉은 댕기가 풀려 발치까지 늘어졌고,우물가의 연화는 두레박 줄을 감은 채 끝내 고개를 들지 않았다.문턱 안쪽에는 이겸에게 밀어 두었던 술잔이 밤새 줄지 않은 채 남아 있었다.“없는데도 저 여자부터 보는군.”“그대가 연 문을 가볍게 여긴 적은 없소.”“가볍지 않다는 말로 빈 잔이 차지는 않지.”옥련은 술잔을 안으로 들이고 문을 닫았다.빗장이 걸린 뒤에야 이겸은 몸을 돌렸으며,연화는 그의 발소리가 골목 끝에서 끊길 때까지 물동이를 들지 못했다.오래 감긴 줄이 손바닥을 거칠게 눌렀고,넘친 물은 신발 둘레의 흙을 물렁하게 적셨다.집으로 돌아온 뒤에도 연화는 젖은 치맛단을 갈아입지 않은 채 바느질함 앞에 앉았다.뚜껑을 열면 붉은 천이 먼저 보였고, 닫으면 옥련의 마지막 질문이 문짝 너머에서 되살아났다.한낮에 연화가 숫돌을 돌려주러 대장간에 갔을 때 난실은 낡은 낫을 달구고 있었다.화덕 가까운 기둥에는 문고리에 걸었던 짧은 붉은 천이 매듭 없이 얹혀 있었고,불기운이 밀려올 때마다 끝이 가볍게 들렸다 내려앉았다.“한 번 문을 열었다고 그 사내의 차례가 되는 건 아니야.”난실은 천을 풀어 화덕 가까이 가져갔으나 불길에는 넣지 않았다.붉은 끝이 열기에 말리자 연화의 손도 소매 안에서 오므라들었고,숫돌을 싼 보자기 끈이 손가락 아래에서 팽팽해졌다.“태우려는 것이오?”“태운다고 없던 밤이 되는 건 아니니까.”“그러면 왜 불 가까이 가져갔소?”“걸지도 못하고 품고만 있으면 언젠가는 제 손부터 데거든.”난실은 달아오른 천을 한 번 식힌 뒤 연화의 손바닥에 올렸다.그녀의 손끝이 움찔했으나 천은 떨어지지 않았다.“이건 내 거야. 자네 것도 걸지 못하겠으면 태워. 다만 어느 쪽이든 남한테 정하게 하지는 마.”“내게 그런 것은 없소.”“없는 사람은 남의 천까지 그렇게 쥐지 않아.”연화가 손을 펴자 천의 주름을 따라 가느다란 붉은 선이 남았다.그때 괭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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