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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9장

Author: 아오
소지환은 끝내 떠나지 못했다.

천신만고 끝에 찾아낸 그녀였다. 데려가지 못한 채 돌아선다는 것은, 그에게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는 의원 맞은편의 주막을 통째로 사들여 가장 좋은 방을 차지했다. 창을 열면 의원 안이 한눈에 들어오는 자리였다.

매일 이른 아침, 그는 그 창가에 서서 강채안이 서운조를 도와 의원 문을 여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찾아온 아녀자와 어린아이들을 다정하게 안내하는 모습을, 뒷마당 약초밭에 쪼그리고 앉아 새로 심은 약초에 물을 주는 모습도 전부 눈에 담았다.

그 풍경들이 매 순간 그의 심장을 찔렀다. 그러나 탐욕스러운 눈길을 차마 돌릴 수가 없었다.

생기가 넘쳤다.

평온했다.

때로는 엷은 웃음까지 머금었다.

그런 강채안의 모습은, 그가 단 한 번도 온전히 가져본 적 없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제는 영영 잃어버린 것이기도 했다. 회한이 시시각각 그의 이성을 갉아먹었다.

그는 서툴게나마 속죄를 시작했다.

먼저 약재였다.

수하들에게 명하여 천하의 희귀한 약재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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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바람에 흩어진 맹세   제22장

    소지환이 도성으로 돌아가 황제께 강남 고을의 역병을 고하니, 조정에서 수많은 명의를 파견하여 힘쓴 끝에 마침내 역병이 온전히 진정되었다.모든 것이 마침내 처음의 평온하고 아름답던 시절로 되돌아간 것이다.백성들은 강채안과 서운조의 은혜에 감격하여 눈물을 흘렸고, 저마다 집안에서 가장 귀한 것들을 가려내어 두 사람에게 바쳤다.“이것은 집에서 직접 기른 토닭이 낳은 알이옵니다. 부디 맛보아 주시옵소서!”“뒷마당 도리나무에 복숭아가 제법 열렸기에, 그중 가장 실하고 큰 놈들로만 골라왔사옵니다. 필히 드셔보셔야 하옵니다!”“두 분 선인이 아니셨더라면, 저희가 어찌 목숨을 보전하여 오늘을 맞이했겠습니까!”두 사람은 품 안 가득 안긴 물건들을 바라보다가, 이윽고 서로를 마주 보고 빙그레 미소 지었다.이듬해, 유난히도 햇살이 따스하고 화창한 날이었다.강채안과 서운조는 고을 백성들이 자발적으로 모여들어 보내는 축복 속에, 소박하나 더없이 따스한 혼례를 올렸다. 화려한 장식도 없었고, 까다로운 예법에 얽매일 필요도 없는 자리였다. 허나 서운조는 자신이 줄 수 있는 가장 좋은 것들을 그녀에게 바치고자 온 정성을 다했다.강채안이 몸에 걸친 고운 옷은, 서운조가 그녀 몰래 수많은 밤을 지새우며 희미한 등잔불 아래서 한 땀 한 땀 친히 바느질한 혼례복이었다. 붉은 비단 자락은 감촉이 부드럽기 그지없었고, 햇살을 받아 은은한 광택을 발했다. 그 위로 오색 실을 가누어 수놓은 원앙사수(鴛鴦戱水)는 바늘땀이 촘촘하고 정교하기 이를 데 없었으니, 마치 그녀를 향한 그의 온유하고도 굳건한 연모의 정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했다.손재주가 가장 뛰어난 마을 아낙이 그녀의 칠흑 같은 머리타래를 정갈하게 올려 비녀를 지르고 진주 목잠을 꽂아주었으며, 이웃집 숙모는 갓 피어난 꽃 몇 송이를 정성스레 꺾어와 머리타래 사이에 고이 꽂아 장식해 주었다. 아이들과 아낙들의 웃음소리에 둘러싸인 채, 강채안이 인자한 미소를 머금고 서 있는 서운조의 앞으로 걸어 나아갈 때, 사방에서 환호와 축원의 소

  • 바람에 흩어진 맹세   제21장

    역병으로 목숨을 잃는 백성이 날로 늘어가자, 태반의 사람들이 스스로 삶을 포기한 채 약을 거부하기에 이르렀다.그 아비규환 속에서 서운조는 매일같이 약로(藥爐)와 병상을 숨 가쁘게 오가며 밤낮없이 약을 맛보고 침을 놓았다. 눈가에는 핏발이 서려 전면이 붉게 물들었고, 낯빛은 병색이 완연한 잿빛으로 변해갔으며, 급기야 참아오던 기침까지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곁에서 지켜보는 강채안의 가슴은 새까맣게 타들어 갔다. 몇 번이고 목소리를 가라앉히며 만류했으나, 서운조는 매번 그녀가 건네는 물사발을 온화하게 밀어낼 뿐이었다.“괜찮소. 이제 고지가 머지않았소. 역병을 잡을 결정적인 약재를 곧 찾아낼 것 같구려.”어느 날 이른 아침이었다. 강채안이 갓 달인 약사발을 들고 방 안으로 들어섰을 때, 서운조는 미동도 없이 책상 위에 엎드려 있었다. 그 손끝에는 쓰다 만 처방전이 흩어져 있었다. 그저 피로에 지쳐 잠든 줄로만 여긴 그녀가 그를 부르며 깨우려 했으나, 아무런 응답도 돌아오지 않았다.순간, 불길한 예감이 심장을 틀어쥐었다.다급히 그의 어깨를 흔든 순간, 그의 온몸은 이미 불덩이처럼 뜨겁게 달아올라 있었다. 서운조가 쓰러진 것이다. 모든 심력을 소진한 채, 그 자신마저 끝내 역병에 전염되고 말았다. 고열에 신음하는 그의 의식은 흐릿하기만 했고, 숨소리는 거칠고 가빠졌으며, 입술은 시퍼렇게 질려 있었다.그 순간 강채안의 세상이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그간 간신히 붙들어 온 냉정과 자제력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그녀의 온몸은 걷잡을 수 없이 떨리기 시작했다. 거대한 공포가 조수처럼 밀려와 그녀의 전신을 집어 삼키며 끝없는 심연 속으로 끌고 들어가는 것만 같았다.강채안은 이전에 시험했던 모든 처방전을 샅샅이 뒤지며 가능성을 하나하나 짚어 나갔다. 그리고 점점 싸늘하게 식어가는 그의 손을 맞잡아 자신의 뺨에 갖다 대며, 목이 메어 부르짖었다.“이대로 죽어서는 안 됩니다... 제게 모든 약초를 분별하는 법을 가르쳐주겠다 약조하지 않으셨습니까.

  • 바람에 흩어진 맹세   제20장

    서운조와 강채안이 이번에 산을 내려온 것은 역병으로 도탄에 빠진 백성들을 구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들불처럼 번지는 역병의 기세는 두 사람의 짐작을 아득히 뛰어넘었다.처음에는 그저 간간이 기침을 하고 열이 오르는 수준에 불과했다. 그러나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아 도성의 크고 작은 골목마다 어김없이 병마가 들이닥쳤다. 약방 문 앞에는 얼굴이 누렇게 뜨고 피골이 상접한 백성들이 인산인해를 이루었는데, 그들의 얼굴에는 하나같이 절망이 짙게 드리워져 있었다. 자신들이 불치병에 걸린 줄로만 여긴 이들은 날마다 맨바닥에 누워 천명을 받아들이듯 통곡을 쏟아냈다.서운조가 운영하는 의원은 밀려드는 환자들로 이미 감당할 수 없는 지경이었다. 그의 안색에는 깊은 피로가 역력했고 눈가에는 핏발이 서렸으며, 밤낮을 가리지 않고 고서를 들추며 처방을 맞추느라 눈 한 번 붙이지 못했다. 좁은 마당에는 매일같이 쓰고 묵직한 탕약 냄새가 안개처럼 자욱하게 감돌았다.강채안은 그의 곁을 지키며 묵묵히 궂은일을 나누어 맡았다. 약재를 찧고 나누어 담는 일에만 머무르지 않고, 서운조를 도와 환자들의 증세와 탕약 복용 후 나타나는 거부 반응을 기록하는 법을 익혔다. 병세가 극도로 위중한 백성들의 상처를 친히 싸매고 탕약을 입에 흘려 넣어 주기까지 했다. 그녀의 손길에는 타고난 과단성이 서려 있었으되, 이번만큼은 사람을 해하기 위함이 아닌, 오직 살리기 위함이었다.어느덧 고을 백성들의 식량이 바닥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물가는 천정부지로 치솟아 한 끼조차 굶기를 거듭 하였으니, 약재를 구하는 일은 엄두도 낼 수 없었다. 서운조와 강채안은 서로 시선을 나누었다. 굳이 입을 열지 않아도 두 사람의 마음은 이미 같은 곳을 향하고 있었다.“제게 아직 섭정왕부에서 가지고 나온 옥가락지가 있으니, 이것을 처분하면 될 것입니다.”강채안이 품속에서 가락지를 꺼내어 서운조의 손바닥 위에 조용히 올려놓았다. 서운조는 잠시 침묵을 지켰으나, 끝내 그것을 거두어들였다.그들은 서운조가 오랜 세월 의술

  • 바람에 흩어진 맹세   제19장

    소지환은 끝내 떠나지 못했다.천신만고 끝에 찾아낸 그녀였다. 데려가지 못한 채 돌아선다는 것은, 그에게는 불가능한 일이었다.그는 의원 맞은편의 주막을 통째로 사들여 가장 좋은 방을 차지했다. 창을 열면 의원 안이 한눈에 들어오는 자리였다.매일 이른 아침, 그는 그 창가에 서서 강채안이 서운조를 도와 의원 문을 여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찾아온 아녀자와 어린아이들을 다정하게 안내하는 모습을, 뒷마당 약초밭에 쪼그리고 앉아 새로 심은 약초에 물을 주는 모습도 전부 눈에 담았다.그 풍경들이 매 순간 그의 심장을 찔렀다. 그러나 탐욕스러운 눈길을 차마 돌릴 수가 없었다.생기가 넘쳤다. 평온했다. 때로는 엷은 웃음까지 머금었다.그런 강채안의 모습은, 그가 단 한 번도 온전히 가져본 적 없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제는 영영 잃어버린 것이기도 했다. 회한이 시시각각 그의 이성을 갉아먹었다.그는 서툴게나마 속죄를 시작했다. 먼저 약재였다. 수하들에게 명하여 천하의 희귀한 약재들을 닥치는 대로 긁어모으게 했다. 백 년 묵은 산삼, 얼음처럼 투명한 설련화, 이역만리에서 건너온 영초까지. 함과 상자에 겹겹이 쌓인 것들이 호위들의 손에 받들려 의원 문 앞으로 정중히 배달되었다.“왕야의 명이십니다. 채안 낭자의 기력을 보하기 위해 하사하신 것이옵니다.”강채안은 그 귀한 것들을 덤덤히 곁눈질할 뿐 안색 하나 변하지 않았다.“받지 않겠소. 의원에는 약재가 차고 넘치니 이런 것은 소용없구려. 도로 가져가시오.”추호의 미련도 없는 목소리였다. 그렇게 매번 그 진귀한 약재들은 고스란히 주막으로 되돌아와 소지환의 방 안에 쌓여갔다.약재가 통하지 않자, 그는 오래된 기억을 뒤졌다.수년 전의 일이었다. 강채안이 임무를 마치고 온몸에 상처를 입은 채 돌아왔던 날, 그가 드물게 먹고 싶은 것이 있느냐고 물었었다. 그녀는 한참을 침묵하다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겨우 답했다.“약과이옵니다.”당시 그는 그 말을 귀담아듣지 않았다. 주방에 대강 만들라 일렀을 뿐, 그녀가

  • 바람에 흩어진 맹세   제18장

    근래 도성 안팎에 난데없이 역병이 다시 창궐하자, 서운조는 서둘러 행장을 꾸려 하산할 채비를 서둘렀다.“이번에는 저도 함께 데려가 주십시오.”강채안이 약초가 가득 담긴 바구니를 품에 안은 채 조용히 입을 열었다.서운조는 그녀를 한 번 바라보더니, 부드럽게 웃었다.“그리합시다.”저잣거리 어귀에 임시 의원 자리를 펼쳐 놓자마자 백성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서운조가 온화한 얼굴로 환자 한 사람 한 사람의 맥을 짚는 동안, 강채안은 그 곁에서 익숙한 손길로 약재를 빻고 나누어 담았다. 때로는 말 없이 침을 건네며 그와 소리 없는 호흡을 맞추었다. 이렇듯 분주하면서도 평온한 나날이 그녀는 참으로 좋았다. 정오가 가까워질 무렵, 준비해 온 약재가 바닥을 드러냈다. 강채안은 잠시 머물고 있는 거처로 발길을 돌렸다.푸른 박석이 깔린 길을 따라 혼자 걷던 중이었다. 마을 어귀의 개울가를 막 지나치려던 순간, 정적을 갈라놓는 비명이 사방을 찢었다.“아이고, 내 새끼! 우리 아이가 물에 빠졌소!”대여섯 살 남짓 되어 보이는 사내아이가 물속에서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거센 물살이 야속하게도 아이를 깊은 물살 쪽으로 끌어당기고 있었다. 강가에 모여든 어른들은 혼비백산하여 발만 동동 구를 뿐, 감히 뛰어드는 이는 없었다.그 순간, 머리보다 몸이 먼저 움직였다.암위로 살아온 세월이 뼛속 깊이 새긴 본능이었는지, 아니면 그저 사람이 사람을 구하고자 하는 마음이었는지. 강채안의 몸은 이미 시위를 떠난 화살처럼 날아오르고 있었다. 돌난간을 가볍게 박차고 도약한 그녀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물속으로 뛰어들었다.얼음장 같은 강물이 옷자락을 무겁게 끌어당겼지만 개의치 않았다. 빠르게 헤엄쳐 아이 곁으로 다가간 그녀는 아이를 등에 업고 숨을 몰아쉬며 강가로 돌아왔다.물을 잔뜩 들이켜고 자지러지게 우는 아이를 어미의 품에 안겨주었을 때, 강채안 역시 온몸이 흠뻑 젖어 있었다. 얼굴을 가리고 있던 얇은 면사마저 비틀어져 뺨에 달라붙었다. 그녀가 매무새를 고치려 고개를 숙이는

  • 바람에 흩어진 맹세   제17장

    산골짜기에서 흐르는 시냇물처럼, 시간은 소리 없이 흘러갔다.서운조의 정성 어린 손길이 날마다 이어지자 강채안의 몸에 새겨졌던 크고 작은 상처들도 조금씩 빛을 잃어갔고, 안색에도 서서히 온기가 돌기 시작했다. 게다가 말수도 늘었다. 약재를 늘어놓은 선반 주변을 어지럽히는 참새들을 향해 소리를 치기도 했고, 서운조가 약을 달이다 실패하여 얼굴에 그을음을 잔뜩 묻힌 채 멋쩍게 서 있을 때면 웃음을 터뜨리기도 했다. 서운조 역시 약초를 구하러 산 아래로 내려갔다 돌아오는 길이면 어김없이 작은 것들을 챙겨왔다. 어떤 날은 계피향이 은은한 계피사탕 한 봉지였고, 어떤 날은 저잣거리에서 갓 들여온 이야기책 몇 권이었으며, 또 어떤 날은 투박하지만 들꽃 같은 정취가 배어있는 나무 비녀이기도 했다. 나른한 오후면 강채안은 마당에 놓인 대나무 의자에 몸을 파묻고 책장을 넘겼다. 선비와 규수의 사랑 이야기, 협객들의 무용담. 따스한 햇살을 등에 받으며 그 안으로 깊이 빠져들다 보면, 어느새 제 그림자가 길게 늘어질 만큼 해가 기울어 있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초저녁, 서운조가 평소보다 일찍 돌아왔다. 그의 손에는 탈 두 개가 들려 있었다. 하나는 눈매가 영민해 보이는 백여우 탈이었고, 다른 하나는 서늘하면서도 신비로운 기운이 감도는 청란(青鸞) 탈이었다.“오늘 밤 산 아래 마을에서 연등회가 열린다오.”서운조는 백여우 탈을 그녀의 눈앞에 내밀며 다정하게 웃었다.“강물 위로 등불이 흘러가 장관을 이룬다 하니, 제법 떠들썩할 것이오. 함께 가시겠소?”강채안은 순간 굳어버렸다.연등회. 그 단어가 귓속에서 잠깐 맴돌았다. 마치 오래전에 잊어버린 언어처럼, 알아들을 수는 있지만 자신의 것으로는 느껴지지 않는 말이었다. 그녀의 기억 속에 남아있는 것이라곤 피비린내 나는 어둠과 얼음처럼 차가운 명령들뿐이었다. 사람이 넘쳐흐르는 축제란 지난날의 그녀에게 언제나 위험의 다른 이름이었다. 방심하면 죽는 곳, 잠시라도 긴장을 늦추면 안 되는 곳. 몸 안 깊숙이 새겨진 경계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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