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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화

Author: 오채운
last update Petsa ng paglalathala: 2026-04-26 23:17:30
설아는 떨리는 눈꺼풀을 아래로 내리깔며, 체념한 듯 세상에서 가장 가련하고 순종적인 딸의 표정을 지어 보였다.

“……알겠습니다, 어머니. 후부의 안위를 위해서라면, 따라야겠지요.”

뜻밖의 고분고분한 대답에 후부인의 눈동자가 미세하게 흔들렸다. 평소처럼 한차례 울며불며 고집을 피울 줄 알았던 딸의 모습에 당황한 나머지, 눈을 깜빡이며 한참을 바라보았다.

“그래. 대답하지 않아도… 아니, 네가 그리 생각해 주니 다행이구나. 어차피 너는 진명후부로 가야만 해. 그게 네 운명이려니 생각하고 받아들이면 편할 게다. 이만 물러가거라.”

후부인은 조금 전과 달리 한풀 누그러진 태도로 서둘러 고개를 돌려버렸다. 설아는 공손히 허리를 숙여 인사를 올리고는 뒤를 돌았다.

문밖으로 나서는 설아의 입가에 차가운 미소가 번졌다. 마치 후부인의 뜻에 따르는 것처럼 보였겠지만, 이것은 설아가 직접 선택한 일보 전진을 위한 일보 후퇴였다.

‘운명이라니. 내 운명은 내가 결정해. 당신들이 당연한 듯 나의 생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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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만독여향: 비단 위에 핀 꽃   132화

    “어이. 빨리 나오라고.”연백리의 낮은 목소리에 목용현과 아란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서둘러 곁문을 열었다.곁문 밖에는 한쪽 눈썹을 찡그린 채 팔짱을 낀 연백리가 못마땅한 얼굴로 그들을 바라보고 서 있었다.“회포는 돌아가서 풀라고. 지금 여기서 그러지 말고. 붙잡히면 다 끝장나는 수가 있어.”연백리는 밖으로 나오라는 듯 턱짓을 했다.그러자 아란이 걸음을 멈춘 채 겁먹은 목소리로 말했다.“지금 도망쳤다간 큰일 나고 말 거예요!”“이미 큰일은 났어.”연백리가 냉정한 목소리로 받아쳤다.“황제가 빈손으로 돌아가 버렸으니까. 어서 빨리 몸을 숨겨야 해.”그는 품속에서 얇은 검은 망토를 꺼내 목용현에게 건네주었다.목용현은 곧바로 망토를 펼쳐 아란의 어깨를 감싸며 화려한 옷차림을 가려 주었다.“가자.”연백리의 신호와 함께 세 사람은 재빨리 별채를 빠져나와 어둠 속으로 몸을 숨겼다.화양 대장공주부에 날카로운 뿔 나팔 소리가 울려 퍼지기 시작한 것은 그로부터 한참 뒤의 일이었다. ***이튿날 아침.아직 아침 햇살이 황궁의 붉은 담장과 황금빛 기와 위를 부드럽게 비추고 있을 무렵, 경무왕 연백리의 마차가 천천히 황궁 정문을 향해 들어섰다.그의 손에는 화친혼의 증표이자 대막국에서 보내온 화려한 예물함 하나가 들려 있었다.“경무왕 전하께서 드십니다!”태감의 우렁찬 목소리가 승명전 안에 울려 퍼지자, 연백리는 천천히 대전 안으로 들어섰다.그는 예물함을 정중히 들어 올리며 연각을 향해 입을 열었다.“폐하, 소신이 이 화친혼에 대해 며칠 밤낮으로 깊이 고심하였으나, 도저히 이 국혼을 받아들일 수가 없어 이리 다시 찾아왔습니다.”연각의 눈썹이 미세하게 꿈틀거렸으나, 연백리는 시침을 뚝 뗀 채 태연하게 말을 이어 나갔다.“본래 이 화친혼의 목적은 대막국이 호시와 각창을 얻기 위함이 아니었습니까. 하나, 이는 대막국만 이득을 보는 일이 아닙니다. 대막이 지닌 풍부한 말과 소금, 그리고 각종 광물 자원은 우리 대연 또한 오래전부터 바라던 것이었습니다

  • 만독여향: 비단 위에 핀 꽃   131화

    연백리의 설명을 들은 목용현은 떨리는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다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렇게 두 사람은 어둠 속에 몸을 숨긴 채, 성대한 환영 연회가 무르익어 가는 모습을 묵묵히 지켜보았다.시간은 더디게 흘렀다.입안은 바싹 말라붙고, 오래 웅크리고 있던 다리는 저려 왔다. 등에 식은땀이 배어 들자 목용현은 저도 모르게 몸을 움찔 떨었다.바로 그때였다.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건만, 연백리의 눈빛이 번뜩였다.그는 날카로운 시선으로 목용현을 돌아보며 나직이 입을 열었다.“지금이다. 바짝 붙어 따라와라.”연백리의 신호가 떨어지자 목용현은 마른침을 꿀꺽 삼키고 재빨리 그의 뒤를 따라붙었다.두 사람은 주변을 예리하게 살피며 그늘진 화랑과 나무 사이를 바람처럼 스쳐 지나갔다.보름달이 환하게 뜬 밤이었으나, 연회가 무르익어 어수선한 대장공주부의 그 누구도 어둠을 타고 스며드는 두 사람의 은밀한 움직임을 눈치채지 못했다.이윽고 두 사람은 화려한 별채의 특실 앞에 이르렀다.사방이 숨 막힐 듯 고요한 가운데, 목용현은 살짝 열린 창문 틈으로 조심스레 방 안을 들여다보았다.안에는 화려한 침의를 차려입은 채 멍하니 앉아 있는 아란의 모습이 보였다.애처롭도록 고운 그 모습을 마주하는 순간, 목용현의 가슴 깊은 곳에서 알 수 없는 감정이 울컥 치밀어 올랐다.그때 연백리가 검지를 입술에 가져다 대며 조용히 신호를 보냈다.쉿.그는 다시 한번 주위를 빈틈없이 살핀 뒤 목용현을 향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신호가 떨어지기 무섭게 목용현은 창문을 조심스럽게 밀어 열고 소리 없이 방 안으로 내려섰다.비단 금침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던 아란이 화들짝 놀라 비명을 지르려는 순간, 목용현이 재빨리 다가가 그녀의 입을 막았다.“란란, 나야. 가만히 있어.”순간 아란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믿을 수 없다는 듯 검은 복면을 쓴 목용현을 바라보던 그녀 앞에서, 그는 천천히 복면을 끌어내렸다.“그래, 나야.”목용현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번졌다.“널 데리러 왔어.”아

  • 만독여향: 비단 위에 핀 꽃   130화

    화양 대장공주는 시침을 떼고 사가 들린 척 헛기침을 하면서 주섬주섬 일어나 떠날 채비를 차렸다. “밖에 오래 나와 있었더니 목에 무리가 오는가 봅니다. 이제 폐하의 시간을 더 빼앗지 말라는 하늘의 뜻이겠지요. 이만 돌아가 연회 준비를 해야겠습니다.”화양 대장공주는 안상궁의 부축을 받으며 연각을 향해 공손히 고개를 숙였다.“무리하지 마시고 편히 돌아가 쉬십시오.”연각은 억지로 입가에 미소를 걸고 그녀를 배웅했다.화양 대장공주의 모습이 승명전 밖으로 완전히 사라진 뒤에야, 그 미소가 서서히 지워졌다.“빌어먹을 늙은 여우 같으니.”연각은 낮게 이를 갈았다.“감히 누구를 떠보며 사람을 쥐락펴락하려 드는 것이냐.”자꾸만 자신이 짜 놓은 판이 어긋나는 상황에 연각의 신경은 날카롭게 곤두섰다.‘맛있는 요리일수록 급하게 주워 먹으면 탈이 나는 법이지. 천천히, 여유 있게 조금씩 음미하는 것이 천하일미를 대하는 태도렸다.’하지만 차오르는 분노를 억누르며 억지로 유지하던 차가운 미소도 끝내 무너지고 말았다.수려한 얼굴 위로 잔혹한 본성이 서서히 고개를 들었다.마치 오랫동안 가면 뒤에 숨겨 두었던 추악한 본색이 모습을 드러내는 듯했다. ***이틀 뒤.만개한 보름달이 밤하늘을 환히 밝히는 가운데, 황궁 못지않게 웅장한 화양 대장공주부의 후원은 화려한 등불로 불야성을 이루고 있었다.연회를 앞두고 비단 장막을 덧대고 향기로운 술과 진귀한 음식을 나르는 시종들의 발걸음이 분주하게 오갔다.화양 대장공주는 본채 난간에 기대어 활기로 가득한 후원의 풍경을 조용히 내려다보았다.자신의 뜻대로 빈틈없이 움직이는 공주부를 바라보는 그녀의 입가에는 만족스러운 미소가 은은하게 번져 있었다.반면, 그 뒤에 서 있던 아란공주의 얼굴에는 감출 수 없는 그늘이 드리워져 있었다.머리부터 발끝까지 대연의 방식대로 눈부시게 치장했지만, 그 어느 것 하나 자신의 의지로 선택한 것은 아니었다.오늘 그녀에게 허락된 역할은 단 하나.황제의 눈에 들고, 황제의 마음을 사로잡는 것.

  • 만독여향: 비단 위에 핀 꽃   129화

    대장공주는 순진한 아란의 질문에 혀를 차고 말았다.“지금은 그런 것이 중요한 게 아니다. 네 마음이 정해졌다면, 그 길로 밀고 나가야지.”“전… 어떤 길이 더 나은지 모르겠어요.”아란은 솔직한 심정을 털어놓았다.“그렇다면 오히려 잘 되었구나. 괜히 머리를 복잡하게 굴릴 생각은 말고, 내가 시키는 대로만 하려무나.”화양 대장공주는 더는 이 이야기를 길게 할 생각이 없다는 듯 단호하게 말을 맺었다.“예…….”아란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작게 대답했다.“황제폐하를 가능한 한 빠른 시일 안에 공주부로 초대해야겠구나. 가만히 앉아 기다리기만 해서는 이도 저도 이루어지는 일이 없을 것이다.”“네? 왜요?”“경무왕이 너와 혼인할 뜻이 없는데, 기다린다고 국혼이 성사되겠느냐?”“하지만 이미 성지가 내려졌고, 대막국에서도 호시와 각창을 준비하느라 한창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그러니 대막국에서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 서두르는 것이지. 설령 이 국혼이 성사되지 않더라도 대막국은 잃을 것이 없다. 너야 돌아가 정혼자든, 다른 이와든 다시 혼인하면 그만 아니냐?”아란은 대장공주의 현실적인 말 앞에서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했다.“정신 바짝 차리거라. 무슨 일이 있어도 폐하의 품에 안겨야 한다.”하지만 아란은 끝내 대답하지 못했다.“아, 그리고 꼭 명심해야 할 것이 있다.”대장공주의 목소리가 한층 낮아졌다.“폐하께서는 선황폐하를 닮아 성정이 차갑고, 매사 독단적이시다. 뜻대로 되지 않는 것을 무엇보다 싫어하시고, 감히 정면에서 맞서는 자를 가장 싫어하시니 반드시 유념해야 한다.”“하지만 제가 다가가지 않으면 찾아오지 않으시는걸요.”아란은 억울한 표정으로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쯧쯧. 대체 친정에서는 무엇을 배우고 온 것이냐. 또 쓸데없는 비약이나 쥐여 주고, 교태나 부리는 얄팍한 재주만 가르쳐 보낸 것이더냐?”대장공주의 신랄한 말에 아란은 움찔하며 어깨를 움츠렸다.“현숙한 척하면서 뒤로 호박씨나 까는 네 어미의 말은 잊어버리거라. 대연에

  • 만독여향: 비단 위에 핀 꽃   128화

    아란은 당돌한 것인지, 눈치가 없는 것인지 헷갈릴 정도로 좀처럼 입을 다물 줄 몰랐다.“아란공주.”“예, 폐하.”아란은 자신을 불러주는 연각을 향해 활짝 미소를 지었다.“황제의 여인이 되려면 입이 무거워야 하네.”“예?”“하고 싶은 말을 다 하고 살려면 황제의 여인이 될 수 없어.”“하지만 금원을 거닐었다고 황후마마께서 저를 쫓아내셨단 말이에요! 중화궁에서 나가 화양대장공주부로 거처를 옮기라고 명하셨다고요!”“잘했군.”“폐하! 전 옮기고 싶지 않습니다! 중화궁에 머물고 싶어요!”아란은 말릴 틈도 없이 떼를 쓰기 시작했다.“하아.”연각은 서첩을 내려놓더니 손가락으로 관자놀이를 천천히 문질렀다.“황후의 명은 곧 내 명이다. 초영황후는 대연의 국모이니, 아란공주도 그 명을 따라야 할 것이야.”“폐하, 저는!”“서충.”연각은 더는 듣고 싶지 않다는 듯 아란의 말을 끊었다.“마마, 이만 저와 함께 밖으로 나가시지요.”서공공이 공손히 한 손을 내밀며 아란을 안내했다.아란은 원망스러운 눈빛으로 연각을 바라보았지만, 그는 이미 눈을 감은 채 관자놀이를 문지르고 있었다.“왕부로 시집가기 전이니 옷차림에는 조금 더 신경을 쓰시오.”아란이 뒤를 돌아보자 연각은 입꼬리를 슬며시 올리며 웃었다.“새 신부의 속살을 내가 먼저 봤다는 소문은 듣고 싶지 않군.”아란은 저 능글맞은 황제의 속내를 도무지 알 수 없었다.웃어야 하는 건지, 화를 내야 하는 건지.대꾸할 말을 찾지 못하고 머뭇거리는데, 서공공이 다시 한번 공손히 재촉했다.“마마, 이만 나가시지요.”하는 수없이 아란은 원망 어린 눈빛만 남긴 채 승명전을 나섰다.연각은 피식 웃음을 흘렸다.“머리만 박으면 다 숨은 줄 아는 꿩 새끼 같군. 저렇게 대놓고 안달을 부리니 황후가 금원까지 찾아오는 것 아닌가.”잠시 입가에 웃음이 머물렀다.“재밌어. 생각보다 색다른 맛이 있군. 아주 멍청한 백치미가.”연각의 눈빛에 묘한 호기심이 스쳤다.“밤에는 또 어떠려나.”***태어나 처음으로

  • 만독여향: 비단 위에 핀 꽃   127화

    “쳇! 지루해. 지루해 죽겠어.”금원을 거닐며 시간을 보내던 완안아란은 지루함을 이기지 못한 채 길게 하품을 했다.“도대체 폐하는 언제 나오는 거야.”아란은 괜스레 발끝에 걸리는 풀꽃을 툭 차며 투덜거렸다.“여기 산책을 자주 나온다며!”뒤를 따르던 상궁들을 돌아본 아란이 눈을 흘기며 쏘아붙였다.“그, 그게…… 저희도 그저 전해 들은 이야기라…….”대막국에서부터 따라온 상궁들은 대연의 사정에 밝지 못해 간자들이 전해 오는 정보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하지만 황궁은 간자를 심어 두기조차 쉽지 않은 곳이었다. 때문에 아란에게 도움이 될 만한 정보를 자세히 알아내는 데에도 한계가 있었다.“도대체 언제까지 기다려야 만날 수 있는 거냐고! 짜증 나!”급기야 아란은 신경질적으로 발을 구르며 시녀들을 향해 버럭 소리를 질렀다.바로 그때, 그녀를 꾸짖는 차갑고도 엄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감히 누가 금원에서 이토록 소란을 피우는가!”고개를 돌리자 얼음처럼 차가운 표정을 한 초영황후가 상궁과 시녀들을 거느린 채 다가오고 있었다.그녀의 싸늘한 시선은 아란공주를 향해 날카롭게 꽂혔다.“화, 황후마마.”아란은 고개를 숙이며 허리를 굽혀 예를 갖추어 인사를 했다. “도대체 아란공주는 예까지 무슨 일인가?”“아, 그게… 중화궁에만 머물다 보니, 너무 답답하여……”“이곳은 대연제국 황제폐하께서 거니시는 승명전의 금원이오. 폐하의 윤허 없이는 감히 드나들 수 없는 곳인데, 대막국에서는 이런 예법조차 가르치지 않는 것인가!”아란은 순간 화가 치밀었지만, 잘못한 것은 본인이었으니 함부로 대꾸할 수는 없었다. “게다가 그렇게 속살을 드러낸 차림으로 금원을 돌아다니다니…….”초영황후의 두 눈에 새파란 불꽃이 일렁였다.“공주는 경무왕과 국혼을 하러 온 것인가. 아니면…… 폐하의 후궁이라도 되고 싶은 것인가?”초영황후의 날카로운 말은 아란의 정곡을 정확히 찔렀다.동시에 가장 감추고 싶었던 속내마저 들킨 듯한 수치심이 그녀를 파고들었다.“뭐라고요?”사

  • 만독여향: 비단 위에 핀 꽃   1화

    ‘웁! 큭!큭!’독기 가득한 뜨거운 온천물이 쉴 새 없이 입과 코를 통해 밀려들어와 숨을 막았다.발버둥이라도 쳐서 밖으로 벗어나고 싶었지만, 이미 극독에 중독돼 굳어져 버린 그녀의 몸은 서서히 황궁 온천 밑바닥으로 가라앉을 뿐이었다.‘설아, 너는 황궁 최고의 재인이야!’대연제국의 황제가 귓가에 달콤하게 속삭여주던 황궁 제일의 후궁이었건만, 이토록 허망하게 죽어가는 꼴이라니. ‘연각! 당신이 나를 구하러 온다던 약속만 지켰더라면!’가슴이 찢어질 듯한 배신감이 독기보다 더 빠르게 전신을 감돌았다. 가문을 위해, 오라버니의

  • 만독여향: 비단 위에 핀 꽃   5화

    냉궁에서 마주했던 연각의 그 안쓰러운 눈빛, 제 손을 피하던 찰나의 흔들림, 그리고 행궁으로 가면 살 수 있다던 황후의 가식적인 자비. 그 모든 의심이 하나의 잔인한 진실이 되어 설아의 심장을 난도질했다.이것은 황후가 계획하고, 황제가 묵인한 완벽한 독살이었다.‘너희가, 너희가 감히 나를……!’사랑이라 믿었던 모든 것이 독이 되어 전신을 파고들었다. 심장이 찢어질 것 같은 배신감에 눈앞이 아득해져 간다. 거품 섞인 숨을 내뱉으며 수면 아래로 잠겨가는 설아의 눈에서 핏물 같은 눈물이 흘러나왔다.아득하게 숨이 넘어가던 찰나,

  • 만독여향: 비단 위에 핀 꽃   4화

    “멈추어라! 감히 어느 안전이라고 황궁의 정원수에 손을 대느냐!”날카로운 호령에 고개를 돌리자, 어느새 초영황후의 화려한 가마 행렬이 냉궁의 정적을 깨며 도착해 있었다. 황후궁 상궁들은 우르르 달려와 청아의 앞을 막아섰다.“황후마마를 뵙나이다!”청아가 혼비백산하여 바닥에 엎드렸다. 품에 안고 있던 나뭇가지들이 볼품없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황후는 흩어진 나뭇가지들을 혐오스럽다는 듯 내려다보았다. “냉궁에서 불을 피우면 안 된다는 법도를 모르느냐? 폐하께서 다녀가셨다는 소문에 내 참담한 심정으로 이곳을 찾았거늘, 기어이 사고를

  • 만독여향: 비단 위에 핀 꽃   3화

    약재는 빠르게 바닥났고, 태의원 앞에서 울부짖는 청아의 애처로운 모습 또한 반복되었다.“청아야… 나 때문에 네가 고생이 많구나…….”설아는 청아가 내미는 약그릇을 받아들며 눈물을 글썽였다.“고생은요. 당연히 해야 할 일인 걸요. 어서 쾌차하셔야 합니다.”설아는 겨우겨우 약탕을 한 모금씩 삼키고는, 모기만 한목소리로 그간 궁금했던 것을 물었다.“폐하는… 폐하 소식은 들었느냐?”“......”청아는 차마 대답하지 못하고 시선을 피했다.“하긴, 너도 소식을 알기 어렵겠구나. 나를 따라 근신해야 할 터이니…….”“지금은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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