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아침부터 내린 봄비는 학교가 끝난 뒤에도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다.운동장을 지나는 길, 은하가 민희의 눈치를 슬슬 보기 시작했다.“우리 학원 가기 전에, 시내 좀 잠깐 들를까?”“응? 시내는 왜?”“백이현 생일 선물 사고 싶어서.”“대박, 오 강은하~ 드디어 챙겨주는 거야?”“그런 거 아니야. 그냥… 생일이니까.”“당연히 콜이지, 서연이도 같이 갈 거지?”“…으응.”그렇게 우산을 펼치고, 비 내리는 시내로 향한 세 사람.하지만 선물을 고르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옷, 시계, 신발 모두 고가의 브랜드를 즐겨 입는 백이현.늘 부족함 없이, 원하는 건 모두 가질 수 있는 환경에서 자란 그였기에, 선물은 모두에게 고민이었다. 가장 먼저 고른 건, 민희였다.이현에게 전혀 어울리지 않는 캐릭터 모양의 핑크색 키링. 커다란 눈망울을 가진, 귀엽고 유치한 캐릭터 키링이었다.“난 이거.”“에?”지켜보던 은하와 서연이 동시에 당황한 표정을 지었지만, 민희는 이미 결정이 끝난 듯 했다.“선물은 주는 사람 마음 인 거야.”서연은 잠시 고민하는 듯 하더니, 나름 현명한 대답을 내놓았다.“그, 그럼 케이크는 내가 사 갈게.”“굿! 그게 좋겠다!”은하는 결국 한참을 고민하긴 했지만 아무것도 고르지 못했다.아무리 살펴봐도 어울리는 게 없어 보여서. 아니, 마음에 들지 않을까 망설이기만 하다 학원 갈 시간이 다 돼버려서.***그날 밤, 답답한 마음에 침대에 누워 천장만 바라보았다. ‘선물은 어떡하지?’그러다 불현듯 무언가 생각난 듯, 책상 서랍을 뒤적거렸다,잠시 후 손에 들린 건, 문득문믁 드는 생각을 편하게 적어 내려간 작은 노트 하나. 노트 안에는 소소한 감정들이 담긴 글귀와, 친구들과 함께 찍은 사진이 소중하게 끼워져 있었다. 어떤 날엔 외로웠고, 어떤 날엔 아팠고, 어떤 날엔 조금 괜찮았고. 이후로는 친구들과 함께여서 행복한 시간들. 그리고, 백이현과 함께한 순간들이 의외로 많이 담겨 있다는 것.은하는 그의 모습이 담긴 사진
그들은 조금은 어설프지만 나름의 방식대로 공부를 시작했다.문제를 풀다가도 치킨을 한 입 베어 먹고, 서로 답을 맞춰보며 웃고 떠드는 시간. 가끔은 헛소리도 나왔지만, 누구도 이 시간이 싫지 않았다.왁자지껄한 웃음소리가 가득한 거실. 테이블 위에는 빈 피자 박스와 치킨 뼈가 널려 있었고, 떡볶이 국물까지 바닥을 보이기 시작했다. 문제집은 어느새 한쪽으로 밀려나 있었고, 시간이 흐를수록 공부는 어느새 뒷전이 된 분위기.그때, 잠시 머뭇거리던 서연이 입술을 작게 움직였다.“나 있잖아… 전학 오길 잘한 것 같아….”다들 그런 서연을 바라보았다.서연은 손가락을 살짝 꼼지락 거리며, 무언가를 더 말할까 말까 고민하는 표정이었지만 천천히 자신의 마음을 전했다.“전학 오기 전에는 솔직히 걱정이 많았거든. 친구를 사귀는 것도 그렇고… 조용하다는 이유로 또 혼자 남진 않을까 걱정도 됐고… 근데… 너희들이랑 이렇게 같이 있는 게… 너무 좋아.”이제는 얼굴까지 붉어진 채로, 은하와 민희를 번갈아 바라보았다.“먼저 다가와 준 은하도… 늘 학원에서까지 챙겨주는 민희도 너무 너무 고마워.”“야, 우리는?”이현이 퉁명스럽게 묻자, 서연의 얼굴이 더 붉게 달아올랐다.“당연히 고맙지. 든든하기도 하고….”민희는 그런 서연을 와락 끌어안았다.“진짜 너무 너무 귀여운 거 아니야?”“으악! 숨 막혀…!”그때, 현관 쪽에서 도어 록 들리더니 우주가 집 안으로 들어섰다.한 손에는 과일이 담긴 접시, 다른 한 손에는 과일 포크를 들고 있었다.“공부들 열심히 하고 있어? 과일 먹고들 해.”“키햐~ 역시 형님밖에 없습니다.”“감사합니다.”우주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테이블 위에 과일 접시를 내려놓았다.그러고는 시선이 이내 서연에게로 향했다.“네가 서연이구나? 은하한테 얘기 들었어. 진짜 엄청 귀엽게 생겼네.”“…네?”서연은 예상치 못한 말에 당황한 듯 눈을 깜빡였다.순간, 민희가 흥분한 듯 끼어들었다.“그쵸? 완전 아기 햄스터 같아요. 아구 귀여워.”
가희는 아무런 타격이 없다는듯, 오히려 은하를 바라보았다. “은하 언니. 저도 여기 앉아도 돼요? 마침 한 자리가 딱 비어있는데요?”“그래. 같이 먹지 뭐.”태하와 이현은 말도 안 된다는 표정으로 은하를 노려보았다.그들이 은하를 이렇게 까지 노려보는 건, 정말로 처음 있는 일이었다. “저 그럼 여기 앉아요!”보란듯이 자리에 착석해버린 가희는 누구보다 당당했다.“선배님들이랑 이렇게 같이 밥 먹으니까, 뭔가 엄청 든든하네요!”참고 있던 민희의 웃음이 터져버렸다.“푸하. 백이현! 네 동생 진짜 너랑 똑같아! 완전 웃겨.”“뭐래? 기분 나쁘게?”“내 기분이 더 나쁘거든?”은하가 그런 이현과 가희를 말렸다.“그만들 싸우고 밥 먹어.”“역시 은하 언니가 제일 착하셔.”그렇게 3학년 다섯 명과, 1학년 한 명이 함께 한 점심 식사.오늘 점심시간은 유독 태하에게 만큼은 길게 느껴졌다. 그리고 그에게 닥친 진짜 문제는 이 모습을 바라보는 은하의 표정이 너무도 밝다는 것. 여전히 자신이 기대하는 반응이 없다는 것. ‘은하는 진짜… 아무렇지 않은 거구나.’***태하를 향한 가희의 직진은 계속 되었다.태하는 여전히 부담스러워 했지만, 결국 모든 걸 포기한 듯 그저 귀여운 여동생처럼 대해주고 있었다. 이현 역시 그런 두 사람의 모습을 보며 상황을 즐기는 듯 했다. “정서방. 이제 모든 걸 순응 하기로 한 건가?”“그냥 포기한 거야.”“그래. 상대가 백가희라면 포기가 정답일 수도.”민희는 가희의 활발한 성격에 마음에 드는 듯 늘 밝게 맞아주었다.처음에는 말없이 지켜만 보았던 서연은 조금씩 가희와 대화를 나누며 어울렸고, 은하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러던 어느 날, 민희의 쩌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우리 오늘 비밀 아지트 가서 놀자!”모두가 동의했다.“오키. 좋지.”“중간고사 준비도 할 겸.”“맛있는 거 시켜 먹자.”서연 역시 같은 자리에 있긴 했지만, 선뜻 대답을 하지 못하고 망설였다.자연스러운 대화 속에서 자신이 끼어도
태하는 뇌 정지가 온듯한 표정으로 굳어버렸고, 은하는 가희가 귀엽다는 듯 웃음을 지었다. “듣던 데로 백이현 동생 답네.”지금 이 순간, 누구보다 창피했던 이현은 이 자리를 피하는 게 최우선이라는 생각을 했다. “태하야…. 우리 먼저 가도 될까? 자습이 시간이 좀 필요할 것 같네?”“…야. 백이현.”태하의 눈빛은 확실했다. 가기만 해, 가만 안 둬.하지만 가희는 정 반대였다. 이제야 좀 말이 통하네, 마음에 드네.“잘 생각했어. 방해하지 말고 좀 꺼져 줄래?”“백가희, 까불지 말고 우리 태하 살살 다뤄라.”은하와 빠르게 눈빛을 교환한 이현은 결국 자리를 떠났고, 남겨진 태하는 절망적인 얼굴로 그들의 뒷모습을 바라봤다.“너네 진짜… 가는 거냐…?”그 순간. 가희가 태하의 옆에 찰싹 달라 붙어 팔짱을 끼었다.“태하 오빠앙. 나 교실까지 데려다 주떼용, 네엥?”“…그. 그래. 일단 가자.”태하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며, 어떻게든 이 상황을 빠져나갈 방법을 고민하기 시작했다. 문제는, 가희가 계속 팔짱을 낀 채 입꼬리를 씰룩거린다는 것.더 심각한 문제는 주변 시선이었다. 교실로 향하는 복도 사이, 지나가는 학생들은 두 사람을 힐끗힐끗 바라보았다.“뭐야?”“저거 백가희 아니야?”“옆에 정태하 선배 맞지?”“와, 커플 탄생?”웅성거림은 이미 퍼져가고 있었다.태하는 진심으로 땀이 나는 기분이 들었지만, 가희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듯 여전히 해맑게 웃어댔다.“오빠, 우리 생각보다 더 잘 어울리는 것 같지 않아?”걸음을 뚝 멈춘 태하가 진심으로 정색하며 가희를 바라봤다.“가희야. 우리 그런 사이 아니잖아.” “맞아. 아직은 아니지이!”너무도 당당한 대답에, 태하의 이마에 식은땀이 맺히기 시작했다. 말려들면 안 된다. 이대로 어물쩡 넘어가다가는 진짜로 일이 커질 것만 같았다.“아니? 앞으로도.”“…오빠아!”“앞으로도 그럴 일은 없어. 나한테 너는 친구 동생일 뿐이야.”예상보다 훨씬 단호한 말투, 장난스럽게 웃던 가희의
태하는 의자에 털썩 주저 앉으며 이현을 똑바로 바라보았다.“백이현, 이제 어떡할 거야? 백가희 기세가 장난이 아니던데?”“정 서방. 나도 미처 이런 일은 예상하지 못했네. 허허허.”태하가 결국 헛웃음을 터트렸다. 웃겨서가 아니라, 진짜로 어이가 없었다. “그래 그건 인정. 그러니까 이제 대책을 좀 말해 봐.”“이건 난이도가 너무 높은데… 아직은 관심이니까 일단 진정부터 하자고. 정 서방.”“여자친구 있냐고 대놓고 묻던데?”이현의 얼굴에서 장난기가 싹 사라졌다.“뭐라고?”“그리고, 있어도 상관 없다 던데?”“와 씨… 이거 진짜 일 났네.”이현은 마치 세상의 종말을 들은 사람처럼 입을 꾹 다물었다.눈앞에서 빠르게 현실 부정과 충격이 교차해, 저도 모르게 관자놀이를 꾹 눌렀다.“정태하, 이건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도와 줄 방법이 없겠다.”“캐릭터가 너무 확실해. 나 진짜 식은 땀 났다니 까.”“잘 들어. 일단 빠져나갈 방법은 딱 하나야.”“뭔데? 빨리 말 해.”“네가 이민을 가거나, 백가희가 이민을 가거나.”이게 무슨 말 같지도 않은 소리야, 이민이 방법이라면 없다는 말이랑 똑같은 거잖아.“아, 하나 더 있다.”“뭐!”“세상이 멸망하거나.”“….”***그날 저녁, 은하의 집.네 사람은 진지한 분위기 속에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주제는 하나였다. 바로 오늘 벌어진 '백가희 사태'.이현이 이마를 짚으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나까지 멘탈이 다 나가는 것 같다.”태하의 목소리엔 오늘 따라 힘이 없었다.“백이현… 네 동생이잖아….”우주는 둘의 이야기를 듣고 한참을 웃어댔다. 애들이 왜 이렇게 귀여운 건지, 또 뭐가 이렇게 심각한 건지.“그러니까, 이현이 동생 가희가 태하한테 관심이 생겼다고?”“형님. 단순한 관심이 아닙니다. 제 동생은 진짜 또라이에요.”은하 역시 자꾸만 히죽거렸고, 우주는 여전히 재미 있어 죽겠다는 눈치였다.“태하는 어떻게 할 거야? 가희가 계속 대쉬하면?”“아… 우주 형님…”“정 서방
그날 오후, 이현에게 문자 메시지 하나가 도착했다.[간식 고마워. 근데 태하 오빠는 더 잘생겨졌더라🩷]문자 메시지를 확인한 이현은 순간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느낌이 좋지 않았다.곧장 태하에게 달려가 이 사실을 전했다.“야 정태하. 아무래도 큰일 난 것 같다.”“왜?”“백가희가, 너 더 잘생겨졌대.”“그게 뭐? 사실이잖아.”“일단 사과부터 받아. 미리 사과할게. 진심으로 다시 한번 미안하다.”“뭐라는 거야 도대체.”이현은 영문을 몰라하는 태하의 어깨를 두 손으로 꽉 부여잡고는, 마치 마지막 유언을 남기는 사람처럼 중얼거렸다.“진짜 미안해. 혹시라도 너무 힘이 들 땐, 우리 우정을 한 번만 떠올려 줘라.”“미친놈인가.”태하는 이현이 이상하게 굴었던 이유를 얼마 지나지 않아 깨달았다.하교길, 가희가 자신을 향해 전속력으로 뛰어오고 있었다. 속도는 너무나도 빨랐고, 환한 미소까지 장착한 채로.그 모습을 지켜본 이현은 누구보다 빠르게 자리를 떠났고, 태하는 이현이 떠나는 것조차 알지 못한 채 속으로 중얼거렸다.‘설마 나한테 오는 건가? 왜? 아니, 표정이 왜… 왜 이렇게 소름 돋지.’정확하게 태하의 앞에 멈춰선 가희가 태하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태하오빠앙~!”본능적으로 몸이 굳었다. 이현이 말했던 불길한 예감이 현실이 되는 순간이었다. 자신을 바라보는 가희의 표정은 여전히 무서우리만큼 해맑았다.“어…어… 가희야, 아까 간식은 잘 먹었어?”“응. 오빠 생각 하면서 다 먹었지!”“…그. 그랬구나. 이왕이면 나 말고, 이현이 생각하면서 먹지 그랬어.”가희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말 같지도 않은 소리가 불쾌하다는 듯.“미쳤어? 근데 어디 가 오빠?”“이현이랑 독서실 가려고.”그 말과 함께 주변을 둘러보던 태하의 눈동자가 당황한듯 흔들렸다. 방금 전까지 바로 옆에 있던 백이현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으니까.분명 이 상황을 피해 도망간 게 틀림없었다.‘하… 이 치사한 자식.’가희는 여전히 반짝이는 눈으로 태하에게서
이번에도 말없이 선생님을 따라 걸었다. 복도를 지나는 동안, 몇몇 학생들의 흘깃거리는 눈초리가 느껴졌다.아무리 고개를 숙이고 걸어도, 모든 시선이 자신을 향해 있는 것 같아 가슴이 답답했다. '첫 날이라 그래, 이것도 내일이면 괜찮아 질거야.'2학년 3반 교실 앞에 다다르고 나서야 작은 목소리를 냈다.“저기… 선생님.”“응?”“전학생 소개는 선생님께서 이름 정도만 해주시고요… 저는 바로 자리에 앉고 싶은데요.”선생님은 은하의 표정을 살피더니,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지었다.“알겠어. 부담 느끼지 말고 편하게 있으면
차가운 공기가 뺨을 스치는 어느 가을날, 희뿌연 햇살이 나뭇가지 사이로 조용히 내려앉았다. 은하는 옷장에 걸린 새 교복을 바라보았다. 단정하게 걸려 있는 교복은 마치 새로운 시작을 속삭이는 듯했지만, 은하에게는 그저 낯설고 무거운 천 조각에 불과했다. 고등학교 입학 후 벌써 세 번째 전학. 이제는 익숙해야 할 것 같은데도, 여전히 이 순간은 낯설었다. 그리고 이 지긋지긋한 고등학교 생활은 아직도 1년도 넘게 남아있었다.학교를 옮길 때마다 별다른 감정은 들지 않았다. 친구들과 헤어지는 것도, 새로운 환경에 적응해야 하는 것도.
조심스럽게 은하를 안아들고 보건실로 향해 걸음을 옮기는 태하. 팔에 안긴 몸은 생각보다 가벼웠고, 숨소리는 여전히 불안정했다. 민희 역시 걱정스러운 얼굴로 뒤를 따르며 은하의 핸드폰을 꽉 쥐고 있었다.보건실로 향하자마자 은하를 조심스레 침대 위에 내려 놓았다.놀란 보건 선생님이 급히 다가와 은하의 상태를 살폈고, 담임 선생님 역시 소식을 듣고 보건실로 달려왔다.“무슨 일이 있었던 거니?”“큰 소리에 갑자기 놀란 듯 하더니… 가방에서 약을 꺼내 먹었어요.”“약? 무슨 약?”민희는 서둘러 은하의 가방을 뒤적여 은하가 먹었던
뒷문에서 모든 상황을 지켜보던 태하가 은하를 향해 다가왔다. “괜찮아? 보건실 데려다 줘?”목소리엔 왠지 모를 걱정이 담겨 있었고, 눈빛에는 분명한 진심이 서려 있었다. 이현은 그 장면을 바라보면서, 느릿하게 입술을 깨물었다.그리고는 피식 웃었다. 그 웃음 뒤에 감춰진 감정은 어디까지가 장난이고, 어디까지가 흥미인지 아무도 알 수 없었다.“아니… 나… 먼저 가봐야겠어. 담임 선생님께 말 좀 전해줘.”그 말과 함께, 은하는 가방을 들고 자리를 피하려는 듯 행동을 취했다. 하지만 태하는 쉽게 수긍하지 않는 표정이었다.“은하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