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오주하. 생전 처음 들어보는 이름이었지만 기찬은 그게 누구인지 금방 알 수 있었다. 요즘 매일 가는 것 같더니 이젠 안 갈 생각인가. 기찬은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착실하게 답했다. 그는 '그냥 더 이상 아무것도 궁금해하지 말자.'라고 그렇게 자신을 달래고 있었다. 그게 목숨을 지키는 길이었다.
"예...!"
"어. 이 주소로 가서 서 있다가 나오면 학교 잘 가는지 보고, 밤엔 집에 잘 도착했는지까지 확인해. 들키지 말고."엎드려뻗쳐 머리를 바닥에 대고 있는 기찬의 옆으로 작은 종이쪽지 같은 것도 스치고 지나갔다. 캠퍼스에서 그 광경을 못 봤다면, 어떤 불쌍한 사람이 도혁에게 걸린 것으로 생각했을 거다. 하지만 기찬은 그게 아니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네, 형님...!"
기찬은 당연하다면 당연한 말이지만 다른 사람을
"어어??? 8개? 서울에? 엄청 넓어야 하는 거 아니야?""음... 서울 끝자락에 있어서 거의 경기도? 그래도 주인님 학교랑은 20분 정도밖에 차이 안 나요."주하는 도혁에게 불쑥 몸을 내밀었다. 도혁은 오늘따라 이래저래 적극적인 주하를 보며 살짝 웃었다. 그에게 무언가 불만이 있어서 거칠었던 건 아닌 모양이라고, 그런 결론을 한 번 더 낼 수 있을 정도의 몸짓이었다."나 시험 끝나고 가도 돼?""네, 그럼요."다음 주 주말쯤이려나. 도혁은 머릿속으로 달력을 대충 그려보았다. 밥 한 번 사 먹이기 힘들었는데, 집에 오면 직접 한 건 아니어도 밥을 먹일 수 있으니 그런대로 만족스러울 것 같았다. 운이 좋으면 한 두 번 더 올지도 모르고."어... 근데 부모님이랑 사는 거 아니야?""아뇨. 일단은 가족들은 없이 저만 있고, 애들 좀 있어요.""아, 그래? 몇 명이나?"아. 이렇게 되면 애새끼들 다 치울 수가 없는데.도혁은 잠시 고민했다. 진실을 말하고 싶지 않았지만, 거짓말을 하기는 싫었다. 그는 잠깐의 고민 끝에 우물쭈물거리지 않고 진실을 말했다."50명 정도. 근데 뭐, 낮에는 다들 나가고 별로 없을 거예요."적당히 치워놓자. 그렇게 결론을 내린 답변이었다. 주하가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50명이라니. 그렇게 많은 사람이 같이 사는지는 몰랐다. 물론, 한옥에 사는지도 처음 알았고. 알게 된 타이밍이 나쁘지는 않았다. 시험을 다 치고 나면 그래도 여유가 좀 있을 테니까."알았어."주하는 그렇게 말하며 다시 벌러덩 누웠다. 도혁은 그 옆에 다시 따라 누웠다."손.""손?"
"오늘따라 왜 그러셨을까?"도혁은 주하의 옆에 누워 주하의 머리카락을 자신의 손가락에 걸어 배배 꼬며 물었다. 주하가 대수롭지 않게 '뭐가?'하고 대꾸했다. 도혁은 그 대답이 아주 마음에 들었다. 아니, 실은 대답이 문제가 아니라 이렇게 나란히 누워 이야기하고 있는 시간이 좋았다. 매번 섹스가 끝나면 쫓아내기나 하던 사람이 이젠 이런 시간을 허용해 준다는 게 만족스러웠다. 그래서 사실 대화 내용은 크게 중요하지는 않았다."오늘 너무 거칠던데, 우리 주인님이.""그런가."몰랐다고? 도혁은 주하의 얼굴을 살폈다. 정말 모르는지, 모르는 척하는 건지 가늠해 보려고. 누가 봐도 모르는 척하는 시침 떼는 얼굴에 도혁은 피식 웃어버리고 말았다."응, 엄청. 그래서 나 아까 울었잖아요."도혁은 눈물을 흘리는 시늉을 하며 말했다. 주하는 그냥 그런 기분이었나 보다 하며 말을 돌렸다. 도혁은 잠시 고민을 했다. 솔직히 짐작이 가는 이유가 별로 없었다."학교에서 무슨 일 있었어요?""없어. 그런 거."그럼 왜 그랬지? 이유도 없이 그럴 사람이 아닌 것 같아서 도혁은 또 고민을 했다. 그는 손가락 사이를 스치는 그녀의 머리카락을 느끼며 혹시나 하고 입을 열었다."아까 내가 집에 가버려서 화났어요?""아니.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릴 하고 있어."주하는 자신이 조금 오버해서 대답했다는 걸 알았지만 이건 절대로 부정해야만 하는 문제였다. 진실이라고 하더라도 진실로는 만들 수 없는 그런 질문이었기 때문이었다. 이걸 입으로 인정해버리고 나면, 일이 많이 커졌다. 소유욕을 느꼈든 아니든 이건 제정신인 감정이 아니었다. 그래서 입 밖으로 내고 나면 꼭 약점이 될 것만 같았다.도혁
"......하아......"주하는 짧은 숨을 내쉬며 다시 상체를 들었다. 도혁의 혀는 생각보다 더 뜨겁고 축축했다. 리드당하는 느낌은 받고 싶지 않아서 혼자 멋대로 해보려고 했는데, 상상과 현실은 조금 달랐던지라 쉽지가 않았다. 그래도 이만하면 만족스러운 키스였다. 도혁의 눈이 활활 불타고 있었으니까. 스스로는 모르는 모양이지만. 그 뒤는, 평소와 비슷한 듯하면서도 달랐다. 주하는 왠지 조금 거칠게 허리를 움직였다. 그가 앙앙 소리를 내면 씩 웃곤 했던 얼굴도 없었다. 그녀는 굉장히 진지하고 심각한 얼굴로 그에게 박아댔다."하... 응...! 읏...! 너무, 흐으응, 빨라요, 주인님... 아...!""좋으면서. 엄살은."그런가? 사실 주하와 섹스하는 게 싫었던 적은 한 번도 없었긴 했다. 아무리 그게 정신이 없는 일이라고 해도. 그는 오늘따라 거친 그녀를 보며, 저도 조금 가련한 척을 해보기로 하였다."으흐응... 그래도... 너무, 응! 빠른데, 흐읏..."촉촉한 눈을 만들어내는 건 그리 어렵지가 않았다. 강한 자극으로 저절로 눈물이 핑 돌 정도였으니까. 평소보다 조금 연약한 척만 하면 그만이었다. 그러나 주하는 그런 도혁은 가련하게 여겨주기는커녕 조금 즐거워했다."만진 적도 없는데 서 있는 좆을 좀 봐."그건 딱히 페니반 때문만은 아니었는데. 도혁은 살짝 억울한 마음을 숨기고 조금 더 밀어붙여보기로 했다. 그는 여전히 반짝거리는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리고선 허리를 살짝 흔들었다. 딱히 원하는 반응이 따로 있는 건 아니었다. 그냥 주하가 어떻게 나올지, 조금 궁금했을 뿐."큭큭..."예상한 게 있지는 않았는데, 주하가 갑자기 소리를 내서 웃으니 꽤 어리둥절했다. 주하는 의아해하는 도혁을 보고 더 크게
"그럴 필욘 없고. 누워.""네."도혁은 느긋하게 걸어가 침대에 누웠다. 이 수동적인 포지션도 이제는 좀 익숙해져 있었다. 뭘 하면서 이렇게 받기만 해 본 적이 있나 싶다가도, 타인에게 뭔가 준 기억이 별로 없는 것 같기도 했다. 이런 성적인 의미의 이야기는 당연히 아니어도."애기야.""아, 나 또 설레게 하시네."주하는 평소엔 잘 부르지도 않으면서 침대에선 호칭에 관대했다. 기껏 부르는 게 '애기야'인건 좀 어울리지 않긴 했지만 그래도 도혁은 좋았다. 주하에게만 불리는 그 특별한 호칭이."너 누구 거야?""네?"도혁은 살면서 한 번도 자신이 '누구의 것'인지 생각해 본 적이 없다. 그게 '나는 내 거야.'같은 의미는 아니었다. 그냥, 정말 생각해 볼 이유가 없었다. 누구의 소유든 아무런 문제가 없으니까. 물론 그는 금세 이 질문의 정답을 눈치챌 수 있었다. 그러니까 그녀가 무슨 대답을 원하는지는 바로 알았다. 되물었던 건 그냥 좀 갑작스러운 질문이라서 그랬을 뿐이었다. 그런데 주하는 도혁이 다시 입을 열기 전에 말을 이었다."아냐. 지금은 대답하지 마."늦었나? 도혁은 잠시 심각한 표정이 되었다. 그러나 이내 웃음을 다시 참아야 했는데, 그녀가 진지하게 그의 손목을 넥타이로 묶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자신에게 빌려간 넥타이로 자신의 손목을 묶느라 별 말이 없는 주하를 가만히 쳐다보았다. 핸드폰을 뭘 그렇게 들여다보나 했더니. 그녀는 그의 손목을 다 묶고서 태평하게 침대 밑으로 내려갔다. 그는 슬쩍 손목을 움직여보았다. 이렇게 헐겁고 느슨한 걸로 어떻게 사람을 고정시켜 놓는다는 건지. 주하가 조금 귀여웠지만 그는 티 내지 않고 얌전히 묶여있었다.평소였다면 도혁의 애널에 손가락부터 밀어 넣었을
주하는 지금껏 자신의 집중력을 의심해 본 적이 없었다. 지난 9학기를 보내는 동안 6학기 동안 과탑을 했던 건, 9할이 집중력 때문이었으니까. 그러니까 주하는 지금 도대체 왜 자신이 도혁을 생각하느라 아무것도 못하고 있는지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는 그저 부모님이 불러서 집에 갔을 뿐인데, 왜 이렇게 미묘한 기분인건지도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물론이었다.'미쳤나...'주하는 머리를 헝클어트렸다. 자신이 근래 조금 이상하다는 것은 물론 자각하고 있었지만, 이런 기분이 드는 건 진짜 이상했다. 도혁이 자신의 것도 아닌데. 내 거? 주하는 문득, 이게 말도 안 되지만 '소유욕'이라는 것을 자각했다.'또라이네, 또라이...'주하는 결국 책상에서 벌떡 일어났다. 시험기간이고 뭐고, 이런 기분으로 앉아있어 봤자 시간만 갈 뿐이었다. 최근에 이랬던 적이 처음은 아니었던지라 한숨이 나왔지만 그래도 그런 생각은 그만하기로 했다.그녀는 한 손에는 꽃다발을, 한 손에는 핸드폰을 쥐고 집을 향해 터덜터덜 걷기 시작했다. 이미 낭비한 시간이 제법 되었다. 잠시 집에서 쉬다가, 책을 조금 들여다보고 일찍 잘 생각이었다. 그게 내일의 컨디션을 위해서 더 나은 결정이었다.그녀는 걸으면서 핸드폰을 들여다봤다 내려놓기를 반복했다. 도혁에게 문자를 할지 말 지 고민이 되었다. 문자를 하자니 딱히 할 말이 없고, 안 하자니 허전하고. 그때, 핸드폰이 울렸다. 여전히 '아저씨'라고 저장된 번호로. 주하는 눈을 잠깐 깜빡이며 바라보다가 천천히 전화를 받았다."여보세요?"'학교예요?'"음... 집에 가는 길."그녀는 잠시 걷던 걸음을 멈춰 서며 대답했다. 뭐 이렇게까지 솔직하게 대답할 필요가 있었나 싶다가도, 거짓말을 할 이유는 없었으니.&nbs
"요즘 바쁘다며? 그래도 가끔 와."도혁은 와락 안기는 어머니의 등을 조용히 두드리며 알겠다고 대답했다. 전혀 평범하지 않은 가정환경이었지만, 그래도 멀쩡히 나이를 먹은 건 다 어머니 덕분이었다. 그는 그걸 늘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조직 내의 분위기가 유해진 것도 어머니의 영향이었고, 끝내 그가 모든 것을 정리할 수 있는 것도 그런 것들의 연장선이었으니까."웬일로 요리를 하셨어요. 전 그냥 아무거나 먹어도 되는데, 고생이시잖아요."도혁은 자신의 어머니를 주방으로 이끌며 다정히 말을 건네었다."너야말로 무슨 바람이 불어 꽃이야? 응?"도혁은 은근히 웃으며 물어보는 어머니에게 '그냥 갑자기 생각이 나서요.'하고 대꾸했다. 이 정도에 당황할 거였으면 절대 이곳에 오지 않았을 것이다."내가 너무 갑자기 불렀지? 밥만 먹고 얼른 가 봐.""아니에요."도혁은 아니라고 대답했지만 괜히 시계를 찾게 되었다. 주하 성격상 시험기간이라 공부를 하는 거면 또 새벽까지 학교에 있으려고 할 텐데 어쩌면 다시 학교에 찾아가 볼 수도 있을 것 같았다."많이 먹어. 응?""두 그릇 먹을게요."도혁은 그렇게 말하며 아버지와 눈이 마주쳐서 짧게 고개를 숙였다. 그의 아버지는 늘 그에게 잘해주긴 했지만, 두 사람은 그렇게 살가운 사이는 아니었다. 여느 가정처럼 사춘기 즈음 심리적으로 멀어지기도 했고, 그도 그다지 사근사근한 타입은 아니니까."무슨 꽃을 보내서 네 엄마를 고생을 시켜.""당신도 참! 도혁이한테 쓸데없는 이야기를 해. 얼른 먹기나 해.""흠!"도혁의 아버지에게 1순위는, 늘 도혁의 어머니였다. 그는 자신의 아버지가
도혁은 뭐라고 저장해야 할지 몰라 저장도 못한 11자리의 핸드폰 번호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취할 정도로 마신 건 아니라지만, 아침이 되니 정신이 돌아온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는 사실 무슨 생각으로 번호를 받아왔는지 정확히 기억나질 않았다. 대체 그 여자랑 뭘 하겠다고. 짧은 해프닝으로 끝내면 그만이었다. 그는 그렇게 다짐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쩌면 어제를 기점으로 성욕이 돌아왔을지도 모를 일이었다."형님! 계십니까? 들어가도 됩니까?""왜."그는 곧장 씻으러 가려다가
"금방이라도 쌀 것 같은데.""그럴 리가."괜히 한 번 도발해 본 거였는데 태연한 척 받아치는 목소리가 사실 조금 멋은 없었다. 목소리가 생각보다 떨렸기 때문이었다. 긴장하고 있지도 않았지만, 그 목소리를 들으니, 마음이 좀 편해지는 것도 같았다."그래요?"그 말이 마치 엄청난 도발처럼 느껴졌다. 얼마나 버틸지 보겠다는 듯이. 도혁은 조금 오기가 생겼지만, 술이 조금 들어간 몸은 그의 의지를 벗어나서 제멋대로 행동하기 시작했다. 최근 몇 년간 성생활과는
"뭐, 근처에도 방은 많으니까요."이 근처엔 널린 게 모텔방이었다. 도혁은 주하의 말에 주변을 살짝 둘러보았다. 날 때부터 도련님이라 이런 곳에 가본 적은 없었다. 물론 갑자기 둘이 택시 타고 호텔을 찾아가는 건 좀 웃긴 것 같기도 했다."흠.""손으로만 해줄 테니까 가려면 가고요.""뭐?"당돌하기 그지없었다. 저보다 2배는 큰 남자를 보면서 하는 말이라고 하기에는. 세상 물정을 모르는가 싶다가도, 무슨 자신감인지 궁금하기도 했
주하는 개강 첫날부터 술을 거나하게 마셨다. 5학년 2학기. 이제 졸업 작품으로 전시회를 마치고, 졸업 논문만 쓰고 나면 길었던 학교생활이 끝난다고 생각하니 왜 그렇게나 술이 당기는지. 학교를 다니는 4년 반 동안 그렇게까지 술을 마셔본 적은 없었다. 건축학과는 제법 술을 많이 마시는 이미지가 있었는데도 주하는 술을 즐기지 않아서, 그렇게까지 마실 일이 없었던 탓이다. 그러니까 그녀는 그날 좀 보기 드물게 취해있었다. 길에서 커다란 남자와 부딪혔을 때, 별생각 없이 고개를 까딱거리며 사과한 건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