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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화

Author: 정대천
"작은 마님, 작은 마님..."

귀에 익은 여인의 목소리가 신수빈의 귀를 뚫고 들어왔다.

‘어머님을 모시던 이의 목소리였던 것 같은데...'

"다들 작은 마님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큰 마님 측에서 이미 여러 번 재촉을 해오셔서 서둘러 가셔야 합니다. 그리고 큰 마님께서 이 혼사는 폐하께서 친히 내리신 혼사이니 작은 마님께서 마음이 편치 않으시더라도 오늘만큼은 부디 후부의 체면을 위해 첩실차(妾室茶:새로 들어온 첩이 올리는 차)를 들라 하십니다."

내실에 들어선 오상댁은 아직 꾸미지 않은 신수빈의 모습에 몸종들을 꾸짖기 시작했다.

"뭣들 하는 게냐? 어서 작은 마님의 치장을 돕지 않고! 나리께서 새 부인을 맞이하는 길시를 놓친다면, 네들 명줄을 내놓아야 할 것이야!"

그렇게 얼떨결에 신수빈은 꼭두각시 인형처럼 하인들에 둘러싸여 꾸며졌다. 능화경(菱花鏡:일종의 거울)에 비친 그녀의 눈동자는 한없이 맑았다. 의아함에 신수빈은 손을 들어 자기 얼굴을 매만져봤으나 불에 그을린 흉은커녕 오히려 살결이 부드러웠다.

'설마... 환생이라도 한 거야? 윤서원이 첩을 들인 그날로?'

아직 상황 파악이 되지 않은 신수빈은 어느새 끌려가다시피 전청(前廳:현관홀)에 당도해 있었고 밖에서 터지는 폭죽 소리에 겨우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화려한 등불 사이로 남녀가 붉은 비단을 손에 잡은 채 서서히 전청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그렇다.

모든 액운의 시작은 이날부터였다.

혼인한 지 불과 석 달 만에, 이재민을 구하러 나간 윤서원은 태후의 손에서 자란 서화 군주와 대전 앞에서 무릎을 꿇고, 서로 진심으로 사모한다고 말했었다.

그야말로 일파만파였다.

갓 혼인한 정실 신수빈은 권세 있는 가문 출신은 아니었지만, 신씨 가문은 전조(前朝:전대의 왕조) 때부터 이미 나라를 대적할 만큼 부유했고, 지금의 신조에 돈과 식량을 줄곧 제공해 온 집안이었다. 비록 봉작은 얻지 못 했지만 조정에서 해금을 해제한 뒤 바다로 나가는 특권을 신씨 가문에게 내린 덕에 남쪽의 관원들조차 그들에게 아부를 떨어야 했다.

그랬기에 신씨 가문의 사람들은 이런 모욕을 절대 용납할 수 없었다.

게다가 윤서원은 신수빈을 부인으로 맞이하기 위해, 신씨 가문 저택 앞에 무릎을 꿇고, 이번 생은 오직 그녀만을 사랑하겠노라 하늘에 맹세한 바 있었다. 그 맹세에 신씨 가문 사람들은 독녀인 신수빈과의 혼인을 허락한 것이다.

그러나 혼인한 지 고작 석 달 만에 윤서원이 다른 여인과 함께 조정의 대전 앞에서 서화 군주를 사모한다고 말할 줄 그 누가 알았을까.

어린 황제는 아직 세상 이치를 알지 못했다. 그의 귀에 맴도는 소리는 오직 노발대발하는 태후의 목소리와 신하들의 의논 소리뿐이었다.

주서화를 아꼈던 태후는 그녀를 평처(平妻:정실은 아니지만 정실에 준하는 부인)로 올려, 정실부인인 신수빈과 나란히 하길 바랐으나 대신들과 백성들의 항의에 결국 주서화의 군주 칭호를 박탈하고 평양후 세자의 귀첩(贵妾:일반 첩보다 귀한 신분)으로 혼인을 하사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제아무리 칭호를 박탈한다고 한들, 혼례는 여전히 예부가 나서서 주관하였기에 공주의 혼례와 다를 게 없었다.

이는 태후의 뜻을 고스란히 보여줬고 감히 그런 귀첩을 함부로 대할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문득 전생에 혼령으로 지낼 당시, 주서화가 털어놓던 혼인날 합방의 진실과 그녀가 집으로 들어온 후 저지른 일들이 떠오른 신수빈의 눈에는 독기로 가득 차 있었다.

'악귀가 되더라도, 이번 생은 내 반드시 이 가문 사람들과 함께 지옥으로 가겠어!'

곧 천지 신령님께 절을 올린 윤서원과 주서화가 신수빈의 앞으로 다가왔다.

윤서원의 무정함과 득의양양해하던 주서화의 표정, 그리고 뜨거운 불길 속에서 살려달라는 애원하던 어린 자식의 모습.

그 모든 게 눈앞에 아른거리자 신수빈의 두 눈은 점차 핏기가 서리고 가슴에서 분노가 들끓기 시작했다. 신수빈은 차오르는 역겨움에 순간 목구멍에서부터 비릿한 냄새와 함께 피가 솓구쳤지만 그녀는 애써 다시 삼킬 수밖에 없었다.

대가문의 어두운 면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던 그녀는 오늘 같은 날 그 어떤 흠 잡힐 일도 하면 안 되었다. 그랬다가는 오히려 광증으로 몰려 갇힐 게 뻔했고 이를 빌미로 신씨 가문을 착취할 것도 뻔했다.

윤서원은 재해 구역에서 돌아온 뒤, 주서화와의 혼인으로 바삐 돌아쳤기에 오늘 신수빈을 처음 보는 것이었다.

화청(花廳:화원 등에 설치된 비교적 크고, 아름답게 장식된 응접실)에 앉은 그녀는 얼굴에 엷은 분칠을 했음에도 기품이 화려해 봄빛처럼 밝게 빛났고, 고개를 살짝 숙여 내려트린 눈매마저 청초해 보였다.

화려한 옷차림의 주서화도 그런 그녀에게 반도 못 미칠 정도였으니, 신수빈의 미모는 실로 아름다웠다.

천하 으뜸 가는 미녀라는 칭호는 역시 괜히 붙은 별명이 아니었다.

하지만 신혼 첫날밤을 떠올린 윤서원은 이내 눈빛이 어두워지더니 눈에 경멸의 빛이 떠올랐다.

반면, 무릎을 꿇은 채 하인에게서 차를 받아 든 주서화는 버들개지처럼 부드러운 목소리를 내뱉었다.

"언니, 차를 올리겠습니다."

전생의 신수빈은 질투와 억울함에, 분을 이기지 못하고 차를 받아들이지 않았었다. 그를 본 윤서원은 여린 몸의 주서화가 무릎을 오래 꿇고 있지 못한다며, 난처하게 굴지 말라 했었다.

그 한마디에 경중에 소문이 무성해졌다. 신수빈이 질투심에 태후의 체면도 세워주지 않고, 공공연히 서화 군주를 괴롭힌다고.

환생한 지금의 신수빈은 여전히 차를 주서화의 얼굴에 들이붓고 싶었다. 하지만 이성의 끈이 그녀를 말렸고, 그녀는 한 손으로 찻잔을 든 채 주서화를 일으켜 세우며 웃는 얼굴로 응했다.

"앞으로 한 집식구이니, 이리 예를 차릴 필요 없다. 회임한 지 두 달이나 된 몸으로 무리하지 말고 어서 일어나거라. 복중에 태아가 더 중요한 법이지 않느냐."

얼굴이 삽시에 창백해진 주서화가 놀란 눈으로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 그걸 어찌 아셨습니까?"

그러다 이내, 실언했음을 깨닫고 재빨리 말을 덧붙였다.

"언니, 그런 말을 어찌 함부로 하십니까? 전 결백한 몸으로 이 집안에 시집온 것입니다. 근데 어찌 절 이리 욕보이시는 겁니까?"

말을 마친 주서화가 눈물을 훔치며 다시 울먹였다.

"저도 압니다. 언니께서 태후마마가 하사하신 이 혼사를 아니꼽게 여긴다는 것을요. 하지만 저와 오라버니는 진심으로 서로 연모하고 있습니다. 제가 군주라는 칭호를 마다하고, 첩실로 들어왔는데도 정녕 제가 마음에 들지 않으신 겁니까? 그래서 이리 절 욕보이시는 겁니까?"

전생에 주서화와 함께 지낸 몇 해 동안 신수빈은 그녀의 얕은수를 진작에 파악해 왔었다. 주서화는 늘 이런 수단으로 사람들의 동정을 사곤 했었으니.

아니나 다를까, 주변에서 구시렁거리는 손님들의 목소리가 하나둘씩 들리기 시작했다.

"회임한 지 벌써 두 달이라니. 그때는 정실부인과 혼인한 지 얼마 안 된 시점이지 않소?"

"어디 그뿐이오? 그때는 나리가 남쪽에서 수해복구를 하고 있을 때고, 백성들이 가장 어려움을 겪고 있을 때잖소. 그런데 어찌 저런 망측한 짓을..."

"서화 군주는 정원왕의 자손인 데다 태후마마의 손에서 자란 귀한 분이신데, 그런 일을 저지를 사람으로 보이진 않소."

"옳소. 저 정실부인이 탐탁지 않은 마음에 거짓 발언으로 군주의 명성을 더럽히고 있을 줄도 모르잖소."

사람들의 의논에 따라 상황은 점점 뒤바뀌고 있었다.

"그러냐?"

신수빈이 짐짓 놀란 듯했고, 맑디맑은 눈망울에는 의혹으로 가득 차 있었다.

"난 서방님께 들은 얘기를 그대로 했을 뿐인데 거짓일 리가? 나와 혼례를 올린 뒤로 서방님께서는 재해 구역으로 바로 떠나셨다. 서방님께서는 너의 애틋한 마음을 헤아려, 천리를 달려 널 만나러 갔다가 아이가 생겼다고 하던데... 날짜를 따져보면 지금쯤 아마 두 달 하고 보름은 되었겠구나."

"부끄러워할 필요 없다. 이젠 한 집 식구인 마당에 내가 너희 모자를 잘 돌볼 테니."

주서화가 도움의 눈길로 윤서원을 바라봤다. 연약하고 무력한 그 눈빛은 마치 왜 연관 없는 사람에게 이 일을 알렸는지 그에게 캐묻는 것 같았다.

그런 그녀의 뜻을 알아챈 윤서원이 미간을 찌푸렸다.

"내가 언제 그런 말을 했다는 거냐?"

그 말에 모든 손님이 일제히 신수빈을 바라봤다.

사람들의 시선 속에 신수빈이 자책하듯 서서히 입을 열었다.

"얼마 전, 전 관례대로 어머님께 문안드리려고 마당에서 기다리고 있었으나 날이 더운 탓에 그만 정신을 잃고 말았습니다. 눈을 떴을 때는 몸종들에 의해 안방으로 옮겨진 뒤였고, 정신이 들 때쯤 우연히 서방님과 어머님의 대화를 듣게 된 것입니다."

"다 제 탓입니다. 제가 미리 알았더라면 진작에 서화를 데려와 돌봤을 텐데... 그럼, 저들 모자가 이 더운 날에 명분도 없이 서방님을 따라 돌아다니지도 않았을 테죠."

예상치 못한 답변에 윤서원을 포함한 윤씨 가문 사람들의 안색이 달라졌다. 자리에 있던 손님들도 어리석은 자들은 아니었기에, 단연 신수빈의 말뜻을 이해할 수 있었다.

"온 집 식구가 이 사실을 알고도, 본처를 속였다는 말 아니요?"

"평소에 자애로워 보이던 평양후 큰 마님이 며느리를 이리 가혹하게 대할 줄이야."

"게다가 한 해 중 제일 더운 이 유월에 며느리를 마당에 저리도 오래 세우다니! 관례대로라고 하는 걸 보니 분명 하루이틀 아니었을 테죠."

"저 작은 마님도 참으로 가엽지... 혼례를 올린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구박을 받고 살다니. 사람을 이리 대할 거였으면 애당초 떠들썩하게 구혼은 왜 한 것인지."

"그건 자네가 몰라서 그렇네. 저 작은 마님의 친정댁은 우리 대주 왕조에서 제일가는 부자일세. 섭정왕께서 남하하여 반란을 평정했을 당시, 신씨 가문에서 군자금과 기계, 병마, 식량은 물론 돈까지 전폭적으로 지지했다지."

"나도 그 얘기는 들은 적 있소. 섭정왕께서 천하를 평정한 뒤로 남쪽에서 장사를 더 크게 한다 들었소. 게다가 지금은 바다로 나가는 특권까지 쥐고 있어 국고를 능가하는 부를 갖고 있다 하오. 어쩌면 이 점을 노리고 혼례를 올린 것은 아닐지..."

사람들의 의논 소리가 다시 한번 울려 퍼졌고, 그들이 하는 말 한마디 한마디가 윤서원의 정곡을 찔러댔다.

애당초 신수빈과 혼인한 목적이 바로 돈이었으니.

반면 신수빈은 속으로 냉소를 터트릴 뿐이었다.

탓하려거든 전생에 사람을 잘못 본 저 자신을 탓해야 했다.

전생에 신수빈은 윤서원을 심성이 착한 사람으로 생각하고 수많은 혼수를 들고 평양 후부로 시집왔었다.

그러나 이런 처지가 될 줄 그 누가 알았을까.

윤서원은 어두워진 얼굴로 죽일 듯이 신수빈을 노려봤다.

윤서원은 원래 신수빈이 쥐 죽은 듯 얌전히만 있으면 평양 후부의 작은 마님으로서 끼니 정도는 챙겨 줄 생각이었으나, 그녀가 만에 하나 후부의 체면에 먹칠이라도 할 심산이라면 그도 손 놓고 있을 생각은 없었다.

"연회 준비가 끝났으니, 다들 자리에 앉아 주시길 바랍니다. 오늘의 연회는 태후마마의 명으로 내무부에서 직접 주관하셨고, 음식 또한 태후마마께서 직접 하사하신 것이니 다들 황은을 마음껏 누리십시오."

체면이 깎일 대로 깎인 윤서원은 태후를 내세워 화제를 돌릴 수밖에 없었다.

그제야 평양 후부 대감마님과 큰 마님이 손님들을 맞이하기 시작했다.

자리에 참석한 사람들 모두 연민의 눈길로 신수빈을 바라봤지만, 그들이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돈 많은 댁의 여식이면 뭐한담. 곧 있으면 저 아리따운 외모도 사라지고 이 집안을 먹여 살릴 처지가 될 터인데.'

*

신혼부부가 합방에 들어서자 화청에 있던 사람들도 뿔뿔이 훑어지고, 신수빈과 몸종밖에 남지 않았다.

신수빈은 여전히 핏기 서린 두 눈으로 붉게 장식된 저택 곳곳을 둘러봤다. 서쪽으로 지는 뜨거운 태양은 마치 그날의 뜨거웠던 온도처럼 세상 만물을 태울 것만 같았다.

두려움과 무력함과 절망이 교차하는 기색으로 말없이 서 있는 그녀를 보며 몸종은 제 주인이 안쓰럽고 걱정됐다.

'나리께서 첩을 들인 일이 여간 충격이었나 보네.'

"아씨, 이만 돌아가시지요."

몸종의 부름에야 신수빈은 다시 정신을 차렸다.

'내가 또 전생에 악몽 같은 그날로 빠져있었나 보군...'

그녀는 고개를 숙여 아직 평평한 아랫배와 가녀린 허리를 내려다봤다. 회임한 지 석 달 됐지만 전혀 티가 나지 않았다.

뱃속의 아이는 혼인 첫날 밤에 회임 된 것이다.

전생에 주서화가 승자의 자태를 뽐내며 사실을 털어놓지만 않았어도 그녀는 주서화와 윤서원이 합동하여 죽인 아이가 실은 오늘날 나라를 군림하는 섭정왕 이도현의 아이라는 사실을 영원히 알지 못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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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부디, 그 허리를 굽히소서   제610화

    장녕은 이도현이 끝내 아무 말도 하지 않는 모습을 보며 속으로 조용히 한숨을 삼켰다.왕야가 신수빈의 지난 일에 얼마나 깊은 응어리를 품고 있는지 그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 마음이 하루아침에 사라질 리 없다는 것도.잠시 침묵하던 장녕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감히 분수에 넘는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왕야께서 마님의 과거를 마음에 두고 계신다 해도, 결국 더 놓지 못하는 사람은 왕야이십니다. 그렇다면 왕야께서 먼저 몇 걸음 더 다가가셔야 합니다.”그는 잠시 숨을 고른 뒤 말을 이었다.“그날 밤처럼, 사실인지 아닌지도 확실하지 않은 일을 화가 난다고 입에 담으시면 마님의 마음만 상하게 됩니다. 그렇게 상처만 주다 보면 결국 마님은 왕야에게서 더 멀어질 뿐입니다.”장녕의 시선이 차분히 이도현을 향했다.“왕야께서 바라시는 것은 마님의 앞으로의 삶 아닙니까? 그렇다면 지난 일은 이제 놓으셔야 합니다. 오늘부터 다시 시작하신다고 생각하십시오.”사실 장녕은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신수빈이 이도현에게 품은 감정은 애정보다는 필요가 훨씬 컸다.지금도 그녀가 그의 곁에 있는 이유는 상당 부분 상황에 떠밀린 결과였다.정말 선택권이 있었다면, 그녀가 기꺼이 왕야에게 시집오겠다고 했을지는 장담할 수 없었다.하지만 그런 진심은 너무 잔인했다.신수빈은 한번 마음이 식으면 쉽게 돌이키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러니 이도현이 그녀를 끝내 포기할 수 없다면, 조급하게 몰아붙일 것이 아니라 마음을 활짝 열고 조용히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감정만 앞세워 서로를 몰아세울수록, 두 사람 사이는 점점 더 멀어질 뿐이었다.이도현은 끝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묵묵히 장녕의 말을 모두 들을 뿐이었다.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그는 마침내 손을 가볍게 내저었다. 물러가라는 뜻이었다.장녕은 왕야가 자신의 말을 얼마나 받아들였는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혼자 생각할 시간이 필요한 듯했다.장녕이 문턱을 막 넘어서려던 순간, 등 뒤에서 이도현의 무심한 목소리

  • 부디, 그 허리를 굽히소서   제609화

    “넷째 오라버니? 여긴 웬일이세요? 오시기 전에 사람이라도 보내셨으면 좋았을 텐데요.”신태안은 짧게 한마디만 했다.“할 말이 있어서.”그의 시선은 곧장 소온별에게 향했다.수상정에 앉아 있는 신수빈과 서하랑은 안중에도 없는 듯, 그는 성큼 앞으로 다가섰다.“소 아가씨와 따로 이야기할 일이 있습니다.”담담한 목소리였지만 거절을 허락하지 않는 기세였다.“소 아가씨께서 직접 저를 따라오시겠습니까? 아니면 제가 직접 모셔가야겠습니까?”신수빈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무례하다고 한마디 하려던 순간, 소온별이 먼저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제가 따라가겠습니다, 신 장군.”신태안은 그녀의 대답을 듣자 아무 말 없이 몸을 돌렸다.소온별은 신수빈과 서하랑에게 가볍게 인사를 건넨 뒤 그의 뒤를 따라 수상정을 떠났다.두 사람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신수빈은 고개를 갸웃했다.무슨 일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아무래도 좋은 일 같지는 않았다.분위기가 흐트러진 탓에 서하랑도 더 오래 머물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났다.신수빈은 혹시라도 신태안이 무슨 일을 벌일까 걱정되어 금자에게 몰래 뒤를 따라가 보라고 일렀다.방으로 돌아온 신수빈은 책상 위에 놓인 작은 딸랑이를 바라보다가 다시 울컥 화가 치밀어 올랐다.싸우는 건 싸우는 것이고, 아이까지 못 만나게 하는 건 또 무슨 심보란 말인가.생각할수록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그 시각.이도현은 근정전에서 상소문을 검토하다가 갑자기 재채기를 했다.어느덧 해가 서쪽으로 기울고 있었다.남은 상소문을 모두 처리한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왕부로 돌아갔다.왕부에 들어서자마자 가장 먼저 집사를 불렀다.“오늘 부인 쪽에서 사람을 보내온 적이 있었느냐?”“없었습니다, 왕야.”이도현의 턱에 힘이 들어갔다.“좋아. 참 잘 버티는군.”'아들까지 데려왔는데도 꿈쩍도 안 한다는 건가.'그는 이를 악물더니 낮게 말했다.“장풍을 불러라.”곧 장풍이 들어오자 이도현은 곧바로 따져 물었다.“네가 그러지 않았느냐! 사흘

  • 부디, 그 허리를 굽히소서   제608화

    한참 자신의 이야기만 늘어놓다 보니 서하랑은 그제야 화제가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왔다는 걸 깨달았다.오늘 두 사람이 호국부를 찾은 이유는 경림연에서 있었던 일을 묻기 위해서였는데 말이다.서하랑은 다시 본론으로 돌아왔다.“그날 경림연에서 보니 왕야께서는 너에게 마음이 있는 것 같던데. 요 며칠은 가는 곳마다 두 사람 이야기뿐이다. 왕야께서 그 뒤로 찾아오시진 않으셨느냐?”신수빈은 태연하게 고개를 저었다.“아니요. 며칠 동안 몸이 좋지 않아 문을 닫고 손님도 받지 않았거든요.”거짓말은 아니었다. 이도현은 정말 찾아오지 않았다.그녀는 되묻기 위해 고개를 들었다.“사람들은 뭐라고들 하나요?”서하랑이 몸을 조금 앞으로 기울이며 목소리를 낮췄다.“왕야께서 너를 마음에 두셨다는 얘기지. 경림연에서 그렇게 많은 사람 앞에서 직접 뜻을 밝혔는데 네가 거절하지 않았더냐.”잠시 뜸을 들인 그녀는 다시 말을 이었다.“어떤 사람들은 왕야께서 순전히 미색에 마음을 빼앗긴 거라고도 하고, 또 어떤 사람들은 네가 지금 장안 백성들 사이에서 워낙 명망이 높고, 이번에 고향으로 돌아간 유생들까지 입을 모아 칭송하면서 현명한 여인이라는 이름이 사방으로 퍼졌으니, 그 정도라면 왕비가 되어도 손색없다고들 하더라고.”그녀는 피식 웃었다.“심지어 저잣거리에서는 네가 왕야와 혼인할지, 한다면 언제쯤 하게 될지를 두고 돈까지 걸고 내기를 하고 있더구나.”차마 입에 담기 어려운 험한 말들은 굳이 전하지 않았다.이런 소문이 퍼지는 만큼 시기와 질투가 섞인 말들도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신수빈은 사람들이 내기까지 벌인다는 이야기에 어이가 없어 속으로만 혀를 찼다.'다들 참 한가하기도 하지.'서하랑이 조심스레 물었다.“그래서... 네 생각은 어떠느냐?”신수빈은 씁쓸하게 웃었다.'아이가 아직 그의 손에 있는데 내게 무슨 선택권이 있다고.'하지만 그렇다고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혼인을 받아들일 수도 없었다.그날 밤, 이도현은 사람의 마음을 후벼 파는 말을 너무도 쉽게 내뱉었다

  • 부디, 그 허리를 굽히소서   제607화

    소온별은 옆에서 차를 한 모금 마시며 서하랑의 이야기를 끝까지 듣고는 끝내 참지 못하고 눈을 흘겼다.“그러게 내가 집 살 때부터 뭐라고 했어? 외성에 작은 집 하나 사서 시녀 둘에 허드렛일하는 하녀 둘 정도만 두면 충분하다고 했잖아. 정말 부군이 고생하는 게 안쓰러웠다면 차라리 마차 한 대 사 주고 마부를 두는 게 나았지.”그녀는 답답하다는 듯 혀를 찼다.“헌데 넌 집을 그렇게 크게 장만하고, 금지옥엽처럼 하인들을 거느리며 살았잖아. 시댁 식구들이 그걸 보고 욕심이 안 생기겠어? 일단 집 안에 발을 들인 이상 다 윗사람인데, 하나하나 모셔야 하고 떠받들어야 하지. 조금만 실수해도 불효했다는 소리부터 들을 테고.”말끝마다 핀잔이 이어졌지만, 그 안에는 친구를 걱정하는 마음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평소엔 그렇게 똑 부러지는 애가 왜 이런 데서는 바보 같은 짓을 하는지 모르겠네. 편하게 살 수 있는 길을 놔두고 제 손으로 골칫덩이들을 집 안에 모셔 왔으니.”신수빈은 소온별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서하랑이 왜 그녀를 그토록 높이 평가했는지 이제야 알 것 같았다. 세상을 보는 눈이 맑았고, 중심이 단단한 사람이었다.서하랑은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이제 와서 어쩌겠어. 이미 다 와 버렸는걸. 어머님께서는 처음에 별말 없으셨는데, 형수님 내외가 옆에서 부추기기 시작하니까 명문가 흉내를 내며 시집 규율을 세우려 하셨어. 부군이 막아 줬으니 망정이지.”“집도 앞뒤로 나눠 시부모님과 친척들은 앞채에서 지내시고, 우리 부부는 뒤채에서 따로 살게 했어. 평소 문안도 부군이 늘 함께 갈 때만 드리니, 어머님께서도 함부로 날 난처하게 만들지는 못하시더라고.”신수빈은 조용히 이야기를 듣다가 문득 깨달았다. 세상에 처음부터 한 몸처럼 완벽하게 맞는 부부는 없다는 것을. 결국 누구나 시댁과 친정, 체면과 예법, 수많은 현실 사이를 지나며 함께 살아가는 법을 배워 가는 것이었다.소온별이 다시 물었다.“헌데 오늘은 또 왜 그렇게 얼굴이 어두운 거야?”서하랑이

  • 부디, 그 허리를 굽히소서   제606화

    경림연이 끝난 다음 날부터 그들은 호국부를 찾아오려 했다.하지만 그 무렵 호국부는 며칠째 굳게 문을 닫은 채 손님을 받지 않고 있었다. 밖에는 부인이 연회에서 병을 얻어 몸져누웠다는 말만 전해질 뿐이었다.그렇게 칠팔 일이 지난 뒤에야 두 사람은 다시 발걸음을 옮길 수 있었다.사실 신수빈이 병이 난 것은 아니었다.그날 이도현과 크게 다투는 과정에서 그의 손아귀 힘이 지나쳐 목덜미 뒤로 선명한 멍이 남아 버렸다.봄이 깊어지면서 옷차림도 한결 가벼워진 때, 하필 그렇게 눈에 잘 띄는 자리에 멍이 들어 있었으니 아무리 가려도 숨길 수가 없었다.결국 사람들을 만나지 않는 수밖에 없었다.신수빈은 사람을 시켜 서하랑과 소온별을 수상정으로 안내했다.호국부를 하사받은 뒤에도 그녀는 한 번도 대대적인 연회를 열어 손님을 맞은 적이 없었다.늘 조용하고 신중하게 지냈다.서하랑 역시 이곳을 찾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웅장한 대문을 지나 안으로 들어서자 정갈하게 배치된 정원과 굽이굽이 이어진 회랑, 물 위에 떠 있는 정자가 한눈에 들어왔다.눈길이 닿는 곳마다 세심하게 꾸며져 있어 흠잡을 데가 없었다.이곳은 본래 전 왕조의 한 친왕이 머물던 저택이었다.수도가 장안을 떠난 뒤 오랫동안 비어 있었는데, 이도현이 이토록 귀한 저택을 통째로 하사했다는 사실에 새삼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서하랑은 주변을 둘러보다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세 사람이 자리를 잡자 그녀가 먼저 입을 열었다.“정원이 정말 아름답구나. 장안에서 강남 풍경을 가장 잘 살린 곳을 꼽으라면 이곳과 돌아가신 여비의 서란소축뿐일 것이다. 왕야께서 네가 강남 출신이라는 걸 아시고 일부러 이런 저택을 골라 주신 걸 보면 마음을 많이 쓰신 것 같구나.”하지만 신수빈은 요 며칠 그 사람 이야기만 들어도 속이 치밀어 올랐다.그 이름조차 듣기 싫었다.그녀는 화제를 자연스럽게 돌렸다.“송 대인께서 곧 명주로 부임하신다고 들었습니다. 명주는 강남이라 제 고향인 여항과도 가깝지요. 언니께서는 이번에 강남

  • 부디, 그 허리를 굽히소서   제605화

    집사는 신수빈의 안색을 슬쩍 살핀 뒤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그리고 왕야께서... 마님께서는 당분간 호국부에서 근신하시며 잘못을 반성하라고 하셨습니다. 특별한 일이 아니면 외출도 허락하지 않겠다고 하셨고요.”뒤에 서 있던 금자와 은보는 하마터면 눈을 뒤집을 뻔했다.'와, 이건 또 무슨 수야.''정말 기가 막히네.'신수빈은 이를 악문 채 굳게 닫힌 왕부의 대문을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끝내 아무 말도 하지 않은 그녀는 몸을 돌려 다시 마차에 올랐다.'그래도 친아버지인데 설마 아이에게 무슨 짓을 하겠어.'그렇게 스스로를 달래며 돌아설 수밖에 없었다.*집사가 안으로 돌아와 보고했을 때, 이도현은 앞채에 앉아 있었다.이준우는 어느새 잠에서 깨어 있었지만 울지도 보채지도 않았다. 작은 몸으로 이도현의 무릎에 앉아 장난감을 만지작거리며 혼자 놀고 있었다.이도현이 고개를 들었다.“뭐라고 하더냐.”“마님께서는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셨습니다.”집사는 잠시 망설이다가 조심스럽게 한마디를 덧붙였다.“많이 화가 나신 것 같기는 했습니다만... 차마 드러내지는 못하시는 눈치였습니다.”이도현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곁에 서 있던 장풍이 자신 있게 입을 열었다.“거 보십시오. 여인이라는 게 원래 사랑을 받으면 점점 더 제멋대로 굴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너무 잘해 주시면 안 됩니다. 며칠만 그대로 두십시오. 그러면 부인께서도 스스로 잘못을 깨닫고, 앞으로는 훨씬 더 다정하게 왕야를 모실 겁니다. 지금처럼 왕야께 맞서려 들지는 않을 테고요.”집사는 장풍을 한 번 바라보고, 다시 이도현의 무릎 위에 앉아 있는 이준우를 바라보았다.나이가 있는 그는 이런저런 풍파를 겪어 본 사람이었다.속으로 한숨이 절로 나왔다.'한 사람은 가르칠 줄 알고, 다른 한 사람은 또 그대로 배워 버리는구나.'조용히 물러난 그는 속으로 중얼거렸다.'내일 우시위를 만나면 꼭 말해 줘야겠군. 좌시위를 좀 말려 보라고. 이대로 가다가는 나중에 마님께서 이 일을 따져 묻게 될 때 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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