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are

제6화

Author: 꼬미 요괴
다음 날.

업무를 마친 허서령이 휴대폰을 들어 심인혜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인혜야, 깼어?]

[어, 깼어.]

[시욱 씨랑은 어떻게 됐어?]

[얘기 잘 끝냈어. 시욱 씨가 양보하기로 해서 결혼식은 예정대로 진행해.]

[미안해서 어떡하지? 지금 손에 엄청 중요한 사건이 하나 있거든. 다음 달에 출장 가야 할 것 같아. 들러리 못 서줄 것 같은데... 이번 한 번만 봐주면 안 될까?]

[양쪽의 비주얼 담당 두 사람이 다 못 온다고? 둘이 짰어?]

[그게 무슨 소리야?]

[지강산 씨도 일이 생겨서 못 온대.]

지강산 역시 허서령을 만나고 싶지 않은 모양이었다.

허서령의 마음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울심시가 넓고 사람도 많았다. 마음먹고 피하기만 한다면 다시 만날 일은 없을 것이다.

허서령도 바빴고 지강산 또한 마찬가지였다. 두 사람이 평행선처럼 영원히 접점이 없을 것만 같았다.

그녀는 실제로도 일부러 그를 피했다.

심인혜와 백시욱이 주선한 자리는 모두 핑계를 대고 거절했고 친구들이 부를 때마다 누가 오는지 낱낱이 확인하며 지강산과 마주칠 가능성을 원천 봉쇄했다.

그렇게 보름 뒤.

변호사 나정민이 서류 한 뭉치를 들고 허서령의 사무실로 들어왔다.

“허변, 이 사건 의뢰인이 꼭 허변한테 사건을 맡기고 싶다네요.”

허서령이 서류를 받아 대충 훑어보았다.

“상표권 침해 소송요? 나변, 이건 제 전문 분야가 아닌데요? 전 공익 쪽을 위주로 맡고 있고 이런 상업 소송은 나변 담당이잖아요.”

“그쪽에서 꼭 허변한테 맡기고 싶다는데 어쩌겠어요.”

나정민이 검은 뿔테 안경을 올리면서 감탄 섞인 말투로 덧붙였다.

“수임료를 무려 30%나 더 주겠다는데 내가 흔들리지 않을 수가 있겠어요?”

“그건...”

“허변 능력을 믿어요.”

“알겠어요. 한번 해볼게요.”

“의뢰인 집 주소니까 바로 가보세요.”

“집으로요?”

“네, 집으로.”

...

에버그린 힐.

울심시에서 손꼽히는 최고급 주택이자 고소득 전문직들이 모여 사는 곳이었다. 항공우주연구원과도 차로 불과 10분 거리였다.

보안이 매우 철저하여 신원 확인과 전화 문의를 거친 후에야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겨우 목적지에 도착한 허서령이 초인종을 눌렀다. 문이 열린 순간 허서령이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눈앞에 나타난 사람은 다름 아닌 소유하였다. 실크 슬립 차림에 긴 머리를 늘어뜨렸고 짙은 메이크업을 해서 그런지 더욱 요염해 보였다.

“들어와. 문은 안 닫아도 돼.”

상업 소송을 굳이 공익 변호사에게 맡긴 이유가 궁금했었는데 모든 의문이 그제야 풀렸다.

소유하가 허서령을 곤란하게 만들고 모욕할 기회를 만들고 싶어서 그녀에게 맡겼던 것이었다.

여기까지 온 이상 허서령은 그녀가 무슨 수작을 부리려는 건지 끝까지 지켜보기로 했다.

허서령이 집 안으로 발을 들였다. 신발장 앞에 놓인 남성용 검은색 슬리퍼가 눈에 들어왔다. 소유하가 신고 있는 것과 같은 디자인의 커플 슬리퍼였다.

소유하가 무심한 척 말했다.

“이건 강산 오빠 슬리퍼니까 신발장 안에서 새것 꺼내 신어.”

‘지강산이랑 동거 중이야?’

그 생각이 머릿속을 스친 순간 마음 한구석이 찌릿하게 아팠다.

‘그나저나 신발은 신발장 안에 넣어둬야 하는 거 아니야? 이렇게 보란 듯이 꺼내놓았다는 건 나한테 보여주기 위해서겠지.’

허서령이 마음을 가라앉히고 신발장을 열어 새 슬리퍼를 꺼내 신었다. 의뢰인을 상대하는 자리라 일단 예의 바르게 대했다.

“소유하 씨, 저는...”

업무적인 태도로 대화를 시작하려던 그때 소유하가 말을 가로챘다.

“소개할 필요 없고 쓸데없는 얘기도 할 필요 없으니까 일단 앉아.”

소유하가 소파에 나른하게 기대앉아 하얀 다리를 꼬고 한 손으로 머리를 지탱했다. 긴 웨이브 머리가 소파 뒤로 흘러내렸다.

그녀의 눈빛에 경멸과 비웃음이 가득했고 태도 또한 오만하기 짝이 없었다.

허서령이 마음을 가라앉히며 옆에 앉아 노트북을 폈다.

“소유하 씨, 의뢰하신 상표권 침해 사건에 대해...”

소유하가 또 한 번 말을 끊고 티테이블을 가리켰다.

“목 좀 축여. 미리 커피 타 놨으니까.”

티테이블 위에 컵 세 개가 놓여 있었다. 그중 두 개는 커플 컵이었다. 이토록 유치하고 노골적인 수작에 허서령은 어이가 없었다.

상표권 침해 사건도 왠지 소유하가 지어낸 거짓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컵은 건드리지 마. 강산 오빠 거니까.”

소유하가 커플 컵을 들고 웃으면서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그러고는 허서령을 쳐다보며 승리감에 젖은 표정을 지었다.

허서령이 가볍게 웃었다가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 더는 이런 저급한 연극을 참아줄 이유가 없었다.

“소유하 씨, 이제 그만하시죠. 사건은 핑계고 날 모욕하는 게 진짜 목적이 아닌가요?”

그러자 소유하가 기다렸다는 듯이 가면을 벗어던지더니 콧방귀를 뀌고 비아냥거렸다.

“허서령, 너 같은 쓰레기도 결국 천벌을 받는구나. 강산 오빠 버리고 떠나서 대단한 재벌 2세라도 만날 줄 알았더니. 금융학과에서 잘나가던 수재가 고작 이런 작은 법률 사무소에서 공익 변호사나 하고 있을 줄은 누가 알았겠어. 이러고 보면 하늘이 참 공평해.”

허서령이 무덤덤한 표정으로 그녀의 오만한 태도를 지켜보았다.

소유하가 말을 이었다.

“그때 강산 오빠가 너 같은 근본 없는 애를 만나준 것만으로도 조상님이 도운 줄 알았어야지. 감히 양다리를 걸쳐? 그러니까 지금 버림받은 신세가 된 거야. 네가 떠나고 나서 오빠는 나랑 만나기 시작했어. 우린 지금 너무 행복해.”

허서령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 웃음 속에 약간의 연민이 섞여 있었다.

“소유하, 세상을 보는 시야가 여전히 좁구나.”

“뭐라고?”

소유하의 안색이 확 어두워진 걸 볼 허서령이 차분하게 반격했다.

“네 눈에는 남자, 금수저, 명분 그런 것밖에 안 보이지? 한낱 일개미가 자기가 옮긴 똥 덩어리가 제일 크다고 자랑하는 것 같아. 하지만 난 지금 이 자리에서 사회적 약자의 목소리를 듣고 있고 절차적 정의와 세상을 조금이라도 나아지게 만드는 판례들을 보고 있어.”

그녀가 웃음을 거두고 칼날처럼 날카로운 눈빛으로 소유하를 쏘아보았다.

“굳이 남자한테 기대어 내 가치를 증명할 필요 없어. 공익 변호사가 뭐 어때서? 내가 맡은 사건 하나하나가 이 사회의 공정함을 수리하고 있어. 그런데 넌 내가 오래전에 버린 과거와 그 남자를 붙들고 있는 것 말고 뭐가 있는데?”

소유하가 얼굴이 흙빛이 된 채 주먹을 꽉 쥐고 일어나 허서령을 노려봤다.

허서령을 제대로 밟아주려고 집으로 부른 것이었는데 오히려 그녀가 처참하게 짓밟히고 말았다.

분노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오른 그때 현관 밖에서 발소리가 들려왔다. 소유하가 급히 현관으로 달려나갔다.

허서령이 서류와 노트북을 가방에 넣었다. 열려 있는 문틈으로 밖의 대화 소리가 고스란히 들려왔다.

“오빠, 퇴근했어? 내가 국 끓여놨는데 얼른 가서 먹어.”

지강산의 낮고 매력적인 목소리가 이어졌다.

“됐어. 저녁 먹고 왔어.”

“다 끓여놨는데 버리면 아깝잖아. 내가 12시간이나 정성 들여 끓인 거라고.”

허서령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토록 오랫동안 지강산을 피했는데 결국 소유하 때문에 또 만나고 말았다.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그때 소파 옆 쓰레기통에 담긴 진씨네 영양탕 포장 봉투가 눈에 들어왔다.

소유하에게 이끌려 집 안으로 들어온 지강산이 현관에서 허서령과 정면으로 마주쳤다.

두 사람의 시선이 공중에서 마주친 순간 모두 돌처럼 굳어버렸다.

Continue to read this book for free
Scan code to download App

Latest chapter

  • 5년 만의 재회, 그의 폭주   제121화

    새벽 한 시, 그녀는 지문으로 문이 열리는 소리에 놀라 깨어나 소파에서 벌떡 일어났다.백시욱이 만취해 의식이 거의 없는 지강산을 부축하며 안으로 들어왔다.허서령은 슬리퍼도 신을 겨를 없이 빠르게 달려가 지강산의 다른 쪽 팔을 붙잡았다.“왜 술을 이렇게 많이 마셨어요?”백시욱은 무거운 지강산을 부축한 채 몹시 힘겹게 말했다.“뭐에 미쳤는지 모르겠어요. 저를 불러내서 술 마시더니 죽을 듯이 들이붓더라고요. 자기 주량이 약하다는 걸 뻔히 알면서도 이렇게 많이 마셨어요.”방에 들어간 허서령은 급히 이불을 걷었다.백시욱은 그를 침대 위에 눕히고 길게 숨을 내쉰 뒤, 팔과 허리를 흔들었다.“서령 씨가 좀 돌봐 줘요. 저도 술을 마셔서 머리가 어질어질하고, 대리기사가 아직 아래에서 기다리고 있어요.”“네, 고생했어요.”허서령은 백시욱을 문까지 배웅하다가 참지 못하고 그를 불러 세웠다.“시욱 씨...”백시욱이 발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려 그녀를 보았다.허서령은 몇 초간 망설이다가 긴장한 채 물었다.“강산 씨가 왜 술을 이렇게 많이 마셨는지 알아요?”백시욱은 몇 초 동안 생각하더니 고개를 저었다.“몰라요. 말 안 했어요.”허서령이 문을 닫으려던 순간, 백시욱이 갑자기 뭔가 떠올랐다는 듯 말했다.“아, 맞다! 걔가 취했을 때 계속 한마디를 중얼거렸어요.”“무슨 말인데요?”“그 여자는 그럴 가치가 없다고 계속 그렇게 말했어요. 그녀는 그럴 가치가 없대요”허서령은 그 말의 뜻을 알아들었다.“네, 조심해서 가요. 안전하게 들어가고요.”백시욱과 작별한 뒤, 그녀는 문을 닫고 잠갔다.그 말을 백시욱은 이해하지 못했지만 그녀는 알았다.지강산은 그녀, 허서령이 더는 그럴 가치가 없다고 느낀 것이다.그의 다정함, 그의 헌신, 그의 세심한 배려, 그의 정성 어린 보살핌을 받을 가치가 없다고, 심지어 그가 어떤 기대를 품을 가치조차 없다고 말이다.두 사람의 관계는 이미 풀렸고, 요즘은 지내는 것도 매우 편안했다.분명 그녀가 뭔가 잘못해서 지강산을

  • 5년 만의 재회, 그의 폭주   제120화

    허서령은 긴장한 채 거실을 한 바퀴 둘러본 뒤 다시 이순애를 바라보았다.“안녕하세요. 아주머니, 그런데 누구세요?”“지강산 대표님께서 허서령 씨를 돌보라고 보낸 사람이에요.”허서령은 곧바로 당황했다.“저는 누가 돌봐 줄 필요 없어요. 혹시 잘못 오신 거 아니에요?”이순애가 말했다.“잘못 온 것 아니에요. 저는 허서령 씨의 세 끼 식사와 아침, 점심, 저녁으로 세 번 약을 발라드리고, 출퇴근 픽업을 맡게 돼요. 그 외의 일도 시키시면 할 수 있어요.”허서령은 이렇게 당황해 본 적이 없었다. 그녀는 몸을 돌려 지강산의 방으로 가 문을 두드렸다.이순애는 주방 불을 끄고 밖으로 나와 예의 바르게 말했다.“대표님은 이미 나가셨어요.”허서령은 깊게 숨을 들이쉬고, 고개를 돌려 아주머니를 바라보았다.마흔 살 정도로 보이는 그녀는 온화하고 능숙했다.“출장 간 건가요?”“아마 아닌 것 같아요. 차 키와 휴대폰만 들고 나가셨거든요.”허서령의 마음속에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그녀는 연신 사과했다.“죄송해요. 아주머니, 저는 정말 돌봐 줄 사람이 필요 없어요. 출근하지 않으셔도 돼요. 제가 일주일치 급여를 보상해 드릴게요. 정말 죄송해요.”이순애는 조금 난처해 보였다.“그런데 대표님께서 이미 한 달 치 급여를 주셨어요. 허서령 씨가 출근하지 말라고 하셔도 저는 돈을 돌려드리지 않을 거예요.”허서령은 멍해졌다.‘대체 어떻게 된 일이지?’자고 일어났더니 생활이 궤도에서 벗어난 것 같았다.이런 통제할 수 없는 불안감에 그녀는 막막하고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다.그녀는 지강산의 돈을 헛되이 낭비하게 하고 싶지 않아 이순애에게 말했다.“그럼 우선 아침부터 만들어 주세요.”이순애는 활짝 웃었다.“네, 아가씨. 잠시만 기다리세요. 곧 아침 드실 수 있어요.”말을 마치고 이순애는 주방으로 들어갔다.허서령은 휴대폰을 꺼내 지강산에게 전화를 걸었다. 벨 소리가 아주 오래 울린 끝에 결국 전화가 연결되었다.휴대폰 너머로 지강산의 담담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 5년 만의 재회, 그의 폭주   제119화

    허서령은 다시 그의 손을 밀어내며 짜증스럽게 말했다.“말했잖아. 난 찍고 싶지 않다고.”윤성은 그녀를 보내 주지 않고, 오히려 심인혜를 불렀다.세 사람은 신랑 신부 옆에 서서 사진을 여러 장 찍었다.사진을 찍을 때 온통 짜증으로 가득했던 허서령은, 윤성이 그녀에게 몰래 하는 작은 동작들을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다.그는 그녀의 어깨에 손을 몰래 올려놓고, 고개를 숙여 뒤통수로 카메라를 가린 채 가까운 거리에서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며 말했다.“너 화장이 떴어.”사진을 다 찍은 뒤, 윤성은 곧바로 사진사에게서 사진을 받아 들었다. 수십 장의 순간 포착 사진을 보고 그는 매우 만족해하며 사진사에게 두툼한 봉투를 건넸다.허서령이 피로연 음식을 먹고 있을 때, 윤성은 옆에서 사진을 골라 SNS에 올리고 있었다. 그는 웃는 듯 마는 듯 눈썹을 치켜올려 허서령을 바라보다가, 갑자기 또 휴대폰을 들고 허서령 곁으로 다가갔다. 허서령이 고개를 돌려 그를 보자마자, 그는 곧바로 두 사람의 셀카를 찍었다.그는 몰래 9장을 SNS에 올렸고, 오직 지강산에게만 보이도록 설정했다....깊은 밤의 구름타워는 유난히 조용했다.TV에서는 새해맞이 방송이 나오고 있었다.지강산은 소파에 앉아 있었다. 시선은 얼음처럼 차가웠고, 손에는 휴대폰을 든 채 윤성의 SNS를 보고 있었다.문구 없는 9장짜리 사진이었다.아홉 장의 사진 중 다섯 장은 윤성과 허서령의 다정해 보이는 사진이었다.얼굴을 감싼 사진, 어깨동무한 사진, 키스하는 듯한 사진, 함께 앉아 밥을 먹는 셀카, 그리고 두 사람이 신랑 신부와 함께 커플처럼 보이게 찍은 네 사람의 단체 사진...그는 휴대폰을 내려놓았다. 무거운 두 어깨는 마치 큰 산에 짓눌린 듯 힘없이 뒤로 젖혀졌다. 결국 뒤통수를 소파에 기대고 눈을 감은 채 깊게 숨을 쉬었다.그의 가슴은 심하게 오르내렸고, 답답한 통증이 밀려왔다. 마치 심장이 갈가리 찢기는 듯했고, 마음속은 이미 피로 물들었다.요 며칠 어렵게 놓아 보낸 원망이 이 순간 모두

  • 5년 만의 재회, 그의 폭주   제118화

    지강산은 방에 들어가 옷장 문을 열고 갈아입을 옷을 꺼냈다.허서령은 뒤따라 들어와 그의 곁에 섰다. 불안한 손가락으로 옷자락을 쥐고, 고개를 들어 그의 어두운 표정을 바라보며 부드러운 말투로 말했다.“저랑 심인혜, 윤성은 어릴 때부터 같이 자란 친구예요. 우리 부모님들도 같은 동네 사람들이고 수십 년 동안 알고 지냈어요.”지강산은 옷장 문을 닫았다.“나한테 설명할 필요 없어.”“제가 강산 씨를 데리고 가면 우리 집 친척들이 분명 우리 관계를 오해할 거예요.”지강산은 어쩔 수 없다는 듯 몸을 돌렸다.“알았어. 안 갈게. 나가서 아침 먹어.”허서령은 눈을 깜빡이며 애원하듯 낮게 중얼거렸다.“그러면 화내지 않으면 안 돼요?”지강산은 씁쓸하게 웃었다.“허서령, 내가 화를 내든 안 내든, 너한테 중요해?”허서령은 고개를 끄덕였다.지강산은 멈칫하다가 눈빛이 점점 깊어졌다. 눈 밑에는 의아함이 엿보였다.“왜?”“강산 씨를 잃고 싶지 않아요...”허서령은 목소리가 몇 초간 멈춘 뒤, 볼이 점점 뜨거워졌다. 그녀는 황급히 몇 글자를 더 덧붙였다.“친구로 말이에요.”지강산의 눈동자에 몰래 실망이 스쳤다. 그는 옷을 침대 위에 던졌다.“화 안 났어. 이제 나가서 아침 먹어도 되지?”“강산 씨도 아직 다 안 먹었잖아요. 안 먹을 거예요?”“옷 갈아입고 나가서 먹을게. 먹고 나서 너 회사까지 데려다주고.”“네.”허서령은 미소 지으며 그대로 서 있었다.“같이 나가서 먹을 때까지 기다릴 거예요.”지강산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내가 옷 갈아입는 거 보려고?”그제야 허서령은 그가 입고 있는 것이 실내복 잠옷이니 겉옷만 걸치는 것이 아니라 전부 갈아입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허서령의 심장박동이 점점 빨라졌다. 마음속은 분명 부끄럽고 조심스러웠지만, 지강산 앞에서 장난을 치고 그를 놀리고 싶은 마음을 참지 못했다.“근육 좀 보면 안 돼요?”그녀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줄은 몰랐던 지강산은 입꼬리가 살짝 올라가며 얕은 미소를 지었다.

  • 5년 만의 재회, 그의 폭주   제117화

    지강산은 뜨거운 물을 끄고 휴지를 뽑아 손을 닦은 뒤, 그녀의 뒤로 와서 두꺼운 옷 아래로 손을 넣었다.한겨울이었지만, 뜨거운 물로 씻은 그의 손바닥은 그녀의 등 피부보다 더 따뜻했다.“위로... 맞아요, 조금 더 위로...”허서령은 미간을 찌푸렸다. 가려워 견디기 힘들었고, 목소리는 조금 나른하고 부드러워졌다.“음...”“맞아요... 바로 거기.”“세게, 음...”“너무 가려워요. 조금 더 세게...”등의 가려움과 그가 조심스럽게 주는 힘 때문에 허서령은 몹시 괴로웠다. 목구멍에서 새어 나온 소리는 가볍고 부드러워 유난히 사람의 마음을 흔들었다.호흡이 가빠진 지강산은 몰래 마른 침을 삼켰다. 그의 목소리는 쉬고 낮게 억눌려 있었다.“허서령, 입 다물어.”그 말은 사납지 않았지만, 한 글자 한 글자마다 괴로움이 배어 있었다.그제야 허서령은 자신이 방금 낸 소리가... 확실히 좀 지나쳤다는 것을 깨달았다.그녀는 불을 끄고 한 손으로 조리대에 기대어 아무 소리도 내지 않으려 애쓰며 입술을 깨물었다. 등의 가려움이 가라앉자, 그제야 가볍게 숨을 내쉬었다.“됐어요. 고마워요.”지강산은 두 걸음 물러나 냉장고에 기댄 채 뜨겁고 무거운 숨을 길게 내쉬고는 어쩔 수 없다는 듯한 어투로 말했다.“넌 정말 나를 고문하려고 작정했구나.”“저 그런 거 아니에요...”허서령은 마지막 달걀전을 담은 따끈한 접시를 들고 몸을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얼굴에는 억울함이 가득했다.“진짜 등이 가려웠어요.”“그래서 평범한 남성 친구한테 이렇게 아무렇지 않게 등을 긁어 달라고 한 거야?”“어차피 매일 저한테 약 발라 주잖아요.”지강산은 어이가 없어 웃음이 났지만 입술을 다문 채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억울하면서도 장난기 어린 모습을 보자 정말 괴롭히고 싶었지만, 신분은 고작 평범한 친구일 뿐이라 참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나가서 아침 먹어요.”허서령은 눈썹과 눈꼬리에 웃음을 담고, 가벼운 말투로 즐겁게 밖으로 나가며 그를 혼자 남겨 이 괴로운 기운을

  • 5년 만의 재회, 그의 폭주   제116화

    “네.”허서령은 뒤집개를 받아 프라이팬을 잡고 제법 그럴듯하게 달걀전을 뒤집었다.지강산은 앞치마를 벗고 허서령의 뒤쪽으로 돌아가 그녀에게 둘러 주었다.“허서령, 나 계속 이해가 안 되는 게 하나 있어.”“물어봐요.”“네 엄마가 그렇게 남아선호가 심한데, 네 동생은 밥도 할 줄 알잖아. 그런데 넌 왜 밥을 못 해?”“강산 씨가 내 동생이 밥할 줄 안다는 걸 어떻게 알아요?”허서령은 당황해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지강산은 전이 타지 않도록 그녀의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싼 후 가볍게 다시 앞으로 돌려 그녀가 팬을 보게 했다.“전에 네 엄마랑 한 번 만난 적이 있는데, 그때 나한테 불평하셨거든.”‘칫! 처음 만난 자리에서 외부인에게 내 단점을 불평하다니, 역시 엄마가 할 법한 일이긴 해.’“그러니까 강산 씨도 내가 밥 못한다고 불평하려는 거야?”허서령은 일부러 화난 척했다.“아니, 그냥 궁금해서 그래.”지강산이 불을 껐다.“다 익었어요. 꺼내도 돼요.”허서령은 급히 달걀전을 접시에 옮겨 담고, 팬을 내려놓은 뒤 다시 불을 켰다.지강산은 숟가락으로 반죽을 떠 올렸다.“기름 부어.”허서령이 기름을 두르고, 지강산이 반죽을 부었다. 그녀는 팬을 돌려 반죽이 고르게 퍼지게 했다.두 사람의 호흡은 유난히 매끄러웠다.허서령은 느긋하게 설명했다.“저는 천재가 아니에요. 한때 공부를 잘했던 건 노력했기 때문이죠. 그런데 저는 매일 학교 끝나고 집안일이 정말 많았어요. 그중 밥하는 일이 제일 시간도 오래 걸리고 힘들었어요. 제가 밥을 배워 버리면 공부할 시간이 아예 없어지니까, 엄마가 요리를 배우라고 할 때마다 음식에 소금을 한 움큼씩 넣거나, 간장을 물처럼 부어 버렸어요.”지강산은 웃음을 참지 못했다.허서령이 말을 이었다.“엄마가 설거지를 시키면 나는 반은 씻고 반은 깨뜨렸어요. 내 성격 알잖아요. 엄마가 나를 때려죽여도 나는 고치지 않았을 거예요. 집도 원래 가난했으니까 내가 그렇게 망칠 돈이 많지 않았고요. 시간이 지나자 엄마도

  • 5년 만의 재회, 그의 폭주   제3화

    지강산이 몸부림치는 허서령의 손목을 잡고 머리 위 벽에 고정시킨 뒤 이성을 잃은 맹수처럼 키스를 퍼부었다.참아왔던 눈물이 허서령의 감긴 눈꺼풀 사이로 속절없이 흘러내렸다. 하지만 지강산은 멈출 기색이 전혀 없었다.도저히 참을 수 없었던 허서령이 그의 아랫입술을 있는 힘껏 깨물었다.“윽.”날카로운 통증에 지강산이 입술을 뗐다.허서령이 기억하는 지강산은 언제나 한없이 다정한 사람이었다.그런 그가 이토록 사납게 구는 건 분명 그녀를 뼛속 깊이 증오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 생각에 허서령은 심장이 바늘에 찔린 것처럼 아팠다.지강

  • 5년 만의 재회, 그의 폭주   제2화

    모두의 시선이 집중된 가운데 지강산이 앞에 놓인 술잔을 들더니 단숨에 비워냈다.뽑은 벌칙 대신 술을 택했다. 그 누구와도 키스하지 않겠다는 무언의 선언이었다.주변에서 킥킥거리는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소유하가 티슈를 던지면서 씩씩거렸다.“재미없어, 정말. 뭐가 부끄럽다고 그래?”지강산이 한숨을 무겁게 내뱉으며 술기운을 눌러 내렸다.게임이 계속되었다. 술병이 여러 번 돌고 돌아 마침내 허서령의 차례가 왔다. 그녀는 벌칙이 지나칠까 봐 두렵기도 했고 술을 이길 자신도 없었다.“진실을 말하는 걸 선택할게요.”그러자 소유하가

  • 5년 만의 재회, 그의 폭주   제1화

    지강산과 함께한 4년은 허서령의 인생에서 가장 행복하고 즐거웠던 시간이었다. 이별 후 허서령은 5년을 울며 보냈다.매일같이 눈물을 쏟은 건 아니었지만 지강산을 떠올리기만 하면 마음속에 장마라도 진 것처럼 축축하고 눅눅한 비가 내렸고 이내 눈시울도 뜨겁게 젖어 들곤 했다.살면서 지강산을 다시 마주하게 될 날이 올 줄은 꿈에도 몰랐다.백시욱이 주선한 술자리.떠들썩한 룸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자석에 이끌리듯 허서령의 시선이 익숙한 얼굴에 닿았다.그 순간 심장이 튀어나올 것처럼 요동쳐 어찌할 바를 몰랐다. 정말 해일이라도 밀려온 것

  • 5년 만의 재회, 그의 폭주   제7화

    공기가 얼어붙은 것처럼 정적이 내려앉았다. 주변의 소음이 잦아들고 세상의 색채가 빛을 잃어가는 가운데 오직 지강산만 선명하게 눈에 들어왔다.연한 블루 반팔 셔츠에 블랙 바지 차림의 지강산이 청량하면서도 멋진 기운을 뿜어내고 있었다.평범한 출근룩이었음에도 조각 같은 이목구비, 탄탄한 몸매와 훤칠한 키 덕분에 우아하고 기품이 흘러넘쳤다.그가 깊고 어두운 눈으로 빤히 쳐다보자 허서령은 저도 모르게 긴장감에 휩싸였다.소유하가 슬리퍼를 가져와 지강산의 앞에 놓으며 살갑게 굴었다.“오빠, 신발 갈아 신어.”하지만 지강산은 아무 반응

More Chapters
Explore and read good novels for free
Free access to a vast number of good novels on GoodNovel app. Download the books you like and read anywhere & anytime.
Read books for free on the app
SCAN CODE TO READ ON APP
DMCA.com Protection Stat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