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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화 상처

Author: 릴리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05-07 17:00:16

시향회장에서 달려온 지수의 손발은 차게 식어 있었다. 하지만 손바닥만큼은 타는 듯 뜨거웠다. 지현이 준 하얀 손수건이 칭칭 감겨 있었지만, 그 너머로 번져 나온 선혈은 이미 붉은 꽃이 되어 하얀 천을 적시고 있었다.

응급실 복도. 도진은 피 묻은 셔츠 차림으로 머리를 감싸 쥐고 있었다. 마치 세상의 종말이라도 선고받은 사람처럼, 텅 비어버린 눈으로 바닥을 응시하던 그가 인기척에 고개를 들었다.

“수진 씨는…….”

지수의 목소리가 닿는 순간, 도진의 눈에 서려 있던 절망은 순식간에 증오의 불길로 타올랐다. 그는 짐승처럼 포효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네가 감히, 무슨 자격으로 수진이를 찾아!”

도진이 성큼성큼 다가와 지수의 어깨를 낚아챘다.

“우리의 아이를 죽인 것도 모자라서 이제 수진이 아이까지 죽이려고 해? 현지도 모자라서! 아직 세상의 빛도 보지 못한 아이였어, 이 독한 여자야!”

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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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수동 구시가지에 자리 잡은 멀티 플렉스숍 ‘the moon’.이곳은 정식 오픈식 전부터 이미 강남의 내로라하는 자산가들과 남성 커뮤니티 사이에서 은밀하게 입소문을 타고 있었다.그 안에서도 특히 제이아우라 존에 자리잡은 프리미엄 바버숍과 프라이빗 라운지를 결합한 ‘man cave’는 그야말로 핫플레이스였다. 패션을 좋아하는 이들에게는 반드시 발걸음해야 하는 쇼핑의 성지로, 그루밍에 눈을 뜬 입문자부터 까다로운 취향을 가진 전문가들까지 모두를 만족시키는 공간. 무엇보다 사업을 하는 이들에게는 대한민국 경제를 흔들 만한 고급 정보가 오가는 최고의 사교 장소였다.지수가 머릿속으로 그리던 이상적인 공간이 마침내 완벽한 형태로 구현되어 가고 있는 셈이었다.한편, 이 ‘man cave’는 또 다른 의미로도 명성을 떨치고 있었다. 다름 아닌, 유부남들 사이에서 ‘가정의 수호’를 위해 반드시 들러야 할 필수 코스로 알려진 탓이었다.“김 사장님, 사흘 뒤에 있을 사모님 생일을 위해 아주 특별한 서프라이즈를 준비하고 계신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정갈하게 가위질을 하며 헤어를 정리하던 바버 정우진이 나직한 목소리로 말을 건넸다. 그 말에 거울 속 김 사장의 눈동자가 눈에 띄게 흔들렸다. 아차. 사흘 뒤가 와이프 생일이었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고 있었던 탓이다.김 사장은 베테랑 사업가답게 놀란 표정을 능숙하게 감추며, 은근 슬쩍 우진에게 정보를 요구했다.“에이, 귀도 밝군 그래. 그렇지. 하지만 웬만한 명품은 다 선물해 본 탓에 올해는 뭘 해줘야 할지 도통 감이 안 와서 말이야.”우진은 거울을 보며 빙긋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미리 준비해 두었던 고급 정보를 자연스럽게 풀어놓았다.“저희 매장 바로 옆에, 아직 대중적으로 알려지진 않았지만 기가 막힌 실력을 갖춘 조향사가 새로 입점했습니다. 사모님께서 워낙 향에 민감하셔서 시중의 일반적인 향수는 쓰지 못하신다고 들었는데, 오직 사모님만을 위한 세계 유일의 맞춤 향수를 선물하시는 건 어떨까요?”김 사장은 흥미로운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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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가장 잔인한 축복   144화. 검은 유혹

    ‘새로운 태양’ 프리미엄 라인의 디자인으로 겨우 강도진의 신뢰를 되찾은 수진은, 다시 그의 카드를 손에 쥐게 되면서 물질적인 숨통을 틔울 수 있었다.백화점 명품관을 돌며 닥치는 대로 긁어대던 영수증만이 그녀의 얄팍한 자존심을 채워주었다. 하지만 쇼핑백이 쌓여갈수록 마음 한구석의 무거운 돌덩이는 도리어 커져만 갔다.도진의 부모, 강 회장 부부에게 받았던 30억 원. 그것이 여전히 수진의 발목을 단단히 옥죄고 있었다.다행이라면 도진의 입김 덕분인지 김미자가 당장 돈을 돌려달라고 사납게 재촉하지는 않는다는 정도였다. 하지만 여전히 해결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도진의 무정자증 진단서가 세상에 공개된 이후, 아이의 친부에 대한 추잡한 의문은 유령처럼 수진의 뒤를 따라다니며 괴롭히고 있었다.게다가 수진을 가장 미치게 만드는 것은 도진의 애매한 태도였다.그는 여전히 자신의 집과 수진의 처소를 오가며 이중생활을 하고 있었다. 최근에는 프리미엄 라인 준비로 바쁘다는 핑계를 대며 수진을 찾는 횟수가 눈에 띄게 줄었다.“배도 불러오는데 회사 출근해서 스트레스받지 마. 특별한 일 없으면 집에서 쉬어.”배려를 가장한 도진의 말은 수진의 귀에 날카로운 배제(排除)로 들렸다.‘이래서는 아무것도 변하지 않아. 내가 어떻게 이지수를 몰아내고 이 자리까지 왔는데……! 왜 아직도 나는 떳떳한 안주인이 아니라 내연녀라는 더러운 꼬리표를 달고 있어야 하지?’수진은 잘게 떨리는 손가락으로 손톱을 거칠게 물어뜯었다. 불안한 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피어올랐다.‘설마 강도진, 그 인간…… 내 디자인만 쏙 빼먹고 날 버리려는 건 아니겠지?’‘내 아이는 어떻게 되는 거야? 아니야, 이 아이는 강도진의

  • 가장 잔인한 축복   143화. 가짜 왕좌

    “대표님, 축하드립니다! 선주문 오픈 30분 만에 10피스 모두 계약 완료되었습니다!”비서실장의 흥분 섞인 보고에 강도진은 와인잔을 가볍게 흔들었다. 붉은 액체가 크리스탈 잔벽을 따라 부드럽게 감돌았다.아스테리아의 블랙 다이아몬드 낙찰 소식을 대대적으로 터뜨린 것은 신의 한 수였다. ‘안젤라이트 이미테이션’ 사태로 바닥을 치던 CB의 이미지는 하룻밤 사이에 ‘세계 유일의 원석을 보유한 독점적 하이엔드 브랜드’로 탈바꿈했다.물론 아직 원석은 도달하지 않았다. 하지만 도진에게는 상관없는 문제였다. 그는 한수진이 급하게 뽑아낸 디자인 시안을 바탕으로, 일반 다이아몬드를 촘촘히 박아 넣은 샘플 피스를 제작했다. 그리고 상위 0.1%의 VVIP들만을 은밀히 초청해 프라이빗 프리오더 세션을 연었다.‘눈부신 화이트 다이아몬드가 박힌 이 자리에, 세계에서 가장 거대하고 완벽한 블랙 다이아몬드가 세팅될 겁니다. 오직 전 세계 딱 열 분에게만 허락되는 특권입니다.’도진의 유려한 화술과 샘플의 화려함에 매료된 자산가들은 앞다투어 지갑을 열었다. 아직 실물조차 존재하지 않는 보석에 수백억의 선주문 대금이 쏟아져 들어왔다.“완판 소식, 곧바로 2차 보도자료로 배포해. 그리고 일반 대중을 타깃으로 한 보급형 라인 샘플링도 이번 주 내로 대중에게 공개한다고 홍보하고.”도진이 거만하게 턱을 치켜들며 곁에 선 태준을 바라보았다.“봤지, 태준아? 프리미엄 라인으로 희소성을 증명하니까, 대중성은 알아서 따라오는 거야. 주춤했던 ‘영원한 사랑’ 주문량도 예전 수준으로 완전히 회복됐다더군. 시장은 이렇게 흔드는 거다.”“……네, 대표님. 대단하십니다.”태준은 억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숙였다. 도진은 승리에 도취해 있었지만, 태준의 손에 든 태블릿에는 수많은 독소 조항이 가득한 계약서와, 당장 메워야 할 대출 이자 그래프가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선주

  • 가장 잔인한 축복   30화 내가 안 괜찮아

    슬비는 장기간의 해외 출장에서 복귀하자마자 지현의 사무실로 향했다. 문 앞에서 몇 번이나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거울도 보지 않은 채 떨리는 손으로 화장을 고쳤다. 심호흡 끝에 노크를 하고 들어선 사무실. 지현은 평소와 다름없이 단정한 3피스 정장 차림으로 서류에 파묻혀 있었다.깔끔하게 뒤로 넘긴 헤어와 지적인 금테 안경. 그 완벽한 모습에 슬비는 자신도 모르게 넋을 놓고 서 있었다. 20년을 봐온 얼굴인데도, 그

  • 가장 잔인한 축복   29화 또 다른 과거와의 이별

    진우는 어떤 정신으로 포스트 빌리지를 빠져나왔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관성처럼 아이들과 함께 살던 집 앞이었다. 하지만 이제 진우에게 이곳은 더 이상 머물 이유가 없는, 온기가 꺼진 잔해에 불과했다.진우는 아이들의 물건을 하나씩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의 손길은 마치 깨지기 쉬운 섬세한 조각품을 다루듯 조심스러웠다.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배어 있는 작은 옷가지와 장난감들을 뒤로한 채, 진우는 자신의 몇 가지 소지품과 7년 동안 비밀리에 지켜온 노트북만을 챙겼다. 현관문을 나서는 그의 뒤로 도어락이

  • 가장 잔인한 축복   16화 가장 잔인한 축복

    그토록 기다렸던 임신 소식이었지만, 지수와 도진에게 허락된 기쁨은 야속할 정도록 짧았다. 다음날 병원을 찾았을 때, 의사는 확신을 유보한 채 일주일 후에 다시 검사하자는 말만을 나겼다. 그 일주닝은 도진과 지수에게 평생보다 긴 지옥이었다. 손끝하나 대면 깨질 것 같은 불안 속에서 부부는 서로를 위로하며 버텼으나, 운명은 그들에게 자비롭지 않았다.일주일 후 다시 마주한 초음파 화면에는 생명의 고동 대신 기괴한 그림자만이 가득했다. " 포상기태 입니다." 의사의 목소리는 건조했다. " 임신유지 호르몬의 과다 분비로 태

  • 가장 잔인한 축복   15화 원하지 않는 아이

    "기쁘지... 않아?" ​수진의 가늘게 떨리는 목소리에 도진은 굳어있던 안면 근육을 억지로 끌어올렸다. 껍데기뿐인 미소가 그의 얼굴에 기괴하게 자리 잡았다. ​"당연히 기쁘지. 내일 병원 갔다가 아기용품부터 보러 가자. 전에 네가 갖고 싶다던 한정판 가방도 사줄게." ​그의 다정한 음성에 수진은 안심한 듯 도진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도진은 그녀의 정수리를 내려다보며 입안의 쓴 침을 삼켰다. 수진과 밀회를 즐기면서도 잠자리는 손에 꼽을 정도였다. 그때마다 결벽에 가까울 정도로 피임을 챙겼던 자신이었다. ​'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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