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이게 말이 돼요?"
"보고 있잖아? 나 진짜 주인님만 봐도 쌀 것 같아. 싸도 돼, 이제?"영상을 통해서 본 성기는 기운이 하나도 없어서 시들시들했는데 어느새 다시 이렇게 커진 건지, 도혁이 힘찬 성기를 흔들며 물었다. 주하는 손을 들어 그에게 짧게 명령했다.
"안 돼요. 멈추고 좀 나와봐요. 그 영상통화도 끊고."
도혁은 아쉬워 입맛을 다시면서도 그녀의 말대로 했다. 두 사람은 다시 모텔방에서 아까와 같은 구도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는 침대에 걸터앉아있었고, 그녀는 그런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 이후에 다른 여자랑은 해봤어요?"
"나 그렇게 헤픈 사람 아니야."사실 해보려고 생각도 했었지만 안 된 것이었다. 하지만 도혁은 굳이 그렇게 구구절절 설명하진 않았다.
"처음 본 여자한테 대딸 받아놓고."
"그건 주인님이니까 그랬지." "일단 아직 아니고요. 그땐 더 아니었고요."도혁은 한눈에 보자마자 눈치챘다며 헛소리를 했다. 아니. 그러니까 어쨌든 주하에게는 헛소리로밖엔 안 들리는 말을 했다. 그에겐 너무 진지한 소리였는데도.
"질문을 바꿔서. 지금까지 그럼 고자셨나요?"
"음."도혁이 눈을 데굴데굴 굴렸다. 솔직히 성관계는 멀리하고 살았지만 딱히 스스로를 고자라고 생각했던 건 아니었다. 주하를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잘 서니까 고자라고 하기는 좀 그렇기도 하고. 주하는 그런 고민을 하는 도혁을 보고 '옳다구나'하고 입을 열었다.
"그건 아니시고."
"뭐... 비슷, 했을지도."주하는 작전을 바꾸기로 했다. 도저히 이 방법으로는 떼어낼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았다. 그러면 더 많은 걸 요구해서 알아서 도망가게 해야지. 주하는 다시 입을 열었다.
"정말 내가 유일하게 사정시킬 수 있는 사람이면, 내가 시키는 거 다 할 수 있어요?"
"예를 들어?" "우선... 흠... 존댓말? 주인님이라면서요." "그건 너무 쉽죠, 주인님."능글맞은 얼굴이 웃고 있었다.
아니. 뭐 저렇게 생긴 사람이 자존심도 없냐고. 말이 되냐. 진짜. 말이 안 되는 거투성이네. 주하는 속으로 투덜거렸다. 그리곤 생각했다. 설마 무릎까지 가볍겠느냐고. 다시 한번 말하지만 거의 산처럼 크게 느껴지는 사람이었다. 무릎을 꿇으려면 한참은 걸릴 것이 틀림없었다."무릎 꿇어봐요."
"네, 주인님."그는 난색을 보이거나 심지어는 굴욕을 느끼지도 않고 가볍게, 아주 가볍게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그 사이에도 그의 성기는 너무나도 반짝거리며 위용을 뽐내고 있었다. 젠장.
"이제 주인님 해주실 건가요? 네? 저 무릎까지 꿇려놓고, 안 하실 건 아니죠?"
도혁은 은근하게, 그러나 주하가 눈치는 채지 못할 정도로 그녀를 압박했다. 이렇게까지 했으면 좀 넘어오라는 생각을 속으로는 하고 있었지만 겉으로는 절대 티 나지 않도록 태연하게 굴면서.
"한다, 해. 한다고! 주인인지 뭔지!"
"진짜?"도혁이 웃으며 물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한계까지 몰아서라도 못 하겠단 소리를 나오게 할 거라고, 주하는 다짐했다. 그녀는 그에게 다시 옷을 입으라고 말했다.
"싸게 해주세요."
옷을 다 입고도 안 어울리게 입술을 비죽거리며 말하는 도혁을 무시하며 주하는 그에게 다시 앉으라고 했다. 그는 얌전히 앉았다. 그녀는 그 앞에 의자를 끌고 가 앉았다. 두 사람은 앉은 채로 마주 보게 되었다.
"우리, 자기소개부터 좀 해요. 통성명도 안 했다고요. 서로 아는 거라곤 전화번호랑 얼굴. 그것밖에 없어요."
"오주하. 23세. 한서대학교 건축학과 졸업반. 과탑 6회. 전액 장학금. 곧 취업 예정이고."도혁은 알고 있는 정보 중에 적당히 걸러서 말했다. 통성명은 하지 않았지만, 그 정도 선에서. 주하가 질린다는 얼굴로 물었다.
"...어떻게 알았어요?"
"어찌저찌? 난 백 도혁. 31살. 하는 일은... 자영업."자영업 같은 소리 하네. 주하는 그렇게 생각했지만, 우선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눈앞의 남자는 자신이 뭘 하는 사람인지 들키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니까, 그냥 속아주는 척하기로 한 것이다. 자세히는 알고 싶지도 않았고. 남의 뒷조사까지 해놓고 시침을 떼는 게 좀 어이없긴 했지만.
"음. 뭐라 부르는 게 좋을까요?"
"도혁아?"8살이나 많은 남자를 이름으로 부르는 건 쉽지 않을 것 같았다. 주하가 고민하는 눈치이자 도혁이 다시 살살 웃으며 말했다.
"예약했는데, 다시 한번 확인 좀 해주세요. 오주하예요."주하는 곤란한 얼굴로 말했다. 하지만 상대방은 주하보다 훨씬 난감한 얼굴이었다. 주하는 어쩔 수 없이 입을 꾹 다물었다. 일주일은 멀리까지 못 나올 것 같아서 기껏 예약까지 한 식당에 왔는데 예약자 명단에 없다니. 나름 모아둔 돈까지 큰 마음먹고 쓸 생각으로 온 건데. 주하는 제 옆에 서서 한 마디도 없이 가만히 있는 도혁을 살짝 올려다보았다."미안. 다른 데 갈까?""왜 미안해해요. 그러지 마요. 예약 확인, 한 번 더 해주신다는데."도혁은 주하를 마주 보지 않고 직원을 뚫어져라 보았다. 식은땀을 삐질삐질 흘리는 모습이 어딘가 익숙한 남자였다. 잘은 모르겠는데 어디서 한 번쯤은 본 것 같은 얼굴이었다. 어디서 봤더라. 도혁이 그런 걸 고민하는 사이, 남자는 도혁의 말에 허리를 푹 숙이고 '네, 네... 한 번 더 확인하고 오겠습니다...!'하고 말하며 줄행랑을 쳤다. 어쩌면 도혁이 남자를 알아챈 것보다, 남자가 도혁을 먼저 알아챘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알아챘든 알아채지 못했든 솔직히 상관은 없었다. 주하를 곤란하게 만드는 것들은 그게 뭐든 다 치워버릴 생각이었다."죄, 죄송합니다. 정말. 착오가 있었습니다... 안쪽으로 안내하겠습니다...!"어느새 다시 나온 직원이 허리를 굽신거리며 자리를 안내했다. 주하는 언젠가 이 비슷한 일을 겪었던 것 같아서 의아했다."아는 사람이야 혹시?""글쎄요. 처음 보는 건 아닌 것 같기도 하고.""어떻게 어딜 가나 아는 사람이 있어?"주하는 좀 질린다는 말투로 말했다. 그리고선, 그날을 떠올렸다. 그날은 두 사람이 처음으로 고깃집에 간 날이었다. 주하가 삼겹살이 먹고 싶다고 해서 찾아간 식당은, 너무 시끌벅적한 분위기였지만 주하는 전혀 신경
"3만 원 맞아요."도혁은 주하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안다는 듯 말했다. 주하는 조금 멋쩍어하며 '고마워.'하고 대꾸했다. 3만 원이라고 치더라도, 이렇게 완벽한 결과물을 찾는 건 생각보다 시간이 오래 걸렸을 터였다."그런데 꽃이 주인님 손에 들리니까 시드는 것 같네.""그런 말도 할 줄 알아?"주하는 기껏 한 칭찬에 놀라 되물었다. 딱히 연습해 온 멘트는 아니지만, 괜히 허탈해지는 기분이라 도혁은 어이가 없다는 듯 웃었다. 주하는 칭찬조차 당연하다는 듯 받지 않는다는 것쯤은 잘 알았지만 이런 반응이라니."맨날 좆이 터질 것 같아요, 이런 말 밖에 안 해서 못 할 줄 알았나 봐.""요즘 아부가 늘었어.""진심인데.""어련하시겠어요."주하는 도혁의 말을 믿어주지 않고 꽃에 얼굴을 묻고 냄새를 한 번 맡아보았다. 딱히 티가 나는 향이 나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래도 남자에게 꽃을 선물 받아본 건, 고등학교 졸업식 날 아버지가 사주신 게 전부여서 기분이 나쁘진 않았다.도혁이 보기에도 주하가 제법 꽃을 마음에 들어하는 것처럼 보였다. 도혁은 속으로 안도의 숨을 삼켰다. 고심해서 고른 꽃이라 마음에 들어하니 다행이었다."고르느라 힘들었겠다.""마음에 드는 게 생각보다 없더라고요. 40개 중에 겨우 고른 거예요.""꽃다발을 40개나 찾아봤어?"주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도혁은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아마도 꽃집을?""...어? '아마도'?""꽃다발도 40개 사긴 했죠.""어?"주하는 꽃을 보던 눈을 휙 도혁에게로 돌렸다. 그는 대수롭지 않은
"회의 중에 갑자기 나가신 것도?!""새벽 2시에 나가셨다가 돌아오시는 것도.""전화받는다고 갑자기 사라지신 것도???""저번에 기분 안 좋으셨던 것도."성철은 하나하나 말해주는 태규를 보며 기가 차서 고개를 저었다. 기찬은 '하하...'하고 어색하게 웃었다. 그날 충격을 먹고 간 상수는, 아직도 못 믿고 있었다. 세상이 미친 게 틀림없다면서. 도혁이 아무리 수상히 굴어도 이상한 합리화를 계속하기에 이르렀다. 사실 머리로는 다 알고 있지만 마음으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는 것에 가까웠다."10개니까 일단 보내드려야겠다."태규는 꽃다발 사진 10개를 모아 도혁에게 보내었다. 대부분은 장미를 위주로 한 꽃다발이었는데, 솔직히 말해서 태규의 눈에는 그게 그거였다. 기찬도 색이 좀 다르다고 생각하는 정도였다. 그들이 생각했을 때, 도혁도 그리 다르진 않을 것 같았다."...다시 보내래."적당히 고를 거라고 생각했던 도혁은, 꽃다발을 아주 진지하게 골랐다. 그렇다고 다른 요구사항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다시.' 그가 보낸 문자는 이게 다였다. 태규는 더 많은 사람에게 명령을 전달했다. 아까보다 더 다양한 꽃다발 사진이 전송되어왔다. 노란색, 분홍색, 흰색, 파란색... 무슨 꽃인지는 여전히 알 수 없었지만 다양한 선택지가 생긴 것에 만족했다."...또 다시 보내래."기찬과 태규와 성철은 심각하게 머리를 맞대고 고민을 하기 시작했다. 이대로 가다간 서울 시내에 있는 모든 꽃집을 다 들러야 할 판이었다."...물어보자. 뭐가 마음에 안 드시는지.""미쳤어? 그런 소리를 어떻게 해.""...이건 좀 촌스러워 보이는 것 같아. 리본이 너무 크잖아.""대학생이
[ 응. 3만 원 이내로. ]일부러 그런 금액으로 골랐다. 그의 씀씀이를 생각해 보면, 절대로 성에 차지 않을 그런 금액으로. 아마 고민이 많이 될 것이었다. 주하는 답장을 마친 뒤 룰루랄라 핸드폰을 내려놓고 다시 과제에 집중했다. 그가 왜 그렇게 빨리 사라졌는지 알았으니, 마음은 한결 가벼워져있었다.한편, 도혁은 3만 원이란 제한에 큰 고민에 빠져있었다. 요즘 물가를 떠올려본다면 3만 원짜리 꽃다발은 아주 작고 약소할 것이 틀림없었다. 한 손에 들어오는 그런 크기. 딱히 가장 크고 비싼 걸로 할 생각까진 없었지만, 확실히 좀 고민이 되는 금액이었다. 그래도 그는 그 금액 안에서 최선을 다할 생각이었다."애들 좀 풀어야겠다."'헉, 무슨 일 있으십니까 대표님?'"서울 시내 꽃집에서 3만 원짜리 꽃다발 좀 구해와. 10개 이상."태규는 갑작스럽고 오랜만의 명령에 놀랐다가, 이어지는 명령에 두 배로 놀라고 말았다. 하지만 그는 '네, 대표님.'하고 침착하게 대답했다. 전화가 뚝 끊겼다. 30분 이내로 사진부터 전부 찍어 보내라는 명령이 문자로 또 날아왔다. 태규는 우선 여러 명에게 해당 지시를 내렸다. 그리고선 뭔가 일을 하느라 정신이 없는 성철에게 다가갔다."보스 여자친구가 좀... 특이한 것 같아.""엉? 여자친구? 보스 여자친구가 무슨 말이야?"성철은 태규의 말을 대충 듣고, 대충 대꾸했다. 사실 조직원들은 거의 다 도혁의 앞에서만 그를 대표님이라고 부르고, 뒤에선 여전히 보스라고 지칭하고 있었다."아니. 여자 생기셨잖아. 좀 특이하다고 그분이.""...무슨 말을 하는 거야?"성철은 일을 하면서 태규의 말을 이해하지 못해서 서류를 내려놓았다. 구석에서 그 이야기를 듣던 기찬이
다음날, 도혁은 또 거의 밤을 새우다시피 하고선 아침 7시부터 분주하게 준비를 했다. 9시까지만 가면 되긴 했지만 집에 있고 싶지가 않았다. 그래서 주하의 집 앞에 도착하니 고작 8시 10분이었다. 물론 50분쯤 기다리는 건 일도 아니었다. 3일을 버텼으니까. 그는 9시가 되면 주하에게 보낼 문자를 쓰느라 핸드폰을 쥐고 한참을 썼다 지웠다 했다. 무슨 문자를 쓸지 아직 정하지 못했는데, 주하의 집에서 그녀가 나왔다."......!"도혁은 얼른 차 문을 열고 나갔다. 그녀는 그가 선물한 옷을 입고 있었다. 너무 잘 어울려서, 벌을 받은 보람이 있는 그런 차림이었다. 옷만 봐도 벌이 끝났다는 건 대충 알 수 있었지만 그는 혹시 몰라 핸드폰을 확인해 보았다. 아직 8시 59분. 입을 떼지 못하고 있으니 주하가 웃으며 다가왔다.보스라서 그런가 별 이상한 데서 다 철저하다 싶어서, 그녀는 웃을 수밖에 없었다."반성은, 잘했어?"묻는 말에 대답하지 못하는 벌은 아니니까, 더 이상 시간은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도혁은 '네.'하고 진지하게 대답했다."물어보지도 않고 마음대로 선물해서 죄송합니다. 안 그럴게요."어찌나 진지하게 사과를 하는지, 주하는 조금 머쓱한 표정을 지을 뻔했지만 참아냈다. 훈육이 기껏 아주 잘 먹혔는데 이제 와서 틈을 보일 수는 없었다."그래. 꼭 허락받아.""보고 싶었다고 말해도 돼요?"백도혁 미친 거 아니야? 무슨 저런 말을 진지하게 해. 사람을 어떻게 만들려고.주하는 자신의 표정 관리가 잘 되고 있는지 신경 쓰느라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그녀는 속으로만 잠시 심호흡을 했다. 태연하게, 태연하게 굴자. 평소의 능글거리는 플러팅은 그냥 심드렁하게 대꾸하면 그만이었는데, 진지하게 말을 하니 심장이
그녀의 예상대로 도혁은 슬쩍 올라가는 주하의 티셔츠를 보고 있었다. 다만, 그는 이곳이 쇼핑몰이라는 것에 꽤 신경을 쓰고 있었다. 사람이 너무 많은 곳이라서. 딱히 주하를 꽁꽁 가둬놓고 혼자 보고 싶다고 생각하는건 아니지만 아무래도 남들에게 보여주기 싫은건 있었다. 하지만 머리를 다시 묶는 시간은 생각보다 아주 짧아서 그는 이내 안정을 찾았다. 주하를 따라다니는 건 생각보다 훨씬 즐거운 일이어서 그는 어느새 즐기며 그녀를 따라가고 있었다. 어떤 사람이 끼어들기 전까지만 해도 그랬다."......"주하가 잡지 같은 걸 뒤적이고 있을 때였다. 웬 남자가 주하에게 말을 걸었다. 주하의 얼굴에 엄청난 경계심이 들어섰다. 아는 사람이 아니구나. 그는 그렇게 생각하자마자 저도 모르게 한 발자국, 주하에게로 다가갔다. 뭐하는 새끼지? 도혁은 남자를 훑어보았다. 주하와 비슷한 또래의 남자애는 조금 쑥스러운 듯 얼굴을 붉히며 주하에게 무언가 말하고 있었다. 벌을 받는 중만 아니었어도 주하의 앞을 가로막고, 저런 애송이 따위는 순식간에 치워버렸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감히' 나서도 되는지 판단이 쉽지 않았다."죄송합니다."남자가 뭐라고 하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었는데, 주하의 목소리가 또렷하게 들렸다. 도혁은 차분하게 다시 한걸음 뒤로 물러섰다. 여긴 사람이 많은 주말의 쇼핑몰. 적어도 저 망할 애새끼가 주하에게 위협적인 행동을 할 리는 없을 것 같았다. 주하가 알아서 차가운 얼굴로 잘 거절하니 딱히 나설 필요 또한 없어 보이고. 도혁은 대신 남자를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누구한테 집적거려. 집적거리길. 그런 분노가 없는 건 아니었지만, 주하가 빠르게 거절해서 마음속에 안도가 퍼졌다.[ 표정 풀어. ]갑자기 울린 핸드폰을 확인하니 주하에게서 그런 문자가 와있었다. 고개를 휙 드니 어느새 혼자 남은 주하가 저를 바라보고 있
도혁은 뭐라고 저장해야 할지 몰라 저장도 못한 11자리의 핸드폰 번호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취할 정도로 마신 건 아니라지만, 아침이 되니 정신이 돌아온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는 사실 무슨 생각으로 번호를 받아왔는지 정확히 기억나질 않았다. 대체 그 여자랑 뭘 하겠다고. 짧은 해프닝으로 끝내면 그만이었다. 그는 그렇게 다짐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쩌면 어제를 기점으로 성욕이 돌아왔을지도 모를 일이었다."형님! 계십니까? 들어가도 됩니까?""왜."그는 곧장 씻으러 가려다가
"금방이라도 쌀 것 같은데.""그럴 리가."괜히 한 번 도발해 본 거였는데 태연한 척 받아치는 목소리가 사실 조금 멋은 없었다. 목소리가 생각보다 떨렸기 때문이었다. 긴장하고 있지도 않았지만, 그 목소리를 들으니, 마음이 좀 편해지는 것도 같았다."그래요?"그 말이 마치 엄청난 도발처럼 느껴졌다. 얼마나 버틸지 보겠다는 듯이. 도혁은 조금 오기가 생겼지만, 술이 조금 들어간 몸은 그의 의지를 벗어나서 제멋대로 행동하기 시작했다. 최근 몇 년간 성생활과는
"뭐, 근처에도 방은 많으니까요."이 근처엔 널린 게 모텔방이었다. 도혁은 주하의 말에 주변을 살짝 둘러보았다. 날 때부터 도련님이라 이런 곳에 가본 적은 없었다. 물론 갑자기 둘이 택시 타고 호텔을 찾아가는 건 좀 웃긴 것 같기도 했다."흠.""손으로만 해줄 테니까 가려면 가고요.""뭐?"당돌하기 그지없었다. 저보다 2배는 큰 남자를 보면서 하는 말이라고 하기에는. 세상 물정을 모르는가 싶다가도, 무슨 자신감인지 궁금하기도 했
주하는 개강 첫날부터 술을 거나하게 마셨다. 5학년 2학기. 이제 졸업 작품으로 전시회를 마치고, 졸업 논문만 쓰고 나면 길었던 학교생활이 끝난다고 생각하니 왜 그렇게나 술이 당기는지. 학교를 다니는 4년 반 동안 그렇게까지 술을 마셔본 적은 없었다. 건축학과는 제법 술을 많이 마시는 이미지가 있었는데도 주하는 술을 즐기지 않아서, 그렇게까지 마실 일이 없었던 탓이다. 그러니까 그녀는 그날 좀 보기 드물게 취해있었다. 길에서 커다란 남자와 부딪혔을 때, 별생각 없이 고개를 까딱거리며 사과한 건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