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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내면의 파국

Author: 데이지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06-27 11:06:47

대비전의 문이 조용히, 그러나 분명한 무게를 가지고 닫혔다.

문 하나가 닫힐 때 이수는 그것이 단순한 문이 아니라

자신을 향한 세상의 경계가 ‘철컥’ 하고 잠기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그 작은 소리 하나가 가슴 깊은 곳에서 오래도록 울렸다.

'나는… 무사한 것일까.'

걸음을 떼려 했으나 발끝이 바닥에 달라붙은 것처럼 떨어지지 않았다.

마치 조금만 움직여도 쏟아질 것 같은 감정들을 간신히 붙들고 서 있는 사람처럼.

궁녀가 다가와 조심스럽게 말했다.

“빈마마… 밖으로 모시겠사옵니다.”

이수는 겨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회랑을 나와 대비전의 뜰에 발을 디디는 순간

바람 한 줄기가 옷자락을 스치고 지나가며 심장이 한 번 크게 패였다.

마치, 대비전에서 버텨낸 모든 담담함이 문밖에서 허물어지는 듯했다.

그녀는 회랑 기둥 가까이에서 잠시 숨을 고르고 섰다.

궁녀들이 뒤에서 조심스레 거리를 두고 따르고 있었지만 아무도 감히 말을 걸지 않았다.

달빛도, 햇빛도 아닌 그저 적막이 깔린 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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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천년의 기억   94. 밤이 깊을수록 드러나는 그림자의 결

    행렬이 지나가고, 궁의 그림자가 길어지고,저녁 바람이 시들어가는 시간이었지만그의 가슴속은 조금도 식지 않았다.석윤이 뒤에서 다가왔다.“경… 저하께서 환궁하신 뒤의 분위기가심상치 않사옵니다.”도진은 대답하지 않았다.대답을 하지 않아도 두 사람 모두 알고 있었다.심상치 않은 이유는 궁의 정세 때문만이 아니었다.석윤은 잠시 머뭇거렸다가 조용히 말을 이었다.“…빈마마의 처소로상궁들이 여러 차례 들락거렸다 하옵니다.대비전에서도 계속 사람을 붙였다 하오니…”도진의 손끝이 미세하게 굳었다.그러나 그는 그 굳음을 들키지 않기 위해검집을 천천히 쓸어내렸다.“오늘 하루는 모두의 시선이… 너무 많이 움직였구나.”그 말은 누구에게 한 말인지조차 불명확했다.석윤에게 한 말이면서도 자신에게 하는 말 같았고, 또한 꽤 먼 곳을 향해 날아가는 말 같았다.가야 할 자리로 돌아가려 할 때 석윤이 다시 말했다.“경. 오늘… 표정을 숨기신 것, 정말… 어려우셨지요.”도진은 잠시 멈췄다.그러나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숨기지요. 숨길 수 없는 것들이 드러나기 전에.”그는 그렇게 말하고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그 걸음은 군영에서의 단단함을 지키려 했지만그 안쪽에서는 오늘 하루 누적된 파문이 마침내 형태를 가지려는 듯한 묵직한 울림을 품고 있었다.하늘은 완전히 어두워지고 궁의 등불이 하나둘 켜질 때궁 전체에는 서로 다른 세 사람의 마음이 보이지 않는 결을 만들며 흘러가고 있었다.이수의 흔들림,세자의 이상함,도진의 가라앉지 않는 파문.그 결들은 아직 서로 닿지 않았지만 이미 같은 방향으로 조용히 흐르고 있었다.그리고, 그 흐름은 머지않아 궁의 밤을 완전히 바꾸어 놓을 것이다.저녁 무렵의 빛이 완전히 사라지자 궁은 전혀 다른 얼굴로 변했다.낮에는 규율과 예법으로 움직이던 공간이 밤이 되자 숨겨진 속내와 균열로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전각 사이사이에 켜진 등불은 어둠을 밀어내기 위해 밝아진 것이 아니라오히려 어둠을 더 선명하게 드러내기

  • 천년의 기억   93. 충분히 보았다는 서늘한 한 마디

    해가 서쪽으로 기울기 시작하자 궁의 기운은 낮과는 전혀 다른 결을 띠기 시작했다.햇빛이 사라지면 늘 찾아오던 고요였지만오늘의 고요는 마치 눈에 보이지 않는 실이 곳곳에서 조용히 당겨지고 있는 듯한 긴장으로 촉수가 세워져 있었다.대비전으로 향하는 길에서 이수는 걸음 한 번마다 심장에 작은 돌이 얹히는 것 같은 묵직함을 느꼈다.발걸음은 단정했고, 호흡은 조용했지만 그 조용함이 오히려 자신의 마음을 더 자극하고 있는 듯했다.궁녀가 뒤에서 속삭였다.“마마… 대비마마의 기분이 오늘… 사뭇 다르다 하옵니다.”그 말에 이수는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그러나 속으로는 파문 하나가 천천히 깊어져 갔다.‘오늘… 나의 작은 떨림 하나조차 그분들에게는 시험이 될 것이다.’그녀는 손끝에 힘을 담아 소매 속으로 조용히 손을 모았다.이 검은 심지가 꺼지지 않도록 마음의 불꽃을 붙잡기 위한 몸짓이었다.대비전 안은 낮과 달리 더 깊고, 탁한 정적이 내려앉아 있었다.향 냄새도, 불빛도, 전각의 숨결도 오늘만큼은 모두 이수를 향해 색을 바꾸고 있는 듯했다.대비는 천천히 차를 내려놓았다.“빈이 왔구나. 자리로 들라.”이수는 예를 갖추고 앉았다.대비의 눈빛은 어떠한 온기도 담지 않은 채 이수의 얼굴을 곧게 바라보았다.“오늘 저하를 배향할 때 그 얼굴이… 대단히 평온해 보이더구나.”말은 칭찬처럼 들렸지만, 그 속뜻은 너무도 뚜렷했다.평온을 유지한 자에게 던지는 말은 그 평온을 의심한다는 뜻이었으니까.“빈. 오늘 궁의 모든 시선이 그대의 걸음과 표정을 살핀다는 것을 몰라서 그리 태연했겠느냐.”이수는 짧은 호흡을 삼켰다.“…태연한 것이 아니라 해야 할 도리를 잊지 않기 위해 마음을 다잡았을 뿐이옵니다.”대비의 입꼬리가 아주 미세하게 올라갔다.웃음이라고 하기엔 너무 매서운 선이었다.“마음이란… 겉으로 다 잡을 수 있을 때는 속이 이미… 흔들리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지.”그 말은 이수의 가슴 가장 깊은 곳을 찔렀다.그러나 그녀는 표정 하나 흐트러뜨리지 않았다

  • 천년의 기억   92. 흔들림을 숨긴 얼굴들 사이로

    세자는 전각 앞에 멈춰 서 있었다.그의 서늘한 그림자가 햇빛을 가르며 내려앉자 궁의 숨결이 눈에 띄게 고요해졌다.무엇 하나 소리를 내서는 안 될 것처럼, 바람조차도 조심스레 움직이는 듯했다.이수는 마음을 가다듬고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무탈하시옵니까, 저하.”그 말은 정확했고, 절제되어 있었다.하지만 정확함과 절제만으로는 감춰지지 않는 떨림이 있었다.아주 깊고, 오래된 상흔처럼 그녀의 목소리 끝에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미세한 결이 남아 있었다.세자는 그 결을 놓치지 않았다.현의 시선이 이수의 얼굴을 잠시 머물렀다.그 머묾은 궁중 예를 지키는 수준에서 벗어나지 않았으나그 안에는 이유를 설명할 수 없는 정적이 있었다.“예로다.”현은 조용히 답했다.말투는 예우를 갖추었으나, 눈빛에는 읽히지 않는 무언가가 잠시 스쳤다.그 미세한 순간이 이수의 심장을 한 번 깊게 파문치게 했다.‘왜… 어째서 그 눈빛이 이렇게 낯설지 않은가.’현은 이어서 말을 붙였다.“궁은 그대가 궐무에 빈틈을 남기지 않았다 하였다. 잘 지낸 듯 하여 안심입니다.”칭찬이었지만 그 말 속에는 어딘가 짙은 의미가 섞여 있었다.칭찬과 확인 사이, 예우와 경계 사이의 어중간한 결.이수는 그 결을 알아차렸으나 따라 묻지 않았다.“…저하께서 부재하신 동안 궁이 어지러워지지 않도록 하는 것이 소첩의 도리였사옵니다.”말은 완벽했다.그러나 이수 자신도 눈치채지 못한 사이한순간 아주 부드러운 흔들림이 그 말의 끝자락에 닿아 있었다.현은 그 흔들림을 느낀 듯 시선을 잠시 고정시켰다.그러나 이내 아무 일 없듯 걸음을 옮겼다.“전각에서 다시 보도록 합시다.”세자는 앞으로 천천히 걸어나갔다.행렬이 뒤따랐고, 궁 안의 모든 시선이 그가 지나가는 길에 붙잡혔다.그러나 이수의 시선은 그 길을 끝까지 쫓지 못했다.그녀의 시선이 자기도 모르게 다른 곳에서 걸려버렸기 때문이다.도진.그는 군영의 무사들과 함께 서 있었지만 그 존재만으로도 다른 이들과 선이 달랐다.

  • 천년의 기억   91. 그 낮고 고른 음성 아래에는

    궁문 밖에서 울리던 북은 점점 더 묵직한 울림으로 바뀌어궁의 바람과 기척을 모두 끌어당기고 있었다.기척이 모여들수록 공기는 더 얇아졌고, 누구도 깊게 숨을 들이쉬지 못했다.마치 숨을 크게 쉬는 것조차 궁의 예를 흐리는 일이 되는 듯이.전각을 향해 걷던 이수도 자신의 걸음이 묘하게 가벼워지는 것을 느꼈다.발걸음이 가벼운 건 설렘 때문이 아니라 몸이 ‘준비’라는 긴장에 더 익숙해져 있기 때문이었다.궁에서의 긴장은 언제나 심장을 바닥으로 끌어당기며 시작되었다.궁녀들이 양쪽에 늘어서 있었다.그들의 얼굴에는 긴장과 경계가 섞여 있었지만이수의 얼굴은 마치 안개 위에 얹힌 새벽의 그림자처럼 단정하고 흔들림이 없었다.그러나 그 단정함 아래에는 아무도 모르는 파문이 아주 가늘게 일렁이고 있었다.‘오늘… 그 사람의 얼굴을 마주하게 되겠지.’그 사람이 누구인지 그녀는 입 밖에 낼 수 없었다.아니, 낼 필요도 없었다.말이라는 형태가 붙는 순간 그 마음은 더 위험해지니까.궁은 숨조차도 기록되는 곳이기에 ‘마음의 방향’조차 드러내서는 안 되는 곳이었다.궁문 너머에서는 무사들의 발걸음이 큰 물결처럼 몰려오고 있었다.정제된 발소리는 어지럽게 뛰는 심장의 박동과는 전혀 다른 결을 가지고 있었다.모두가 숨을 삼킨 채 그 소리를 들었다.군영에서는 그 소리를 누구보다 또렷하게 듣는 사람이 있었다.도진.그는 검집을 고쳐 쥔 채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세자의 행렬이 들어오는 길을 향해 촉을 세운 시선은 흔들림이 없었지만가슴 한가운데에서는 말할 수 없는 무게가 차올랐다.석윤이 그의 곁에 멈춰 섰다.“경. 곧 행렬이 도착한다 하옵니다. 대비전에서도 방금 마지막 전갈이 내려왔다 하오니경께서는 오늘… 그 어떤 표정도 드러내시면 아니 된다 하였습니다.”도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말이 필요 없었다.그는 이미 알고 있었다.오늘은 검을 드는 일보다 가슴을 다스리는 일이 더 어려운 날이라는 것을.석윤은 조심스레 말을 이었다.“궁이… 빈마마의 일거수

  • 천년의 기억   90. 환궁의 북이 마음을 가를 때

    정오의 북이 세 번 울리고, 궁의 공기는 한순간에 형태를 달리했다.바람도, 햇빛도, 사람들의 숨결도 모두 같은 방향으로 쏠려 들어갔다.오늘 세자가 돌아온다.그 사실 하나만으로 궁의 수많은 표정이 동시에 굳어졌다.이수는 전각 앞에서 잠시 걸음을 멈추었다.그녀의 시선은 담장 너머를 향하고 있었으나 그 너머의 사람을 볼 수는 없었다.그러나 마음은 이미 그곳을 향해 가 있었고, 그 마음을 억누르는 힘만 더욱 깊어져 갔다.궁녀가 다가와 속삭였다.“마마… 오늘은 빈마마의 표정까지 궁에서 기록한다 하옵니다.상궁들이 곳곳에서… 마마의 숨소리까지 듣고 있사옵니다.”이수는 그 말에 아무런 놀람도, 두려움도 드러내지 않았다.그러나 그녀의 속은 차가운 물결이 한 번 크게 흔들린 듯 미묘하게 떨렸다.“숨을 쉬는 것도 이제는 허락이 필요하다는 말이겠지.”궁녀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이수는 걸음을 내딛었다.그 걸음은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았다.그러나 오직 오늘 하루만큼은 그 걸음의 리듬마저도 궁의 눈들이 헤아리고 있었다.군영에서는 세자 환궁을 위한 준비가 이미 절정에 다다르고 있었다.정렬된 무사들의 발끝은 바람 한 줄기에도 흔들리지 않았다.도진은 그들보다 더 단단하게 서 있었다.그의 앞에는 공문이 놓여 있었고,그 공문에는 오늘 그가 맡아야 할 자리와 그 자리에서의 모든 행동이 적혀 있었다.그 행동 하나하나가 궁의 질서와 체면을 지키는 일이자그 질서 안에서 자신의 마음을 가두는 일이기도 했다.석윤이 다가왔다.“경… 전각에서 빈마마의 동선을 조금 전 다시 보고했다 하옵니다.”도진의 시선이 아주 미세하게 흔들렸다.“…어디로 향하셨느냐.”“대비전과 후원 사이… 하지만 오래 머물지 않았다고 하옵니다. 대비마마의 명 때문이라 합니다.”그녀가 오래 머무르지 못한다는 사실이왜 이토록 가슴을 묵직하게 만드는지 도진은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오늘… 그대의 발걸음은 얼마나 조심스러웠을까.’석윤이 다시 말했다.“경께서도 오늘은 어떤 표정도…

  • 천년의 기억   89. 어느 전각에도 오래 머물지 말라 하심은

    석윤이 다가오며 낮게 말했다.“경. 궁은 누가 움직이는지보다 왜 움직이는지를 먼저 본다 하옵니다.”도진은 눈을 떴다.“알고 있다.”석윤은 조심스럽게 덧붙였다.“그러니 오늘… 경께서는 평소보다 더 마음을 다스리셔야 합니다.”그 말은 조심스러웠으나 그 조심 속에 담겨 있는 말의 진심은 분명했다.경의 마음은 이미 움직였으니 오늘 하루만큼은 그 움직임이 드러나지 않게 하시오.그러나 도진은 외면한 듯 말 없이 걸음을 내디뎠다.그리고, 그 무심한 걸음 하나조차 누군가의 눈에는 이미 어떤 표정으로 보이고 있을지 그는 알고 있었다.이수는 오전 점검을 위해 후원 가까운 전각을 살피고 있었다.햇빛이 이미 담장을 넘어오고 있었고, 정오의 열기는 아직 오지 않았지만그 예고만으로도 공기가 묵직하게 갈라져 있었다.궁녀가 귀에 바짝 대고 말했다.“마마… 오늘은 각 전각에서 마마를 뵙기를 꺼린다 하옵니다.”“…나를?”“예, 마마. 빈마마를 향한 작은 말도 오늘은 조심해야 한다고… 궁인들끼리 서로 경계하고 있사옵니다.”경계. 그 말은 곧 ‘위험’이었다.궁은 언제나 가장 가까운 사람을 먼저 경계했고, 가장 조용한 사람이 가장 많은 말을 듣는 법이었다.이수는 눈을 가늘게 떴다.“오늘 하루는 누구도 믿지 말라는 뜻이겠지.”궁녀는 대답하지 못했다.그러나 그 침묵이 이미 대답이었다.그 순간, 멀리서 금속이 부딪히는 소리가 바람에 실려 들려왔다.군영이었다.정확히는 도진이 있을 자리였다.이수의 발끝이 아주 조금 멈췄다.그 멈춤은 오래가지 않았지만 그 짧은 순간에도 가슴 깊은 곳이 찢어질 듯 흔들렸다.‘경… 오늘 당신은 어떤 마음으로 이 하루를 버티고 있을까.’그녀는 다시 걸음을 옮겼다.천천히, 그러나 확실하게.오늘 하루는 감정을 누르는 날이었다.누군가를 향한 마음이 단 한 번이라도 흔들리면 그 흔들림이 곧 궁의 칼이 될 수 있었다.정오가 가까워질수록 궁은 이상하리만큼 조용해졌다.마치 바람도, 햇빛도, 사람도 모두 한곳을 향해 고개를 돌리는

  • 천년의 기억   6. 시선의 감옥

    그 목소리는 낮고 차분했지만 어딘가 가늘게 떨리는 결이 있었다.그 떨림은 이수만 느낀 것이 아니었다.도진 역시 자신 안에서 무언가 아주 미세하게 흔들리고 있는 것을 어렴풋이 감지하고 있었다.그러나 그 감정의 이름을 알기에는 이 날은 너무 이르고, 운명은 아직 침묵을 지키는 중이었다.둘의 발걸음이 나란히 복도를 따라 이어질 때비 온 뒤의 햇빛이 천천히 두 사람의 그림자를 하나의 긴 선처럼 이어 붙였다.아무것도 시작되지 않은 것 같았으나, 동시에 이미 모든 것이 시작되고 있었다.전각 앞에 도착했을 때, 하늘은 이미 낮빛

  • 천년의 기억   5. 열리지 않는 상자

    아침 햇살이 기와 위를 얇게 훑으며 지나갔다.비가 그치고 얼마 되지 않은 궁의 공기는 습기와 햇빛이 뒤섞여 묘한 온기를 띠고 있었다.이수는 도진의 뒤를 조심스럽게 따라 걷고 있었다.비단 치마가 발목에 스치는 소리가 궁의 긴 복도에 조용히 흩어졌다.걸음을 옮길 때마다 종종 그 소리가 마치 자신이 낯선 인생의 첫 페이지를 넘기는 것처럼 느껴졌다.도진은 일정한 속도로 걸었다.돌바닥 위에 닿는 그의 발걸음은 군더더기 없이 단정했다.앞서가는 그의 뒷모습은 그가 평생 검을 들어왔다는 사실을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을 만큼 기압

  • 천년의 기억   4. 운명의 첫 그림자

    아직 한 마디도 들은 적 없는 사람.이름조차 모르는 남자.하지만 왜인지 모르겠는 떨림이 그의 모습과 함께 가슴 위로 올라왔다.‘저 사람…’그녀는 이유 없이 손끝이 차가워지는 것을 느꼈다.그를 둘러싸고 있는 공기는 다른 무사들과는 달랐다.기세라기보다, 결이 있었다.그 결은 단단하고 곧았지만 어딘가에 오래된 상처를 품은 듯한 분위기였다.한편, 세자의 곁에 서 있어야 할 자리에 그는 정확히 서 있었다.세자 현. 오늘 그녀가 첫 인사를 올려야 할 사람.혼례를 올릴 예비 남편이자, 나라의 중심이 되어갈 사람.그러나 지금

  • 천년의 기억   3. 천 년의 시작, 마주한 운명

    도진의 눈이 미세하게 흔들렸다.소문은 이미 들었지만, 직접 그의 입에서 들으니 사실이 되어버린 느낌이었다.세자가 혼례를 치르는 문제는 나라 전체의 일이며 궁 전체가 흔들리는 날이었다.“좌상댁의 영애라 하더군.”이현이 덧붙였다.“예, 저하.”도진은 짧게 대답했다.그 이상의 말을 할 권리는 그에게 없었다.하지만 그 순간 전각의 문 밖에서작은 물방울 하나가 지붕 끝에서 바닥으로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촛불이 그 작은 소리에 반응하듯 아주 미세하게 흔들렸다.그리고, 그 흔들림과 동시에 도진의 머릿속 어딘가가이유 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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