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열녀문 아래 색귀: Chapter 11 - Chapter 20

20 Chapters

11화

해원이 차례를 정하겠다고 말한 순간, 두 남자의 침묵은 전보다 무거워졌다.담장 너머의 발소리가 멀어졌는데도 돌쇠와 허담은 창고 앞에서 물러나지 않았다.해원은 먼저 별당 쪽으로 걸었다.돌쇠가 뒤따라오며 소매에 묻은 나무 가루를 털었다.“저 말을 그냥 두실 겁니까?”“입을 막으면 더 멀리 퍼져.”“그래도 마님 밤을 함부로 입에 올리게 둘 수는 없습니다.”해원이 걸음을 멈췄다.“내 소문인데 왜 네가 먼저 화를 내?”“제 이름이 나와서가 아닙니다.”돌쇠는 손가락 사이에 낀 톱밥을 내려다봤다.“마님이 누구를 들였는지 남들이 세는 게 싫습니다.”허담이 뒤에서 말을 받았다.“목수가 행랑채를 돌아다니며 따지면 소문에 얼굴까지 붙게 됩니다.”돌쇠가 돌아봤다.“의원은 가만히 있을 겁니까?”“제가 나서면 사내 이름이 하나 더 붙겠지요.”두 남자의 말이 해원의 등을 따라붙었다.별당 앞에 도착한 해원은 문턱을 넘기 전 돌아섰다.“둘 다 아무것도 하지 마.”“마님.”“내가 누구를 골랐는지는 내가 말할 일이야. 당신들이 대신 숨기거나 인정할 일이 아니고.”복례가 문을 열었다.해원은 돌쇠를 바라봤다.비뚤어진 적삼 위에 자신이 움켜쥔 자국이 깊게 남아 있었다.“오늘 밤은 여기까지야.”돌쇠의 시선이 해원의 옷고름에 닿았다.자신이 다시 묶어 준 매듭이었다.“내일도 부르실 겁니까?”해원은 그의 질문을 피하지 않았다.“오늘 밤을 내일까지 가지려 하지 마.”돌쇠의 입술이 닫혔다.그는 계단 아래로 내려갔지만 마당을 건너지는 않았다.허담도 약갑을 든 채 그대로 남아 있었다.“의원 나리는 왜 안 가요?”“진료가 끝났다는 말을 듣지 못했습니다.”“필요 없다고 했잖아요.”허담은 해원의 목덜미에 남은 붉은 자국에서 시선을 거뒀다.약갑 뚜껑을 여는 데 평소보다 긴 시간이 걸렸다.“그때와 지금은 다릅니다.”“뭐가 달라졌는데요?”“맥을 짚지 않아도 열이 오른 흔적이 보입니다.”해원은 손목을 등 뒤로 감췄다.“그 열은 의원 나리가 내릴 게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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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화

“보고 싶으면 들어와.”문밖에서 돌쇠의 톱질이 먼저 끊겼다.허담은 약갑을 든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해원은 문 아래 놓인 약봉지를 집어 들었다.“둘 다 못 들었어?”돌쇠의 발이 문턱 가까이 다가왔다.“들었습니다.”“그런데 왜 안 들어와?”“누구에게 한 말인지 몰라서요.”해원이 문고리를 잡았다.“들어오고 싶은 사람만 들어와.”문이 열리자 돌쇠가 먼저 문턱을 넘었다.그러나 문을 닫지는 않았다.허담이 선 마당까지 훤히 보이도록 열어 둔 채 해원을 바라봤다.“제가 들어왔습니다.”“그래서?”“저를 부른 겁니까?”해원은 대답 대신 약봉지를 내밀었다.“열어 봐.”돌쇠가 매듭을 풀었다.안에는 말린 약재와 접힌 종이 한 장이 들어 있었다.[밤에는 반 첩만 달일 것.]해원은 문밖의 허담을 바라봤다.“진료하러 온 사람은 왜 거기 있어요?”“목수가 먼저 들어갔으니까요.”“먼저 들어오면 그 사람 차례예요?”허담은 곧바로 답하지 못했다.해원은 약봉지를 돌쇠에게서 되받았다.“난 문을 열었지, 밤을 준다고는 안 했어요.”돌쇠의 입술이 닫혔다.허담은 여전히 문턱 밖에 서 있었다.해원이 물었다.“의원 나리는 내가 누구를 들이는지 보고만 있을 거예요?”“보지 말라고 하셔도 이미 보았습니다.”“뭘요?”허담의 시선이 소복 깃 위로 드러난 붉은 자국에 잠시 머물렀다.돌쇠가 남긴 흔적이었다.방 안에서 돌쇠의 호흡이 달라졌다.해원은 옷깃을 여미지 않았다.“내 몸에 남은 걸 봤으면 모른 척하지 마요.”허담의 손이 약갑 끈 위에서 멈췄다.“무엇을 원하십니까?”“의원인 척만 하지 말라는 거예요.”해원은 문을 조금 더 열었다.“들어와요.”허담은 문턱 바로 앞에서 멈췄다.“목수가 있는 방에 말입니까?”“싫으면 돌아가고.”돌쇠가 해원의 곁으로 다가왔다.“마님.”“왜?”“오늘은 아무도 들이지 않겠다고 하셨습니다.”“마음이 바뀌었어.”“의원 때문에요?”해원은 돌쇠의 적삼 소매를 잡아 제 앞으로 당겼다.나무진 냄새가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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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화

문이 닫힌 뒤에도 두 남자는 돌아가지 않았다.해원은 창호지 위에 겹친 두 그림자를 한동안 바라봤다.하나는 문 가까이에 머물렀고, 다른 하나는 마당 끝에서 약갑을 들고 있었다.복례가 방 안쪽에서 물었다.“정말 한 사람만 부르실 겁니까?”“그래.”“누구를요?”해원은 대답 대신 촛불을 껐다.불빛이 사라지자 창호지 위의 형체도 흐려졌다.“둘 다 자기 몫이 남아 있다고 생각하잖아.”“어젯밤은 돌쇠가 있었으니 다음은 의원 나리라고 여길 수도 있지 않습니까?”“내 밤이 순서대로 나눠 갖는 물건이야?”문밖에서 돌쇠가 불렀다.“마님.”“왜 아직 있어?”“차례는 묻지 않겠습니다.”옷감에 나무가 스치는 소리가 났다.잠시 뒤 문 아래로 작은 장식 하나가 밀려 들어왔다.두 가닥의 끈이 얽힌 모양을 나무로 깎아 만든 물건이었다.복례가 그것을 주워 해원에게 건넸다.매끈한 표면에서 옅은 나무진 냄새가 배어 나왔다.“이걸 왜 줘?”“제가 다녀간 흔적이 하나쯤 남았으면 했습니다.”해원은 장식을 손가락 사이에서 돌렸다.“내가 달라고 한 적은 없는데.”“알고 있습니다.”“그런데도 남겨?”돌쇠의 대답이 문밖에서 머뭇거렸다.“어젯밤이 없던 일처럼 되는 건 싫었습니다.”마당 쪽에서 약갑이 닫혔다.딸깍.돌쇠가 바로 물었다.“의원은 약봉지를 남기지 않았습니까?”“필요한 약을 둔 것입니다.”“문을 열라는 글까지 적어 놓고요?”“열이 오르면 열라는 뜻이었습니다.”두 사람의 말이 닫힌 문 앞에서 맞부딪쳤다.해원은 나무 장식을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돌쇠는 들어와.”문이 곧 열렸다.돌쇠가 방 안으로 들어섰지만 문을 완전히 닫지는 않았다.해원은 마당에 남은 허담을 향해 말했다.“의원 나리는 거기서 들어요.”돌쇠가 침상 앞에서 멈췄다.“왜 저는 안이고 의원은 밖입니까?”“내 방에서는 내가 자리를 정해.”돌쇠의 입술이 닫혔다.해원은 그의 적삼 소매에 붙은 톱밥을 털어 냈다.어젯밤 움켜쥔 자리에는 아직 주름이 남아 있었다.“이 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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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화

허담은 흰 끈을 풀지 않았다.낮에는 소매 안에 감췄고, 해가 기울자 손목 밖으로 드러냈다.돌쇠는 마당 건너편에서 문살을 다듬으며 그 끈을 몇 번이나 확인했다.대패날이 한 번 비껴갔다.얇게 벗겨져야 할 문살 한쪽이 손가락 마디만큼 깊게 파였다.돌쇠는 그 자리를 메우지 않았다.해원이 별당 문을 열자 두 남자의 손이 동시에 멎었다.그녀는 돌쇠를 먼저 바라봤다.“오늘은 문 안 고쳐도 돼.”“문 때문에 남은 게 아닙니다.”“그럼?”돌쇠의 시선이 허담의 손목으로 향했다.“저 끈을 정말 풀지 않았는지 보려고 남았습니다.”해원은 계단을 내려와 돌쇠 앞에 섰다.“풀지 말라고 한 건 나야.”“압니다.”“그런데 왜 의원 나리한테 화를 내?”돌쇠는 대패날에 붙은 나무 조각을 엄지로 밀어냈다.“마님이 묶어 준 걸 저 사람이 갖고 있으니까요.”“오늘 밤은 의원 나리 차례야.”돌쇠의 손이 대패 위에서 멎었다.“어디까지 허락하실 겁니까?”“그건 네가 물을 일이 아니야.”“기다리라고 하셨습니다.”“기다리는 것과 내 허락을 대신 정하는 건 달라.”돌쇠는 더 묻지 않았다.다만 해원이 허담에게 향하는 동안에도 마당을 떠나지 않았다.허담은 약갑을 든 채 별당 계단 아래에 서 있었다.해원이 그의 손목을 잡았다.흰 끈 아래에서 맥이 거칠게 뛰었다.“정말 안 풀었네요.”“풀지 말라고 하셨습니다.”“내가 묶은 건 전부 지켜요?”“지키지 못할 말은 받지 않습니다.”“오늘 밤도 약속부터 받을 건가요?”허담은 곧바로 답하지 않았다.해원은 그의 약갑을 빼앗아 복례에게 건넸다.“오늘은 의원으로 들어오지 마요.”“그럼 무엇으로 들어갑니까?”해원이 별당 문을 열었다.“흰 끈을 받은 남자로.”허담은 문턱 앞에서 머물렀다.“싫으면 돌아가도 돼요.”잠시 뒤 그의 발이 방 안으로 들어왔다.해원은 돌쇠가 지켜보는 앞에서 문을 닫았다.놋방울이 흔들렸으나 울리지 않았다.방 안에는 전날의 나무진 냄새가 옅게 남아 있었다.허담은 그 냄새를 알아차리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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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화

돌쇠는 밤이 지나도록 허담의 향이 묻은 손을 씻지 않았다.우물은 몇 걸음 앞에 있었지만 그는 대패부터 집었다.나무 장식의 둥근 면이 얇게 벗겨졌다.해원은 문턱에 기대어 그 모습을 내려다봤다.“그러다 전부 없어지겠어.”“없어지면 다시 만들겠습니다.”“내가 달라고 하지도 않았는데?”대패날이 나무 위에서 멎었다.돌쇠는 해원의 풀어진 머리와 새로 여민 옷고름을 차례로 살폈다.허담의 약향은 소매뿐 아니라 소복 안쪽까지 깊이 배어 있었다.“마님께 드리려고 깎는 게 아닙니다.”“그럼 왜 깎아?”“손을 멈추면 방 안에서 있었던 일만 생각날 것 같아서요.”해원이 계단을 내려갔다.소매 끝이 돌쇠의 손등을 스쳤다.옅어졌던 약향이 다시 짙어진 듯했다.“궁금해?”“예.”“어디까지 갔는지?”돌쇠는 대패를 내려놓았다.“묻지 않으려 했습니다.”“왜?”“마님이 고른 밤이니까요.”“그런데 떠나지도 않았잖아.”그의 시선이 깊게 파인 문살에 머물렀다.“떠났으면 문을 열고 들어갔을 것 같습니다.”“내 허락도 없이?”“그래서 밖에 있었습니다.”해원은 그의 바로 앞에 섰다.“의원 나리와도 끝까지 갔어.”돌쇠의 엄지가 나무 장식의 모서리를 눌렀다.한동안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화나?”“의원에게 화가 납니다.”“나한테는?”돌쇠는 곧바로 답하지 않았다.“마님께 화낼 자격이 없다는 게 더 화납니다.”해원은 그의 눈을 피하지 않았다.“내가 다른 남자를 고른 게 싫어?”“제가 받았던 걸 저 사람도 받았다는 게 싫습니다.”해원은 돌쇠의 손에서 나무 장식을 빼앗아 대패 옆에 놓았다.“내가 너한테 준 걸 의원 나리한테 나눠 준 게 아니야.”그녀가 약향 밴 소매를 들어 올렸다.“그날에는 너를 골랐고, 어젯밤에는 그 사람을 골랐어.”돌쇠의 입술이 닫혔다.“같은 밤 아니었어.”“무엇이 달랐습니까?”“그걸 왜 알고 싶은데?”“다음에는 더 잘하고 싶습니다.”“누구보다?”대답이 막혔다.해원의 표정에서 남아 있던 장난기가 사라졌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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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화

의원방의 등불은 해원이 문 앞에 서자 한 번 크게 흔들렸다.문은 닫혀 있었다.허담은 안에서 기다리면서도 먼저 열지 않았다.해원은 손목에 감은 약향 밴 천을 한 번 당겼다.“들어오십시오.”“먼저 열어 주지는 않네요.”“오실지 제가 정할 수 없으니까요.”해원은 문고리를 잡았다.문은 잠겨 있지 않았다.안에는 약재 서랍과 낮은 책상, 침상 하나가 반듯하게 놓여 있었다.“등불을 켜 둔다더니 정말 진맥만 하려고요?”“필요하시면.”해원은 문을 닫지 않은 채 들어갔다.약향이 별당에서 맡았을 때보다 짙었다.옷이 아니라 벽과 이불, 오래 밴 나무 서랍에서 올라오는 냄새였다.“여기서는 의원 나리 향을 피할 곳이 없네요.”“다만 문을 닫으면 의원 나리 방에 갇힌 모양이 되겠네.”허담이 문에서 한 걸음 물러났다.해원은 문을 절반만 닫았다.“아직은 이것만.”허담은 남은 틈에 손대지 않았다.해원은 그가 앉았던 자리를 차지했다.약서 위에 손을 얹고 붓을 옆으로 밀자 먹 받침이 비뚤어졌다.“바로잡고 싶어요?”“평소라면 그랬을 겁니다.”“오늘은?”“마님이 무엇을 흐트러뜨리는지 보고 싶습니다.”해원은 그의 손목에 두 손가락을 올렸다.맥박이 곧 손끝을 밀어냈다.“빠르네.”“의원방에 환자가 아닌 분이 오셨으니까요.”해원이 손가락을 손목 안쪽으로 옮겼다.“어젯밤의 남자?”“그 이름으로 부르시면 오늘도 그 사람이 될 겁니다.”“여긴 의원 나리 방인데.”“그래서 더 어렵습니다.”“뭐가요?”허담의 시선이 반쯤 닫힌 문으로 향했다.“제가 정한 곳에서까지 허락을 기다리는 일입니다.”해원은 그의 손목을 놓지 않았다.“자기 방에서는 마음대로 하고 싶어요?”“아닙니다.”“거짓말.”허담의 손이 책상 가장자리를 짚었다.정렬돼 있던 약서 한 권이 바닥으로 떨어졌다.그는 줍지 않았다.“제가 문을 닫으면 나가지 못하게 하고 싶어질 것 같습니다.”“이미 그러고 싶은 얼굴인데요.”“그래서 손대지 않는 겁니다.”해원은 자리에서 일어나 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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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화

“이미 마님이 제 문 안에 계시니까요.”허담의 말이 끝나자 의원방 안이 조용해졌다.해원은 손가락에 감긴 갓끈을 놓지 않았다.팽팽해진 끈 아래로 그의 숨이 빠르게 오갔다.“다시는 문밖으로 보내지 않겠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기다리겠다고 했죠.”“그렇습니다.”“둘 중 어느 쪽이 진심이에요?”“둘 다입니다.”해원은 매듭을 한 번 당겼다.허담의 얼굴이 가까워졌다.“그럼 오늘은 기다리는 쪽만 보여 줘요.”“무엇을 기다리면 됩니까?”“내가 이걸 풀 때까지.”허담은 손을 올리지 않았다.해원은 매듭부터 풀지 않고 갓 아래로 손가락을 밀어 넣었다.끈이 그의 뺨을 스치며 느슨해졌다.그 순간 허담의 손이 해원의 허리를 끌어당기려다 옷감 위에서 멎었다.“또 참네요.”“풀라고 하신 것은 갓끈뿐입니다.”“내가 허락한 만큼만 가지려고요?”“그러지 않으면 전부 원하게 될 테니까요.”해원은 마지막 매듭을 풀었다.갓이 기울어 책상 위 약서로 떨어졌다.먹 받침이 밀리고 붓 하나가 바닥을 굴렀다.허담은 줍지 않았다.해원은 풀린 갓끈을 그의 목에 느슨하게 둘렀다.“이제 의원인 척 못 하겠네요.”“마님이 벗기셨으니까요.”“갓 하나 풀었다고 남자가 돼요?”허담의 손이 허리에서 등으로 올라갔다.이번에는 해원이 막지 않았다.“어젯밤부터 남자였습니다.”“그런데 오늘까지 의원방에 숨었네.”“여기로 오시면 덜 흔들릴 줄 알았습니다.”“틀렸어요?”허담은 바닥에 떨어진 약서를 보지 않았다.“마님이 들어오신 뒤로 이 방의 모든 것이 달라 보입니다.”“무엇부터요?”“제가 앉던 자리부터.”그의 시선이 해원이 밀어낸 약서와 비뚤어진 먹 받침을 지나 그녀에게 멈췄다.“그리고 문을 열어 두는 일까지.”해원은 갓끈을 목 뒤로 당겨 그의 얼굴을 가까이 끌었다.“내가 벗긴 건 갓이지 예법이 아니에요.”허담의 눈길이 그녀의 입술에 머물렀다.“예법까지 벗기고 싶으십니까?”“의원 나리가 얼마나 버티는지 보고.”허담의 손이 옷고름 가까이에서 멎었다.“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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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화

돌쇠는 해원의 비녀를 훔칠 생각이 없었다.적어도 별당 마루의 대팻밥을 쓸어 담을 때까지는 그랬다.새벽빛이 담장 위로 번지고 있었지만 방 안에는 아직 등잔불이 남아 있었다.돌쇠는 닫힌 문을 두드리지 않았다.기다리는 것과 부름받는 것은 다르다는 말을 전날 밤 배웠다.바구니를 들고 돌아서려는 순간 문이 열렸다.해원은 풀어진 머리를 한쪽 어깨로 넘긴 채 서 있었다.손목에는 허담의 갓끈이 그대로 감겨 있었다.“아직도 안 갔어?”“치울 게 남았습니다.”“나무 조각보다 네가 더 오래 남아 있네.”돌쇠는 대답하지 않았다.시선만 갓끈에서 해원의 머리로 옮겨 갔다.검은 머리 사이에 꽂힌 옥비녀가 등잔빛을 받아 희게 빛났다.해원은 그 시선을 놓치지 않았다.“왜 봐?”“아무것도 아닙니다.”“아무것도 아닌 얼굴은 아닌데.”그녀가 비녀를 뽑았다.머리카락이 어깨와 등 위로 한꺼번에 흘러내렸다.돌쇠의 손이 바구니 가장자리를 눌렀다.해원은 비녀를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갖고 싶어?”돌쇠의 대답은 늦었다.“예.”“왜?”“마님이 늘 몸에 지니는 것이니까요.”“그걸 가지면 나도 네 쪽에 남는 것 같아?”돌쇠는 부정하지 못했다.“갖고 싶다고 다 가져도 되는 건 아니라는 말, 들었지?”“들었습니다.”“그럼 돌아가.”회랑 끝에서 복례가 해원을 불렀다.“마님, 안채에서 사람이 왔습니다.”해원이 고개를 돌렸다.최씨 부인이 보낸 사람이 무슨 말을 가져왔는지 묻는 짧은 사이였다.돌쇠의 손이 문턱을 넘었다가 멈췄다.해원이 돌아보면 바로 들킬 거리였다.그 순간 손목에 감긴 허담의 갓끈이 다시 눈에 들어왔다.돌쇠는 옥비녀를 움켜쥐어 소매 안에 숨겼다.해원이 돌아봤을 때 그는 이미 바구니를 들고 마루 아래에 서 있었다.“왜 아직 있어?”“이제 갑니다.”돌쇠는 별당을 떠나면서도 소매 안 비녀를 놓지 못했다.차갑던 옥은 손바닥의 열을 먹고 빠르게 미지근해졌다.몇 걸음 지나지 않아 비녀 끝이 손바닥을 찔렀다.해원의 허락을 받지 않았다는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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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화

“못 봤다고 했지?”흰 옥비녀가 마루 위에서 멈췄다.돌쇠도 허담도 허리를 굽히지 못했다.해원은 비녀보다 두 남자의 손을 먼저 봤다.한쪽은 대패 자국으로 거칠었고, 다른 한쪽은 약재 물이 배었지만 반듯했다.허담의 손이 비녀를 향해 움직였다.돌쇠도 뒤늦게 손을 내밀었다.해원이 옥비녀 위에 손바닥을 덮었다.“둘 다 손대지 마.”두 손이 동시에 멎었다.해원은 직접 비녀를 집었다.차갑던 옥 표면에는 돌쇠의 체온이 남아 있었다.비녀 끝에 붙은 대팻밥 한 조각을 손톱으로 떼어 냈다.밤새 얼마나 오래 품고 있었는지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갖고 싶다고 했지.”돌쇠의 시선이 비녀에 붙었다.“예.”“가져도 된다고는 안 했어.”“알고 있습니다.”“알면서 가져갔고, 물었을 때는 못 봤다고 했네.”돌쇠는 변명하지 못했다.허담이 약갑을 내려놓았다.“거짓말까지 한 사람을 다시 곁에 두실 겁니까?”해원이 고개를 돌렸다.“그 말을 할 자격이 생겼다고 생각해요?”허담의 입술이 닫혔다.“훔치지 않았으니 돌쇠보다 낫다고 생각했죠?”“저 사람보다 낫다고 생각했습니다.”“지금도요?”허담은 대답하지 못했다.해원은 그의 손목을 잡아 아래로 내렸다.“대답 못 하는 걸 보니 아직도 그러네.”허담의 맥이 손끝 아래에서 빠르게 뛰었다.“다시 같은 일이 생기지 않게 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누가요?”대답이 늦어졌다.“의원 나리가?”“마님께서 원하신다면.”“그 말을 끝까지 하면 의원 나리도 오늘은 돌아가야 해요.”해원이 손을 놓자 허담은 더 말하지 못했다.돌쇠가 마루 아래에 무릎을 꿇었다.“제가 잘못했습니다.”“무엇을?”“허락 없이 가져갔습니다.”“또.”“못 봤다고 거짓말했습니다.”“또.”돌쇠는 비녀를 바라보다 입술을 다물었다.해원이 옥비녀 끝으로 그의 손등을 가볍게 눌렀다.“내가 찾아오길 바랐어?”돌쇠의 손이 천천히 접혔다.“갖고 있고 싶었습니다.”“그게 전부야?”“그 말까지 하면 더 비겁해질 것 같습니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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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화

해원은 다음 날 아침 돌쇠를 불렀고,별당 문은 열어 두었으나 그는 문턱 밖에서 더 들어오지 않았다.마당 건너편에는 허담이 약갑을 내려놓고 있었는데,전날 해원이 약만 두고 가라고 했던 탓에 계단 아래에서 발을 멈춘 채였다.거울 앞에 앉은 해원은 옥비녀를 머리에 꽂은 채 돌쇠를 바라봤다.“들어와.”돌쇠는 문턱을 내려다보다가 물었다.“들어가도 됩니까?”“불렀으니까.”그제야 한 발 안으로 들어왔지만,시선은 해원의 얼굴보다 비녀에 먼저 닿았다.어제 제 품에서 떨어졌던 물건이라 눈길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빼고 싶어?”“예.”“오늘은 안 돼.”돌쇠의 손가락이 옷자락 곁에서 접혔고,해원은 거울로 그의 반응을 지켜봤다. 그러나 그는 이유를 묻지 않았으며,비녀를 한 번 더 본 뒤 스스로 문턱 쪽으로 물러났다.“왜 가?”“안 된다고 하셨으니까요.”“갖고 싶은데도?”돌쇠는 비녀에서 시선을 떼지 못한 채 숨을 삼켰다.“더 보고 있으면 또 손이 먼저 갈 것 같습니다.”그 말을 들은 해원의 손이 옥비녀 끝에서 멈췄다.어제는 욕심이 먼저였으나 오늘은 물러날 자리를 골랐고,해원은 잠시 그를 본 뒤 손짓했다.“이제 와.”돌쇠가 고개를 들었다.“비녀만 빼.”“허락하시는 겁니까?”“이번에는.”그가 천천히 다가오자 해원은 등을 보였고,거울 속에서는 두 사람의 시선이 맞물렸다.거친 손이 옥비녀 가까이 올라왔으나 곧장 닿지는 않았다.“머리카락에는 닿아도 됩니까?”“필요한 만큼만.”허락이 떨어지고 나서야 돌쇠의 손가락이 매끈한 옥을 감쌌다.이윽고 비녀가 검은 머리 사이에서 빠져나오자 풀린 머리카락이 해원의 등 위로 흘러내렸고,가까워진 돌쇠의 숨도 함께 흐트러졌다.다만 그는 머리카락을 움켜쥐지 않았으며, 옥비녀만 받쳐 들었다.해원이 손바닥을 내밀자 돌쇠는 곧바로 비녀를 올려놓지 못했다.엄지가 옥 표면을 한 번 쓸었고,해원이 그의 이름을 부르고 나서야 비녀가 손바닥 위로 옮겨졌다.“아직 놓기 싫지?”“예.”“그런데 놓았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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