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손님맞이를 그렇게 해놓고 무슨 상을 받아?"
급조한 변명이었다. 얼마나 먹힐지 모르겠는, 그런 변명. 오늘은 도저히 할 자신이 없었다. 이건 두 번째 도망이었다. 그걸 알면서도 주하는 도망을 선택해버리고 말았다.
"아, 니..."
주하가 급조해 낸 변명인지 뭔지, 도혁은 전혀 알지 못했다. 그에게 중요한 건 상이 없어질 수도 있다는 사실 그 자체뿐이었으니까. 그는 대체 무슨 말을 해야 상이 되돌아오는지 그것만이 궁금했다.
"그건, 제가 잘못했는데요-..."
너무 구질구질한가? 도혁은 말을 하다 말고 멈추었다. 그 건에 대해서는 이미 벌을 받았으니 상이랑은 상관없는 거 아니냐고, 그렇게 말해봐야 할 것 같은데 입이 열리질 않았다. 주하가 이미 결정한 일을 번복할 리가 없어 보여서. 그렇다면 지금까지처럼 얌전히 고분고분 굴어야 다음 기회가
오와 열을 맞추고, 뒷짐을 진 채 서 있는 조직원들을 보며 주하는 조금 부담스러워서 머리를 긁적였다. 그들은 굉장히 긴장한 채로 서서 오로지 주하만을 보고 있었다. 그녀의 옆에 도혁이 서 있는데도 불구하고. 도대체 이 조직의 보스가 누구인지 헷갈릴 지경이었다."그... 뭐... 당분간 좀 신세 지겠습니다. 오주하입니다."사실 요즘 자주 들락날락했던 터라, 다들 주하를 꽤 익숙하게 생각하고 있긴 했지만 어쨌든 (잠깐이라고 해도) 정식으로 함께 살게 되었으니 인사를 하는 게 맞는 것 같다는 도혁의 말에 이런 꼴이 되고 말았다."말씀 편하게 하십쇼!""저희가 뭐라고 부르면 좋겠습니까?""주...인님...이라고 부를 순 없을 것 같고..."'주'까지만 말했는데도 눈을 부라리는 도혁 때문에 부하 한 명이 우물쭈물하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어딜 감히 그 호칭을 부르려고. 그런 눈이었다. 주하는 도혁이 옆에서 뭘 하고 있는지 알았지만 내버려두었다. 그래도 나름 카리스마 넘치는 보스일 텐데 괜히 부하들 앞에서 그의 자존심을 더 긁지는 않으려고. 게다가 오늘은 정말 전체 다 온 것 같고."말은 편하게 할 생각은 없고요. 뭐. 아무렇게나 부르시면 됩니다. 주인님이란 호칭은 하지 말고요. 애기도 아니고, 그렇게 부르시면 좀... 징그러울 것 같아서."그들은 소문으로만 들었던 '애기'란 호칭이 그녀의 입에서 진짜로 나오자 조금 웅성거렸지만 금세 잦아들었다. 그 와중에 주하가 주인님 호칭을 허락하지 않자 뿌듯해하는 도혁은 덤이었다."호, 호칭을 정해주시면 저희가 조금 더 편하게......가 아니라... 정중하게... 부를 수 있을 것 같습니다...!"다들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주하는 수십 개의 눈이 부담스러워 차라리 도혁을 보기로 하고, 시선을 돌렸다."으음...
"오늘 좀 늦었네요?"짐을 싸다가 쓰러지듯 잠든 탓에 늦잠을 잤다. 밥도 제대로 못 먹어서 기력도 없었고. 하지만 주하는 티 내지 않았다. 그냥 좀 바빴다고 둘러댔다. 아침부터 할 일이 뭐가 있어서 바빴는지, 도혁은 물어보지 않았다. 주하는 다시 물어보지 않는 도혁이 이상하지 않았다. 그녀는 그저 평소처럼 자신의 자리에 앉았다. 회의실 정중앙에. 어느새 놀랍도록 익숙해져 있었다."점심은 이따 여기서 먹을 거죠?""응."사실 지금도 배가 고팠지만 그 또한 내색하지 않았다. 아침 같은 건 안 먹는다는 것쯤, 도혁도 잘 아는 일이니까. 노트북을 열어서 이것저것 타이핑을 시작하니 도혁이 방해하지 않겠다는 듯 입을 다물었다. 그렇다고 멀어진 건 아니었다. 그는 항상 몇 걸음 떨어진 곳에서 그녀를 지켜보곤 했으니까. 처음엔 부담스럽던 그 시선도 지금은 회의실의 자리만큼이나 익숙했다. 아무렇지 않게 과제를 계속할 수 있는 것도 그런 이유였다.과제에 집중하고 있다 보면 책상에 무언가 올라오기 시작했다. 커피나 과일, 과자, 빵 같은 것들이었다. 도혁이 가져오는 건 아니고, 누군가가 준비를 해주는 것처럼 보였다. 그녀는 그게 다 그의 명령 때문이라는 것을 몰랐다."고마워."무심한 인사였다. 눈길 한번 안 주는. 주하는 하는 일에 집중하다가 쳐다도 보지 않고 종종 입에 밀어 넣었다. 하지만 괜찮았다. 어쨌든 그녀가 먹으니까. 여기선 커피가 얼마냐는 둥 따지지 않으니까. 일부러 고급 원두만 골라서 썼다. 그녀는 자신의 입에 들어가는 롤케이크가 한 조각에 얼마인지 안다면 먹지 않을 테니까 일부러 아무 말도 안 했다. 괜히 시선을 뺏었다가 쓸데없는 질문을 받고 싶지 않았다. 그녀가 물어보면 거짓말 따위 못 할 것이 뻔해서. 그래서 그는 그 무심한 인사가 좋았다.또 하루가 가고 있었다. 평범하게. 도혁이 집에 가려는 주하에게
그때, 주하의 핸드폰이 지잉하고 울렸다. 주하와 도혁의 시선이 동시에 핸드폰으로 꽂혔다. 저장이 되어있지 않은 번호. 그런데 어딘지 모르게 한 번쯤 본 것 같은 기시감이 들었다. 주하는 한참 내려다보다가 핸드폰을 들어 전화를 받았다. 평소라면 모르는 번호를 받지 않았을 텐데, 기분이 묘해서."여보세요?"'오주하 씨? 저 건물주입니다.'건물주? 그런 사람이 왜 전화가 오지?주하는 저도 모르게 도혁을 올려다보았다. 도혁이 아무렇지 않게 그 시선을 마주 보았다. 왠지, 지금 이 남자가 있으면 안 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주하는 짧게 눈짓했다. 도혁은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회의실을 나갔다."네, 무슨 일이시죠?"'엘리베이터에 공지 붙여놓은 거 보셨죠?'엘리베이터. 공지. 주하는 흰색 종이 한 장을 떠올렸다. 무슨 내용이었는지 기억을 더듬어보는 것도 잊지 않았다. 매일 보는 종이지만 처음 읽은 이후로는 눈길도 안 줬던 탓에 정확하게는 기억이 안 났다. 무슨 공사를 한다고 했었던가. 건물 철거. 그런 내용이 있었던 것 같기도 하고. 제법 중요한 내용인데도 확실하게 기억하지 못하는 이유는, 공사 시작 시기가 1월로 되어있었기 때문이었다. 졸업은 못 했어도 이미 학기는 끝나있을 시점이니까. 그건 졸업반인 그녀에게 그렇게 중요한 내용이 아니었다."네, 봤는데요."'그게 좀 일정이 당겨져서, 나가주셔야 할 것 같습니다.'"...네? 아니, 아무리 그래도 갑자기 그러시면..."아직 10월. 일주일에 한 번 뿐이라고는 해도 수업이 있고, 과제도 해야 했다. 학교 앞의 다른 원룸으로 가자니 2달만 더 지내면 되는데 1년 계약을 하기에도 애매했다. 다른 곳으로 가자니 어디로 취업할지도 모르는데 대뜸 계약하기도 그렇고. 이 보증금으로 학교 앞 말고 어딜 갈 수 있을지도 모르는데. 고시원이라도 가야 하나. 주하의 머릿속이 팽팽 돌아가
"오셨어요?""아. 응."미치겠네. 안 그래도 잘생긴 남자는, 마음을 자각하고 나니 훨씬 더 잘생겨 보였다. 게다가 눈이 마주치면 항상 저렇게 웃어대니 심장이 주체를 못 하는 게 어쩌면 당연했다. 게다가 막 씻고 나와서 왠지 촉촉해 보이기까지 하니. 망할. 저 인간 때문에 내 눈만 높아져서, 앞으로 어떡하지? 주하는 참 쓸데없는 걱정을 했다."훔쳐본 새ㄲ... 놈들은 다 쫓아낼게요.""놔둬. 궁금한가 보지."욕하지 말랬다고 말을 정정하는 것마저 기특해 보였다. 인생이 망하려면 이런 식으로도 망할 수 있다는 걸, 주하는 뼈저리게 깨닫고 있었다."오늘은 어디 보시려고요?""사랑채로 가려고."주하는 자신이 평소와 똑같이 굴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눈치 빠른 남자이니 분명 이상하게 굴었다면 물어봤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밖엔 없는 것이었다."아. 자리 만들어놨어요.""응. 들었어."자랑 좀 신나게 하려고 했더니 박기찬 새끼가 선수를 쳐?도혁은 그런 생각을 했지만 주하와 눈이 마주치고서는 그저 싱긋 웃었다. 도혁은 주하에게 잘 보일 생각 밖에 없어서, 그녀가 평소와 다른 것은 눈치채지 못했다. 주하는 원래도 표정이 많은 편은 아니고 종종 '잘생기긴 했네.'같은 표정을 짓기도 했기에 이상한 것을 눈치채기란 제법 어려웠다."여기예요.""어... 고마워."회의실 한 구석도 아니고, 정중앙에 그녀의 자리라고 떡하니 만들어진 곳은, 인테리어를 해치지 않는 선에서 깔끔하게 완성되어 있었다. 책상 위에 지난번에 까먹고 안 들고 간 메모 몇 장이 올려져 있었다. 그리고 새로운 노트, 펜, 스탠드 등이 줄 맞추어 놓여있었다.&nb
하. 주하는 한숨을 푹 쉬었다. 망할.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그런 생각을 해봐도 언제부터인지는 알 길이 없었다. 얼굴에 홀렸다는 자각이야 있었지만, 마음까지는 절대 안 주리라 생각했었다. 그야, 자신 같은 대학생쯤은 유희일 것이 뻔한 남자니까. 그녀는 상처받는 건 자신뿐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제와 생각해 보면 그와 섹스하는 게 두려운 이유도, 그를 좋아하게 되어버려서 인 것 같았다. 한 번 자고 나면 그 고분고분한 사람이 다른 사람이 되어버릴까 봐. 그렇게 아무렇지 않게 이 사이가 끝나버릴까 봐. 이미 좋아하게 되어버린 건 도대체 어떻게 하면 좋은 건지. 주하는 책상에 머리를 쾅 박으며 엎드렸다. 일단은 이 마음을 들키지 않는 게 중요했다. 늘 가벼운 척 해대며(분명 첫 만남엔 안 그랬다.) 속내를 숨기고 있는 남자에게, 이런 마음을 들킬 수는 없었다. 분명히 저를 가지고 놀 테니까. 모르긴 몰라도 그녀와의 섹스가 너무 하고 싶은 건 확실하니, 그걸 어떻게든 이용해 보는 게 나을까."......"주하는 눈을 감았다. 도망갈 생각이 있는 건 아니었다. 그렇다고 꼬셔볼 생각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지금은 생각해야 할 것이 너무 많았다. 들키지 말고 유지만 하자. 그게 주하의 결론이었다. 과제와 논문 때문에 그 집에 몇 번 더 가기로 했으니, 핑계는 괜찮았다. 사진도 아직 부족하고, 전체적인 구조도 다 파악 못한 데다가, 누마루도 아직 신경 쓰이니까. 심지어 지도교수님도 현장에 다시 다녀오라고 했다. 주하는 몸을 벌떡 일으켜 시계를 보았다. 기찬이 데리러 오기로 한 시간이 다 되어가고 있었다. 그녀는 나가기 전에 저도 모르게 거울을 한 번 확인했다. 평소와 다르지 않게. 그렇게 생각은 했지만 삐져나온 머리마저 조금 신경이 쓰였다. 미친 게 틀림없다니까. 주하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집을 나섰다."모시러 왔습니다."기찬은 이미 주하의 집 앞이었다. 당연하게도 도혁이 데리러
"손님맞이를 그렇게 해놓고 무슨 상을 받아?"급조한 변명이었다. 얼마나 먹힐지 모르겠는, 그런 변명. 오늘은 도저히 할 자신이 없었다. 이건 두 번째 도망이었다. 그걸 알면서도 주하는 도망을 선택해버리고 말았다."아, 니..."주하가 급조해 낸 변명인지 뭔지, 도혁은 전혀 알지 못했다. 그에게 중요한 건 상이 없어질 수도 있다는 사실 그 자체뿐이었으니까. 그는 대체 무슨 말을 해야 상이 되돌아오는지 그것만이 궁금했다."그건, 제가 잘못했는데요-..."너무 구질구질한가? 도혁은 말을 하다 말고 멈추었다. 그 건에 대해서는 이미 벌을 받았으니 상이랑은 상관없는 거 아니냐고, 그렇게 말해봐야 할 것 같은데 입이 열리질 않았다. 주하가 이미 결정한 일을 번복할 리가 없어 보여서. 그렇다면 지금까지처럼 얌전히 고분고분 굴어야 다음 기회가 올 것만 같아서."...알겠어요."도혁의 수긍에 주하는 몰래 숨을 골랐다. 이런 모습을 보면 섹스쯤이야 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했는데, 아무튼 오늘은 아니었다. 마음의 준비가 덜 됐다. 아까 문전박대당한 것도 아예 영향이 없지는 않았다. 기껏 잔뜩 긴장하고 왔다가 열받은 채로 되돌아가면서 섹스 생각을 잊어버렸으니까."......."잠시 방에 짧은 정적이 흘렀다. 도혁은 자신의 침대 위에 앉은 주하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상을 줄 것도 아니면서, 왜 사람 설레게 여기까지 와선 아무렇지 않게 남의 침대에 앉은 건지. 주하의 뒤를 따라다니며 한껏 했던 상상들이 물거품이 되었으니, 억울한 마음이 한 번에 다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기다릴게요.""뭐?""다음에 상 주실 때까지 얌전히 기다린다고요."아예 주지 않겠
"어때? 가족 때문에 빚이 좀 있긴 한데, 학교 선생님이야. 괜찮아."도대체 뭐가 어떻냐는 건지. 도혁은 술병을 빼앗아 자신이 따르고, 병은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그리곤 단숨에 한 잔을 다 마셨다. 술이 조금 들어가면 어제와 같은 상태가 될지도 몰랐다."지금까지와는 좀 다른 스타일로 준비를 해본 건데?"하지만 도혁의 옆에 앉은 사람은 그를 쳐다보지도 못하고 덜덜 떨고 있었다. 여기서 소개팅하겠다는 건 아니었기에 그는 그저 술잔을 내려놓으며 잠시 숨을 골랐다. 하룻밤. 그
도혁은 뭐라고 저장해야 할지 몰라 저장도 못한 11자리의 핸드폰 번호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취할 정도로 마신 건 아니라지만, 아침이 되니 정신이 돌아온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는 사실 무슨 생각으로 번호를 받아왔는지 정확히 기억나질 않았다. 대체 그 여자랑 뭘 하겠다고. 짧은 해프닝으로 끝내면 그만이었다. 그는 그렇게 다짐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쩌면 어제를 기점으로 성욕이 돌아왔을지도 모를 일이었다."형님! 계십니까? 들어가도 됩니까?""왜."그는 곧장 씻으러 가려다가
"금방이라도 쌀 것 같은데.""그럴 리가."괜히 한 번 도발해 본 거였는데 태연한 척 받아치는 목소리가 사실 조금 멋은 없었다. 목소리가 생각보다 떨렸기 때문이었다. 긴장하고 있지도 않았지만, 그 목소리를 들으니, 마음이 좀 편해지는 것도 같았다."그래요?"그 말이 마치 엄청난 도발처럼 느껴졌다. 얼마나 버틸지 보겠다는 듯이. 도혁은 조금 오기가 생겼지만, 술이 조금 들어간 몸은 그의 의지를 벗어나서 제멋대로 행동하기 시작했다. 최근 몇 년간 성생활과는
"뭐, 근처에도 방은 많으니까요."이 근처엔 널린 게 모텔방이었다. 도혁은 주하의 말에 주변을 살짝 둘러보았다. 날 때부터 도련님이라 이런 곳에 가본 적은 없었다. 물론 갑자기 둘이 택시 타고 호텔을 찾아가는 건 좀 웃긴 것 같기도 했다."흠.""손으로만 해줄 테니까 가려면 가고요.""뭐?"당돌하기 그지없었다. 저보다 2배는 큰 남자를 보면서 하는 말이라고 하기에는. 세상 물정을 모르는가 싶다가도, 무슨 자신감인지 궁금하기도 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