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g-log in같은 시각, 아르젠트 궁의 집무실.
르세인은 창밖을 등진 채 커다란 마호가니 책상 앞에 앉아 있었다. 방금 전까지 전장 보고서를 검토하던 그의 펜 끝은 허공에 그대로 멈췄다. 그의 뇌리는 방금 목격한 한 장면을 반복해서 재생했다. 짙푸른 녹음 속에서 유독 이질적으로 튀어 오르던 그 와인빛 머리카락과 루비빛 동공. 그는 그것을 아름답다고 정의하지 않았다. 미학적 가치는 주관적인 변수일 뿐, 그의 논리 세상에서는 무가치한 정보였다. 그러나… 그 선명함만은 분명 달랐다. ‘가시성이 지나치게 높군.’ 르세인은 눈을 감았다. 감긴 눈꺼풀 너머로 엘라엔이 고개를 들어 자신을 올려다보던 그 찰나의 순간은 인상처럼 박혔다. 자신을 보고 분명 놀랐음에도 시선을 피하지 않고 날을 세우던 그 붉은 눈동자. 그건 르세인이 평생 보아온 질서와는 정반대 지점에 서 있는 것이었다. 무질서하고, 감정적이며, 선명하게 타오르는 생명력. “바델.” 르세인이 입을 열었다. 대기하던 부관 바델은 소리 없이 다가왔다. “폐하의 다과회에 참석했던 명단 중, 와인빛 머리카락을 가진 영애는 누구인가.” 바델은 그의 물음에 잠시 당황했으나 이내 숙련된 자세로 답했다. “제국 제일 가문, 라안느 공작가의 영애입니다. 전하께서 전장에 계신 동안 황후 폐하께서 직접 황태자비 후보로 공표하신 분이기도 합니다.” 황태자비 후보. 그 수식어를 듣는 순간 르세인의 손끝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황태자비라….” 자신은 곧 황태자가 될 것이고, 자신의 세상은 완벽한 질서 아래 통제되어야 했다. 그런데 그 질서의 핵심 조각이 될 후보가 황궁의 하찮은 변수와 섞여 무의미한 감정을 소모하고 있었다. 그건 명백한 오점이었다. “비논리의 극치이군.” 그는 자신이 가져야 할 가장 화려하고도 결함 있는 조각에 이름을 붙였다. 관심도, 연모도 아니었다. 정교한 기계 장치 속에 잘못 끼워진 나사 하나를 제자리로 돌려놓으려는 지독한 강박이었다. *** 황궁 서문을 빠져나온 마차는 거칠게 흔들리며 마레즈나로 향했다. 엘라엔은 가죽 시트에 몸을 파묻은 채 창밖을 응시했다. 어느새 해는 뉘엿뉘엿 저물어갔다. ‘르세인 폰 루카르디아.’ 엘라엔은 그 이름을 입안에서 작게 굴려 보았다. 혀끝의 감각이 이상할 정도로 낯선 이름이었다. 사교계에서는 그가 가진 완벽한 외모를 칭송했다. 하지만 정작 누구와도 온기를 나누지 않는다는 소문의 주인공. 그에 대한 소문들은 오히려 그가 지닌 것보다 미화되었다고 엘라엔은 생각했다. 그는 차가운 것이 아니라 온도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 기계 같았으니까. 마침내 마레즈나의 철문이 열리고 익숙한 정원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평소라면 안락하게 느껴졌을 장미 향기가 오늘따라 숨이 막히는 듯했다. “영애님, 도착했습니다.” 하녀 마리가 마차의 문을 열자 엘라엔은 조심스럽게 바닥으로 발을 내디뎠다. 현관 앞에는 라안느 공작 에드먼이 뒷짐을 지고 서 있었다. “다녀왔느냐, 엘라엔.” 에드먼의 시선이 엘라엔의 흐트러진 머리칼과 먼지 묻은 구두 끝을 훑었다. 엘라엔은 그의 의심 어린 눈빛을 읽어내며 입매를 늘였다. “네, 아버지. 폐하께서 내주신 차가 유독 향긋해서 시간 가는 줄 몰랐어요.” “그래. 라안느가의 영광은 너에게 달려 있다는 걸 결코 잊지 말거라.” 에드먼은 엘라엔의 뺨을 가볍게 두드리고는 먼저 들어섰다. 그 짧은 접촉조차 애정보다는 확인에 가까웠다. 엘라엔은 자신의 방으로 돌아와 거울 앞에 앉았다. 화장을 지우고 드레스를 벗어던졌으나 등 뒤에 꽂혔던 그 소름 끼치고 따가운 시선은 여전히 화끈거렸다. 그녀는 주먹을 꽉 쥐었다. 그 남자와 다시는 마주치고 싶지 않았다. 왠지 모르게 불쾌하고 음습했기에. 이런 알 수 없는 찝찝한 감정을 느끼게 하는 건 그가 처음이었다. 하지만 다음 날 아침. 창가로 쏟아지는 찬란한 여름 햇살은 어제의 오한이 기우였다는 듯 그녀를 안심시켰다. 오늘은 황실의 승전 축하 연회가 열리는 날이었다. 르세인의 귀환을 축하하는 자리였으나 엘라엔에게 그 주인공은 르세인이 아니었다. “영애님, 오늘은 이 사파이어 장식을 하시는 게 어떨까요? 이황자 전하께서 푸른색을 좋아한다고 하셨잖아요.” 하녀 마리의 들뜬 목소리에 엘라엔은 거울을 보며 수줍게 웃었다. 이황자. 이안 폰 루카르디아. 르세인의 동생이자 황후의 또 다른 적통인 그는 르세인이 전장을 누비는 동안 황궁의 사교계를 지켜온 다정하고 유능한 황자였다. 사교계의 모든 이들은 입을 모아 말했다. 비록 르세인의 무력이 출중하나 제국의 황제가 되기에 더 적합한 인품과 덕망을 갖춘 이는 이안이라고. 엘라엔 역시 그 의견에 전적으로 동의했다. 아니, 동의해야만 했다. 이안이 황태자가 되어야만 그녀가 꿈꾸는 마레즈나의 평화와 카시안의 우정이 안전할 수 있을 테니까. 연회장으로 향하는 마차 안에서 엘라엔은 흐트러진 호흡을 가다듬었다. 르세인이라는 기괴한 변수가 나타나긴 했지만 제국은 여전히 이안이라는 견고한 지휘 아래 돌아갔다. *** 에르디엔의 대연회장은 눈부시게 빛났다. 수많은 촛불이 크리스털 샹들리에에 반사되어 비산했고, 악단의 연주는 잔잔한 호수처럼 부드럽게 홀을 채웠다. 엘라엔은 라안느 문양이 새겨진 부채를 천천히 흔들며 사람들의 인사를 받았다. 어제 정원에서 느꼈던 그 기분 나쁜 시선의 잔상은 화려한 드레스와 샴페인의 거품 속에 녹아드는 듯했다. “라안느 영애. 오늘도 꽃들을 무색하게 만드는 미모로군요.” 군중을 헤치고 다가온 이는 이안이었다. “이황자 전하를 뵙습니다.” 엘라엔은 우아하게 무릎을 굽혔다. 이안은 다정한 미소를 지으며 엘라엔의 손을 잡아 제 입술로 가져갔다. 르세인의 시선이 닿았을 때 느껴졌던 소름 끼치는 전율과는 정반대의, 익숙하고도 안락한 온기였다. “형님이 다시 돌아오니 사교계가 떠들썩하더군요. 하지만 영애,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형님은 곧 다시 전장으로 떠날 것이니. 이 황궁의 평화를 지키는 것은 결국 저의 몫이지요.” 이안의 확신에 찬 어조에 엘라엔은 마음 한구석이 편안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래, 르세인은 지나가는 폭풍일 뿐이야. 제국의 진정한 차기 태양은 이 다정한 황자이고 나는 그의 곁에서 라안느 가문의 영광을 이어가면 돼. 이건 엘라엔이 상상한 가장 완벽하고 정합적인 미래였다. 이안과 대화를 나누며 샴페인을 한 모금 마신 엘라엔은 비로소 긴장을 완전히 풀고 웃음을 터뜨렸다. 이안의 가벼운 농담과 영애들의 간드러진 웃음소리가 어우러져 연회장의 분위기는 정점에 달했다. 하지만 그 이면의 서늘함이 도사리는 즐거움의 한가운데에서, 엘라엔은 다시 한번 기묘한 위화감을 느꼈다. 수천 명의 군중 속에서 오직 자신만이 누군가에게 발가벗겨진 기분. 화려한 음악 소리가 갑자기 먼 곳에서 들리는 것처럼 먹먹해지고, 주변 공기가 급격히 식어가는 듯한 감각. 엘라엔의 동공이 무언가에 강렬하게 찔러 오는 것을 느끼며 발악하듯 흔들리기 시작했다. 새하얀 꽃들 너머 혼자만이 짙고 짙은 색으로 주변을 물들이고 있는 그 때문에…. 르세인. 그는 연회의 주인공임에도 불구하고 사람들과 섞이지 않은 채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난간에 팔을 기대고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르세인은 이안과 다정하게 손을 맞잡고 있는 엘라엔을, 정확히는 엘라엔의 손목을 감싸고 있는 이안의 손가락을 지독히도 무심한 눈으로 관망했다. 엘라엔의 온몸이 그대로 굳어버렸다. 조금 전까지 느꼈던 안도감은 순식간에 휘발되고 다시금 무채색의 심연이 발밑에서 입을 벌리는 듯한 공포가 밀려왔다. 르세인은 천천히 와인 잔을 입가로 가져갔다. 붉은 액체가 그의 입술을 적시는 순간, 엘라엔은 그것이 와인이 아니라 평화를 찢고 흘러나온 선혈처럼 느껴져 몸을 얕게 떨었다. 이 안온한 질서는 허상이었다. 이안이 약속한 평화 위로 르세인이라는 거대한 포식자의 그림자는 이미 소리 없이 드리워졌다.엘라엔의 말에 르세인의 입가에 희미한 고뇌의 미소가 걸렸다. 그는 엘라엔의 지략이 좋으면서도 가끔은 그 냉철함에 묘한 서늘함을 느꼈다.“…좋습니다. 당장 남부로 정보원들을 급히 파견하죠. 폰테의 창고를 봉인하고 황실의 이름으로 소금을 풀도록 하지.”르세인은 짧은 작별 인사를 남기고 서둘러 밖으로 나섰다. 그가 떠난 자리에는 서늘한 수목 향만이 남았다.이사벨라는 엘라엔을 보며 새침한 눈초리로 말을 꺼냈다.“참 영리해, 넌. 황후 폐하의 독한 사랑까지 네 판의 말로 이용하다니.”“이용하는 게 아니에요, 어머니. 살아남으려는 것뿐이죠.”엘라엔은 창밖을 보았다. 저 멀리 황궁의 실루엣이 보이는 것만 같았다. 그곳 어딘가에서 황후 로잘린은 아들을 위해 한 행동에 대해 기분 좋은 웃음을 흘리고 있을 것이다. ***엘레니르 제국의 수도 카르네티아의 가을은 잔인했다.낮의 태양은 여전히 폰테 후작저를 태웠던 불길의 여열을 머금은 듯 뜨거웠으나 지평선 아래로 고개를 숙이는 순간 대기는 서늘해졌다.그 급격한 온도 차이는 마치 르세인의 아름다운 얼굴 뒤에 숨겨진 잔혹한 본성과도 닮아 있었다.폰테 후작가가 불타오른 지 단 사흘 만에 제국의 남부 경제는 르세인의 손바닥 위에서 다시 쓰였다.황후 로잘린이 뿌린 피 냄새가 채 가시기도 전에 르세인은 그 위로 가장 정교한 논리의 성벽을 쌓아 올렸다.황실 행정부의 집무실에서 르세인은 흐트러짐 없는 자세로 서류 더미를 내려다보았다. 그의 오묘한 녹색 눈동자에는 피로도, 동정도 담겨 있지 않았다. 오직 기계적인 냉정함만이 감돌 뿐.“남부 협곡의 요새는 황실 금위대가 영구 주둔하는 것으로 확정한다. 폰테의 유가족 중 반역에 가담하지 않은 방계 혈족들은 전원 남부 연안의 소금 채취 부역자로 압송하도록.”“전하. 그들은 직접적인 반역 증거가 없습니다. 가혹하다는 여론이 생길 수도…”정무관의 조심스러운 진언에 르세인이 고개를 들어 그를 보았다. 시선이 닿는 것만으로도 정무관은 숨이 막히는 압박감을 느껴야 했다.
다음 날 아침. 폰테 후작가가 멸문지화를 당했다는 비보는 날카로운 칼날이 되어 라안느 공작저에 도착했다.자신의 방에 감금되어 있던 엘라엔은 창문을 타고 넘어오는 불길한 종소리를 들었다. 황궁에서 울리는 그 종소리는 누군가의 죽음을 알리는 장송곡이었다.‘……뭔가 잘못됐어.’엘라엔은 책상에 놓인 지도를 내려다보았다. 르세인과 함께 그렸던 그 정교한 도면 위로 붉은 잉크를 쏟은 듯한 불길한 예감이 스쳤다.폰테 후작가의 처리는 엘라엔의 조언에서 시작된 일이었다. 그런데 그 과정이 이토록 피비린내 나게 변했다면 르세인의 칼은 이제 누구를 향하게 될 것인가.방문 너머에서는 공작 부인의 히스테릭한 발소리가 들려왔다. 마레즈나에 불어닥칠 폭풍의 서막이었다.한참 뒤, 방문이 거칠게 열렸다. 평소라면 결코 허용되지 않았을 무례한 소음이었다.“영애님! 황자 전하께서…! 전하께서 와 계십니다!”헐떡이며 들어온 하녀의 얼굴은 하얗게 질려 있었다. 엘라엔이 자리에서 일어나 천천히 걸음하자 그녀의 연한 보랏빛 드레스 자락이 바닥을 쓸며 기분 나쁜 마찰음을 냈다.“…공작 부인께서는 어디 계시지?”“이미 대접견실에서 전하를 맞이하고 계십니다. 영애님… 황자 전하의 기색이… 예사롭지 않으십니다.”엘라엔은 겁에 질린 하녀를 뒤로하고 방을 나섰다. 감금 상태나 다름없는 처지였지만 지금 이 순간 그녀를 막을 수 있는 기사는 아무도 없었다.복도를 지나는 동안 마주친 사용인들은 모두 고개를 숙인 채 떨고 있었다. 제국의 거대 세력 중 하나였던 폰테가 단 하룻밤 만에 사라졌다는 공포는 공작저의 공기마저 얼어붙게 만들었다.‘황후 폐하께서 움직이셨어.’그건 엘라엔의 계산에 없던 변수였다. 르세인과 함께 세웠던 계획은 폰테 후작을 서서히 압박해 그들의 자금줄을 르세인의 수하로 귀속시키는 것이었다.폰테 후작가가 장악하고 있던 협곡은 남부의 숨통이나 다름없었다. 제국의 주된 소금 산지인 남부 해안가에서 내륙으로 들어오는 유일한 통로가 바로 그 좁고 험한 협곡이었기 때
황궁의 가장 높은 탑 위. 르세인은 난간에 기대어 서 있었다.바람이 그의 금빛 머리카락을 흔들었다. 그의 눈은 멀리 마레즈나가 있을 곳을 향해있었다.르세인의 입가에 아주 희미한 미소가 차올랐다.“서신은… 곧 받겠지.”그것을 읽고도 눈치채지 못한다면 그건 바로잡아야 할 오류이고.그는 나직이 부연하며 천천히 눈을 감았다.*** 라안느 공작저 마레즈나의 영애 침소는 공식적인 감옥이 되었다. 참나무 문밖에서는 하녀들이 교대로 자리를 지켰고, 정기적으로 문이 열릴 때마다 들리는 열쇠의 금속성 마찰음은 엘라엔의 신경을 긁어내렸다.창밖으로는 초가을의 노을이 보랏빛으로 번지고 있었다. 한때 붉게 타오르던 정원의 장미들은 거뭇하게 말라비틀어져 가느다란 가시들만이 허공을 찔렀다.“영애님. 황궁에서 전령이 도착했습니다. 황자 전하께서 보내신 서신입니다.”하녀장이 은제 쟁반 위에 놓인 서신을 내밀었다. 르세인의 개인 인장인 검은 왁스가 찍힌 봉투에서는 독한 잉크 냄새가 배어 나왔다. 엘라엔은 떨리는 손으로 서신을 집어 들었다. 서신의 종이는 최급 양피지였고 그 질감은 르세인처럼 매끄럽고 서늘했다.[영애.황궁의 정무는 북부의 전장보다 더 치밀한 계산을 요구합니다.폰테 후작가는 서서히 질식하고 있죠.당신의 논리가 제국의 판도를 바꾸는 광경을 지켜보는 것은 내가 겪어본 그 어떤 승전보다도 자극적입니다.하지만 마레즈나에서 들려오는 소식은 그리 유쾌하지가 않더군요.당신은 내 곁에서 가장 화려하고 단단한 정점에 서야 할 존재라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엘라엔은 서신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역시나 르세인은 자신의 일거수일투족을 이미 제 손바닥 위에 올려두고 있었다.[또한, 공작 부인이 준비하는 그 모든 억압과 고통을 기꺼이 받아들이십시오. 명심하십시오. 당신의 모든 것은 나의 논리 안에 있음을.책봉식 이후 내가 당신의 목에 걸어줄 것은 단순한 보석이 아니라 나와 당신을 영원히 묶을 제국의 사슬이 될 겁니다.]서신을 다 읽은 엘라엔은 숨이 막혀 코
엘라엔은 카시안을 똑바로 보았다.카시안은 대답 대신 가죽 함을 열었다. 그 안에는 보석 대신 수십 장의 얇은 양피지가 들어 있었다.부족함 없는 엘라엔에게 블러드가 보낸 정보의 선물은 그 어떤 보석과도 비할 수가 없었다.“황자가 폰테 후작가를 지우겠다고 하셨다며.”엘라엔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 은밀한 이야기를 카시안이 알고 있다는 사실에 소름이 돋았다.카시안은 당혹감이 깃든 엘라엔의 손짓을 보며 다가가 그녀의 손목을 부드럽게 쥐었다.“황자는 너를 자신의 옆에 세울 완벽한 파트너로 만들지. 하지만 엘라엔. 파트너는 언제든 대체될 수 있다는 걸 명심해. 그러나….”“…….”“공범은 다르지 않겠어?”카시안의 목소리는 낮고 은밀했으며 매혹적이었다.“황자가 너에게 칼을 쥐여주었다면 나는 그 칼이 박힐 급소를 알려줄게.”엘라엔은 숨을 들이켰다. 르세인이 주는 압박이 완벽해져야 한다는 강박이었다면 카시안이 주는 압박은 헌신이었다.“엘라엔.”카시안은 엘라엔의 드러난 뺨에 자신의 손등을 대었다.“네가 황자의 눈을 속이는 동안, 나는 제국의 어둠을 너의 발치에 깔아둘게.”서재 창밖으로는 이제 완전히 빛을 잃은 장미 정원이 보였다. 시든 꽃잎들이 바람에 날려 사라지고, 그 자리를 초가을의 찬 바람이 채웠다.엘라엔은 카시안이 건넨 블러드의 비밀 장부를 가슴에 품었다. “고마워, 카시안.”엘라엔의 미소 위로 자애로운 햇빛이 내려앉았다. 이사벨라와 에드먼은 서재 밖에서 경의 등장에 전전긍긍하고 있을 것이고, 르세인은 자신의 논리가 완벽하게 작동하고 있다고 확신하고 있을 것이다.그 모든 착각의 한가운데서 엘라엔은 두 남자의 비호 아래 제국의 정점을 향한 가장 우아하고 잔혹한 발걸음을 내디뎠다.*** 카시안이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고 떠난 라안느 공작저의 아침은 처참하게 고요했다.에드먼과 이사벨라는 질식할 듯 무거운 분위기를 조성하며 엘라엔을 경악스럽게 보았다.식탁 위에는 시나몬을 뿌린 따뜻한 오트밀과 요거트, 그리고 호두를 넣어 구운 빵이 차
창백한 오후의 햇살이 시든 장미 덤불 위를 무심하게 비출 무렵, 마레즈나의 정문 너머로 들려오는 말발굽 소리는 유독 묵직하고 절도가 있었다.마레즈나의 집사장은 사색이 된 얼굴로 에드먼 앞에서 고개를 숙이며 외쳤다.“공작님! 베, 베르제 대공저에서 마차가 도착했습니다!”“베르제라고? 대공께서는 거동이 불편하실 텐데 누가 왔단 말이냐.”에드먼이 의아한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사벨라 역시 부채를 꽉 쥐며 에드먼을 뒤따랐다.마레즈나의 정문으로 들어선 마차는 대공가의 문양만이 간결하게 새겨졌다. 하지만 그 마차를 호위하는 기사들의 기세는 르세인의 정예병들조차 긴장시킬 만큼 서슬 퍼런 살기를 품고 있었다.이사벨라는 현관 홀 입구에 서서 에드먼을 힐끗 바라보며 말을 흘렸다.“아무리 베르제라고는 하나, 전령도 없이 이리 무례하다니요….”“대공의 친필 서신을 지참했다 하니 어쩔 수 없지 않소. 일단 맞이합시다.”라안느 공작 에드먼은 불쾌감을 억누르며 현관을 바라보았다.마차 문이 열리고 한 남자가 내렸다. 그는 제국의 법도가 정한 제식 예복도, 귀족들이 즐겨 입는 화려한 예복도 입지 않았으며 베르제의 군인 또한 아니었다.현관 홀의 문이 열리자 초가을의 선선한 바람이 안으로 밀려들었다.곧 그가 저택 안으로 들어서자 에드먼은 본능적으로 뒷걸음질 쳤다. 남자의 얼굴은 반쯤 가려져 있었음에도 희미하게 보이는 턱 선과 굳게 다문 입술은 범상치 않은 고결함을 풍겼다.“베르제 대공의 명으로 곧 황태자비가 될 영애를 축하하기 위한 작은 성의를 가져왔습니다.”남자의 목소리는 낮고 거칠었으나 묘하게 우아했다. 이사벨라는 그의 무례한 복색과 오만한 태도에 눈썹을 치켜세웠다.“대공 각하의 손님이라니 예우는 갖추겠습니다만… 성함조차 밝히지 않는 것은 라안느가에 대한 결례가 아닌지요?”이사벨라의 가시 돋친 비아냥에도 그는 눈 하나 깜빡이지 않았다. 대신 에드먼과 이사벨라 뒤에 있는 엘라엔에게 시선을 맞췄다.부딪힌 그의 푸른 눈동자는 평소보다 훨씬 깊이가 있었다.
르세인의 오만함은 압도적이었으나 그가 제시하는 이 비정한 제안은 엘라엔에게 거부할 수 없는 권력의 맛을 보여주고 있었다.내부의 공기는 르세인이 내뱉은 서늘한 질문으로 인해 얼어붙은 듯했다. 엘라엔의 손가락 사이에 쥐어진 금제 깃펜의 촉은 날카로운 금색 빛을 튕겨냈다. 그녀의 등 뒤에 밀착한 르세인의 체온은 뜨거웠으나 발산하는 기운은 북부의 만년설처럼 차가웠다.엘라엔은 지도를 천천히 훑어 내렸다. 노라 남작, 반디아 연맹, 그리고 그들 사이에 거미줄처럼 얽힌 보급로들….르세인은 그녀가 가장 거대하고 눈에 띄는 반디아를 고를 것이라 예상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엘라엔은 블러드에게 배운 논리를 떠올렸다.“전하께서는 효율을 중시하시죠.”엘라엔의 목소리가 고요한 서재를 울렸다. 그녀는 깃펜을 움직여 명단의 가장 구석에 적힌 이름조차 생소한 폰테 후작가의 이름 위에 단호하게 선을 그었다.“…폰테라고.”르세인의 눈빛이 돌변했다. 흥미로운 변수를 발견한 포식자의 반응이었다.“반디아는 거대하지만, 그들은 욕망으로 움직이는 집단입니다. 욕망은 돈으로 매수할 수 있죠.”“…….” “하지만 폰테 후작가는 반디아의 상선들이 제국 남부로 진입할 때 반드시 거쳐야 하는 협곡의 통행권을 쥐고 있어요.”“…….”“이들은 명예를 중시하는 척하지만 실상은 소금 전매권의 문지기 역할을 하며 수수료를 챙기고 있죠.”엘라엔은 깃펜을 내려놓고 고개를 살짝 돌려 르세인을 응시했다.“반디아를 치는 것은 거대한 파도를 막는 일이지만, 폰테를 지우는 것은 파도가 지나는 길목을 없애는 일입니다. 문지기가 사라진 길 위에서 탐욕스러운 상인들은 서로를 물어뜯으며 자멸하겠죠.”“…….”“전하께서 원하시는 가장 적은 비용으로 도출하는 최대의 파멸은 바로 이것이 아닐까요?”잠시 동안 서재에는 창밖의 장미 넝쿨이 바람에 부딪히는 소리만이 감돌았다.르세인은 엘라엔의 등을 압박하던 힘을 서서히 풀었다. 그리고 그녀의 턱을 잡아 자신의 얼굴 쪽으로 더욱 가까이 끌어당겼다.“…놀랍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