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예리는 점심조차 1층 카페의 샌드위치로 대충 때운 채, 해성 관련 자료를 훑는 데 여념이 없었다.
해상 그룹. 대한민국 재계 서열 1위. IT와 통신, 금융을 넘어 이커머스까지 국민의 일상을 장악한 그들은 거대한 블랙홀이라 불릴 만큼 압도적인 영향력 가졌다. ‘해상이 무너지는 날엔 대한민국 전 국민이 무너진다’라는 말이 공공연하게 돌 정도였다.
그런 박 회장의 직접 움직이는 것도 이례적이지만, 의뢰 대상이 유은호라는 점이 예리를 더 깊은 생각에 잠기게 했다.
마흔에 가까운 두 아들에게 직접 생선 살을 발라주는 사진이 화제가 될 만큼, 첫째와 둘째를 향한 박 회장의 애정은 유별났다. 그런 그녀가 발 벗고 나선 상대가 금지옥엽 두 아들이 아닌, 배다른 자식으로 알려진 막내 유은호라니.
자식의 결혼조차 철저히 계산된 비즈니스로 이용할 박해미였다. 이득이 없는 곳엔 눈길조차 주지 않는 그녀가 유은호의 결혼을 주도한다는 사실은, 이번 방문이 결코 순수한 의도가 아님을 증명하고 있었다.
‘유도현도 유동현도 아니고, 왜 하필 유은호지?’
그때 태블릿 화면 속, 19년 전 기사 하나가 예리의 눈에 들어왔다.
[[단독]’아르케 리서치’ 박해미 대표, 해상 유상만 회장과 11일 백년가약]
이혼 후 두 아들을 홀로 키우던 박해미와 은호의 부친인 유상만 회장이 재혼했다는 소식이었다. 당시 정·재계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해상 그룹의 새로운 안주인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자선 행사에서 만나 약속이라도 한 듯 빠르게 가까워진 두 사람은 혼인 신고 후 세 아들과 함께 매체에 자주 얼굴을 비췄다. 대중의 부러움을 사는 화목한 재벌가 가족의 표본이 되었지만, 그 행복은 그리 얼마 가지 못했다.
예리는 화면을 위로 쓸어 넘겼다. 2년 뒤, 유 회장의 갑작스러운 부고를 알리는 대대적인 보도들이 줄을 이었다. 예리는 그 중 뉴스 영상 하나를 재생했다.
-해상 그룹 유상만 회장이 어젯밤 교통사고로 별세했습니다. 유 회장은 가족과의 여행을 마치고 귀가하던 중, 직접 운전대를 잡았던 것으로 확인됐습니다.
화면에는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처참하게 구겨진 고급 승용차가 비쳤다.
-당시 폭우가 쏟아지는 야간이었으며, 차량은 빗길에 미끄러지며 가드레일을 추돌한 뒤 절벽 아래로 추락했습니다. 경찰은 현재 단순 교통사고로 결론짓고 수사를 종결한 상태입니다.
화면이 바뀌며 응급실로 급히 실려 들어가는 이동 침대 위, 유은호의 모습이 잡혔다. 앳된 얼굴은 붉은 피와 검은 그을음으로 얼룩져 있었다.
예리는 차갑게 식은 커피를 한 모금 들이켰다. 사고 현장에서 기적적으로 살아남은 건, 뒷좌석에 타고 있던 당시 중학생이던 유은호뿐이었다.
이후 유 회장이 자신의 지분을 박해미와 유은호에게 상속한다는 유언장이 공개되었다. 박해미는 본래 가진 지분에 유 회장에게 상속받은 몫, 그리고 미성년자였던 유은호의 법정대리인 권한까지 합쳐 완벽한 캐스팅보트를 손에 넣었다.
그녀는 장례를 치른 지 일주일도 지나지 않아 이사진을 전부 갈아치웠다. 박해미의 측근으로 채워진 이사회는 주주총회 승인을 전례 없이 공격적으로 밀어붙였다.
[해상 그룹, ‘박해미 체제’ 공식 출범… 장례 일주일만의 초고속 인사 단행]
그렇게 그녀는 해상의 가장 높은 곳에 올라섰다. 태블릿 화면을 훑어내리던 예리의 손가락이 박 회장의 최근 동향 항목에서 딱 멈춰 섰다.
“최근엔 상속 전문 변호인단까지 수시로 만났단 말이지.”
해상 내부에서 또다시 상속과 관련된 은밀한 움직임이 일고 있었다.
‘박 회장이 상속을 준비하는 건가? 아니면….’
예리의 머릿속에 과거 박해미가 지금의 자리에 오르기 위해 이용했던 유은호의 지분이 떠올랐다.
만약 박 회장이 유은호의 지분을 다시 한번 이용하려는 속셈이라면, 변호인단과 접촉한 정황과도 맞아떨어졌다.
‘그런데 왜? 하필 우리 인연이지?’
업계 1위라고는 하나, 해상과 특별한 접점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상속 전쟁이라는 민감한 문제를 처리하기 위해 굳이 우리를 선택한 이유가 무엇인지 의문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명확한 해답은 나오지 않았다. 결국 예리는 이번 의뢰의 핵심 키가 될 유은호의 정보를 태블릿에서 찾아 내려갔다.
유은호는 언론 노출을 극도로 꺼리는, 베일에 싸인 인물이었다. 이사장으로 있는 해상 아트센터 행사조차 좀처럼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으며, 그간 스캔들은커녕 결혼과 관련된 기미조차 보인 적이 없었다.
부친 사망 이후, 당시 중학생이던 유은호는 종적을 감췄다. 그 빈자리를 채운 건 박해미의 두 아들, 유동현과 유도현이었다. 박해미는 의도적으로 두 아들을 언론에 노출했다. 자애로운 어머니의 모습을 연출하며 이들이 해상의 유일한 승계자임을 사람들의 머릿속에 각인시켰다.
박 회장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는 두 사람이 차기 리더로 받아들여지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어느덧 사람들 사이에서 선대 회장의 친아들인 유은호의 존재는 서서히 지워져 갔다. 박해미의 작전이 완벽히 성공한 셈이었다.
간혹 유은호의 근황을 묻는 이들도 있었지만, 박해미의 답변은 늘 한결같았다.
"지금은 그저 조용한 곳에서 마음의 상처를 돌보는 일에만 전념하고 있어요….”
예리가 화면 속 인터뷰 구절을 나지막이 읊조렸다. 이 대답 역시 은호를 나약한 인간으로 낙인찍어 후계 구도에서 완전히 밀어내려는 속셈이 잔뜩 묻어 있었다.
그는 박 회장의 말처럼 정말 조용한 곳으로 떠났다. 고등학교 2학년 무렵, 아버지가 떠오르지 않는 곳에서 트라우마를 털어내려는 듯 돌연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명문대 경영학과를 졸업 후, 전공을 바꿔 미술 경영 석사를 마친 그는 세계 최대 미술품 경매 회사 ‘크리스털’ 뉴욕 본사에서 근무했다.
그렇게 타국에서 제 자리를 잡은 듯했던 그가 돌연 귀국을 선택했다. 하지만 진짜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마지막 행적이… 1년 전?”
업계 최고의 정보력을 자랑하는 인연의 VIP 전담팀이 샅샅이 긁어모은 자료조차 1년 전 자선 행사가 마지막이었다. 그나마도 멀리서 찍힌 흐릿한 사진뿐이었다.
취향이나 사생활을 포함한 개인적인 자료는 어디에도 없었다. 마치 유은호 스스로 제 흔적을 지워낸 듯한 기분마저 들었다.
막막함이 먹구름처럼 밀려오던 그때, 예리의 시야에 유은호의 얼굴이 들어왔다.
먼저 옷을 갈아입고 나와 마당에서 기다리던 예리의 시야에, 쭈뼛거리며 걸어 나오는 은호의 실루엣이 들어왔다.늘 자로 잰 듯 완벽하게 피팅 된 슈트 차림만 보다가, 헐렁한 작업복을 입은 그는 무척 낯설었다. 거기에 사과를 든 꿀벌이 엄지를 치켜세운 티셔츠와 냉기 어린 얼굴의 조합이라니.그 환장의 불협화음에 예리는 뿜어져 나오려는 웃음을 참느라 입술을 꾹 깨물었다.“이사님, 생각보다… 되게 잘 어울리시는데요?”은호가 티셔츠 밑단을 어색하게 만지작거릴 때였다. 도운이 무선 마이크를 어깨에 메고 다시 나타났다.“자, 여러분 집중해 주세요! 지금부터 사과나무밭으로 이동하겠습니다. 도보로 이동할 예정이니, 친한 분끼리 두 분씩 짝을 맞춰 길게 줄을 서주세요!”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사람들이 일사불란하게 대열을 갖췄다. 은호 혼자 갈 길을 잃고 어색하게 서 있자, 소진이 그의 등을 예리 쪽으로 가볍게 밀어 넣었다.“우리 이사님, 나 팀장님이랑 같이 서세요. 저는 두 분 뒤에 설게요.”소진의 센스 넘치는 배려 덕에 얼떨결에 예리의 옆자리를 꿰찬 은호의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갔다.“줄 다 서셨으면, 출발하겠습니다!”도운의 활기찬 구령 들으며 예리는 오랜만에 마주하는 평화로운 시골 풍경을 눈에 담았다.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하늘 아래, 하얀 사과꽃 물결이 일렁이는 과수원은 믿기지 않을 정도로 평화로웠다.***옆에서 나란히 걷던 은호 역시 풍경을 눈에 담는 척 슬그머니 고개를 돌려 제 옆의 예리를 내려다보았다.높게 질끈 묶어 올린 예리의 뒷머리가 걸음을 옮길 때마다 가볍게 찰랑였다. 부드럽게 불어오는 바람을 타고 예리의 향이 코끝에 은은하게 번졌다.은은한 배향이 섞인, 서늘하고 달콤한 꽃향기를 맡으며 한참 동안 입술을 달싹이던 은호가, 조심스럽게 먼저 말을 건넸다.“하도운 씨 말입니다. 사진보다 훨씬… 매력적이시더군요.”예리는 시선을 은호 대신 맨 앞에서 씩씩하게 걸어가는 도운에게 둔 채 고개를 끄덕였다.“목소리도 좋고 성격도 쾌활해서 괜찮아 보이더
예리는 화끈거리는 볼을 손으로 슥 문지르며 물었다.“제 얼굴에 뭐라도 묻었나요…?”“아니요.”정작 은호는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이었다. 오히려 그를 의식하고 난리가 난 쪽은 예리였다. 그녀는 후다닥 손을 내리고 목을 가다듬었다.“그러면 왜 그렇게 쳐다보시는데요?”여전히 자신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은호를 힐끔거리며 물었다.“도운 씨가 아윤 씨를 좋아하는지 아닌지, 알아낼 특별한 계획이라도 있으신지 궁금해서요.”“아… 그게 궁금하셨구나.”나한테 개인적인 질문이 있는 게 아니고.“그건… 오늘 직접 보시면 알게 될 거예요. 백 마디 설명 듣는 것보다 눈으로 한 번 확인하는 게 훨씬 빠르거든요.”누가 봐도 어물쩍 넘어가려는 태도였지만, 은호는 그녀의 눈을 가만히 들여다보다가 고개를 끄덕일 뿐 더는 캐묻지 않았다.예리는 재빨리 창밖으로 시선을 회피했다. 그가 또 곤란한 질문을 던질까 봐. 아니, 실은 제 요동치는 속마음을 들킬까 봐서였다.‘왜 서운한 감정이 드는 거지?’예리는 툭, 차가운 창문에 이마를 기댔다.은호가 항상 자신에 대해 궁금해할 거라고 착각하는 것도 웃겼고, 그게 아니라고 서운함을 느끼는 스스로가 더 기가 막혔다.말도 안 되는 생각임을 알았지만, 아무래도 그의 문양에 감정적으로 동화되고 있는 게 분명했다. 그러지 않고서야 이 요상한 마음 상태가 설명되지 않았다.작은 한숨을 삼킨 예리가 창밖으로 빠르게 흘러가는 시골 풍경만 무표정하게 바라보았다.아침 일찍 출발한 차는 ‘햇살 사과’라 적힌 커다란 이정표가 세워진 넓은 부지 안으로 미끄러지듯 들어섰다.차에서 내린 은호가 주변을 천천히 살폈다."주말이라 그런지 사람이 참 많네요. 가족끼리 온 분들도 꽤 보이고요."창고 앞마당은 이미 사람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그의 말처럼 아이를 동반한 부모들도 보였지만, 유독 젊은 여성들의 비중이 압도적으로 높았다.그도 그럴 것이, 청년 농업인을 홍보하는 다큐에 출연한 뒤로 도운의 훈훈한 외모가 온라인상에서 크게 화제가 된 영향이었다.“팀장님
계약서에 서명을 마친 은호가 고급 만년필의 뚜껑을 닫아 서류 위로 내려놓았다.“작가님, 이번 전시 잘 부탁드립니다. 저희도 불편함이 없도록 세심하게 잘 살피겠습니다.”병훈이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은호의 손을 마주 잡았다.“네, 저도 해상과 함께하게 되어 영광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유 이사님.”그간 골머리를 앓던 거장 이병훈 작가와의 계약이 성공리에 마무리되자, 숨을 죽이고 지켜보던 직원들이 일제히 환호하며 박수를 쳤다.은호가 맞잡은 손을 놓으려 할 때였다.“저, 이사님….”병훈의 조심스러운 목소리에 은호가 의아한 듯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그는 선뜻 입을 떼지 못한 채 직원들을 힐끔거렸다.“잠시 자리 좀 비켜주시죠.”은호의 차분한 지시에 눈치를 보던 직원들이 하나둘 각자 서류와 짐을 챙겨 회의실 밖으로 빠져나갔다. 이들이 모두 나가는 동안 병훈은 조용히 굳은살 박인 손끝만 내려다보았다.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묵직한 정적이 회의실을 감돌았다.“이제 말씀하셔도 됩니다. 제게 하실 말씀이 어떤 건가요?”마른 입술을 혀로 축인 병훈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사실… 계약 직전까지 고민이 아주 많았습니다.”불길한 이름이 머릿속을 스치자, 은호는 씁쓸하게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저희 형들 때문입니까?”병훈이 쓴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주변에서 다들 말리더군요. 굳이 해상과 일하면서 위험을 감수할 필요가 있겠냐고….”병훈이 창가로 시선을 옮겼다. 해상 아트센터를 감싸안고 있는 드넓은 호수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이내 은호에게로 다시 고개를 돌렸다.“유동현 사장님이 백화점 VIP 컬렉터들과 거래 갤러리들을 움직이기 시작한 뒤로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해상 아트센터와 손잡으면 대형 컬렉터들이 등을 돌릴 거라는 말이 업계에 퍼졌어요. 그래서 계약을 망설이는 작가들이 적지 않습니다.”은호의 턱선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동안은 아트센터에서 직접 접촉한 작가들에게만 훼방을 놓는 줄 알았다. 그런데 업계
“목상에서 다음 촬영 일정이 어떻게 되죠?”“내일부터요.”“그럼, 제가 일정을 다시 조율해서 연락드릴게요. 그때 목상에서 직접 뵙는 걸로 하죠. 그리고….”예리는 아윤의 손목을 잠시 응시했다.“저와 함께 일하시는 동안은 손목 액세서리 금지입니다.”“맞아, 언니! 그래야 좋은 기운이 안 막힌다나 뭐라나.”주은이 제 소매를 걷어붙이면서까지 열변을 토했다.아윤은 마치 용한 무당의 비방이라도 전해 들은 것처럼 결연한 표정으로 고개를 세차게 끄덕였다.“…명심할게요.”“그럼, 상담은 이쯤에서 마무리해도 될까요? 저도 곧 다음 회의가 있어서요.”“앗, 네! 오늘 진짜 감사했습니다. 주은아, 너도 예리 씨 소개해 주고 여기까지 같이 와줘서 정말 고마워.”주은이 부드럽게 입꼬리를 올리며 손사래를 쳤다.“아휴, 우리 사이에 무슨! 이번에 꼭 잘됐으면 좋겠다. 예리야, 우리 아윤 언니 건은 정말 잘 부탁해!”예리가 알겠다는 듯 눈을 깜빡이며 소진에게 시선을 돌렸다.“강 비서님, 아윤 씨께 사전 설문지 전달해 주세요.”“알겠습니다. 잠시 이쪽으로 오시겠어요?”소진이 문고리를 돌리려는 찰나, 타이밍 좋게 바깥에서 정갈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단정하게 검은색 슈트를 차려입은 은호의 비서, 선우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밖으로 향하는 소진과 아윤에게 가볍게 인사를 건넨 그는 소파에 앉아 있는 이들에게 다가와 차분히 고개를 숙였다.“이사님. 외부 미팅 시간 다 되어서 모시러 왔습니다.”은호가 클래식한 손목시계를 내려다보곤 소파에서 느릿하게 몸을 일으켰다. 재킷 끝을 팽팽하게 잡아당겨 옷매무새를 정리한 그는 예리를 내려다보았다.“저는 미팅이 있어서 먼저 일어나겠습니다.”몸을 돌려 문으로 향하려던 은호는 멈칫하더니, 다시 몸을 돌려 예리와 시선을 맞추었다.“목상군 출장 일정 정해지면 바로 공유해 주시죠. 제 스케줄 맞추겠습니다.”“네, 알겠습니다.”인사를 건넨 후 선우의 뒤를 따라 문으로 향하는 은호의 발걸음은 오늘따라 유난히 더뎠다.문이 닫히고
순간 등줄기에 소름이 오소소 돋아난 주은이 사색이 되어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아니야! 나 절대 말 안 했어! 그냥 너한테 가면 좋아하는지 아닌지 확실히 확인할 수 있다고만….”손사래를 치던 주은이 살려달라는 듯 아윤을 바라보자, 아윤이 테이블 쪽으로 몸을 기울이며 말을 거들었다."맞아요. 요즘 결혼정보회사들은 AI 기술이 워낙 정교해서, 데이터만 넣으면 심리 분석까지 전부 가능하다면서요?”“아… AI 기술이요.”예리가 한 쪽 눈썹을 삐딱하게 꿈틀거리며 주은을 짓씹을 기세로 훑었다. 그러고는 언제 그랬냐는 듯 안타까운 표정으로 무릎 위로 깍지 낀 손을 내려놓았다.“음, AI… 아니, 저희 회사 시스템으로 상대방의 호감 여부를 분석해 드릴 수는 있어요. 다만, 정말 그게 전부예요. 분석 결과가 어떻든 아윤 씨의 마음을 받아들일지 말지는 오로지 상대방의 선택에 달린 문제니까요.”“저는 그거면 충분해요. 저를 싫어하는 사람을 억지로 좋아하게 만들 자신은 없지만, 저를 좋아하는 사람이 저를 사랑하게 만드는 건 자신 있거든요.”“…….”“만약 제 착각이 아니라 그 사람도 날 좋아하는 게 맞다면, 내 모든 걸 걸고서라도 그 사람 마음 얻어낼 거예요. 하지만….”잠시 말을 멈춘 아윤이 쓸쓸히 미소 지었다. 그러곤 주먹을 꼭 쥐어 가슴께에 얹었다.“그게 아니라 정말 나 혼자만의 기우라면… 깨끗하게 포기할게요. 그러니까 제발 도와주세요, 예리 씨. 그 사람의 진짜 마음이 어떤지만 확인해 주세요.”잠시 말없이 아윤을 바라보던 예리가 물었다.“…상대방에게 직접 물어는 보셨나요? 본인을 좋아하는지?”아윤이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당연히 물어봤죠. 그런데 그 사람은… 저를 이성으로 본 적이 없대요. 하지만… 그때 그 사람의 눈빛은 정반대였어요! 저 연기하는 사람이에요. 눈빛이 진심인지 가짜인지 정도는 누구보다 잘 안다고요. 심지어… 결정적인 사건도 있었어요.”“결정적인 사건이라뇨?”그때 일을 떠올리는지 아윤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걸렸다.“제가 촬영
“주은이한테 이야기 많이 들었어요. 롤모델인 선배라고 하도 자랑을 해서요.”“어머, 정말요? 주은이가 과장이 심했네.”생각보다 낮은 음조가 예리의 귓가를 감쌌다. 앳된 얼굴 뒤에 숨겨진 지적인 저음과 아나운서처럼 정확한 발음. 그 반전 매력 하나만으로도 예리는 왜 대한민국의 모든 시나리오가 그녀에게 쏟아지는지 단번에 납득했다.“예리 씨야말로 세상에 둘도 없는 천사라고, 주은이가 입이 마르도록 칭찬하던걸요?”“천사요…? 제가요?”예리가 눈을 가늘게 뜨고 째려보자, 주은은 슬쩍 시선을 피하며 입술을 쭉 내밀었다. 그러더니 양손으로 파닥파닥 천사 날갯짓을 해 보였다.하여튼, 하는 짓만 보면 친구가 동생이라 해도 이상할 게 없었다. 예리는 속으로 혀를 차며 다시 아윤에게 시선을 돌렸다.“오늘 어떤 일로 저를 찾으신 걸까요? 혹시, 커플 매칭 때문인가요?”아윤은 마음의 준비가 필요한 듯 차가운 커피를 한 모금 마시며 잠시 뜸을 들였다.달그락.유리잔을 테이블에 내려놓은 그녀가 예리와 시선을 정확히 맞췄다. 조금 전의 수줍던 미소는 지워진 채, 배우 오아윤만 보여줄 수 있는 단호하고 흡입력 있는 눈빛이었다.아윤이 차분하게 입을 뗐다.“저는 커플 매칭이 필요하지 않아요.”“…네?”“이미 좋아하는 사람이 있거든요.”덤덤하게 흘러나온 메가톤급 폭탄 발언에 소진과 은호의 눈이 동시에 커졌다. 아무리 주은의 친구라지만 오늘 처음 본 예리에게 서슴없이 사적인 내용을 털어놓는 그녀의 태도에 예리 역시 말문이 막혔다. 정작 폭탄을 던진 본인은 평온한 얼굴로 말을 이어갈 뿐이었다.“실은 지금 찍고 있는 사극 촬영 때문에 요 몇 달 동안 ‘목상군’이라는 곳에서 지내고 있어요.”‘목상군?’예리의 머릿속으로 홈쇼핑 쇼호스트가 사과즙을 단숨에 들이켜고는 '목상군 유기농 햇사과로 짠 최상품!'이라며 호들갑을 떨던 장면이 스쳐 지나갔다.“혹시, 사과로 유명한 그 목상군 말씀인가요?”“네, 맞아요. 촬영장 근처에 사과 과수원이 하나 있거든요. 쉬는 시간에 스태프들
“그러니 은호 너라도 가야 하지 않겠니? 엄마는, 우리 착한 아들이 절대 날 실망시키지 않을 거라는 걸 잘 알아.”해미가 쥐고 있던 은호의 손에 힘을 주었다. 부드러운 손길과 달리, 눈빛은 서늘할 만큼 강압적이었다.해미가 자신을 '아들'이라 불러줄 때마다, 그는 매번 무너졌다. 그녀가 목적이 있을 때만 어머니 행세를 한다는 걸 잘 알면서도, 은호에게는 그 가식적인 온기조차 절실했다.그녀와 두 형조차 자신을 외면한다면 정말 아무것도 남지 않을 거라는 공포. 은호는 이번에도 그녀를 실망시키지 않기 위해 착한 아들의 가면을 쓰기로
“그래서? 너는 그 여자가 신랑 전 애인인 줄 어떻게 알았어?”이야기에 몰입하느라 젓가락질 한 번 못 한 주은이 물었다.“화장실에서 나란히 서서 손을 씻는데, 그 여자 손목에 문양이 보이더라고. 묘하게 예감이 이상해서 따라 나갔지.”예리가 찻잔을 내려놓으며 무심하게 덧붙였다.“그런데 신랑을 몰래 지켜보더라. 죽일 듯이 노려보는 눈빛에 문양까지 반짝이는데, 전 애인 말고는 설명이 안 되지.”“와, 세상에 그런 일이 다 있냐.”“내가 항상 말하잖아. 사랑, 그거 별로 특별한 감정 아니라고. 오늘 네 배역도 솔직히 이해 안
웨딩홀이 일순간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혜영의 부모가 경악한 얼굴로 자리에서 엉거주춤 일어났다.“이게 무슨…!”하객들은 이 상황을 놓칠세라 앞다투어 스마트폰을 꺼내 촬영하기 시작했다.“뭐, 뭐라고요…?”혜영이 귀를 의심하며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여자는 대답 대신 가방에서 사진 뭉치를 꺼내 혜영의 가슴팍으로 사납게 내던졌다.사진들이 파르르 흩날리며 바닥으로 떨어졌다.한 장, 한 장 주워 확인하던 혜영이 비명을 막으려는 듯 급히 입을 틀어쥐며 주저앉았다.“이, 이게….”하지만 사시나무 떨듯 잘게 떨리는 손끝까
주은은 찻잔을 들어 한 모금 마셨다."그거 말고는 더 들은 게 없는 거 같은데…."예리는 말없이 제 접시 위의 음식을 뒤적였다.연예계는 물론 스포츠, 정치계까지 발이 넓은 주은조차 이 정도라면 유은호라는 남자를 파악하는 건 생각보다 더 까다로운 과제가 될 것 같았다.“아트센터 행사 말고는 외부 활동도 아예 없는 것 같던데. 친구도 없고, 모임도 안 하는 것 같고… 아! 유은호 아는 사람, 딱 한 명 있다!”주은의 실낱같은 말에 젓가락을 내려놓은 예리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누구?”순간 주은이 대답 대신 미간을 잔뜩 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